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 의성을 사암 도인, 허준 선생, 이제마 선생 이라합니다.
사암도인은
사명당 대사의 상수제자로 알려진 신비의 전설적 인물로 사암침법이라 불리는 독창적인 침법을 창안하였으나 그 침법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고 사장되다시피 해왔다. 사암도인은 사암(舍岩: 집'사', 바위'암')이라는 별명 그대로 속명을 숨긴채 바위굴 속에서 13년을 참선수행하다 침법에 대한 도리를 깨우쳤다 전해질 뿐 그의 인술 보시 행적은 팔도 각처에서 구전으로 구전으로 신비하게 그 신침(神針)의 치료 효험이 전해오고 있다.
舍岩道人은 그이 尊姓大名을 밝힌바 없고 그저 道號를 舍岩이라하였을 뿐인데 石窟 속에서 得度한 까닭이라하며 俗姓의 發表를 忌하는 것이 古來 僧侶의 本質이고보니 追考할 必要性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未確認이지만 此書 發刊을 豫告한 卽後 믿을 만한 江原道 一老醫의 傳하는 바에 의하면 舍岩道人은 別人이 아니라 俗名 延學으로 去今 四百十數年前인 壬亂 當時 僧兵을 指揮하여 많은 戰功을 세우고 軍使로 日本에 건너가 여러 가지 異蹟을 나타내어 倭人의 肝膽을 서늘하게 한 저 有名한 四溟堂 松雲大師의 首弟子라 한다. 그의 事實 與否는 別問題로하고 此書가 奇書에 屬한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라하겠다.
허준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귀암(龜巖).1546(명종 1) 서울~1615(광해군 7).조선시대 선조·광해군 때의 명의.
예방의학사상과 실용사상
허준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것은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것이고 약과 침은 그 다음"이라는 선진적인 의학사상을 강조했다. 이 소박한 의학사상은 허준의 진보적 의학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마음과 몸을 단련하고 수양을 잘하면 병을 미리 막아 오래 살 수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병의 치료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일단 병이 생긴 다음에는 제때에 치료하여 불행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정상적인 생체의 생리적 메커니즘에 대해 쓰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한 다음 질병의 병리적 메커니즘과 증상 및 치료 처방과 예후에 대하여 썼으며 끝으로 해당 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는 단방문들과 침구법을 밝히는 독특한 서술체계를 세웠다.
동의학적 공적
허준은 우리민족 의학사상 가장 탁월한 의학지식과 이론을 가졌던 사람으로 그때까지 발전, 지탱되어왔던 민족의학을 과학이론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에서 새로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의학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무엇보다도 의료사상적 측면에서 민족의학·민중의학의 지향을 분명히 함으로써 근대민족의학의 지향점을 건설했다. 허준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의학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제마는 1837년(헌종3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제마(濟馬)라는 이름은 이제마의 할아버지인 충원공이 어느날 꿈을 꾸었는 데 어느 여인이 탐스러운 망아지 한 필을 가져와 "이 망아지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인데 그 훌륭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댁으로 끌고 왔으니 이 말을 맡아서 잘 길러달라"는말과 함께 망아지를 집앞에 매어두고 사라졌는데 이 꿈을 꾸고 난 후 이제마를 손자로 얻게되어 제주도에서 가져온 말이라 하여 '제마'라고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있다.
본관 전주(全州). 호 동무(東武). 자 무평(務平). 함남 함흥 출생.
1888년(고종 25) 군관직에 등용되었으나 이듬해 사퇴하고, 1892년 진해현감(鎭海縣監)이 되었다.
다음해 사직하고 1896년 최문환(崔文煥)의 반란을 평정하여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주역(周易)》의 태극설(太極說)인 태양(太陽) ·소양(小陽) ·태음(太陰) ·소음(小陰)의 사상(四象)을 인체에 적용, 기질과 성격에 따라 인간을 4가지 형으로 나누어 그에 적합한 치료방법을 제시한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안하였다.
이 학설은 종래의 음양오행설의 철리적(哲理的) 공론을 배척하고 임상학적인 방법에 따라 환자의 체질을 중심으로 치료방법을 제시한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