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나라(하) ㅡ16 두 번째 희생자 1
아내들의 나라(하) 원제: 역사에 없는 나라 작가소개 16.두 번째 희생자 17.실마리 18.숨가쁜 72시간 19.최후의 대결 20.강경파의 깃발 21.내무부 장관의 비밀 22.연하리의 사랑 23.역사에 없는 나라 {{}}작가소개 종로구 중학동 14번지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한국일보 신관 6층 일간스포츠 편집국 부사장실. 그곳에서 그는 매일같이 어떤 기사가 독자를 재미있게 할까 고민한다. 그는 우리가 가장 많이 읽는 스포츠 신문 마케팅의 귀재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인 기자를 수습에서 편집국장, 이사, 사장까지 모두 경험한 그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가끔 우리는 그를 50대 신세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30여 년 동안의 기자 생활만큼이나 그의 삶에서 중요한 테마가 있다. 바로 추리소설 집필이다. 1961년 대구일보에<新임꺽정전>을 연재하면서 시작된 그의 글쓰기는 오랜 기자생활에서 단련된 문체와 다양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10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탄생케 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추경감 시리즈>는 지금도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불새, 밤에 죽다> <악녀 두 번 살다> <안개도시> <악녀시대> <파혼여행>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여자는 눈으로 승부한다> <북악에서 부는 바람> 등이 있다. {{}}16.두 번째 희생자 합동 수사본부에서는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강 유람선에서 건져온 각종 자료들이 민독추의 정체를 밝히는데 크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유람선 접촉은 그들의 요구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감시가 없는 것처럼 되었지만 실은 배 전체에 각종 감시장치를 해 두었던 것이다. 거기서 가져온 중요 자료란, 백장군이라는 사람과 그의 수행원인 여자의 비디오 촬영 테이프와 그들의 목소리 녹음, 지문등 선상 자료와 그들이 사라진 행로에 관한 자료 등이었다. 한동안 그 일에서 손을 떼었던 추경감은 다시 유람선 사건에 차출되었다. 추경감은 여러 각도에서 찍은 백장군의 얼굴 장면을 분석해서 누군가를 알아내는 파트의 일을 맡았다. 이 사람은 분명히 군대에 오랫동안 있던 사람일 것입니다. 백장군의 비디오 테이프를 한참동안 관찰해본 추경감이 제4부장인 신동훈 대령을 보고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신대령은 인화된 백장군의 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짧게 깎은 머리라던지 얼굴 표정 관리가 엄격한 조직에서 울어나온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때의 모양을 자세히 보세요. 군대의 제식 훈련을 받은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절도 있게 움직이는 모양이라던지 돌아설 때의 딱딱한 몸 움직임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추경감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신대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군인들 중에서 이 사람의 얼굴을 찾아내는 게 빠르겠군. 그건 제3부의 소관 아닙니까? 추경감의 말대로 군부에 관한 수사는 합동 수사본부 제3부에서 맡고 있었다. 3부와 우리부가 합쳐서 이 작업을 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은데.... 내가 상부의 허락을 받아 올테니 내일부터 시작합시다. 그렇게 해서 3,4부의 합동 수사가 시작되었다. 우선 백장군이라는자의 인물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만든 뒤 각 정보기관의 예하 부대에 보내 그 사람의 신원을 알아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또한 여자의 사진도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군 정보 및 수사기관뿐 아니라 다른 정보기관이나 경찰의 정보 파트에도 보내 신원을 알아내는 작업을 했다. 추경감은 요원 몇 사람을 데리고 유람선에서 채취한 지문의 주인을 찾는 작업을 하는 한편, 백장군과 빨간 모자의 여인이 사라진 곳을 추적하는 수사도 함께 진행했다. 백장군과 그 문제의 여인은 여의도 유람선 선착장에서 내린 뒤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일단 주차장 쪽으로 왔다. 그들은 여러 사람 틈에 끼여 자동차를 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즐비한 승용차중의 하나를 타지 않고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선착장 뒤 공사장처럼 보이는 곳에 서 있던 흙더미를 실은 트럭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그 큰 트럭이 쏜살같이 달려 고수부지를 빠져나갔다. 트럭은 뚝위의 자동차 물결속으로 파묻혀버렸다. 그러나 합동 수사본부 요원들에 의해 그 트럭의 행방은 계속 체크되었다. 트럭은 육삼빌딩쪽에서 마포대교쪽으로 온 뒤 다리를 건너와 강북 강변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트럭이 한강 대교 밑에 도착 했을 때 트럭에 타고 있어야할 백장군과 여자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추경감은 그 트럭의 번호판에 따라 차주를 찾아냈다. 그는 봉천동에 있는 차주의 집으로 찾아가 주인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어느 조그만 전문 건설업체에 차를 빌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운행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었다. 추경감은 다시 건설회사를 찾아가 그 트럭의 운전사를 만났다. 갓 스물을 넘었을까 말까한 젊은이가 운전사였다. 그날 말이죠. 가만있자. 그날은 억세게 재수 좋은 날이었어요. 이 이야기 우리 과장님이 알면 큰일인데... 그가 갑자기 무엇을 주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추경감이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자 말을 계속했다. 그날 매일 하는 작업인 흙 나르는 일을 계속했지요. 올림픽 도로에서 여의도로 막 접어드는데 한 젊은이가 차를 세우더군요. 그러더니 이 트럭 지금부터 4시간만 빌리자고 하더군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기에 그냥 웃었더니 그는 시간당 2만원씩 주겠다고 하면서 8만원을 내밀더군요 어떻게 생긴 젊은이였나요? 추경감이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 물었다. 그냥 젊은이 에요. 머리를 짧게 깎아 군인들이 사복을 입은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그래서 돈 욕심도 좀 나고...사실 우리 위험을 무릅쓰고 하루 뛰어 보았자 얼마 받는 지나 알아요? 그가 갑자기 엄살을 부리려고 했다. 아니 엄살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생활이 그렇게 고달플지도 모른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어서 그 다음 얘기나 해보아요.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했지요. 그리고 고수부지로 내려가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두 세시간 지나니까 낯선 남녀가 급히 올라타고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고수부지를 빠져나와 도로로 나왔는데 신호등에 걸려 잠깐 서 있는 사이 그들이 없어져 버렸더라구요. 별 싱거운 사람들 다 보았어요. 그 트럭 운전사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백장군의 행방을 찾는 일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그 트럭을 쫓고있던 요원들도 그들이 중간에서 감쪽같이 없어진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던 것이다. 이들의 수사는 벽에 부딪친 것 같았으나 군 정보 기관에서 새로운 소식이 왔다. 백장군이라고 알려진 사람의 신원이 밝혀진 것이다. 전방의 한 정보 부대에서 보낸 보고에 의하면 그는 제165사단 예하의 공병 여단에서 근무하던 백성규 대령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장군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 사회에서 그냥 애칭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즉시 백성규 대령에 대한 병적 카드, 복무기록, 주민등록 카드 등이 합동 수사부로 옮겨졌다. 유람선에서 채취한 그의 지문 대조 작업이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증거는 그가 백성규 대령이 틀림없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백성규 대령. 1950년 학도병으로 입대. 51년에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 공병대 지휘관으로 편성되어 미8군 예하 부대에 편입. 육군 전방 사단에서 주로 근무하다가 육군 대령으로 작년에 예편. 가족 아내와 딸하나. 이런 것이 그에 대한 대강의 이력이었다. 추경감의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백장군으로 알려진 백성규 예비역 대령에 대한 신원 수사가 그 것이었다. 추경감은 우선 백성규 대령의 제대 할 때 주소인 서울시 둔촌동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그 아파트는 뜻밖에도 열 두평 짜리로 낡은 집에 영세민들이 살고 있는 것이었다. 육군 대령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는 믿기기 어려운, 말하자면 아파트촌의 달동네였다. 추경감은 백대령이 사는 5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계단도 낡고 지저분 할뿐 아니라 연탄재와 구질구질한 살림도구들을 쌓아 놓아 올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계십니까? 추경감은 5층 8호실 앞에서 현관문을 뚜드리며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추경감이 현관문을 열어 보았다. 그냥 열렸다. 여보세요. 라면 박스 같은 것이 잔뜩 쌓인 거실 겸 부엌을 둘러보며 다시 큰 소리로 불렀다. 뉘시요? 한참만에 방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다리를 절룩거리는 노인이 나왔다. 피골이 상접해 해골만 남은 것 같은 노인의 모습은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뒤이어 머리만 커다란 영양실조의 어린이 두명이 노인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겁에 질린 채 빼꼼히 내다보았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추경감이 현관에 선 채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현관에는 다 해어진 어린이의 신발이 잔뜩 있었다. 말해보슈. 노인이 절룩거리는 다리를 두어 발자국 옮겨 종이 박스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여기가 백 성규 대령의 집인 가요? 백성규 대령? 예 노인은 처음 듣는 말이란 듯이 눈만 껌벅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령이 아니고 백 장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추경감은 그가 여기서도 장군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얼른 인정했다. 그 양반 좀 찾아 주어요. 우리도 몇 달째 소식을 몰라 큰일 났어요. 노인은 오히려 추경감을 잘 만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노인은 추경감에게 거실로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추경감은 거실로 올라가 상자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노인에게 담배 한대를 권했다. 노인은 담배를 보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을 꺼냈다. 댁은 뉘시오? 우리 백장군님의 친척이시우? 친굽니다. 학교 동창인데 근 십년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여기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나가던 길에 들렸습니다. 지금 여기 안계신가요? 우리 장군님의 친구분이라니 참 반갑구려. 이 세상에 우리 장군님 같은 분은 없을 겁니다. 노인은 백대령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했다. 칭찬이라기 보다는 그를 신처럼 존경하고 있었다. 노인이나 거기 있는 어린이들에게는 그가 바로 구세주였다는 것을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야 추경감도 알았다. 노인이 이야기한 백성규란 사람은 훌륭한 점이 많았다. 지금은 몇 달째 이곳에 오지 않아 노인과 아이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이 작은 아파트는 백성규 대령이 아내, 딸과 함께 살던 집이었다. 그것도 군인 생활 20여년만에 겨우 마련한 아파트였다. 그런데 2년전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이 노인을 집에 데려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대령은 서울역 구내서 자고 있는 거지 노인을 발견하고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집에 데려 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불우한 어린이들도 데리고 와서 열두평 좁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집이 비좁아지니까 오히려 백대령 세 식구가 이웃에 사글세방을 얻어서 나가 살면서 그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달 동안 그 집 식구들의 소식이 끊겼다는 것이었다. 추경감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백성규라는 사람이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추경감은 주민등록을 확인 해보았으나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최종 주민등록지가 그 조그만 아파트로만 되어 있었다. 추경감은 백성규 대령의 친구라는 사람들을 몇 사람 만나 보았다. 그 친구요? 좀 별종이지요. 본성은 착한 사람인데 어떻게나 고집이 세고 고지식한지.... 원리 원칙을 따지는데는 상관이고 아랫사람이고 가 없지요. 모두 백성규하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으니까요. 그렇게 아래위가 꽉막히지만 않았다면 군에서도 크게 될 사람이었어요. 그와 군대 동기라는 사람의 평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백성규. 참다운 인격자입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목숨을 내 놓을 사람이니까요. 그는 늘 이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대해 비분강개하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세상은 꼭 바로잡고 말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군인답지 않은 면모까지 보였으니까요. 군대 동기가 아닌 고교 동창 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자선사업가도 성직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자기 가진 것을 다 내놓을 사람이지요. 군인답지 않게 인정이 많고 너그러워요. 군대에서 장교노릇을 20여년씩 하면서 변변한 집한칸 없고 양복 한벌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그의 부인은 남편 몰래 파출부 벌이도 다 나갔으니까요. 오늘 같은 험악한 세상에 그 친구 같은 순수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자랑이 아니겠어요. 추경감은 그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데 다소는 이해가 갔다. 그의 인간성이나 행적을 캐면 캘수록 머리가 수그러졌다. 그러나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죄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백성규 대령 같은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백성규를 추적하는 일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노인과 어린이가 기다리고 집을 감시하는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조준철이 누나와 서종서 차관의 연관 고리를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나봉주는 그녀대로 조준철을 도울 결심을 했다. 또한 비록 극비의 합동 수사 본부에 차출되어 있긴 하지만 추경감도 조은하 피살 사건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한편 추경감이 차출되어 쫓고 있는 국무위원 부인 납치 사건은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강 유람선 회담이후 정부 쪽에는 국무위원 사이 분열의 조짐까지 보였다. 백대령이 내놓은 국무위원 개별적인 비위, 부도덕 기록은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따위 날조된 기록에 현혹 될 것 없습니다. 싹 무시해요. 이렇게 떠드는 총리 자신부터 켕기는 것이 많은 것 같았다. 백장군의 말대로 이 것을 내외신 기자들에게 터뜨리면 사실이건 아니건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한 당대 거인들의 치부가 모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비대위가 시한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동안 납치된 국무위원 사모님들도 긴박한 순간을 마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근 열흘째 수용되어 자기폭로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서울 외곽 공장지대의 한 건물. 그 곳은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자, 다들 주목하세요. 지금부터 중대한 발표를 하겠어요. 얼굴을 보기만 해도 공포에 떨게 하는 여성부장이 강당에 또 나타났다. 여러분들의 낭군들은 아직도 여러분들 버려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구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자기들의 잘 못을 뉘우치고 이 나라를 더 망치기 전에 나라일에서 손을 떼라고 한 우리들의 권유를 못 받아 드리는 것도 문제지만 그 보다 여러분의 생명이야 어떻게 되든 권력의 방석 위에서 영화를 누리겠다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남편들입니다. 조강지처쯤이야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남자들을 남편이라고 믿고 살아온 여러분들도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여성부장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일장 연설을 했다. 공연히 장관님들을 비난하지 맙시다. 김교준 육군장관 부인 선영실이 큰소리로 항변했다. 그녀는 날씬한 몸매에 날렵해 보이기도 했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조리 있게 말도 잘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으세요. 여성부장이 비위가 상한 듯 탁자를 치면서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여러분의 그 알량한 남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아내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란 것을 설득력 있게 쓰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써서 어떻게 하는 겁니까? 몸집이 뚱뚱한 상공업 장관 부인 황순덕이 볼멘 소리로 말했다. 물론 여러분의 남편인 국무위원들에게 보내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편지로 남편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부득이 여러분이 차례로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차례로 희생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공보부 장관 부인 팽희자가 물었다. 엉터리 국무위원들이 모두 물러가고 이 나라 정권이 양심세력의 손으로 돌아 올 때까지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여러분은 제비뽑기로 한사람씩 제물이 될 수밖에 없지요. 뭐라구요? 오, 하나님! 여기 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그 술렁임도 몇 초뿐 실내는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무거운 공포가 휘몰아쳤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 볼펜과 종이를 나눠줘요. 여성부장이 명령하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 감시원들이 편지지와 볼펜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에 이 나라 장래와 여러분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언제까지 쓰는 겁니까? 김휘수 재무장관 부인 이미선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 고백때 많은 부끄러운 일을 지적 당한 이후 늘 혼자 돌아앉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부터 쓰세요. 한 시간쯤 여유를 줄 테니 마음에서 울어난 글을 쓰도록 해요. 국무위원 부인들은 남편에게 편지를 쓰면서 각자 딴 생각들을 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그녀들이 불안하게 느낀 것은 이 편지를 심사하여 제일 호소력이 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제일먼저 희생자로 삼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박상천 해군장관 부인 차영순씨가 어떻게 희생되었나 하는 것을 입과 입을 통해 잘 듣고 있는 처지였다. 한시간이라고 정한 이상한 편지 쓰기는 거의 오전 내내가 걸려서야 끝났다. 모두가 16절지 종이 한장 정도를 썼으나 몇몇 사람은 여러 장을 쓰기고 했다. 특히 남편의 운전사와 불륜관계가 폭로된 뚱뚱이 황순덕씨와 배소성 외무장관 부인 김순주씨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여성부장에게 마치 시험 답안지를 내듯 편지를 써낸 여자들은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창고 같은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별로 말이 없었다. 모두가 누가 먼저 제비에 뽑혀 두 번째 희생자가 되느냐 하는데 신경이 곤두 서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죽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게되면 우리는 모두 죽는 것이고 살게 되면 모두 살게 되는 것이지요. 총리 부인 문 숙여사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한마디했다. 그녀들이 모래알을 씹듯이 입맛 가신 점심을 먹고 다시 그녀들의 거실 격인 강당으로 돌아 왔을 때였다. 자, 모두들 주목해요. 대체로 괜찮게 편지들을 썼더군요. 한데 몇 사람은 도대체 이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는 편지 뭉텅이를 오른손에 들고 흔들면서 말했다. 제법 쓴 것 한 두통만 여기서 공개를 하고 보내겠어요. 그녀가 공개를 한다는 바람에 모두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불안으로 입술이 마르고 손이 떨리는 여자들도 있었다. 팽희자씨! 예? 모두가 팽희자씨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국민학교 학생처럼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이리 나와 봐요. 아주 모범적으로 썼어요. 나와서 좀 읽어봐요. 팽희자는 거의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면서 앞으로 나갔다. 자, 이것 좀 읽어봐요. 여성부장이 팽희자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던 팽희자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빨리 읽어욧! 한참 머뭇거리든 팽희자는 각오한 듯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당신에게 그녀가 첫마디를 읽자 장내는 숙연해졌다. 모두가 절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여보! 우리가 결혼 한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기는 처음이군요. 지금처럼 당신이 그리운 일은 없었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헤어져 있어야만 하는 겁니까? 당신 곁에 있을 때는 당신이란 존재를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떨어져 있으니까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존재, 아니 나의 전부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여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불안해서 죽겠어요. 나라도 좋고 백성도 좋아요. 하지만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우리가 다시 만나서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여보! 우리는 유관순이나 논개 같은 절세의 애국자이기보다는 평범한 아내와 남편이 되는 길을 찾아요. 여보! 이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주어요. 내가 당신을 잃기 싫듯이 당신도 나를 잃기 싫은 것을 나는 다 알아요. 정말 불안해서 죽겠어요.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용기를 가지세요. 두 번째, 세 번째 희생자 속에 내가 들어가지 말란 법이 없잖아요. 여보 정말 보고 싶어요. 당신의 희자로부터 팽희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편지를 읽는 동안 숙연해진 실내에서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이 많았다. 팽희자의 눈에서는 두줄기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으나 그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팽희자씨 수고했어요. 들어가세요. 여성 부장의 목소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다음. 선영실씨 나와요. 선영실이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 성큼 걸어 나왔다. 늘씬한 몸매에 걷는 모습도 마치 패션 모델들의 걸음걸이 같았다. 육감적인 히프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은 남자들이 보았다면 좋아할 걸음걸이였다. 그녀가 호스티스 출신이라 그렇게 세련되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른 여자들은 생각했다. 읽어봐요. 여성부장이 편지를 넘겨주었다. 어흠, 어흠. 그녀는 마치 독창이라도 하러 나온 소녀처럼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의자에 앉은 뒤 맵시 있게 무릎을 척 포갰다. 늘씬한 각선미가 잘 드러났다. 그까짓 몇 줄 된다고 뜸을 드리고 있어요? 빨리 읽고 들어가요. 여성부장이 독촉을 했다. 존경하는 육군 장관 예비역 육군중장 김교중씨에게.... 후후후... 여기 저기서 갑자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들해요. 여성부장이 마치 국민하교 학생을 다루듯이 말했다. 선영실이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빨리 이 사람들 말 들어주고 저를 구해주세요. 저는 죽기 싫어요. 그까짓 장관자리 그만 두어요. 육군 중장 자리도 그만 두었는데 그까짓 장관 자리 그만두는 게 제 목숨보다 아까워요? 나중에 다시 더 좋은 자리 할 수도 있지않아요? 나 좀 살려 주세요. 선영실 그녀의 호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녀 나름대로의 솔직함이 짧은 글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선영실씨 들어가서 제 자리에 앉아요. 선영실이 다시 히프를 흔들면서 걸어 들어왔다. 조금도 부끄럽다거나 다소곳한 태도는 볼 수 없었다. 이 편지에 대해서 모두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 할말이야 있겠지만 표현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럼 다음에 황순덕씨 좀 나와요. 예? 저 말입니까? 제일 뒷자리에 앉아있던 상공장관 부인 황순덕씨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커다란 얼굴에 눈도 커다란 그녀의 놀란 모습은 금방 다른 사람들 눈에 띄었다. 여기 황순덕씨가 둘 있어요? 여성 부장이 핀잔을 주었다. 황순덕씨가 그 커다란 몸집을 뒤뚱거리면서 앞으로 나갔다. 앉아서 그녀의 걷는 모습을 보고있는 다른 여자들은 저렇게 살만 디룩디룩 찐 여자가 어떻게 남편 외의 남자들과 정사를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황순덕이 나가서 편지를 받아들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도 무릎을 척 포개었다. 그러나 그녀의 팽팽하게 살찐 장딴지는 선영실의 각선미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자, 읽어욧. 여성부장이 편지를 황순덕씨 앞에 집어던지면서 말했다. 몹시 못마땅해하는 행동으로 보아 엉뚱한 내용이 있는 것 같았다. 황순덕씨는 일어나서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줏어들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또 고집스럽게 억지로 다리를 포갰다. 빨리 안 읽고 뭐해욧! 독촉을 받고서야 황순덕은 천천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보고싶은 휘수씨! 그녀 편지의 첫마디를 들은 여자들 중에는 킥킥 웃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만나 함께 산 것이 벌써 20년이 가까웠구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처음이군요.... 웬 넋두리가 그렇게 많아! 편지를 읽는 도중에 여성 부장이 핀잔을 주었다. ...당신은 항상 나랏일을 걱정하며 20여년을 살았지요. 당신이 공무원 생활을 하는 동안 항상 가정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했지요. 솔직히 말해 그런 당신의 태도에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공직 생활 몇 년이면 재산이 몇 십억이니 하고 떵떵거리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 그런 것은 하나도 부럽지 않았어요. 아니... 황순덕씨의 편지는 뜻밖의 서두로 시작되었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편 몰래 다른 사나이들과 정사를 가질 정도로 타락한 여자의 편지치고는 뜻밖이었다. 황순덕씨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편지를 읽어 나갔다. ...나는 당신에게 영원히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른 여자예요. 솔직히 말한다면 아내 될 자격이 없는 여자예요. 하지만 당신에게 지은 죄를 만분의 일이나마 씻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휘수씨! 이 사람들의 요구를 절대로 들어주면 안됩니다... 어머! 음... 여기 저기서 놀라움과 신음이 뒤섞여 나왔다. 황순덕씨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빨리 읽어욧! 여성부장이 독촉을 했다. ...이 사람들은 가장 야비한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에요. 연약한 부녀자들의 목숨을 이용해 자기들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입니다.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방법이 글렀으면 그 일은 글러먹은 일입니다. 지금 당신이 몸담고 있는 정부가 아무리 타락하고 독재적인 정권일지라도 이 사람들 앞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휘수씨! 다른 장관님들은 아내의 목숨과 장관 자리를 바꿀지라도 당신만은 그렇게 하지 마세요. 내 목숨 같은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나는 벌써 죽었어야 할 목숨인걸요. 당신은 나 같은 사람은 싹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행동해온 공직자로서의 도리를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휘수씨. 그녀는 목이 메인 듯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뚱뚱하고 못생긴 그녀의 용모에서부터 경멸을 해 온 그녀들이었다. 남들이 돈방석이라는 경제부처의 고급 공무원 자리에 20여년을 있으면서 40평 짜리 집한칸 밖에 없다는 때부터 그녀를 얕잡아 봤었다. 나는 벌써 죽었어야 할 죄인이에요. 아무리 부도덕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강도들에게 내 줄 수는 없는 일 아니에요? 뭐야? 강도? 잘 논다. 여성부장이 화가 났는지 갑자기 소리를 꽥질렀다. 잠시 멈추었던 황순덕이 다시 차분하게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수용소 같은 데 갇혀 있어요. 서울 외각 어디인 것 같은데 어딘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런 대로 견딜 만 합니다.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책임자는 이 조직의 여성 부장이라고 하는데 꽤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가진 사람 같습니다. 아무튼 나 같은 사람 살리려고 나라를 파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당신의 순덕으로부터 편지를 다 읽고 난 황순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여자들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빨리 제자리로 들어가요. 뭘 잘했다고 울긴 울어요. 여성부장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황순덕은 울음을 그치고 들어왔다. 그녀를 보는 다른 여자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남편 몰래 남의 남자 앞에 치마를 벗는 타락한 여자가 아닌, 지조 있는 존경스러운 여자로 모두의 눈에 비쳤다. 다음 문숙 여사 나와요. 여성부장은 일행 중에 총리 부인인 문숙씨에게만 꼭 여사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녀가 나이 가장 많기도 하겠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항상 근엄한 무엇을 느끼게 했다. 함부로 접근 할 수 없는 위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장관 부인들도 문 숙씨에게만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 문숙씨가 의연한 태도로 앞에 나가 여성 부장이 주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읽어요. 여성부장의 명령이 약간 부드러웠다. 모두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저도 별 수 없겠지. 남편아 나 살려라 하고 눈물 짜는 소리나 했겠지.. 여자들 중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 숙씨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총리각하.! 그의 서두를 듣고 모두 조용해졌다. 기대 했든 것과는 너무도 다른 서두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길인지 잘 생각하셔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문숙 올림 그녀의 편지는 이렇게 간단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런 소리를 다 썼다고 해서 밖으로 전달될지 의심스럽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간단해서 좋아요. 하지만 아무런 설득력이 없어서 그런 편지는 하나마나 일 것이에요. 들어가도 좋아요. 문숙 여사는 언제나 처럼 아무 표정없이 들어와 앉았다.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구질구질하게 살려 달라는 글이나 써 놓은 사모님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정채명 내무 장관의 부인 조민숙. 배소성 외무 장관의 부인 김순주등.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 편지들을 가지고 바깥 세상으로 나갈 사람을 선발하도록 하겠어요. 이 편지들을 다 그들에게 보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편지들은 그대로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그녀는 손으로 편지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이 편지를 가지고 서울 시내로 들어 갈 사람을 뽑겠어요. 모두 서로 가려고 할 테니까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가도록 하겠어요. 여성부장의 말은 그녀들에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편지를 전달하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인질 한 사람을 시켜서 보낸단 말인가? 여자들은 여성 부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먼젓번에 뽑혀간 해군 장관 부인 차영순씨가 영 돌아오지 못하는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꾸 머리에 떠 올렸다. 모두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왜 표정들이 그래요? 편지 가지고 서울 간다는데... 여성부장이 인질들의 속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하게 일을 진행했다. 자 지금부터 제비뽑기를 해서 행운의 한 사람을 뽑겠어요. 여러분들 입찰계라는 것 자주 해 보았지요? 그 것을 왜 우리가 전달해야 합니까? 문숙 여사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일어서서 말했다. 그녀는 톤을 낮추어 조용히 이야기했으나 강력한 항의의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와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인 일을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여성부장의 말이 도대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 편지 내가 가지고 갈 테니 낙찰곈지 뭔지 하는 제비뽑기는 그만 두도록 해요. 뜻밖에도 황순덕이 벌떡 일어서서 이야기했다. 말은 조용히 했으나 그녀의 입술과 팔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편지의 메신저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두 번째 희생자! 목숨을 내 놓는 일을 누가 자원하겠는가? 그러나 황순덕은 그것을 자원하고 나섰다. 조금 전에 읽었던 그녀의 편지에서 그녀의 존재를 다시 느꼈던 여자들은 모두 충격으로 입을 벌인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황순덕씨는 아까도 이상한 편지를 쓰는 위선자였는데... 또 이상한 제안을 하는군요. 이 편지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편지 가지고 나가서 남편 몰래 만나든 그 운전기사 품이 그리워서 그러는 거죠? 여성부장이 모욕감을 주려는 듯 한껏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황순덕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편지는 내가 가지고 가겠소. 나는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바깥양반들의 지위를 보더라도 내가 할일 같으니 그렇게 해주시지요. 문숙여사가 말했다. 그러나 여성부장은 두 사람의 말을 묵살하고 다시 자기 고집대로 일을 진행했다. 자, 지금부터 제비를 뽑겠습니다. 그 상자 가지고 와요. 어느새 들어왔는지 곁에 와있는 청년 두명을 향해 여성 부장이 명령했다. 곧 네모난 조그만 상자를 청년이 들고 들어왔다. 자, 이 상자 속에서 접혀 있는 종이 쪽지 한 장씩을 각자가 꺼내는 겁니다. 종이 쪽지에는 넘버가 적혀 있습니다. 그 넘버를 잘 외어 두십시오. 그럼 누가 먼저 나오겠어요? 실내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문숙 여사가 먼저 나갔다. 그녀는 상자에 손을 넣어 접힌 종이 한 장을 뽑아들고 펴 보았다. 4번이군요. 문숙 여사가 말하자 청년이 그 것을 확인한 뒤 자기가 가진 노트에 적었다. 그 것을 가지고 들어가 있어요. 다음... 그 다음에 배소성 외무장관 부인 김순주가 나왔다. 상자 속에 집어넣는 희고 가느다란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멀리 있는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19번이에요. 그녀는 마치 숫자가 멀리 있을 수록 행운이나 되는 것처럼 다소 안도의 모습으로 말했다. 다음에는 황순덕이 나왔다. 그녀의 넓적하고 큼직한 얼굴은 아무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5번. 그녀는 종이 쪽지를 청년 앞에 휙 던지고 들어가 버렸다. 마음대로 하라는 투였다. 그 다음에는 아무도 제비를 뽑으러 나오지 않았다. 다음... 여성 부장이 독촉을 했다. 그러나 모두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군요. 그럼 내가 한사람씩 호명을 하겠어요. 그녀는 일행을 주욱 돌아본 뒤 호명을 했다. 선영실씨! 옛? 저, 저요? 김교중 육군 장관 부인이 놀라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나왔다. 다음 김휘수씨. 다음 팽희자씨, 다음 조민숙씨... 스물 한명 모두가 나와서 숫자 한 장씩을 뽑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스물 한 명중 한사람만을 다시 추첨하겠습니다 여성 부장의 말이 떨어지자 실내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국무위원 사모님들이 갇혀서 온갖 수모 속에 생명을 내건 제비뽑기가 진행되는 동안 정부 쪽에서는 갑론을박이 그치지 않았다. 우선 한강 유람선에서 백장군이라는 자가 건네준 자료가 아주 고약한 것이었다.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의 차관급 이상 요직 인물들의 신상에 관한 내용이 주자료였다. 장차관등 현직 인물뿐 아니라 과거 이 정권과 연관된 인물이나 여당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주로 그들의 약점이 지적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대통령의 여자 관계까지 자세하게 언급되어 그 것이 공개 되는 날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 같았다. 대통령의 스캔들은 주로 아무개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여자들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현직의 대통령에 대해 소위 민독추가 공격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 외 각부 장차관들에 관한 것도 여자관계를 비롯해 재산문제, 부당한 업무처리, 친인척이나, 재벌과의 부도덕한 유착등이 열거되어 있었다. 아니 이런 엉터리 정보가 도대체 어디서 흘러 나갔단 말입니까? 정일만 전 정보국장이 열을 올렸다. 정일만 전 국장은 정보국장에서 해임된 이후 비교적 말수가 적었으나 이 일에만은 흥분을 하고 나섰다. 말도 안돼요. 내가 친척 명의로 어마마한 재산이 있다고? 부자 친인척 둔 것도 잘못이야? 박인덕 공보처 장관이 이어서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내가 명색이 교회의 장로인데 이렇게 터무니없는 모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국무 회의 때는 비교적 조용히 앉아만 있던 홀아비 원자력 장관이 복잡한 여자관계의 지적에 흥분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펄펄 뛰지만 속으로는 모두가 꺼림직한 점이 없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모든 조사를 했는가 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이 자료가 거의 엉터리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진실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자료가 엉터리라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이자료가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성유 정보국장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중요 하지만 이 자료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유출되었나 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자료는 우리 정보 기관들이 수집해 가지고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박상천 해군 장관이 몇몇 장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니 그럼 장관님은 우리가 이 것을 유출 시켰다고 생각하는 거요? 조민석 육군 정보국장이 볼멘 소리를 했다. 누가 유출시켰느냐가 지금 문제가 아니오. 김교중 육군장관이 은근히 조국장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서 유출되었다면, 그러면 이것이 사실이란 말인 가요? 무슨 말들을 그렇게 해요? 고일수 법무장관이 삿대질을 하면서 떠들었다. 그때였다. 김영기 총리 비서실장이 긴장된 얼굴로 들어왔다. 그가 총리의 책상 앞에 메모지를 내 놓았다. 메모지를 본 총리가 긴장한 얼굴로 일어섰다. 토론들 하고 계십시오. 잠깐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여기서 함께 의논하시지요. 정채명 장관이 말했다. 그는 워낙 거물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총리도 선배 대접을 깎듯이 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때로는 점잖게 총리를 나무라기도 했다. 총리는 들은 척도 않고 바쁘게 밖으로 나갔다. 그는 밖으로 나가 자기가 직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수화기에 나왔다. 각하 저놈들이 일을 또 저지를 모양입니다. 그는 한마디하고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소위 민독추 위원장 이름으로 내 외신 기자회견을 야당 당사에서 가지겠다고 합니다. 그는 다시 땀을 닦고 대답했다. 전번 한강 유람선에서 보낸 공개 자료를 공개하여 부도덕 정권의... 그때 수화기에서 옆에 있는 사람도 들을 정도로 큰 소리가 흘러 나왔다. 부도덕 정권이라는 말에 대통령이 화가 난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모래까지 자기들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의 말이 계속되었다. 예. 모래까지 자기들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인질 중에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총리의 목소리는 약간 떨려 나왔다. 그로부터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대통령 공보비서관이 갑자기 기자 회견을 열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내각이 심기일전하여 일하는 자세를 갖추고 대국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 개각을 오늘 날짜로 단행합니다. 그는 조금 뜸을 드린 뒤에 발표문을 읽었다. 국무 총리에 김교중 전 육군장관, 육군장관에는 정일만 전 내각 정보국장. 이상입니다.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는 돌연한 개각이었다. 공보 비서는 기자들의 질문을 거절한 채 회견실에서 나가버렸다. 대통령의 이러한 엉뚱한 인사는 내각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총리 부인도 지금 인질로 잡혀 있는데 경질을 한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지만, 김교중 장관을 총리로 발탁한다는 것도 수긍하기 어려운 인사였다. 더구나 정일만 전 정보국장을 육군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내각 내부뿐 아니라 매스컴 쪽의 반응도 아주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대통령의 해프닝은 효과를 가져온 측면도 있었다. 민독추의 백장군으로부터 성유 국장에게 직접 전화가 걸려왔다. 총리를 바꾸셨더군요. 국회 동의를 아직 얻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총리 서리겠지요. 우리는 이러한 조그마한 움직임을 우리에 대한 성의로 인정하겠습니다. 다음 전 내각이 물러 날 때는 총리 서리가 부담을 덜 느낄 테니까요. 그러나 정일만씨 같은 파렴치한이 육군장관이 되는 것은 유감입니다. 어쨌든 내일 기자회견 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대신 모래까지 현 내각의 부도덕성에 관해서는 어떤 형태든 국민에 대해 고백성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보세요. 백장군... 그러나 백장군의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겨버렸다. 비대위 합동 수사본부에서는 그의 전화가 어디서 걸려 온 것인가를 추적해 내는데 성공했다. 백장군의 전화는 광화문 우체국 옆의 공중 전화였다. 그 곳을 재빨리 수색했으나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조치로 그들의 기자회견이라는 것을 막는데는 일단 성공했으나 두 번째 희생자를 막기 위한 대책이란 아무 것도 세우지 못했다. 김교중 총리는 취임 첫 조치로 비대위를 확대 개편하여 전 국무 위원과 내각 정보국장, 육군정보부장등을 포함시키는 조치를 했다. 저 자들이 내각이 총사퇴 하더라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명분 축적용으로 자꾸 국무위원들의 개인적 비리를 조작 폭로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꼭 조작했다고 만 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정채명 장관이 한마디했다. 장관들 중에서 총리 깜이 있다면 정채명 내무일 것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파란 젊은 사람 밑에 내무 장관을 지내게된 그 였으나 크게 불만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차관의 도덕성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그였다. 물론 전혀 문제가 없다고 단언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만.... 어쨌든 소위 민독추가 하자는 대로 따라 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첫 번째 내각 회의는 갑론을박만 있었을 뿐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내각회의가 그러고 있는 사이 또 하루가 가고 그들이 말하는 두 번째 희생자가 나올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어물어물 하다가 또 홀아비 장관이나 한사람 만들 것이요? 도대체 수사나 정보를 맡은 부처들은 무엇을 하는 거요? 배소성 외무장관이 불만을 터뜨렸다. 누가 일부러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잖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정일만 신임 육군장관이 핀잔을 주었다. 그는 정보국장때는 물론이고 잠시 그 자리를 물러나 있는 동안에도 기가 펄펄 살아있던 인물이었다. 제2의 희생자를 예고한 민독추의 인질 수용소에서는 여전히 긴박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 자. 번호 없는 사람은 없지요? 그럼 지금부터 한사람이 여러분 번호 중에 한사람을 다시 뽑겠습니다. 거기에 당첨된 사람이 이 편지를 전하는 메신저가 되는 것입니다. 여성 부장이 인질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국무 위원 부인들은 모두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여성 부장의 입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된 사람도 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사람도 있었다. 오금을 달달 떠는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문숙, 황순덕씨만은 비교적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문숙여사는 아예 눈을 착 내려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누가 나와서 번호표를 뽑겠습니까? 여성 부장이 옆에 다시 마련된 추첨함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스물 한 개의 번호 중 하나를 뽑아 내는 일인데, 저승으로 보내는 번호표를 뽑아 원망을 듣는 일을 자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원자가 아무도 없나요? 그러면 내가 지명을 해도 좋습니까? 언제는 인질들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을 했던가? 모두가 더욱 겁에 질려 목을 움츠렸다. 거기에 지명 당하면 큰일이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지명을 하겠어요. 가장 공평하게 추첨을 해 줄 사람은 아무래도.... 말을 끊고 그녀가 인질들을 쭉 훑어보다가 문숙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문숙 여사! 문숙씨는 이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고 또 총리의 사모님이기도 하니까... 아니 지금은 전 총리의 사모님이지만... 그 순간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지명되지 않았다는 것이 목숨을 구한 것만큼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숙씨 앞으로 좀 나오실까요? 문숙씨가 아무 말도 않고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나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신 것도 잠시 모두 다시 숨막히는 공포와 긴장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 그 상자 속에서 한 장만 뽑아요. 영광스러운 당첨자가 될 것이에요. 문 숙씨는 뒤로 돌아서서 추첨함에 손을 넣으려다 말고 인질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 참읍시다. 지금 이 자들이 하고 있는 일은 나라나 시민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명분이 있으니까 어떤 짓을 해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있겠지만... "옳아요. 우리 모두 이따위 광대 놀음을 거부합시다." 문숙 여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순덕이 그 뚱뚱한 몸집을 날렵하게 일으켜 세우며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거부합시다." 선영실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그러나 다른 열 일곱 명의 여자들은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소리를 하다가 엉뚱한 보복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운 눈초리로 황순덕과 선영실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들이에요? 당신들을 장관 사모님으로 대우해 주려고 했더니, 도저히 못 참게 만드는군!" 여성 부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장관 사모님으로 대우를 해준다고요? 여기가 뭐 코미디 경연장인 줄 압니까? 웃겨도 적당히 웃기시구려. 당신은 사람들을 납치 해다 가두어 두고 한자리 안내 놓으면 하나씩 죽이겠다는, 천하의 날강도 짓을 하는 주제에...아니 그것도 당신이 하는 짓이 아니라 당신은 그 날강도들의 하수인이잖아. 그런 주제에 무엇이 어떻다구요? 사모님 대우? 하하하..." 황순덕이 코웃음까지 치면서 여성 부장에게 최대의 모욕을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여자들 중에는 속시원하게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렇게 하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걱정으로 가슴이 조마조마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부창부수라는 말이 있듯이 그 장관님들에 그 사모님들이군요." 여성 부장은 의외로 침착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 당장 펄펄 뛸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여러분이 아무리 어거지를 부려 보아야 소용이 없어요. 역사란 언제나 정의의 바다로 흐르는 강이니까요. 자, 추첨이나 끝내지요!" 여성 부장이 황순덕을 한번 흘깃 본뒤 눈을 아래로 깔고 말했다. 문숙 여사가 아무 말도 않고 추첨함에 손을 집어넣고 접힌 종이 쪽지 하나를 집어 여성 부장에게 주었다. 인질들의 공포는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여성부장의 입만 바라보았다. 모두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었다. "추경감. 빨리 현장으로 갑시다." 백대령의 소재 수사를 위해 밤을 새우고 난 추경감이 합동 수사 본부 간이 침대에서 겨우 눈을 좀 부치려고 할 무렵 신동훈 대령이 불쑥 나타나서 한 말이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져있고 야전용 군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대한 사건이 생겼다는 것을 추경감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추경감은 아무 말도 않고 벌떡 일어나 점퍼를 위에 걸치고 그를 따라 나섰다. 그의 지프가 남대문을 나와 용산역 앞을 지날 때까지 추경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프가 한강대교 입구에서 멎었다. 새벽 3시께 통행금지가 실시 중인데도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좀 내려봅시다." 강변 도로에 신대령이 내려섰다. 추경감도 따라 내리면서 한강에서 무슨 사고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곳에 미리 와 있던 수사 요원들이 신대령을 보자 부동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군 수사 기관에서 차출된 사람이라 추경감도 안면이 있었다. "시체는 어디 있나?" "예. 저기 강 가 고수 부지에 있습니다." 신대령과 추경감은 수사 요원의 안내로 고수 부지에 내려섰다. 어디로 내려 왔는지 앰뷸런스 한 대가 와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헤드라이트 불빛 앞에 분명히 여자의 시체가 한 구 놓여 있었다. 물 속에 서 금방 건져 낸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굽니까?" 추경감이 신대령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물었다. 신동훈 대령은 나이가 추경감보다 근 열 살이나 아래지만 지금은 그가 그의 상관이라 깍듯이 존대를 했다. 한강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툭하면 생기지만 그럴 때는 일선 경찰서에서 변사사건 처리를 하고 만다 . 그런데 합동 수사 본부가 나서야 하는 일이라면 대개 어떤 사람이라는 짐작이 갔지만 추경감은 자신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인질 사모님 중의 한 분인 것 같습니다.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하니까... 통상적인 현장 초동 수사는 생략합니다. 빨리 시체를 딴 곳으로 옮겨야 하니까 경감은 지금의 익사 위치, 시체의 모양을 대강 보아 두었다가 나중 보고서 쓰는데 참고가 되게 하십시오." 신대령은 추경감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추경감은 앞으로 다가가서 시체의 모양을 자세히 보았다. 물에 젖어 흐트러진 검고 긴 머리털에 싸인 얼굴은 40대의 곱상한 여인이었다. 갸름하고 목이 긴 미인형의 여자였다. 자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상류층의 여인이라는 인상을 강력하게 주었다. 짧은 스커트 밑으로 푸른빛이 돌 정도로 하얀 다리의 각선미가 자갈과 비교가 되었다. 170센티는 충분히 될 것 같은 늘씬한 키에 가는 허리 육중한 히프 등이 한눈에 출중한 미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꼭 감은 두 눈 아래로 핏기 없는 얇은 입술도 꼭 다물어져 있었다. 얼른 보아 사고로 빠져 죽은 것인지 자살을 한 것인지는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시체를 빨리 옮기지." 신대령이 명령하자 시체는 곧 앰뷸런스로 옮겨졌다. "육군병원으로 가." 다시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앰뷸런스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어둠을 뚫고 강둑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위로 올라갑시다." "어느 사모님입니까?" 추경감이 그를 따라 강둑으로 올라오면서 다시 물었다. 신대령은 한강 대교 차도 위에 올라 와서야 대답을 했다. "저기 유서가 있다니까 봅시다. 아무래도 공보부 장관의 사모님인 것 같습니다. " 그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다리위 난간께로 걸어갔다. 그들이 멈추어 선 곳에는 빨간 색 여자의 하이힐 한 켤레와 누런 색 대봉투, 까만 핸드백 등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한강 다리 위에 남아 있는 유류품으로 본다면 강에 투신 자살한 사람들이 남기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자살을 했습니까?" 추경감이 신동훈 대령을 보고 물었다. "인질로 잡혀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한강까지 나와서 자살을 합니까?" 신대령은 그래 가지고 어떻게 형사 노릇을 했느냐, 참으로 딱도 하다는 표정으로 추경감을 돌아다보았다. 다리 위의 유류품을 빨리 수습한 수사 요원들은 즉시 그곳을 떠나고 통제를 해제했다. 여러 사람이 알게 되면 소문이 번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그 바람에 변사 사건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정밀한 감식 수사는 모두 생략되었다. 합동 수사본부로 돌아온 신대령은 수사 회의를 열고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변사체의 신원은 팽희자. 나이 43세. 공보부장관 박인덕의 처. 약간 살이 찐 미인형의 얼굴. 문신 눈썹. 코와 이마에 성형 흔적. 맑은 피부. 유류품으로 빨간 색 구두와 내의를 비롯한 여성 정장 일체. 검은 색 핸드백. 쓰던 화장품과 백화점 할인카드 3장. 현금 수표 등 41만원 3천 2백원. 누런 색 대봉투에는 팽희자를 비롯한 인질 스물한 명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는 모두 자필로 쓰여졌으며 용지는 갱지 16절지를 사용했다. 편지의 내용은 모두 그들의 남편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대개가 빨리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팽희자 씨의 편지는 콧등이 시큰해지는데요." 추경감이 신대령을 흘깃 보며 말했다. "우리는 유관순이나 논개가 되기보다는 평범한 아내의 길을 찾자는 구절이 있던데 경감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신대령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절실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 여자는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세상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더군요." 추경감이 목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신대령은 몹시 불쾌한 듯 콧등을 찡그리고 한참동안 있었다. "그러니까 경감님은 그 편지가 감동적이라는 말씀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공직자의 아내로서, 더구나 이 나라 국무위원의 아내로서의 국가관이 영 형편없어요.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되든 우리의 행복을 지켜야 된다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아닙니까? 적어도..." 신대령이 큰 소리로 떠들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공연한 일로 열을 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기 보다는 장관 사모님을 공개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꺼림칙했던 모양이다. "수사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한참만에 추경감이 입을 열었다. 다른 수사관들도 모두 신대령의 입을 쳐다보았다. "우선 이 사건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결정된 내용 외는 일체 함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사의 전체적인 방향은 일신상의 비관으로... 투신 자살한 것으로 잡아야 합니다." 신대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장관의 사모님이 뚜렷한 이유없이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고 하면 매스컴에서 믿어 주지 않고 온갖 억설을 다 쓸 겁니다." 추경감이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수사관 생활 20여 년에 온갖 압력을 다 받았으나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을 하자고 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건 상부의 발표에 맡겨두고 우리는 그렇게 정리를 합시다." 신대령이 다시 못을 박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부에서 발표를 어떻게 하든 우리는 진실을 밝혀 두어야 합니다. 납치 사건을 해결하는데도 이 사건의 진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경감은 굽히지 않았다. "추경감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내각 정보국에서 차출된 요원 한 사람이 추경감의 편을 들어주었다. 신대령은 한참동안 이마를 찌푸리고 앉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팽희자 씨 자살 사건의 진실을 캐 보세요. 그러나 이것은 절대 우리의 공식 의견이어서는 안됩니다." 박인덕 공보처 장관 팽희자 여사의 변사 사건은 극비 속에 감추어져 있었으나 그 이튿날 아침 한성일보에 제 일보가 보도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인지 그녀가 단순히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보도만 하고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보도가 나가자 매스컴의 초점은 공보부 장관에게 쏠렸다. 부부간의 애정에 문제가 발생해서 투신 자살을 한 것이 아니냐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추경감이 예언했던 대로였다. 그리고 애매하게도 노량진 경찰서가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에서부터 유서가 있다는데 내 놓으라는 요구까지 하면서 기자들이 형사들에게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선 경찰서에서는 시체도 본 일이 없고 더구나 유서 따위는 구경도 못했기 때문에 딱한 노릇이었다. "상급기관에서 수사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형사들이 이렇게 발뺌을 했으나 좀체 통하지 않았다. 매스컴은 어디서 나왔는지 박인덕 장관과의 불화설을 퍼뜨리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는 소스를 달아 팽희자 씨가 최근에 불륜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흥미 위주의 추측 기사를 쓰기도 했다. "도대체 어느 부서에서 이런 못된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것입니까. 불쌍한 내 처를 이렇게 매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또 뭡니까? 우리 부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못된 타락한 연놈으로 매일 보도가 되고 있는데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박인덕 장관이 비대위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스물두 명의 아내 중에 왜 자기 아내가 두 번째로 희생이 되어야 하는가! 땅을 치면서 울분을 삼키고 있는데 이번에는 불륜의 굴레가 또 씌워지자 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건의 방향을 조종하고 있는 내각 정보국에서 진실을 숨기기 위해 엉뚱한 기사를 흘려 보내고 있다는 것을 그가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정 이런 식으로 일을 끌고 나가면 나 장관 자리 내놓겠어요. 그리고 기자회견 열어 민독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하게 죽은 내 처의 누명도 벗길 겁니다." 박장관이 마침내 폭탄 선언을 했다. 국무 위원들은 모두 놀라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때 정일만 육군장관이 입을 열었다. "박인덕 장관 흥분 좀 가라앉히고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서로 헐뜯기나 하는 것은 저들이 바라는 바대로 되는 것입니다.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물론 스물한 명의 사모님 중에 하필 박장관의 사모님이 당했다는 데에는 동정을 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옵니까?" 여기 까지 점잖게 이야기하든 정일만 장관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에 박장관이 기자 회견을 열어 당면한 정부의 위기를 노출시킨다면 박장관이 제일 먼저 희생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정신 차리시오!" 정일만 장관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끝내자 박인덕 장관이 더욱 큰소리로 대들었다. "무엇이라고? 당신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박인덕 장관이 벌떡 일어나 덤빌 듯 했다. "당신이라니? 이봐! 너무 까불지마! 당신이 기자 회견하기 전에 내각 정보국에서 먼저 폭로할 것이 얼마든지 있어. 아니 백장군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보낸 자료에도 있어. 당신 좋은 자리 5, 6년 있는 동안에 뇌물 받아 숨겨 놓은 재산이 얼마인지나 알아? 2백억도 넘어. 국민학교 다니는 당신 아들 명의로부터 처남, 사돈의 팔촌까지 이름 빌려 사놓은 부동산 좀 공개해 볼까?" "거짓말이야." 박인덕 장관은 이렇게 말했으나 그 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금세 기가 팍 죽어버렸다. "자. 쓸데없는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하고 대책을 논의합시다." 총리 서리가 된 김교중 장관이 분위기를 바꿀 양으로 말했다. "국사를 이끌고 가야하는 국무회의가 도대체 이게 뭡니까? 우리 모두가 떳떳하지 못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추잡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모두 부끄러운줄 아시오." 한마디 말도 않고 있던 정채명 내무가 점잖게 타일렀다. "검찰에서 수사 결과를 공식으로 밝히는 것이 좋겠군요." 이후범 원자력 장관이 제안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후 서울 지검에서 사건 내막을 발표 할 것입니다. 팽희자 여사는 투신 자살 한 것입니다.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난 박인덕 장관 부부의 눈물겨운 가정살이가 잘 부각될 것입니다." 범무장관의 어이없는 발언에 아무도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어디 먼 곳으로 가서 살아요." 조준철의 털부숭이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나봉주가 던진 말이다. 조준철은 아무 말도 않고 매끈한 그녀의 등을 쓰다듬기만 했다. 방금 격렬한 정사를 끝낸 그녀의 등에는 땀이 촉촉하게 배여 있었다. 저녁 무렵 심각한 얼굴로 조준철의 병원에 찾아온 그녀는 다짜고짜 준철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다가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입술이 뜨거웠다. "봉주. 왜 이래 누가 본단 말이야." 병원 복도에서 갑자기 기습(?)을 당한 조준철은 그녀를 껴안은 채 급한 대로 숙직실로 들어갔다. 그날 밤 그가 숙직이기 때문에 방은 비어 있었다. "준철 씨 나 좀 어떻게 해주어요. 죽여도 좋아." 그녀는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준철은 그녀가 욕정에 못 이겨 이러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요구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어느새 준철 자신의 욕정이 불붙기 시작하고 그들은 병원 숙질실에서 황급히 서로의 옷을 벗기기에 바빴다. 그들의 돌발적인 정사는 숙질실을 뜨거운 숨결로 채웠다. 그들의 정사는 서둘러 끝나고 텅빈 가슴을 서로 맞댄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철 씨. 왜 대답이 없어요?" 재촉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준철이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쏟아지고 있었다. "봉주야! 무슨 일이 있었지?" 준철이 그녀의 알몸을 가슴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묻지 말고 사랑 한번 더해 줘!" 그녀가 준철을 껴안은 채 몸을 뒤척여 그를 자기 배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의 나봉주와 전혀 다른 행동을 보여 주었다. 마치 괴로운 자기의 위치를 섹스로 탈출하려고 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조준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요구를 다시 들어주기 위해 몸을 가누었다. 연거푸 이어진 정사는 처음보다 더 뜨겁게 이루어졌다. 조준철은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의 육체가 신기했다. 나봉주도 두 번째 정사에 더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이민이라도 가자는 말이야?" 조준철이 그녀를 가슴에 안은 채 담배를 찾아 한 개비를 입에 물면서 말했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않았다. "갈 수 있으면 그렇게 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갈증 들린 사람이 냉수로 실컷 목을 축인 뒤의 느긋함 같은 것을 그녀에게서 느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보아." "......" 그녀는 한참 동안 조준철의 가슴에 난 털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조준철씨 나를 사랑해요?" "물론이지." "얼마만큼? 나하고 같이 죽을 수 있어요?" 나봉주가 고개를 들어 준철의 눈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왜 그러니? 그래 죽을 수도 있어.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해보아" 조준철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 도망쳤어." "도망쳐? 아니 그럼..." 나봉주는 조준철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나를 찾으면 죽일지도 몰라. 준철씨 누나도 그들이 죽였을 거야." 나봉주가 그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미부대 요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하숙집도 옮겨버렸어. 사무실의 중요 서류들은 내가 복사해서 한 불 가지고 나왔어. 그건 아무도 못 찾는 곳에 두었어. 정말이지 더 견딜 수 없었어." "잘했어." 그렇게 말하는 조준철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 서류들은 어디에 두었는데?" "준철 씨는 그걸 모르는 게 좋아요. 만약에 그들이 준철 씨를 의심해서..." "무슨 뜻인지 알겠어." 준철이 그녀의 입을 자기 입으로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같이 있지 말아요. 참 당분간 준철 씨와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나봉주가 준철의 입술에 몇 번이나 자기 입술을 문지르면서 이야기했다. "왜?" "왜가 아니에요. 만약 나를 미행하든 자들이 준철 씨를 해코지하면 어떻게 해요. 나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준철 씨가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싫어요." "봉주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조준철이 봉주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맨살인 그녀의 가슴을 통해 콩닥거리는 그녀의 심장이 준철의 가슴을 공명시켰다. "결혼도 당분간은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봉주야!" 조준철은 더 참기 어려운 듯 꼭 껴안은 봉주의 맨몸 위로 올라갔다. "아니..." 그러나 봉주는 더 뜨겁게 준철을 받아주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적극적인 행동으로 준철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는 신음으로 변했다. "....준철 씨....음, 음..." 그녀의 뜨거운 신음은 준철을 더욱 자극하여 그의 행동을 더없이 거칠게 만들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했다. 모음이 없는 소리들이 목에서 저절로 흘러 나왔다. 두 사람 모두 사랑 행위에 몰두해 있는 동안은 잠시 거미 부대도 죽음도 잊었다. 이 순간만이 영원히 계속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마침내 더 오를 곳이 없게 된 두 사람은 황홀한 풍선을 터뜨렸다. 풍선이 터진 뒤에도 두 사람은 꼼짝 않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들의 세 번째 사랑은 더 길고 더 뜨겁게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조준철이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당분간 남의 눈에 띠지 않아야 되겠지요. 내 친구의 남편이 용인에서 조그만 봉제 공장을 하는데 거기 가서 당분간 지낼 작정이에요." 나봉주를 용인의 봉제 공장으로 보낸 조준철은 추경감을 찾아갔다. "시경에서도 추병태 경감이 어디 계신지 확실히 모른다구요?" 조준철은 서울 경찰청을 몇 번이나 드나들어도 추경감의 행방을 알 수 없자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아 며칠을 그 집앞에서 서성인 끝에 어느 날 이른 아침 그를 가까스로 만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