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법문(薦度法門).....무여 선사
영가(靈駕)여, 법계(法界)의 유주무주(有主無主) 일체의 애고혼(哀孤魂)영가여!
(할을 크게 한 번 하시고)
이와 같이 영가가 끝없는 옛적부터 지은 무량한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주장자를 한 번 치시고)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망상(煩惱妄想)을 일시에 쉬어버리고,
(주장자를 다시 한번 치고 들어보이시면서)
이와 같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드러내니 이 도리를 알겠는가?
이와 같이 또렷하게 듣고, 이와 같이 분명하게 보았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부처님 말씀 중에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
담연불수어생사(湛然不隨於生死)
라는 법어가 있습니다.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영가여, 태어나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경사 났다 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이웃이나 친지에게서 축하도 받습니다. 집안에 소가 송아지를 낳고, 개가 강아지를 낳아도 주인은 싱글벙글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어떤 5대 독자가 아들을 낳으니 거의 사경을 헤 메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몇 달 더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출생은 축복 받을 일이고, 가장 기분 좋고 즐거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된 날이 가장 자랑스러운 날이라 했습니다. 어떤 여인은 아기를 낳은 날이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고 기억합니다.
그 출생은 부모를 의지해서 하지만, 부모에게 태어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태어나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죽어서는 어느 곳으로 가겠습니까? 영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죽음처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생명 있는 물체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피할 곳은 이 세상에 아무데도 없습니다. 죽음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도 없고, 빈부귀천(貧富貴賤)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잔혹하고, 비참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속담에, “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도 도살장으로 끌려 갈 때는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치며, 개도 잡혀갈 때는 반항을 하고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결국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고 맙니다.
영가여,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저 창공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은 무수한 습기가 모여서 한 조각의 구름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듯이, 태어나는 것도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즉 흙과 물과 불기운과 바람 기운이 일시적으로 인연이 되어 계합된 것이 이 몸뚱이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저 예쁘장한 얼굴과 애지중지하는 몸뚱아리가 그 흔한 흙과 물과 불 성분과 바람 성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여러분의 육신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좋다는 것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지만 그 구성 요소와 인연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서 허황된 생각과 전도(顚倒)된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났다고 해서 너무 기뻐할 것도 없고, 죽었다고 해서 너무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죽음의 시작이요, 죽는 것은 출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도 이 몸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할 필요도 없고, 너무 무시하고 천하게 다루어서 고통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적당하게 알맞게 다스리며 살아간 즉 선업(善業)이 되고, 지나치고 과하면 악업(惡業)이 됩니다. 선한 인(因)을 심으면 선한 결과가 되고, 악한 씨앗을 뿌리면 악한 열매가 달린다는 인과(因果)의 이치는 엄연하고, 조금도 흩어지지 않아서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합니다. 인과응보는 윤회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윤회(輪廻)란 유전(流轉)이라고도 하는데, 수레바퀴가 돌아가듯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중생은 삼계(三界)와 육도(六道)를 유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가여, 그 유전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윤회의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번뇌로 말미암은 업(業)’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번뇌란 정신작용이요, 업이란 행위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여러 가지 번뇌망상과 일상 생활 속에서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행위의 결과 우리들의 주인공, 즉 영가를 감싸고 다음 세상으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 무정물(無情物)이 되지만 평시에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고 다음 세상으로 떠날 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만가지 업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아서 생사윤회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이 업은 부처님 말씀에, ‘설사 백천겁(百千劫)을 지날지라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인연이 모여 만날 때에는 많은 과보를 돌려 받느니라.’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출생의 인연을 알아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야 하고, 살아가면서 자신과 육체를 적당히 알맞게 다스리고 관리해서 선업을 쌓고 악업을 소멸하여 영원을 살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 조각의 구름이 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이 떠가다가 바람이 분다든가, 태양이 솟으면 사라지듯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인연을 다하여 흩어지는 것을 죽음이라 합니다.
참으로 무상하고 허망한 것이 육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중생은 우둔해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지만, 이 몸은 순간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신도 여러분도 이 순간에도 얼굴에는 잔주름이 늘어가고, 허리는 굽어가고, 머리카락은 빠지고 희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이 육체를 그 누가 막을 수가 있으랴.
부처님 말씀에 “이 몸은 호흡 사이에도 900번을 생멸(生滅)한다” 하였습니다. 찰나(刹那)에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이 육신입니다. 숨 한 번 들이켰다가 내쉬지 못하면 바로 내생입니다. 건강하고 젊을 때는 천년 만년 살 것 같지만 항시 살얼음판을 걷듯이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그래서 항상 죽음은 예고되어 있고, 언제라도 불시에 찾아올 수 있는 것이 죽음입니다. 저 하늘 가운데 외로이 떠가던 한 조각의 구름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듯이 허망하게 쓰러질 수 있는 것이 여러분의 몸뚱이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죽음을 대비하듯이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이 두렵거든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쌓고 생사윤회를 초탈할 수 있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이란 끝없는 옛적부터 지어온 업장(業障)을 소멸해서 순수한 자기를 찾는 작업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자기를 개발하고 자기를 완성하는 길입니다. 바로 부처로 가는 길입니다. 부처란 가장 완벽하고 완성된 인간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인격과 도덕을 갖추면 생사까지도 초탈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죽음이 두렵고 내생이 걱정스럽거든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의 본 뜻을 모르고 체험도 없이 살아가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수행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괴고 꼭 해야 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을 잘 하면 죽음을 웃으면서 맞이할 수도 있고, 옛날 조사스님들처럼 앉아서 가고, 서서도 가고, 물구나무 서서 가기도 하여 생사까지도 자유자재(自由自在)할 수 있습니다. 생사를 자유자재한다, 이해가 안 되는 분이 있겠지만, 삶과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불교적인 수행입니다.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 생사의 가고 옴도 이와 같습니다.’
저 허공 중에 떠가는 구름은 실체가 없습니다. 어떤 모양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 구름입니다. 구름이 흩어지고 사라지면 아무 흔적이 없듯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인생의 오고 감도 또한 그러하여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살, 가죽, 힘줄, 뇌, 골수, 머리털, 손톱, 발톱, 때 같은 것은 흙의 성분으로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큰 흙덩이가 되었다가 점점 작아졌다가 결국은 먼지로 변하고, 그것마저 바람에 날려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침, 콧물, 고름, 피, 가래, 눈물, 소변 등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서 그 물도 증발되어 사라지고 맙니다. 더운 기운과 힘의 기운은 숨이 떨어지자마자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참으로 허망한 것이 육체입니다.
그런 죽음 앞에는 영웅호걸(英雄豪傑)도 소용없고, 천하대장군도 속수무책입니다. 죽음과 대적할 자 그 누구입니까?
흔히 생사문제를 생사대사(生死大事)라 합니다. 인생사에서 뭐니뭐니 해도 자기의 생사문제가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 생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위대한 출가를 하셨습니다.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면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도리가 무엇일까요?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
담연불수어생사(湛然不隨於生死)‘
‘오직 한 물건만은 항상 홀로 뚜렷하여 생사를 따르지 않고 맑고 고요하다네.’ 하였습니다.
이 한 물건, 항상 맑고 고요하고, 홀로 뚜렷한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주인공입니다. 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주인은 몸뚱이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육체를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차를 움직이는 운전수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여러분의 주인이요 임자입니다.
서산(西山)대사의 말씀에, ‘그것은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름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으며, 생(生)하는 것도 아니며, 멸(滅)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줄어드는 것도 아니므로 절대 태어남도 없고, 절대 죽음도 없으므로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부득이 이름하여 마음이라고도 하고, 한 물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부처라고도 표현하지만 어느 것도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경전마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본지풍광(本地風光), 법성(法性), 불성(佛性), 진여(眞如)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죽은 사람의 그것은 영가(靈駕), 일반적으로 영혼(靈魂)이라 합니다.
그것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친우를 보면 좋아하고, 연인을 보면 사랑하고 여러분을 움직이고 살아가는 주체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그것을 떠나 여러분을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면 그것은 육신을 떠납니다. 육체를 벗어난 그것을 영가라 부릅니다. 영가는 세세생생(世世生生) 윤회하면서 인연 있던 곳을 떠돌아 다닙니다. 죽음에서 새 인연을 맺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중간적인 존재를 중음신(中陰身)이라고도 합니다.
중음신은 인연에 따라 짧게는 7일, 3․7일, 49일 동안, 길게는 100일, 몇 년, 몇 십 년, 몇 백 년을 떠돌아 다니는 영가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돌아가시면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육도(六途)를 만행하게 됩니다. 육도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세계를 말합니다. 선업(先業)을 많이 닦은 영가는 선도(先途)에 태어나고, 악업(惡業)을 많이 지은 영가는 악도(惡途)에 떨어지게 됩니다. 육도 중에서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는 악도이고, 천상, 인간, 아수라의 세계는 선도에 해당됩니다.
천도(薦度)는 천혼(薦魂) 또는 천령(薦靈)이라고 합니다.
천도는 죽은 혼령(중음신) 즉 영가를, 죽은 사람의 주인공을 다스리고 인도하는 의식입니다. 천도는 업이 두터워 악도에 떨어질 영가나, 중음신으로 새 인연을 맺어 태어나지 못하고 우주의 고혼이 되어 떠다니는 영혼에게 부처님의 좋은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어서 지난 생의 잘못을 참회케 하며, 영가 스스로 깨닫게 하고, 부처님과 여러 보살님들의 가피력을 입게 하고, 스님들의 법력을 받게 하고, 유가족들의 지극한 공덕으로 악도에 떨어질 영가나 인연 없는 영가르 극락세계나 천상세계 같은 선도에 태어나게 하는 법회입니다.
천도재의 종류는 49재 천도재와 일반 천도재, 특별 천도재로 나눌 수 있습니다.
49재는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매 7일마다 재(齋)를 베풀고 선도로 인도하는 의식입니다.
<지장경>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자기의 죄와 복을 알지 못한 채 죽음의 어둠속을 헤매다가 선악의 업보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는데. 중음신으로 떠도는 기간이 보통 49일간이라 합니다. 천도가 되는 것은 49일 이전이라도 7일 또는 3․7일 동안 지장보살님께 예배하고 공양하면 선도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49재를 올려도 천도가 되지 못하고 100일, 1년, 수 년, 수십 년, 심지어 수백 년이 지나도 천도가 안 되는 영가는 지난 생애에 대한 집착이 강한 영가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런 영가를 위하여 별도로 특별히 베푸는 재를 특별 천도재라 하고, 7월 백중 우란분재(盂蘭盆齋)처럼 법계(法界)의 유주무주(有主無主) 모든 애고혼(哀孤魂)을 다 모시는 재를 일반 천도재라 합니다.
천도재는 지극한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유가족은 정성껏, 성심 성의껏 재를 준비하여 부처님께 올리고 스님들께 공양하여 영가를 위하여 공덕을 짓고, 지장기도나 미타기도를 봉행하고, <지장경>, <아미타경>, <법화경>, <금강경> 같은 대승경전을 읽어 드리고, 사경을 하고, 중요한 경전을 출판하여 보시하고 명복을 빌기도 합니다.
천도의 대상은 이제 막 유체이탈한 영가를 비롯하여 몇 년, 몇 십 년 심지어 몇 백 년 동안 우주 법계를 떠돌아 다니는 모든 영가가 해당됩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백세의 보모도 천도가 된다.”하였고, “극악무도한 영가도, 악업을 지은 영가도 천도되어 선도에 태어나거나 천상락(天上樂)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가 천도를 하면 영가에게만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유가족에게 더 큰 이익이 따릅니다. <지장경>에 말씀하시되, “죽은 이를 위하여 재를 지내면 그 공덕의 7분의 1만 죽은 이에게 가고, 7분의 6은 재를 지내는 사람에게 간다.”고 하였습니다.
천도재는 단지 가신 사람의 명복을 빌고 제도하는데 그치지 말고, 자기 천도의 기회로 삼아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게 해야겠습니다.
천도재는 영가를 위해서는 효행(孝行)중의 효행이요, 선행(善行) 중의 선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가족이 망자를 위해 아무리 괴로워하고 몸부림쳐도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도재는 영가와 인연만 계합되면 선도에 태어날 수 있는 격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악도에 태어날 영가를 선도로 안내하고 인도하여 제도하는 것은 영가를 위해서는 최상의 공덕이 될 것입니다.
영가여, 축서사 법당에 봉안된 영가여, 시방세계의 일체 영가여!
(주장자를 한 번 치시고)
먹구름이 흩어지니 구만리 장천(九萬里長天)에 외로운 달만이 홀로 밝도다.
밝고 신령하도다 이 한 점의 공적영지(空寂靈知)여
신통묘용(神通妙用)을 자재(自在)하니 생사를 초월했도다.
홍진(紅塵)을 벗어나서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드러나니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부처 아닌 것 없네.
이 한 물건은 위음왕(威音王) 이전부터 뚜렷이 밝았고, 역대제불(歷代諸佛)과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도 입을 다물었으며, 항상 극락세게에서 노닐고,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짝할 이 없으니 문수(文殊)보살의 스승이요, 보현(普賢)보살의 부모로다.
곳곳마다 금색광명(金色光明)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고,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모두 부동지불(不動地佛) 이고, 꽃꽃마다 풀잎마다 비로자나법신이로다.
영가여, 시방법계(十方法界) 일체 애고혼(哀孤魂)이여! 이 생사없는 도리를 알겠는가?
8월의 태양은 축서도량에 작열(灼熱)하는데
한가한 노승(老僧)은 나무그늘에서 졸고 앉았구나.
(법상에서 내려오시다.)
우리들은 선근공덕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된 부모 형제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부모님과 지금도 저의 뒷바라지에 지극한 정성을 쏟고 있는 보살님들 그리고 생계에 매달리면서도 이른 잠을 깨워 불공을 드리는 보살님들의 지성과 은혜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멀리서 격려해 주시고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의 뜻이 이러하니 어떻게 복전을 담보로 보시를 권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지혜없는 방편으로 복을 구하라고 말하겠습니까?
시주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 분들보다 의식주가 풍부하거나 사치스런 행위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세태를 비난 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사명이요 더우기 스스로의 번뇌와 죄악이 누구보다 깊고 무겁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수행방편을 비난하거나 염불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저의 체험을 말할 뿐입니다.
저는 부모 형제의 눈물을 바라보며 출가하였으나 수행과정에서 다시 계.정.혜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세간에서 죄를 짓고 다시 출가해서도 죄를 지었으니 무척 괴로웠습니다.
자리이타를 말한다는 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업력이 범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함을 자각하고 염불을 선택하여 정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 고뇌와 슬픔을 뛰어 넘는 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깨달음은 기쁨을 넘어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일순간의 사건인지를 검증하기 위하여 가난을 선택하여 수많은 날을 보냈습니다.
저의 체험은 부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고 조사의 어록에 부합하는 의식의 혁명이요 생활의 변화였습니다.
저의 깨달음이 저 큰스님들의 경계에 미치지 못한다 하여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자신의 업력에 상응하는 염불을 선택하여 믿음으로 정진하고 자비광명 안에서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 더없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염불과 인연이 있거나 제가 은혜입은 분들에게 조심스런 마음으로 염불법을 전하고자 서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지성과 재화를 헛되이 버리지 않고 반드시 자비광명이 감응하는 생산적인 도를 일러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염불을 권하는 진실한 뜻입니다.
염불행자는 다시는 윤회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위해 생업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염불은 이 시대의 범부가 실천하여 지혜와 공덕을 성취할 수 있는 참으로 생산적인 도입니다.
한가한 시간마다 부처님의 말씀을 진실한 믿음으로 독송하고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있다는 마음으로 염불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훌륭한 수행환경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말고 일상생활 가운데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법을 만났으니 윤회하는 업을 안고 내생까지 갈 것이 없습니다.
금생에 해결해야 하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급하게 서둘지 마십시요.
하루 하루의 염불이 헛되지 않고 공덕으로 쌓이기 때문입니다.
염불행자는 먼저 부처님이 지혜로 말씀하신 염불법에 대하여 진실한 믿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한번 선택했으면 이곳 저곳의 수행방편에 기웃거리거나 비난하는 말에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염불행자는 범부의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탐진치를 끊겠다는 어설픈 생각을 버리시고 참회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염불수행은 죄악을 짓고 부끄러운 줄을 아는 사람에게 깨달음의 계기가 오기 때문입니다.
생활하면서는 일체의 인연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자주자주 익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자연히 수행의 경계는 깊어지고 지혜와 복덕이 증장합니다.
보다 넓고 깊이 공부하고자 하시면 [정토지침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아미타경에서 "사리불아, 가히 적은 선근복덕 인연으로는 저 정토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하신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느 때, 우리가 인생의 여로에서 이웃을 비롯한 뭇 생명과 자연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사는지, 그리고 자신의 번뇌와 죄업이 어느 정도 되는지 진실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체의 인연과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깊은 선근공덕의 소유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염불법을 만나면 기뻐하고 지혜와 복덕이 날로 증장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인연있는 분들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믿기 어려우시면 보시지 않되 비난하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저에 대한 비난은 감당할 수 있지만 대승경전을 비방하는 죄업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