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세(大功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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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진인을 위시한 정도련의 수뇌들이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오후
의 난동으로 정도련의 체면은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상태였다. 뜨
내기 무인들은 이미 정도련을 나간 지 오래였고, 남은 무인들마저 심
기가 편하지 않았다.
개파대전을 치르고 군웅들을 모아 위세를 드높이려던 시도는 이로
써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때문에 대전에 모여 있는 수뇌들
의 얼굴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십자성의 짓이 분명하외다. 설마 개파대전을 이용해 분열
을 획책할 줄이야."
"아까 자살 공격을 했던 이들의 눈에는 이지가 존재하지 않았소.
약물이나 대법 등으로 세뇌를 한 것이 분명할 것이오. 이런 천인공
노한 짓이라니!"
분노에 떠는 수뇌들을 바라보는 청송진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
다. 그라고 해서 왜 지금의 상황에 분노가 치솟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분노하기보다는 이성을 찾아야 할 때였다. 지나간 일에 대해
왈가왈부 떠들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장로들은 아까부터 계
속 자살 공격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
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역시 현실감각이 결여된 것인가?'
그가 생각하는 정도련과 구대문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사
람들 틈에서 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라는 도피처에 있다는
것이다. 현실과 괴리된 삶을 살다 보니 자신들이 백성들 위에 있다
고 생각한다. 물론 무공이나 삶을 들여다보자면 그게 맞는 말이겠지
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일이 무공으로만 해결된다면 무림 단체가 벌써 천하를 일통했
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도 무림 단체가 일방의
패주로 안주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선 수많은 정치적인 요
소와 현실적인 감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힘의 균형을 맞
추기 위한 이해타산이 필요한 법인데 지금 정도련에는 그 모든 것이
미흡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것들은 저절로 갖춰지기 마련이
었지만 문제는 그들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적은
그들이 미처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자신들의 안방에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알려주는 사실은 한 가지였다.
'이젠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겠다는 것, 분명히 십
자서의 이번 행보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
이겠지.'
청송진인의 고뇌는 깊어만 갓다.
지금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개파대전에 대한 성토가 아니라
현실적인 대처 방안이었다. 하지만 각 파의 정로들은 그런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현실적인 일들은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뒤에서 받쳐 주는 것
이 우리들의 몫인가?'
무당산에서 검만 닦을 때는 이런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았다. 단
지 검을 닦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이곳의 현실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현실이 그에게 정신적인 피
로를 주고 있었다.
그때 대전의 문이 열리면서 무비를 비롯한 젊은 무인들이 들어왔
다. 그들이 들어오자 청송진인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개
파대전에서 여러 자기 문제가 터지자 실질적으로 움직이며 뒷수습을
한 사람들이 바로 젊은 무인들이었다. 비록 서투르긴 했지만 현실감
각이 있는 그들의 등장은 청송진인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젊은 무인들의 대표로 무비가 입을 열었다.
"일단 모든 상황을 수습했습니다, 련주님."
"수고들 했네."
"당연히 저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자리에 앉게나."
"아닙니다. 그보다 서 소저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서 소저가?"
무비의 말에 청송진인이 반색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궁성에게
서문아가 의심이 가는 폐장원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어찌
되었는지 궁금했던 차였기 때문이다.
무비와 젊은 무인들의 뒤에서 서문아와 남궁성이 나왔다.
"어서 오시구려, 서 소저."
"네, 련주님."
서문아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서 소저, 어찌 된 일이오? 정말 그 장원에 십자성의 무리들이 있
었소?"
"그런 정보는 어찌 안 것이오? 그런 것은....."
미처 서문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장로들이 그녀에게 질문을 해
댔다. 정신없는 그들의 모습에도 서문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분이 아는 사람이 다행히 그런 정보에 능통합니다. 때문에 저
에게 귀띔을 해 주었고, 제가 직접 가서 학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장로들의 시
선이 일제히 그녀의 입에 집중되었다.
"분명히 십자성의 무인들이 폐장원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
니다. 일단 수백의 무에이 삽자성의 무상과 문상이 나와 있는 것으
로 파악되었습니다."
"십자성의 문상과 무상이?"
"설마 그 둘이 모두 동원되었단 말이오?"
장로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무비를 비롯한 젊은 무인
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문상과 무상이 모두 동원된 적은
거의 없었다. 설마 했던 최악의 사태가 현실로 나타나자 그들은 침
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청송진인은 분위기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차피 언젠가는 싸워야 할 적이오. 우리의 목적 자체가 십자성
에 대항하는 거였으니까. 단지 그 시기가 조금 빨라진 것뿐이오. 그
러니까 마음을 굳게 먹읍시다."
청송진인의 말에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가 먼저 저쪽을 쳐야 합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분명 많이 지쳐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쳐들어가는
것이 효과적일 겁니다."
"일단 저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염탐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무작정 쳐들어갔다가는 오히려 저들의 함정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몰아......"
젊은 사람들의 의견이 거세지자 장로들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자
신들이 개파대전을 어떻게 수습할지 의논하는 데 반해 새로운 세대
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난국을 헤쳐 나갈 것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나이 든 장로들의 피를 들끓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개파대전은 지나간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저들과 효과적
으로 싸울 것인지를 의논합시다."
"좋습니다. 일단 척후를 내보냅시다. 서 소저가 다행히 저들의 거
점을 알아 왔으니 이제부터 저들의 규모와 준비 상황을 파악해야 합
니다. 이 일은....."
일단 하나의 의견으로 가닥이 잡히자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쏟아
져 나왔다. 대전은 금세 사람들의 이야기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서문아는 이런 소란이 싫지 않았다. 무언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의견을 모아 가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그때 무인 한 명이 대전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련주님, 비모각에서 온 급보입니다."
"비모각에서?"
청송진인의 물음에 무인이 봉서를 가지고 왔다. 봉서를 건네받은
청송진인이 급히 봉인을 뜯고 서신을 읽었다.
"이런!"
점점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장로들은 회의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청송진인의 모습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한참이 지나도 청송진인이 아무런 말없이 비통한 표정을 하고 있
자 공동파의 관무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련주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으음, 청성파가....."
청송진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청성파
의 철연자가 말했다.
"본파가 어찌 되었습니까?"
"그게....."
계속해서 청송진인이 말을 흐리자 결국 철연자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쳤다.
"어허~! 답답합니다. 도대체 본파가 어이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련주!"
"청....성파가 혈겁을 당했다 합니다."
"뭣이? 본파가 혈겁을...."
"뿐만 아니라 아미파도 혈겁을 당했다 합니다."
"아미타불! 본파가 말이오?"
청성파의 철연자와 아미파의 헤심사태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러
자 청송진인이 비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십자성의 무리들이 사천의 두 문파를 급습했다 합니다. 하루 사
이에 일어난 공격이기에 미처 대응할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본파가 혈겁을 당하다니."
"아미타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본파에 가 봐야겠소."
혜심사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뜨거
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청송진인을 비롯한 장로들이 그녀를 급히
말렸다.
"이보시오, 혜심사태. 마음은 알지만 진정하시오. 지금 무작정 아
미파로 달려간다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오."
"그렇소!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이오. 여기에서 아미파의 전력이
빠지면 커다란 손실이오. 그러니까......"
"본파가 혈겁을 당했소. 제자들이 어찌 되었나 알 수가 없는 상황
이오. 미안하지만 내겐 정도련보다 본파가 우선이오. 내 제자들의
반은 남기고 갈 것이오. 하니 날 말리지 마시구려. 어서 가서 본파
를 수습해야 하오."
"하지만......"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고 내게 강요하지 마시오. 이것은 천년 아
미의 존망이 걸린 일이오. 더 이상 말리면 그나마 우리의 관계도 끊
겠소이다. 아미타불!"
단호하게 말하는 혜심사태의 태도에 장로들은 더 이상 그녀를 말
릴 수 없었다.
혜심사태뿐만 아니라 청성파의 철연자마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전력의 삼분지 일을 여기에 두고 가겠소. 이 시기에 빠지는
것은 미안하지만 문파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소. 나라도 가서 문파를 수습해야겠소이다."
"허어~!"
청송진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정을 바꿔 자신이 저들
의 입장이라도 마찬가지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말릴 수
없었다.
두 장로가 나간 후 장내의 분위기는 급속히 식었다.
"이것이 십자성의 노림수던가? 철저히 당했군."
남궁성이 이를 악물었다.
저들의 분열책에 완전히 넘어간 꼴이었다. 아홉 개의 문파로 이루
어진 정도련의 약점은 근본이 따로 흩어져 있다는 것. 저들은 그런
정도련의 약점을 이용해 근간을 뒤흔들고 분열을 가져왔다. 그야말
로 절묘한 술책이었다.
'정도련의 근본은 구파일방, 청성과 아미가 당한 이상 다른 문파
도 자파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도련의 힘
이 약화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더구나 오늘 개파대전의 일까지
생각한다면 군웅들의 힘을 빌리기도 힘들 터. 정말 어렵게 되었구
나.'
서문아는 새삼스럽게 십자성의 문상 문수영의 계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단 두 가지의 노림수만으로 정도련의 힘을 절반 이상 약화시
킨 그녀의 머리에는 그야말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청송진인을 비롯한 장로들의 고민이 이어졌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 전보다 기세가 꺾인 것은 어
쩔 수 없었다.
서문아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갑갑
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남궁세가의 무인이 대전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
전 안의 분위기가 어떤지 익히 알기에 서문아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입니까?"
"아! 실은 정문에서 이곳에 들어오겠다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정도는 그쪽에서 해결할 수 있지 않나요?"
서문아의 말에 남궁세가의 무인이 난색을 표했다. 사실 아까 개파
대전의 무산으로 인해 정도련은 외인의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혹
시 있을지 모르는 제이의 불상사에 대비를 한 것이다. 그래서 배치
된 무인들이 바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그 사람을 막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적 대협의 친
구라고 말을 해서....."
"지금 뭐라고 했나요? 그분의 친구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진위를 파악할 수 없기에 이렇게 온 겁
니다."
"안내하세요. 제가 그를 직접 만나겠어요."
"아, 예!"
서문아의 말에 남궁세가의 무인이 몸을 돌렸다.
'도대체 누구지? 그분의 친구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
데.....'
그녀는 부질없는 생각이라 여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만나
보면 진위를 알게 될 터였다.
"글쎄, 내가 도마라고 불리는 적무강의 친구라니까!"
"확인이 되기 전까지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어허~! 내가 천하의 도마의 친구라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안 되면 안 되는 겁니다."
정도련의 정문에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정도련의 무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꺼운 옷을 껴입은 남자였다. 그
는 모자를 눌러쓰고 코 위까지 옷깃을 세워 눈만 내놓고 있어 굉장
히 수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두 사람의 다툼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해져 갔고, 이제는 정문
을 지키는 다른 무인들까지 합세해 점점 더 고성이 오고갔다.
안에 들어가고 싶으면 정체를 밝히라는 정도련의 무인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적무강의 친구라고만 떠들어댔다. 그는 한
사코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그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무인들의 눈빛이 더욱 험악해져 갔다. 그렇지 않아도 대낮의 사건으
로 감정이 격앙되어 있던 이들이었다. 무인들의 얼굴에는 시간이 지
날수록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그때 정문안에서 남궁세가의 무인과 늘씬한 여인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모자를 눌러쓴 남자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어? 잠깐! 내 눈이 이상한가?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
디서 봤지? 왜 기억이 안 나지?"
남자가 연신 남궁세가의 무인을 따라 나온 서문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환골탈태한 후 뺨의 상처가 거의 사라지고 눈부신 살결을
회복한 그녀의 모습을 알아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모습에 서문아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당신, 누구죠? 누군데 적 대협을 안다고 그러는 건가요?"
"아! 난 철홍이라고 합니다. 무강이의 친구죠."
"당신이....."
서문아의 눈동자에 한 줄기 기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어디선
가 들어 본 이름이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 십자성에 있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난 당신의 얼굴을
처음 보는데."
"역시 그랬군요.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안으로 들여보내세요."
서문아가 정문 무사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성문 무인들이 의심쩍은 얼굴을 했다. 분명히 서문아가 높은 위치
에 있는 여인인 것은 알겠는데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
기 때문이다.
"남궁성 공자도 허락한 일이에요. 들여보내세요."
"아, 알겠습니다."
서문아가 남궁성을 들먹이자 무인들이 남자를 들여보냈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인들은 모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있
어 남궁성의 말은 지상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서문아의 정체
는 확실히 몰랐지만 남궁성과 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철홍을 통과시켰다.
정문을 지키는 무인들을 뒤로하고 서문아와 철홍은 정도련 안으로
들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자 철홍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당신은 날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당신을 도무
지 모르겠거든요. 혹시 우리 만난 적이 있나요?"
"우리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지요. 십자성 참호대의 철홍 소협, 틀
린가요?"
"마, 맞아요. 그런데 당신은?"
"나, 기억이 안 나나요? 우린 몇 번이나 만났는데."
"하하. 그게......"
철홍의 목소리가 갈수록 낮아졌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
다. 이토록 눈에 띄는 미인을 보았다면 분명 기억할 터인데도 저주
받은 그의 두뇌는 기억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서문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웅풍대의 부대주였던 서문아예요."
"설...마 당신이?"
"그래요. 내가 서문아예요."
"이런 일이......"
철홍이 놀람을 표했다. 서문아의 말을 듣고 난 후에 자세히 살펴
보니 예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서문아의 변한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당신이군요. 못 알아보겠는데요."
"적 대가 덕분에 이렇게 됐네요."
"그렇군요."
철홍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
는 듯하다가 푹 눌러쓴 모자를 벗었다.
"당신?"
순간 서문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드러난 그의 모습이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칠흑처럼 검은 피부, 분명히 이목구비는 철홍
이 맞지만 그의 피부색은 그녀가 알던 철홍이 아닌 것이다.
"하하! 사정이 있어서 피부가 이따위로 변했습니다. 낯부끄러워서
어디 얼굴을 드러내 놓고 다닐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모자를 눌러
쓴 것이니까 양해해 주십시오."
철홍의 말에 서문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철홍이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다른 사람에게도 제 피부색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치료법을 찾
을 때까지는 비밀로 하고 싶으니까요."
"알았어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네요."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은 나직이 이야기를 나누며 정도련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