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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동기들은 예전 학교 다닐 때 자신이 속한 클럽활동 부서가 뭔지 기억하는가?
요샌 클럽이 아니라 순 우리말을 써서 동아리라고 하는데 사실 난 별 기억이 없다.
예전 우리의 학교 졸업앨범 뒤편에 보면 여러 클럽별로 모여서 나름대로 똥폼을 내며 사진을 찍은 것들이 있는데 원래 3학년이면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대부분 그런 시간은 자습시간으로 돌리고 나중에 사진만 찍는 게 관례적 이었다.
실제로 우리도 중학교 졸업시에 그냥 반별로 남녀를 나눠서 대충 부서별로 사진을 찍고 말았었다.
하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도 나도 내가 독일어회화반 인줄 처음 알았다.
개떼처럼 모여서 독일잡지를 펴놓고 진지한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그 잡지에 차범근의 사진이 있었던게 어렴풋이 생각날뿐이다.
요새도 내가 맡은 부서가 영미문학반이지만 문학보다는 영화에 더 많은 투자를 해서 거의 늘 새로운 무비를 보여주는게 내 일이기도 하다.... 음.... 머 어쩌라고.....
근데 말이다 우리의 중학교 앨범에 나와 있는 클럽활동은 문예반이니 축구반이니 나름대로 그럴듯한 공식적인 부서였는데 딱 한 장의 사진에 나와 있는 부서는 전혀 공식적이지도 않고 불량하기 그지없는 놈들을 모아놓고 있는데 그것은 “육상반”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체불명의 부서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냥 사진사가 사진을 찍어 주니까 당시 100키로구라무 가까이 나가던 그 돈키호테 체육쌤이 몇 명을 허수아비 모양으로 죽 세워놓고 갑작스레 찍은 것 같다.
그런데 거기 서 있는 놈들이 그냥 모여든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 놈들은 그해 6월 초 어느 날 당시 우리가 공설운동장이라 부르던 서문통의 넓디 넓은 운동장에 가서 나름대로 학교를 대표해서 뜀박질한 경력자들이었으니 담배를 피웠으나 아직은 싱싱했던지 100미터를 곧잘 뛰었던 골초와 단거리의 마라톤이라는 400미터를 뛰었던 나와 보현산 놀개이를 쫓아 맨손으로 때려잡는 실력으로 800미터를 가볍게 달음박질 치던 깐채이와 뛰는 모습이 이번 세계육상선수권 마라톤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우간다 선수를 무척이나 닮았던 서울에서 이빨을 만드는 놈과 유난히 큰 머리통을 흔들거리며 멀리뛰기를 했던 대석이와 하늘을 무척 날고 싶은 이카루스를 닮고자 했지만 지금은 백두급 씨름선수가 어울릴 찬모가 그들이었으니 나름대로 모두 해당 종목에서 입상을 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 열린 계주에서 조차 2위로 들어와 항상 인상을 쓰고 다니던 체육쌤을 잠시나마 미소짓게 만들었었다.
그날 결국에는 단체상까지 하나 먹고 흐뭇하게 운동장을 떠나올 때 저 멀리 산위의 S여고 누님들이 우리를 보고 놀다 가라는 손짓조차 반갑기 그지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산뜻하게 새로 만들어진 영천공설운동장>
그리하여 다음 주 운동장에서 열린 조회에서 이름조차 정겹던 김삼수 교장쌤이 직접 상장을 전해주면서 두드려 주던 어깨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전교의 모든 여학생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은 착각을 하며 임금님의 자리끼를 떠다드리다가 갑자기 성욕이 발동한 주상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겁탈을 통해 승은을 입게 되는 무수리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며 황홀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었다. 아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1등을 먹은 손기정 할배나 1974년 남아공 더반에서 챔피언을 따먹고는 국제전화로 즈그 엄마에게 “챔피언 먹었다!”고 외치던 홍수환 보다도 더 우쭐했었으리라.
하지만 늘 아름다운 미담 뒤에도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냄새나는 스토리가 숨어 있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쯤은 이 나이의 평균적인 우리들은 다 잘 알고 있는 법이다.
그리고 또 우리가 누구였던가?
그야말로 찐빠로 똘똘 뭉친 천하의 무적 꼴통들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하니 대다수의 동기들은 모르겠지만 그토록 자랑스러운 모습 뒤에도 쪽팔리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꼴통짓꺼리”를 “트리오”로 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세월도 오래 지났으니 그때 기억을 되살려 우리가 저지른 띨빵하기 그지없는 짓을 말해 주리라.
우리가 출전했던 그 대회의 명칭은 어느 놈이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3회 학교간경기 그룹대회” 였으니 우리가 조금이라도 똑똑했으면 그 명칭에서 대회의 성격을 파악했으련만 무식하기가 우리나 그 체육쌤이나 별로 다를게 없어서 이 후 벌어질 멍청이 짓이 구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대회는 여러 학교를 규모별로 두 개 그룹으로 나누어서 실력을 겨루게 하였으니 시내의 큰 학교들을 한 그룹으로 묶고 고만고만한 학교를 또 한 그룹으로 묶어 그룹내에서 경쟁하게 했다.
문제는 그런 시스템이란 걸 우리는 전혀 모르고 그냥 뭣 빠지게 뛰는 게 다였다는 점이다.
당시 대회 운영 시스템은 우선 실제 최종 결승인 각 그룹내 경기를 진행하여 순위를 결정짓고(사실 이게 대회의 끝이다) 전년도와 비교하여 경기력의 상승도를 알아보기 위해 우수 입상자를 대상으로 한 번 더 뛰게 해서 “그냥 기록을 재는” 짓을 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그걸 알 만큼 똑똑하지도 못했고 그냥 두 번씩 경기를 하라니까 하는 것 뿐 이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 중에서 세 놈이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웃기는 짓을 하게 되었다.
흑ㅠㅠㅠ 지금생각해도 눈물이 다 난다.....
시바 하여튼 사내를 눈물짓게 하는 것은 과거의 추억이요 지난날의 멍청한 짓이니 그게 떠나버린 여자든 머든 다 그런벱이다!!!
맨 먼저 얼빵한 짓을 저지른 놈은 지금 횟칼을 휘두르는 창원에 사는 그 놈이다.
그놈은 800미터에 출전하여 싸이나 먹고 마지막 발악하는 토끼새끼처럼 잘도 뛰었지만 하필 그게 탈이었다. 우리도 그랬지만 그 놈도 두 번씩이나 경기를 하라니까 첫 경기는 당연히 예선인줄 알았고 당연히 결선에 진출할 정도로만 뛰고 체력을 비축했다.
놈은 그날의 경기를 위해서 평소 즐겨보던 ‘썬데이서울’을 일주일간이나 끊고 다리에 힘을 길렀으며 결선을 위해 예선에서는 힘을 아꼈다.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3관왕을 먹은 볼트라는 놈도 예선과 준결승에서는 일부러 살살 달리지 않았던가! 따라서 세계적인 선수가 그러하듯이 놈도 나름대로 “전략”을 세워 경기를 운영했으니 기특하다 할 만하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기나 우리가 생각한 “예선전”에서 2등으로 가볍게 통과한 놈은 “결선”에서 죨라 달려서 1등을 했으니 그 순간 자신의 전략이 성공한 것을 그 놈은 얼마나 흐뭇했겠는가....
놈은 아마 그때 적벽대전에서 고육지계(苦肉之計)와 화공(火攻)작전이라는 잔대가리를 굴려 조조의 백만대군을 한방에 훅 가버리게 만든 주유보다도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랬지 않았는가!
예선이라 생각한 그것이 실제 결선이고 결선이라 생각한 그것은 단순한 기록계측에 지나지 않다고......
잠시뒤 당연히 자기는 1등이라고 생각한 놈에게 주어진 것은 그냥 2등이었으니 놈의 팔자도 기구하기 그지 없다. ㅎㅎㅎㅎ
놈은 지금도 한 달에 한번씩 여자들이 매직에 걸리듯이 그때 자기의 금메달을 도둑맞았다고
주기적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으며 그 순간마다 죄없는 물고기의 모가지를 가차 없이 따면서 화를 삭히고 있다.
하긴 이천 수백년전에 저 대국땅에 살았다던 항우라는 놈도 결국 지 잘못으로 유방과의 다이다이에서 지고도 엉뚱하게 하늘의 운이 다 했다고 헛소리를 했다하니 깐채이 이 놈아 누구를 욕하리.... 그게 다 니 운명이고 팔자인 것을!
ㅎㅎㅎ 글케 처음부터 졸라뛰지 그랬어! 전략은 무슨 놈의 전략....
가끔은 멧돼지 장비의 무식한 저돌성이 꾀돌이 제갈량보다 전투에서는 나은 벱이여!!!!!
깐채놈이 녹쓸어 뻑뻑한 골통을 짜내어 전략을 쓰다가 오히려 당했지만 또 다른 한 늠은 꼴찌를 하고도 1등을 했었으니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런 일이 그날 실제 있었다! 지금부터는 그런 늠의 이야기를 해 주겠다.
유난히 맑고 푸르렀던 영천시내의 하늘아래 수많은 여자들이 뿜어내는 분냄새를 맡아 이미 헤벌레한 기분으로 공설운동장으로 들어간 그 늠은 깐채이와는 달리 첫 경기부터 아부지의 지게작대기를 피해 토끼는 기분으로 달렸고 넉넉하게 1등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도 전의를 가다듬고 있었다.
스타팅 총성과 함께 놈은 죨라 달렸으니 100미터를 지나 200미터가 지날 무렵에는 드디어 1등으로 치고 나왔고 300미터를 지날 쯤에는 상당한 격차를 두고 확실한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그 늠 기분이 그때 얼마나 째지게 좋았겠는가?
조금 있다가 경기가 모두 끝나면 정류장에 가서 그 당시 최고 지식인들만 본다는 “리더스아이제스트”와는 전혀 상관없는 “건강다이제스트” 당월호를 사서 컬러로 인쇄된 서양년들의 쭉쭉빵빵한 허벅지와 어린아이 대갈통만한 가슴을 보며 황홀감에 젖을 기대감이 가슴속에 무럭무럭 차오르고 있었으니....
<그시절 건강다이제스트-살짝 한장만 넘기면 "참 좋은" 사진이 많았다!>
그 늠이 왜 그런 미친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 하지만 어쨌든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남아있으니 가슴 아프더라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결승선을 50미터 앞두고 아직도 넉넉하게 선두를 달리던 늠은 환희에 사로잡힌 나머지 갑자기 “파이팅 세레모니”를 한번 하고 싶어졌단다.
잘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지난 1992년 이맘때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100리가 넘는 마라톤 경기 내내 피똥 싸며 뛰어 몬주익 경기장으로 들어서던 나랑 동갑이던 황영조도 결승선을 들어설 때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쳤었다.
근데 말이다, 황영조와 늠의 차이가 먼지 아는가?
황영조는 결승선 테이프를 끊으면서 파이팅을 외쳤고 늠은 결승선을 앞두고 파이팅 세레모니를 했다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 아는가?
만사 모든 일이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다!!
그날 늠에게 닥친 일은 바로 과유불급의 전형과도 같았으니 불과 5-6초 후면 결승선을 지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행복함으로 온통 쌰워를 할 미래를 생각하며 마치 평양주석궁을 방문하여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림모 동무가 그랬듯이 늠도 힘껏 오른손을 공중으로 뻗으며 “자천중 파이팅!”을 외쳤다.
그러는 순간에도 늠은 자신의 기특한 행동을 의식하며 결승선 뒤에서 엷은 미소를 짓던 고릴라 체육쌤을 살짝 쳐다 보았더란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게 파이팅을 외쳤던지 갑자기 늠의 다리힘이 풀리더니 숭구리당당 김정렬 형님처럼 스르르 주저앉듯 패대기쳐지고 말았더란다.
<이렇게 트렉에 패대기쳐 졌단다.>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 본격적으로 술을 홀짝거리다가 완전히 맛탱이가 가서는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갑자기 땅바닥이 벌떡 일어나 늠의 귀싸대기를 후려패던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던 늠은 이미 자신이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었다는 쪽팔림을어렴풋이 깨닫고는 밧데리에 지져진 메기가 도망가듯이 후다닥 일어나 다시 달렸단다.
하지만 이미 그 때는 그 늠의 뒤를 *빠지게 쫓아오던 다른 학교 쉐이들이 앞으로 나간 뒤라서 늠이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는 1등도, 2등도, 3등도 아닌 4등이 되어 있었더란다.
사방에서 달려들어 늠의 모가지에 빨대를 꽂아 피를 빨아댈 것 같은 친구 놈들로부터 느껴지는 온갖 쪽시러움과 뻘쭘함을 애써 외면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띵하게 고민하면서 4등자리에 앉아 있을 그때 죨라 얍삽하게 생겨먹은 심판관 한 놈이 다가와서 마지막 비수를 늠의 가슴에 꽂고 그것도 모자라 자루를 홱 비틀어 확인사살 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그 심판관 놈은 비겁하기 그지없는 썩소를 날리면서 다 떨어진 고무신짝을 엿장수 리어카 짐칸에 던지듯 늠을 향해 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이 니! 니는 아까 넘어지면서 옆 라인을 침범했잖아. 실격이야!.....”
이런 쉬팍...... 젓같은 놈........_-_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앞서 글머리에 설명한 그 날 경기 방식을 기억하는가?
그렇지!
첫 경기가 결선이고 두 번째 경기는 단순한 기록 측정이었잖아!
한쪽 그늘 구석에 짱박혀 어느 정도의 쪽팔림을 수습하던 늠은 불려지는 자신의 이름을 간신히 듣고 본부석으로 가서 상을 받아왔더랬지. 당연히 1등이었다네!
<봐, 여기 증거가 있잖아!>
그게 바로 절라 멍청한 짓을 해서 실격당하고도 1등 상을 받은 늠의 이야기 이다.
그 늠이 누구인지 추측하겠는가?
모르거든 그날 400미터에 출전한 늠이 누구인지 이 글 처음 부분을 찬찬히 다시 읽어 보라!
하여튼 그 늠은 그날 그 대형 사고를 쳤지만 상은 제대로 받았으니 애초 계획대로 건강다이제스트 한권을 사서 뿌듯함을 온 가슴으로 느끼며, 헤까닥 뒤짚어 질 때 빤스 속에 들어간 모래의 사그락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돌아왔었단다.
첫 번째나 두 번째 사고친 이야기는 어쩌면 순진무구하기도 하고 귀엽기까지 한 구석이 없잖아 있을 것이지만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세 번째 사고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사고를 친 그 놈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 짓을 했는지 수많은 꼴통을 학교에서 보아오면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먼저 그 사고를 친 넘은 앞서 말했듯이 개과천선하여 지금은 사장노릇을, 그것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수도 서울에서 하고 있지만 생김새로 봐서는 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남쪽에 산다는 부시맨을 떠올리게 하거나 이번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중장거리 부문을 휩쓴 특정지역 출신 선수들과 무척이나 닮았다.
< 그 넘의 고딩때 모습- 확실히 우리와는 인종이 다르지 않은가?>
<그 넘과 비슷한 모습을 한 아프리카의 뜀박질 선수>
이젠 사는 것도 좀 펴졌고 사장노릇도 하고 중년을 지나고 있으니 배도 좀 나오고 서울에 이십년 가까이 살았으니 얼굴도 뽀얗게 되련만 그 넘은 “너무나도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한채 살아가고 있다.
어쨌든 그 넘은 앙상하다 못해 말라 비틀어져 배고픈 동네 개들조차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앙상한 종아리를 번득이며 산과 들을 헤매며 꼴을 베고 총싸움을 하고 다녔으니 이를 통해 자연히 뜀박질 능력을 얻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아니면 말고.....
여담이지만 보현산 자락에서 놀개이를 뒤쫓는 구석기인 같은 깐채이나 자천들판의 부시맨이 된 이 놈 둘 모두가 오래 뜀박질하는 능력은 탁월하였으며 또한 같은 함안 조(趙)씨 가문 출신이라는 것은 특이하다.
지기미 별게 다 특이하다...... -_-
하지만 같은 함안 조씨 가문의 아들이라도 잔대가리를 파팍 돌린 깐채이와 달리 1500미터에 출전한 이 넘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듯 첫 경기에서부터 당연히 1등을 따 먹었으며 결승선을 통과한 다음에도 전혀 지친 기색을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기력이 왕성했었다.
하지만............
노상 아무것도 얻어먹지 못한 에티오피아 난민같던 외모와 달리 왕성하다 못해 넘치던 넘의 기력이 다음에 가져올 무지막지한 찐빠의 원인이 되리라고는 그때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1등으로 들어와 그늘에 잠시 쉰 그 넘은 예의 그날의 시나리오에 따라 2차 경기에 나섰으니 우리는 당연히 넘이 다시 한번 멋지게 결승선에 맨 먼저 들어 올 것이라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넘은 당연히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었다.
다만 넘이 결승선을 들어올 때 우리가 느낀 감정은 “자랑스러움”이나 “가슴벅참”이 아니라 “의아함”과 “띵∼함”이었다.
여기서 잠시 육상경기 규칙에 대해 설명하자면 너무나 잘 알듯이 100미터나 200미터는 특정구역에서 출발하여 단숨에 결승선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정식 규격의 트렉이 400미터이기 때문에 이글을 쓰는 필자가 출전한 400미터나 깐채이가 출전한 800미터는 출발선과 결승선이 동일하다. 그래서 각각 딱 한 바퀴와 두 바퀴만 돌면 경기가 끝난다.
근데 문제는 1500미터인데 이 종목은 결승선 100미터 지난 곳에서 출발하여 출발지를 세 번 지난 후에 300미터를 더 달려 결승선에 도착하게 된다. 보라, 이 얼마나 복잡한가!.... 이 복잡한 것을 그 넘이 쉬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그 넘은 총성이 울리자 말자 선두로 나서 레이스를 이끌었다.
결승선 앞에서 기다리던 우리는 한바퀴, 두바퀴를 지나가는 그 넘이 무척이나 대견하게 여겨졌다. 이제 한바퀴만 더 돌면 출전한 우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1차, 2차 경기 모두에서 1등하는 최초의 선수가 생기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 바퀴에서 점점 더 격차를 벌리던 넘이 마지막 직선코스에 들어섰을 때 응원하던 우리는 정말이지 첫 담배를 피웠을때의 몽롱함을 느끼며 넘을 얼싸안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결승선을 향해 뛰어오는 넘을 바라보면서 이미 우리는 발정난 수캐들처럼 넘의 얼굴을 할퀴고 쓰다듬으려 우르르 결승선 트렉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근데 말이다, 그 넘이 미쳤는지 결승선을 통과하더니 우리를 지나쳐서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 기이한 짓을 하더니 아예 트렉을 따라 계속 뜀박질 하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먼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넘의 레이스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지 우린 틀림없이 넘의 바퀴수를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분명히 갑자기 뇌로 전달되는 헤모글로빈의 급속한 하락으로 인해 그 넘이 헤까닥 미치고 있거나 그때까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1등한 자신이 너무 대견한 나머지 아직도 꿈속을 헤메고 있는지 모르거나 였으리라 생각되었다.
하여튼 분명히 끝난 레이스를 그 넘이 계속, 그것도 선두에서 하다 보니 그 넘을 뒤따르던 다른 학교 선수 놈들조차 약간 띵하기는 했지만 멈출 수가 없어 같이 뛸 수밖에 없었다.
결승선에서 어떻게 하면 넘을 사랑스럽게 안아 줄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우리는 1500미터가 아니라 1900미터를 뛰어 오는 그 넘을 멀리서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었다.
“저 쉐이 저거.....”
“와 저 지랄을 하노?”
“니가 봐도 미쳤제?.....”
다만 트렉을 한 바퀴 더 돌고 결승선에 들어오던 넘이 뒤따르던 놈들보다 더욱 격차를 벌였다는 사실은 칭찬해야할지 욕을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를 뿐이다.
넘은 그날 끝까지 자기의 실력이 뛰어나서 격차를 더 벌렸다고 주장했지만 우리가 보기에 뒤따르던 놈들조차 미친 들개처럼 앞서 달리던 넘의 모습에 기가차서 다리 힘이 풀렸을 뿐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넘의 그런 미친 모습을 보면 어떨지 느끼고 싶은 동기가 있다면 1994년 미국의 저멕키스가 감독한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꼭 보기를 권하고 싶다.
영화에서 검프는 사랑하는 여자 친구 제니가 달리라는 말만 하면 미식축구장이든 전쟁터이든 들판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다.
그래서 꼭 멈추라는 말을 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달리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큐 75인 검프와 넘의 지적수준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음 그럴거야.... 틀림없이...
<노상 뜀박질하는 포레스트 검프>
갖가지 유치찬란한 사고를 쳐가면서 출전했던 그해 육상대회의 우리행동을 지금도 돌이켜 보면 웃음부터 나온다.
지금은 전부 배가 나온 아저씨가 되어서 그 옛날 우리에게 사회를 가르치던 장모 선상님처럼 뜀박질을 할라치면 배와 팔다리가 따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땐 우리도 물찬 제비였다는걸 우리 자식들을 알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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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끼가 지랄하네!
난 단지 결선테입이 나올때까지 달린것 뿐이고
니는 쇼하다 자빠진거고
깐채이는 안굴러가는 머리 굴리다 낭패본거고
순혼 담배피워 일등 몬했고
진실은 이렇다 알겠냐
그렇다고 해라.
아직도 흥분하는 걸 보니까 그때의 감격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구나. ㅎㅎ
위에 글보다 둘이 이카는게 더 잼나다 ㅎㅎ
어야 근데 같이 찍은 여자 둘이는 누구였노?
서정화를 마이 닮았던데....
매직이다 씁새야 (공공의적 버전으로)
한명은 서정화가 맞고 한명은 옜날 초딩때 전학간 우리동네 살던 친군데 이름은 모르겠다 아마 돌격이나 당쇠가 알끼라
그러니까 쟈샤 그게 누구냐고?
중학교 뒤에 살던 애가?
박은식이 동생?
나이는 동갑 이름은 김 경미 집에선 미야로 불렀음 처음엔 같이 학교 다녓으나 가정상의 문제로 학교 2년쉬다 다시 다님~
경미...
난 전혀 모르겠는데...
미지의 여인이었구만.....
초등학교 2~3 학년때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겠지 . 6학년때 이사 같다 대구로 ~ 초등때 4.5.6 학년마을 한바퀴 마라톤 기억날려나 몰겠네. 남자먼저 뛰고 10분뒤 여자 뛰었지 아마 자가 남자 3/2 추월 하구 여자 1등 했다 아이가 .
초등학교 몇학년까지 다녔으면 알텐데 왜 난 하나도 기억이 없지?
하여튼 자천 1구 알라들이 굉장히 운동을 잘했나벼.
단거리계의 여자 볼트였던 포비 정화도 있고 쟈도 있고 운동장을 한바퀴 더 뛰는 조모란 놈도 있고 체육대회 기마전에서 상대방을 때려 죽이던 함모 군도 있었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