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있어 연명하는 삶에 대하여
- 120호를 축하하며
김효은(시인, 문학평론가)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부분
기도와 울기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당신에게도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마주 잡을 손 하나”만 내려 달라고, 이 깊은 수렁에서, 이 막장 같은 끈적한 어둠 속에서 헤어날 밧줄 하나만 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그런 밤이 내게는 있었고 당신에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 “손”은 “오고 있”는 ‘중中’이어서,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찾아 나서기엔 막막한 그 “손”이 올 때까지, 어둠 속에서 다만 그 “손”이 다가와 내 꽁꽁 얼어붙은 손을 잡아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던 밤이 당신과 나에게 있었을 것이다. 수술실 앞에서 어쩌면 금세 꺼져 버릴지도 모를 희미한 불빛 앞에서 더욱더 굳게 생의 의지를 다지며, 눈물이 촛농으로 흘러내리던 그때 그 밤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2001년 12월 하순이었다. 뇌가 두부처럼 으깨어져(당시 주치의 표현) 응급실과 수술실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던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나, 그 둘 외엔 세상에 아무도 없던, 몹시 쓸쓸하고 춥고 암담했던 겨울밤들, 그해 성탄절을 잊을 수 없다. 검은 우물 속에 잠긴 것만 같았던 그때 다만 내겐 한 줄기의 빛이 간절했다. 절벽에 마주한 나는 비겁하고 염치없지만 오랫동안 외면했던 신神을 그예 다시 소환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읊조리며 신에게 기도하는 손,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로 끝나는 고정희의 시구가 밧줄인 양 들려 있었다. 그 모든 부재의 순간에도, 나락과 절망의 순간에도 신과 시만은 그렇게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전부였고 마지막 희망이었다. 무의식 속에라도 기대어 쉴 수 있는, 내가 비빌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고 은신처였다. 간절하게 맞잡았던 그 “손”의 감촉을 기억한다. 그렇게 시가 먼저 다가와 내게 손 내밀어 준 그런 밝은 밤이 있었다. 궁핍하고 보잘것없고 한없이 나약한 “상한 영혼”에게 그나마 기대고 붙들 수 있는 신앙이, 문학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손 닿는 곳에 시詩가 있어 언제든 펼쳐 보고 호흡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다행인가를 이제 와 새삼 다시 고백한다. 문학은 신이 내려준 천사인가. 구원인가. 디딤돌인가. 동아줄인가. 나는 도대체 왜 문학을 하는가.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스스로 추궁하듯 물어본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왜 문학을 하느냐고, 왜 그토록 시를 붙들고 있냐고. 매너리즘에 빠져서 습관적으로 앵무새의 말만 반복하며 종이와 잉크만 낭비할 것 같으면, 인제 그만두어도 되지 않겠냐고 감히. 그러므로 절실하게, 당신이 진정한 작가라면 더더욱 왜 쓰는지 자신에게 자주 물어볼 일이다.
‘연명延命’이라는 단어가 최근 나의 뇌리 속을 온통 지배하듯이 맴돌았다. 지난여름, 의사는 연명 치료에 대해 설명하고 의향을 물었다. 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맥락과 어조와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패혈증으로 위독했던 아버지에게 연명 치료에 필요한 모든 의료 행위를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했다. 연명延命이란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존엄尊嚴이란 무엇인가. 사실 연명의 문제, 치료 중단의 문제는 당사자 스스로 미리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타자이기 때문에 극한의 고통에 직면하기 전에 가능한 스스로가 결정할 일인 것이다. 생명을 연장할지 말지의 여부를 감히 누가 결정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의 문제에 ‘나’를 대입하면 조금은 쉬워진다. 고통스럽게 투병하느니 ‘나’는 분명 존엄하게 죽고 싶다. 근래에 요양병원 집중치료실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아버지를 면회하는 동시에 미래의 내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아 가슴이 옥죄고 마음이 답답해져 온다. 기도 삽관에, 콧줄에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삶은, 어떠한 말 한마디, 울음조차 표현할 수 없는, 당사자에게는 두려움과 괴로움, 어쩌면 치욕이자 극한의 고통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는 치매 노인들의 경우 낙상 방지와 기타 사고 방지를 위해 24시간 팔다리를 전부 결박한다. 그곳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면회는 극히 차단되어, 일부 병원에서는 임종 면회만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목도하고 자각하면서도 내 아픈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연명 치료 여부를 당장에 결정해야 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고 괴롭고 당혹스러운 문제이다. 지금도 피붙이의 죽음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도 눈앞이 캄캄해지고 생이 무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내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이러니한 심리적 대치 속에서도 나는 무엇이든지 결코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간편한 결정이야말로 포기와 단념이 아니었던가. 포기보다는 매달리고 싶다. 당신을 살리고 연약한 숨이라도 불어넣어 주면서 기꺼이 당신의 생을 연장하고 싶다. 거기엔 나의 돌봄과 희생과 재정적 부담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고 싶어서, 당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너무도 이기적인 결정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문학 역시 문학을 하는 대부분의 날들이, 실은 희망 고문에 가깝다. 열심히 공부하고 매달린다고 해서 뜻하는 대로 잘 풀리지도 않을뿐더러, 원하는 만큼 노력한 만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등단을 하고 청탁이 오고 발표를 하고 난 이후에도 번번이 실패와 절망을 마주하게 된다. 작품이 아예 안 써지는 슬럼프 역시도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경험하게 된다. 문학의 꿈은 닿을 듯 닿을 듯하면서도 요원遙遠해서, 잘 잡히지 않는다. 창작의 고통은 좀처럼 원하는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매달리기에 알맞은 양식이다. 당신이 허우적거리는 사람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니까 더욱 간절히. 당신도 알다시피 밧줄에는 두 종류가 있다. 목매달아 죽기에 알맞은 절명絶命의 밧줄과 수렁과 낭떠러지에서 혹은 물속에서 붙잡아 탈출하기에 알맞은 구명救命의 밧줄. 나는 문학이, 시詩가 후자의 밧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 잔혹하고 비루한 현실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해 문학이 여전히 구원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문학은 늘 씨앗의 형태로 지금보다는 밝은 미래를 품고 있고, 그 기대와 희망으로 발아發芽한다고 믿는다. 농부의 믿음처럼 그 믿음만큼은 필자 역시 평생 동안 저버린 적이 없다. 순진하게도 여전히 문학의 위용과 가치와 숭고와 효용에 대해 맹신한다. 그러니 산소 호흡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은 죽어 마땅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심장이 뛰고 있는데, 연명을 포기하라니, 중단하라니.
누군가에게 문학은 연명 장치로 기능한다. 그것은 응당 대가와 희생을 요구한다. 이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삶이라면, 버틸 수 없는 삶이라면, 또는 시가 없으면 지독하게 지리멸렬한 삶이라면 그 끈을 놓지 말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시는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고 비루한 존재인 나에게 시인詩人이라고 불러준다. 시는 존재의 신원을 보증해 준다. 존재를 존재할 수 있게, 연명하게 하는 동시에 존재가 존재인 것을 확인해 주고 존재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고 보증해 주는 시, 게다가 당신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응답해 주는 시, 독자와 소통하고 대화하게 이어주는 시, 나아가 누군가를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 시는 아름답고 가치 있다. 작가를 포함해 단 한 사람이라도 살게 하는 시, 말을 건네고 그 말을 들어주는 소통과 기도, 염원과 치유, 영혼을, 세상을 움직이는 한 편의 시를 꿈꾼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당신에게도 계속해서 ‘시 쓰기’를 권하고 처방하고 독려하고자 한다. 존재가 존재이기 위해서는 존재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를 코나투스라고 불렀다. 시를 통해 나와 당신의 코나투스가 증진된다고 믿는다.
지극히 사적인, 신앙 고백이 길었다. 계간 『시와산문』이 어느덧 120호를 맞이하였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 무섭고 애틋하고 특별하고 묘하다. 『시와산문』과의 인연은 내게 특히 그러하다. 특별하고 소중하고 감사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은 골방에서 혼자서 하는 것, 고독하고 쓸쓸한 작업이자 천형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문인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자기 상처와 고통이 제일 크고 깊어서 트라우마와 열등감과 열패감과 페이소스에 사로잡혀 대게는 타자에게 적대적이고 기만적이며, 방어적, 공격적이라고만 생각했다. 또한 자기 스스로가 가장 뛰어난 작가라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의 경향과 피터 팬 증후군까지 있어서 대부분의 시인들은 다소 이기적이고 독단적이고 유아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지연과 학연 등으로 형성된 끼리끼리의 문학과 문단의 카르텔은 또 어떠한가. 필자는 시가 아닌 시를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온통 부정적인 시각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와산문』에 와서, 편집위원으로 함께 하는 동안 문학인과 문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불신과 편견, 억견들을 불식拂拭하게 되었다. 편집위원, 편집위원장, 주간, 편집장, 발행인 누구나 동등하게 발언권을 가지고 있고, 동인들과도 서로 대화와 존중과 소통으로 시종 함께하는 이렇게 화목하고 민주적인 잡지를 본 적이 없다. 특정인의 소유물所有物이나 권력의 유지를 위한 매체가 아닌 공동共同, 공유公有의 잡지, 또한 발표할 지면이 없거나 소속이 없는 소외된 누구에게라도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이 시대 최고의, 소통하고 공감하는 평등한 문예지라고 당당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와 산문』이 어느덧 30주년, 120호를 맞이하였다. 축하와 더불어 지금 여기, 우리 모두에게도 건영과 건필健筆을 빈다. 시련과 장애와 환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詩가 있어서 행복한, 우리들의 연명連名과 연명延命을 위해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