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일상생활 이면에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맞물려 돌아가는 에네르기가 있다. 오늘 밤 꾸었던 꿈도 그러한 에네르기의 작동에 의한 한낮 몽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킬리만자로의 광활한 사막을 넘어 불어 온 듯한 -평범하고 무료하기도 하며 어떤 건조함이 감도는- 일상의 어느날 밤, 몽상과는 또 다른 일종의 초자연적인 에네르기가 작용하고 만 것이다.
잠을 자다가 깨어나 보니 나 혼자 휑뎅그런 방에서 시체같은 잠을 자고 있었다. 시트는 흠뻑 젖어서 마치 내가 물
고기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꿈 속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 곳은 크레타섬이었다. 아주 익숙한 바람 내음이었다. 누군가 내 뒤에 서 있었다. 기억 속에 크레타섬.. 어쩌면 이곳에 왔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혼미를 거듭했다. 편두통이 더해왔다. 그를 붙잡지 않으면 섬과 함께 침몰할 것만 같았다. 나는 결코 로빈슨이 아니었다.
낮잠에서 깨어나서 한동안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았다. 크레타 섬에 관한 여행가이드북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인가
보다. 열 아홉... 그리고 스무살... 나의 기억에서 지워진 부분이었다. 행복이 가득한 삶은 아니었을 거란 느낌이 더했다. 제길.. 이런 밤에는 만찬이라도 준비해서 자축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잊혀진 망각의 뇌수에 축배를.
따르릉 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 손에서 땀이 났다. 도마 위에는 썰다 만 양파가 가지런했고 오른 손에 들려 있던 식칼은 벨소리에 그만 손을 난도질한 것처럼 선홍색의 핏빛으로 물들었다. 우메보시를 담을 접시를 식탁 위에 꺼내 놓은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윙―하고 감이 멀게 잡히는 소리만 거듭 들렸다. 응답이 없었다. 전화를 끊을까 하다가 다시 한번 더 말을 걸었다.
"네, 말씀하세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네? 오늘은 하루종일…"
주방에서 탄내가 났다. 수화기에서는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포트폴리오를 정리 하느라 집 밖으로 나갈 틈이 없었다. 낮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분명히 꿈속에서 누군가 내 뒤에 있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탄내가 배어 나왔다. 주방으로 가야 할지 대답을 해야할지 잠시 망설였다.
"실례지만 용건이, 아니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군요."
"단정하지 마십시요. 당신의 머릿결을 쓰다듬은 기억이 나는군요. 아직 제 손에는 당신의 체취가 묻어 납니다. 이건 제비꽃 향기와 비슷하군요."
오디오 스위치를 켰다. 오븐 위에 올려놓은 화이트 소스가 타고 있었다. 연어에 곁들일 소스였다. 빨리 가서 끄지 않으면 집 안이 온통 연기로 가득 할 것 같았다. 이 사람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오디오에서는 X의 TEARS가 스피커를 타고 흐른다.
"낮에 꿈을 꾸었어요."
갑자기 꿈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이상한 전화에 어울릴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때 갑자기 주방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마구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런.. 하고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던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불꽃들이 생선을 위한 悲舞를 추듯 흐느적거리며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얼른 싱크대에서 물을 틀어 그릇에 담은 뒤 오븐 위에서 지글거리며 타고 있는 냄비 위에다 뿌렸다. 그러자 불꽃의 춤은 사라지고 대신 자욱한 연기만 더하고 있었다. 가스밸브를 잠근 다음 다시 전화를 받으러 거실로 나갔다.
뚜―우.
응답 대신 신호음이 울렸다. 장난전화였나 하는 생각에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오늘 밤 나의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소스를 그만 망치고 만 것이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겨우 스물 세 살하고 삼개월 3일. 어리다고 볼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23이라는 숫자에 어울리는 평범한 삶은 아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직함을 여럿 가지고 있다. 화가, 디자이너, 그리고 하나 더, 마마. 나는 마마다. 한때 콜걸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이젠 그런 시시한 직업에는 흥미가 가신지 오래다. 조금 솔직해지자면 더 이상 반항할 필요가 없어져서 였다. 나는 고아가 아니었다. 다만 고아처럼 자랐을 뿐이다.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운영하는 큰 회사의 사장이셨다.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의 양팔에 오빠와 나란히 매달려도 아
버지는 산처럼 끄덕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없다.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름 모를 병에 걸려서 아름다운 젊음을 간직한채 돌아가셨을 거라는 공상에 골몰하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피하셨다. 내가 그런 말이라도 꺼내면 집안에는 한동안 웃음이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가 설계한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신 뒤 배와 함께 행방불명 되셨다. 그 뒤 회사는 작은 아버지가 맡게 되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곧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작은 아버지는 설계가였지 사업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오빠 손을 꼭 붙잡으시고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 그날 저녁 우리집 옥상에 빨랫줄로 목을 매고 자살하셨다.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더 이상 오빠와 나를 맡아줄 친척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양부가 생겼다. 바로 회사의 새로운 사장이었다. 그 때 오빠는 열 다섯, 나는 열 넷이었다. 그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미혼이며 왼다리를 약간 절었다. 다리에 대한 콤플렉스가 상당해서 여간해서는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항상 미간에는 주름자국이 내비쳤다. 그러나 그 주름을 걷어내기만 하면 그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마치 킬리만자로를 넘어 고원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바람과도 같이 그의 얼굴은 나에게 묘한 매력을 주었다. 나는 그를 킬리만자로의 이니셜을 따서 K라고 불렀다. K는 우리를 맡자마자 바로 오빠를 미국 동부에 있는 기숙사 학교로 보내버렸다. 나는 오빠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끼니도 거르고 떼를 쓰며 울었지만 소용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
"너는 화가가 될 소질이 있어. 열심히 그림공부를 해서 미술 공부를 하러 미국에 가게 되면 그 땐 오빠를 만나게 해 주지. 그때까지 열심히 하든 아니면 지금처럼 울고만 있든 모든건 너에게 달린 거야."
그날 저녁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사진 속의 어머니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는 크래타섬의 해변을 거닐었다. 그 꿈을 꾼 다음날부터 나는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년이 지나자 화랑계에서 내 그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K는 인정하지 않고 더욱 더 매몰차게 그림공부를 강요했다. 내 그림에는 깊이가 없다고 했다. 그런 날에는 하루종일 쥐스퀸트의 책을 읽었다.
제 2부 마마와 누드모델
개인적으로 마마라는 직업을 좋아한다. 가진 돈은 많지만 그것에 비례해면 보잘 것 없는 가슴을 가진 남자들에게 여자를 기부하고 얻는 희열감 때문이다. 처음에 그들은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다. 단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식이다. 그런 시작은 결국 오래가지 않아서 여자라는 덫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한 때 그런 종류의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마마를 택했다. 직접 내가 하는 대신에 내 밑의 콜걸을 시켜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쪽으로 전향한 것이다. 어제 전화한 남자도 그런 종류의 남자가 이니었을까?
"그런 남자는 채찍 대신 여자의 아랫도리가 어울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모델에게 어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남자는 ―남자라기 보다 아직 소년에 가까
운 나이다. 열 아홉이라고 했다. 나는 열 아홉이 기억나질 않는다. 열 아홉부터 스무살까지의 기억들은 스폰지가 뇌수를 빨아먹은 듯 머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몇해 전 몽블랑에서 당한 조난사고의 휴우증으로 인한 기억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잠깐만... 제 얘기 들어주실래요?"
갑자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나이 밖에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 좋아. 열 아홉이라고 했지? 난 그 때가 기억나질 않아. 너의 열 아홉살 이야기라면 좋을 것같애. 어디
시작해봐."
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남자는 옷을 하나씩 챙겨 입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직 제 이름도 모르시죠? 토시라고 하지만 다들 모델이라고 불러요. 누드모델로 아르바이트 하잖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붙여줬어요."
"형이 있어?"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하나를 더 꺼내어 불을 붙이면서 무심결에 말을 던졌다.
"네, 형 이름은 요시키에요. 형도 누드화가를 했었어요. 이태리로 유학갔다가... 크레타섬으로 간 뒤에…."
그는 무언가를 헤매이듯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말을 이었다.
"실종됐어요. 3년 전에 크레타 섬에서 어떤 여자와 같이 있었다는 것밖에 아는게 없어요. 그 여자... 마을사람들 말에 의하면 매일같이 형을 그렸다는데... 아참, 저도 그 그림 한 장 가지고 있어요. 그 집 침대 밑에 있던 거예
요."
"그래? 나도 크레타섬에 가보고 싶었는데. 그런 일을 겪었다니까 충격이 크겠구나."
나는 신경쓰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갑지기 금속성의 목소리로 쥐어짜듯 토시가 얘기했다.
"그 섬을 모른다는 말... 사실이 아니죠? 형을 아실거예요. 왜, 아시잖아요? 모르는 사람처럼 얘길 하세요? 그리스에서 형을 그렸던 그림들 아직 제가 보관하고 있는걸요. 이거 보세요."
그는 가방에서 그림을 꺼내어 내게 매달리듯 늘어지며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림은 남자의 나체를 그리다 만 것이었지만 선의 터치에서 어쩐지 깊이가 느껴졌다.
"나와 비슷하긴 하지만 내 스타일이 아냐. 내 그림엔 힘이 없는걸. 이걸 그린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엄청난 정열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야. 나에겐 아직 정열이 부족해."
"아뇨, 다시 한번 보세요. 난 당신을 찾기 위해서 지난 4년 동안 그림공부를 하고 화가들 누드모델을 했다구요! 당신 그림을 본 순간 단번에 알아봤어요. 그래서 당신에 관한 모든걸 조사해 봤어요. 크레타섬에 안 가본척 해도 거짓말이란거 다 알아요. 크레타에서 6개월 동안 뭘 했는지 말해봐요"
나는 크레타섬에 가본 적이 없다. 언젠가 꿈결에서 어머니와 나란히 거닐었던 기억이 가물한 것 외에는 크레타에
관한 여행가이드북 밖에 없다. 결국 K는 내가 크레타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툴루즈에서 몇 개월 지내다가 마르세유로 가서 그림을 그렸어. 그러다가 몽블랑에서 폭설로 매몰당해서 조난당했다구. 그 때 이후로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프랑스에서 보낸 일년 정도의 기간이 기억에서 사라진 것외엔 완벽한 사람이야."
갑자기 왼쪽머리가 아파왔다. 조난사고 이후 기억을 더듬을 때면 극심한 편두통에 시달리곤 했다.
"거짓말! 형과 같이 있었어. 당신 여권기록은 조작된거야. 항공사에 기록을 의뢰해 봤어. 도대체 당신 뒤엔 누
가 있는 거야? 형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줘. 형과 사랑했던 사이가 아녔어?"
사랑했던 사이라는 말에 갑자기 어떤 남자의 음성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사랑해….'
"그만… 그만…해. 머리가 너무…아…퍼."
편두통이 더해갔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담배가 짓눌러져 동강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토시는 내 어깨를 흔들면서 계속 윽박질렀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K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 때 현관문을 박차고 검은 무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나는 의자에서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며 의식을 잃어갔다. 그것은 검은 연기와도 같았다. 유우지로는 검은 연기에 휩싸여 문밖으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길게 뻗은 악마의 손가락에 의해 유우지로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토쿄미술고등학교의 졸업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나는 2주 정도 이태리에서 그리스까지 여행계획을 세워 K에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K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나도 이번 주에 유럽 출장이 있으니까 같이 가도록 하지. 그리스 대신 프랑스 남부지방이 좋아. 그 곳에는 포도주를 양조하는 곳이 많거든. 나와 직접 거래를 하는 곳도 있고 그 근처에 마침 5년 전에 사둔 내 소유의 별장도 있으니까 그 곳으로 바꾸자구. 그리고 그리스 보다는 프랑스가 그림을 하기에는 덧없이 좋지. 툴루즈나 마르세유로 바꾸도록 스케줄 조정을 애덤에게 맡겨라. 내가 지시해 두마."
"싫어요. 프랑스에는 멋진 섬이 없잖아요. 나는 크레타섬으로 정했어요. 출장 같은거 내가 성가시게 해서 일을 망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아저씨가 가시는 방향하고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파리에서 얼마나 먼 거린데..."
K는 애덤에게 서류작성을 지시하면 내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아저씬 아저씨 사무만 보고 돌아오시든지 하세요. 이번만은 혼자 가고 싶단 말예요. 더는 제게 강요하지 마세요"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계속되는 그의 짜증을 견디다 못해 결국 그의 소원대로 그리스 대신 툴루즈로 일정을 바꿨다. 툴루즈에서 처음 밤을 보내던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밤 중에 침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런 시골에 도둑이 있을리 난무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K를 깨우러 가던 도중 구석에 있던 콘솔 근처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 모양이며 입고 있던 옷 따위가 낯이 익었다. 창밖으로 달빛이 조금씩 내비치기 시작했다. 서서히 윤곽이 드러났다. K였다. 그는 식은 땀을 흘리며 내 방 구석에 쪼그리고 않아서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서 멍한 눈빛을 보내며 계속 구레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곧장 어둠속에서 옷과 소지품이 든 토드백만 챙겨 나와서 콜택시를 불렀다. 그 다음은 생각지도 않고 바로 미디 운하로 향했다. 미디 운하에서 다시 배로 바꿔탄 뒤 페르피낭에서 고속버스로 갈아타고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더 이상 K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오빠를 만나고 싶었다. 오빠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나에게 일주일에 한번 씩은 꼬박꼬박 편지를 부쳤다. 그런데 지난 달 이유없이 자살했다. 그랜드 케년에 여행을 간다고 나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그 편지 보다 오빠의 시체가 먼저 일본으로 왔다. 나는 별로 슬프지가 않았다. 꼭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서야 오빠의 죽음이 현실로 받아들여 진 것이다. 이제 나는 정말 혼자가 된 것이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곧장 그리스로 향했다.
제 3부 킬리만자로의 바람
깨어나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K의 별장이었다. 일본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K의 곁을 빠져 나가야 했다. 우리 사이에 연결된 고리를 찾아서 끊어야만 했다. 노크 소리와 함께 K가 들어왔다.
"이제야 깨어나셨군요, 우리 공주님."
"토시는 어디있죠?"
"그런 싸구려 녀석들과 어울려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너는 환자란 말이다. 내 곁에서 내 보호를 받으
면서 치료를 꾸준히 받아야만 그 고질병을 고칠수 있어. 그리고 그 마만지 뚜쟁인지 그만 두거라."
마마? 그도 알고 있었다. 하긴 일본 내에서 그의 눈 밖에서 무엇을 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K를 바라보았다. 40대에 어울리지 않는 은발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얼굴과 잘 어울렸다.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대개 극단적으로 반응했다. 극단적으로 자극적이라던가, 아니면 너무 편안하다던가. 나는 전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 그의 목소리는 내게 대해 세심하게 배려하는 듯 방 안에 나즈막히 울렸다.
"내일부터 철강노련과 협상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바빠 질거다."
"철강노련에선 어떤 꼭두각시가 나오죠? 아저씨와 협상 테이블에 나란히해서 이길 사람이 누가 있다구..."
"그렇게 비아냥거리지 말거라. 네가 하는 그 짓을 막느라고 나도 하는만큼 했다. 마코토가 죽은 건 그의 잘못도 있지만 네 탓도 있는거야. 그래도 그 동안 그만큼 했으면 그 사람도 편히 눈을 감았을 거다."
"그 사람, 내가 죽인게 아네요. 그 사람 때문에 마마가 된건 절대 아니에요. 넘겨 짚지 마세요. 자기 덫에 자기
가 빠진 거라구요. 콜걸 따위를 사랑하다니.. 그 사람더러... 저를... 사랑해달라고 한적 없어요! 마코토가 나 때문에 죽었다구요?"
눈물이 흘렀다. 크레타 섬으로 가고 싶었다. K가 입을 열었다.
"크레타 섬으로 보내 주세요. 왜 그 곳에 가면 안되는 거죠? 정말 가보고 싶어요."
순간 K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사람을 불렀다. 나는 진정제를 맞고 깊은 잠에 빠졌다.
꿈을 꾸었다. K가 눈 속에 나를 파묻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온몸에 마비가 왔다. 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밤 중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서 커티 샥을 온더 락으로 마셨다.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이런 곳에 맥주 따윈
없었다.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일어난 뒤에 온 몸이 끈적끈적한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K는 내가
집으로 들어오길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고리를 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볼보의 엔진소리가 들렸다. 발코니로 나가보았다. 검은색의 광택을 지닌 볼보는 방탄으로 무장되어 있어 달빛에 의해 더욱 견고한 여리고성처럼 보였다. 서재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오자마자 바로 서류뭉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시계는 벌써 새벽 한시였다.
"내일 아파트에서 짐을 챙겨 오도록 하거라."
은발이 이마 위로 약간 흘러 내렸다.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다만 피곤해 보였다.
"그냥 거기서 살고 싶어요. 이제 저도 어른이예요. 제 앞가림 정도는 제가 해요."
"그 앞가림이란게 겨우 남자들에게 창녀를 연결시켜 주는 일이냐?"
"상관할 것 없잖아요. 저는 그 일이 좋아요."
"그만큼 했으면 이제 됐다. 그 디자인 공부도 치우거라. 다시 그림을 시작 하도록 해. 너는 뚜쟁이 장사에 미처서 가장 소중한 걸 잊고 있어. 너는 화가가 될 소질이 있단 말이다. 다음 주에 프랑스 보르도로 가거라. 거기에 있는 내 친구에게 부탁해 놨다. 프랑스에서 유명한 화가니까 가서 많이 배우도록 해."
"제 그림엔 깊이가 없다고 그러셨죠? 한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됐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 말씀 충분히 이해해요.
저는 정말 그림에는 소질이 없다구요. 차라리 디자인 공부라도 하게 해주세요. 지난번 제가 디자인 ?事? 냈을 때에도 은행에 압력을 넣어서 가계를 차압했죠? 제발 이번만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세요."
K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서류를 훑어보고 사인을 하거나 서류분쇄기에 넣거나 하면서 서류를 정리했다. 옆에 서 있던 애덤도 그의 작업을 돕고 있었다. 애덤은 나에게 의자를 빼주었지만 나는 앉지 않았다.
"자꾸 그러시면 저도 그랜드 케년으로 가고 말거에요."
그 순간 K는 왼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놓쳤다. 애덤도 긴장한 듯 했다.
"망할 것. 애덤, 저 아이를 당장 내보내게!"
나는 당장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밖은 스산했다. 현관 입구에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 애덤이 내 가방을 챙겨 나
왔다.
"어르신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돌아가신 도련님 이야기는 삼가주십시오."
"애덤, 오빠는… 자살한게 아니죠?"
보름이 가까워서 그런지 달이 밝았다. 현관에서 보이는 건너편으로 달빛을 잔뜩 머금은 달빛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애덤은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어르신께서 사람을 몇 명 보내…"
"도움은 필요없어요. 애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리고 아저씨 잘 부탁 할게요."
현관 앞에 도요다가 도착했다. 나는 가방을 집어들고 달빛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마요르카섬에서 샤르데냐섬으로, 다시 시칠리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서 간 곳이 그리스였다. 이탈리아는 행정의 부재가 많아서 나의 뒤를 추적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는 만점짜리 여행지였다. 그리스에서 꼬박 10시간을 뜬 눈으로 보낸 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뱃편을 이용해서 섬에 도착했다. 선박하는 입구에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계속 K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 신문을 사서 읽으면서 커피로 피곤함을 달래던 차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내 앞에 멈춰서서 말을 붙였다.
"あの, すみません. 日本の方でしょ. (저기, 일본인이시죠?)"
정확한 발음으로 일본말을 구사했다. 그는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는 듯 까만 피부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고국사람을 만나서 반가웠지만 피곤함이 앞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숙박할 곳이 필요한데…."
"피곤하시죠? 그리스 사람들 보수적인데가 있어서 의외로 친해지기가 힘들어요. 저도 여기 온지 한달만에야 겨우 이웃을 만들 수 있었는 걸요. 제가 근처에 숙박하기 좋은 곳을 알고 있으니까 저를 따라오세요."
어디든 들어가서 잠을 청하고 싶었다. 그를 따라서 차를 타고 섬 뒷편으로 돌아 들어가 3시간 정도 해안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서 레팀논이라는 마을로 들어가 19세기에 지어진 어떤 별장에 여장을 풀었다.
"아까는 너무 피곤해보였어요. 그런 몸으로 다니다간 해변에서 해적을 만날지도 모른다구요. 걱정이 앞서 실례를 무릎쓰고 먼저 말을 걸었어요."
친절한 사람이었다.
"저는 요시키에요.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제 4부 크레타 섬
크레타에서의 첫날 밤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곤하게 잤다. 꿈도 꾸지 않았다. 그동안 내도록 K의 악몽에 시달렸
던 탓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이상하게도 그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후 1시쯤에 일어나서 커
피를 마시면서 스크럼블 애그를 만들고 있을 때에 밖에서 누군가 인기척이 났다.
"누구세요?"
거실 입구에서 요시키가 수영복차림에 조깅화를 신고서 인사를 했다.
"늦은 아침이군요. 뭐죠? 이 냄새는… 아하. 스크럼블 에그군요. 점심식사로는 부족하지 않나요? 바닷가에서 배가 고파지면 곤란할텐데."
내가 웃음을 보이자 그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같이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식사를 끝내자 그가 해변가로 나가자고 권했다.
"근처에 저만 아는 해상 동굴이 있어요. 그곳에는 사람 손도 많이 안타고 한적해서 좋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아름다워요. 당신에게 여기 온 기념으로 그곳의 바다를 선물하고 싶어요."
그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누드화가였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데 고심하다가다 갑자기 유학을 결정했다고 했다. 일본에는 어머니와 남동생 그렇게 둘만 남겨두고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남부 이탈리아로 갔다가 스케치 여행 중에 우연히 들린 크레타섬에 매료되어 그 이후로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누드를 그리고 있었다. 요시키는 웃으면 얼굴에 보조개가 패였다. 그리고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몸을 보고 있으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손이 저려왔다.
해상동굴을 보러간 이후 우리 둘은 가까워졌다. 나는 그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도 흔쾌히 허락했다. 열 아홉살 남자의 나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동안 내가 봐온 남자라곤 K와 그의 비서인 애덤이 전부였다. 요시키는 그들과 달랐다. 젊고 탄력있는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졌다. 그를 보고 있으면 태양이 이글거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의 그림을 수없이 그렸다. 그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보름만에 나는 그와 함께 밤을 보냈다. 그 이후 우리는 함께 생활했다. 한시도 떨어져 지낼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나의 심장과 폐가 되어서 내 몸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아파트는 요코하마에 있다. 집 안에 들어서자 매퀘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방에는 며칠 전에 태운 냄비
가 싱크대에 그대로 있었다. 냄비 안에는 곰팡이가 잔뜩 붙어 있었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정말 남자의 몸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떤 모델도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들지는 못했다.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주방에 가서 그릇을 씻어서 정리를 한 다음 샤워를 했다. 손에서 곰팡내가 나는 듯 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받고 싶지 않았다. 냉장고로 가서 맥주를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그 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여보세요."
"돌아 오셨군요."
"누구…."
그 때 전화했던 그 남자였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오븐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샹태다.
"지난번에 전화하셨다가 그냥 끊으셨죠?"
"감청당하고 있었습니다."
"당신 말인가요?"
"아뇨, 저는 감청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아파트는 경비가 허술하더군요. 댁의 전화선에 감청장치가 되어 있어서 전화통화를 오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K의 짓이다. 그 날 토시가 그렇게 된 것도 도청으로 알아내어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전화하시는 건가요?"
"댁에 안계시는 동안 제가 조치를 취해 놨습니다."
"실례지만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냥 크레타라고 불러 주십시오."
"크레타…."
"크레타 섬에서 당신은 알아서는 안될 것을 알고 말았습니다."
"만나서 얘기해요. 이런 얘긴, 더 못하겠어요."
가슴이 뛰었다. 크레타섬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아니, 없는 것 같다. 크레타섬.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사랑―해.'
머리가 아파왔다. 하필 이런 때에 편두통이 다시 도지다니. 그 때 수화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레타 섬을 생각하지 마세요., 크레타 섬은 당신은 모르는 곳입니다. 당신은 지금 아파트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그냥 오래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계속해서 그 얘기를 되풀이해서 말했다. 5분 정도가 지나자 편두통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20십분 정도 조금씩 잡다한 수다를 조금씩 해나가자 편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 괜찮습니까?"
"제가… 심한 편두통을 앓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제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어느날 밤, 심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제우스가 단단히 심술을 부리고 가는 듯 했다. 비바람과 천둥번개로 우리는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비바람은 말끔히 가셨다. 해안은 더없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해변을 거닐던 도중 이웃에 사는 뚱뚱한 여인을 만났다. 폭풍 속에서 어떤 동양인이 이 마을에 왔다는 것이었다. 요시키는 또 다른 좋은 이웃에 생길지도 모른다고 좋아했다. 우리는 티타임을 가지기 위해서 별장으로 돌아갔다. 별장 앞에는 검은색 볼보가 서 있었다. 집 안에 누군가 있는 듯했다.
"누구시죠?"
요시키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은발의 남자가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K가 뒤돌아 보았다.
"오랫만이구나."
"이곳은 어떻게 아셨죠?"
요시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K는 요시키를 쳐다보며 나에게 말을 계속했다.
"스케치여행을 무려 6개월씩이나 하다니, 대단한 졸업작품을 그릴 작정인가 보구나. 이 남자는 네가 찾던 모델인가 본데, 한달에 얼마나 주고…."
"그런 식으로 매도하지 마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K는 파이프를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앞에 있는 쇼파에 앉기까지 무척 힘이 들어 보였다. 오늘따라 그의 짧은 왼다리가 다리가 더욱 더 그의 몸을 지탱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 어머니와 똑같은 소릴 하는구나."
제 5부 J's Bar
크레타와는 아카사카역 근처에 있는 허름한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지하철 내에서 내도록 크레타섬에
관한 여행가이드북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레팀논이라는 마을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그 때 아카사카역에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얼른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약속장소로 갔다.
다방이 의외로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참을 헤맨 다음에야 찾을 수 있었다. 한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하기에는 너무 더운 곳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냉커피를 시켰다. 벽에는 니코틴이 배어 있어서 실내에 냄새를 더해주고 있었다. 냉커피를 시키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가씨, 더운 날씨에 이런 다방은 너무 덥죠? 뒤따르는 사람도 있을테니 화장실 뒷문으로 나가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J's Bar를 찾아 가도록 해요. 그곳에 가서 화교인 주인을 찾으세요. 그럼 크레타로 가는 시원한 티켓을 드릴겁니다."
나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화장실에 나있는 쪽문을 통해서 건물 후면으로 빠져 나와서 곧장 택시를 잡아 타고 J's Bar를 찾아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졸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세요, 화교인 주인을 찾고 있는데요."
그 남자는 졸린 눈을 비비다 말고는 나를 훑어 보았다.
"저기 주방에 가면 만날 수 있을거요."
그 남자는 말을 끝내고 다시 잠을 청하는 듯 했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어떤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죠? 왜 제게 계속 접근하려 하는거에요? 크레타라는 이름 말고 당신의 정체를 밝히세요."
"이곳은 제 사무실입니다. 한때 재즈바를 경영하기도 했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입술 언저리에 거뭇하게 난 수염자리가 보기 좋은 남자였다. 하지만 가끔씩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몸서리치게 했다.
"제 이름은 히로시 사부로입니다. J라고 부르기도 하죠. 일주일 전쯤에 당신의 꿈속에서 만났었죠. 그 때보다 실제로 뵈니 더욱 아름다우신 것 같군요."
그날 밤 꿈속에서 나를 부르던 사람은 이 남자가 아니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당신이 아니었어요. 확신…해요."
말하는데 숨이 찼다. 머리 속에서 누군가 손톱을 세워서 마구 긁어대는 것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에네르기를 이용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당신에게 제가 텔레파시를 보내어 잠재된 기억으로 침투를 했습니
다. 아마도 당신의 잠재 속에 잠들어 있던 그 누군가로 투영된 거겠죠."
"당신이 왜 제게…."
머리가 터질것만 같았다. 이상하게도 과거를 기억하려는 순간에는 늘 극심한 편두통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나는 한쪽 벽에 기대며 서서히 중심을 잃어갔다. J가 급하게 부축하며 나를 의자로 이끌었다. 독한 진을 한잔 가득 부어 내게 마시게 했다. 진의 역겨운 냄새가 위로 넘어가자 구토가 일었다. K가 삽으로 나를 파묻던 꿈이 생각났다. 그는 나에게 구토를 참지 말라고 했다. 의자 밑으로 진과 함께 노란 물이 넘어왔다. 10여분 뒤에는 안정을 되찼았다.
"당신의 전두엽에 있는 기억을 관장하는 시신경이 약물로 인해 조금 손상되었습니다."
"약물이라뇨?"
"프로파인계로 제가 발명한 것입니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동시에 자백을 받아내게 되죠. 그 어떤 약물보다 강해서 그 사람의 기억마저 지워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평생동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채 손상된 신경이 자극될 때마다 괴로워하게 극심한 편두통에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저와 같은 경우겠군요."
"요시키군의 행방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그런 사람 몰라요.. 왜 다들 요시키라는 사람의 행방을 내게서 찾죠?'
"당신의 손상된 전두엽에 어떤 기억들이 내재했었는지 궁금하실텐데요."
요시키라는 사람이 낯설지가 않았다. 꿈속에서 나를 불러세운 사람은 그였을지도 모른다.
"4년 전에 어르신께 의뢰를 받았습니다. 당신을 찾아서 프로파인을 주사해 기억을 지우라는 거였죠. 그런데 그 때는 프로파인의 영향력에 대한 자세한 검증이 없었습니다. 다만 기억상실을 유발한다는 정도 밖에 몰랐었죠."
"아저씨의 부탁을 받았다면서 왜 제게 이런 말을 하는거죠?"
"아뇨, 오해마세요. 이번 일은 요시키군의 부탁을 받고 당신에게 연락을 드린 겁니다."
"요시키가 제게요?"
그가 어머니라는 말을 했다. 어머니를 알고 있는 것이다. 요시키는 주방으로 들어가서 커피를 뽑았다.
"어머니라뇨?"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요시키가 모두에게 커피를 권했다.
"자넨 나가 있지 않겠나?"
요시키를 내보낸 다음 K는 커피를 마셨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 하긴, 그 사람. 자존심이 여간 아니지. 널 보면 그 사람 고집을 닮은 데가 있어."
"어머니를 어떻게 아시죠? 아버지는 한번도 어머니 얘길 꺼낸 적이 없으세요. 작은 아버지 조차도."
"네 어머니와 난 사랑하는 사이였다. 단지 조금 늦게 만났다는 것만 빼면 우린 서로가 행복했었다. 너를 배고 있
을 때 수상이 주관하는 리셉션에서 만났지. 너를 낳고 나면 네 아버지와 이혼하고 나와 크레타섬으로 밀월여행을 가자고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말았어. 같이 크레타섬에 갔지만 나올때는 나 혼자 나와야만 했다."
"왜죠?"
"네 아버지가 우릴 따라와서는 네 어머니를, 아니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절벽에서 밀어서 죽여 버렸다. 네 어머
니는 죽기 전에 네 아버지에게 이?품? 얘기했어. '그렇게 매도하지 말아요, 우린 사랑하는 사이에요'라고 말야."
"아버진 그러실 분이 아녜요."
눈물이 흘렀다. 이십 삼년간 꿈꾸던 나의 공상은 여리고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너는 네 어머니의 분신이다. 네 오빠도 이 사실을 알고는 너를 데려가려고 했지.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았어.
내가 그랜드 케년에서 밀어 버렸거든. 아무도 네 곁에 있을수 없어. 나만이 허용될 뿐이야."
"당신은 사람도 아냐. 이제껏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요시키가 들어왔다. 흥분하고 있었다.
"당신이 여태껏 내 여자를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니 고맙군요. 이젠 내가 맡을테니 걱정말고 나가 주시죠."
"요시키군. 오히려 그 반대야. 여기서 없어져야 할 사람은 바로 자네야!."
밖에서 검은 무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나에게 주사를 놓고 난 뒤 침대로 데리고 들어가서 재우려 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요시키의 모습은 모이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왔다. K가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 6부 J의 고백
잠시동안 크레타섬의 이곳 저곳을 상상하면서 여유를 갖고자 노력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크레타섬의 소금기 많은 습한 열대성 바람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 아저씨가 나와 오빠를 맡았을 때부터 뭔가 있었던 것같다. 레팀논 마을의 해상동굴을 상상했다. 작은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내 미안하다는 말만 하셨다. 발가락이 간지럽도록 시린 해수에 발을 담그고 싶었다. 아버지가 실종되신 것과 작은 아버지의 죽음, K가 소떼를 몰아넣듯 우리 가족을 함정의 우리로 몰아 넣은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게 솔직하셨으니까 이것도 대답해 주시겠죠?"
"말씀하시죠."
"크레타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죠? 내겐 그곳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그렇지만 이토록 집착하는걸 보면 그 섬에
서는 뭔가 잃어버린 기억의 고리를 찾아줄수 있?? 것만 같아요. 요시키와 저는 어떤 사이였죠?"
"당신은 그 섬에서 요시키와 6개월 동안 동거를 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뒤를 추적하면서 많은 것을 알아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필요 이상으로 당신에게 집착하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당신의 가족관계부터 조사했습니다."
"당신이 작성한 보고서에 내가 고아라는 것 외에 다른 사항이 있었나요?"
나는 그를 빈정거리듯 천천히 뜯어 보았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당신의 아버지 도키다 겐지는 197X년에 구레타라는 여성과 결혼해서 당신과 당신의
오빠인 히데토를 연년생으로 낳았습니다. 그 이듬해 구레타는 크레타섬으로 여행을 갔다가 레팀논 절벽에서 실족사해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더군요."
레팀논 마을에는 해상동굴과 절벽이 있다고 여행가이드북에 사진과 글이 자세하게 실려 있었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분이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나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빠에게는 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어머닌 실족사를 당하셨군요."
"그런데 그녀의 죽음에는 분명치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구레타가 죽은 지 삼일 뒤에 어르신께서 크레타섬에서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주일 뒤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유럽출장 겸 크레타섬을 다녀와서 귀국했더군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구레타와 어르신은 보통 사이가 아니었던 거죠. 도키다도 그걸 알고 있었던거구요. 3년 뒤 도키다는 원양어선 사업을 시작했고 정경유착을 통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198X년 도키다 겐지는 동생 도키다 신지가 설계한 배를 타고 시항을 하러 대서양으로 떠났습니다. 향해일정이 대서양으로 잡혀 있었지만 배는 지중해 지브롤터 3543지점에서 실종됐습니다. 그 뒤에 신지가 사장이 되었지만 주가조작설과 함께 은행에서 어음이 돌지 않아서 결국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물론 어르신의 방해공작이었죠. 얼마 뒤에 주주총회에서 어르신이 만장일치로 대표이사로 선임되었고, 3일 뒤에 도키다 신지가 자살했더군요."
믿을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K가 관여하고 있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나에게 의붓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나무랄데 없이 아버지 역할을 해 주었다. J가 가짓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그 말은 도저히…."
"믿기지 않겠죠. 그러나 아직 한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당신의 오빠도 199X년 미국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던데 그때에도 어르신께서는 미국으로 출장을 가셨습니다. 뉴욕에서 업무를 마친 후에 서부 애리조나주로 가서 그랜드 캐년 공원을 관람했더군요."
"오빠가 죽은 것도 그럼 아저씨가 꾸민 짓이란 말예요?"
"그렇습니다. 그런 뒤에 당신과 함께 유럽여행을 갔다가 당신이 어느 날 밤에 도망친 거죠."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요시키를 만나서 모든 걸 확인하고 싶었다. 요시키가 필요했다.
"요시키를 만나게 해줘요.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죠?"
눈을 뜬 곳은 알수 없는 장소였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달빛 대신 세찬 눈보라가 새어 들어왔다. 요시키가 보고 싶었다. 사람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일어나셨군요."
어둠 속 저편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은 진정제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아가씨, 이곳은 몽블랑에 있는 산장입니다. 해발 3천미터가 넘
는 곳이라서 눈이 내릴 때 이곳에 남게 되면 이듬 해에 눈이 녹을 때까지 꼼작할 수가 없습니다."
애덤의 목소리였다. 요시키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요시키군은 잘 있습니다."
애덤은 내 생각을 꿰뚫은 듯 한마디를 덧붙이고는 방을 나갔다. 그러고 난 뒤에 나는 길고 긴 죽음같은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난지 몇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몸을 일으켜 세운 다음 침대에서 간신히 걸어 나왔다. 분명히 이 집 어딘가에 요시키도 있을 것이다. 그를 느낄수 있었다. 다행히 방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방을 빠져 나와서 벽을 더듬으면서 길다란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푸른수염이라도 나올 것처럼 스산했다. 복도 끝에 다달았을 즈음 끝방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부로, 요시키란 놈에게 그 약을 투여하게. 죽어도 좋지만…. 내 딸아이의 정서를 고려해서 심하게는 다루지 말
게."
"어르신, 프로파인은 자백제로 쓰이는 약물입니다. 기억상실을 동반하긴 하지만 그 자체는 아직 검증받은 것이 아니라서 생명에 지장을 줄지도…."
"자네는 내가 시키는 일만 하고 곧장 여길 떠나주게. 돈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입금시켰 놨네."
K와 누군가 류이치의 행방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듣는 순간 나는 바람맞이 창문턱에 올라앉아 커튼을 치고 숨었다. 어떤 남자가 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가서 십 여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식량창고로 들어갔다. 그곳에 요시키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뒤로 돌아 들어가서 창문을 찾아내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밀가루 푸대 옆에 요시키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 남자는 쓰러져 있는 요시키의 팔에 주사를 놓고 있었다. 그런 다음 요시키의 맥박을 재고나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거의 기어 가다시피해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요시키, 정신 좀 차려봐요."
그의 입에서 노란 구토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흔들어 깨우자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얼른… 이곳에서… 나…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에서 구토물이 계속 새어 나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밖으로 데리고 가서 차고에 있는 차를 타고 나가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꼭 죽을 것처럼 계속해서 온 몸을 떨었다.
"어딜 가시죠?"
K와 말을 나누던 사람이었다. 해를 등지고 문밖에 서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돈을 더 줄테니까 우릴 보내줘요."
그가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가슴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내어 내 팔목에 꽂았다. 나는 그의 소매를 붙들고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제 7부 요시키의 죽음
그를 따라간 곳은 요코하마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에 있는 병원이었다. 병원 왼쪽에는 요양소로 쓰이는 3층짜리 건물이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교회도 딸려 있었다. 그 사람도 나처럼 프로파인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병원 지하였다. 소독계열의 약물냄새가 지하실 내에 감돌고 있었다.
"이곳에 병실이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군요."
그는 나를 보며 그냥 따라오라는 식으로 눈빛을 보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영안실이었다.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일주일 전에 기도폐쇄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사망했습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죠."
절망적이었다. 요시키는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 이외에는 나에게 어떤 확신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발작으로 인해 폐인과 다름 없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죠. 그날 제가 너무 많은 양의 프로파인을 주사했기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입니다. 그가 죽기 이틀 전에 평소보다 심한 극도의 정신분열 상태를 보이다가 약 5분 정도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나에게 말했죠. 내 죄값으로 당신을 찾아서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대신 지불하지 않겠냐구 말이죠."
"그 죄값을 지불하는 대신 받은게 있겠죠. 뭐죠? 돈인가요?"
그가 웃었다. 소리내어 웃고 있었지만 얼굴표정은 거의 굳어 있었다.
"죄값대신 지불한 것이라…. 역시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제게도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 서로 거래한게 뭐죠?"
J는 시체보관함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어떤 곳에서 멈춰섰다. B-162라고 쓰여진 보관함을 열었다. 요시키였다. 그는 희고 엷은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멀리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나는 J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나에게 당신을 그린 그림을 전부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섬뜩했다. 가까이서 확인하자 그 동안 그의 심리적인 상태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자신에게 마구 학대를 했던 것으로 보였다. 다시 살펴 보았다. 온 몸 여기저기를 긁어대서 온통 손톱자국이었다. 왼쪽 눈은 아예 파져 있었고 손톱 밑도 다 까져 있었다. J가 옆에서 무슨 말을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귀가 멍해져 왔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잠깐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코끝에서 제비꽃 향기가 났다. 깨어난 곳은 병원 1층에
있는 응급실이었다. 팔에 링거주사가 놓여 있었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그를 화장해서 제게 가져다 주세요. 사례는 하겠습니다."
"사례는 필요없습니다. 그것까지 계약되어 있으니까요."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눈이 내릴 때 이곳에 남게 되면 이듬해에 눈이 녹을 때까지 꼼작할 수가 없습
니다. 애덤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멀리서 개짖은 소리가 들려왔다. K가 가장 아키는 도베르만이었다. 근처에 K도 있을 것이다. 멀리서 검은색 볼보의 실루엣이 보였다.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말이 입 속에서만 맴돌았다. 나는 곧 승합차에 태워졌다. 안에서 어떤 남자가 내게 주사를 놓았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시야가 흐려져 갔다.
볼보였다. 멀리 승합차 뒤에 볼보가 서 있었다. 눈을 뜨자 K와 애덤이 보였다. K의 옆에 삽을 들고 있던 애덤이 직접 나를 눈 속에 파묻고 있었다. 하늘에는 눈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저항할 힘이 없었다. 하체에 감각이 없었지고 입에서는 계속해서 침이 흘렀다. K는 나에게 잠시만 이렇게 있으면 되는거야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가버렸다.
죽음같은 긴 잠을 잤다. 제비꽃 향기가 났다. 주위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긴 어디죠?
"몽블랑에서 일주일 동안 눈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파요.
"이봐요, 괜찮은 거에요? 선생님, 환자가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가씨, 이쪽을 보세요."
의사가 눈에 후레쉬를 비추었다.
"이름이 뭐죠. 말을 할수 없으면 여기 노트에 적어 보세요."
나는 펜을 겨우 집어 들고서 노트에 적었다.
제가 누군지 저도 모르겠어요….
실어증 증세는 한달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억상실증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검은색 볼보를 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원장이 나를 불렀다. 원장실에는 은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 기색에 겨워 눈물을 보였다.
"이제야 찾았구나. 그동안 너를 찾아서 프랑스 각지에 있는 병원을 다 뒤졌단다."
그는 어디 아픈데라도 있냐는 듯이 내 몸 여기저기를 만지면서 확인했다.
"누구시죠?"
냉정한 나의 말투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르신이십니다."
원장은 그동안 나의 병력에 대해 은발의 남자에게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린채 지낼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다. 순간 그의 얼굴에 평온함이 언뜻 보였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아이는 제 외동딸입니다."
그가 나에게 모든 얘기를 해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와 오빠를 맡게 된 일, 히데오빠의 죽음, 스케치 여행에서 실종된 것 등 세세한 이야기를 듣고나자 하나씩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도미노현상처럼 연쇄적으로 기억속에서 반응을 일으키며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사람은 나의 유일한 가족인 K라는 것,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왠지 두려운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스케치 여행 이후 이 병원에 오기까지 약 일년 정도의 기간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런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커다란 벽에 사방이 가로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남자의 나체가 생각났다. 그 생각으로 인해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속이 메스꺼워 지고 구토가 일었다. 원장이 나에게 다가왔지만 나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갔다.
제 8부 K의 추락
하루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내 그림에는 깊이가 없었다. 깊이를 찾기 위해서 헤매인 결과, 요시
키와의 만남이자 그의 죽음이었다. 토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형이 실종된 이후로 시코쿠에서 살다가 얼마전 집을 장만해서 오키나와로 옮겨갔다고 J가 알려 주었다. 분명 K가 집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손에는 토시의 주소가 들려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차례로 잃었다. 어머니, 아버지, 작은 아버지, 히데오빠 그리고 요시키. K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한 대가로 무언가를 남겨 주어야 한다. 결심이 섰다. 곧 오키나와행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나는 대합실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4번 GATE로 들어갔다.
오키나와에서 토시가 사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 배를 3번 정도 갈아타야 했다. 곧 태풍이 상륙한다는 일기예보 때문
에 고깃배들은 부둣가에 꼭 매어 있었다. 배편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위험수당까지 얹어서 배삯을 내어서야 겨우 배를 구할 수 있었다. 선장은 한국인 2세였다. 태풍을 무릅쓰고 가는 길이라며 계속해서 떠들어 대는 통에 멀미가 더해왔다. 30분 정도가 지나서 그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아주 작고 외딴 곳에 있는 섬이었다. 마을에 배가 대이자 부두가 근처에 사는 어부가 구경을 하러 왔다. 그 사람에게 토시의 행방을 물었다. 선뜻 그 곳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나를 그 곳으로 이끌었다. 그는 나를 토시의 여자친구로 오해를 했는지 그 동안 토시가 얼마나 성실하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 만한 나이에 어부가 되겠다고 시골로 들어오는 청년은 드물다고 계속해서 이야기 하는 동안 토시의 집에 다달았다. 어부와 헤어지고 나서 그 집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그물을 메고 돌아오는 토시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외면하면서 아무말 없이 그대로 집으로 들어갔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토시는 담배를 찾아서 입에 물었다.
"담배는 안피는 걸로 아는데."
그는 말이 없었다. 그도 형에 대해서 뭔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형에 대해서 말해 줄게 있어."
"어디있죠? 아마… 죽었겠죠."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가방에서 요시키의 骨壺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미안해, 이런 소식을 들고 오고 싶진 않았는데."
"형의 죽음 대신, 우린 이 집과 고깃배를 얻었어요. 차라리 그 편이 낫죠."
담배는 불이 꺼져 있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것을 빨아 당겼다.
"용건이 있어서 왔어. 마지막으로 같이 할 일이 남았어. 그걸 같이 하려고 찾아 온거야."
그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껐다. 비를 피해 나에게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오키나와에서 돌아온지 삼일째다. 토시와 나는 계획에 착수했다. 애덤은 K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K가
정경유착이나 우익의 입을 빌어서 행한 갖가지 비리들은 애덤은 낱낱이 알고 있다. 그를 납치해서 자백을 조금만 받아내도 K를 파멸시킬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권력의 맛을 본 사람에게 권력에 의해 파멸당하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토시에게 J를 만나서 프로파인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나서 애덤이 퇴근 후에 항상 들리는 이자까야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도록 시켰다. 애덤에게서 받아낼 게 있었다.
애덤은 업무가 끝나는 밤 10시 이후에 사무실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이자까야에서 술을 마신 뒤 귀가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날도 10시에 사무실을 나와서 술을 마신 다음 11시 30분 쯤에 술집을 나와서 근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차장 근처에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함 뒤에서 기다리던 토시에게 애덤은 둔기로 머리를 난타 당했다. 토시는 조심스레 그를 차로 옮겨 싣고 J's Bar로 데리고 왔다.
애덤이 정신을 차리자 토시는 손에 들고 있던 주사를 팔에 놓았다. 애덤은 아직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흔들면서 주사를 놓은 것도 모른채 주위를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쓴 웃음을 흘렸다.
"아가씨, 장난이 과하신 것 같습니다."
토시는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게 장난으로 보여? 오늘 장난이 뭔지 보여 주겠다."
토시가 주먹으로 그를 마구 때렸다. 나는 흥분한 토시를 막아서며 애덤에게 말했다.
"아저씨가 벌인 일 중에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걸로 얘기해 줘요."
"제가 말씀 안드릴거라는거 알고 계시잖습니까?"
"애덤, 당신은 프로파인을 맞았어. 치사량보다 1밀리그램을 더 넣었지. 아마 자백을 하다가 너무 괴로운 나머지 한쪽 눈알을 파낼지도 몰라."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갔다. 평소에 흐트러짐 없던 그도 지금 이 순간에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앞으로 1분 남았어. 각오하고 있으라구."
약 1분이 지나자 그가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쉴새없이 침이 흘렀고 극도의 경련을 일으키며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주절주절 말을 해댔다. 5분이 지나자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J가 입을 열었다.
"이제 질문 하면 자백할거야."
"애덤, 아저씨가 최근 벌인 일이 뭐죠?"
"국제 노조와 관련된… 철강노조파업을 뒤에서 조종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제노조가 일본정부에 노조를 위한 조약을 요구하게… 되죠. 국제노조가 일본에 진출할 경우… 어르신께서는 그 조약으로 인해 이…득을 보게 되십니다."
애덤은 말을 끝내자마자 곧 극심한 경련에 시달렸다. 인간의 눈으로 지켜본다는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토시에게 국제노련과 관련된 파업기사를 맡고 있는 신문기자를 서배하도록 했다. 나는 곧장 K의 집으로 갔다. K는 집에 없었다. 나는 서재로 들어가서 그의 책상 서랍을 뒤져서 국제노조와의 밀서를 찾아내어 복사를 한 뒤 다시 제자리에 두고 집을 나왔다. 밖으로 나가던 중 K의 차가 차고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검은색 볼보를 보자 일종의 연민 같은 것이 일었다. 여리고성은 곧 허물어질 것이다.
다음날 아침 요미우리 신문사의 여기자에게 자료를 복사해서 팩스로 보내 주었다. 그날 저녁 석간 1면에는 K의 기사와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뒤 일주일 동안 일본열도를 뜨겁게 한 것은 K의 비리 내용이었다. K는 추락하고 있었다. 내일 쯤 검찰에서 소환장을 보낼 예정이라고 뉴스에서 떠들어 댔다. 애덤은 지금 요시키의 시체가 보관되었던 병원에 뇌사상태로 입원 중이다. 소환이 끝나고 죄가 확정되면 도미노처럼 다른 범죄도 연쇄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가 일본에서 발붙일 곳은 더 이상 없다.
K가 소환되고 난지 일주일 뒤에 나도 소환되었으나 간단한 의례상의 절차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리고 있었다.
K와 국제노조와의 관계가 밝혀지고 형이 확실시 되고 나서 나는 토시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같다. 레팀논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어떤 별장 앞을 지나가다가 별장 관리인이 만났다. 그는 나를 반기면서 요시키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안부를 뒤로하고 토시와 함께 해상동굴로 갔다. 동굴은 마을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위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왔다. 토시와 나는 아무 말없이 뼛가루를 동굴 근처 허공에 날렸다. 토시는 눌물을 보였다. 가슴에서 심장과 폐가 서서히 움직임을 그쳐가고 있었다. 이제야 신 앞에서 예외자적인 운명을 응시할 수 있을 것같다. 그가 죽으면서 나도 죽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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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Tears라는 곡을 듣고 막연하게 써두었던 소설인데요. 용기를 내서 올립니다. 여러날에 걸쳐서 손질을 했는데도 어색한 부분이 많네요. 글쓰는게 좋아서 그냥 써본거니까 아무 생각없이 읽어 주시면 감샤..
앞의 큰 단락은 현재진행형이구요, 뒷단락은 과거에서의 현재진행형이거든요. 헷갈려하실까봐 밝힙니다. 그리고 요짱을 죽이고 싶진 않았지만, X에서 요시키만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 없는 것같아서 그렸게 했어요. f^^;
참고로 하루키 글에서 모티브를 많이 따왔어요. 단편 화요일의 여자들과 태엽감는 새에서 전화나 구레타를, 수필 먼 북소리에서 그리스 크레타섬을, 그리고 하루키가 젊은시절 직접 운영했다는 J's bar 등등 말이죠.
마지막으로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