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소설(輕小說) : '가벼운(輕) 소설'이라는 뜻. '라이트노벨(Light Novel)'이라는 일본식 영어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라이트노벨'의 '라이트(Light)'는 '가볍다'는 뜻이 있는 영어고, '노벨(Novel)'은 '소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나왔다. 이건 내(잉걸)가 만들어낸 낱말이 아니라, 내가 여덟 해 전 한국의 어느 누리그물(인터넷) 카페에서 우연히 접한 글에 나온 말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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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나이를 먹으면 감성적이 되어서 큰일이다.
- 9쪽
“훌륭한 사람? 어떻게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데?”
글쎄. 어떻게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걸까.
그때 나(소설의 남주인공인 ‘마왕’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는, 이 아이(소설의 여주인공인 ‘키이리 윈즈’ 공주 – 옮긴이)에게 좀 더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도 뭐가 훌륭한 사람인지 잘 몰랐다. 일단 나부터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니까.
마왕에게 훌륭한 사람의 조건 같은 거 묻지 말라고. 그걸 알면 내가 마왕 같은 걸 하고 있겠어?
- 9쪽
“너는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세대라서 모르겠지만 말이야. 전쟁이라는 건 굉장히 안 좋은 거야. 전쟁이라는 건 정말이지……, 뭐랄까……, 귀찮은 거거든.”
“전쟁을 모르는 세대이긴 한데, ‘전쟁’이라는 단어와 ‘귀찮다.’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라는 건 알 것 같은걸.”
- 18쪽
“보험 약관과 계약서는 토씨 하나도 꼼꼼하게 살펴보라는 가르침은 못 받았나 보지? 이런, 키이리. 현실은 원래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거야.”
- 24쪽
“오랜만에 맛본 타인의 호의는 어째서인지 시큼 텁터름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 31쪽
나도 안다. 성에 틀어박힌 지가 벌써 300년째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을에 내려가는 것은 아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어떤 귀찮은 일에 얽히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나를 ‘마왕’이라며 비난하거나 두려워하는 건, 이미 익숙해졌으니 그런대로 감수할 수 있다. 그런 건 차라리 괜찮다. 하지만 송곳은 주머니에 감춘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니까. 내가 마왕이기 때문에, 나 때문에 일어나게 될 모든 재난이 두려운 거다.
- 61~62쪽
"사람이 무서워?"
나는 일순 동요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동요한 마음을 숨긴 채 키이리의 질문을 비웃었다.
“무섭다고? 내가? 하! 넌 도대체 마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에게 마왕이라는 말은 그냥 ‘호칭’이야. 당신을 부르는 호칭. 마왕이 자기 이름도 까먹어 버린 바보니까 말이야.”
- 62쪽
“알고 있어.”
“마왕과 방법은 다르겠지만, 나(키이리 윈즈 공주 – 옮긴이)도 몇 달 정도만 시간을 주면, 나라 전체 초토화시키는 거, 그거 할 수 있어. 하지만 안 해. 그런 짓 해서 나에게 득 될 게 없거든. 그건 마왕도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공격 못할 호구니까 안 무섭다, 그런 의미냐?”
“그럴 힘이 있어도 무분별하게 휘두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 의미야.”
- 63쪽
나(마왕 – 옮긴이)는 귀찮기만 할 뿐인데, 키이리에게는 오랜만에 낯선 타인의 방문이 – 그 타인이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 그저 반가울 뿐인지,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 표정을 보니, 어쩐지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에게 숟가락을 집어 던질 정도로 짜증을 냈으면서, 이 변화무쌍한 감정 기복이라니.
- 64~65쪽
새삼 10년 전의 나에게 불만을 던져 보았다. 이제 와 과거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 65쪽
소소한 승리 전적을 세우기 위해 내 보금자리를 날려 버릴 수는 없지.
- 67쪽
‘마왕’으로 살다 보면 비가 많이 내려도 내 탓, 안 와도 내 탓, 경제가 나빠져도 내 탓, 심지어 옆 나라 과부가 길을 걷다가 자빠져도 내 탓이 되는 걸 감수하고 지낼 수밖에 없다.
- 69쪽
‘극악무도한 마왕’과 ‘파렴치한’, 어느 쪽이 더 나쁜 걸까.
- 71쪽
“크윽 ……. 가, 감사합니다, 공주님 ……! 이 손을 죽을 때까지 절대 씻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런 의미 없는 짓은 그만두고 제발 씻어 줘. 손을 잘 씻지 않는 건은 눈병, 감기, 식중독에까지 이르는 만병의 시작이라고. 손바닥 위에서 세균이라도 양식할 작정인 거냐.
- 72쪽
미움 받는 데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익숙해졌다는 것이 ‘괜찮아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 77쪽
“무성의한 대답 짜증 나. 왜 화 안 내는 거야? 재수 없어.”
“내가 숨 쉬는 건 짜증 안 나냐 …….”
- 77쪽
아이는 금방 어른이 되어 버린다. 나는, 그대로인데.
- 85쪽
주변의 소음도, 이 아이도, 어째서인지 나와는 이어져 있지 않은 액자 너머의 다른 세계인 것 같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않는 별처럼.
- 85쪽
언제부터인가 너(소설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아닌 또 다른 여성. 이름은 ‘이브’ – 옮긴이)는 나(‘마왕’ – 옮긴이)를 ‘스승님’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때 나는 몰랐다. 나 역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 너무나 서툴렀으니까.
- 88 ~ 89쪽
“<영웅 되기 매뉴얼> 같은 거라도 있냐? ‘마왕의 성 앞에 가서 패기롭게 전투를 선언한다.’라는 필수 수련 항목이 있다든지.”
“글쎄, 요 근래 (마왕의 집을 – 옮긴이) 찾아오는 사람들은 영웅보다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닐까? 나(키이리 공주 – 옮긴이)를 데려가면 (왕에게 – 옮긴이) 작위도 얻을 수 있고, 나와 결혼도 할 수 있게 되는 거잖아.”
“남 얘기처럼 잘도 말하는군.”
- 91 ~ 92쪽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그 상대가 동거인(同居人. 함께[同] 사는[居] 사람[人]. 예를 들면, 식구나 룸메이트 – 옮긴이)이라면 더욱 그렇다.
- 101쪽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반격을 꾀하는 것이 좋아. 무턱대고 돌진하면 에너지만 낭비하게 되니까. 기다리면 (상대방이나 경쟁상대나 적의 – 옮긴이) 허점은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거든.”
- 105쪽
“짧게 끊어치는 공격으로 전환한 건 좋았어. 그렇지만 그 공격이 유효하다고 계속 같은 공격 패턴으로 가다가는 조그마한 변수에도 금방 당황하고 말아. 똑같은 동작만 반복되는 춤은 누구라도 보고 싶지 않을 거야. 다음 동작이 쉽게 읽혀 버리니까.”
- 108쪽
“마왕, 그거 알고 있어? 동화에도 회화처럼 숨겨진 코드가 있어서, 허투루 쓰이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거 말이야.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알고 들여다보면, 이만큼 염세적인 내용도 없을 거야.”
“왜 하필 ‘백마 탄 왕자’일까? 백마는 우성 교배로만 얻을 수 있는 최상 품종이거든. 즉, 남자의 가문이 부유하고 힘이 있다는 걸 상징하는 거야. 공주들이 괜히 백마 탄 왕자에게 첫눈에 반하는 게 아니라고. 지지 기반을 만들어 줄 강력한 부마가 필요하니까, 백마 탄 왕자에게 반하는 거야.”
“공주들의 속물근성을 말하고 싶은 건가?”
“그렇지만도 않아. 왕자들도 공주를 보고 첫눈에 반하잖아? 수행원 하나 없이 떠돌아다니는 왕자는 가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차남(次男. 둘째 아들 – 옮긴이) 이하의 남자들이란 뜻이거든. 그러니 공주와 결혼하여 권력을 되찾으려는 욕망이 있겠지. 날 구하겠답시고 찾아오는 남자들처럼.”
- 126 ~ 127쪽
“행복해지기 참 어렵다.”
“어렵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 132쪽
사람에게 상처받고 버림받고 배신당해도, 결국 사람에게 상처받은 것은 사람에게서 치유 받을 수밖에 없는 거라고, 은연중에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 133쪽
질질 끌리는 발자국 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내 뒤를 따라왔다. 이 성이 이렇게 크고 조용했었나. 이렇게 공기가 무겁고 싸늘했던가. 마치 무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나(‘마왕’ – 옮긴이)는 사람들과 동떨어져 홀로 이 성에서 지냈던 300년간의 시간은, 나 스스로가(자신이 – 옮긴이) 만든 자신의 무덤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나 다음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않고, 어떤 소리도 만들어 내지 않고, 시간의 흐름조차 무색하게 여기며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 숨만 쉬고 있었던 것이다.
- 135 ~ 136쪽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게 아이러니하군(역설[逆說]이군 – 옮긴이).”
“너(그림 속의 갈색 머리 여자 – 옮긴이)는 내 시간을 멈추었는데, 그 애(키이리 – 옮긴이)는 내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해 주었잖아?”
- 136쪽
나와 타인의 시간은 이렇게나 멀리 빗겨 간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새삼 괴롭다.
- 139쪽
보름. 키이리가 내 성에 머물렀던 시간은 고작 보름 남짓이었다. 태어나서 100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인간의 삶에서, 백사장의 모래 몇 줌만큼이나 의미 없는 짧은 시간.
그러나 그 ‘한 줌의 시간’은, 자신이 외로운 줄도 모른 채 (‘한 나라의 공주’라는 – 옮긴이)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어린 소녀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만큼 긴 시간이기도 했다.
- 139쪽
“…… 잘난 사람은 피곤해.”
“하긴, 잘난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몰리니까 피곤하긴 하지.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날 질투하거나 끌어 내리려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 160쪽
“장수 떡이래. 길게 늘어날수록 오래오래 살 수 있대.”
“……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게 아니란다, 어린이들.”
- 182쪽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가도, 사소한 사건 한두 가지로 '괴물'은 '인간'의 껍데기를 벗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괴물은 괴물일 뿐’인 걸까. 도움을 줘 놓고도 고마움이 아닌 경멸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걸까.
- 192~193쪽
사실은 지독하게 사람이 그리운 주제에, 사람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다.
- 216쪽
“그러니까 너도 좀 믿어.”
“뭘 말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
참으로 오글거리는 대사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그저 웃었다.
- 250쪽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타인을 믿으라고 했으니까.
- 263쪽
망가진 마음은 망가진 언어를 통해 흘러나온다.
- 270쪽
태어난 이상, 분명 죽음의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아도, 인간을 초월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결국 나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 278쪽
‘도망치라.’는 그녀(키이리 – 옮긴이)의 말은, ‘도와달라.’는 외침보다도 절박하게 나를 흔들었다.
나(‘마왕’ – 옮긴이)는 마법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마법 – 옮긴이)을 하는 수밖에.
- 280 ~ 281쪽
발버둥 칠수록 옭아매는 올가미 같은 거, 더욱 발버둥 쳐서 끊어 내면 그만이잖아.
- 283쪽
“덤비려면, 죽을 각오로 와라.”
“나는 죽일 각오로 쓸어버릴 생각이니.”
- 293 ~ 294쪽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고, 가끔은 장난스러웠으며, 공기처럼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너도 나와 같이 약한 존재였다. 언제나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해가 떠오르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국 너도 그깟 사소한 말 한마디에 고맙다고 말할 만큼 타인의 감정에 초조해하는 사람이었어.
그래, 너도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었어.
- 298쪽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투둑, 투둑, 투둑, 하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텅 빈 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침묵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갔다.
- 301쪽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창문을 두드리는 비의 소음은 더욱 거세진다. 번쩍 하고 일순 방 안이 빛으로 가득 찼다가 사그라졌다. 뒤이어 들리는 길고 음울한 천둥소리. 쉽게 그칠 비가 아니야. (하고 – 옮긴이) 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쉽게 그칠 비가 아니야.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하고 싶은 게 없는 것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결국 그 ‘도돌이표’를 끝낼 수가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 311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꽃다발이 내 뺨을 갈겼다. 꽃으로 맞아 보기는 처음이다. 이상하군. 별로 안 아플 것 같았는데, 무진장 아프다. 꽃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녀석은.
- 321쪽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설령 내가 지는 싸움이 된다고 해도 일단 해 보는 수밖에.
- 336쪽
― 『 은둔마왕과 검(劍)의 공주 1 』 (‘비에이’ 지음, ‘Lpip’ 그림, ‘(주) 디앤씨미디어[시드노벨]’ 펴냄, 서기 2015년)에서 퍼옴
- 단기 4356년 음력 6월 1일에, ‘한국에도 이렇게 뛰어난 경소설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미국과 일본의 천박한 대중문화에 맞서 싸우며 한국 대중문화를 지키는(나아가 알리는) 문화 지킴이/문화 독립군이 된 마음으로 『 은둔 마왕과 검의 공주 』 의 명대사/명문장들을 소개하기 시작한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