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고(祖考) 삼진(三鎭)공 외(外) 5위(位)
예산 추모공원 봉안 고유제
2021. 9. 4.(토요일)
오전 11시 충남 예산군 응봉면 평촌리 35에 있는 예산군 추모공원 수선화 묘역 2-9에서 안동김씨 태사공 후예 26대손, 휴암공 11대손인 휘(諱) 삼진(三鎭)공 외 5위(位)에 대한 유골함 봉안 고유제를 올리었다.
작년 5월 15일 충남 예산군 삽교읍 신가리 백현산에 계시던 할아버지 휘 삼진공과 할머니 영산신씨(靈山辛氏) 남순(南順), 작은 할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 경순(庚順), 아버지 휘 득한(得漢)공과 뒤각골 말무당에 계시던 작은아버지 휘 의한(義漢)공과 작은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진표(眞杓)의 산소를 우중에 조우화(厝于火)하여 예산군 추모공원안에 있는 추모관에 임시 봉안하였었다.
그리고 7월 17일 가족묘단 추첨에서 불운하게도 낙첨(落籤)되어 기다렸는데 금년 5월에 다시 추첨에서 예비 8번으로 사촌 진동아우가 당첨(當籤)이 되어 오늘 11시에 가족묘역인 수선화 묘역 2-9에서 봉안의 예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원래는 할아버지 자손들이 5대에 걸쳐 수십명에 이르러 모두 모여 성대하게 봉안례를 올리려 하였으나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방염 관계로 부득이 여섯명 까지만 허용이 되어 조졸하게나마 고유제를 올리게 되어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 미국으로 출가하였던 조카딸 아현(雅顯)이가 귀국하여 증손자를 대표하여 제를 올리게 되어 마음이 편하였다.
제수품(祭需品)도 북어포 하나만을 허용하여 단배 독축으로 고유제를 올렸다.
고유축문은 대종중 중앙회장을 역임하시고 안동김씨 대동보 9간(刊)을 한글화하여 집필하고 전산화를 실현한 명지대 석좌교수인 위현(渭顯) 교수가 초(抄)해 준 고유문을 독축(讀祝)하였다.
고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追慕園墓壇告由文(原文)
維檀君紀元四三五四年辛丑八月五日戊午朔初五日壬戌冑孫官東
敢昭告于
顯祖考學生府君
顯祖妣孺人靈山辛氏南順
顯祖妣孺人東萊鄭氏庚順
顯叔父學生府君
顯叔母孺人南陽洪氏眞杓之壇 伏以
恭惟列祖太師公後裔孫生被蔭德死厚靈安孝悌信讓世傳宗訓溫恭慈厚稟性賦天以敬修齊以孝養親模欑行實膾炙鄕人誠以奉祭恭以接賓棣鄂其情友愛兼全敦宗睦族助相保出處分明鄕黨遵模守羲率家婦德內助世守箕裘義方子敎襄奉各處歲久守護歲薦一祭禮當瞻掃子孫不敏事勢不逮擇地明堂設壇于玆引靈導魄於此奉祭列祖尊靈不驚不駭鳴呼列祖妥靈于此永世不絶庇孫護家謹涓吉日設饌焚香獻酌敢告厥由伏惟先靈陟降於斯庶畿歆格 尙 饗
追慕園墓壇告由文(추모원묘단고유문)
維檀君紀元四三五四年(유단군기원사삼오사년)辛丑八月五日戊午朔(신축팔월오일무오삭)初五日壬戌(초오일임술)冑孫官東(주손관동) 敢昭告于(감소고우)
顯祖考學生府君(현조고학생부군)
顯祖妣孺人靈山辛氏南順(현조비유인영산신씨남순)
顯祖妣孺人東萊鄭氏庚順(현조비유인동래정씨경순)
顯叔父學生府君(현숙부학생부군)
顯叔母孺人南陽洪氏眞杓之壇(현숙모유인남양홍씨진표지단) 업드려서
恭遜(공손)히 생각해보니 여러 祖上(조상)님들께서는 太師公(태사공)의 後孫(後孫)으로서, 살아서는 祖上(조상)님들의 隱德(은덕)을 입으셨고, 돌아가셔서는 魂靈(혼령)이 平安(평안)하게 계셨습니다. 孝道(효도)와 恭敬(공경). 믿음과 辭讓(사양)하는 것을 宗訓(종훈)으로 삼아서, 溫和(온화)하고 恭遜(공손)하며 仁慈(인자)하고 厚德(후덕)한 稟性(품성)을 하늘로부터 받으셨습니다. 恭遜(공손)으로 修身齊家(수신제가)하셨고, 孝道(효도)로서 父母(부모)님을 奉養(봉양)하셨습니다. 바르고 模範(모범)된 行實(행실)은 膾炙(회자)되었습니다. 精誠(정성)으로 祭祀(제사)를 받들었으며 恭遜(공손)함으로 손님을 接對(접대)하였습니다. 兄弟(형제)간에 그 情(정은) 友愛(우애)를 온전히 하셨고, 家族(가족)간에 敦睦(돈목)하셔서 서로도와 家門(가문)을 保存(보존)하셨습니다. 出處(출처) 行藏(행장)이 分明(분명)하시니 마을과 뭇사람이 그 模範(모범)됨을 따르고, 義理(의리)를 지켜 집안을 거느리시니 婦德(부덕)이 있는 아내로서 內助(내조)를 잘 하셨습니다. 두 곳의 墳山(분산)에 葬禮(장례)를 모신지 歲月(세월)이 오래 되도록 守護(수호)하였습니다. 해마다 한번 祭祀(제사)를 올리면서, 禮儀(예의)상 當然(당연)히 墓所(묘소)를 살펴야 하나, 子孫(자손)들이 不敏(불민)하고 時世(시세)의 形便(형편)이 미치지 못해서, 後孫(후손)들의 協議下(협의하)에 明堂(명당)터를 골라서 이곳에 墓壇(묘단)을 만들었습니다. 이 자리로 魂靈(혼령)과 魂魄(혼백)을 引導(인도)해 모시고 이곳에서 祭祀(제사)를 받들고자하오니, 여러 祖上(조상)님들의 尊靈(존령)께서는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아! 여러 祖上(조상)님께서는 이곳에서 魂靈(혼령)이 便安(편안)하게 계시면서, 永世(영세)토록 끊이지 않고 자손들을 도우시고 家門(가문)을 保護(보호)해 주십시오, 삼가 좋은날을 받아 祭需(제수)를 作滿(장만)하고 향불을 피우고 잔을 올려 감히 고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先祖英靈(선조영령)께서는 이곳에 오르내리시면서 부디 歆饗(흠향)하소서, 尙(상) 饗(향)
고유제를 올리고 점심때가 되어 삽교 읍내 만수장 식당으로 가 삽교의 별미인 곱창찌게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둘째아우 내외는 고향집으로 가고 셋째아우는 잿뜰 셋째 처남네서 도정한 쌀을 막내 아우네 것과 함께 가지고 가고 나는 진동이 사촌과 함께 승리 정육점에 들러 추석 차례용 국거리로 양지머리 고기와 잡뼈를 산 뒤 처남댁에 들러 쌀을 싣고 서해고속도로를 경유하여 낙성대 뒤에있는 인현아파트에 사촌아우를 내려 주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5시가 거의 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