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16세기 최고의 신비주의 화가다.
그는 신약성경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핵심 주제인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
<십자가를 안고 가시는 예수님>, <베로니카>,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십자가 처형>, <피에타>, <그리스도의 매장> 등이 그의 작품이다.
어쩌면 그가 주로 그리는 뒤틀어진 형상이나
신비스러운 색상 같은 그만의 특징들은 수난에 딱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십자가를 안고 가시는 예수님>은 요한복음 19장 17절을 배경으로 그린 그의 주목할 만한 작품 중의 하나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입을 다문 채 간절하게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작품을 보면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의 십자가입니다.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당신과 딱 어울립니다.
사실 당신에겐 십자가가 필요 없는데 당신은 나서부터 죽기까지
이 세상의 죄의 멍에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당신은 지금 십자가를 안고 계십니다.
자, 이제는 걸음을 옮기십시오.
힘이 들어도 앞으로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골고타 언덕까지 안고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 당신은 아무 말씀도 없이 길을 가고 계십니다.
입을 다물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싸울 때가 있고 져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주님, 저 같으면 십자가의 운명과 싸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십자가를 한번 지고 나면 내 어깨는 점점 무거워지니까요.
주님,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잠자코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께서 제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 하시면 당신처럼 말없이 안고 가야 함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엘 그레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안고 가시는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다.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과 안고 간다는 것이 무엇이 다를까?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짊어져야 할 짐으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십자가를 안고 간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왕 짊어져야 할 고통이라면 짐으로 생각하고 투덜거리면서 힘들게 짊어지는 것보다는
엘 그레코가 그린 예수님처럼 고통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면 어떨까?
십자가를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은 애처롭지만 평온하고
십자가를 감싸 안은 그분의 두 손과 가시관을 쓴 그분의 얼굴엔 광채마저 맴돈다.
왜 이 그림이 짙은 어둠이 빛의 시작이라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 쓴 ‘어둔 밤’에 잘 어울리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출처] 십자가를 안고 가시는 예수님 (1580) - 엘 그레코|작성자 말씀과 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