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제대로 써라. 제대로.. 너의 마음대로가 아니고, 제발 우리말의 정의로 하나는 한이고 우리가 없으면 하나나라가 없는 것으로 민족언어를 없다고 하면, 역사도 부정하고 단군도 부정하고 배달도 부정하고 한국(환국)도 부정하니, 왜 여기에서 하나나라에서 사는가? 뺏어서 넓게 살려고? 그래서 북미 대륙을 전부 가지고도 딴 소리한다.. 가서 살아라.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쥬이쉬의 신칭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엘이 아니니, 지발, 하나사람을 하나라고 해달라. 제발 부탁이다. 아무리 우봉 이씨가 대단한 학자집안이라도 니네 집안에 가서 니네 나라에 가서 떠들어라.
“모든 정의에 사랑이 수반되지 않으면 폭력이자 아편인 것처럼 하나님 여호와의 사랑은 자신이 죽는 사랑이다. 하나님 신의 정의는 생명으로 나아간다” (이재철 목사)
▲ 양화진 문화원 목요강좌 "이어령 교수, 이재철 목사 스토리텔링" ⓒ양화진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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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양화진문화원(명예원장 이어령, 원장 박흥식) 목요강좌는 이어령 교수와 이재철 목사(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와의 대담은 정의에 대한 말씀 속 다윗의 스토리텔링으로 진행됐다. 신을 최대 영역의 심판자로만 본다면, 다윗과 압살롬의 전쟁은 불의에 대해 지적하고 나름대로의 정의를 실천하려고 했던 압살롬의 승으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들어주었고, 압살롬은 죽음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에 대해 이어령 교수는 죽은 압살롬을 붙잡고 자기가 대신 죽어야 했다고 울부짖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의 정의를 찾았다. 하나님 신(여호와)의 정의는 단순한 심판의 옳고 그름의 잣대를 넘어선 인간애, 인류애를 가진다는 것. 신, 구약을 통틀어 하나님 신이 심판만 하는 것이 아닌, 징계하지만 연민과 사랑을 감추지 못하는 하나님 여호와(신)이시라는 것이다.
(산) 정의(Justice)에 대한 내용은 우리 하나님의 이야기에는 성(誠) 지성이라는 말씀을 이룬다의 8리훈의 참전계경 366사에 자세히나오는 것으로 단순한 심판의 옳고 그름이 의가 아니고, 옳고 그름은 무선악, 선과 악에 대한 경계가 없는 성의 단계를 제1의 하나라고 하고 이를 천지도의 하나라고 하였다. 즉 성은 앎이 아니고, 바로 통하는 것으로 통성이라고 하고 이는 상철로 철인의 가장 높은 단계로 상철, philosopher (철인)의 제1 상철, 첫번째 지성, 지식인의 갖춤이 지성이 아니고, 바로 통성이라는 이야리고 "하나님"을 쓰면 우리는 우리이야기로 해석하는 줄 오해하게 됩니다. 이어녕이 말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 신(엘)의 이야기로, 우리의 신념이나 사상, 철학인 '하나' -Hana- 항일(恒一), 항심(恒心)의 단군8조교의 이야기가 아닌, 저 멀리 중동의 샤론의 언덕에서 불어온 모래사상과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이 교수는 “시대적 법, 율법, 정의의 개념을 뛰어넘어 죄를 지었는데도 구제하려는 힘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만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구약의 정의로 대표되는 하나님 여호와를 그저 심판하는 자로 볼 것이 아닌 “악자를 징벌하지만 두 손으로 징벌하지 않고 구제의 여지를 두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 주인인 여호와 신”이라고 역설했다. (산) 오만과 편견이 이러한 것으로 죄를 지었는데도 구제하려는 힘이 바로 기독교신앙, 믿음에만 있는 것은 원죄가 없는데도 창조하고 만들어내고 날조하는 것이 선악을 구분하게 된 이스라엘의 시작의 잘못, 생각의 잘못 날조한 죄가 원죄로, 성(性)은 無善惡으로 이는 지(知)가 아니고 깨달음 통함(通)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이를 아니라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조작하니, 짐승조작, 날조의 역사라고 하는 생명에 대한 진리마저 부전하는 원죄를 저지르고 이는 삼신할매에서는 부정이 아니고, 아예 삼신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비삼신론으로 신은 오로지 엘로힘, 엘의 창조주만이 인류를 창조했다. 6100년전에.. 아멘 할레루야.. 할레가 온 누리에.. 할레.. 헐레, 걸레가 이땅에.. 이렇듯, 무선악인 것을 유선악, 선과 악이 있어, 이스랑엘만 선한 선택된 민족이고, 그 이외의 인디언족은 죽어야 할 족으로 사탄의 자손이다. 뱀의 자손으로 한국, 하나민족은 죽어도 싸다고 하는 망령을 심망이라고 하고 이를 바로 "유선악" 심망이니, 마음에 검은 구멍이 난 자들을 원죄가 있어 절대로 하늘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생명수의 물리와 생리(생명의 이치)까지 파괴할 종자들로 영원히 에덴(얻은 땅)에서조차도 발을 들어놓지 못하게 하라. 그것이 원죄다. 구천의 하나의 하늘에 머물다 떠돌아다니니, 성통공완자가 되지 못할 말종의 아이들이로다. 제 주인하나 여호와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후손들아, 너희를 영원히 기억해야 할 너의 주인님은 바로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민족의 영원한 조상이고 시조이고, 삼위일체 삼신할매, 할배, 성의 구별이 없는 대덕, 대혜, 대력의 허허공공 하늘의 극으로 삼극이니 이 삼극이 무극/반극/태극으로 하나둘셋이나, 하나다 하나가 한(韓)이다.. 거짓말로 헛소리를 엉터리 교수요, 박사요.. 무슨 하나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이의 조상에 따라 완용과 병도의 후손이라.. 기독교에 귀의하더라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순간 구천에서 떠돌게 되리라.. 용서치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말씀을 기억하라, 죽어가도 용서치 않을 지성의 똥지성을 알고 말하라.. ==== 이재철 목사는 정의를 하나님 여호와의 관점이라는 큰 맥락에서 바라봤다. “인간의 단순한 선과 악을 구별짓는 정의가 하나님 여호와의 정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 여호와의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징벌하고 축복하는 하나님의 여호와 신의 정의의 개념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여호와 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존귀히 여기는 주인 여호와신 하나님“이라고 밝혔다. (산) 한 구절 문장에도 6번이나, 하나님이라는 말로 떡칠을 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무선악, 무청탁, 무후박이라고 하지만, 이 성명정은 삼진으로 이는 사람의 도, 사람이 가진 하늘의 삼위, 대덕,대혜, 대력을 사람의 도로 사람은 원래 하늘의 삼일도와 같은 영성을 인성으로 가지고 태어났는데, 이를 무선악(성), 무청탁(명), 무후박(정)이라고 하고 통성을 상철, 지명은 중철, 보정을 하철이라고 하는 사람의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초월적 절대절명의 무부재, 무불용 허허공공에서 시작한 하나에 대한 이야기는 알지도 못하면서 겨우 부족의 설화이야기인 엘로힘,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원죄(Original Sin) 큰 죄임을 알아야 할텐데.. 가서 알아보겠다고 이재철 목사가 떠드나, 가서 알아보고 다시 와서 설교하든 설화를 조작하든 하여야 한다.
결국 다윗에게 주어진 축복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주인 여호와의 옳고 그름에 대한 정의의 실천, 혹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사랑의 실천이라기보다 하나님의 큰 섭리가운데 하나님 주인 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또 김 목사는 하나님 주인 신의 정의가 인간의 정의와는 구분됨을 밝히고 “ 인간의 심판은 압살롬처럼 자기가 처벌해 죽이는 것이고 하나님 주인 신 여호와의 심판은 자기가 죽는 심판”이라고 정의했다.
(산) 다윗이 데이빗, 데이비드이든 알 바가 아닌데, 무슨 다윗왕, 이스라엘왕국의 다윗이 40년 왕정을 펼쳤다고 이 왕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성서에 나온 이스라엘 부족장에서 왕국의 왕이 되었다고 정의, 선악의 기초를 세웠다고.. 기원전 1030년에 다윗이 왕이 되어, 엘족의 신이 "하나님"이 아닌데도, 왜 이리 왱왱, 왜넘처럼 말을 하나.. 시대기준도 몰라, 함무라비 법전이 먼저인지? 다윗의 별이 먼저고 선악구분한 것이 먼저인지, 왜 저리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할까? 기원전 2,333년 다윗왕의 재위 1,300년전에 단군조선을 건국하시면서 단군8조교를 반포하셨다. 지금까지 속담, 스토리텔링으로 알고 있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헌집신도 제짝이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단국의 건국하신, 제1대 단군 왕검께서 5가의 5령에게 반포한 단군8조교로 함무라비 법전보다도 오래된 이야기.. 그 이전의 천부경 81자와 천부16자는 너무나도 오래되어 아예 머리에 이고사는 하나를 우리는 시조로, 교조로, 국조로, 그리고 나라로, 민족으로 신으로 아예 삼신, 삼일신, 삼위가 일체, 하나이니 이를 韓이라고 한다는 것을 없애려고 하지, 쥬이쉬처럼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우리는 설화도 아닌, 선녀와 나무꿋의 나뭇꾼이라고.. 나무나 해서 지어서 아내와 아이들을 굶기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는 단군설화 모든 설화는 말로 구전된 이야기꾼들이 자손이라고 하고, 지만 잘나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지랄을 떨고 있는 지랄 이야기꾼.. 얼쑤 지화자. 궁시궁시 궁시렁.. 궁시하면 하늘화살이 떨어진다.. 궁시궁시 궁시렁.. 너희 엘족의 뱀이 떨어지지 않고 용들이 떨어질 수 있으니 사탄 용이 떨어질제, 물의 나라, 엘족은 엘엘엘 하면서 어디로 뽕뽕거리면서 가야 하는가? 시온산이 아닌가? 지옥산 (Zion, 지온, 땅의 온, 지옥)이라..이를 따르고 가면 이 땅의 가장 성스러운 산, 지온(시온)의 게토(개구리 사람들)가 되려나.. 그들이 심판하려 오니, 개종하라면, 유황지온에 걸어들어가리라. 체코키 인디언 추장의 영광스런 자연의 대정령이시여. 하나이시여.. 하나는 북미 인디어의 최고위신, 위대한 정령의 이름이 "하나" 아나이니, 아나 가져라고 가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니, 국어도 모르는 왜국인이 창조한답시고 날조하면 그것이 창작이라 공상소설이니, 문학이나, 영 맞지 않는 날조설이니, 소설이라고 하여야 한다.
“소년 다윗,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본다면...“ ▲ 이어령 박사 스토리텔링은 관념적으로 사랑,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막연한 일이나 이를 스토리로 풀면 그러한 사랑이 나의 삶에 부딪혀 행동과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과 부활을 문자적 의미, 자체로는 알 기 어렵지만 스토리텔링을 통해 초월적인 기독교신앙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문학작품으로 매력있는 까닭은, 한없이 약한 인간이 신에 의해 심판만 받는 것이 아닌 끝없이 그것을 끌어내는 손에 있다. 정의, 이지, 종교의 초월적인 세계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지만 문학의 세계로 들었을 때의 스토리텔링의 재미라는 것은 단순한 신학적 해석이 아닌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데 있다. 비논리적이고 이치에 안 맞는 것들을 스토리텔링을 통해 서술할 수 있어서 모순을 가지면서도 이야기를 가지고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등의 이야기 속에 스토리텔링이 포함된 것이다. (산) 스토리텔링은 비논리적이고 이치에 안맞는 부조리, 비합리적인 것을 이야기로 푸는 것으로 이를 설화(Story Telling)이라고 하고,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한 신들의 이야기, 엘로힘, 엘-샤다이,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 그 많은 신들의 이야기를 신화(Myth - God's story) 신들에 대한 이야기썰을 신야기설, 신화라고 한다.. 우리말로도 이리 정확하게 해석이 되는데, 마치 우리말로는 정의가 어렵다.. 하나는 이스라엘 히브리어의 히(해)에서 온 이스라엘말이라고 하는 멍청한 어녕 박사의 이야기.. 그러니 엉텅리 스토리 텔러의 말장난(텔링)일 뿐이다.
▲이재철 목사
자칫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 쉬운 말을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이야기로 전달하는 방식이 스토리텔링이다. 삼상, 삼하에 기록된 다윗에 대해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을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이 여호와가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두 그룹으로 나눠 보여준다.
하나님은 여호와는 로고스 말씀이다 그 하나님의 여호와의 말씀을 존중하는 삶을 살면 결국 자기 존중의 삶으로 귀결하지만,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면 결국 자기경멸의 삶으로 귀결되는 전체가 스토리텔링의 맥락이다. “엘리 제사장/한나, 홈리와 비나아스(엘리 제사장의 아들)/사무엘, 사울 왕/ 다윗”이 그 예다. (산) 목자들이 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주인이라고 하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쓴다. 한평생 거짓말로 이리도 이야기를 지어내니 어이 마음이 안 아프겠는가? 여호와의 증인 이 아니기에 여호와를 안쓴다? 왜? 하나님이 쥬이쉬 말이기때문에.. 이게 스토리텔링, 설화로, 조작된 신의 명칭의 조작으로 날조로 엉터리고, 다윗이 무슨 일제한자라고 다윗이라고 데이빗이고 데이비드라고 하는 것을 맨날 다, 대, 태라고 해서 그리도 갖다 붙이기니는 유다는 이스라엘의 한 자손의 이름으로 쥬다(주다가 아니고 쥬다.. 쥬-우-다)인데, 이를 맨날 숨기고, 위대한 유대인, 유태인으로 유씨의 한 조상의 대인이고 태인이라고 하는 한자장난질에 놀아난 세월이 얼마인가? 한글로도 말이 안되니, 하나님은 로고스 말씀이 아닌 삼신으로 삼신의 하나둘셋중 하나가 말씀 로고스로 말(言)의 뜻이 알 주(.)의 삼(셋 三)의 입 口은 바로 삼신의 로고스다.. 말씀이다. 말씀이 조화로 말씀은 빛의 파장과 소리의 파장으로 들리니, 무형의 하늘이 아닌 시작, 빛의 시작, 로고스이니, 바람타고 빛타고 오신 신이 바로 말씀이니 소리가 삼신이니, 율려라고 한다는 우리말도 모르면서 어디서 줏어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윗? 데이빗, 데이비드왕.. 다윗왕은 40년 재위한 이스라엘왕국의 시조? 왕? 무슨 이야기를 하고 해야지, 무작정 다윗의 유선악이 여호와의 선악을 판단하고 판결한다니... “누가 정의로운가, 압살롬 vs 다윗” ▲이어령 교수
다윗은 도망자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 자기존중의 삶을 십년동안 살았다. 유일무이한 왕국을 이루고 가장 큰 번영을 이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압살롬과 다윗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여호와가 항상 정의, 법, 율법의 편의 정의의 하나님 여호와 주인이라면 자기 누이를 범한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옳고 이를 처벌하지 않은 다윗은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하나님은 여호와는 결국 다윗에게 손을 들어준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던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통곡을 하고 운다. 다윗에게 마지막 남은 것은 심판의 여부가 아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아들을 감싸 안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신구약을 꿰뚫는 기독교신앙인데 세속적 의미로 보면, 이를 타협, 불의에서는 것처럼 오해한다. 세상이 흔히 생각하는 정의 앞에 압살롬은 정당하다. 압살롬은 다윗의 잘못을 비판하고 재판한 것이 그릇됐다고 반항했지만 다윗은 잘못된 것에 대해 심판하지 않고 끌어않는 태도를 보인다. 심판을 최고의 하나님의 여호와의 힘과 도구로 아는 사람과, 심판을 뛰어넘는 사랑의 하나님이 엘족의 주인신이 오늘 이야기의 근본이다. 인간이 누군가를 심판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 그런데 오늘은 신의 최대영역을 심판자로만 생각한다. 이를 뛰어넘어 죄를 지었는데도 구제하려는 힘이 바로 그리스도신앙에만 있다. 그런데 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다 가정에서 불법을 가리면 사회개혁이 안 된다고 여겨 가정을 넘어서야 사회정의가 실현된다고 봤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사회가 무너지고 갈갈이 찢겼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가족의 사랑, 혈연이라는 비논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왔다. 기독교의 충돌도 가족과 전체 사회 정의의 하나님이 엘족의 신들이 충돌하는 것이다.
(산) 무엇이 문제인가? 왜 이야기설화인가? 이들의 엘족만의 신, 주인인 여호와만이 구제의 심판자로 지옥과 천국의 심판자라고 하는 오만과 편견으로 엘족의 인격신만이 구제한다? 홍익제민, 하늘의 천범으로 백성을 구제한다는 홍익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여호와, 엘족의 신들만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제하고, 다윗의 정의가 엘로힘, 여호와의 사랑으로 유선악이 여호와에게 있다고 하는 오만과 독선에 찬 유다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어녕이 말한다고 다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가 아니고 설화를 가지고, 마치 자신이 믿는 종교가 신앙이 유일한 신으로 신(God)은 오로지 "유일신, 유다의 일신" 여호와를 말한다. 그 이외의 신이라는 것은 전부 잡신, 정령일 뿐이다. 개신교 개신종자만이 여호와의 종으로 인디언은 종으로 사용할 수 없는 짐승 원시인의 사탄의 종이라고 판결한 개신신앙의 종자가 마치 진리의 정의의 사도라고 하는 정의사회구현의 사제, 신부, 신의 아버지라고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설화(舌禍)로 인종말살이 진리의 정의의 판결이라고 오직 기독교에서만 구제가능한 유일무이한 신의 존재인 쥬이쉬 이스라엘의 후손만이 엘의 주인님의 종이니, 그 이외의 종은 필요치 않은 이 세상의 짐스러운 존재로 태워야 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종교.. 그건 종교가 아닌, 말종교라고 한다.. 말아야 할 가르침..
다윗이 유일무이한 왕국을 건설하고 재위 40년간에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어느 개신종자가, 역사도 모르고, 지리학도 모르고 인문학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박사를 방사라고 해서 이런 헛소리를 씹고 있는가? 과연 이 박사는 박사인지, 얇은 실인지 알지 못하겠다..
이스라엘 왕국 다윗 수도: 기브아 (기원전 1030년 ~ 1010년)마하나임 (기원전 1010년 ~ 1008년)헤브론 (기원전 1008년 ~ 1003년)예루살렘 (기원전 1003년 ~ 930년) 왕들의 목록[편집]
다윗왕(데이빗).. 통치기간 40년, 기원전 1010년경-기원전 970년.. 이게 역사서의 기록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부족설화인가? 성경의 사무엘하5:1과 역대상11:1에 나왔다고 유일무이한 대제국이란 말인가? 중동의 쪼그만 이스라엘 국을 건설하였다고 과연 성경구절에 나왔다고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로 우리에게 들이대고 있단 말인가?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한다고, 이게 설화지 역사가 아니다. 역사라 고증과 실증으로 증명된 사실로 이야기해야 한다. 이 다윗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도 저 쪼그만 제국을 왕국이고 유일무이라고 하는 뻥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슈메르문명, 이집트문명의 주위의 국가만 하더라도 대제국, 대왕국을 건설하였다는 메소포타미아문명국과 이집트문명국에 대한 이야기는 빼고 겨우 기원전 1010년경의 40년간 조그마한 이스라엘왕국의 왕 40년을 마치 인류전체의 대제국이고 문명의 시작으로 신의 판결과 정의를 운운하는 것은 이어녕 비어령으로 녕과 령의 갈림길이 아니고, 그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이헌령, 비헌령이지, 무슨 말도 되지 않는 문학의 대서사시, 성경이라고 실증 고고학을 통한 이스라엘 유일무이한 나라??? 지랄이 삼태기다...
문명의 발상지도 아니고 대제국도 아니고, 그냥 중동의 조그마한 말썽장이 이스라엘 민족의 부족국가 설화이야기의 ㅜ족장 다윗의 재위 40년.. 이보다는 우리나라 단군조선의 47대 단군이야기가 더 실증적인 이야기고, 고인돌과 청동검 등의 유물로 그 실재가 확인되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 우리나라 역사도 인정하지 않고,"하나"가 우리나라 하나나라의 하나사람, 하나(한)이 천신, 삼위일체, 삼신일체를 이름하는 우리 하나사람의 핵심어고 우리자체를 가르키느 말이라고 해도 그건 몰역사적인 스토리텔링, 구전설화여.. 그게 그건데, 서양 코장이가 이야기하면 과학이고, 합리고, 영성이란다. 같잖아서 말이 안나온다.. 엉터리, 빚정머리 없는 정말 역겨움의 쥬이쉬 코리안이라고 한다. 코위쉬.. 왜넘의 정신을 이은 얼빠진 박사.. 이어녕비아냥 박사이겠지..
"이스라엘 국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원전 9세기 구릉지대에 정착한 유목민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이라는 두개의 경쟁국가를 만들면서 비롯됐다고 보았다.그는 이보다 한세기 전인 다윗왕과 솔로몬 왕 시대의 도시들을 발굴한 결과 이들 도시는 이곳저곳에 흩어진 건물들로 구성돼 있었고 왕국의 규모도 소규모인데다 중동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역 왕조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강조했다.그는 또 중동지역 대부분에 걸친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다윗왕이 건설했다는 예루살렘은 기껏해야 작은 왕국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
▲ 이재철 목사
압살롬을 의인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으나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윗의 관점, 압살롬의 관점보다도 이 말씀이 하나님의 여호와 엘의 주인신의 관점에서 어떻게 씌여졌느냐가 중요하다. ▲ 이어령 교수 압살롬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고 심판의 관점에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압살롬이 내세웠던 것은 도둑질이 아닌 개혁이었고 정의였다는 것이다. 그런 공의가 우리 역사의 스토리텔링 속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옳다고 본다. 세속적인 진리로 기독교 종교가 없으면 항상 그런 쪽의 사람이 옳고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 외에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참된 공의와 정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여호와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와 주인 신은 악자를 징벌하지만 두 손으로 징벌하지 않고 한손으로 치고 다른 한손으로는 구제하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 신이다. 성서의 스토리텔링은 이중구조로 하나님 신과 사람의 관점을 정의하면 하나님 신은 분명히 내치지만 가죽으로 옷을 입히신다는 것 알아야한다. 심판만 하는 것이 아닌, 그냥 내치는 것이 아닌 불쌍해서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 신을 기억해야한다. 이 마음을 모르면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고 구약과 신약은 전혀 다른 서술이 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구원으로부터 일관적으로 흐르는데 정의의 하나님 신이면서도 플러스 알파가 있다. 불의한 자를 어떻게 해서든 구제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최후의 심판이다. 압살롬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윗이 왕권계승자를 차단했으면,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정의로워지려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인생은 대단히 부조리한 것이며 인간의 머리로는 풀어갈 수 없는 것이다. (산) 우리나라 역사와 사상적인 내용이 아닌 쥬이쉬 이스라엘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하나님" 이라고 하여 "하나"가 마치 쥬이쉬 이스라엘의 창조주이자, 유일무이한 주인이라고 종들에게 하대를 하나, 전혀 우리나라 하나님, 하나의 자손에게 할 이야기가 아닌, 주인과 종의 계약에 의한 노예계약의 진리가 정의라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 오직 기독교의 교리라고 하나, "하나"를 빼고 "신"이라고 엘(신)으로 고치면 너무 자연스럽고, 다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오만과 편견, 그들의 원죄에 대한 유선악에 대한 오만과 편견, 삼신부정에 대한 원죄가 뚜렷하게 나옵니다. 무선악이 성이라고 하는데도 지마을대로 여호와가 성이고 전부이고 시작이고 마지막이다. 마치 하나가 무시무종 하나다를 가져다 놓은듯한 이야기 헛소리르 하면서도, "하나님"이라고 국어국문학의 기본도 모르는 왜식교육의 본산을 보는듯한 가공의 세상 만들기 이야기세상으로 하나(님)민족 말살에 대한 정당성을 성경의 이스라엘 부족국가 건국기와 영웅이라고 마치 전 세계의 국가론과 창세기론적인 조작된 역사로, 세상을 현혹하고 혹세무민하니, 이게 머시기 거시기 이야기로. 그냥 거시기 머시기라고 유다의 신을 머시기, 유시기.. 하면 된다. 여시기.. 여호와시기.. 여시기.. 엿이기...
====================== “하나님 여호와의 심판은 자기가 죽는 심판” ▲ 이재철 목사 인간의 심판은 압살롬처럼 자기가 죽이는 것이고, 하나님 여호와의 심판은 자기가 죽는 심판이다. 다윗과 압살롬의 심판의 핵심이 자기가 죽어서 다른 이를 살리게 되는 것으로 차이를 보면 될 것이다. 다윗이 왕이 되는데 하나님을 여호와를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하나님 여호와도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관점으로 다윗의 전성시기 펼쳐졌는데 다윗 인생의 절정 이 때,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멸시하므로 자기경멸로 들어간 밧세바와 불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생각해 봐야할 것은 왜 하나님을 여호와를 그렇게 섬기던 다윗이 왜 욕정의 나락으로 한순간에 떨어졌는가? 새해가 되면 왕은 반드시 전장에 나가 다독거려 줘야 하는데 다윗은 나가지 않고 병사들만 보냈다. 책임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자신의 직책을 나를 즐기기 위해 사용할까 생각하면 주색에 빠진다. 내 인생이 클라이막스에 올라가있을 수록 유복한 상황이면 상황일수록 영적으로 주색에 빠지기가 쉽다.
하나님이 여호와가 보시며 죄는 반드시 열매를 맺고 값을 치루게 한다. 인생의 퇴장은 등장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으로 다윗의 마지막에는 중심이 하나님을 여호와를 향하고 있음으로 여인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성경은 밧세바로 인해 실추된 다윗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모든 것들을 이런 스토리를 만들게 해주는 하나님의 여호와의 서술로 볼 때 하나님은 여호와는 징벌 하기는 하지만 다윗의 복종하고 회개하는 모습에 편을 들어주셨다고 이야기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압살롬을 죽이고 다윗을 그대로 밧세바의 아들을 솔로몬에게 앉히고 지혜를 줬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나의 모든 허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여호와에 대한 소망을 얻을 수 있다. (산) 아무리 높은 영성의 먹사라도, 하나민족의 최고위신칭으로 이리 박살을 내는 것을 신성모독이고, 민족에 대한 모독이 아닌 자기자신에게 자신의 조상에게 침을 밷으면서 좋다고 웃는 가장 악랄한 종자의 자신만이 살면 된다는 심망에 기망에 신망의 삼망의 종합체로 가장 악마라고 하는 요인의 첫째 자신만 잘났다. 선민이다. 유선악을 판단하고 징벌하고 용서하는 잘한 신, 여호와 엘족의 신을 찬양하자면서 "하나"를 팔고 영혼을 쥬이쉬에게 팔아먹은 쥬이쉬 하나. 이는 쥬한이 아니고 코한으로 코이쉬라고 불리기를 바라는 영혼의 방랑자, 쥬이쉬한인으로 한(韓)자체를 잃은 무영혼의 무신자이니,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어린 백성이라고 한다.. 더 이상의 죄를 짓는다는 것은 삼겁의 악행이고, 미래, 업주가리의 업의 멸절로, 인간계의 윤회가 막힘이라. 하나를 부정한다함은 바로 이렇듯 이스라엘 주인을 우상하고 숭배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하나를 부정한 것도 모자라, 팔아먹는 영혼을 파는 행위는 원죄가 아닌 금생죄로 금죄이니, 사람이라면 하여서는 아니될 짐승도 자신의 자식, 부모에게는 돌을 던지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침을 밷어도, 지 얼굴에 떨어진다는 자명한 것을 말이 장난이라고 국어국문학이 조선어, 조센진왜넘들의 정립했다고 한국말과 하나문자가 없어진 것이 아닌데, 해도 해도 너무하니, 하노라.. 하얗고나. 하애.. 하나는 어디가나.. 이스라엘 사해에 누워 둥둥 떠있나 보다. 입주둥아리만..
▲ 이어령 교수 심판 이상의 구제자로서의 하나님에 여호와에 이런 전체적인 흐름이 담겨있다. 하나님을 여호와를 정의의 하나님 여호와신임과 동시에 구제의 하나님 신이라고 안보면 압살롬의 편이 되기 쉽고 우리도 그런 유혹에 빠지기도 쉽다. 정의가 궁극적 목적처럼 얘기하지만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정의를 넘어선 사랑, 연민, 등이 있다. 옳고 그름의 심판자로 현실에서 아버지를 고발한 자를 영웅시하는 모습처럼, 이 이야기 속에 담긴 것은 옛 구약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정의 이상의 하나님 여호와 신이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정치논리에서 넘어서는 것이다. (산) 오상의 법리와 규범을 이야기한다면 그러한 오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되지, 무슨 정의(져스티스)라고 이리도 다윗의 정의가 이스라엘의 신의 정의라면 그렇다고 하면 되지, 설화로 이를 역사적인 사실인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너무 심하게 "하나님"을 쓰니, 참으로 짜증이 나고, 언잖은 일이로다.. 가소로와 가소로와 가소롭도다.
▲ 이재철 목사
압찰롬의 의인의 의는 자기의 의이다. 모든 정의에 사랑이 수반되지 않으면 폭력이자 아편이듯 하나님 여호와의 사랑은 당신이 죽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여호와의 정의는 생명으로 나아간다.
(산) 참으로 의(義)라고 하고는 하나님의 의, 정의는 우리는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의 정의로 알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나라 말이고 고유어라는 것을 아는데도, 마치 여호와의 사랑이 참이고 생명이라고.. 천주교는 예수가 정의라고 하는데, 개신교 목자들은 여호와를 정의라고 진리라고 생명으로까지.. 하나님은 생명이나, 생명의 이치인 생리를 주관한다고 하지, 그 자체가 생명이 아니데.. 물리, 하늘과 땅이 개벽하고, 27자 물리(만물의 이치)를 이야기하고, 그 다음, 하나둘셋이 무엇인가? 넷다섯여섯(ㅅ은 생명 -사람포함-의 이치).. 그것이 생리라고 하는 넷다섯여섯도 하나이니,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해도 이는 하나님의 셋(태극)의 사람(ㅅ)의 이치 생명의 이치 생리(生理) (주: 생리통이 아니고, 생명의 이치의 준말- 생리)라고 했는데,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인정도 하지 않는 뚱뚱이와 홀쭉이의 개그, 이야기만들기, 날조의 대담.. 홀쭉이와 뚱뚱이의 다윗의 제왕기, 정의는 다윗의 주인인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해야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면 하나사람이 중동으로 이주해서 아니, 그곳에서 이곳을 이주했단 말인가? 더 이상은 봐줄 곳이 없다. 천리낭떠러지에 서 있는 "하나"사람에게 비켜라.. 이 세상의 주인 여호와의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으쓱대는 저 꼬라지에, 저 생각에, 저 오만과 불손은 현생의 죄업이 가이 가볍지 않으리라..
▲ 양화진 문화원 목요강좌 "이어령 교수, 이재철 목사 스토리텔링" ⓒ 양화진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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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화진 문화원 목요강좌 "이어령 교수, 이재철 목사 스토리텔링" ⓒ 양화진문화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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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 명쾌하시네요...바빠서 팔봉산님의 글을 한동안 접하지 못하였는데, 모처럼 시원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