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의 수필공원 산책 - 김학
계간 수필세계 수필평
가슴을 울리는 풋풋한 신예수필가들의 작품
김학
누가 뭐래도 지금은 수필 전성시대다. 각종 문예지마다 수필을 보듬고있고, 수필전문지가 속속 창간된다. 수필이 제대로 대접을 받는 시대에 접어들었나 보다. 지금 바깥 세상은 온통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이지만 우리 문단은 불황을 모른다. 봄이나 가을이면 문학세미나니 문학기행이니 하며 떼지어 명산대천을 찾고, 해외문학 심포지엄이니 뭐니 하며 해외나들이를 하느라 소중한 달러를 소비하고 있다. 가난해서는 문인노릇 하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아이엠에프 때에도 문예지가 도산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창간되기도 했었으니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을 빼버린 어느 종합문예지가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다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계간 수필세계>가 수필전문지로서는 막내가 아니다. 뒤이어 벌써 <에세이21>이 태어났고, 이어서 부산에서도 수필전문지를 창간한다고 원고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회 역시 계간 수필전문지를 창간하려고 서두르고 있다. 우리는 지금 수필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원고가 없어서 발표를 못하지, 지면이 모자라서 원고를 발표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글 쓰는 이에겐 참 좋은 시절이 아닐 수 없다.
수필평론 역시 활성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각종 종합문예지나 수필전문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수필평을 싣고 있으니 말이다. 아쉬운 것은 그 수필평이라는 게 한국수필문단의 총체적인 수필 평에 이르지 못하고 국지적인 평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수필문단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필 평이 소망스러우나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 겨우 자기 잡지에 발표된 수필에 한정하여 메스를 들이대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 아쉽다는 이야기다.
어떤 수필평자는 1년에 1,800편의 수필을 읽고 그 중에서 좋은 수필을 고른다고 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필을 쓰는 등단수필가가 2,000명쯤 되리라 추산해본다면 그들이 1년에 한 편씩만 수필을 쓰더라도 1년에 2,000편이다. 그들이 1년에 5편씩의 수필만 창작한다해도 무려 만 편이다. 또 그 작품들이 발표되는 종합문예지와 수필전문지 그리고 동인지, 단행본까지 모두 구해서 읽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떤 평자들은 으레 수필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수필작품의 수준은 제자리걸음이거나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고 꾸짖는다. 과연 그 평자들이 이 시대에 발표되는 수필들을 모두 다 읽은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게 합당한 이야기일까? 천군만마를 호령하듯 오만불손한 그런 자세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생각한다.
수필은 겸손의 문학이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문학이다. 수필문단을 한 마디로 격하시키는 그런 무례한 표현은 겸손하지 못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태도라면 차라리 수필 평을 쓰지 않는 게 옳다고 본다. 그냥 진솔하게 자기가 읽은 수필에 국한하여 논지를 펴는 게 옳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숲을 이야기한다거나 모래 한 알을 보고 사막을 논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나는 오히려 중견이나 원로의 작품에서보다 신인들의 작품에서 가슴을 울리는 풋풋한 작품을 만나는 수가 많다. 그런 작품을 만날 때마다 나 자신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앞으로 이들이 중견이 되고 원로가 되면 얼마나 좋은 수필을 빚을지 예상해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문학에서는 나이나 경력이 훈장일 수만은 없다. 다만 누가 어떤 작품을 썼느냐가 중요한 일이다. 남의 작품을 폄하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제대로 평가하려면 몇 번쯤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얼마나 지난한 일이겠는가?
수필세계 가을호에는 많은 수필작품들이 게재되어있다. 원로와 중견, 신인의 작품이 비교적 고르게 담겨져 있다. 수필이론과 다양한 내용의 연재수필, 지역수필동인회 순례, 우리시대의 수필작가, 한국의 수필 세계의 수필, 정진권의 고전수필역해 등 읽을 거리가 아주 푸짐하다. 진수성찬이다. 불과 280쪽의 지면에 이처럼 다채로운 읽을거리를 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문예지에서 시도하지 않은 참신한 기획이 돋보였다.
이 계절의 신작20선과 신예작가 12인 신작선에 눈길이 먼저 갔다. 신구세대의 수필이 어떤 차이점을 보여주나 관심이 끌렸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계절의 신작20선과 신예작가 12인선의 작가 선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신작 20선은 대체로 중견수필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진 듯하다. 그 작품들은 대체로 교과서적인 수필이론으로 무장된 작가들의 작품이기에 대부분 정격수필(正格隨筆)들이다. 체험에 작가의 느낌과 상상을 버무려서 쓴 작품들이다. 깊이 음미하면서 읽어야 할 작품들이다.
우선 목차를 펼쳐서 신예작가 12인 신작선을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제목들이 많았다. 황원준의 농월정, 최남미의 가시고기, 문혜란의 바람의 옷, 문경희의 괜찮다, 김인호의 틀니 산행, 김명진의 못박기, 강경채의 화인(火印)이 눈길을 끌었다. 일단 제목 뽑기에 성공한 작품들이라 생각되었다.
제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내 경우 책을 읽을 때 먼저 표지를 살피고 그 다음에는 목차를 펼쳐든다. 목차에서 내 작품이 나올 경우 그것부터 읽고, 그 다음 아는 이들의 작품에 눈길을 보낸다. 그 뒤에는 관심 있는 특집에 눈길을 주고, 그 뒤에는 작품의 제목을 살핀다. 좋은 제목의 작품을 먼저 읽는 것은 내 버릇이다. 제목이 독자인 나를 유혹하지 못하면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읽는 순서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신문의 편집자나 텔레비전의 편성담당자가 기사나 프로그램의 좋은 제목을 뽑으려고 고심하는 태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독자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낼 수 있는 제목을 뽑는 일은 수필가들에겐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쯤에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황원준의 농월정》은 기행수필이다. 화자가 찾아가는 곳은 유명한 팔담팔정(八潭八亭) 중 농월정(弄月亭). 달과 더불어 노니는 정자이니 퍽 운치가 있을 법하다. 제목에서 한자를 곁들여주었더라면 좋았겠다. 소리글자인 우리말만으로는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장이 매끄럽고 속도감이 있다. 목적지에 들러서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돌아오는 여행을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은 작가의 생각에 공감이 간다. 서두부터 Fan하던 카메라의 앵글이 농월정의 잔해를 Close Up시켜주어 독자가 직접 눈으로 보는 듯 사실감을 높여준다.
일대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묘한 자리에 있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멋들어진 정자였다는 농월정은 숯 무덤이 되어있다. (중략) 서까래는 숯가루가 되었고 기둥과 대들보는 겉이 쩍쩍 갈라터진 채로 널브러져 있다.
《황원준의 농월정》 중에서
누군가가 고의로 불을 질러 태워버린 농월정의 처참한 잔해를 이렇게 묘사함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분노에 공감토록 한 대목이다. 마치 초점을 잘 맞춰 찍은 사진처럼 선명한 작품이다.
《최남미의 가시고기》는 이야기가 있는 서사수필이다. 한 번 읽고 책장을 덮어도 독자의 머리에 줄거리가 선명하게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문장의 세련미는 다소 미흡하다. 그러나 자식들을 위하여 피땀 흘려 가꾸던 농토를 팔고 죽어간 장군머리 아저씨를 부성애가 강한 가시고기에 비유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이 작품에 서정성을 더 가미했더라면 좋았겠다.
《문혜란의 바람의 옷》은 생활 속에서 건져 올린 토속적인 소재로 매끄럽게 꾸민 서정수필이다. 문장이 나긋나긋하고 구성에 짜임새가 있다. 어휘 하나하나가 반들반들 윤이 나고 아름답다. 갓 새댁시절 모시옷을 손질하여 시어머니의 칭찬을 들으려 했던 작가가 결국 시어머니에게서 칭찬을 듣지 못했던 아픈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모시옷을 손질하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다.
종이 호랑이가 된 시어머니를 보면서 모시한복을 입혀드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풀먹인 모시처럼 꼿꼿이 허리가 펴질까. 당신의 마지막 날에도 나는 모시옷을 입히고 싶다. 그리하면 바람처럼 훨훨 하늘로 가실 테지.
《문혜란의 바람의 옷》중에서
두려울 만치 도도하고 기품이 있던 시어머니가 93세의 노환으로 아들 며느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작가는 회한에 젖는다. 위 인용문 중 "나는 모시옷을 입히고 싶다."는 "…입혀드리고 싶다."로 바꾸면 좋겠다. 그 위 문장에서도 "…새우등처럼 굽었다."보다는 "…새우등처럼 굽으셨다."로 바로잡았으면 한다.
《문경희의 괜찮다》는 아버지를 화소로 한 수필이다. 아버지의 69회 생신 날 5남매의 자녀들이 모였는데 아버지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평소에는 매사 괜찮다고 하시며 자녀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시는 아버지를 종합병원에 모시고 가서 진찰을 받는 과정을 리얼하게 잘 그린 수필이다. 초조하고 불안한 딸의 심정이 진솔하게 잘 표출되었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화자의 심리적 변화와 창조적 상상력이 잘 버무려진 글이다. 서두와 내용 전개도 좋지만 결미가 멋지다.
자식들이야말로 정말 괜찮다고, 언제든 달려가겠노라고…….
《문경희의 괜찮다》결미에서
아버지가 늘 '괜찮다괜찮다' 하시던 그 말씀을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되돌려드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어 독자로 하여금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게 한 솜씨가 좋다. 그런데 위에서 열두 줄 째 "아버지께서는 멀찍이 떨어진 대기실 의자에 사진처럼 앉아 계신다."의 '사진'처럼 앉아 계신다는 비유가 어색하다. 사진은 앉아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차라리 '조각상'이나 '마네킹'이란 어휘로 바꾸는 게 어떨까싶다.
《김인호의 틀니산행》은 제목부터가 특이하고 참신하여 독자를 사로잡는다. 틀니와 산행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제목 못지 않게 화소가 이색적이어서 읽는 맛을 느끼게 한다. 산을 인체에 비유한 것이야 흔한 이야기지만, 안방의 구겨진 이불을 보면서 산을 떠올리는 것이라든지, 탁자 위에 빼놓은 틀니에서 설악산의 용아장승을 떠올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비슷비슷한 소재의 수필이 많이 발표되어 식상하기 쉬운 요즘에 대어를 낚은 느낌이다. 적절한 비유법이 글을 더 감칠맛 나게 한다.
산에서 인체와 닮은꼴을 찾는 일도, 사물에서 산을 발견하는 일도 나에게는 크나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버릇이란 손익을 벗어나는 일 아닌가.
《김인호의 틀니산행》결미에서
늘 서서 바라보던 사물도 때로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면 새로운 그림으로 보이듯 그런 낯설게 하기 수법을 활용하여 수필의 소재를 바라보는 것도 좋은 수필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는 본보기 수필이다.
《김명진의 못박기》는 단순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소재에 의미를 부여하여 인생문제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화자가 흙에서 채취한 자연의 색으로만 그린 그림을 전시한 '땅꽃전'에 들렀다가 '산국'이란 작품을 사게 된다. 달포가 지난 어느 날 그 그림을 걸려고 벽에 못을 박으면서 수필의 발단은 시작된다.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기란 그리 손쉬운 일이 아니다.
적당한 정도의 도전이 있으니 오히려 짜릿한 희열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기를 얼마간, 거부하고 튕겨 대던 벽에 드디어 못이 자리를 잡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김명진의 못박기》결미에서
몇 번의 실패 끝에 못이 박히기까지의 과정에서 깨달은 심리적 변화가 잘 그려진 작품이다. 콘크리트 벽에 못이 수월하게 박혔다면 이런 수필은 탄생되지 않았으리라. 난생 처음으로 벽에 못을 박으면서 멋진 한 편의 수필을 건진 셈이다. 이 작품 역시 체험과 깨달음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경채의 화인火印》은 이름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의 울타리를 넓혀나가는 솜씨가 대단하다. 여권을 발급 받으면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찍게 되고 거기에서 이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일반화 과정을 거쳐 노예의 등에 찍는 화인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또 항해사가 자신의 배에 고향 마을이름이나 연인의 이름을 새기는 예화를 소곤소곤 들려주고, 성직자를 사랑하다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평생을 비련의 주인공이 된 지인의 이야기까지 범위가 넓혀진다. 화인의 인印은 바로 도장을 뜻한다. 작가는 도장은 몸에 새긴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