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 부산 지하철 1호선 1단계(동래구 청룡동-부산진구 범7동간) 개통
부산광역시에서도 늘어나는 교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1981년 1월 지하철건설본부를 설치하여 같은 해 6월 13일 1호선을 착공하였다.
1호선은 1985년 7월 19일에 노포동역~범내골역의 1단계 구간이 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1994년 서대신동역~신평동역의 4단계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노포동역~신평동역을 연결하는 34개 역 32.5㎞가 완전 개통되었다.
2호선은 1단계로 1991년 11월 28일 호포역~서면역의 22.4㎞ 구간이 착공되어 1999년 6월 30일 개통되었고, 2단계는 서면역~금련산역의 8㎞ 구간이 2001년 8월 8일 개통되었으며, 2002년 8월에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밖에 3단계인 호포역~북정역의 11.1㎞ 구간도 2006년 완공될 예정이다. 1996년 착공된 3호선은 대저역~수영역의 18.3㎞ 구간이 2005년 12월에, 미남 로터리역~반송역의 11.2㎞ 구간은 2007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건설중이다.
(1974년 8월 15일 발행된 '서울지하철 종로선 개통기념' 우표를 참고로 올려보았다.)
1981년 --- 한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1982년 9월 4일 발행된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기념' 우표를 참고로 올려보았다.)
1980년 ---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
인류최대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대회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미국을 위시한 세계 약 60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레닌 스타디움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 당서기장은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을 통제하기 위해 레닌 스타디움 주위를 경찰과 군인들로 벽을 쌓은 뒤 개막을 선언, 동서 냉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대회는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시작된 이래 사상최초로 공산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전해인 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 서방국가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철퇴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자 이에 미국을 위시한 서독 일본 등 스포츠 강국이 올림픽대회를 보이콧함으로써 스포츠제전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고 만 것이다. 당초 소련은 최고 최대의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모스크바올림픽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81개국 선수 5326명만이 출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대회 스타는 소련의 남자체조 선수 디디아틴이었다. 그는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얻어 가장 많은 메달 획득수를 기록했다. 이로써 소련은 6백30개의 메달 중 1백95개, 1백27개의 금메달 중 80개를 따내며 1위를 차지했다. (chosun.com-인용)
(1982년 발행- 'Kremlin Tower, Moscow')
1979년 --- 여자 양궁선수 김진호, 세계양궁선수권대회 60m 더블라운드서 세계 신기록 수립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 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언론도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 "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1984년 서향순, 1988년 김수녕, 1992년 조윤정, 19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chosun.com-인용)
(1984년 7월 28일 발행된 '제23회 올림픽대회 기념' 우표를 참고로 올려보았다.)
1977년 --- 중국 정치지도자 덩 샤오핑(鄧小平) 복권
모택동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된 이듬해 1977년 7월 22일 '부도옹' 등소평이 세 번째로 부활하여 당 부주석으로 복권됐다. 등소평은 1976년 제1차 천안문사태를 초래한 책임으로 세 번째 실각했었다. 첫 번째 실각은 1933년 왕명 등 좌파의 당 중앙에 의한 모택동 비판 때문이었고, 두 번째 실각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였다.
급진적인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파탄을 가져온 1960년대 초 등소평은 '백묘흑묘론'으로 알려져 있는 현실주의적인 경제조정책을 중시했으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 유소기 다음가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내 제2의 실권파'로 지목되어 실각했었다.
연금과 노동으로 연명하다 1973년에 모택동의 배려로 국무원 부총리로 부활, 1975년에 중앙군사위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 당 부주석,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으나 강청 등 '4인방'과의 첨예한 대립으로 제1차 천안문 사태 때 배후자로 지목되어,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chosun.com-인용)
1965년 ---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전 대통령, 망명지 하와이서 별세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별세했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 간부로 활약했다. 1910년 일본이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자 귀국해 이상재 등과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기독교 학원과 독립 군관 학교를 세웠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초대 대통령에 추대됐고,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됐다. 19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됐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 마우나라니병원에서 요양 중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chosun.com-인용)
1952년 ---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인구 36만7천명에 불과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제15회 올림픽이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됐다. 69개국 5,871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최대의 화제는 처음 참가한 소련이었다. 소련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스포츠 대국 미국의 76개 금메달에 이어 71개의 금메달을 획득, 스포츠세계에서도 미소대립의 시대를 열었다. 개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펙이 화제였다. 자토펙은 육상 5천m, 1만m 우승에 이어 마라톤에서도 우승, 세계를 감동시켰다. 자토펙 부인 다나도 투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육상·역도·복싱·사이클·레슬링·승마 6개 종목에 참가하여 37위를 차지했다. (chosun.com-인용)
(1975년 발행-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움에 있는 핀란드의 올림픽 영웅 Paavo Nurmi의 조각상-조각가 Waino Aaltonen의 작품)
1949년 --- 프랑스, 라오스 독립 승인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부에 있는 내륙국으로 정식명칭은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Laos People's Democratic Republic)이다. 수도는 비엔티안이고 공용어는 라오어이다. 동쪽으로 베트남, 남쪽으로 캄보디아, 서쪽으로 타이, 북서쪽으로 미얀마, 북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접한다.
1938년 --- 최초의 우리말 사전(문세영) 발간
(1946년 10월 9일 발행된 '한글 500년 기념우표'를 참고로 올려보았다.)
1895년 --- 중국의 유명한 화가, 예술교육자 쉬베이훙(徐悲鴻, 1895~1953) 출생
저장성(浙江省) 출생. 1917년 일본에 유학하고, 1918년 베이징대학교 화법연구회 강사로 있다가 그뒤 쿵더학원(孔德學院) 교수가 되었다. 1919년 파리에 유학, 1927년 귀국한 후 1929년에는 난징(南京) 국립중앙대학 예술계 주임교수가 되었으며 1930년 이후 유럽 각지에서 중국근대화전을 개최하고, 1934년 소련을 방문, 1949년 중국의 중앙미술원 원장이 되었다.
주요작품에 《우공이산(愚公移山)》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 등이 있다.
1893년 ---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초기의 지도적 시인 마야코프스키(Vladimir V. Mayakovsky, 1893~1930) 출생
그루지야 출생. 임무관(林務官)의 아들로 중학 시절에 모스크바로 가서, 볼셰비키의 비합법활동에 참가하여 3회나 체포당한 뒤, 화가가 되려고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곳에서 미래주의의 화가 ·시인 브르뤼크와 알게 되어 시작(詩作)으로 전환하였다. 혁명 전의 작품으로는 장시 《바지를 입은 구름》(1915) 《배반의 플류트》(1916) 《전쟁과 세계》(1917) 《인간》(1918) 등이 있다. 그는 또 프레브니코프나 카멘스키 등과 더불어 러시아 미래파(未來派) 예술운동의 중요한 추진자이기도 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에도 계속 시와 시극, 그리고 희곡 등을 발표하였으며, 소련은 물론 유럽 각지와 멕시코 ·미국 등지로도 여행하였다.
만년에는 문학계 재편성 물결에 밀려 고립하게 되었고, 불행한 연애로 고민한 끝에 자살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러시아 미래파의 전통 거부와 기술 중시의 영향이 두드러지고, 동시에 독특한 시형과 격렬한 비유, 그리고 풍자와 내성(內省)이 나타나 있으며, 서정과 서사의 기적적인 결합이 엿보인다. 그는 그 후의 소련의 시인뿐 아니라 금세기 세계 각국의 시인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시에 신선한 영역을 개척해 놓은 시인이다. 시작품 이외에도 시극 《미스테리아 브프》(1918), 희곡 《빈대》(1929) 《목욕》(1930) 등이 있다.
1877년 --- 스웨덴의 민속학자, 고고학자 노르덴시욀드(Erland Nordenskiöld, 1877~1932) 출생
지리학자인 노르덴시욀드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행을 좋아하였으며, 형 G.E.A.노르덴시욀드가 콜로라도에서 고고학 조사에 성공한 것에 자극받아 남아메리카 각지에서 민족학적 고고학 조사를 하였고, 특히 그란차코족에 관한 조사를 할 때는 주민과 함께 생활하였다. 1914년 예테보리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남아메리카 여러 종족의 토속품 수집과 분포권적(分布圈的) 진열방법에 진력하였다. 저서에는 《Indianer och hvita inord stra Bolivia》(1911) 등이 있다.
1876년 --- 오스트리아의 총리를 지낸 로마 가톨릭 사제 자이펠(Ignaz Seipel, 1876~1932) 출생
1922~24, 1926~29년 2번에 걸쳐 오스트리아 총리를 지냈다.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의 싸움에서 파시스트당의 정규군을 지원한 하임베르를 이용했는데 그 결과 오스트리아에서 파시즘 세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1899년에 서품을 받고 1918년 오스트리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잘츠부르크대학교와 빈대학교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진 뒤 기독교사회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기독교사회당이 군주제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공화론자로 갈라지는 것을 막았다. 1922년 5월 대(大)독일당에 가입하여 그의 첫번째 정부를 수립했다. 동맹국들의 감독하에 경제·행정의 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오스트리아를 위해 국제연맹으로부터 1억 달러를 확보했다. 디플레이션(통화수축)을 억제했지만 그의 노력은 지방 행정부와 자신의 당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
1863년 --- 오스트리아의 작가, 극작가 바르(Hermann Bahr, 1863~1934) 출생
린츠 출생. 빈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법률 ·역사 ·경제학 등을 공부하였으며,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각국을 돌아보고 견문을 넓혔다. 시인으로서는 처음에 홀츠의 감화를 받아 자연주의를 따랐으나, 그 후에 ‘젊은 빈’의 중심적 존재가 되어 《자연주의의 극복 Die berwindung des Naturalismus》(1891)을 발표하였다. 또한 잡지의 간행과 무대감독 등, 항상 시대의 첨단에 서서 새로운 사조를 흡수하여, 마침내 《표현주의 Expressionismus》(1914)를 저술하여 ‘독일문단의 카멜레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834년 --- 발레리나 그림과 소묘의 대가인 프랑스 화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 출생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8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 ·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1883년의 생애를 마쳤다. 파리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된 대표작 《압생트》(1876) 《대야》(1886)를 비롯한 많은 작품를 남겼다.
(1960년 발행-드가의 자화상, 1970년 발행-'Dancer with Bouquet')
1819년 --- 독일 태생의 스위스 소설가 켈러(Gottfried Keller, 1819~1890) 출생
취리히 출생. 직공의 아들로 15세 때 취리히공업학교에서 교사배척사건에 관계하여 퇴교당한(1834) 후 독학으로 공부했다. 화가가 되려고 뮌헨에 유학하였으나(1840),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1842년 귀향하여, 많은 시인과 사귀는 동안에 문학에 뜻을 세우게 되었다. 스위스 망명 중 혁명시인의 영향으로 급진적 정치시를 지어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 1848년 취리히 주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수학(1848∼1850), 철학자 L.A.포이어바흐의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강의’를 듣고 세계를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소설로 전향하여 1854∼1855년 인세를 선불받고 자전적인 장편 교양소설 《녹색의 하인리히 Der grne Heinrich》의 구판(舊版)을 썼다. 베를린 시절에는 이 밖에도 《신시집(新詩集)》, 단편집 《젤트빌라의 사람들 Die Leute von Seldwyla》의 제1부(1856)를 썼는데, 여기에는 5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1855년 취리히주(州)의 1등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15년간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7개의 성도전설(聖徒傳說) Sieben Legenden》(1872) 《젤트빌라의 사람들》(제2부, 1873∼1874) 《취리히 단편집 Zricher Novellen》(1878~1879), 단편집 《우시(寓詩) Das Sinngedicht》(1882) 《푸른 하인리히》의 개작(改作), 소설집 《격언시(格言詩)》 《전시집(全詩集)》, 장편소설 《마르틴 잘란더 Martin Salander》(1886) 등이 출판되었다.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는 유언으로 인세의 제1상속인을 취리히 주정부로 정함으로써 주정부에서 받은 은혜에 보답하였다.
1799년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 '로제타 스톤' 발견
1799년 7월 19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가 나일강변 전략요충지 로제타에서 요새 터 파기를 하던 중, 한 장교가 문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가로 72㎝·세로 114㎝ 크기의 검은 현무암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돌에는 54행의 그리스 문자와 이를 번역한 이집트 상형문자, 서민들이 즐겨쓰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중요한 돌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었건만 2년 뒤 영국군에 패배하는 바람에 돌은 영국으로 넘어가 대영박물관에 보관됐다.
그때까지도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지 않은 터라 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프랑스의 샹폴리옹도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해독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상형문자가 '의미'를 표현하는 표의(表意)문자라고 생각한 데 반해 샹폴리옹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表音)문자일 수 있다며 주류와는 다른 연구방법을 선택했다. 돌에 쓰여진 그리스 문자는 돌이 기원전 196년에 제작됐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비임을 확인해주었다. 상형문자에도 반드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이 들어있을 것으로 믿은 샹폴리옹은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한 기호에 주목했다. 어렵게 해독한 결과 왕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제2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린 오벨리스크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도 찾아냈다. 이로써 로마인의 역사책에서나 등장하던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이집트 역사에서도 생생하게 살아나게 됐다.
샹폴리옹의 발음기호 찾기는 1822년이 되어서야 27개 파라오(왕)의 이름과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모두 밝혀낼 수 있었다. 이집트 5000년의 신비가 풀리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chosun.com-인용)
(1990년 발행-1822년 로제타 스톤을 해독한 프랑스의 샹폴리옹 우표를 참고로 올려보았다.)
1573년 --- 영국의 고전적인 건축 전통을 수립한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존스(Inigo Jones, 1573~1652) 출생
런던 출생. 1596∼1604년 이탈리아에서 회화 및 무대미술을 배운 후 귀국하여 궁정에서 의상(衣裳) 디자인에 종사하였다. 또한 가면극을 연출하고 원근법에 의한 배경·장면의 변화를 나타내는 회전무대 사용을 소개하여 영국 연극계에 큰 공적을 남겼다.
1613∼1614년에 재차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로마 및 르네상스 건축, 즉 A.팔라디오의 고전주의 건축을 연구하고 그 양식을 도입하여 새로운 면을 열고 17세기 영국건축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귀국 후 1616년에 궁정 건축 총감독관으로 활약하였다. 후에 청교도혁명으로 지위를 잃게 되어 만년은 실의 속에 궁핍한 생활을 보냈지만, 영국 국민에게 신격화된 건축가로서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주요작품으로 그리니치의 《왕비관 Queen house)》, 런던에 있는 화이트홀(White Hall)의 《향연전(饗宴殿)》 《코번트가든》 《세인트폴 교회당》, 펨브로크 백작의 《윌튼 하우스》 등이 있다.
1374년 ---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 사망
토스카나주 아레초 출생. 아버지 페트라코로는 피렌체의 서기였으나, 귀족옹호파인 흑당(黑黨)으로부터 추방당했으므로 페트라르카는 망명지에서 태어났다. 1311년 피사로 이사하였으며, 그 후 아비뇽으로 갔다. 몽펠리에 및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아비뇽으로 돌아가 교황청에서 직업을 얻었다. 여기서 시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연애 경험이었다. 1327년 성키아라 교회에서 라우라(Laura:?∼1348)라는 여성을 만나 연애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평생 그녀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또한 교황청의 방대한 장서를 탐독함으로써 교양을 쌓았다.
30세를 넘길 무렵 그에게 예술적 성숙기가 찾아와 1337년 라틴어 서사시 《아프리카 Africa》의 집필을 시작했으나, 같은 해 로마의 여행에서 자극받은 고대에 대한 애착이 성숙해졌다. 현실 사회에 대한 혐오에서 이상으로 하는 고대의 연구였다. 여기서 이 시인의 인문주의의 밑뿌리를 받견할 수 있다. G.보카치오도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였다. 1341년 로마에서 계관시인(桂冠詩人)의 영예를 안았다. 이듬해 프로방스에서 그의 사생아가 태어나 주교(主敎)였던 그의 동생 게랄도의 개입으로 그에게 정신적 위기가 찾아왔다. 이때에 성아우구스티누스와 대화형식으로 자기의 고민을 고백한 라틴어 작품 《나의 비밀 De secreto conflictu curarum mearum》(1342∼1343)을 집필하였다.
1347년 로마에서 일어난 콜라 디 리엔치(Cola di Rienzi)의 반귀족정치의 혁명을 지지하였으나 그 혁명은 좌절하고 말았다. 이듬해 파르마 체재 중 라우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지상(地上)의 것은 덧없음을 호소하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만년에 그는 아르쿠아에 은퇴하여 단테의 《신곡(神曲)》을 모방한 이탈리아어 작품 《승리》를 집필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당시 속어였던 이탈리아어 작품을 경시했던 그를 불멸의 시인으로 만든 것은, 1342년경부터 집필한 이탈리아어로 된 서정시 《칸초니에레 Canzoniere》이다. 지상의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전면적 헌신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그의 고민에 찬 의문이 발생한다. 그의 경우 지상의 것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생전과 사후의 라우라로 가득 채워진 이 서정시집은 인간적인 것, 성스러운 것의 투쟁의 증거로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미녀 찬양과 쪼아 다듬은 시풍은 소네트의 한 극치로서, 후년 ‘페트라르카 시풍(petrarchismo)’이란 이름으로 서유럽 각국의 시인의 규범으로 숭앙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