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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genius school] 최고의 명문고 윤세고등학교
(작가)반하늘
(메일)suddenly28@hanmail.net
(연재)맑은하늘①
( 팸)미녀팸 (http://cafe.daum.net/GirlTown)
(출처)╋소설나라╋ (http://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절.대.금.지 ※
※ 퍼가실 땐 작가님(suddenly28@hanmail.net) 허락 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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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약 3교시 수업이 시작될 무렵 쯤이었을 것이다.
화려한 의상과 화려한 화장으로,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진
소녀가 A- 1반에 들어온 것은.
국어 수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교실 뒷문이 드르르륵 열리며 너무도 아름다운 소녀가 성큼성큼 뛰어왔다.
화려한 의상과 붉은빛 톤의 컬러로 화장한 소녀의 모습은 화사함의 극치였다.
“시연아아아~!!!!”
“헤헤, 내가 그렇게 좋은거야? 혜원?”
“이제 안 아픈거지? 난 너가 아픈지도 몰랐단 말이야.”
“괜찮아, 나. 이제 되게 많이 건강해졌어. 헤헤헷.”
시연이 혜원의 예쁘게 다듬어진 손톱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춤연습에, 노래연습에 고생을 많이 했는지 그나마 통통했던 젖살이 다 빠져버린 혜원이
시연의 몸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 거려주었다.
“이젠 아프지마. 내 인생의 빛이 되어준 소중한 친구야.”
모든걸 포기하고 싶을 만큼 너무 힘들었을 때.
상상외의 배신감에 할말을 잃고 절망에 빠져있었을 때.
암흑속에서 갈길을 잃었을 때.
그때 빛이 되준 건 너니까... 시연아.
그니까 앞으로는 아프지마.
종례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인 기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일 수련회 간다는 사실, 모두 알죠?”
시연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지며 여환쪽으로 훼까닥 목이 돌아갔다.
여환은 시연의 이런 반응을 미리 예상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소근소근 말해주었다.
“도쿄로 가기로 했던거 알지? 시험 끝나고 3주뒤에 간다고 했었잖아.”
“에에. 여환아, 너도 가는 거지?”
“글쎄...”
여환의 눈이 깊게 가라앉으며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시연은 그런 여환의 뺨을 손으로 감싸안았다.
여환의 볼이 살짝 발그레 해졌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비밀이 없는 거야.”
“그런건 어디서 주워들은 건데.”
“혜원이한테! 그니까 빨리 말해엣!! 말 안하면 주욱어~!!”
여환은 자신의 볼을 꽈악 감싼 시연의 손을 잡아 떼어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이니까 말 안해도 되겠다.”
“에... 그런게 어딨어!”
“여??는걸.”
시연은 그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방안에서의 키스..., 입술이 닿기 바로 전 그는 지금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악마같지만, 도도해보이는 미소.
“치이.”
시연은 입술을 빼꼼히 내밀고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기현을 쳐다보았다.
기현은 프린트한 예쁜 묶음 종이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컬러로 예쁘게 프린트된 묶음 종이에는 필요한 준비물, 장소, 그 곳의 특징 등
세부적인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이쁘다. 중학교 때는 흑백이었는데.”
시연은 묶음 종이의 앞 뒤를 돌려 보며 이쁘다고 연신 중얼댔다.
여환은 그런 시연의 모습에 피식 미소 지을 뿐이었다.
“여환아, 너도 가는 거지? 응? 너 안가면 나도 안 갈꺼다아.”
“휴우. 그럴까봐 신청은 했어.”
“와아아.”
시연은 활짝 웃으며 여환의 팔에 기대었다.
기뻐하는 시연을 여환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시연아, 오늘 시간 괜찮아?”
여환이 이끌은 곳은 무덤 세개가 나란히 있는, 어찌보면 음산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무덤이 있는 곳 앞에는 푸른 물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강가가 있었고,
길을 따라 쭈욱 가면 부모 잃은 아이들의 유일한 쉼터, 고아원도 있었다.
“무덤만 보면 으스스 했는데, 주위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시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붉그스름한 노을이 비추고, 투명하다 못해 푸르기까지 한 강가는 노을빛을 받아 더욱
찬란히 빛나며, 고아원 앞 마당에서는 꼬마 아이들이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한 평생을 이 곳에도 보내도 행복할까?”
“음, 나라면 행복할 것 같아. 귀여운 아이들도 있고, 푸른 강가도 있고, 너무 아름다운
걸?”
“그랬으면 좋겠다.”
여환이 그렇게 읊조리며 무덤 앞에 앉았다.
무덤을 쓰다듬으며 슬픈 눈으로, 슬픈 웃음으로 무덤과 마주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사랑하는 가족들...”
시연은 여환의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라니?
“무...슨 말이야, 여환아?”
“너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듯이 나도 있더라고. 하하하.”
여환의 눈에서 맑은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덤을 더욱 쓰다듬었다.
“가족끼리 여행을 가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우리 아버지는 민대원 국회의원이라고 알아? 그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는 주위의
더러운 비리따위에는 눈조차 안 돌리시는 분이었어. 그런 것을 철저히 배척하고
싶어하셨던 분이지. 그렇기에 우리 아버지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봐.
그렇잖아? 종이에 흰 물감을 칠해놔도 검정 물감 한번 칠하면 금새 흰색은 사라져버리지.
세상은 그런거야. 이 시대에선 깨끗함, 순백 이 따위것은 존재하지 않아.”
가시 팍팍 돋힌 여환의 말에 시연은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지어주던 여환 같지가 않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의 첫인상처럼 굉장히 차갑고 날카로웠다.
“단지 추억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아름다운 그 날을 그들은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의 날로 만들어버렸어. 조작된 사고였음에도 불구 진실은 철저히 묻혀버렸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는 큰 아버지네에서 지내게 ?獰?. 나를 양아들로 삼아줬어.
그리고 내가 민대원 국회의원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묻혀버렸고, 나는 그의 친아들이 되어
살아왔어. 그런데 더 웃긴건, 큰 아버지는 나를 너무 살갑게 대하지만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진 않는다는거야. 단지 내 앞에 있는 거액의 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지.
난 그때 너무 어렸어. 그래서 큰 아버지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 알았고,
그 유산을 모두 큰 아버지것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두었지. 그때 형이 살아있었더라면...”
여환은 떨리는 손으로 무덤을 더욱 세게 쓰다듬다가 끌어안아버렸다.
여환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세고에는 나처럼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
돈도 많고, 머리도 좋지만 그만큼 순수함은 없지. 세상의 더러움을 이미 알아버린
고등학생들... 후훗, 악순환의 연속이야. 세상의 더러움을 알고 있는 이들이
깨끗하게 사려면 또 얼마나 깨끗히 살수 있겠나? 자신이 살아남기위해 똑같이 그들처럼
더럽게 살아갈테지. 그럼 그들의 자식들은 또 다시 그렇게 살테고... 하하하.
망할 수 밖에 없는 더러운 세상이지.”
시연은 절규하듯 외치는 여환을 보며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자신은 그런 상황에서 살지 않았다.
항상 행복했고, 따스한 부모님 밑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지내왔다.
자신이 복받았다고 생각했던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시연은 자신의 따스한 품으로 여환의 차갑고 상처받은 마음을 꽈악 끌어안았다.
더이상 아프지 말아요.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사랑아...
“이 세상의 더러움. 까짓거 깨끗하게 빨면 되잖아.”
“...뭐?”
“여환아, 더러운건 까짓거 빨면 되.
더러운 걸레를 깨끗히 만드는 방법은 깨끗히 세탁하는 거야.
더러운 세상? 깨끗히 빨면 깨끗해 질걸?”
“시연..”
“아파하지마.”
시연의 흑색눈동자가 생기를 되찾았다.
반짝이는 두 눈에서는 마치 환한 빛이 뿜어나오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32.
여환과 헤어지고, 집에 도착한 시연.
시연은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계시는 성환에게 달려가 포옥 안겼다.
성환은 기분 좋은 듯 웃어보이며 시연을 꽈악 안아주었다.
이 냄새가 미치도록 그리웠었다.
아빠에게서 나는 부드러운 냄새.
엄마에게서 나는 달콤한 냄새.
오빠에게서 나는 아기 냄새.
“아빠.”
“그래.”
“인간으로써 살아간다는게 쉽지만은 않은것 같아요. 하지만요, 나...
정말 열심히 살거예요. 친구들한테도 용기와 힘을 줄 꺼고, 언제나 당당하고 강할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우리 시연이가 누구 딸인데.”
“아빠, 아빠 회사는 오빠가 물려받겠죠?”
성환은 시연을 잠시 떼어내며 시선을 마주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성환은 짐짓 냉정한 표정으로 시연에게 말했다.
“네가 물려받고 싶은 게야?”
성환의 말에 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빠의 회사를 탐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럼?”
“단지 내 세상을 한번 창조해보고 싶을 뿐야.”
“네 세상?”
“네. 내 세상, 나만의 곳. 푸히힛.”
성환은 의아한 눈빛으로 시연을 쳐다보았지만, 시연은 이미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시연이의 세상. 시연이만의 곳.
원하고 있다니,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수술 성공 이후, 뇌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시연은 욕심이 생기고 있는것 같았다.
그럴수 밖에 없는것이, 뛰어난 사업가 성환과 뛰어난 디자이너 혜란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는데, 그런 욕심조차 없다면 그들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시연...”
하지만 딸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여나 순수하고 깨끗하게 자라온 시연이, 어른들의 세계.
즉 더러운 비리들로 가득찬 세계를 배우고, 발을 들여놓게 된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밝게 웃을 수 있을까?
그 더러움에 질식하여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되는 성환이었다.
“비행기 공포증...”
침대에 누운 시연은 혼란스러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최근들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전혀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 좋지 않은 것들을.
돈을 위해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돈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님을 두고,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받고 누워 계시는 엄마를 두고.. .
자신에겐 너무도 소중한 친구들이 이런 아픔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시연은 가슴이 아프고,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도와주고 싶었다. 끝까지 도와주고 싶었다.
다행히 혜란이 혜원을 높이 평가하는 덕에 혜원을 도와줄 수 있었지만,
여환과 연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자신의 모든 힘을 보태서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힘이란 것은 아주 미약했다.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 힘을 가지고 싶다.
“하아.”
여환이 떠올랐다.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아파하는
여환이 떠올랐다. 큰 눈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너무도 힘들어하는 여환이 떠올랐다.
자신에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 여환이 그렇게 아파하고 있었다.
단지 놀러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가족들끼리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아무런 걱정도 없이, 전혀 앞에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지 못 한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인한 공포증.
그것도 모른 체 자신은 같이 가자고 조르기만 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힘든데도, 아픈데도, 기억하기 싫은 데도 자신때문에...
“하아. 세상이 이렇게 힘든건줄 정말 몰랐어.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냥 편안히
살아가는 줄 알았다고, 정말...”
시연은 눈을 꼬옥 감아버렸다.
이 세상과의 교류를 차단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힘든 밤이 지났다.
“다녀오겠습니다아!!”
시연은 운동화를 꾸겨신으며 마구 뛰어나갔다.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한 터라,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시연아, 조심히 다녀오렴.”
성환이 신문을 접으며 시연에게 소리쳤다.
혜란은 그런 성환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대었다.
성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혜란에게 물었다.
“또 잠이 오는가 보오? 잠꾸러기 아줌마.”
“흥, 왠만하면 아가씨로 해줘요. 예전에는 아가씨로 해주더니.. 흐윽, 저 울거예요.”
예전의 푼수끼가 다시 되살아나는 혜란이었다.
“세입!”
공황에는 아직 많은 학생들이 남아있었다.
윤세고의 자랑스러운 교복을 예쁘게 착용한 윤세고 학생들이었다.
시연은 흘러내린 가방을 제대로 고쳐메며 A -1 반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환의 옆에 섰다.
여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약간 파랗게 질렸다고나 할까?
시연은 여환의 손을 꽈악 잡아주었다.
느껴졌다. 여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시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환의 표정에는 미소는 없었다.
그녀를 바라볼때마다 짓던 그 부드러운 미소는 여환의 얼굴에서 행적을 감춘지 오래였다.
“여환아.”
“으, 응.”
시연은 여환의 얼굴을 따스한 손길로 매만지며 말했다.
“이럴수록 더 강해져야 되는 거야.”
“그래...”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너도 더 강해져야 하고, 상대가 비열하면 너는 그 비열을
가볍게 꺾어줄 수 있을 정도로 더욱 강해지는 거야.”
시연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여환의 손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맞잡은 두 손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왼쪽 가슴팍에는 명찰이 곱게 달려있었다.
'김선우.'
33.
그녀는 빛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여자였다.
처음엔 단지 동경의 상대의 동생일 뿐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존재였다.
점점 그녀와 함께 생활을 하면서, 나는 경악을 할때도 있었고 행복했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바보'였다. 강성환의 딸이라고 치기엔 너무 멍청했다.
바보같이 헤헤 웃기만 하고, 덜렁거리기도 엄청 잘하는 데다가, 전교 꼴찌까지 당당히 했다.
하지만 강다연과 그 무언가가 닮아있었다.
닮은 그 무엇이 뭐라고 딱히 콕 찝어낼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느낌, 이미지 같은 거랄까? 사람 보는 눈이 어렸을 때 부터 뛰어났던 나였기에 그녀는
결코 더이상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그녀에게 부쩍 많은 시선을 주게 되었다.
그래, 아마도 그녀의 눈물을 본 뒤 부터일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내 마음을 심하게 동요시켰고, 처음으로 슬픔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징징 우는 모습이 짜증났기만 했었는데, 그녀의 울음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너무도 애달펐다.
감싸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동경의 대상인 강다연은 시연을 항상 주시했다.
시연을 어떤 바보같은 짓을 하던, 언제나 변함없는 부드러운 미소로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또한 민여환이라는 녀석 또한 시연의 옆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강다연, 민여환. 1,3학년의 거물급이 아닌가.
역시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다니는 힘이 있었다.
중간고사가 있은 뒤로 그녀는 윤세고 학생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것 같다는 의심을
받으며 재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시험에서 떨어졌다.
더이상 그녀를 학교에서 만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머릿속은 온통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강시연이 짤렸데.”
“하긴 점수를 너무 못 보긴 했잖아?”
재잘되며 대화를 나누는 여학생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긴 앞머리는 이제 시야까지 가려대었다. 피식 웃었다.
언제 앞머리가 이렇게 길었더라...
내가 너무 세상에 무심했던 걸까.
“그래서 남자애들이 그 난리였구나?”
“그러게. 하긴 걔가 좀 이뻤어? 인기 엄청 많았잖아.”
“주단비 걔도 이쁘지 않아?”
“걘 왠지 표독스럽게 생겨서 별로야.”
“강시연은?”
“걘 순~하게 생겼잖아. 왠지 모르게 말을 걸고 싶달까?”
그래. 강시연은 주단비와 다르다.
강시연은 순수함을 가진 빛을 가진 여자다.
주단비와는 달라.
그래. 강시연은 그런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왠지 모르게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그것도 S급 아님 A급의 사람들만.
재잘되는 저 여학생의 이름이 뭐였더라. 신하나였던가?
신하나. 나와 동갑이었지, 아마도.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지, 후후.
정말 대단하네요. 강시연이라는 여자는.
공부는 못 하더라도 그 능력만으로도 윤세고 학생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한데 말입니다.
“보고 싶다.”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잡념을 털어내고는 강다연을 주시했다.
검붉은 머리카락과 귀공자 같은 이미지의 동경의 대상.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이 세상을 뒤엎을 정도의 뛰어남과 권력을 가진 남자.
그에겐 뛰어난 능력도 있었고, 권력 또한 있었다.
그래서 부러웠다. 그래서 동경했다. 그래서 닮고 싶었다.
그를 뛰어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처음엔 노력만 하면 그를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는 닮기에도 어려운 상대였다. 그렇게 뛰어난 상대였다.
“하아.”
힘없는 하루가 또 다시 흘렀다.
온 몸에 힘도 없고,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목표는 너무 높고, 옆에 격려해 줄 사람도 없다.
혼자라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힘없이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데 남학생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정확히 그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온것은 뒷문이 드르륵 열린 뒤 부터였다.
나는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앞머리 때문에 시야가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뒷문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동공이 확대되는 것을 느꼈다.
예전보다 더욱 흰 얼굴에 그나마 있었던 살들이 쪼옥 빠져, 더욱 아름다워진 시연이었다.
그리고 내성적인지 자리에만 앉아서 책만 읽던..., 누구라더라. 김연희였던가?
그 둘은 아이들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으며 교실로 들어왔다.
“아름답다.”
나는 메마른 입술을 촉촉히 적시며 그녀를 계속 주시했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당신은.
사모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사랑까지 바라진 않습니다.
저는 혼자 바라보고, 혼자 사랑하는것에 익숙하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당신에게 이 마음을 전하는 것 조차 안될까요?
당신의 사랑에 방해가 될 까요?
당신이 바라지 않는 다면 바라만 보겠습니다.
그런데 민여환이라는 녀석이 부럽네요.
당신의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받을 수 있어서 부럽습니다.
외전 : 김선우가 말하다.
The end.
34.
곱디 고은 색상의 고급 교복을 착용한 윤세고 "A"반 학생들은 기현의 안내에 따라
차례차례 비행기에 올랐다. 시연은 오랜만에 비행기에 타는 지라 기쁨이 얼굴에
가득했다. 허나 자신 옆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앉아있는 그를 보니
가슴이 절로 아파왔다.
“난 너의 아픔을 잘 몰라.”
시연의 말에 여환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연의 깊고, 탈색된듯한 흑색 눈동자가 시선을 떼지 못 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딱히 형용할 순 없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
“뭘?”
여환이 나지막히 대꾸했다.
그의 대답에 시연이, 활짝 핀 꽃보다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에 한 공주님과 왕자님이 살았습니다.”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한 그녀의 말에 여환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여환이 무슨 말이냐며 입을 떼려던 찰라, 그녀의 입에서 또 다시 말이 흘러나왔다.
“왕자님에겐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
“공주님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왕자님의 상처를 치료해줄 자신이 없었거든요.”
“...시연.”
“그래서!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공주님은,
왕자님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순 없어도 따스하게 감싸주고 보듬어주고 품어줄 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환은 안 넘어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흑색 눈동자가 미칠듯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의 향이 더욱 가까이서 느껴졌다.
촉.
그녀의 눈동자가 100배는 확대되어 보인 것 같았다.
그녀의 향기가 숨막힐 듯 다가오더니 후각을 마비시켜버렸다.
온통 그녀의 향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눈에서는 그녀의 아름다운 흑색 눈동자만이 비춰질 뿐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붉은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석류보다 더욱 붉고, 초콜릿보다 더욱 달콤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에겐 그랬다.
그의 뇌는 순간 마비되어버렸다.
그날밤의 키스보다, 지금 그녀의 짧은 입맞춤이 더욱 달콤하고 설레었다.
“시, 시연.”
“나의 하나뿐인 사랑, 나의 하나뿐인 남자, 나의 하나뿐인 왕자님이시여.
이제 그 상처는 저의 손길에 맡기시고, 그만 저에게 기대시옵소서.”
그녀의 붉은 입술이 활곡선을 띄었다.
아름답다. 미치도록 아름답다. 힘껏 안아 내것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여환의 메마른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의 사랑, 시연.”
“왕자님은 상처를 이제 공주님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공주님은 있는 힘껏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었습니다.”
“...”
“왕자님의 상처는 하루가 다르게 빠른 회복력을 보이며 낫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평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시연이 씨익 웃으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여환이 입을 열었다.
“서로만을 간절히 원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그 둘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 사랑이 시작되었는지조차 서로는 모른다.
아니, 둘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사랑의 운명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둘의 모습은 아기천사들의 축복이라도 받은 냥 아름다웠지만,
한 사람의 질투 어린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해 한 여자.
다갈색 굵은 웨이브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웠다.
허나, 시연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시연을 순백의 장미에 비유한다면, 그녀는 붉은 장미에 비유해야 할것이다.
시연에게는 순수함과, 순백함, 천진난만함이 있다면
그녀에게는 섹시함, 도도함, 그리고 남자를 부리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었다.
“가, 감히.”
“단비야, 너가 중간에 낀거라고.”
“뭣?”
“시연과 여환은 원래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넌 그때 다연선배께 관심이 있었고.”
“그까짓 건 상관없어!!”
“하, 하지만...”
“내가 그를 좋아한 후부터는 그도 나를 좋아해야되! 그걸 방해하는 저 년이 잘 못
된거야. 지까짓게 이젠 다연선배를 넘어 여환까지!”
승은은 단비의 눈이 잔인함과 질투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언제까지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비행기에서 내린 연희는 계속 안절부절이었다.
시연이 연희의 팔을 잡으며 생긋 웃으며 연희에게 물음을 던졌다.
“연희야, 아까부터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무것도.”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연희는 아까부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꾸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일인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길 바랬다.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온 수련회에서 결단코 그런일이 생길리 없었다.
그녀는 자꾸 마음 어디서부턴가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잊으려 오버하며 웃고, 즐겼다.
그리고 문화탐방이 끝나고, 저녁을 먹은 뒤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시연과 연희는 다행히 붙었다. 아니, 정확히 1학년은 1학년끼리 한 방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더욱 세세하게 파고들자면, 숙소에는 시연과 연희의 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35.
연희와 시연은 대충 씻고 나서는 2층 침대에 누웠다. 기숙사는 넓은 편이었고
2층 침대 5개로 깔끔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연희와 시연은 5개의 침대 중 하나를 위아래로
차지하고는 바닥에 앉아 로션을 바르며 수다를 떨었다.
“시연아, 뭔가 수상하지 않아?”
“뭐가?”
“주단비 패거리 말야. 아직까지 안 들어온다는게 말이 되?”
“흠. 몰라, 몰라. 이런건 걔네가 알아서 해야지!!! 난 아임 슬리핑, 매우 졸리다고.”
시연은 로션을 대충 가방에 집어넣고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연희는 아랫층 침대에 그냥 누워버리는 시연을 보고는 시연의 배를 간지럼 피우며
일어나라고 외쳤다.
“아, 내가 아래할래~!!”
“싫어, 싫어. 나 벌써 잠들었어.”
“웃기신다, 진짜. 빨리 안 비켜? 안 비킨다 이거지, 강시연. 죽을래에~~!!”
그렇게 한창을 장난치며 떠들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주단비 패거리겠거니 해서 시선도 안 주고, 계속 주거니 받거니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묵직한 남자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두 분 이리 좀 나오시죠.”
빨간 모자.
가이드 겸 조교로 따라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시연과 연희를 노려보고 있었고,
뒤에선 많은 숫자의 주단비 패거리가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시연과 연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이시죠?”
연희가 대충 옷을 매만지고는, 그들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상대가 윤세고 학생들인지라, 조교도 매섭게 몰아치기만 할 수는 없었기에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며 말했다.
“여자 A- 1반 학생들이 사용하는 301호에서 지갑 도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
연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연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시연을 한번 뒤돌아보고는, 다시 조교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범인을 저희로 지목하셨다는 겁니까?”
“이 나머지 학생들은 다 같이 벌을 받느라고 방안에 들어오지조차 못 했죠.
그럼 용의자로 지목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은 당신과 당신 뿐입니다.”
“하, 어이가 없군요. 누구의 지갑이 사라졌는데요?”
“내것.”
연희는 매서운 눈빛으로 ‘내것.’이라고 외친 상대를 노려보았다.
고고하기 짝이 없는 억양으로 당당하게 내것이라고 외친 이는, 분명 주단비였다.
주단비는 살짝 입꼬리를 말아올리고는 마치 윗사람이 하수대하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희는 앞이 깜깜했다.
정말 용의자로 지목 될 만한 사람은 시연과 자신밖에 없었다.
아니라고 외쳐줄 사람도 없었다.
완전히 적수에게 둘러싸인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마냥 가만히 있으면 분명 끌려가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일단 지갑 도난 사건이라는 것은 도둑질을 했다는 거니까.
그리고 지갑을 내노라고 하겠지. 그럼 그땐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앞길이 막막해 뒤를 돌아보니 시연이 살짝 일어나고 있었다.
연희는 시연의 눈동자가 오늘처럼 반짝였던 날은 없을 것 같았다.
시연의 흑색 맑은 눈동자가 한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석류빛 입술이 점점 말아올라가고 있었다.
연희로서는 이런 시연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제가 용의자라는 증거있나요?”
“그런것은 아니지만 앞뒤상황을...”
“증거도 없는데, 앞뒤상황을 따져보니 너희들밖에 죄지을 사람이 없구나.
너희가 좀 끌려가줘야겠다. 이건가요? 어이가 없군요.”
“무, 뭐?”
교관은 쪼그마한 계집애가 기어오르는 것이 참기 힘들만큼 화가 났다.
희고 고운 얼굴에 크고 살짝 처진 눈이 너무 순하고 천진난만한 이미지였다.
처음 얼굴을 보았을 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직 17살밖에 안된것이 저리 아름다우면, 점점 성장해 아름다움의 절정에 이르렀을 땐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아. 하지만 이건 이거고, 자신의 본부는 교관이었다.
아무리 학생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냥 물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짐짓 냉랭한 목소리로 벌하려 하는데, 꼬박꼬박 말대꾸 하며 기어오른다.
그렇다고 또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니 무작정 혼을 낼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저 학생의 지갑이 사라졌다구요? 어떻게 생겼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아, 그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면서 무작정 사라졌으니 우리 탓이다? 어이가 없군요.
그럼 지갑에 돈은 얼마나 들어있었는데요? 지갑을 어느 곳에 넣어두었었는데요?
정확히 몇시에서 몇시사이에 도난당한 건데요?”
“음... 그, 그건.”
“훗. 저 학생들이 말하길 자신은 가방을 놓고 나갔다가 벌을 받느라 기숙사에 한번도
들어오지 못 했다고 말했습니다. 틀립니까, 교관님?”
시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주위에 꽃이 피어오르는 것마냥 향긋한 웃음이었다.
연희는 시연의 미소가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시연의 미소는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
화를 억제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 같았다.
“그렇담 저들은 방에 들어온 적 조차 없으니 결단코 도난 할래야 할 수가 없군요?”
“그렇지!”
“그렇담 저 도난당한 여학생은 자기 지갑이 사라졌는지, 가방에 들어있는지 어찌압니까?”
“아!”
교관은 아무생각없이 시연의 말을 듣다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시연을 쳐다보았다.
그렇다! 한번도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지갑이 어떻게 사라진줄 알지?
겉모양새는 그럴싸하더니 자세히 생각해보니 완전히 모순된 말을 짓껄이고 있었던 것이다.
“네 이놈!”
교관은 얼굴이 욹그락붉그락 해져서는 주단비 패거리를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주단비는 입술을 꾸욱 깨물며 시연을 노려보았다.
마지막 결정타.
화가 난 상태의 교관을 시연이 낭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었다.
“교관님?”
“음?”
“이래도 제가 용의자 같으시다면 같이 따라오신 지도부 선생님께 이렇게 여쭤보세요.
소지품 검사시 적어놨던 명렬표를 한번 볼 수 있겠냐구요. 과연 지갑이 있었을까요?”
주단비 패거리는 그대로 다시 끌려나갔다.
나가면서 시연을 한번 흘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와! 시연아, 짱이다.”
“별로..., 저들이 너무 멍청했던 거지.”
시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그대로 아랫층 침대에 몸을 맡기고 쿨쿨 먼저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어어어!! 아랫층은 내꺼라니깐, 강시연 미워~!!!!!”
그렇게 한밤의 지갑도난사건은 막을 내렸다.
36.
“수련회 나름대로 재밌었어, 그렇지?”
“응.”
“여환아, 오늘따라 힘이 없어보여.”
“아, 아냐. 그냥 잠을 좀 덜 자서...”
수련회를 다녀오고 바로 다음 날이었다.
시연은 집에서 이것저것 수련회가서 못 먹은 음식들을 마구 밀어넣으며 배를 채우고,
혜원과 밤늦게까지 비디오를 보며 깔깔 대며 웃으며 즐겁게 보냈는데
여환은 그게 아닌가보다.
오히려 수련회때가 지금 보다 얼굴이 더 환했다.
지금은 못 자고 못 먹고, 근심 걱정으로 똘똘 뭉친애 같아보였다.
시연은 여환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말 괜찮은거야?”
걱정과 애정이 듬뿍 담긴 시연의 말에 여환이 미세하게나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은 여환이 아프거나 힘들어할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것 같았다.
“누구?”
학교가 끝이 날 무렵, 집에 가고 있던 미라는 (1편 참고) 낯선 여자가 자신을 가로막자
깜짝 놀래었다. 다갈색 웨이브진 머리에 도도하게 생긴 여자와,
검은색 올빽한 머리에 깔끔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 둘이었다.
“길게 할 말이 있어. 잠시 대화 좀 나눌까?”
셋은 가까운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미라는 오렌지 쥬스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할말이 뭔데?”
“나를 좀 도와줘.”
미라는 상대편 여자의 말에 깜짝 놀래었다.
처음 보는데 도와달라니? 더구나 저렇게 당당하고 도도한 자세로.
마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는 것 같았다.
오늘 처음 봤지만 사람을 다루는데 굉장히 능숙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를 아시나요?”
*
주단비는 수련회때의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강시연같은 꼴통쯤은 이 정도로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는 성급한 판단 아래
일을 대충 꾸며낸대도 잘못이 있었지만 강시연이 이렇게 잘 빠져나올 줄은 몰랐다.
더구나 명백한 상황 판단까지 해내 자신을 엿먹이다니!
처음 주단비는 일을 꾸밀때 강시연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희가 자꾸 마음에 걸리었다.
김연희.
못사는 달동네 계집애지만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상대는 아니었다.
김연희가 모든 일을 간단하게 풀어낼까봐 조마조마 하고 있는데,
입을 떡 벌리고는 한 마디도 못 하자 기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런데 강시연!
그 눈꼴시린 계집애가 일을 풀어내버리다니!
그것도 생글생글 미소를 잘도 지으며.
“엿 먹여야되! 똑같이!!”
그렇게 승은과 시연의 과거를 조사하던 중,
시연이 미라라는 여자애와 친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생긴건 별 볼일 없지만 똑똑한 모범생에다가, 시연을 많이 챙겨주었다는 사실을 확보하고는
씨익 미소지었다.
이 세상은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아무리 강하고 질긴 우정이라 한들 돈 조금 먹여주면 알아서 자기쪽으로 굴러오게 되있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돈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리고 그 미라라는 여자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다.
돈은 얼마든지 있다. 이제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저보고 같이 강시연을 무너뜨리자는 겁니까?”
“친한 사이라는 건 충분히 알아. 하지만 그 계집애, 너가 봐도 눈꼴 시리잖아?
가진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말이야.”
가진게 없다니.
시연의 부모님은 엄청난 사업가에, 패션 디자이너였다.
시연의 가정사를 다 알만큼 시연과 친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놀러간 적도 있었기에
대충은 알고 있었다.
넓디 넓은 집과, 많은 가정부들.
엄청난 사업가, 패션 디자이너이지만 항상 다정한 부모님.
그리고 똑똑하고 잘생긴 오빠.
그 정도가 가진게 없다니.
그럼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저 여자는 더욱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아,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구나.
“도와주지 않겠나?”
“하지만..”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원하는 거... 없어요.”
단비의 눈이 휭둥그레졌다.
없다고?
원하는게?
“난 그냥 무너뜨리고 싶을 뿐이예요.
나의 하나뿐인 사랑을 빼앗아버린 그녀가 미치도록 싫을 뿐이죠.
단지 무너뜨릴 힘이 없었을 뿐이예요.
천상의 美를 가지고 있는 그녀인지라, 친한 사이로 남는 것이 더욱 좋을 것 같아서...”
“하! 잘 되었군. 뒷처리는 내가 다 알아서 해주지. 크게 한 건 해봐.
강시연 그 계집애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게...!!”
*
시연은 여환과 헤어지고 힘찬 발걸음으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집 근처에 어떤 여자가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분명...!!
“미라야?!!”
“아, 시연아.”
미라가 그 어느때보다 농도짙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시연에게 다가왔다.
시연은 오랜만에 보는 미라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언제나 언니같은 다정한 친구였다.
고등학교 올라와서 한번도 보지 못 해 아쉬웠는데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잘 지냈어? 응? 응? 응?”
시연은 미라의 팔을 잡고 빙빙 돌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절친한 친구를 보니 기쁠 수 밖에 없었다.
“응. 그럼. 시연이 너도 잘 지냈지?”
“당연하지~~”
“좋은 고등학교 가더니 교복도 세련되고 예쁘네?”
“헤헤, 미라는 뭘 입어도 이뻐.”
“고마워. 시연아, 나 오랜만에 너희 집 가도 되?”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며 시연이 먼저 집으로 냉큼 들어갔다.
미라의 웃음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철저하게 무너뜨려라.”
37.
“다녀왔습니다아.”
“아가씨, 다녀오셨어요.”
“아빠는요?”
“사모님과 쇼핑에 가셨습니다.”
“아아~”
시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정부에게 고개를 끄떡 하고는 미라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가정부가 시연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쥬스 올려다 드릴까요?”
“네에~!!”
가정부는 시연의 밝은 목소리에 방긋 웃었다.
가정부.
솔직히 창피하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아이를 갖고, 실력없고 능력없는 남편과 살게 ?榮?.
그래서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아이의 생계를 유지시킬 수 없었다.
결국 택한 것이 가정부라는 직업이었다.
공부도 별로 못 하고, 가진것도 없는 자신을 많은 돈을 주며 일을 시켜줄 사람은 없었다.
가정부를 하려고 해도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 지 몰랐던 그녀는 남감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 사모님, 즉 시연의 어머니를 만났다.
힘없이 가정부를 하겠다는 프린트된 몇 장의 종이, 돈이 많이 들어 별로 얼마 되지도 않은
양의 종이를 골목길에 붙이며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움과 왠지 모를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15년전 시연의 어머니는 더욱 아름다웠다.
곱디 고운 얼굴과 선명한 이목구비, 그리고 몸 전체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기품.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우리집 가정부가 되는 건 어때요?”
아무 생각없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힘들었다.
평소 살던 집과는 몇 십배는 될 정도로 크고 거대했고,
이것 저것 조심히 다뤄야할 물건들이 넘치고 넘쳤다.
실수로 하나만 깨뜨려도 바로 짤리고 엄청난 양의 빚을 져야 할 것이다.
“어려울 땐 상담을 요청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않나요?”
사모님은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내면까지 아름다운 여자였다.
사모님은 자식을 위해 다정함을 숨겼다.
자식에게 너무 다정하면, 아이들이 삐뚤어나갈 수도 있었다.
보통 집이 잘 살다보면 아이들이 제멋대로 지가 잘난줄 알아 삐뚤어 나가는 아이들이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쓴 웃음을 머금고 그녀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런면에서 역시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역시 대한민국 패션계의 자존심이라는 혜란 다웠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선택을.
시연 아가씨와 다연 도련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둘이 세상을 얼마나 진동시킬 지를.
대한민국을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시연아,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미라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연에게 말했다.
시연은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항상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웠던 미라였기에
그러려니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혼자서 중학교 때 앨범을 뒤적거리며 깔깔 웃었다.
미라는 조심스레 1층으로 내려와서는 시연의 아버지, 성환이 사용하는 서재로 들어갔다.
시연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환의 회사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
역시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성환의 서재였다.
미라는 손을 빨리 놀려 성환의 자료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중요하고 더 치명적인 자료가 필요했다.
성환의 회사를 한 방에 무너뜨릴!
미라의 이마에 작은 땀들이 송글송글 맺혔다.
미라가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해도 회사일까지 잘 알순 없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중요해보이는 것을 찾아내야 했기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1초가 1시간 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이렇게 심장이 뛰고 맥박이 뛴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숨이 다 턱턱 막힐 정도로 긴장된 상태였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젠장.”
그녀의 입에서 작은 욕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완벽히 서류 찾기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방문 사이로 자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없었다.
“어머머...”
청소하기 위해 물수건을 들고, 성환의 서재에 들어온 가정부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시연이 데려온, 자기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미라가 성환의 서재를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정부는 거친 숨을 가까스로 조용히 내쉬며 2층으로 살금살금 올라갔다.
그리고는 깔깔대며 앨범을 보고 있는 시연을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시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가정부를 쳐다보다가 서재안을 보라는 듯 제스쳐를 취하는
가정부때문에 살짝 열린 틈새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과,
뒷통수를 망치로 세게 가격당한 듯한 정신적 충격을 얻었다.
이런 걸 보고 일종의 배신감이라고 하겠지.
“지금...미라가 무얼 하는 거죠?”
“일명 스파이 짓이라고도 하겠죠.”
가정부는 공부는 못 했지만, 15년동안 그들을 보필하면서 어느정도의 눈치와
상황파악에 능해졌다.
그렇기에 미라가 지금 장난으로 아무 생각없이 뒤지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라.”
시연은 눈에 고이는 눈물을 쓰윽 닦아내고는 거칠게 방문을 열어제꼈다.
미라가 휘둥그레 진 눈으로 시연을 쳐다보았다.
미라의 눈에 시연의 얼굴이 비춰졌다.
시연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화나 보이지도, 실망한 것 같지도 않았다.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너무 냉정해 졌다는 것이다.
싸늘한 표정에 입꼬리가 살짝 말려올라갔다.
그래, 이 표정.
연희라면 알 것이다.
시연이 화났을때 나타나는 저 표정.
무표정에 입꼬리만 살짝 말려올라가는 저 싸늘하기 그지없는 표정.
“나는 한번 화나면 돌아버려.”
“..시, 시연..”
“나는 한번 배신한 친구는 친구로 안봐.”
“....그, 그게..”
쫙.
거칠은 마찰음과 함께 미라의 얼굴이 돌아갔다.
미라는 한 손으로 맞은 뺨을 잡고는 눈물을 뚝둑 흘리며 시연을 쳐다보았다.
“정말 실망했다.”
시연이 그렇게 서재를 나갔다.
미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재에 주저앉았다.
시연의 눈에 마지막으로 스친 실망감과 배신감이라는 감정에
왠지모르게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38.
시연은 방안으로 뛰어들어와, 숨돌릴 틈도 없이 문을 걸어 잠그고는 방문에 기대어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시연의 순수함과 선함이 가득 담긴 커다란 눈에 맑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눈이 점점 충혈되 붉어지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닐거야. 내 친구 미라가 그럴리 없잖아, 그럴리 없어... 그래,
단순히 가정부 아주머니께서 오해한 것일 뿐야.
그래, 그럴거야. 그래, 그런걸꺼야. 분명이 나한테 맞은 뺨을 부여잡고 내 방문을 거칠게
두들기며 메가펀치를 하기위해 난리칠거야. 그래, 미라는 분명히...
흐흐흑.. .분명히 그럴...흐흑...거야....그럴거라구...흐흐흑...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데...흐흐흐흑...”
시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라보는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할만큼
안타까워보였다. 말은 아니라고, 아닐거라고 중얼거리고 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벌써 하나하나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미라는 자신을 배신하고,
성환의 자료를 빼돌릴려고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미라를 반갑게 맞이했다.
미라는 자신에게 친구이자, 언니였다.
실수투성이에 장난꾸러기인 자기를 항상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미라.
미라였기에 믿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기뻤다.
“미라야, 얼른 올라와. 그래서 방문을 마구 두들겨.
날 얼마든지 때려도 되니까, 그래도 되니까 어서 나를 찾아오라구...
아니라구 변명하라구, 왜 때렸냐고 원망하라고. 왜 의심했냐구 소리치라구...
제바알!!!!!!!”
시연의 절규는 1층까지 들릴 정도였다.
시연에게 맞아 붉어진 뺨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주저앉아 있는 한 소녀를,
가정부는 가엾다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순간 가슴이 찢어질듯, 심장이 갈기갈기 분해되듯 너무 아팠다.
시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너무 미웠다.
내겐 없는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시연이.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이들의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는 시연이 너무 부러웠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듯 한껏 활짝 펴있는 시연이 너무 얄미웠다.
“아니었나?..”
미라는 혼란스러운 심정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책상을 짚고 겨우겨우 일어나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자신 앞에 서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정부였다.
“누굴 그 따위 눈으로 보는거죠?”
힘이 다 빠진, 맥아리없는 목소리였지만 왠지 날카로움이 묻어있었다.
가정부는 싱긋 웃으면서, 마치 자신의 손녀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듯한
억양으로 말을 시작했다.
“지우개가 왜 존재하는 지 알아요?”
“하, 제가 어린애입니까? 비켜요, 나가고 싶으니까.”
어디서든 이 더러운 느낌을 정화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려면 빨리 이 집을 벗어나야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쓸데없는 헛소리나 하는 가정부를 지나쳐가려고 했다.
그러나 가정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나갔다.
“지우개는 지우라고 있는 거죠.”
“하.”
“사람들은 지우개를 별것아닌 존재로 생각하죠, 별 볼일 없는 존재.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죠. 지우개는 지워주는 거예요. 실수를, 그리고 연필이
남긴 상처를...”
“인격을 부여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데 전 별로 그 따위 짓거리를 하고 싶지 않거든요? 지우개는 지우개일 뿐이죠.
도대체 왜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며, 상처니 뭐니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비켜요,
전 당신처럼 한가하지 않아요!”
미라가 가정부를 휙 밀치고 서재를 나가버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문으로 다가섰다.
미라의 손이 문고리에 닿아 열려는 순간 가정부의 다정하고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처는 가슴에 오래 남겨져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진해지는 겁니다.”
“하-.”
미라는 콧웃음을 치며 나가려고 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들 하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상처를 방치해두면 그 위에 딱정이가 생기고,
그 뒤엔 흉터로 남아버리죠.
결코 한 번도 생기지 않았다는 듯 사라질 순 없어요.
지우개가 필요할 것 같군요, 당신에겐.”
“무..뭐요?”
“어서 시연아가씨 가슴에 남긴 상처를 지워주세요.
기회는 이제 한 번뿐입니다, 미라아가씨.”
미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미라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가정부는 그런 미라를 엄마만큼이나 따스한 미소로 맞이했다.
*
“어떻게 ?獰??”
“잘 ?楹た?, 미라씨?”
단비와 승은이 미라가 카페안으로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미라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늘씬한 다리를 꼬으며 쥬스를 한모금 쪼옥 들이켰다.
“어떻게 ?楹캑歐??”
“당연히 잘 ?瑩?.”
“어디 봐봐, 그 계집애를 무너뜨릴 방법이 뭔데? 응?”
미라가 한 서류를 당당하게 단비와 승은에게 내밀었다.
승은이 의아한 눈빛으로 미라를 쳐다보며 그 서류를 받아들였다.
“시연이의 아버지는 강성환, 어머니는 정혜란이죠.
정말 뛰어난 사업가에, 뛰어난 패션디자이너죠.”
그 말에 단비와 승은이 눈이 동그래졌다.
달동네 계집애였는줄 알았더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강성환씨의 서류입니다.
분명히 중요한 걸 테죠, 이거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승은과 단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단비는 흰 봉투를 미라에게 쭈욱 내밀더니,
승은과 카페를 나가버렸다.
미라는 봉투 안을 들여다 보고는 피식 웃었다.
만원짜리 지폐가 엄청난 장수로 들어있었다.
39.
미라는 싱긋 웃으며 만원짜리 지폐가 가득 든 봉투를,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때 미라에게 한 소녀가 다가왔다.
“아깝지 않아?”
“별로.”
미라는 자신의 옆에 앉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정을 배신할 뻔 했던 값치고는 너무 싸다.
“이게 바로 강시연을 무너뜨릴수 있는 최후의 한 수라 이거지?”
“그렇다잖아. 근데 단비야, 정말 이래도 될까?”
“흥, 그까짓 년만 밟을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이건 시연만 무너뜨리는게 아니라, 아예 그 집안 자체를 무너뜨리는 거야!”
“상관없어. 아빠도 좋아하실껄? 강시연의 아버지가 강성환,
아버지는 그를 제일 경계하시니까 말이야.”
주단비가 싱긋 웃어보였다.
언제나 자신에게만큼은 한없이 다정하고 해달라는 것은 모든지 다 들어주었던 아버지.
하지만 회사 사람들만 오면, 얼굴이 딱딱히 굳어서는 항상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 원인이 거의 강성환, 그 때문이라고!
최고의 사업가지만, 주변 사업가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
“같이 무너뜨려 버리는 거야.”
잔인한 계획을 세우며 집으로 향하고 있는 승은과 단비 앞에,
어느 남학생이 스쳐지나갔다.
짙은 검은색의 머리에, 약간은 섹시함과 반항아 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환!”
단비가 꾸밈없는 듯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여환을 불렀다.
정말 이때만큼은 순수하고 맑아보였다.
여환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 안녕.”
이름도 정확히 기억이 날듯 말듯 하지만, 어쨌든 학교 친구라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단비는 부끄럽다는 듯 미소를 작게 지으며 여환에게 사뿐 사뿐, 나비가 날아가듯 다가갔다.
“아?”
“이렇게 밖에서 만난것도 인연인데..., 커피 한잔 같이 마시지 않을래?
내가 요즘 이것저것 고민할 게 너무 많아서...”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단비가 고개를 살짝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그렇기에 무작정 거절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아..., 으응.”
“와, 고마워.”
단비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은 채,
기쁘다는 듯 작은 환호성을 지으며 상큼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승은은 그런 단비의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지만,
단비에게 대들어봤자 좋을 거 없다는 생각에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분명 같이 가도 욕먹을 것이다.
“아, 쟤는 왜?”
여환이 그냥 가버리는 승은의 뒷모습을 보고 외치는데,
단비가 그런 여환의 팔을 확 낚아채 살짝 두 손으로 그의 팔을 감싸쥐고는,
근처 카페로 이끌었다.
“오렌지쥬스 두 잔요.”
여환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한없이 청순하고 다소곳한 여학생에게 호감을 얻었다.
물론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아니었다.
성품도 맑고 깨끗해 보이니, 시연과 친하게 지내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여??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오렌지 쥬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렇게 말하고는 가버리는 종업원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단비였다.
정말 단비의 모습은 아까와는 상상도 못할만큼 정반대였다.
“고민이 뭔데?”
여환이 단비를 쭈욱 응시하며 물어왔다.
단비는 작은 한숨을 살포시 내쉬고는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괴롭히는 여학생이 하나 있어.”
“널 괴롭힌다고?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이유없이 괴롭혀. 내가 많이 싫나봐.
사실 내가 그렇게 애들하고 잘 친해질 수 있는 타입이 아니잖아?”
단비가 무릎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손톱을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했다.
여환은 그런 단비의 모습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내가 보기엔 넌 많이 착해보이는데, 왜 너를 괴롭히는 건지 몰라?”
“응, 모르겠어. 난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을 뿐인데...”
“그니까 넌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데, 그 여학생은 무시하고 널 괴롭힌다?”
“으응...”
“나쁜 애네. 어느 학교 학생인데?”
“우...리 학교.”
“그래? 이름이 뭔데, 그냥 말해봐.”
그의 물음에 단비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여환이 그런 단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려 토닥여주고는 오렌지쥬스를
한 모금 쪼옥 마셨다.
“시연과 친하게 지내면 다 해결될거야.
그 녀석은 엉뚱하고 어이없고, 가끔 너무 바보같긴 해도
이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법을 가장 잘 아는 녀석이거든.”
여환이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단비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준뒤
카페를 벗어났다.
남겨진 단비가 오렌지쥬스 컵을 세게 꽈악 쥐며 중얼거렸다.
“또 강시연이군.”
집에 도착한 단비는, 승은이 가져간 서류를 건내받아 아버지가 퇴근하시기만을 기다렸다.
와인을 사들고 집에 오신 아버지에게, 단비는 포옥 안겼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오늘따라 왜 이리 반겨주십니까?”
“아버지! 저기 아버지께 드릴 서류가 하나 있어요.”
“뭔데?”
단비는 아버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그 서류봉투를 튿어내어 안을 드려다 보며 말했다.
“이게 뭔데?”
“강시연..., 아니아니 강성환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료!”
단비의 말에 단비의 아버지이 동그래졌다.
말도 안되. 라는 생각만이 가득 돌았다.
“저, 정말이냐?”
“네! 제가 아는 애가 직접 강성환네 집에 들어가서 빼내온 자료예요.”
“하!”
아버지가 떨리는 손놀림으로 봉투 안에의 서류들을 꺼내어 읽어보았다.
여름빛축제.
.
.
.
.
“그래! 강성환, 그 녀석이 여름맞이 축제를 한다했어!
하하하. 이것만 있으면 내가 먼저 그 축제를 터트릴 수 있겠구나.
그 녀석들은 이 자료가 없어 급히 다시 만들테고, 나는 여유롭게 이 자료로 축제를..!!
하하하하하하!!!!”
40.
“아, 정말 왜 이러세요.”
갓 익은 싱싱한 레몬처럼 노오란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불쾌한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굉장히 핸섬하게 생긴 남자가 그 소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소녀에게는 능글맞고 추잡해 보였다.
“아, 혜원씨 정말 왜 이래? 커피 한 잔 마시자는데.
선배로써 이런저런 충고도 해줄겸 말이야.”
“전 싫다니까요?”
“정말 혜원씨 이상하네. 선배 말이 말같지가 않아?
내가 뭐 더러운 생각을 품고 있는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젠 선배라는 계급까지 들먹이며 대놓고 찝쩍거린다.
노오란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에, 곱고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한껏 머금은 그녀는, 시연의 친구 정혜원이었다.
“어쨌든 매니저 오빠도 사적인 만남은 금지하라고 했어요.
조금있으면 또 방송들어가야 해요, 좀 비켜주시죠?”
혜원이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손을 뻗어 슬쩍 혜원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알거 다 알 사람들끼리 왜 이래?”
“이거 치워요, 제가 뭘 안다고 그러시는 거죠?”
혜원이 거칠게 그 남자의 손을 떨쳐내며,
그를 쏘아보며 외쳤다.
“연예계에 진출한지 얼마 안되서 모르나보군?
연예계는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란다, 아가야.”
남자가 혜원의 윤기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쓰윽 넘겨주며 말했다.
눈동자는 욕망으로 가득차 풀려있었고, 입에서는 낮은 신음소리와 말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혜원은 이런 끈적끈적한 시선을 바로 코 앞에서
받아본 적은 없던 터라 순간 겁을 먹고 말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그는 혜원의 약해진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혜원의 보드라운 뺨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닿을듯 말듯하게 쓸어내렸다.
혜원은 숨이 턱턱 막힘과 불쾌함에 쓰러질 것 같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발요...”
그의 이름은 정현성.
잘생기고 매너있는 태도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많은 소녀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고 있는, 지금 한창 잘나가고 있는 인기 가수였다.
외모면 외모, 체격이면 체격, 실력이면 실력.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는 그였다.
그는 원래 색욕에 찌든 사람이었다.
잘생기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돈이 없어 여자들에게 많이 차였던 그는
일단 돈부터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탤런트로 캐스팅을 받았으나,
그가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른다는 것을 알아챈 기획사에서는 그를 가수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결과 기획사의 예상대로 그는 한순간에 톱스타가 되어버렸다.
상대적으로 탤런트들에 비해 외모가 떨어졌던 가요계에 등장한,
잘생기고 실력까지 빵빵한 정현성은 인기를 얻을 수 밖에 없었다.
뚜벅뚜벅.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혜원에게 다가갔다.
이미 거미줄에 걸린 먹이였다.
조급해하고 급히 일을 처리할 필요 없었다.
“제, 제발요...”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서,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바르르 떨고 있는 소녀를 주시했다.
큰 눈과 갸름한 얼굴, 가녀리면서도 S라인이 잘 살아있는 소녀.
얼굴은 앳되지만 몸으로만 본다면 성숙했다.
그에게 몸을 받치는 여자들은 많았다.
얼굴도 잘생긴데다가 톱스타인 그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몸을 내줄 수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그가 날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그는 혜원의 뺨을 또 한번 쓰다듬었다.
가요프로그램 무대에서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 붉은 입술이 애타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혜원의 턱을 잡고 살짝 올렸다.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탕.
“뭐야?”
현성이 신경질적이게 소리쳤다.
혜원은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문쪽으로 무조건 내달렸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기만을 바라며.
“남의 여자한테 손을 댈때는 기억해야 될 게 있다.”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분노는 몸을 살짝
떨리게 할 만큼 대단했다.
혜원은 떨리는 눈으로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자를 올려다보았다.
검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리고,
큰 눈에 분노를 가득 담고 자신을 농락하려했던 자를 매섭게 노려보는
그는... 너무도 사랑하는 다연이었다.
“오, 오빠...”
“뭔지 아나?”
“혜원이 니 여자라는 거냐?”
“혜원? 누가 그 더러운 입에서 성스러운 그녀의 이름을 나오게 하래.”
“무, 뭐뭐?”
현성은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자를
응시했다. 그는 정말 분노로 가득 찬 듯 했다.
그는 자신과는 달랐다.
자신은 현재 10대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를 가졌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를 가졌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아름답고 기품있었다.
“감히 니...니따위것이!”
“질문에나 대답해.”
“내가 그따위것을 어떻게 알아?!!
그러는 너는 내가 누군지나 알아?!!! ”
“십중팔구 미친놈이겠지.”
“뭐야?!!!! 가, 감히 이 정현성님에게!!!! 이런 무례한!!!!!”
“죽거나. 뒈지게 처맞거나.
남의 여자를 건들때 기억해야되는 건 바로 이거다.
어떤거 선택할래, 이 골빈 새끼야?”
혜원은 다연의 강한 모습은 처음이였기에 깜짝 놀랐다.
다연은 정말 그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한 대 칠듯이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이 미친새끼가 돌았나!!”
현성이 먼저 다연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혜원은 눈을 꼭 감아버렸다.
다연은 분명 싸움을 못 할것이 분명했다.
퍽.
드디어 마찰음이 들려왔다.
혜원은 눈을 살짝 떴다.
그 순간 놀람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죽거나, 뒈지게 처맞거나. 둘 중 하나 선택하라고.”
쓰러져있는 것은 다연이 아니라 현성이었다.
그는 가는 피줄기를 매달고서 쓰러져있었다.
다연은 천천히 그의 근처로 다가가 배를 발로 꾸욱 눌렀다.
“나는 설득과 타협을 좋아한다.
하지만 너같은 걸레같은 새끼들한텐 말로 안해.
그게 이 세상에 법칙이고, 너같은 새끼들한테도 가장 잘 들어먹는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다연은 냉소적인 웃음을 달고서 그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현성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어 한 마디라도 뱉으면 피가 한 웅큼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 여자 한번만 더 건들면.”
꿀꺽.
“그땐 진짜 뒈지게 처맞는다.
몰랐기 때문에 한번만 봐줬을 뿐이야.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 건들면, 진짜 눈이 뒤집히는 걸 느끼게 해주지.”
그렇게 말한 다연은 혜원의 가는 손목을 꽉 쥐고는 대기실에서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현성은 피를 쏟아내며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 하얗고 가는 손에서 나오는 파워는 상상 이상이었다.
“쿨럭. 괜히 건들었군, 젠장.”
혜원은 다연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가, 다연이 멈추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헥헥 거렸다. 다연은 그런 혜원을 애틋하게 바라보다가 품에 안았다.
혜원은 다연의 품에 안겨 숨을 몰아쉬었다.
“혜원아.”
“응, 오빠?”
“저런 새끼들이 자꾸 엉겨붙으면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경비실에서 보고 깜짝 놀랐잖아.”
“겨, 경비실?”
“대기실에 CCTV달려있는 거 몰랐구나.”
“그럼 경비아저씨는 내가 당하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단 말야?
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혜원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다연에게 말했다.
그러자 다연이 안타깝다는 듯 혜원을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말했다.
“원래... 이 세상이 돈에 따라 좌지우지 한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하아...”
“걱정마, 이제부턴 오빠가 지켜줄꺼니까. 이런일 없게 할테니까, 겁먹지마.
넌 당당하게, 자신있게 노래를 불러.”
“오빠.”
다연이 천천히 입술을 혜원에게 가져갔다.
혜원의 입술과 다연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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