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PCT). 지옥처럼 멀고 험한 길이다. 무려 4,285km다. '악마의 코스'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432km인 서울부산의 10배나 되는 길이다. 그 길을 완주한다면 과연 삶이 달라 질 수 있을까.
그 길을 홀로 完走(완주)한 여자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와일드'는 마음을 단련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경구가 많이 등장한다. '못이 되지말고 망치가 되자', '길이 되지 말고 숲이 되자'처럼 주인공 세릴이 걸으면서 혼자 독백처럼 토해 내는 말뿐만 아니라.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에밀리 디킨슨>는 말처럼 저명한 작가의 경구도 귀에 꽂힌다. 하지만 더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그 길은 걸은 세릴 스트레이드의 체험에서 우러난 말이다.
1.
"누구나 한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번은 길을 만든다"
영화 '와일드'의 원작자인 세릴 스트레이드의 말이다.
멕시코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남북으로 황무지와 사막, 눈 덮힌 고지대와 열대 우림, 9개의 산맥을 따라 펼져진 4,285km의 태평성 연안 최장거리코스인 퍼시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홀로 걸은 여자의 말에는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길은 인생이다. 삶의 버팀목이 됐던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방탕한 생활로 모든걸 잃은 여자가 '악마의 코스'라는 말을 들을만큼 멀고 험난한 길을 걸으며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한 분투기다.
눈덮힌 넓은 평야와 깊은 숲속에선 방향 찾는것도 쉽지 않다. 여러갈래 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일 수 밖에 없다. 나침판을 꺼낸다고 길이 나오는것도 아니다. 하물며 인생의 길에선 말할것도 없다. 어떤 선택이 올바른 길인지 모르기 때문에 늘 방황하게 된다. 그래도 누구는 길을 찾거나 아예 만들고 누구는 방황하다가 끝난다. <배우로서 슬럼프를 겪고 제작자로 변신한 리즈 워더스푼에게 '와일드'가 눈에 들어온것도 이 때문이다. 제작과 주연을 맡아 거의 '원맨쇼'를 펼친 워드스푼에겐 이 영화가 배우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도있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에밀리 디킨슨>
사람들은 왜 인생의 끝에서 길을 택할까. 그것도 아주 먼길을. 길을 걷는 것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좌절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거나 술과 노름, 마약등 무엇인가에 중독돼 파멸해가는 경우도 있다.
먼길을 걷는 것은 극한의 고통을 수반한다. 인내력과 의지의 한계를 시험한다. 예나 지금이나 순례자들은 수천키로를 걸으면서 종교적인 신념을 보여줬다. 트레킹 코스의 대명사인 스페인 산티아고길은 순례자의 길이었지만 지금은 전세계 수많은 트레커들의 성지다. 그 길을 한달여에 걸쳐 걸으면서 삶의 소중한 의미를 깨닳는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걷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것도 매일 수십키로를 걷는 것은 苦行(고행)이다. 더구나 PCT(퍼시퍽 트레스트 트레일)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 길을 완주하는 것은 몸을 초월하는 것이 될 것이다.
3.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내 등에 지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세릴 스트레이드>
세릴은 자신의 몸보다 커 보이고 몸무게보다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짊어지고 그 먼길을 걸었다. 처음엔 그 배낭을 어깨에 메고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 배낭속에는 그녀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불필요한것도 많았다. 트레일을 시작한지 얼마안돼 대피소에서 하루 쉬던 그녀는 배낭을 정리해주던 대피소 주인으로부터 따끔한 충고를 듣는다. 필요없는 물건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별로 쓰지도 않은 콘돔도 12개나 들었으나 그럴만도 하다. 우리 생활도 그러할 것이다. 온갖 잡동사니를 이고지고 산다. 버리는게 아까워서 쓰지도 않으며 움켜지고 있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어디 물건뿐인가 세릴은 걸으면서 과거의 악몽을 반추하며 괴로워한다. 머릿곳에 켜켜히 쌓여있는 회한과 상처도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아마 그 길의 끝에서는 필요없는 물건과 상념도 털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4.
"나는 발걸음이 느립니다. 그렇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에이브러함 링컨.
세릴이 링컨의 유명한 말을 트레일 도중 방명록에 적어놓은 것은 포기하고 싶을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피멍이 든 발톱이 빠지지 않는다면, 하루에도 수없이 트레일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한반도의 최북단도시 신의주에서 최남단 부산까지 거리는 835km다. PCT는 신의주-부산의 5배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다. 홀로 걸으며 들짐승에 쫓기고, 험한 바위산을 타넘고, 급류를 건너고, 방향도 모른채 발이 푹푹 빠지는 눈속을 걸어야 한다. 무엇보다 길에서 만난 거친남성의 음란한 눈길은 물론 칠흙같은 어둠속에 별빛만 반짝이는 어느 골짜기의 텐트속에서 짙은 외로움과도 싸워야 한다. 자서전 제목처럼 '와일드'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5.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 네가 마음만 먹으면 매일 볼 수 있어. 너도 얼마든지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어"
불행한 결혼생활에 이어 암투병 끝에 40대 중반의 젊은나이에 세상을 떠난 세릴의 엄마가 세릴에게 남긴 말이다. 세릴은 그 말을 길의 끝에서 깨닳는다. 결론은 인생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얘기다. 그리 심오한 말도 아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다. 그렇지만 절실히 깨닳는 사람은 많지않다.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기 쉽지않다. 하지만 인생의 벼랑끝에서 스스로 극한체험을 이겨낸 사람은 다를 것이다. 세릴 스트레이드는 이미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유명인사가 됐다. 매일 30키로씩 150일을 걷는 PCT에는 연간 125만명이 도전한다고 한다. 물론 포기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세릴은 90일만에 주파했다. 대장정의 끝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은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