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운반 농구 ‘광지리’ 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농구(農具) 시리즈 제3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의 농기구에는 ‘광지리’라는 운반용구(運搬用具)가 있다. 표준어(標準語)로 ‘광주리’를 말한다. “이거, 한 ‘광지리’ 팔어가 얼매나 남는다꼬 그마이 깍닌기요?(이것, 한 ‘광주리’ 팔아서 얼마나 남는다고 그만치 깍는가요?)”라는 용례가 있다.
‘광주리’는 대오리·싸릿대·버들가지 따위로 바닥은 둥글고 위는 좀 벌어지게 결어 만든 큼직한 그릇으로 뽕을 따고 배추를 절여 담고, 생선(生鮮)을 말리는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농기구(農器具)이다.
광주리
그러나 대개의 경우 여름에 음식(飮食)을 담아 상하지 않게 보관(保管)하거나, ‘들밥’이나 ‘중참(새참)’을 논밭으로 운반(運搬)할 때 가장 많이 쓰였다. 오일장날 열무 등 채소를 이고 가서 행상(行商)을 할 때도 주로 ‘광주리’를 사용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참’은 ‘사이참’을 말하고, ‘사이참’은 줄인 말로 ‘새참’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이참’은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 또는 그때 먹는 음식을 말한다.
새 참
‘광주리’와 비슷한 것으로 ‘바구니’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주로 ‘대오리’나 ‘싸릿대’를 통으로 쓰지 않고, 얇게 쪼개어 둥글게 결어 속이 깊게 만든 그릇을 일컫는다.
‘광주리’는 크고, ‘바구니’는 조금 작은 것이 일반적(一般的)이다. 그리고 ‘광주리’는 ‘대바구니’와는 달리 그물코가 거칠고 형태도 비교적(比較的) 크게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광주리’는 배추, 무, 감자, 고구마 등 개체(個體)가 큰 농작물(農作物)을 주로 담았고, ‘바구니’에는 콩, 팥, 쌀, 보리 등 자잘한 곡식(穀食)을 담았다.
바구니
‘광주리’를 사용한 시기는 석기시대(石器時代)부터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중요한 민구(民具)로서 일찍 발전해 왔었다. ‘광주리’의 대소(大小)와 종류에 따라 ‘가는 대’는 통째로 쓰고, ‘굵은 대’는 쪼개어 쓴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오리’나 ‘싸릿대’를 표백(漂白) 또는 염색(染色)을 해서 쓰는데, 사용 목적에 따라 칠을 하거나 물감을 들이는 수도 있다. 모양은 사각 진 곽 모양부터 둥근 모양, 타원형(橢圓形), 원통형 등 그 쓰임새에 맞게 제작되었다.
여러 가지 모양의 광주리
재료(材料)도 앞서 말한 대로 대나무, 등나무, 버드나무, 싸리나무 등 가늘고 잘 휘어지는 나무를 사용해 만들어 썼다. 일정한 모양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 썼기 때문에 모양도 다양(多樣)한 것이 ‘광주리’다.
물건을 담아 두거나, 호박이나 무 등 열매채소를 썰어 말릴 때도 쓰고, 생선(生鮮)을 말릴 때도 사용했다. 다양한 쓰임새와 활용도(活用度)가 높아 좋은 살림도구가 되었지만, 요즘은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그릇이 발달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플라스틱 광주리
농사철이면 여인네들이 ‘광주리’에 밥과 반찬을 담아 머리에 이고 들판을 다니는데, 여름철 ‘광주리’에 담아둔 음식은 통풍(通風)이 잘되어 잘 상하지 않았고, 생선(生鮮)이나 축축한 물건을 말릴 때도 그 영향으로 건조(乾燥)가 잘 되었다.
각(角)이 진 것은 품격(品格)이 있어 보이고, 둥근 것은 여인네들의 펑퍼짐한 엉덩이 같아 보기도 좋았다. 엮는 방법도 다양해 그 예술성(藝術性)도 멋지고 아름다웠다.
‘광주리’는 주로 여인들이 머리에 이고 다녔는데, 빨래를 담아 개울가로 나갈 때도, 들에 음식을 여 나를 때도, 밭에서 고추․감자․야채(野菜) 등을 걷어 들일 때도 ‘광주리’에 담아 이고 다녔다. 남자들은 가득 담아 지게에 지고 다니기도 한다.
광주리로 운반하는 중참
흔히들 ‘광주리’를 ‘바구니’라고 하고, ‘바구니’를 ‘광주리’라고 호칭(呼稱)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서 ‘광주리’와 ‘바구니’의 차이점(差異點)을 잠시 알아본다.
우선 ‘광주리’와 ‘바구니’는 모두 무엇을 담는 그릇이고, 대나무나 등나무, 싸리나무 따위가 재료(材料)다. 그리고 용도(用度)도 비슷하다.
바구니
다만, 모양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전체 모양이 동그스름한 것은 비슷하다. 그리고 ‘광주리’는 앞서 얘기한 대로 대오리나 싸릿대를 통으로 결어 만들고, ‘바구니’는 주로 ‘대오리’로 만드는데, ‘대오리’를 얇게 쪼개어서 촘촘하게 만든다.
또한 속이 깊숙한 정도를 보면 ‘광주리’는 낮고 ‘바구니’는 높은 편이다. 그리고 ‘바구리’는 촘촘하게 짰기 때문에 쌀이나 자잘한 곡식(穀食)을 담아도 새지 않을 정도며, ‘광주리’는 너무 성기고 거칠어서 자잘한 것들은 담아둘 수가 없다. 광주리와 바구니의 생김새를 비교해 본다.
광주리 |
바구니 |
|
|
‘광주리’는 또 ‘채반’과 혼돈(混沌)하는 경우가 많다. 생김새가 비슷하기도 하고, 같은 재료(材料)로 만들기도 하지만, 물건을 가득 담아 놓았을 때는 구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반’은 채그릇의 한 가지로 껍질을 벗긴 싸릿개비나 버들가지로 넓적하고 ‘울’이 얕게 결어 만들고, ‘광주리’는 같은 재료로 만들더라도 ‘울’을 깊게 만든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울’은 ‘신울’이나 ‘울타리’의 준말이기도 하고, 속이 비고 위가 터진 물건의 가를 두른 부분을 말한다. ‘광주리’는 속이 비고 위가 터진 그릇으로 그 가를 두른 울타리를 줄여서 ‘울’이라고 한다.
어쨌든 ‘광주리’는 물건을 담아 나르거나, 보관(保管)하는 용도로 주로 쓰이고, ‘채반’은 생선(生鮮)이나, 삶은 나물 등을 말리는데 사용한다. ‘광주리’와 ‘채반’의 모양을 비교해 본다.
광주리와 채반
광주리 |
채 반 |
|
|
어쨌든 옛적 우리들의 어버이들이 사용하던 ‘광주리’는 우리 생활과 너무나 밀접(密接)해 있었다. 어머니께서 모내기나 벼 베기 때 아버지께서나 품앗이 일꾼들이 일하시는 논밭에 점심이나 ‘중참’을 내어 갈 때는 반드시 ‘광주리’가 쓰였다.
보리밥 한 그릇에 된장 한 종지, 김치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어김없이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날랐다. 어떻게 보면 ‘광주리’ 외에 다른 운반농구(運搬農具)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들밥 나르는 광주리 행렬
어린 시절, 일꾼을 얻어서 들녘에서 일을 할 때면 음식이 푸짐하게 담긴 점심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논밭으로 나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 본 적이 종종 있었다.
점심 ‘광주리’를 이고 오는 어머니가 저 만치 보이면 일을 하던 일꾼 중에 먼저 본 사람이 달려와서 “저념 해 온다꼬 고상 마이 했심더(점심 해 온다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하며 ‘광주리’를 받아 간다.
중참을 담아 이고 온 광주리
논두렁이나 펑퍼짐한 밭둑에 ‘광주리’를 내려놓고, “밥 묵꼬 하입시더”라고 소리치면 흙 묻은 손을 대충 씻거나, 툭툭 털고 모두 풀밭 위에 차려진 밥상으로 모여든다.
‘새참’ 때도 어머니께서는 정갈한 ‘광주리’에 갖은 반찬을 장만하여 밥과 찌개, 고등어조림, 장떡 등 한 ‘광주리’ 차려 머리에 이고, 막걸리가 든 양은(洋銀) 주전자는 꼭 필자가 들고 뒤따라오라고 하셨다.
막걸리 심부름
그런데 어떤 날은 논둑길을 잘못 밟아 넘어지는 바람에 두 되짜리 막걸리를 모두 쏟아 혼쭐이 났고, 한참동안 논둑에 주저앉아 울기도 했었다. 맞은 것이 섧고, 쏟은 것이 분해서였다.
‘광주리’는 또 잔칫집이나 초상집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그릇이었다. 잔칫집에서는 갖가지 ‘지짐’이나 먹을거리를 튀기고 부쳐서 ‘광주리’에 널어 말리기도 하고, 가마솥에서 삶아 낸 국시(국수)를 찬물에 식혀 한 그릇에 담을 만한 ‘사리’를 만들어 차곡차곡 쌓기도 했었다.
김장김치를 담글 때 배추나 무를 씻거나, 절여 물기를 빼는 데도 ‘광주리’가 요긴했었다. 뿐이었겠는가. 요즘은 아예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광주리’가 행상(行商)들의 필수품(必需品)이기도 했었다.
광주리 행상
떡이나 과일, 생선(生鮮) 따위를 담아 이고 다녔고, 노점상(露店商)으로 좌판(坐板)을 벌일 때도 ‘광주리’가 쓰였다. ‘광주리’를 머리에서 내려놓으면 그냥 좌판이 되는 것이다.
‘광주리’의 크기도 다양(多樣)했었다. 큰 ‘광주리’안에 작은 ‘광주리’를 넣고, 그 작은 ‘광주리’안에 다시 더 작은 ‘광주리’를 넣어 차지하는 부피를 줄였다.
‘광주리’를 벽에 걸어둘 때도 작은 것 위에 큰 것을 걸고, 그 큰 것 위에 그것보다 더 큰 것을 다시 걸어 차지하는 면적(面積)을 줄였다.
광주리와 비슷한 채반
옛날에는 감자나 고구마가 구황식물(救荒植物)로 일반 백성들이 먹고 살기 어려운 때 주식 노릇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어름에 들면서부터 고구마가 간식(間食)거리로 등장(登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어머니들은 고구마를 날로 또는 삶아서 납작납작하게 썰어 ‘광주리’에 널어 말리셨다.
겨울철 고운 햇살 아래 삶은 고구마를 썰어 ‘광주리’에 말리면 꼬득꼬득하게 마르는데, 이를 바라보는 아이들 입에는 군침이 돈다. 그래서 채 굳기도 전에 아이들 입에서 많이 녹기도 했었다.
빼때기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서 ‘광주리’에 널어 말린 고구마를 ‘빼때기’라고 하는데, 생고구마를 얇게 빼딱빼딱하게 썰어 말린 것으로 쉬이 썩어버리는 고구마를 제대로 보관하는 방편(方便)이었다.
그리고 ‘빼때기’는 콩, 팥 등 잡곡(雜穀)이나 무, 배추 등을 썰어 넣어 ‘빼때기죽’을 끓여 먹었다. ‘빼때기죽’은 경상남도 통영(統營) 지방의 명물이기도 했었다.
통영 빼때기 죽
그리고 삶은 고구마를 썰어 말린 것은 ‘쫀득이’라고 했는데, ‘쫀득이’는 남녀노소 없이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겨울도 지내고 보릿고개도 견뎠다. 여기에서 말하는 ‘쫀득이’는 옛적에 학교 앞 문방구(文房具) 가게에서 사먹던 불량식품(不良食品)인 ‘쫀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구마를 삶아서 납작납작하게 썰어 ‘광주리’에 펼쳐 통풍(通風)이 잘되는 곳에 널어 말린 것으로 그 강도(强度)가 쫀득쫀득하다하여 ‘쫀득이’라고 했었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에서는 '쫄때기'라고도 했다.
쫀득이
고구마를 노릇노릇하고 말랑말랑하게 삶는데다 삶는 과정에서 당분(糖分)이 숙성되고, 크기도 줄어 보관(保管)하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었고, 쫀득쫀득하게 말라 씹기조차 좋았던 그 맛은 기가 막혔다.
필자네의 경우 당시의 울산(蔚山郡) 방어진에서 밤고구마 종자를 구입하여 외동면 북부지역에서는 제일 먼저 밤고구마를 재배(栽培)했고, ‘빼때기’와 ‘쫀득이’를 만들어 먹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구마 빼때기
밤고구마 종자(種子)를 구하기 위해 인근에 있던 신계리, 활성리, 방어리, 말방리, 죽동리, 내동면(內東面) 시리(矢里)와 구정리, 진현동 등지에서 필자의 집을 찾아와서 ‘씨고구마’를 구해가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쨌든 고구마 ‘빼때기’와 ‘쫀득이’는 어릴 적 우리들의 둘도 없는 훌륭한 간식(間食)거리였다. 호주머니에 넣어 골목길을 쏘다니며 친구들과 나눠먹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밤고구마
---------------------------------------------
6·25 전만 해도 ‘광주리’에 잡화(雜貨)를 이고 다니면서 행상을 하는 ‘광주리장수’들이 많이 있었다. 중년 이상의 부인들이 주로 시골 아낙네들을 상대로 실, 바늘, 가위, 물감, 비누, 화장품(化粧品), 과일, 사탕, 과자 등 온갖 잡동사니를 이고 다니며 팔았다.
당시에는 또 ‘황아장수’라는 행상(行商)이 있었는데, 황아(荒貨)라는 ‘잡살뱅이’를 지게에 지고 팔던 사람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잡살뱅이’란 여러 가지가 뒤섞인 그리 중요(重要)하지 않은 물건을 말하고, ‘황아장수’란 ‘잡살뱅이’의 물건을 지고, 집집이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을 말하는데, 주로 남자들이 지게에 ‘잡살뱅이’를 지고 다녔다.
황아장수
여자에게 소용되는 화장품(化粧品), 바느질 기구, 패물 등 ‘방물’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방물장사’를 하는 여자와는 조금 다른 말이다. ‘황아장수’는 주로 남자들이고, ‘방물장수’는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황아장수’는 트럭에 잡화(雜貨)를 싣고 다니면서 확성기(擴聲器)로 손님을 불러 모으고 있고, 들밥은 경운기(耕耘機)로 나르고, 빨래터에는 플라스틱 용기가 쓰이며, 밭곡식은 비닐 부대에 담겨지고 있다. 더 이상 ‘광주리’가 쓰일 곳이 없어졌다는 얘기다.
방물장수
이 때문에 이 마을 저 마을의 소식(消息)을 전해 주고 때로는 혼사(婚事)도 맺어 주던 그 시절 ‘광주리장수’와 ‘등짐장수’들은 이제 만날 수도 없고, 구경할 수도 없게 되었다.
-------------------------------------------
‘광주리’의 용도(用度)는 너무나 다양하여 열거(列擧)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옛적에는 참새나 멧새를 잡을 때도 ‘광주리’를 덫으로 사용하곤 했었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참새와 멧새 같은 새들은 먹이를 얻기 어려워 외양간이나 볏짚 낟가리 등에 모여든다. 이때는 마당에 지름 1m쯤으로 눈을 치우고 ‘광주리’를 땅에 엎어 놓되, 한쪽은 30cm쯤 들어서 막대기로 버티어 놓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둔다.
광주리 덫
그리고 ‘광주리’ 안팎에 조나 수수이삭 등을 뿌린다. 쌀이나 벼를 뿌려놓기도 한다. 버팀 막대기에 잡아맨 끈을 쥐고, 방안에서 문구멍을 뚫어 지켜보다가 새가 먹이를 쪼아 먹으려고 ‘광주리’ 안에 들어간 순간 끈을 힘차게 당기면 ‘광주리’가 엎어지면서 새를 덮친다.
이 때 보자기 같은 것으로 ‘광주리’를 덮어씌우고 손을 집어넣어 한 마리씩 꺼내어 참새구이를 만들어 먹으면, 둘이 먹다가 둘 다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이 일품(逸品)이었다.
참새구이
평안도(平安道)에서는 이를 ‘광지덫’ 또는 ‘광지첨’이라 부른다. ‘광지’는 ‘광주리’의 평안도 사투리이다. 충청북도(忠淸北道)에서는 이렇게 참새를 잡는 것을 ‘참새 덮치기’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새를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새가 워낙 민첩(敏捷)하기 때문에 축 늘어진 끈을 방안에서 잡아당기면, ‘광주리’가 덮치기 전에 잽싸게 날아 가버리기 때문이다.
‘광주리’ 대신 ‘삼태기’나 가로 1m, 세로 80cm쯤 되는 널판이나 ‘바소쿠리’를 접어 이용하기도 하는데, 구조(構造)나 잡는 방법은 ‘광주리덫’과 같았다.
소쿠리 덫
----------------------------------------------
‘광주리’와 관련해서는 화백 박수근(朴壽根 ; 1914-1965)의 그림 ‘광주리 인 여인’이 우리들의 심금(心琴)을 울리기도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박수근의 ‘광주리를 인 여인’은 ‘절구질하는 여인’과 함께 그의 대표적(代表的)인 그림이다.
이들 그림은 박수근이 짧은 일생을 살면서 남겨놓은 그림들로 금액(金額)으로도 엄청난 경지(境地)에 달하고 있다. 물론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거들떠보는 이들조차 없었다.
광주리를 인 여인
그와 그의 아내가 타계(他界)한 후 그의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지금은 부유층의 투기대상이 되고도 있지만, 거의 모든 예술가(藝術家)들의 경우처럼 살아 있을 때의 박수근(朴壽根) 자신은 너무나 궁핍(窮乏)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었다. 그의 삶을 잠시 살펴본다.
그의 그림 중에 ‘광주리를 인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과 ‘행상(行商)을 하는 여인’들은 그 모델이 모두 화백(畵伯)의 아내였다는 데서 우리는 그의 빈한(貧寒)했던 일생을 엿볼 수 있다.
평생 독학(獨學)으로 그림을 익혔던 박수근(朴壽根)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단 한 번도 붓을 놓은 일이 없을 만큼 예술(藝術)을 사랑했고, 예술적 의지가 강했다.
행상 자리를 잡지 못해 광주리를 이고 서성이는 여인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박수근(朴壽根)은 너무나 무력했다. 일생을 두고 그가 직업을 가졌던 기간은 도청직원(道廳職員)으로, 또 미술선생으로, 그리고 간판그림을 그리며 미군부대(美軍部隊)를 잠시 거쳐 갔던 시절까지 전부 합쳐 5년 정도였다.
그가 즐겨 그린 ‘광주리를 인 아낙’은 이곳저곳 오일장(五日場)을 찾아다니며, 나물 몇 다발이 든 ‘광주리’를 시장통 부근 땅바닥에 내려놓고 해가 다 가도록 길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면 여인은 잘 펴지지 않는 무릎을 두드리며 겨우 일어나 팔다 남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총총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 모델이 바로 박수근(朴壽根)의 아내 김복순이었다.
광주리를 인 여인들
박수근(朴壽根)은 주로 여인을 그렸지만, 앞선 어느 파일에서 소개한대로 그가 그린 여인들은 고운 꽃분홍색 한 가닥 찾아볼 수가 없다. 건조(乾燥)하게 갈라진 흙벽 같은 그림의 표면(表面)에서 궂은 일로 꺼칠꺼칠해진 여인의 손등이 보이는 것 같은 그림뿐이었다.
수수한 갈색조(褐色藻)의 바탕색은 여인이 입은 구겨지고 흙 묻은 흰 무명옷을 생각나게 한다. 이 여인도 틀림없이 매끌매끌한 비단 치마에 구슬 박힌 작은 손가방으로 멋을 내고 수줍은 표정(表情)으로 남편을 따라 나들이를 가고 싶었을 것이다.
박수근(朴壽根)의 그림에서 늘 모델이 되고 있는 그의 아내 김복순은 단 한 번도 그런 나들이를 꿈꿔보지 못했다. 궁핍(窮乏)한 생활에 시집 식구들의 밥을 챙겨주고 나면, 먹을 것이 없어 정작 자신은 콩 몇 알에 냉수(冷水)만 벌컥벌컥 들이켜야 했었다.
광주리를 앞에 놓고 행상하는 여인
-------------------------------------------
‘광주리장수’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숱한 얘기들이 쌓여 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필자가 살던 경기도 부천시(富川市) 변두리마을에는 매주 수요일마다 ‘광주리’에 ‘굴비’를 담아 팔러 다니는 할머니가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할머니를 보면,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며 그 할머니의 생선(生鮮)을 매번 사드리곤 했었는데, 그 덕분에 필자는 매주 그 귀하던 ‘굴비’ 반찬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어머니와 필자는 그 할머니를 ‘굴비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할머니의 머리 위에는 할머니 몸집의 세 배는 더 되어 보이는 커다란 ‘광주리’가 항상 얹혀 있었고, 할머니의 등은 우산(雨傘)을 써도 엉덩이가 비에 젖을 정도로 굽어 있었다.
광주리장수 할머니
‘굴비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굴비를 팔았고, 한낮에는 길모퉁이에 생선 ‘광주리’를 내려놓고 생선(生鮮)을 팔았다. 그리고 그 ‘광주리’에는 ‘굴비’ 말고도 고등어, 오징어 같은 생선(生鮮) 중에서도 상하는 속도가 더딘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굴비’를 팔기 위해 ‘굴비 광주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그제야 보이는 할머니의 머리 모습은 ‘광주리’를 얹기 위해 또아 올린 수건 모양 그대로 머리카락 하나 없이 허연 피부(皮膚)가 드러나 있었다. 생선(生鮮)에서 흘러내린 소금물이 머리칼의 뿌리조차 고사(枯死)시켰기 때문이다.
생선장수
‘굴비 할머니’는 그 ‘광주리’ 장사로 딸과 아들을 대학(大學)까지 공부시키고 결혼(結婚)까지 시켰다고 했다고 가끔씩 자랑을 하곤 했었다.
지금은 웬만하면 대학에 다닐 수 있으나, 그 시절의 서민가정(庶民家庭) 자녀들은 대학진학(大學進學)이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입학시험(入學試驗)에 합격이 되었다 해도 그 엄청난 등록금(登錄金)을 마련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었다.
그런데도 ‘굴비할머니’는 하나도 아닌 두 자식을 그 어려운 대학(大學)까지 나오게 했고, 그 많은 돈을 들여 혼사(婚事)까지 주선하느라 ‘머릿등’이 허옇게 벗겨지도록 생선장수를 하신 것이다.
광주리장수
(그 시절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굴비할머니’는 딸과 아들을 대학(大學)까지 보내 결혼까지 시켰지만, 평생을 ‘광주리’장사로 연명(延命)하시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연탄불이 꺼진 방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
필자는 요즘도 ‘광주리’나 식당쟁반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주머니들을 보면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그 ‘굴비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 할머니 같이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좀 적었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과하다면 살맛이라도 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 시절 계란장수 어머니
여기에서 잠시 어머니의 ‘광주리’장사에 얽힌 애환(哀歡)을 그린 김효숙의 ‘마지막 계란행상’을 음미하기로 한다.
마지막 계란 행상
김효숙
하얗게 눈이 쏟아져 산과 들에 옷을 갈아입히면
철없는 아이들은 눈이 좋아
온종일 눈싸움을 하며 지냈습니다.
눈사람을 만들어 소나무 솔잎을 따다 수염을 만들고
아궁이 타다 남은 숱을 갖다가 눈썹을 만들고
나뭇잎 주워 다 입을 만들어
이쁜 꼬마 눈사람을 완성시켜
하얀 천사얼굴처럼 좋아서 웃던 우리들
저녁나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면
집집마다 저녁연기로
가득 한데 우리 집엔 장사를 나가신
엄마가 돌아오시지 않아 저녁밥을 지을 수 없어
저녁연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졌는지
엄마가 돌아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동생과 나는 다 식어 버린 아랫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잔불 밑에서 숙제를 했었다.
옆집에서는 청국장 끓는 냄새가
배고픈 우리들 허기진 배를 유혹했지만
오직 엄마가 부르시는 기척만 오래도록 기다릴 뿐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효숙아!’ 엄마가 돌아 오셨다.
머리에 이고 들어 온 광주리엔
노랗게 터진 계란에 흔적이 남아 돌뿐
곡식을 많이 받지는 못했다.
엄마는 그날도 한 시간은 걸어서
산등성이를 넘어 가는 고주몰이라는 곳에 가셨다가
이집 저집에서 계란을 받아
광주리에 이고 하얗게 눈이 쌓인
산등성이를 넘어 내려오시다가
그만 미끄러지셔서 계란을 다 엎으셨단다.
아! 마지막 계란 장사가 되고 말았다며
눈물이 핑 도시던 어머니
이젠 마지막이라고 서울에 있는 언니한테 돈을 얻어다
계란 장사를 시작 하셨는데 본전을 다 잃어 버리셨으니
그날 밤 엄마는 어깨가 축 쳐진 모습으로 들어오셨다.
목소리도 기운이 하나도 없으셨다.
그땐 엄마가 슬픈 건지.
엄마가 그렇게 맘이 아픈 건지
어린 나는 잘 몰랐다.
왜 하필이면 눈이 싸인 산등성이를 넘어
그 동네를 가셨을까
논둑길을 건너가는 동네를 가시면 괜찮으셨을 텐데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엄마의 마지막 계란 행상이
가슴 아프게 생각난다.
하얀 눈 속에 슬픈 기억을 잊고 싶은데 말이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아니한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눈이 오는 날이면, 그 기억 때문에
|
광주리 행상
옛적 괘릉리(掛陵里)에 살던 어느 아주머니는 어일장(魚日場 : 경주시 양북면 소재지 어일리에 소재)에 새우젓 장사를 다니느라 가파른 ‘괘릉재’를 넘어 왕복(往復) 40리 길을 걸어 ‘광주리’ 장사를 하셨다. 평지의 40리가 아니라 가파르게 오르고 내리는 잿길이 40리였다.
어일장에 갈 때에는 울산(蔚山)에서 받아 온 쌀자루를 ‘광주리’에 이고 가서 팔았고, 올 때에는 새우젓을 받아 그 ‘광주리’에 이고 와서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이른바 ‘방문판매(訪問販賣)’를 하셨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도 머리를 항상 빛바랜 수건으로 감싸고 다녔다. 수건을 걷으면 소금기에 절어 머리가 빠진 반 대머리가 그대로 들어나기 때문에 수건을 벗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광주리 새우젓 장수
새우젓을 ‘광주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물건을 팔 때 돈이 귀하던 시절인지라 현금(現金)은 없고, 보리나 쌀 등 곡식으로 바꿔주니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고개가 휘다 못해 허리까지 휘고, 힘에 붙이니 걸음을 걸을 때마다 새우젓 담은 양푼에서 넘쳐흐르는 독한 소금국물(젓국)이 ‘따배이(똬리)’와 머릿수건을 적시고, 맨 머리 위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그러나 ‘광주리’가 너무 무거워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 그냥 참고 다니니 모공(毛孔 ; 털구멍)에 젓국이 스며들어 모근(毛根 ; 털뿌리)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는 줄곧 수건을 쓰고 다니다가 후일 서울로 이주(移住)한 후에는 평생 동안 그 당시 유행하던 가발(假髮)을 쓰고 다니곤 하셨다.
언제나 수건으로 머릿등을 가린 아주머니
이 아주머니가 지난 2000년 초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천국(天國)에 가신 필자의 어머니다. 필자의 무작정 상경(上京)으로 가까이에서 봉양(奉養)하지 못한 불효로 원치 않은 고생을 하신 것이다.
어머니에게 한평생 안겨드린 불효(不孝)가 너무나 후회되어 지금도 매일같이 하나님께 회개(悔改)하고, 용서를 빌고 있지만 개운치가 않다.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아무래도 용서(容恕) 받지 못할 것 같아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토록 고된 ‘새우젓 장사’가 ‘사기그릇 장사’보다는 낫다고 했었다. 무거운 사기그릇을 종류별(種類別)로 몇 십 벌씩 ‘광주리’에 담아 이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다니면서 행상(行商)을 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선 장수
쉬이 팔리지도 않는데다가 돌덩이 같이 무거운 사기그릇을 이고 다니느라 고개가 휘고 허리가 휘고, 나중에는 다리까지 휘는 힘겨운 중노동(重勞動)이라 ‘새우젓장사’보다는 낫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별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머니의 ‘새우젓 장사’가 그만큼 힘들고 고통(苦痛)스러웠던 탓이다.
-------------------------------------------------
우리말에는 ‘광주리장사’라는 말과 ‘광주리장수’라는 말이 있다.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엄밀(嚴密)히 따지면 같은 말이 아니다.
‘광주리장사’는 적은 양의 과일이나 채소ㆍ어물 따위의 식료품(食料品), 부피가 작은 생활용품(生活用品) 따위를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거나 장터에 앉아서 파는 장사를 말하고, ‘광주리장수’는 ‘광주리장사’를 하는 사람 또는 ‘광주리’를 파는 사람을 말한다.
광주리 장사
(9.28수복 이후 전쟁의 폐허가 고스란히 남겨진 남대문
시장에서 두 아낙네가 광주리를 머리에 인채 걷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옛적 어느 어머니가 ‘입실장(入室場)’에서 ‘광주리’ 장사를 하고 있을 때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동무들에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창피하여 숨어서 뛰어오곤 하던 어린 딸이 성장한 후에 그 시절을 후회(後悔)하며 그리워하는 ‘입실 장날’을 음미해 본다.
입실 장날
그 시골 작은 도시, 입실에서 5일마다 장이 섰는데
왕복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우리 집에 울 엄마는
철마다 밭에서 나는 곡식이나 과일을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장으로 나섰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제각기 장에 내다 팔
곡식들을 한 보따리씩 챙겨서 모이면
구루마에 올라타고 온 동네가 시끄러울
정도로 수다를 떨면서 장으로 나가신다.
입실장 큰길 양쪽 가장자리를 쭉 늘어선
광주리장사 아주머니들 사이에
울 엄마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계셨다.
학교가 끝나고 그 시장 길을 지나올 때는
엄마를 못 쳐다보고 언제나 잽싸게 빠져 나왔었다.
그때는 어머니의 모습이
왜 그렇게 창피했는지 몰랐었다.
지금 같으면 같이 앉아서 장사 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엄마가 장사하는 모습은 창피했지만
집으로 돌아오시는 엄마는 참 많이도 기다렸다.
양손가득 무엇이든 사 들고 오시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향 떠나온 지 하도 오래되었고
일 년에 추석명절 전에
한번 갈까 말까 하는 정도라서
그 입실 오일장의 모습은 볼 기회조차 없어졌다.
지금도 그 입실 5일장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 같은데
언제든 한번 기회가 되면 그 장이 서는 날
꼭 한번 가보고 싶다.
|
필자는 김홍도(金弘道)의 ‘부부 행상’을 볼 때마다 언제나 애잔한 생각이 들곤 한다. 남자는 지게를 지고 지게 작대기를 들었고, 여자는 ‘광주리’를 이고 있다. 남자의 벙거지는 낡아서 너덜거린다.
여자는 아이를 업고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이는 ‘처네(어린아이를 업을 때 두르는 끈이 달린 작은 포대기)’로 업지 않고 옷 속에 업고 있다.
이들은 부부임이 분명하다. 남편의 지게에는 나무로 엮은 통이 얹혀 있는데, 줄로 단단히 묶은 모양으로 보아 곡식(穀食)이나 음식이라기보다는 새우젓 같이 보인다.
김홍도의 부부행상
그리고 아내의 ‘광주리’에 담긴 것은 푸성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둘은 마주보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시절 서민생활(庶民生活)을 대표하는 이 그림에서 그 시절 부모님의 힘들었던 삶이 엿보이는 것 같아 언제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
‘광주리’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속담(俗談)이 전래되기도 한다. “광주리에 담은 밥도 엎어질 수가 있다”라는 말은 “틀림없을 듯한 것도 실수(失手)하여 그르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입이 ‘광주리’만 해도 말 못 한다.”라는 말은 잘못이 이미 똑똑히 드러났으므로, 제 아무리 입이 ‘광주리’처럼 넓고 커도 변명(辨明)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광주리
“아가리가 ‘광주리’만 해도 막말은 못한다.”라는 말은 입이 아무리 커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뜻으로 상대편(相對便)이 어처구니없는 말을 함을 비난(非難)조로 이르는 말이다.
‘미얀마’ 속담(俗談)에는 “남자가 귤 한 ‘광주리’면, 여자는 쌀 한 광주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미얀마’는 여자가 많은데다 출생 시의 성비(性比)에서도 여아의 출산율(出産率)이 훨씬 높은 편이다.
그리고 ‘미얀마’는 불교(佛敎) 국가라 남자들 중에는 승려(僧侶)의 길을 가는 비율이 많다보니 남자에 비해 여자의 수가 상대적(相對的)으로 매우 많다. 이를 두고 “남자가 귤 한 ‘광주리’면, 여자는 쌀 한 광주리”는 속담이 생겼다.
영어(英語)에도 우리 속담(俗談)과 비슷한 ‘광주리’ 속담이 있다. Don’t put all your eggs in one basket(달걀을 한 광주리에 담지 마라) 이 말은 한꺼번에 한 곳에다 모든 노력과 투자를 다하지 말라는 뜻이다. A wise man does not put all his eggs in one basket(현명한 사람은 달걀을 한 광주리에 담지 않는다)와 같은 의미다.
광주리 장수
----------------------------------------
옛적에는 가을 운동회(運動會) 때 ‘광주리’에 ‘콩주머니 던져넣기’ 경기가 있었다. 운동회의 단골 게임이었고, ‘박’ 터뜨리기는 오전 게임의 백미(白眉)였다. ‘박’이 빨리 터져야 점심시간이 앞당겨진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사력을 다해 콩주머니를 던졌다.
콩주머니 세례를 받은 ‘박’이 쩍 벌어지면, 하늘에 날리는 오색 꽃가루를 보면서 환호성(歡呼聲)을 질렀다. ‘콩주머니 던져 넣기’는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이 던져 넣은 팀이 승리하는 단체경기(團體競技)였다.
그리고 ‘콩주머니’는 진짜 콩을 넣어 만들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부잣집 자녀들이나 그렇게 했고, 서민(庶民) 자녀들은 모래나 흙을 넣어 만들었다. 필자들은 이런 주머니를 ‘오재미’ 또는 ‘오자미’라고 했었다.
오자미(콩주머니)
부유층 자녀들의 오곡 오자미 |
서민 자녀들의 모래 오자미 |
|
|
‘오자미’는 손바닥 만 한 헝겊에 콩이나 모래를 집어넣고, 사방을 둘러 꿰매 어린이 주먹만 하게 만들어서 던지면서 노는 놀이 도구(道具)로 일부에서는 이 말을 일본말이라고 하나 순 우리말이다.
필자가 ‘외동이야기’ 어느 파일에서 ‘오자미’를 일본말이라고 소개한바 있는데, 그때의 소개는 오류(誤謬)에 해당한다. 그러나 ‘오자미’보다는 ‘콩주머니’ 또는 ‘모래주머니’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광주리에 콩주머니 던져 넣기
고장(故場) 마다 ‘오자미’ 놀이에 얽힌 얘기도 부지기 수였다. 가난한 서민들의 경우 1년 내내 ‘이밥(쌀밥)’ 한 번 구경하기가 힘들었고, 정월대보름마다 지어 먹던 오곡밥도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 서민(庶民)들도 1년 중 단 한번 오곡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정월대보름이 아닌 관내(管內) 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 때가 그때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運動會) 때는 어김없이 ‘박 터트리기’ 게임이 있었고, 이때 사용(使用)하기 위해 부잣집 애들이 만들어 온 ‘오자미’에는 쌀에서부터 보리쌀, 좁쌀, 수수쌀, 콩, 팥 등이 소복소복 들어 있었다.
일부는 학생들이 되가져가기도 했지만, ‘오자미’가 못 생겼거나 던지느라 약간씩 실밥이 터진 것은 운동장(運動場)에 그냥 버리거나 한쪽 구석에 쌓아놓기 일쑤였다.
오자미 박 터트리기
가난한 집 애들과 어머니들은 이들 ‘오자미’들을 주워 집으로 갖고 와서 일일이 내용물(內容物)을 끄집어내어 오곡(五穀)을 만든다. 먼지와 모래알이 스며들어 흙투성이가 되기는 했지만, 몇 번이고 씻고 일어 내면 그런대로 오곡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다.
운동회가 끝난 운동장(運動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오자미’를 주워 와서 때 이른 오곡밥을 지어 먹으면서 배고픔의 설움을 달래던 그 시절도 추억(追憶)이라면 추억일 것이다.
그 시절 ‘오자미 오곡밥’을 노래하면서 철부지 어린 마음에 그려지는 고운 그림을 무명시인(無名詩人)의 동시(童詩)를 빌린 ‘밥과 오재미’를 통해 엿보기로 한다.
밥과 오재미
가을날 운동회는
너무나 신나
흰 천의 오재미
쌀을 넣어 던지면
콩을 넣어 던지면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이 아파요.
운동회 끝난 운동장엔
듬성듬성 오재미 서너 개
하얀 수건 쓴 어머니
말없는 얼굴로
한개 두개 주워서
밥을 지어요.
오재미 털어 만든
더운 오곡밥
나는 맛만 좋은데
울 엄마는 배부르다
저만 주세요.
|
------------------------------------------------
옛적 어느 마을 ‘나무국자’ 장수의 얘기를 소개하면서 파일을 덮을까 한다. 당시의 ‘국자장수’는 자신이 ‘국자’를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파는 행상(行商)이었다.
어느 날 이웃동네 김부자집 앞을 지나던 ‘국자장수’는 “나무국자 사이소”라며 호기(好氣)롭게 외쳤다. 김부자가 ‘국자장수’의 외침 소리를 듣고는 그를 들어오라 하여 ‘국자’ 세 개를 샀다. 하지만 김부자는 돈을 주려고 하지를 않았다.
국 자
그래서 ‘국자장수’는 왜 돈을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 부자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물건을 샀을 때 돈을 지불(支拂)하는 방법이 따로 있네. 산 물건(物件)에 쌀을 담아 주는 걸로 값을 대신하고 있지.”라며 너스레를 떤다.
‘국자장수’는 어이가 없었다. ‘국자’에 쌀을 담아 보았자 그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며칠 동안 열심히 만든 ‘국자’가 쌀 몇 ‘국자’와 바꾸어지다니….
‘국자장수’는 결국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하여 김부자집을 나왔다. 너무 억울해서 ‘국자’에 담아주는 쌀도 받지 않고 나왔다.
국자 장수
‘국자장수’는 너무나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복수(復讐)를 할 수 있을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그는 좋은 생각을 해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다시 물건(物件)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자’가 아니라 커다란 ‘짚광주리’를 만들었다. 몇 달이 지난 후 그 ‘국자장수’는 ‘짚광주리’를 들고 다시 김 부자네로 갔다.
그가 ‘국자장수’라는 것을 전혀 기억(記憶) 못한 김부자는 그에게서 또 세 개의 ‘광주리’를 샀다. 그리고는 물었다. “이 ‘광주리’ 값이 얼마인가?”
짚 광주리
‘국자장수’가 대답했다. “이 집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傳統)에 따라 파는 물건에 쌀을 담아 그걸로 값을 대신하지요.” 김부자는 그가 ‘국자장수’였음을 그제야 깨닫고 몹시 놀랐다.
그러나 많은 하인들 앞에서 공언(公言)한 자신의 약속을 뒤집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그 ‘광주리’에 가득하게 쌀을 담아 주어야만 했다.
광주리 만들기
-------------------------------------
광주리장수와 관련해서는 이에 관한 미담(美談)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광주리’ 행상으로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을 전북대(全北大)에 장학금으로 기탁해 감동을 안겨줬던 ‘광주리 할머니’, 고(故) 최은순 할머니의 얘기다.
최 할머니는 지난 40여 년간 혼자 살며 ‘광주리’ 행상(行商)과 삯바느질로 모은 재산 4억원을 1997년 전북대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獎學金)으로 기탁했다.
광주리 행상
당시 전북대 학생들은 ‘최은순 할머니를 사랑하는 모임(최사모)’를 구성했고, 1998년 최 할머니가 노환(老患)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매해 기일을 즈음해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최 할머니가 기증한 장학금(獎學金)은 현재까지 전북대 학생들에게 든든한 힘이 돼 주고 있는데, 1997년 2학기부터 매학기 10명의 학생이 ‘최은순 장학생’으로 선발(選拔)돼 75만원씩을 지원받고 있다.
---------------------------------------------
‘광주리’에 대한 음악 역시 동요(童謠)조차 없어 부득이 다른 노래를 선곡할 수밖에 없다. 옛적에 만들어진 도라지 타령에서 심심산천(深深山川)의 도라지는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가 철철 넘는다는 가사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바구니’를 지방에 따라서는 ‘광주리’라고 하는데, 용어의 적절성(適切性) 여부를 떠나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대바구니’도 ‘대광주리’도 모두 대나무로 만들어 비슷한 용도(用度)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였다. 회원님들의 양해(諒解)를 구한다. 지방마다 가사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어 가사와 노래가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거듭 양해를 바란다.
도 라 지
노래: 최숙자
①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의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로 반실만 되누나
[후렴]
에헤요 에헤요 에헤애야
어여라 난다 지화자 좋다
저기 저 산 밑에 도라지가 한들한들
②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은율 금산포 백도라지
한 뿌리 두 뿌리 받으니
산골에 도라지 풍년일세
③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강원도 금강산 백도라지
도라지 캐는 아가씨들
손 맵시도 멋 들어졌네
④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산유곡에 난 도라지
보라 꽃 남 꽃 만발하여
바람에 휘날려 간들대네
⑤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순진난만한 아가씨들
총각만 보면 낯붉히는
수줍은 태도가 더욱 좋네
⑥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뒷동산 엉큼바위에 난 도라지
꽃바구니 옆에 끼고
살랑살랑 캐러 가네
⑦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캐는 아가씨들
행주치마 휩싸 입고
오솔길로 돌아가네
⑧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이 도라지를 캐어다가
마늘 파 깨소금 양념하여
어룬님 공경에 힘을 쓰세
|
도라지 캐는 아가씨들
|
첫댓글 대작입니다. 광주리 오자미 국자 ....없는게 없네요..ㅎㅎ새참 중참 심부름도 마이 다니고...기다려지기도 했지요..사투리 얘기 듣다가 보면 옛날로 돌아간듯하네요...감상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중참과 새참은 같은 말이군요....."새"라는 말이 "사이"라고 생각하니...."중"도 "새"가 되네요..ㅎㅎ "놀 새가 없다"는 말 등으로 많이 썼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