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정현 목사님 학력이 날조되었다는 황당한 ‘나홀로 기자회견’에 대한 무교병 글을 놀래서 읽다가 그만 서있던 앞차의 뒤 범퍼를 가볍게 받았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생각했는데 코미디같은 행태를 보다가 그만 슬쩍 발이 풀렸나 봅니다. ^^
오늘은 오정현 목사님께서 대학부 수련회에 나타나셨다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을 접하네요.
참으로 희망적인 일입니다.
아마, 무교병이나 성도님들 중에는 자숙 기간에는 움직이지 않으시는게 좋지 않겠나 하는 선의의 걱정도 있으실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선한 싸움을 하시는 분들이 잊지 않으셔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도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를 공격하면서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의 논리를 잘 분석해 보십시오.
그들의 목사상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한편으로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다를 바 없으니 그들의 권위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지극히 평등주의적인 논리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도덕적 흠결을 공격할 때 그네들은 거의 성인과도 같은 목회자상을 기준점으로 제시합니다.
그들에게 목사란 ‘성자이거나 개’입니다.
분당중앙교회 반대파의 핵심 중에는 이상하게도 목회자 아들이나 딸들이 많았습니다. 목회자도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더 잘 이해해줄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그 반대였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마치 길에 휴지 한번 버린 적도 없다는 식의 상투적인 도덕성을 내세워 최종천 목사님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지요.
목사를 개라고 폄훼하는 것이나 성인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그다지 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권위에 대한 비틀린 태도는 대체로 이렇게 이중적인 잣대의 공존입니다.
목사님 개인의 추종자, 인간 우상숭배라는 욕을 먹었던 이쪽 성도들은 목사님에 대한 기대가 의외로 소박합니다. 이는 목회학에서 정말 연구해볼만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시간과 돈과 몸을 던져 목회자를 지키는 이들은 목사에 대한 환상이 별로 없었습니다.
얼마나 없던지 부목사님 중 한분은 이쪽으로 갈지 저쪽으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사납고 이단이나 할 소리를 하는 반대파도 싫지만 목회자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최사모(원포천)도 목회자의 자존심을 훼손한다.’
그렇다고 최사모가 반대파의 의혹을 믿었거나 반대파의 의혹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최종천 목사님을 맹목적으로 지지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지는 분명 신뢰에 기반했었습니다. 다만 유치부 아이들이 선생님이나 부모에게나 가질 그런 환상으로 목회자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옥한음 목사님은 성자이셨습니까?
한국 교회나 성도들이 옥한음 목사님에게 진 빚은 많지요.
한국의 크리스챤들의 마음에 옥목사님은 하나의 별처럼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최대 업적이 무엇입니까?
제자훈련입니까? 성경중심의 지성주의 신앙훈련입니까?
아마도 많은 크리스챤들이 저와 같다면 후계자를 찾아 세우고 스스로 물러나신 그 모습 자체가 현직에서의 수많은 업적을 능가하는 그분의 설교요 그분의 기도요 신앙이었다고 기억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 순전함의 신앙이 그분을 영적 거인으로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 번 일을 통해서 너무나 잔혹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랑의 교회의 자랑이자 한국 교회 전체의 자존심이기도 한 문제이기 때문에 참으로 안타깝고 그래서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옥목사님을 성자로 만드는 목적이 현직의 오정현 목사님을 깎아 내리기 위해서라는 걸 냉정하게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면서도 끝끝내 사랑하셨지만
사탄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은 쓰레기와 같고 그런 쓰레기를 사랑하는 것은 부조리하다고 고변하는 것이 인간을 가운데 놓고 벌어지는 주님과 사탄의 줄다리기라는 걸 성경은 보여줍니다.
최종천 목사님이 법적으로 당회장을 회복하기 전에
원포천의 회원들은 회원이 운영하는 식당을 하루 빌려서 최종천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했습니다.
최종천 목사님으로서는 사표를 내시고 신문이고 인터넷에 성추행 목사로 보도가 나간 이후 얼굴이 알려져서 편하게 찾아갈 예배처소조차 없이 지낸 반년 이후에 부흥회를 인도하시게 된 셈입니다.
선한 의도로 많은 분들이 이 부흥회를 만류했습니다.
반대파가 난리칠 게 뻔하고 목사님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던 노회 어른들에게 자숙하지 않고 나대는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라는 합리적인 우려였습니다.
게다가 아직 의혹과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있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다’라는 반대파의 집요한 주장을 증명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목회를 통해서 회복한다는 원포천 리더들의 신념으로 강행한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부흥회는 성공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강하게 임재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느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목사님의 회복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목사님을 내쫓은 사람들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목사님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았던 이들이었습니다.
암에 걸렸거나 자녀가 대학 갈 때, 군대 갈 때 마다 목사님을 모시고 기도를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사납고 맹렬하게 목사님을 찔렀습니다.
인간이라면 어찌 좌절감이 없겠습니까?
배신감과 억울함이 불쑥 불쑥 치밀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이란 일을 당하면 분노하다 좌절하고 그리고 결국 만성적인 우울증으로 갑니다.
이 싸움에는 많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많은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그런 인물들을 곳곳에 숨겨 놓고 때마다 들어 올려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의 한 복판에 있는 분은 최종천 목사님 본인이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분이 멈칫하고 물러날 때만 반대파는 성공했고
목사님이 일어나시고 굳건히 서실수록 그들은 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얼핏 보면 여러 기관이 여러 이해당사자가 이 싸움을 좌우하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목사님 한분의 의지에 달려있기도 한 단순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잘 아는 이들이 바로 이런 싸움을 수없이 치루면서 많은 교회를 넘어뜨려본 매뉴얼을 갖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공격이 당회장 목사 한 분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은 우연이 결코 아닙니다.
겁주고 질리게 하고 좌절하게 해서 그 한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면 곧바로 그들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유도의 한판승처럼 지금까지의 점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이 자리를 지켜야 하나’라는 선량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게 될 그 마음을 지렛대 삼아 교회 점령이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그들은 때로 여론을 무시하면서까지 폭주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마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소송도 거짓도 폭력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정현 목사님이 대학부 수련회에 나타나셨다는 소식이 희망적인 이유입니다.
목사님에게 자숙이라는 말이 더 이상 강박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놓임을 허락받으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회복을 생각한다면 이를 당연히 환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이 다니시도록 독려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목사님을 성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부담스런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신뢰를 기반으로 사랑으로 품어주는 성도들과의 눈 맞춤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이미 판단은 넘치도록 받으셨습니다.
사랑은 어느 정도는 연민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아이의 사랑보다는 다 큰 자식이 늙은 부모에 대해 갖는 그것이 사랑의 정의에 더 가깝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닮았을 겁니다.
이제 큰 싸움이 임박했습니다.
주제넘지만 이 싸움의 최전선에서 지휘봉을 갖고 싸우실 분은 바로 오정현 목사님이시라는 걸 분당중앙교회의 사례를 통해 말씀드리고자 이 글을 썼습니다.
기도로 또한 정성으로 그분의 몸과 마음을 지켜드리십시오.
오정현 목사님이 스스로 물러서지 않는 한 결코 지는 싸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 교인이지만 그래도 한번 외쳐 봅니다.
오정현 목사님 사랑합니다.
오정현 목사님 파이팅 !!!
사진설명 노회 정치국에서 최목사님을 조사하려고 부른다는 소식을 듣고 6개월만에 목사님을 가까이서 보려는 원포천 열혈 성도들이 현수막을 들고 8시간 동안 노회앞에 대기하는 모습. 뉴스엔조이가 광적이라는 뉴앙스로 소개 (2011. 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