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7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한국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 영국 리아트에 참가해 2012년에 이어 10년 만에 최우수상과 인기상 수상.
2019년 미국하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결의안 부결 찬성 95 반대 332
2017년 박성현 LPGA 메이저대회 제72회 US오픈 우승
2016년 진경준 검사장 뇌물수수 혐의로 현직검사장으로는 사상처음 구속
2014년 세월호 참사 지원 강원 소방헬기 광주 도심에 추락 5명 목숨 잃음
2014년 말레이시아 보잉777 여객기 러시아 국경 근처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친러시아 반군이 쏜 미사일에 맞아 추락 298명 전원 사망
2013년 영국 폭염 잉글랜드 지역만 760명 사망
2010년 일본 폭염 57명 사망 1만여 명 피해
2009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호텔 폭탄 테러
2009년 7월 17일 오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5성급 호텔 2곳에서 테러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가 잇달아 발생, 오전 10시(현지 시간·한국 12시) 현재 6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했다.
미국의 CNN와 AP 통신 등은 “2건의 폭발로 최소 2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폭발은 이날 오전 7시45분(현지시간)쯤 자카르타 중심부에 위치한 리츠 칼튼 호텔과 메리어트 호텔의 입구에서 5분 간격으로 발생했다.
메리어트 호텔은 2003년 8월에 발생한 폭탄 테러(당시 12명 사망, 100여명 부상)에 이어 6년 만에 또 테러를 당했으며, 리츠 칼튼 호텔은 저층에 있는 창문 일부가 산산이 부서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이와 관련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현지 공관에서 사건 발생 경위와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진 도신우 모델센터 인터내셔날 대표(전 한국모델협회장)의 상태 등을 확인하고 있다”며 “아직 정확한 상황은 보고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호텔에는 한국인 50여 명이 묵고 있었으나 도 회장만이 유리 파편 등에 부상당해 인근 메트로 폴리탄 호텔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의 또 다른 교민은 “폭발이 일어난 두 호텔은 모두 미국 자본으로 지어진 5성급 호텔”이라면서 “최근 대통령 선거에서 유도요노 대통령과 친미 성향의 부통령 후보가 당선될 것이 확실해지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테러를 감행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2009년 전설적인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별세
1962년부터 1981년까지 ‘CBS 이브닝 뉴스’를 진행하며 케네디 대통령 암살, 달 착륙, 베트남전쟁 등 미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주요 사건들을 보도했다. 1968년에는 종군기자로 직접 베트남에 다녀온 후 “미국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고 최초로 보도하기도 했다. 뉴스 앵커로서의 표본으로서 크롱카이트의 명성은 전세계에 미쳤다. CBS에 따르면 오늘날 스웨덴과 네덜란드에서는 앵커를 ‘크롱카이터’라고 부를 정도다.
2009년 조선 중기 문신 심사손(沈思遜)묘 도굴 사건 발생
조선 중기 문신 심사손 묘의 훼손 당시 모습. 2009년 7월 17일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 중턱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문신 심사손(沈思遜·1493~1528)의 묘가 파헤쳐진 것이 발견됐다. 명백한 도굴 현장이었다. 봉분이 절반 이상이 무너지고, 묘역에 가로 60㎝×세로 120㎝×깊이 60㎝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심사손이 묻힌 개화산 기슭은 풍산 심씨 집안의 묘 50여기와 석인상 등이 모여있는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2584㎡·781평)이다. 심사손은 비변사 낭관 등을 지내며 북방 오랑캐 정벌에 공을 세운 인물로, 오랑캐를 섬멸하다 목숨을 잃었다. 심사손의 아버지 심정(1471~1531)은 중종반정의 주역 중 한 명이며, 아들 심수경(1516~1599)은 대사헌을 지냈다. 훼손된 심사손의 묘 인근에 있는 이들의 묘는 무사했다.
심사손의 묘는 400년 넘게 보존돼오다가 처음으로 파헤쳐진 까닭에, 무엇이 도굴됐는지 확인하기 힘들다. 풍산심씨 대종회 심현종(沈鉉鐘·64) 총무이사는 “묘 앞에 석인상까지 세운 것을 보면 분명히 ‘보검’ 같은 임금의 하사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덤 앞에 석인상을 세우는 풍습은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묻힌 사람의 사회적인 위세를 나타낸다. 이번에 사건이 난 묘역도 묘에 따라 문신과 무신을 형상화한 석인상이 서 있다.
2007년 파키스탄서 이프티카르 전 대법원장 지지하는 자살폭탄 테러 12명 이상 사망
2007년 브라질 TAM항공사 상파울루 콩고냐스 공항 착륙중 충돌사고로 폭발 250여명 사망
2006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북한 미사일발사(7.5) 규탄 결의
2005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과 두 아들, 제주 모슬포~마라도 횡단
2002년 정부, ‘외국 인력제도 개선대책’ 발표
정부가 17일 내놓은 ‘외국 인력제도 개선대책’으로 국내 외국인 근로자의 운용 틀이 크게 바뀌게 됐다. 정부가 개선책 마련에 나선 것은 현행 제도로는 26만6000여명에 달하는 불법 체류자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산업연수생의 불법 근로자화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송출기관의 연수생 선발권을 제한해, 국내 관리기관에서 연수생을 컴퓨터로 추첨해 뽑게 했다. 신설될 연수생 관리기관은 연 2회씩 정기감사를 받게 되고, 연수생을 한국으로 보내는 국가는 한국 내에 관리사무소를 신설해야한다. 연수생 이탈률이 높은 국가는 ‘송출국 지정 취소’ 등 강력한 제재를 받게된다. 음성적으로 이뤄지던 음식점업, 사업지원서비스업, 사회복지사업, 청소관련 서비스업 등에 대한 외국동포 취업이 이번에 처음 허용됐다. 단, 유흥관련업종 취업은 전면 금지된다.
2001년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포스트지 회장 별세
그는 미국의 언론을 바꿨고 더 나아가 미국의 정치와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강인한 언론인의 사명의식과 추진력으로 미국의 부패한 정치를 바꿨고, 언론사 대주주는 어떠해야 하는지의 진정한 역할모델을 창출했다.
1971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다룬 국방부 기밀문서(펜타곤 페이퍼) 폭로나 1974년 닉슨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는 그레이엄 여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1963년 매출액이 8400만달러에 불과한 일개 지방지였다. 그러나 30년 후인 1993년 그레이엄 여사가 아들 도널드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때는 매출액이 14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워싱턴포스트 외에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다수의 지상파 TV방송사와 케이블TV 그리고 인터넷방송사까지 끊임없는 사업다각화를 했다.
시카고대 졸업 후 포스트 기자로 일하던 그레이엄은 신문사에서 변호사였던 남편 필립 그레이엄을 만났다. 1945년 아버지는 사위에게 최대주주 자리를 넘겨주면서 신문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다. 남편은 여기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요구했다.
1963년 8월 우울증을 앓던 남편이 권총으로 자살했다. 신문경영을 맡은 46세의 그레이엄은 포스트와 독립언론의 성장에 자신의 후반부 인생을 걸었다. 1997년 그녀는 자신과 워싱턴포스트, 그리고 자신이 교류했던 유명인사의 얘기를 담은 자서전 ‘개인사’를 펴냈고 이 책으로 그녀는 다음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1999년 영화 `용가리` 개봉
1998년 파푸아 뉴기니에 해일 사망 8천여 명
1997년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위버 사망
1997년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 별세
온몸에 퍼진 암세포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화가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 90여점을 다른 환자들이 힘을 얻어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써달라며 병원에 내놓았다. 기증자는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이다. 자신이 입원한 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노년의 작품을 아무 조건없이 기증한 원로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이 1997년 7월 17일 끝내 별세했다.
평북 영변 태생으로 만주 신경미술학교 출신인 한 화백은 1950년대 말 우리나라 현대미술문화운동의 중요한 이벤트가 된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을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970년대 초 스웨덴 의사의 권유로 스웨덴으로 이주해서는 붓글씨 쓰는 모필로 서양화를 그리는 독특한 작업방식으로 그곳 화단에서도 잘 알려졌다. 지난 1988년 귀국, 제주도와 용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국내 서양화단의 가장 원로그룹을 형성하며 작품판매보단 제작에만 몰두해왔다
1996년 TWA 보잉747 여객기 공중폭발, 2백28명 몰사
승객 2백10명과 승무원 18명 등 2백28명을 태운 미국 TWA 항공사 소속 보잉 747 여객기가 1996년 7월 17일 오후 8시40분쯤 뉴욕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직후 대서양 상공에서 공중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기인 TWA 800편은 오후 8시15분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지 25분만에 뉴욕주 롱아일랜드 남동쪽 24km 상공에서 폭발, 불길에 휩싸인 채 산산조각이 나면서 해상으로 추락했다.
생존자 구조작업에 나선 해안경비대는 헬리콥터와 보트 40여척, 잠수부 등을 동원해 밤새 구조작업에 나서 불에 심하게 그을린 1백여구의 사체를 인양했다. 사체들은 모두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돼 폭발과 침몰이 아무런 경고없이 순식간에 일어났음을 보여줬다. 사고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길이 28.2m, 높이 8.1m인 사고 여객기를 복원했지만 사고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 미궁에 빠졌다.
TWA는 1946년 뉴욕∼파리 노선에 처음 취항하는 역사적 기록을 가진 미국의 중견 항공사로 ‘사고율은 낮은 항공사’로 인식돼왔으나 이번 사고로 물거품이 됐다.
1994년 세기의 우주쇼, 슈메이커-레비 혜성 파편들과 목성 충돌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파편이 1994년 7월 17일 목성과 충돌하면서 1천년 만에 한번 보는 우주쇼를 연출했다. 한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혀줄 장대한 우주쇼가 17일부터 시작돼 7월 22일 오후 5시 마지막 21번째 파편(W핵)의 충돌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대충돌은 전세계 천문학자들에게 목성의 신비를 풀어줄 수년간의 연구거리를 제공했다.
슈메이커-레비 혜성은 원래 거대한 하나의 얼음덩어리였으나 2년 전 목성 주변을 지나는 도중 목성의 강력한 중력에 이끌려 지름 1~3㎞ 크기의 21개 파편으로 조각이 났다. 이 가운데 10번째(J)와 13번째(M) 파편은 충돌 직전 얼음덩어리로 이루어진 핵이 증발하는 바람에 소멸됐으며, 17번째 Q파편은 다시 두개로 분리되기도 했다. 충돌이 6일 동안이나 계속된 것은 21개의 파편이 총길이 10만㎞ 정도로 일렬로 늘어서서 차례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핵 파편들은 초속 60㎞의 무서운 속도로 목성과 충돌하면서 거대한 불기둥을 뿜고 최후를 마쳤다.
1989년 B2스텔스 폭격기 시험비행 성공
적의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설계된 미국의 B2스텔스 폭격기가 1989년 7월17일 오랫동안 지체해 왔던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개발에 8년의 시일과 2백30억달러의 경비가 소요된 B2스텔스 폭격기는 이날 두 조종사를 태우고 캘리포니아 사막의 팜데일에 있는 한 공군 활주로를 이륙한 뒤 하늘높이 상승하여 2시간의 비행 끝에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무사히 착륙했다. B2스텔스 폭격기는 제작비용이 대당 5억 3천만달러나 소요되어 의회에서도 제작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았았다.
1987년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대통령 불출마 선언 번복
1983년 남북이산가족재회 촉진대회
1980년 볼리비아에 군사 쿠데타, 가르시아 집권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좌파의 헤르난 실레스 수아조의 당선이 확실해지자 취임을 저지하기 위해 육군사령관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가 쿠데타를 감행했다.
수아조가 5억달러에 달하는 코카인무역에 군이 관여했는지를 조사하려고 하자 신분상의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의회를 폐쇄한 군사정권은 수천명의 사람을 투옥했고 반대파의 주요인물을 살해했다.
카터대통령은 볼리비아에 대한 지원금 2억달러의 지불을 정지시켰고 신임 레이건 대통령도 볼리비아 지원을 중단했다. 재정파탄에 빠진 가르시아정권은 결국 붕괴돼 1982년 수아조가 다시 대통령에 복귀했다.
1980년 미국내 이상폭서로 1000여명 사망
1980년 일본 수상에 스즈키 젠코(영목선행) 피선
1979년 니카라과에 좌익정권 탄생, 소모사대통령 미국 망명
1979년 7월 17일 사임한 니카라과 소모사 대통령이 전용기 5대에 40명 이상의 가족을 태우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니카라과에서는 1934년 소모사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이래 장남과 차남인 소모사 등으로 이어온 소모사家 독재체제가 계속돼 왔다.
반대파는 모두 경찰에 의해 사라졌다. 1977년 10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신은 무력투쟁을 선언했다. 국내외로부터도 소모사 퇴진을 요구하는 압력이 높아졌고 소모사는 이에 저항했다.
1979년에 들어서자 쿠바의 지원을 받는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은 6월 16일에 인근 코스타리카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소모사 망명한 후인 7월19일 혁명 축하행사가 거행돼 쿠바에 이은 2번째 사회주의정권이 중미에 탄생하게 됐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개막
1976년 7월 17일 오후3시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21회 올림픽 개막식이 거행됐다. 개막식은 오일쇼크로 인한 건축자재값의 폭등, 노동자의 파업, 공사지연 등으로 메인 스타디움이 미완성인 채 열렸다. 럭비팀을 남아공에 원정시킨 뉴질랜드의 경기참가에 항의하는 22개의 아프리카 국가가 경기를 보이콧해 참가는 94개국 선수 6941명이 출전했다.
대회 최대의 스타는 루마니아 여자체조 선수 코마네치였다. 그녀는 7번이나 10점 만점을 얻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은 수영 13개 종목중 12종목에서 우승해 수영강국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경기는 소련이 금메달 47개로 1위, 동독이 40개로 2위, 미국은 34개로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양정모 선수(레슬링)가 우리나라 올림픽 출전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해 전국민을 기쁘게 했다.
1975년 아폴로-소유즈 도킹 성공
미국의 아폴로 18호와 소련의 소유즈 19호가 1975년 7월 17일 대서양 상공에서 도킹에 성공했다. 아폴로에는 토마스 스태포드선장과 2명의 비행사, 소유즈에는 알렉세이 레오노프 선장과 2명의 비행사가 타고 있었다.
도킹 3시간후 아폴로의 패치가 열리자 스태포드 선장을 포함한 2명의 비행사가 기내를 유영하면서 소유즈에 옮겨탔다. 사상최초로 양국의 비행사가 우주에서 악수를 교환한 것은 암스테르담 상공에서였다.
이틀간 6인의 승무원들은 우주선 사이를 왕래하며 식사를 함께하고 과학적인 실험에 협력했다. 이 도킹은 양국이 우주사고가 일어날 경우 서로 구조활동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72년 5월 미소정상회담에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우주개발경쟁의 데탕트라고도 한다.
1975년 세계기독교반공대회 서울에서 열림
1973년 아프가니스탄에 쿠데타 왕정 폐지
1969년 공주 석장리에서 3만년 전 석기 유물 출토
1969년 3선개헌 반대 투위(鬪委) 발기
1969년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 발사
아폴로 11호가 1969년 7월 17일 미국 케이프 케네디 우주기지에서 발사됐다. 높이 110미터의 사탄 5형 로켓은 3000톤의 추력을 받아 점점 속도를 붙여 하늘로 날아갔다. 3분 정도 경과 후 1단이 떨어졌고 2단이 점화되었다. 다시 2단이 떨어지고 3단이 점화, 이렇게 달까지의 거리 38만 4천km를 나아갔다. 최고속도는 시속 약 3만9천km였다.
비행사 3명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암스트롱이 알드린보다 먼저 달에 첫 발을 내딛고, 그 사이 콜린스는 달의 주위를 선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착륙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예정대로 달 착륙선 이글은 암스트롱과 알드린을 태워 모선 콜롬비아를 떠났고, 콜린스는 달 주위를 110km 높이에서 계속 돌았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글은 마침내 7월 21일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다. 이어 착륙선의 해치가 열렸다.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후 109시간 10분 35초가 소요됐다.
평소 과묵했던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의 표면을 밟으며 말했다. " 이 순간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한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도약이다."라고...
1969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기공
1959년 부산 공설운동장서 참사, 시민위안의 밤 진행중 폭우로 출구에서 67명 사망 150명 부상
부산에서 시민위안잔치에 참석한 관중 3만여명이 소나기를 피하려고 좁은 출입구로 쏟아져 나오다 67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959년 7월 17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부산시민위안회에는 가난과 실직에 찌든 3만여명의 부산시민들이 여름 오후 구경거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오후 8시경 영화배우팀과 만화가팀 간의 야구시합에 뒤이은 시민위안공연이 한창일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당황한 군중들이 하나 뿐인 출입문으로 몰려들면서 앞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뒤에서 그대로 짓밟아 순식간에 남녀 67명이 목숨을 잃고 24명이 크게 다쳤다. 정부에서는 시체1구당 매장비 등으로 3천환씩 지급했을 뿐 아무런 보상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1959년 美 재즈 가수 빌리 할리데이 사망
빌리는 1915년 메릴랜드주(州)의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초기에는 술집 가수로 활동했지만, 선천적인 작은 목소리를 특유의 감성적인 집중력을 사용하여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녀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독특한 발성, 드라마틱한 창법,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인해 그 시대의 보컬리스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이윽고 가창력을 인정받아 `베니 굿맨`과 함께 작업, 1930년대 후반에는 `카운트 베이시`등과 함께 공연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1939년에서 1945년에 걸쳐 `Fine And Mellow`, `God Bless The Child`, `Lover Man` 그리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Strange Fruit`등 여러 곡의 히트를 기록했다.
1940년대에 들어 3번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등 불행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1941년 결혼 후 마약에 중독됐고 1947년에는 마약 소지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해야했다. 1948년 3월 막 출소하고 나서 가진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콘서트가 대성공을 거두지만 1956년 마약 혐의로 다시 체포된 후 재활 치료를 받다 이날 생을 마감했다.
1955년 제1회 학ㆍ예술상 시상
1955년 디즈니랜드 개원
창조력이 넘치는 세계 최초의 테마 파크 `디즈니랜드`가 1955년 7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개원했다.
이 `마법의 왕국`은 중앙에 19세기 미국의 거리를 재현해 이 곳을 통해 여러 상상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모험의 나라, 환상의 나라, 개척의 나라로 구분되어 이는 상상의 나라는 방문자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물했다. 어린이에게는 꿈과 모험과 미래를 안겨주고, 어른들에게는 지난 날의 향수와 동심의 세계를 선사해 온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명소로 꼽히고 있어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1983년에는 동경에 1992년에는 파리에 디즈니랜드가 세워져 맥도널드 햄버거, 코카콜라와 함께 미국의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1954년 학술원-예술원 개원
1952년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1950년 한국전쟁 중 정부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김
1948년 대한민국 헌법 공포
1948년은 5월10일 총선으로 198명의 제헌의원을 탄생시켰고, 5월31일에는 최고령자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한 역사적인 제헌의회가 개원을 맞았다. 첫 본회의는 188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이승만을 정식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3권분립의 한 축이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대한민국의 밑그림이 될 헌법을 제정할 차례다. 누군들 경험이 있었을까, 당연히 시행착오가 따랐다. 국회내에 발족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유진오 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들이 내놓은 헌법 초안은 내각책임제와 양원제였다. 대통령 중심제를 원했던 이승만은 분노를 드러내며 압력을 가했다. 내각책임제를 강행할 경우 자신은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것. 당시 이승만의 위치는 김구가 현실정치에서 한 발 빠져있는 상태에서 유일한 절대 강자였다.
6월22일 한민당이 이승만에게 먼저 굴복했다.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꾼 수정안을 다음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한 것이다. 이래서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뒤바뀌었다"는 말이 돌았다. 수정안을 놓고 12차례나 토론을 벌였지만 대세는 이미 이승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7월12일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헌법이 가결됐고, 17일에는 이승만 의장이 국회의사당에서 헌법에 서명ㆍ날인하고 이를 내외에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그리고 사흘 뒤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승만에게 실질적인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1948년 제헌절 제정
1946년 38선 이북으로의 통행 금지
1945년 미국-영국-소련 수뇌 포츠담회담 개최
1945년 7월 17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 연합국의 세 대표가 독일 포츠담에서 회의를 열었다. 세 사람은 8월 2일까지 유럽의 전후처리문제, 대일방침 등을 협의했다.
회담은 당초 동구에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염려하는 처칠의 주도로 진행됐지만 회의 중 총선거에서 처칠의 보수당이 노동당에 대패하는 바람에 24일, 영국 대표가 노동당 당수인 애틀리로 바뀌었다.
회담은 폴란드-독일 간의 국경확정을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했다. 또 프랑스를 포함 4국이 독일을 분할점령하기로 확정했다.
대일전후처리는
1.일본군국주의의 영구추방
2.군대의 완전무장해제
3.전쟁범죄인의 처벌 등을 협의했다.
1944년 미국 포트 시카고서 탄약수송선 폭발 사망 322명
1936년 프랑코 스페인 식민지 아프리카 카나리아 섬(모로코)에서 반란 스페인 내전 시작
1917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기ㆍ예능보유자 명고수 김득수 출생
1917년 수리조합령 공포
1902년 미국 윌리스 캐리어, 에어컨 발명
`에어컨의 아버지`란 별칭으로 불리는 미국인 윌리스 캐리어(Carrier). 캐리어는 1902년 코넬대학 졸업 후 바로 뉴욕주(州)의 한 기계설비회사에 입사했다. 입사 직후인 7월, 주급 10달러의 그에게 뉴욕 브루클린의 한 출판사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한 여름의 무더위와 습기로 종이가 멋대로 수축·팽창하기 때문에 도무지 깨끗한 인쇄를 할 수 없다." 20대 초반의 캐리어는 너무도 쉽게 해법을 생각해냈다. 뜨거운 증기를 파이프로 순환시켜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난방이 가능하다면, 차가운 물을 이용한 냉방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
인공장치를 이용해 깨끗하고 습기없는 찬 공기를 내뿜토록 한 에어컨은 캐리어에 이르러서야 그 원형이 만들어졌다. 냉수가 순환하는 냉각코일에서 물을 압축·기화시켜 공기로부터 증발열을 빼앗아 온도를 낮춘 후 바람으로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출판사 인쇄공장에 처음 설치된 에어컨은 오랜 기간 수요가 없다가, 1920년대 초 뉴욕의 극장과 백화점들이 도입하면서 비로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미 의회에는 1928년 에어컨이 설치됐다. 여객기(유나이티드 에어라인·UA)에는 1936년, 자동차에는 1939년 처음 에어컨이 장착됐다. 에어컨이 대중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선 1955년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에 에어컨을 기본 사양으로 채택하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1876년 소련의 외교관 막심 리트비노프 출생
1868년 일본 강호를 동경으로 개칭
1865년 독립운동가 임예환 출생
1790년 고전경제학 창시자 애덤 스미스 사망
1763년 미국의 모피 왕 애스터 출생
1744년 미국의 독립선언문 서명자, 부통령 게리 출생
1674년 제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 승리
1453년 백년전쟁 종결
1392년 태조 이성계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 조선왕조 건국
661(신라 문무왕 1) 김유신 고구려 정벌에 나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