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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페르세우스는 사무실로 돌아와 김종칠이 넣었다는 보험의 내용과 가입한 날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가입한 날짜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물론, 김가희가 다니는 보험회사의 건도 두 개나 있었다. 가장 먼저 넣은 것이 대략 육 년 전쯤이다. 그렇다면 전부 결혼하고 넣은 것이 분명하다. 김종칠 자신의 생명보험이다.
이상한 점이라면 거의 열 달을 주기로 두 개씩 보험에 가입했다는 점이다. 보험 만기일도 표시가 되어있는데 이십 년, 긴 것은 삼십 년 형인데 거의 장기보험이다. 매월 납부금도 미미한 금액이었다. 자신이 죽거나 다쳤을 경우, 보험금을 청구하고 받는 사람은 전부가 선미 누나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전혀 이상한 게 없다. 오히려 선미 누나가 거꾸로 알고 오해를 하는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김종칠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 어떨까?
김종칠의 전화번호가 핸드폰 어딘가에 들어있을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알았으니 그건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탁자 위에 여태 얹혀있는 카메라를 포맷시켜야 하겠다. 빨리 포맷을 시켜야 사진이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카메라에 든 사진의 내용이 궁금해서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카메라는 페르세우스가 처음 만져보는 고가의 카메라였다.
자세히 보니 디지털이 두 대, 필름이 들어가는 것이 한 대였다. 요즘에 필름이 들어가는 카메라를 지니고 있었다니, 천박한 예술가지만 광은 광인 모양이다.
필름이 들어가는 이런 카메라가 있었으니 암실이 필요했겠지.
먼저 필름이 들어가는 카메라를 열어서 보니 필름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암실이 아닌 곳에서 뒤에 뚜껑을 열었으니 이미 필름은 다 탔을 것이다. 필름을 빼서 주르르 빼보았다. 역시 육안으로는 알아볼 수가 없는 필름이 되어있었다. 다음은 디지털카메라다. 사진은 한 장, 한 장 클릭해서 지우는 방식이다. 클릭한 사진을 지우고, 또 클릭해서 지우고, 상당히 더디다.
김종칠에게 보험회사 외판사원을 가장해서 전화하면 어떨까?
손으로는 사진을 포맷하고 있지만, 페르세우스의 머리는 김종칠의 영역을 뒤지고 있었다.
행복을 디자인하는 설계사라고 하면서 전화를 하면 어떨까? 신상품이 나와서 우수고객을 골라서 전화한다고, 한정 가입으로 되어서 먼저 통보한다고 접근하면 어떨까? 한정 상품? 보험에 그런 상품이 있기나 할까? 아니면 경찰서인데 보험사기 관계로 알아볼 게 있다고 전화를 하면 의중을 파악할 수가 있을까?
페르세우스는 사진을 지우면서 계속 김종칠의 생각에 말렸다.
사진을 클릭해서 지우면 건성이지만 사진을 안 볼 수가 없다. 지우면서 보니 중간중간에 누드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지 않고 지웠다. 한꺼번에 포맷시키는 방법이 있을 터인데 그 기능을 찾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카메라 전문점에 들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이 소도시에서 이 카메라가 누구의 카메라인지 단박에 알 수도 있는 문제다.
열 달?
열 달이면 임산부가 임신해서 출산하는 기간이다.
보험을 계약하는데 왜 하필 열 달을 주기로 잡았을까? 임신 기간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거기서 생각을 멈추고 카메라를 놓고 책상 위의 보험 내용을 다시 살폈다.
날짜를 보며 계산하니 거의 열 달을 주기로 넣은 것이다. 혹시 불임의 보상심리로 보험을 선택한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넣은 게 한국 생명이라는 보험회사에 가입한 것인데 올해 가입한 것이다. 주선미 누나의 생명을 담보로 한 보험을 살폈다. 그것도 보험금이 미미한 액수였다.
모르겠다.
주선미 누나가 오해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불임에 대한 과대망상은 김종칠이 아니라 주선미 누나일 수도 있는 일이다.
이걸 주선미 누나에게 그대로 던져주고 알아서 해석하라고 하면 어떨까?
아무래도 주선미 누나는 김종칠의 아기를, 임신해야 할 주인공이니 생리 주기나 부부관계횟수, 그 날짜를 짚어보면 이 문제를 의외로 쉽게 해석할 수도 있다. 아니다. 주선미 누나를 찾아가서 이 보험 내용을 보며 상의를 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부부관계나 임신주기 여부에 대해서 솔직하고 털털하게 말을 해줄 성격이다.
주선미 누나와 그렇게 대화를 하며 머리를 맞대면 김종칠의 의중을 유추할 수가 있겠다.
주선미 누나는 지금 바쁜 시간일까?
어라?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다.
점심시간이 넘었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 구태여 집에 밥을 먹으러 들어가기도 귀찮은 지경이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어머니는 어떡하고 계실까?
큰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고부터 어머니는 말수가 줄었다. 페르세우스도 큰아버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집에서 큰아버지의 얘기를 꺼내는 건 묵언의 금기처럼 여겨졌다. 이상한 일이다. 어머니는 염치가 없다고, 염치를 들먹였지만, 페르세우스는 기대가 된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다가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 밥 한 숟갈을 물에 말아서 점심을 때웠노라고 했다.
아. 호젓한 어머니의 식욕이여!
어머니의 식욕을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가능하다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
페르세우스는 그 사실을 다시 실감하고 새겼다.
내가 왜, 뭘 하느라고 점심시간을 놓쳤을까?
페르세우스의 가슴에는 그 점이 후회처럼 밀려들었다.
도립도서관 옆 롯데리아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그 자리에 앉아 주선미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봄날의 햇살이 창으로 들어오는 가게는 안락했고 다른 손님이 없이 조용했다. 사무실보다 통화하고 생각하기에 나은 공간이다. 주선미 누나는 컬컬한 목소리로 어이, 동생!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오후에 시간이 어떠냐고 물었다.
항상 넘치는 게 시간이라고 했다. 언제든지 시간에 개의치 말고 미용실로 오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오면 머리를 다듬어 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정말 잔정이 많은 아줌마다.
오후에는 보험 가입 내용을 들고 미용실에 가야겠다. 그게 나을 것이다. 주선미 누나에게 그걸 보여주면서 간략하게 설명하면 의외로 쉽게 답을 스스로 찾을 수가 있는 문제이고, 머리를 맞대고 풀어보면 누구의 오해인지 실마리가 풀릴 일이다.
이거 사건이 의외로 허무하게 끝나는 게 아닌가?
사설탐정으로서의 포지션이 답답한 실정이다.
그렇더라도 사실이지 그랬으면 좋겠다. 의뢰사건이 허무하게 끝났으면 좋겠다. 주선미 누나의 가정이 파탄 나지 않고 행복하게 모름지기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페르세우스의 솔직한 심정이다. 주선미 누나의 건은 좀 더 생각해보자.
롯데리아를 나와서 사무실로 걸어서 오고 있을 적에 전화가 한 통 왔다. 의뢰인이었다. 지금도 쓰나미의 해평넷과 후배의 벼룩시장에는 그대로 사설탐정의 광고가 나가는 모양이다. 의뢰인은 역시 바람난 남편의 뒷조사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무실의 위치를 알려주고 들르면 자세히 상당을 하겠노라고 했다. 가만히 보니 들어오는 의뢰인 칠 할 정도가 그런 불륜관계를 의뢰하는 건이었다. 뭐, 흥미를 갖고 일할 만한 참신한 사건이 없나? 그 전화를 끊고 나니 금세 전화가 또 왔다.
국정원이라고 했다.
국정원이라는 말에 난데없이 소름이 끼치고 머리가 쭈뼛 섰다. 이건 장난 전화가 아니다.
페르세우스는 바짝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페르세우스의 이름을 말하며 본인이 맞느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더니 큰아버지 조사가 끝나서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내일 오전 10시까지 와서 모셔가라는 통보였다. 벌써 조사가 끝났느냐고 물으니 조사할 게 없다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는 끊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국정원의 위치를 물어보지 못했다. 그거야 국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하면 되겠지.
사무실로 들어와서 인터넷을 켜고 국정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특수기관이라 그런지 위치가 나와 있지 않았다. 다른 홈페이지에는 있는‘찾아오시는 길’그렇게 쓰인 위치나 약도가 있는 코너는 없었다.
국정원이 어디에 붙은 거야?
궁리하다가 국정원에 파견 나가 있다는 이희철 경정을 떠올렸다. 핸드폰을 뒤져 그에게 전화했다. 그에게 누구라는 걸 밝히려면 또 아버지 성함을 거론해야 했다. 이희철 경정은 자상했다. 해평시에서 올라오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가능하면 승용차를 이용하지 말고 기차를 이용해서 지하철을 타는 것이 편리하단다. 서울역에서 몇 호선을 타고 어디에 내려서 갈아타고 어디에 내리라고 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니 페르세우스는 대충 어디쯤인지 감이 잡힌다.
그의 자상함에 고맙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고 보험 내용인 인쇄된 용지를 챙기고 노트북을 챙겨서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에게 사실을 알리고 큰아버지를 맞이할 집을 정리하고 준비해야만 했다.
집에 들어가서 내일 큰아버지를 모시러 가야 한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한숨을 먼저 쉬었다. 페르세우스는 한숨을 쉬는 어머니를 안아드렸다.
“어머니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내일 같이 가시기만 하면 돼요.”
페르세우스는 자신의 방에 든 책상과 침대를 거실로 꺼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거들기는 했지만, 거의 혼잣손으로 했다. 작은 줄만 알았던 거실인데 그런 물건들을 꺼내고 거실을 정리하니 그래도 공간이 남았다. 궁리하다가 작은 옷장도 마저 꺼내서 거실에 배치했다. 그래도 거실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앉아서 차를 마실 공간은 있었다.
“어머니! 집이 자꾸 늘어지네요. 쇼핑가요!”
“무슨 쇼핑?”
어머니가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 하나와 작은 옷장 하나. 그리고 이불을 사야만 했다. 어머니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경제적인 걱정을 했다. 페르세우스는 그것 얼마 하지도 않을 거라며 노트북 가방에서 안드로메다에게 받은 봉투를 그대로 어머니께 내밀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받았지만, 웬 돈이냐, 하는 눈치였다.
“어머니 제가 명색이 사설탐정인데 벌어야죠. 어머니께서 깎고 어머니께서 계산하세요. 현금이니 깎아야 하겠지요? 많이 깎으세요. 물건은 깎고 흥정하는 재미로 사는 거죠.”
페르세우스는 유쾌함으로 가장했다.
가장이 아니라 속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어머니는 애가 타는지 모르지만, 페르세우스는 즐겁다.
어머니를 태우고 나와 먼저 이불가게에 들렀다. 겨울 이불은 보관하기가 그러니 다음에 사기로 하고 계절에 맞는 이불과 요, 배게 등속을 어머니는 재질과 디자인을 보고 꼼꼼하게 따져서 샀다. 어머니는 힘이 없어 보였지만 흥정을 하는 데는 활기가 넘쳤다.
페르세우스가 한 일이라곤 산 물건은 차에 싣는 정도였다.
그다음에 들른 곳이 바로 옆의 가구점이었다. 적당한 싱글침대를 하나 주문하고 원목으로 된 옷장을 하나 골랐다. 전적으로 어머니께서 고른 것이다. 그리고 깎았다. 흥정이 원만하게 끝이 나니 여기에 있는 것은 전시용이고 물건은 창고 있으니 금세 집으로 배달을 해주고 설치까지 해준다고 했다. 페르세우스는 조금 바쁘다고 했더니 바로 따라갈 것이라고 했다.
안드로메다가 과하게 넣었는지 어머니께서 잘 깎았는지 물건대금을 다 지급하고도 봉투에 현금이 두툼하게 남았다. 어머니는 그 봉투를 페르세우스에게 내밀었지만, 페르세우스는 어머니께서 접수하시라고 다시 밀었다.
아파트와 동 호수를 알려주고 집으로 들어와 있으니 금세 가구점에서 배달을 왔다. 배달온 가구점 점원을 도와서 침대와 옷장을 제 자리에 정리하고 나니 어머니는 커튼을 들먹이셨다. 페르세우스는 그건 어머니께서 알아서 하시라고 어머니께 미루었다. 어머니 표정이 좀 풀리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새로 꾸민 방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아담했다. 노인 혼자 거처하기에는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정리를 마치고 청소를 마치자 해는 이미 기운 상태였다. 다시 사무실에 나가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늦었다. 다음날 10시까지 국정원에 가려면 기차표는 미리 준비해야 했다. 모바일 예매를 하려고 핸드폰을 드는 순간, 벨이 울렸다. 미용실 주선미 누나였다. 오후 내내 기다렸다는 것이다.
“알았어요. 뭘 좀 조사하느라고, 누나! 십 분 후에 미용실로 갈게요.”
그 말을 하고 전화를 끊으니 어머니는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어머니? 사설탐정이 밤낮이 있나요? 업무차 나가는 거예요.”
노트북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주선미 누나에게 보험의 종류와 수령인을 설명하고 해석하라고 해야 할 일이다.
형곡동 고개를 넘어서다가 차를 갓길에 세웠다. 김종칠에게 통화를 해보는 게 낫겠다. 전화해서 보험외판원이라고 하면 밑지는 거야 없다. 차의 오디오 볼륨을 낮추고 전화번호를 찾았다.
김종칠은 번개 익스프레스라는 상호를 거론하며 전화를 받았다. 생각보다 굵직한 목소리였다. 페르세우스는 보험회사 직원이라며 인사를 했다. 새로 나온 상품이 있는데 우수고객에게 먼저 연락하는 차원에서 전화했다고 둘러댔다.
“아이고, 보험? 말도 하지 마시오. 너무 많이 들어 허리가 휘청거리는구만! 보험? 소리만 들어도 옆구리가 결리는구먼!”
왜 보상이 별로 좋지도 않은 보험을 많이 넣었느냐고 묻자, 불쌍한 마누라를 생각하고 넣었다가 보험료 내느라고 개고생을 한다고 투박하게 말했다. 페르세우스는 잽싸게 그 말을 붙들고 그럼 자녀 교육보험도 좋은 상품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넘겨짚어 물었다.
“미안하지만, 아이가 아직 없소! 아이가 있었다면 내가 마누라 앞으로 허리가 휘어지도록 보험을 넣었을 거 같소? 자식이 바로 보험이 아니겠소! 아이가 생기면 손해가 왕창 가더라도 당장 그놈의 생명보험부터 해약할 거요. 교육보험? 다음에 전화하시오. 교육보험? 나도 아이만 있다면 넣고 싶소! 누구 염장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 말을 하고 김종칠은 전화를 투박하게 끊었다.
확실해졌다.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다. 페르세우스의 핸드폰에는 김종칠과의 통화내용이 다 녹음되었다.
감동적인 사실이었다. 주선미 누나는 그런 사나이의 책임감으로 뭉친 깊은 마음을 곡해하고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주선미 누나가 기다릴 것이다.
*17.
기차는 새벽에 탔다.
10시까지 국정원에 도착하려면 새벽 기차를 타야만 했다.
큰아버지를 그곳에서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새벽에 서둘렀다. 기차 승차권은 이미 어제저녁에 주선미 누나를 만나고 들어와 모바일로 예매했다. 기차를 타고 가서 돌아올 적에는 장거리이지만 택시로 모시자고 어머니와 합의를 보았다.
어머니는 생각지도 못한 큰아버지 덕분에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자. 무엇이 걱정인지 어머니는 옆에 앉은 페르세우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에 잠기셨다. 만감이 교차하실 것이 분명하다. 어머니 입에서 혹시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올까 봐 페르세우스는 조마조마했다. 만약 아버지의 얘기가 나온다면 어머니는 또 눈시울을 붉힐 것은 뻔한데 기차에서 그런 낭패가 없다.
“뭐 하는 아가씨니?”
페르세우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페르세우스에게 물었다. 기차가 천안을 지나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나란히 앉기는 했지만, 그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며칠 전에 그 처녀! 참 참하더라.”
어머니는 안드로메다를 얘기하시는 모양이다.
“아! 그 아가씨, 그 아가씨 간호사인데 사건 의뢰인이에요. 그런 사이가 아니어요.”
“내가 참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그래서 안드로메다가 어머니의 눈빛을 들먹였구나, 이해가 간다. 어머니는 고기 맛보다 안드로메다에게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남의 엄한 처녀를 가지고 엉뚱한 생각을 하지 마셔요. 어머니! 그날 고기가 참 연한 게 맛있었지요?”
페르세우스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니었다.
“참 참하게 생겼더라. 숟가락을 잡는 모양도 그렇고, 먹는 모습도 복스럽고, 집안의 복은 여자가 몰고 온다.”
어머니는 정말 섬세하게 관찰했었나 보다. 페르세우스는 웃음이 쿡 터져 나왔다.
“어머니! 엉뚱한 생각을 하시지 마세요. 이제는 끝이에요. 사건이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으니,”
“과연! 정말 그럴까? 그 아가씨 눈빛은 그게 아니던데? 너는 아직 모른다. 여자의 직감을.”
어머니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조용했다. 페르세우스는 그만하자고 어머니 볼을 쓰다듬었다.
서울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갈아탔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그다지 붐비지는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페르세우스의 핸드폰에서 입금이 되었다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현금은 별로 없는 통장이지만 입금이 되면 은행에서 문자가 날아오는 시스템이다. 대수롭잖게 확인을 했는데 거액이었다. 거액이란 의뢰받은 사건을 종결하고 받은 사례금으로는 분명, 과한 금액이었다. 입금자는 주선미 누나였다.
“이거, 부담이 왕창 되는 금액이네.”
페르세우스는 중얼거리며 주선미 누나에게 전화했다.
“누나! 이게 뭐예요?”
“왜 적니?”
“아니, 너무 많아요. 내가 지금 서울인데 내려가면 좀 돌려드릴게요.”
아니란다. 행복을 디자인한 값으로는 약소하다고 했다. 행복 디자인이란 말은 어젯밤 페르세우스가 주선미 누나에게 한 말이었다.
어젯밤 김종칠과 통화를 하고 주선미 누나를 미용실 옆 호프집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페르세우스는 누나를 엄청 나무랐다. 그렇게 나무라는 것이 치료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에는 그렇게 나와 있다. 역발상의 가르침, 달래면 의심을 하고 자기 정당화를 시키는 심리가 작용한다. 먼저 호통을 치고 들어가야 한다. 보험 이 들어간 내용을 보여주며 누구를 위한 보험인가 설명을 하고 핸드폰에 녹음된 통화기록도 들려주었다.
결국, 주선미 누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실컷, 호통을 치고 사례비를 달라고 했다. 분명히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선미 누나는 지금 현금이 없다면서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내일 아침에 송금시켜주겠노라고 했다.
“누나! 어젯밤에 다정하게 잤어요?”
페르세우스가 지하철 안의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래, 동생 덕분에 마음 편하게 잘 잤지. 서울에서 언제 내려와?”
“아마 오늘 밤에, 해평에 도착할 거예요.”
“내려오면 미용실에 들러, 머리 예쁘게 잘라줄게.”
정말 잔정이 많은 아줌마다. 전화는 끊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과하게 받았다. 그건 그렇고, 주선미 누나가 아기를 빨리 가졌으면 좋으련만.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지하철은 선로 위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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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테스는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가지러 떠나자마자 드러내놓고 페르세우스의 어머니 다나에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는 공공연하게 다나에에게 결혼을 강요했다. 다나에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몇 차례나 그녀를 겁탈하려고도 했다. 다나에가 왕의 추태를 피해 신전으로 피신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전이란 신성한 곳이어서 왕도 감히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페르세우스는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없는 사이 어머니가 폴리덱테스 왕에게 당한 수모를 모두 전해 듣고 격분했다. 그는 아내 안드로메다를 어머니 다나에와 딕티스에게 맡겨두고 얼른 폴리덱테스 왕의 궁전으로 갔다. 왕은 마침 신하들과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약속대로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왔노라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갑자기 그것을 자루에서 꺼내 그들에게 보였다. 그러자 졸지에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만 그들은 모두 돌로 변해 버렸다.
페르세우스는 어머니의 복수를 하자, 요긴하게 썼던 무기들이 필요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헤르메스에게 바쳤고, 헤르메스는 다시 원래 그 무기들의 주인인 요정들에게 돌려주었다. 페르세우스는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와주었던 아테나 여신에겐 감사의 표시로 메두사의 머리를 바쳤다. 그러자 여신은 그것을 자신의 아이기스 방패에 박아 기념으로 삼았다. 그 후 페르세우스는 지신을 키워준 어부, 딕티스를 세리포스의 왕으로 추대한 다음 어머니 다나에와 아내 안드로메다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아르고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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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국정원에 도착했다.
헤매지 않고 제대로 찾는 것이다.
아홉 시가 좀 넘었으니 적당한 시간이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국정원 앞은 혼잡했다. 아마도 시위가 있는 모양이었다. 태극기 부대들의 시위인 모양이다.
빨간 모자를 쓰고 태극기를 손에 쥔 노인들의 집회인 모양이다. 서울은 허구한 날 시위다.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페르세우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이 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얘야! 무슨 시위니?”
어머니가 페르세우스에게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네요.”
어머니도 페르세우스도 정신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위대를 피해서 어디에 가야지 큰아버지를 안전하게 모셔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위대 주위에 경찰들도 보이고 카메라를 맨 기자들로 보이는 무리도 있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어디에 가서 큰아버지를 찾아야 하지? 페르세우스는 어머니를 그 자리에서 잠시 기다리게 하고 무리 뒤에 선 태극기를 들고 있는 아저씨를 잡고 물었다.
“오늘 무슨 시위인가요?”
“시위? 아니야 환영대회야.”
아저씨는 빨간색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에는 월남 참전 전우회라고 금박 글씨로 씌어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그걸 얼른 보았다.
“그럼 혹시? 베트남 참전 용사 귀환 환영대회인가요?”
“그렇지. 자네도 뉴스를 보고 왔는가?”
초로의 노인이 되물었다.
“아니 그럼, 혹시 설효진 중사 귀환 환영대회인가요?”
아저씨는 그렇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분이 오로지 환영대회를 위해 모이신 건가요?”
“그렇지. 그럼 자네는 그것도 모르고 왜 왔나?”
“저는 국정원의 연락을 받고 큰아버지 설효진 중사를 모시러 왔습니다.”
“뭣이, 그럼 설강진 의원의 아들이란 말인가?”
노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어머니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고 웅성대는 군중의 소리에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오늘 모시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이고, 이거 반갑네. 좋은 집안의 장손일세.”
노인은 그 말을 하며 페르세우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노인은 월남 참전 전우회의 일을 보고 있다고 하면서 페르세우스를 이끌었다. 페르세우스는 잠깐만요, 하고는 어머니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온 어머니에게 큰아버지의 귀환 환영대회에 모인 군중이라고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세상에, 어머니는 좀 놀라는 투였다. 노인은 어머니에게도 인사를 했다.
노인이 안내하는 곳으로 인파를 헤지고 따라갔다. 환영대회 맨 앞에 있는 참전 전우회 회장을 소개해 주었다. 그 노인도 역시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빨간 모자를 쓴 환영 무리는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참전 용사들이 분명했다. 전우회 회장이라는 분이 어머니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뭐라고 형용할 수는 없지만, 페르세우스는 우쭐해지는 기분이었다. 군중심리인 모양이다.
앞에 국정원의 담벼락에는 현수막이 두 개나 걸려 있었다.
백마부대 참전 용사 설효진 중사 무사 귀환을 환영한다는 내용이고, 현수막을 자세히 보니 월남 참전 전우회가 하나고, 하나는 백마부대 전우회가 건 것이었다.
환영대회 모인 노인들은 대충 어림잡아도 이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인다. 정말이지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들인 모양이다. 붉은색 모자를 쓴 노병들은 다 씩씩해 보였다. 페르세우스는 어머니와 나란히 월남 참전 전우회장 옆에 섰다. 전우회장은 페르세우스를 보고 아버지를 닮아서 잘생겼다고 하면서 지금 학생인가 물었다. 페르세우스는 지금 창업을 해서 혼자 일하고 있다고 간략히 대답했다.
열 시가 다 되어 간다.
“어머니 긴장을 푸세요.”
페르세우스는 어머니가 걱정이었다.
“아니야. 나는 지금 괜찮아!”
어머니가 억지로 웃어 주었다. 그 억지로라는 티가 역력했다. 페르세우스는 옆에 선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전우회장이 뒤로 돌아섰다.
군중을 향해 쥐고 있던 태극기를 쳐들며 만세를 불렀다.
참전 용사 만세!
전우회장이 선창하자 역전의 용사들은 일제히 따라 하며 만세를 외쳤다.
참전 용사 만세!
그러게 세 번을 하고 전우회장은 돌아섰다. 분위기가 뜨겁게 고조되고 있었다. 해평시에서 출발을 할 적에는 이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니도 잔뜩 고무된 기분인 모양이다.
이윽고 국정원 문이 안에서 스르르 양쪽으로 열리고 제복은 입은 헌병 둘이 나와 절도 있게 문 양쪽 옆에 차려자세로 섰다. 문은 군중이 있는 도로보다 약간 높았다.
아마도 큰아버지께서 나오실 모양이다.
초조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차려자세를 한 헌병들의 군중을 향해서 좌, 우향우를 절도 있게 하자, 안에서 정복을 입은 헌병대, 대원 네 명이 점퍼 차림의 한 초로의 노인을 보좌하고 절도있게 행진을 하고 나왔다. 드디어 큰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자 태극기를 든 한 노인이 달려가더니 큰아버지에게 붉은색 모자를 씌워 주셨다.
큰아버지는 정문을 나와 군중들을 향해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하셨다.
그러자 참전 용사 전우회장이 돌아서서 만세를 선창했다.
참전 용사 만세!
군중들도 일사불란하게 태극기를 쳐들며 만세를, 아니 절규를 외쳤다.
참전 용사 만세!
만세는 삼창으로 지속했다. 소름이 돋는 절규였다. 정말 사전에 연습한 것만 같이 울려 퍼졌다. 어머니는 기어이 눈물을 찍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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