Olivia Newton John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John)은 70년대 컨트리 팝에서부터 메인스트림 소프트 록까지 능숙하게
성공을 이뤄낸 보컬리스트 중 한 명입니다.
386세대 및 그 이전 세대들의 젊은 시절에 최고의 화제와 유행을 낳으며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된 그녀는
여전히 많은 팝 명곡들을 통해 매력적인 보이스를 전합니다.
그녀는 컨트리와 팝 음악계 양쪽으로부터 인정을 받아낸 보컬리스트로 컨트리 싱어로서
5 개 싱글과 팝 싱어로서 15개의 싱글을 정상 10위권 내에 진입시키는 상업적인 성공을 이뤄냈으며
80년대 마돈나(Madonna),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이 등장하기 이전,
여성 솔로 싱어로서 유일하게 세계 팝 음악계에서 부동의 정상을 지키던 최고의 보컬리스트였음,
Olivia Newton-John은 청순하고 우아한 보컬, 지적인 용모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금세기 최고의 요정이죠.
If Not For You, Let Me Be There, I Honestly Love You, If You Me Let Me Know
Grease, You're The one That I Want, A Little More Love, Deeper Than The Night
Xanadu, Magic,Suddenly, Physical등 수많은 히트곡이 있습니다.
Olivia Newton John
올리비아 뉴튼 존은 1948년 9월 26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올리비아는 1965년 호주의 탤런트 콘테스트에 출전하여 우승, 부상으로 영국여행의 기회를
얻게 되는데 영국에 도착한 그녀는 호주로 돌아가지 않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음악생활을
시작했으며 최초의 레코드 취입(single : Till you say you'll be mine/For ever)도
이 무렵 시작되었다.
올리비아의 노래가 처음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밥딜런의 오리지널을 브루스 웨일즈가 편곡한
'If not for you'였다. 이 곡은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제법 인기를 얻게 된다.
그후 1972년 클리프 리챠드의 TV 쇼에 고정게스트로 출연하면서
그녀는 런던의 라이브 가수로 명성을 굳혀갔다.
Shadows 의 다른 멤버였던 존 파라가 작곡한 Let me be there 는 공전의 인기를 누리게 되는데
이때부터 존 파라와 올리비아의 파트너쉽이 25년 이상 계속되고 있고
그후 존 파라는 올리비아의 초기 듀엣파트너 팻 캐롤과 결혼하게 된다.
올리비아는 1974년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유능한 사업가인 Lee kramer를 만나는데
그는 이후 수년간 올리비아의 연인이자 매니저를 맡게 되었고
올리비아는 그의 도움으로 유러비젼 송 콘테스트에서 영국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1974년은 그룹 ABBA가 유럽을 휩쓴 해였는데 ABBA의 노래 Waterloo 가 1위를 차지하고
올리비아의 Long live love 는 4위에 그쳤다.
한편 If not for you 의 성공 이후로 미국에서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I honestly love you, Have you never been mellow, Please Mr.please 등의
연속적인 히트곡을 내면서 세계적인 가수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1970년대 초,중반 미국의 그래미상,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등을 매년 수상하며
명실상부한 당대의 최고 여가수로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ABC 방송국에 그녀 자신의 쇼도 가지게 되기에 이르렀다.
가수로서의 성공은 스크린으로도 이어졌다.
올리비아는 1978년 뮤지컬을 영화화한 '그리스'에서 주인공 샌디 역을 맡아
존 트라볼타와 함께 멋진 노래와 춤을 선보였는데 영화와 사운드 트랙 모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는 지난 1998년 그리스 개봉 20주년을 기념하여 재개봉되었는데
역시 흥행에 성공을 거두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뮤지컬 영화 사상 가장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Summer night 장면은
최근 국내에서 고소영과 정우성이 등장하는 청바지 CF에서 패러디 되기도 했다.
영화 속의 샌디가 청순한 소녀에서 끼가 넘치는 여인으로 변신하듯 올리비아의 음악도
이 무렵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컨츄리, 발라드 계열의 노래를 즐겨불렀던 그녀는
비트가 강한 록이 가미된 음악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좋은 반응을 얻으며
제 2의 전성기를 예고하게 된다.
1980년 올리비아는 그리스 성공의 여세를 몰아 또다른 뮤지컬 Xanadu 에 출연했는데
아쉽게도 영화는 비평과 흥행 모두 참패를 거두었다.
다만 ELO와 같이 만든 사운드 트랙만은 그리스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재너두에서 그녀는 11살 연하의 무명 댄서 배우 매트 래턴지를 만나며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어 훗날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1981년에는 올리비아의 최대 히트곡인 physical 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올리비아 열풍으로 물들였는데 이 노래는 빌보드 지에서 10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80년대 미국 최대의 히트곡 중 하나로 남게 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불어닥친 에어로빅 붐과 맞물려 Physical의 뮤직비디오 또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 무렵 올리비아는 사업에도 눈을 돌려 패션체인점 '코알라 블루'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존 트라볼타와 다시 짝을 이루어 영화 Two of a kind를 찍는데
영화자체는 기대이하였지만 데이비드 포스터가 제작한 사운드 트랙만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84년 겨울 마침내 올리비아는 그간 동거해오던 매트 래턴지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 Soul kiss 라는 앨범을 발표하고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도 했으나
이전같은 큰 인기는 누리지 못했고 1986년에 딸 클로에를 분만한다.
이후 올리비아는 딸의 양육과 사업 '코알라블루'에만 신경을 쓰며 음악적으로는 수년간 공백기간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업가로서의 올리비아는 성공하지 못했다.
코알라블루는 90년대 초반 파산신고를 내기에 이르렀으며 올리비아는 경제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공백기간에도 음악을 완전히 등한시하지는 않았는데 1988년 엘튼죤이 써준 곡 The Rumour를
타이틀로 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고 호주독립 200주년 기념식의 노래도 불렀으며
1989년 딸 클로에를 위해 자장가와 뮤지컬 넘버들을 리메이크한 Warm and Tender album을
발매하기도 했다. Warm and tender 이후로 올리비아는 MCA와 결별하고
데이비드 게펜 사에서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사업의 실패 후 다시 올리비아는 노래에 전념하기로 하는 듯 싶었다.
1992년 Back to basic 이라는 그동안의 히트곡을 모은 곡에 신곡들을 섞은 앨범을 발매하고
각종 투어를 계획하는 등 재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연이은 불행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그녀 자신도 유방암에 걸린 것이다.
그녀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유방암 수술과 화학요법 및 1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거친다.
이 투병기간은 그녀의 음악과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녀는 전곡을 손수 만든 Gaia-one woman's journey 라는 앨범을 만들었으며
자신의 투병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유방암 조기 발견 및 환자의 재활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95년 올리비아는 남편 매트 래턴지와 별거를 시작했고 이듬해 결국 두 사람은 결혼생활을 마감했다.
이혼 후 그녀는 호주에서 환경보호 TV 프로에 출연(올리비아 뉴튼 존의 자연과 인생이라는 시리즈로
국내 교육방송에서도 방영)하거나 여성건강관리 및 미용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녀는 A Pig tale 이라는 동화책의 공동저자이기도 하며 호주의 Woman's day에
Looking great with onJ 라는 제목의 고정 칼럼을 최근까지 맡았었다.
올리비아는 열렬한 환경보호론자이자 아동보호 운동가이다.
최근에 발표하는 자작곡들에서 특히 이런 경향이 짙어지는데 사실 그녀는 이미 1990년부터
유엔의 환경친선대사를 맡았고 Childrens' Health Environmental Coalition 이라는
아동건강보호 단체에서 자선활동도 계속 벌이고 있다.
그녀의 이러한 사회적인 활동은 1999년 Red CrossHumanitarian Award
(for environmental & breast cancer charity work) 및
Women's Guild of Cedar-Sinai Woman of the 21st Century Award (for environmental &
breast cancer charity work) 등의 수상으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올리비아의 음악적 컴백은 1998년 팝-컨츄리 앨범 Back with a heart 로 본격적인 출발을 고했다.
이 앨범은 전성기 때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고혹적인 모습과
건강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시켜 그녀의 팬들을 기쁘게 했다.
이후 그녀는 클리프 리챠드와의 듀엣 공연, 호주에서의 Main Event tour 에 이어 99년에는
미국 순회 공연까지 성황리에 치루어내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1999년 연극을 영화화한 델 쇼어의 독립영화 Sordid lives에서 그녀는 시골 술집의
터프한 여가수로 출연하고 오리지날 송도 불렀는데 2001년 개봉예정인 이 영화는
현재 여러 독립영화제 및 퀴어영화제 등에서 상을 휩쓸고 있다.
2000년에도 그녀는 콘서트를 통해 계속 팬들과 만나는 한편 컨트리 가수 Vince gill 과 함께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을 만들었고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의 메인 아티스트와 성화봉송주자로도 등장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30년가까이 국내 팬들이 고대해왔던 한국 공연을 8월 22일 마침내 성사시켰다.
콘서트 장에서 그녀는 다음에 꼭 다시 찾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한국의 팬들은 한번 더 기대를 가져도 좋을 듯 하다.
Ⅱ. 5곡의 넘버원 싱글과 22곡의 탑 40 히트곡을 배출한 팝의 여왕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John)은 '팝계의 신데렐라' 혹은 '팝계의 꾀꼬리'라는
애교스런 별명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치했다.
국내에서는 디스코와 팝록으로 전향한 1970년대 후반 이후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컨트리 음악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 미녀 가수의 초기 히트곡들인
'If not for you'나 'Let me be there', 'If you love me(Let me know)' 등은
'Physical', 'Xanadu', 'Summer nights', 'Magic'보다 조금은 더 생경하게 다가온다.
1948년 9월 26일, 영국의 캠브리지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독일계 할아버지인
막스 본(Max Born)과 대학 학장인 아버지를 둔 '영국판 사대부' 집안의 딸로 태어나
곱게 자란 올리비아 뉴튼 존은 기숙사처럼 딱딱한 가풍(家風)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에 몰입했다. 20대 초반에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의
백보컬리스트로 합류하면서 가닥을 잡아가던 금발의 뉴튼 존은 1971년에
밥 딜런(Bob Dylan)의 원곡 'If not for you'로 데뷔하면서 팝 역사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1970년대 초반 그녀는 미국인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컨트리 음악으로 그래미는 물론
주요 컨트리 음악 상을 수상하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통 컨트리 신봉자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선 이 미녀 가수가 미국인이 아니라 호주에서 성장한 영국인이었고,
둘째는 컨트리의 트레이드마크인 소위 '꺾기 창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잔의 맑은 정화수나 청명한 봄바람 그 자체다.
이 컨트리 창법 상의 약점(혹은 장점) 때문에 1970년대 후반 올리비아 뉴튼 존이 디스코나
팝 록으로의 방향 전환이 어렵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올리비아 뉴튼 존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데뷔 초기 그녀가 취입한 곡들은 다른 아티스트들의 노래들을 커버한 것이 많았다.
브레드(Bread)의 'If', 'Everything I own', 존 덴버(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What is life', 홀리스(Hollies)의 'The air that I breathe',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등, 그녀가 그래미 최우수 컨트리 여자 가수상을 수상한
'Let me be there(6위)'를 제외하면 초기 3장의 음반은 거의 컴필레이션의 성격이 짙은 앨범으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기존에 많이 알려진 곡들로 신인 가수들의 입지를 빠르게 다지면서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하기 위한
스타 메이킹 공식이었다.
소포모어 징크스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녀를 스쳐갔다.
경쾌한 컨트리 곡 'If you love me(Let me know-5위)', 포크 풍의 발라드 'Please Mr. Please(3위)',
그리고 빌보드 싱글 차트 탑을 장식한 'I honestly love you'와 'Have you never been mellow'로
눈이 큰 올리비아의 인기에 가속도를 붙였다. 'I honestly love you'로 그래미 최우수 여성 팝보컬과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금발의 싱어는 1976년엔 프레드 로스(Fred Rose)의 컨트리
고전 'Blue eyes crying in the rain'을 재해석했다.
이 곡은 1990년대 초반 국내의 땅콩 CF에서 조영남이 불러 뒤늦게 알려졌다.
1975년도 싱글 'Please Mr. Please'가 3위에 오른 이후 인기 전선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그녀는
'컨트리 소녀'에서 '섹시 걸'로 과감한 이미지 변신을 감행했다.
청바지 대신 검정색 가죽 바지를 입은 올리비아 뉴튼 존은 머리 기름을 한껏 바른 존 트라볼타와
1978년도 뮤지컬 영화 <그리스>의 주인공을 맡은 것이다. 옷만 바뀐게 아니었다. 음악도 바뀌었다.
컨트리와 포크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디스코와 팝록, 소프트 팝 등 다양한 음악 형식을 소화했다.
성공적인 변신이었다. 그녀의 인기는 마른 장작에 붙은 불처럼 다시 활활 타올랐다.
영화 성적도 좋았고 사운드트랙도 플래티넘의 고지에 올라섰다.
프랭키 밸리(Frankie Valli)의 'Grease'와 뉴튼 존과 트라볼타가 함께 부른 'You're the one that I want'가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컨트리 풍의 'Hopelessly devoted to you'와 'Summer nights'도 각각 3위와
5위를 기록하면서 1980년대 꽃을 피우는 컴필레이션 형(形) 사운드트랙의 물꼬를 텄다.
'Summer nights'는 정우성과 고소영이 등장하는 국내 청바지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깔리면서
1990년대 후반에 사랑 받았다.
다시 맞이한 전성기로 한껏 고무된 금발의 여가수는 안정적인 길을 택했다.
1978년도 솔로 음반 <Totally Hot>은 성인 취향의 팝록과 디스코 사운드에 의지했다.
1980년에는 <그리스> 형식을 답습한 공상 과학 뮤지컬 영화 <제너두>에 출연해 ELO와 함께
뉴웨이브 스타일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했다. 타이틀 트랙 'Xanadu(8위)'와 'Magic(1위)',
클리프 리차드와 호흡을 맞춘 발라드 'Suddenly(20위)'의 히트로 앨범은 성공했지만
영화는 혹평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뉴튼 존은 이 영화에서 만난 11살 연하의 배우
매트 라탄지(Matt Lattanzi)와 1984년에 결혼해 개인적으로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
1981년 연말, 제목만큼이나 육감적인 뮤직비디오를 앞세운 'Physical'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곡은 데비 분(Debbie Boone)의 'You light up my life'와 함께 빌보드 싱글 차트 10주간 1위 고수라는
당시로서는 기네스 적인 기록을 새운 대형 히트 곡이었다.
이 노래 때문에 포리너(Foreigner)의 'Waiting for a girl like you'는 10주 동안 2위에 머물러야 했었고,
개국한지 1년도 안 된 MTV는 이 선정적인 뮤직비디오로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헬스와 에어로빅 장면을 코믹하게 다룬 이 뮤직비디오로 1980년대 초반 에어로빅 비디오 제작이
봇물을 이루어 제인 폰다 같은 여배우들이 그 덕을 봤지만 그 이면에는 뮤비의 음란성에 대한
사회적인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래미 위원들은 'Physical'에게 최우수 비디오 트로피를
건네면서 더 이상의 잡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올리비아 뉴튼 존의 수혜자가 존재했다.
현재 팝송 개그로 사랑 받고 있는 박성호의 원조인 박세민은 '냉장고를 녹이는 뜨거운 남자'라는
모토를 내세워 1980년대에 'Physical'의 가사 'let me hear you body talk'를 '냄비 위에 밥이 타'로,
'If not for you'를 '기분 나뻐유'처럼 들리는 대로 번역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개그를 선보여
가공할 인기를 누렸다(직접 확인해 보시라!). 그 시기에 국내의 팝 마니아들은 미국 차트와는
별개로 'Silvery rain'을 선호했다.
'Make a move on me(5위)', 'Heart attack(3위)', 'Tied up(38위)'으로 인기의 끈을 이어간
뉴튼 존은 1983년에도 존 트라볼타와 다시 한번 <투 오브 어 카인드>라는 로맨틱 코메디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 작품도 실패작이라는 멍에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Twist of fate(5위)'와
'Livin' in desperate times(31위)'만이 인기곡 대열에 합류했다.
1986년에는 유명한 작곡가 겸 제작자인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 함께 부른
'Best of me(80위)'가 국내에서 유독 사랑을 받았다.
타이틀 트랙 'Soul kiss'가 20위에 랭크된 1985년도 LP <Soul Kiss>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89년부터는 UN에서 추진하는 환경 운동의 민간대사를 맡아 부메랑처럼 데뷔 시절의 풋풋한 이미지로
돌아간 그녀는 1990년대에 유방암을 극복하면서 인간 승리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몇 편의 영화에 실패한 올리비아 뉴튼 존이 드디어 '인생'이라는 영화를 통해 진정한 헤로인이 된 것이다.
이후 1990년대까지 꾸준한 앨범을 발표했지만 현재는 환경 운동가나
사회 사업에 좀 더 집중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0년 8월, 시드니 올림픽 성화 주자로 참여하기 직전 내한 공연을 가져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겨준 올리비아 뉴튼 존의 당시 나이는 52세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송(老松)의 나이테만큼 많은 주름살이 그녀의 얼굴을 책임질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를 듣고 있는 한 그녀는
앞으로도 '영원한 소녀'로 우리의 마음 속에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올리비아 뉴톤 존'의 전기를 보는듯 상세하게 모든걸 알게 되었습니다. 노래도 잘듣고 프로필도 잘 보습니다. 청순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세기적 스타 입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저 개인적으로 마돈나보다 올리비아 뉴튼존의 미모가 훨 아름답지 않나 합니다
목소리 또한 일품이죠 ~~~
올만에 듣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이의준님 오랜만에 팝방에 오신 것 같네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