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년~1943년)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또한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뽑은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1873년 4월 1일 러시아 제국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출생하여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했다.
국민악파가 주를 이루던 시절에 활동한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페루초 부조니,
요제프 호프만과 함께 사실상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였으며
현대 피아니스트의 정립에 상당히 공헌한 인물이다.
피아노 협주곡 4곡을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이외의 곡도 다수 작곡했으며
피아노 협주곡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피아노 협주곡에 가까운〈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나
〈보칼리제〉 등의 곡도 광고 등에 흔히 등장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주 스타로루스키에서 태어났다.
라흐마니노프의 부모는 총 3남 3녀를 낳았는데 라흐마니노프는 그중 4번째 자식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부친은 오랜 전통을 가진 지역 귀족이었으며 모친은 부유한 러시아군
장교의 딸로 결혼시에 상당한 지참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유복했다.
다른 상당수의 유명한 음악가들처럼 라흐마니노프 역시 어린시절부터 일찍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세 때 자청해서 피아노를 배운 이후 10대부터 작곡을 했고 그 시기에 이미 그 끔찍한 난이도의
스크리아빈의 에튀드 5번을 무려 한 시간만에 다 완성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견력을 가졌으며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작품번호 1번으로(거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17세에 작곡했는데 자신의 말로는 2, 3악장의 경우 고작 이틀 반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 후 24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하지만, 평단의 엄청난 비난세례를 받으며 그 충격으로
후 3~4년간 아무 곡도 작곡하지 못한 채, 라흐마니노프는 엄청난 슬럼프에 빠진다.
이 때문에 이 곡은 생전에 연주 자체가 이루어지질 않았다.
이 시기에 사촌과 결혼했다가 러시아 정교회의 비난을 받아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때의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작곡한 것이 바로 회심의 역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 이 곡으로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기존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곡을 시작했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은
저음으로 시작하는 피아노가 마치 반주로 들리며 오케스트라가 주 멜로디를 연주한다.
현대 이전의 곡으로는 드물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가 녹음되어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여담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을 고친 방법은 '자기암시 기법'이었고 결과는 매우 좋았다.
다만 이 곡의 1악장은 정말 우울증이 치료된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격정적이며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의 악절이 상당히 많다.
이 곡은 당시 라흐마니노프의 치료를 담당하였던 니콜라이 달(Nikolai Dahl) 박사에게
헌정되었으며, 알렉산더 질로티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작곡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1901년 11월 09일 초연되었다.
뒤이어 1909년에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 불리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발표했다.
(악보와 함께 듣기) 극악의 난이도와 난해함으로 많은 피아니스트 지망생들
심지어는 프로 연주가들마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곡.
심지어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서 이 곡을 헌정받은 당대의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조차도
'나를 위한 곡이 아닌 것 같다'며 거절했을 정도였다!
영화 샤인에서는 데이비드 헬프곳이 이 곡을 연습하다가 분열정동장애를 일으켰다고 묘사된다
(헬프곳의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 연주 듣기).
물론 본인 역시도 이 곡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낸 것처럼 이러한 묘사는 과장된 면이 있다.
그리고 20세기가 피아니스트들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만큼 여러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의
라흐마니노프의 피협 3번 레코딩이 존재한다.
그중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 직접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호로비츠의 연주들이 유명하다.
연주의 난이도로 특히 유명하긴 하지만 작품성도 이전의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실험적인 부분이 돋보이는 훌륭한 곡이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공산화를 피해 일단
노르웨이로 향했다가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1928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만나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다.
여담으로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의 연주를 매우 높게 샀는데 특히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치도 않았다"며 극찬했다.
호로비츠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도 다수 남아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후 미국에서 거주하며, 적은 수의 작품만을 작곡하였다.
급격히 변해가는 음악계에서 후기 낭만주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그로서는
장 시벨리우스가 그러했듯 점진적 절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말년에는 소련 당국의 요청이었던 귀국을 고려하였던 듯하나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943년 3월 28일에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흑색종으로 사망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했다. 실은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큰 나머지,
2~3년 정도의 연습을 통하여 정식으로 연주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극악의 난이도의 피아노 곡들을 써대면서도 본인은 스스로 작곡한 곡들을 쉽게
소화해냈는데, 손이 매우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안 그래도 빠른 초반의 피아노
전개가 워낙 빨라 산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큰 손은 마르팡 증후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일설에 따르면 엄지로 '도'를
짚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으로 다음 옥타브의 '라'를 짚을 만큼 길었다고 한다.
손가락을 완전히 펼쳤을 때 대략 30cm 정도의 길이가 나왔다는 얘기.
이와 더불어 손가락의 관절도 굉장히 유연해서 오른손 2, 3, 4, 5번 손가락으로 도-미-솔-도의
C코드를 짚은 뒤 엄지를 손바닥 아래로 밀어넣어 1옥타브 위의 미를 짚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튜브 등지에서는 극악한 난이도의 피아노곡 동영상이 올라올 때
댓글에 종종 '라흐마니노프 사이즈의 손만이 칠 수 있다'는 말이 종종 보인다.
그렇기에 그 라흐마니노프의 큰 손을 주제로 하는 이런 연주 겸 콩트도 있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라흐마니노프가 인기를 끈 이유가 '큰 손'뿐만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크고 유연한 손으로 구사할 수 있는 기교 테크닉적 완성도'와 '큰 몸으로
낼 수 있는 크고 웅장한 소리' 등 여러 가지 복합적 요소가 있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 작곡가로서 본인의 곡을 본인이 연주한 레코딩 전집이 남아있다.
그러나 작곡가 본인의 해석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연주자들의 해석이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음질은 그리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1920년대의 피아노 곡에 이 정도의 음질이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보다 좋은 음질의 연주를 찾고 싶다면 연주가 녹음된 자동피아노에서 롤 형태의
천공 카드를 재생시킨 버전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임의의 편집이 가능한 피아노롤은 정직하지 못한 매체라는 인식이 강했고
실제로 왜곡이 많이 이루어졌으니 걸러 들을 것.
위에도 언급되었듯이 본인의 연주는 현재의 해석된 연주보다 훨씬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198cm나 되는 거대한 신체에서 나오는 매우 긴 팔과 30cm를 넘는 넓고
두툼한 손의 소유자로 작곡가 본인의 사기적인 신체 스펙이 반영되어 있다.
10도 이상으로 손을 찢으며 건반을 4개 이상을 누르는 옥타브와 굳이 넣지 않아도
됐을 음표가 떡칠되어 있고, 이 모든 것을 모두 물 흐르듯이 표현해야 한다.
이러니 솔직히 말해 아무리 타고난 테크닉과 센스가 있어도 신체적 스펙이
받쳐주질 않으면 친다 해도 한계가 들린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기교를 자랑하기 위해서
이렇게 어려운 곡들을 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과시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였고 그의 녹음을 들어보면 그 어떤 어려운 패시지도
산만하게 들릴 정도로 간단하게 흘려보낸다.
심지어 그 악명 높은 3번 협주곡조차도! 따라서 이는 그냥 천재의 무심함의 산물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면모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3번 협주곡의 작곡 일화인데, 자신이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사랑하는 친구인 요제프 호프만를 위해 3번을 선물/헌정했으나
호프만의 손이 옥타브를 겨우 짚을 정도로 작다는 것을 전혀 배려하지 못했다.
문서 전체에서 피아노 곡 위주로 서술되었지만, 여러 다른 악기들을 이용한 작곡도 많이 했다.
그와 함께 낭만시대 피아노의 거장 취급을 받는 프레데리크 쇼팽이나
프란츠 리스트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작곡 스타일도 다양해서, 현악사중주 1번의 2악장 스케르초는 많은 대표적인 작품들이
대체로 암울하고 어두운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고 발랄하다.
현악사중주 1번은 1, 2악장 모두가 명곡이니,
그의 초기곡들을 듣고 싶다면 찾아서 들어보는 것도 좋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관통하는 주제에는 크게 종교(종소리)와 우울증(죽음),
그리고 러시아가 있다. 라흐마니노프 스스로가 어렸을 때 정교회의 예배나
니주니-노브고르드 성당에서 들었던 종소리에 영감을 받았다고 했었고..
그의 작품들 대부분이 - 피아노협주곡 2번 1악장의 도입부 특유의 피아노 타건과
합창교향곡 "종", 전주곡 3-2 등 교회의 종소리와 정교회의 엄숙함이 짙게 묻어나온다.
기악곡에 묻어나오는 종교적 색채 외에도 종교에 관련한 작품도 많이 작곡했다.
우울증은 앞에서 언급했던 교향곡 1번의 혹평으로 3년간 슬럼프인 것도 있지만 지주였으나
방탕한 삶을 살아 가정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와 평소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
슬럼프 시기에 사촌이랑 결혼한 것에 대한 정교회의 비난 등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환경에서
심적으로 억누르는 요소가 정말 많았다.
또한 조국이 소비에트 혁명에 휩싸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고 그는 죽을 때까지 조국을 그리워했다.
조국을 떠난 후 했던 인터뷰나 평소의 의식주도 그렇지만 음악적으로도 '러시아인다웠다'고.
그가 망명 후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4번과 그의 마지막 작품 "교향적 무곡(춤곡)"에서는
러시아 특유의 서정성을 지울 수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요소들이 작곡가가 명곡을 뽑아내는 밑거름이 되었지만...
이 외에도 작품관을 관통하는 또 다른 요소로는, 그레고리안 성가 중 진노의 날의 동기가 존재한다.
그의 많은 작품이 이 동기를 내포하거나 모티프로 사용한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 1번, 피아노 협주곡 2, 3번, 파가니니의 주제에 대한 광시곡, 전주곡 op.32
no.4, 죽음의 섬, 교향곡 3곡 전부, 교항적 무곡 3번 등 매우 많은 곡에서 이 동기를 사용하였다.
이 중, 죽음의 섬과 교향적 무곡 3번은 아예 이 동기를 주선율로 삼아 곡을 완성시킨다.
2011년에 호주의 라임라이트 매거진이 현존하는 유명 피아니스트 100인에게
(그리고리 소콜로프, 안드라스 쉬프, 알프레드 브렌델, 등) 자신들의 우상을 뽑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1위를 했다. (2위부터 5위까지 호로비츠, 리히터,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에밀 길렐스).
생애 전반과 사후 몇십년간 끊임없이 비판과 저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살롱 음악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했고
진보적인 성향의 인물들은 과거의 작곡법을 답습하기만 했을 뿐
그 어떤 음악적 발전도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기법적인 저평가도 무조음악을 필두로 실험적인 기법이 심화되던
근대 클래식 기준으로만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다.
라흐마니노프의 활동 시기에는 인상주의 사조도 겹쳐 있고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원 동기 스크리아빈이 구축했던 조성과 무조성 사이의 독자적인
어법의 영향이 분명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도 없지 않고 재즈가 태동하기도 했으며
거슈윈처럼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케이스도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모든 흔적을 아우르는 한편 러시아적 감성이라는 일관성 아래
너무 실험적 측면이 강조되거나 융합이 미숙해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듣기 좋은
작품 세계를 만들어냈고, 또 음악이 가볍게 들리지만은 않도록 충실한 주제 전개
기법과 비르투오소까지 갖췄다.
다른 작곡가 중에도 이렇게 양식에 국한되지 않으면서 고전미에 충실한 구성력과
현대까지 통용되는 감성을 모두 갖춘 케이스는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단지 시대적으로 눈에 띄는 혁신이 아닐 뿐이지 라흐마니노프 개인의
예술성과 그 희소성은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이를 나타내듯 대중적으로는 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널리 사랑받는 편이었으며
음악학자들의 냉담한 평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한 70년대 이래로는 많이 나아진 편.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은 인터뷰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매우 긴
시간 동안, 또는 영원히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런저런 평과 별개로 라흐마니노프 스스로는 개작도 자주 할 만큼
자신의 작품에 쉽게 만족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특히 그의 많은 작품에서 나오는 중반부의 다소 장황한 전개가 스스로도 컴플렉스였는지
원래 평이 좋았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너무 축소했다가 역효과가 난 사례도 있고
대표작 중 하나인 교향곡 2번도 아예 삭제 연주 관행을 용인해주었다.
증손자가 현 룩셈부르크의 총리인 그자비에 베텔이다. 베텔의 어머니가 러시아계 프랑스인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당대의 몇몇 연주자들처럼 그의 베히슈타인 피아노를 대동하고 다녔는데
1911년 조지아에서 연주회가 끝나고 당시 러시아 왕립 음악원 조지아 분원장이자 그의 팬이었던
스테판 미르조예프가 기념으로 피아노를 자기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해 그에게 넘겨주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예술이 부르주아의 사치로 여겨져 박해를 받자생활이 곤궁해진
미르조예프는 라흐마니노프의 베히슈타인을 2만 5천 루블에 조지아 콘서바토리에 넘겼다.
볼셰비키는 미국으로 망명한 라흐마니노프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여 그의
흔적은 무엇이든 파괴하려 들었지만 이 피아노의 존재는 다행히 알지 못했고
오늘날 조지아 박물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베히슈타인 피아노가 전시되고 있다.
한편 그 뒤 새 피아노를 구입한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내 와이프와
내 소중한 블뤼트너 피아노, 이 둘만 가져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유독 대한민국에서 대단히 인기 있는 작곡가다. 라흐마니노프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작곡가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 특히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와 비교해 봤을 때도 우리나라에서 연주 빈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나무위키에도 상당히 많은 문서들이 작성되어 있는 작곡가다.
형식과 전개가 훌륭한 곡보다 전개가 산만하더라도 선율 자체를 중요시하는 한국
음악팬들의 취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선율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가 대한민국에서 인기가 많은 것과도 상통한다.
다만 차이코프스키는 형식과 구조적 완성도도 훌륭한 작곡가이며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작곡가다. 그리고 이름이 꽤 길다 보니
'라흐', 'Rach' 등으로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1917년에 망명가기 전까지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은 거의 자작곡 연주가 전부였다고 한다.
망명 이후 생계문제 때문에 사실상의 전업 피아니스트로 전향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