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고운사 최치원 벚나무
최치원은 남북국 시대 말 신라 경주에서 태어나 신라를 넘어 발해와 당나라까지 문명을 떨쳤다. 남겨놓은 글, 사상, 행적은 후세의 귀감이 되고, 승화되어 민간 신앙, 설화가 되었다. 누구나 아무나 이룰 수 있는 업적이나 역사가 아니다.
봄이 무르익어 가는 날, 고운의 행적을 찾아 경북 의성에 이르니, 최치원문학관이 있다. ‘바람 타고 꾀꼬리 소리 머리 위에 요란하고/ 해 기우니 꽃 그림자 수풀 속에 넘어지네.’ 최치원의 ‘봄날’을 떠올리며 문학관을 들러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었다는 고운사에 이른다.
시냇물 소리 정겹고, 달큼한 봄바람에 벚꽃이 화사하게 나그네를 반긴다. 고운사(高雲寺)는 신라 신문왕 1년인 681년 승려 의상이 창건했다. 이 사찰에 최치원이 여지, 여사 두 승려와 함께 가운루, 우화루를 보태 고운사(孤雲寺)라 했다.
계곡 위에 앉아있는 가운루를 지나 우화루로 간다. 여기 우화루의 호랑이 벽화는 보는 이가 움직이는 쪽으로 호랑이 눈도 따라온다. 조선의 어떤 화공인지 그 기법이 대단하구나 하면서도, 그저 최치원의 법력이구나 싶다.
최치원은 868년 12살에 당시 국제항구 영암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발해만 해로로 북상하다가 황해도 해주에서 중국 산둥으로 입국했다. 이 무렵 신라에서는 당나라 유학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837년 한 해만도 당 유학생이 216명이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또 신라 3최라 불리는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 등 세 명도 6두품이지만, 당나라 유학을 통해 그 이름을 남겼다.
최치원은 당의 외국인 과거 빈공과에 장원 급제했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최치원의 사촌 동생 최언위도 886년 당나라 유학을 떠나 906년 빈공과에 급제, 경순왕에 이어 고려 왕건 때까지 벼슬하였다. 890년 당나라 유학을 떠난 최승우도 893년 빈공과에 급제 벼슬을 지내다가 당이 멸망하자 후백제 견훤을 따르며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하겠다’는 글을 왕건에게 보냈다.
신라에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 귀족은 6두품에서 4두품, 평민은 3두품에서 1두품, 그리고 노비였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도 아들의 영특함을 알고 당나라 유학을 통해 6두품의 한계를 넘어 정권의 실세가 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배 위에서 아들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 하면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라고 했고, 최치원도 ‘남이 백의 노력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며 6년 만에 빈공과에 장원 급제했다.
아무튼, 최치원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나 18살에 장원 급제하고 당나라며 신라의 벼슬을 두루 거쳤으니, 6두품으로서는 최고의 관직과 명예를 두루 차지한 셈이다.
더욱 최치원의 명성은 문필과 학문, 관직에 그치지 않고 신선에 이르렀으니, 해인사 학사대에서 최치원의 가야금 소리에 학이 날아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898년 관직에서 은퇴하여 가족과 함께 가야산, 금강산, 속리산 등 명산을 유람했다. 그러다 어느 날 홀연히 지리산 아래 하동 화개의 환학대에서 청학을 불러 타고 피안의 세상으로 갔다.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3월이다. 주한 중국 대사관이 대구광역시에 마스크를 보내며 최치원의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는 도불원인, 인무이국(道不远人, 人无异国)을 함께 보냈다. 돈과 권력만 쥐면 제멋대로 하는 세태에서 의성 고운사의 봄을 지키는 벚나무를 최치원으로 여기고 고개를 숙이는 연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