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7. 11 : 00(목요일)
이른 아침 모텔에서 창문을 열으니 눈 앞에 월출산이 들어오고, 새벽부터 내리는 봄비가 비구름를 띄우며 상긋함을 더해준다.
군청 앞의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맛있게 들고 시간에 맞추어 월출산 밑에 자리한 녹동서원을 찾았다.
서원 재실에서 영암 향교의 유생들과 그리고 남원, 정읍, 전주, 등지에서 유생과 전주최씨 후손들이 70여명 모여 가란비가 오는 우중에 향사를 봉행하였다.
오김에서는 종헌관으로 대종중 부회장이며 대한 서예가 협회 초대작가인 벽천 세한 족숙이 제관으로 4현의 신위전에 잔을 올렸다.
영암녹동서원(靈巖鹿洞書院)
지정번호 : 전남유형문화재 제183호
지정연도 : 1992년 11월 30일
소재지 :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356
1992년 11월 30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녹동서원은 존양사(存養祠)라는 이름으로 1630년(인조 8) 창건된 뒤 녹동(鹿洞)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 서원에는 최덕지(崔德之:1384∼1455), 최충성(崔忠成:1458∼1491), 김수항(金壽恒:1629∼1689), 김창협(金昌協:1651∼1708) 등을 배향하고 있다.
녹동서원에는 많은 고문서류와 목판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은 봉안 인물의 문집인 《연촌유사》 26판, 《문곡집》 560판, 《산당집》 60판 등과 인근 지역 인물인 임억령의 《석천집(石川集)》, 강항의 《강감회요(綱鑑會要)》 등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지정된 목판은 《연촌유사》 26판, 《문곡집》 560판, 《산당집》 54판 등 총 642판에 이른다. 이 목판은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녹동서원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868년 서원 훼철 이후 현재 보관장소인 덕진면 영보리에 있는 합경당의 목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고문서로는 원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서원청금안(書院靑衿案)》(1690∼1844) 25책, 《서원서재유안》 2책, 《합경재청금안》 3책(1807, 1822, 1844) 등 30책에 달하는 유안(儒案)이 있다. 이 중에 가장 오래된 유안은 1690년에 등재된 것으로 수록 인원은 140여 명에 이르며, 여기에 등재된 대표적 씨족으로는 전주최씨, 거창신씨, 함양박씨 순으로 나타나 있다. 이밖에도 《심원록(尋源錄)》 5책(1723∼1811), 《합경재보노안(合敬齋保奴案)》 3책(1822, 1823, 1840) 등을 합하여 모두 38책이 보존되어있다.
기타 고문서로 1659년에 작성된 존양녹동서원 영선물자수집 통문(通文) 1매, 1701년에 작성된 청액시의 경비와 노비 방매의 내용이 기록된 완의(完議) 1매, 영당에 노비를 기증한 내용의 명문(明文) 1매(1716년 작성), 노비 기증 완의 1매(1719년 작성), 면역조처를 내린 예조 완의 1매(1803년 작성), 면역(免役)을 청하는 상서 1매(1818 작성), 1868년의 서원 훼철시에 작성된 순영감결(巡營甘結) 1매 등 7건의 낱장 문서가 있다.
이상의 녹동서원 소장 자료는 조선 후기 서원의 연혁, 조직과 운영, 유생명단, 경제기반, 사회적인 위상, 제향인물사 등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와 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의 저술을 판각한 목판까지 소장하고 있어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
文簡公 農巖 諱昌協 禮曹判書 正二品職
(문간공 농암 휘창협) 예조판서 정 2품직
본관은 안동(安東). 字(자)는 중화(仲和) 號(호)는 농암(農巖). 孝宗(효종) 2년(1651) 辛卯(신묘) 1월 2일 과천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玄祖(현조)는 信川公[(신천공) 신천군수(信川郡守) 諱生海(휘생해)]이고, 高祖(고조)는 都正公[(도정공)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諱克孝(휘극효)]이며, 증조는 文正公[(문정공) 文衡(문형) 淸白吏(청백리) 左議政(좌의정) 贈領議政(증영의정) 淸陰(청음) 諱尙憲(휘상헌)]이니, 할아버지는 同知公[(동지공)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영의정(贈領議政) 휘광찬(諱光燦)]이요, 아버지는 文谷公[(문곡공) 영의정(領議政) 휘수항(諱壽恒)과 어머니 정경부인 安定羅氏(안정나씨)의 6남 1녀 중 次男(차남)이다.
顯宗(현종) 10년(1669) 己酉(기유) 19살에 식년시 3等(등) 44位(위)로 진사(進士)가 되어, 肅宗(숙종) 8년1682) 壬戌(임술) 11월14일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35인을 뽑는데, 전시장원(殿試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전적(典籍)으로 출사(出仕) 한 뒤, 이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보했다.
肅宗(숙종) 9년(1683) 癸亥(계해) 4월 23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같은 해 6월 13일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을 뽑을 때 11인 중에 들었고, 같은 해 6월15일 부수찬(副修撰), 같은 해 윤 6월 19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같은 해 윤 6월 26일 수찬(修撰), 같은 해 9월 27일 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肅宗(숙종) 10년(1684) 甲子(갑자) 1월 10일 교리(校理), 같은 해 2월 14일 교리(校理). 같은 해 6월14일 이조좌랑(吏曹佐郞), 같은 해 9월 10일 헌납(獻納)을 역임했다.
肅宗(숙종) 11년 을축(1685) 2월 20일 부교리(副校理), 같은 해 9월 6일 교리(校理), 肅宗(숙종) 12년(1686) 丙寅(병인) 1월 10일 이조정랑(吏曹正郞), 같은 해 2월 14일 수찬(修撰), 같은 해 3월 27일 이조정랑(吏曹正郞), 같은 해 윤 4월 28일 헌납(獻納), 같은 해 5월 5일 대사간(大司諫), 같은 해 6월 16일 집의(執義), 같은 해 6월 17일 승지(承旨), 같은 해 7월 20일 대사성(大司成)에 보하였다.
肅宗(숙종) 13년(1687) 丁卯(정묘) 1월 19일 대사간(大司諫), 肅宗(숙종) 15년(1689) 己巳(기사) 윤3월 21일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나 아버지가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어 다음달 9일 사사(賜死)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장례를 치른 뒤 형제들이 영평(永平=현 경기도포천) 산중(산중)에 숨어 지내다가 肅宗(숙종) 20년 (1694) 甲戌(갑술) 4월 2일 선친이 사면복관(赦免復官) 되었다.
같은 해 5월 26일 부제학(副提學), 같은 해 6월 21일 대사간(大司諫), 같은해 9월 4일 승지(承旨), 肅宗(숙종) 21년(1695) 乙亥(을해) 4월 1일 부제학(副提學), 같은 해 7월 12일 개성유수(開城留守), 같은 해 11월 6일 대사헌(大司憲), 肅宗(숙종) 22년(1696) 丙子(병자) 5월 15일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같은 해 6월 29일 부제학(副提學), 같은 해 9월 21일 이조참판(吏曹參判), 肅宗(숙종) 24년(1698) 戊寅(무인) 7월 26일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肅宗(숙종) 25년 기묘(1699) 10월 1일 부제학(副提學), 같은 해 12월 10일 이조참판(吏曹參判), 肅宗(숙종) 26년 (1700) 庚辰(경진) 6월13일 대사헌(大司憲), 肅宗(숙종) 27년(1701) 辛巳(신사) 2월 5일 대사성(大司成), 같은 해 11월 11일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肅宗(숙종) 28년(1702) 壬午(임오) 7월 26일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같은 해 8월 15일 부제학(副提學), 肅宗(숙종) 31년 乙酉(을유) 11월 5일 한성좌윤(漢城左尹), 같은 해 11월 22일 이조참판(吏曹參判), 같은 해 11월 8일 대사간(大司諫)에 보했다.
肅宗(숙종) 32년(1706) 丙戌(병술) 2월 5일(大提學), 같은 해 4월 9일 형조판서(刑曹判書), 같은 해 5월 1일 예조판서(禮曹判書), 같은 해 8월9일 대사헌(大司憲), 肅宗(숙종) 34년 (1708) 戊子(무자) 4월 11일 享年(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난 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평소에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지만 의리를 분별해 밝힐 때는 목소리를 높여 기개와 절조를 표현해 그의 말을 끊을 수 없었지만, 선입견이 없 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
또한 후학을 순순히 교화해 모두 심복하게 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해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그의 시는 두보 (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 다.
학문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라는 李珥(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氣(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理(이)와 氣(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 부터 기가 주된 것이라고 해 이황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 였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그는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 된 정이 모두 악하 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성악론변 性惡論辨〉에서 그는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 (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善)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기설에서 대체로 이이보다는 이황의 설에 가까우며 호론(湖論) 을 지지하였다. 특히,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썼다.
숙종 31년(1705) 문정공(文貞公李端相碑) ․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 김숭겸표(金崇謙表) ․ 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이 있다.
配位(배위)는 정부인 연안이씨로 서기 1651년 辛卯(신묘) 孝宗(효종) 2년에 태어나, 서기 1708년 戊子(무자) 肅宗(숙종) 34년 2월 1일 58세에 卒(졸)하였다. 아버지는 文貞公(문정공) 靜觀齋(정관재) 端相(단상)이고, 祖(조)는 대제학 白洲(백주) 明漢(명한)이며, 증조는 좌의정 廷龜(정구)이니, 외조는 우의정 李行遠(이행원)으로 본은 전의이다.
膝下(슬하)에 1南(남) 5女(녀)를 두니, 1남은 崇謙(숭겸)이고, 1녀는 군수 徐宗愈(서종유)로 달성인이며, 2녀는 도정 李台鎭(이태진)으로 덕수인이니, 3녀는 정랑 吳晉周(오진주)로 해주인이요, 4녀는 지중추부사 朴師漢(박사한)으로 반남인이고, 5녀는 증이조참판 兪受基(유수기)로 기계인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先兆下(선조하) 庚坐(경좌) 合窆(합폄)이고, 묘지 및 묘표는 동생 창흡이 撰(찬)하고, 陰記(음기)했으며, 海昌尉(해창위) 吳泰周(오태주)가 썼다.
肅宗(숙종)의 廟廷(묘정)에 配享(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는 선친인 문곡(文谷) 휘 수항(壽恒)과 함께 배향(配享) 되었다.
저서로는《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 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 論語詳說》․《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등 많은 편집 하였다.
※【참고문헌】숙종실록 농암집(김창협)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