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미술관에 있는
카페
현대미술전이 펼쳐지는 1•2관,
단원콘텐츠관인 3관,
그리고 아동들을 위한 상상미술공장 등
4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김홍도미술관
현대미술전이 펼쳐지는
김홍도미술관 1관
현대미술전이 펼쳐지는
김홍도미술관 1관
입장권(4천원)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내용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작품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작품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작품 출품 작가 중 한 명인
강상우 작가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작품 출품 작가 중 한 명인
조가연 작가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작품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작품
비고에 관한 안내문
비고의 영상물
비고의 영상물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작품 출품 작가 중 한 명인
김선영 작가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미술관 1관의
김선영 작가 작품
김홍도미술관 1관의
김선영 작가 작품
김홍도미술관 1관의
전시 작품 출품 작가 중 한 명인
구수현 작가에 관한
안내문
구수현 작가의 작품
구수현 작가의 작품
김홍도미술관의
전시 작품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미술관의
상상미술공장
김홍도미술관의 2관
김홍도미술관의 2관에서 전시 중인
안산시 기증 작가 작품전
안산시 기증 작가인
故 성백주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미술관의
2관 전시작품
김홍도미술관의
2관 전시작품
안산시 기증 작가인
故 장성순의
영상물
안산시 기증 작가인
故 장성순의
기증 작품
故 장성순 작가에 관한
안내문
안산시 기증 작가인
故 장성순의
기증 작품
김홍도미술관의
상상미술공장
상상미술공장
김홍도의 진본 작품과 영인본 작품이
전시 중인
김홍도미술관의 3관
김홍도미술관 안내도
김홍도미술관의 3관
전시내용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에 관한
안내문
김홍도의
소나무 아래 호랑이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당대 최고의 화가 심사정과 최북, 김홍도가 그림을 그렸고 강세황이 그림의 구도를 기획했다. 허필은 발문을 적었다.]
18세기 지방 문화의 중심지였던
안산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영상물
김홍도미술관의 소장품
[김홍도의 작품 진본 7점을 보유하고 있다.]
김홍도의 진본 작품인
[사슴과 동자]
중국의 신선 중 대표격인
팔선八仙 중 한 사람으로
가장 인기 있는
여동빈을 그린
여동빈도(呂洞賓圖)
팔가조도((八哥鳥圖)
단원의 그림 중
과거 시험장을 다룬 유일한 작품인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구름이 깊은 산속,
폭포와 노송 아래 자리 잡은
고사들의 풍류를 선면에 그려
운치를 더한 작품인
임수간운도(臨水看雲圖)
신광사 가는 길
단원 김홍도에 관한
안내문
세상이 놀란
김홍도의 재주
신언인도(愼言人圖)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행려풍속도〉 병풍
25점의 〈풍속화첩〉 중
8점
25점의 〈풍속화첩〉 중
8점에 관한
안내문
신선도를 많이 그린
김홍도
국보 제139호로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
신선과 사슴
정조(正祖, 1752~1800)가 수원 화성을 방문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서울로 귀환하는
모습을 그린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과 관동8경을 그리게 된
김홍도
[오른쪽 그림이 해동명산도첩]
해동명산도첩에 관한
안내문
마음으로 산수화를 그린
김홍도
단양8경을 그린
김홍도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
조어산수도
춘작보희도
김홍도미술관 앞의
조각작품들
2024년01월20일(토요일) 안산시 [안산갈대습지공원&노적봉 폭포공원&김홍도 미술관&안산 산업역사박물관&경기도 미술관&안산 화랑공원&안산 호수공원] 탐방기 탐방지 : 안산시 안산갈대습지공원 [안산 갈대습지는 시화호의 수질개선을 위해 조성한 국내 최초의 인공 습지로서 1997년 착공하여 2005년 12월 완공한 이 공원은 본래 ‘시화호습지공원’으로 불렸으나, 2014년 4월 관할 주체가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안산시와 화성시로 나뉘어 넘어가면서, 안산시 쪽과 화성시 쪽을 각각 안산갈대습지공원과 비봉습지공원으로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2014년부터 안산갈대습지공원의 람사르 습지 등재를 추진하는 등, 이 공원은 시화호 생태계 회복을 보여주는 척도 역할을 하고 있다. * 문의 : 031-599-9400 * 개장시간 : (동절기 11~2월) 10:00~16:30 / (하절기 3~10월) 10:00~18:00 * 휴무일 : 매주 월요일 * 관련 홈페이지 : https://wetland.ansan.go.kr/index.php ◎이용안내 - 이용요금 : 무료 - 화장실 : 있음(남녀공용) - 장애인 편의시설 : 장애인화장실 있음(남녀공용) - 주차시설 : 있음 ] 탐방코스: [안산갈대습지 버스 정류장~안산갈대습지공원 입구~안산갈대습지~안산갈대습지공원 입구~그랑시티자이 214동 앞 버스 정류장] 탐방일 : 2024년 01월 20일(토요일) 날씨 : 구름이 낀 날씨 [안산시 상록구 : 최저기온 3도C, 최고기온 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6분 소요) 08:26~10:04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삼각지역으로 가서 4호선으로 환승하여 중앙역으로 간 후 중앙역 1번 출구로 이동 [1시간38분 소요] 10:04~10:37 중앙역 1번 출구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안산갈대습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80B 버스 승차 대기 10:37~11:04 중앙역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80B 버스를 타고 안산갈대습지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7분, 11개 정류장 이동] 11:04~11:14 경기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는 안산갈대습지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안산갈대습지공원 입구로 이동 11:14~11:27 안산 9경 중 제7경인 안산갈대습지로 이동 11:27~11:40 안산갈대습지공원 입구로 회귀 11:40~11:50 경기 안산시 상록구 사동에 있는 그랑시티자이 214동 앞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안산갈대습지 탐방을 완료 11:50~11:52 그랑시티자이 214동 앞 버스 정류장에서 안산 시외버스터미널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50번 버스 승차 대기 11:52~12:24 50번 버스를 타고 그랑시티자이 214동 앞 버스 정류장에서 안산 시외버스터미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32분 소요] 탐방지 : 안산시 [노적봉 폭포공원 & 김홍도 미술관] [노적봉공원은 안산 시내로 진입하는 관문에 있는 도시자연공원으로 노적봉 정상에 서면 안산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정상에서 보는 서해 낙조는 절경 중의 절경이다. 이 산의 지맥은 수리산에서 떨어진 낙맥으로 안산읍지의 청룡말미에 해당하는데 산의 모양이 노적가리를 쌓아 놓은 듯하다 하여 노적봉이라 불리었다. 노적봉공원은 순환로가 조성되어 산책을 즐기기에 좋으며, 주요시설인 인공폭포는 인조암으로 조성된 뒤 1,900개의 자연석으로 재공사하여 2단 계류식 자연석 폭포로 재탄생하였다. 이와 함께 장미원과 철쭉원 등을 갖추고 있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으며, 다양한 편의시설과 볼거리 등으로 안산시민의 여가 활용 공간으로서뿐만 아니라 안산시의 도시 상징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노적봉 공원과 이어지는 김홍도 테마길은 안산을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성포동 일원을 테마길로 조성해서 이곳을 따라 둘레길을 산책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곳이다. 김홍도미술관 - 노적봉공원 - 성호공원 - 청문당 - 점성공원 - 단원조각공원으로 이어지는 테마길은 산책하기 좋은 안산시의 둘레길 명소이다.] 탐방코스: [안산 시외버스터미널 버스 정류장~(821m)~김홍도 미술관(단원 미술관)~(450m)~노적봉 폭포공원 상록광장~(53m)~단원 광장~(108m)~철쭉원~(207m)~장미광장~(258m)~노적봉 폭포공원 상록광장~(450m)~김홍도 미술관(단원 미술관)] (이동거리 : 2,347m) 탐방일 : 2024년 01월 20일(토요일) 날씨 : 구름이 낀 날씨 [안산시 상록구 : 최저기온 3도C, 최고기온 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5분 소요) 12:24~12:33 안산 시외버스터미널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경기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 422 번지에 있는 김홍도미술관(단원 미술관)으로 이동 12:33~12:37 경기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709 번지에 있는 노적봉 폭포공원 상록광장으로 이동 12:37~12:47 [노적봉 폭포공원 상록광장~단원 광장~철쭉원~장미광장~노적봉 폭포공원 상록광장]의 동선으로 안산 9경 중 제9경인 노적봉 폭포공원을 탐방 [노적봉 폭포 가동기간 : 4월~10월 가동시간 : 9시~18시 폭포 가동시간 : 45분 폭포 정지시간 : 15분] 12:47~12:51 경기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 422 번지에 있는 김홍도미술관(단원 미술관)으로 회귀 [김홍도미술관 : 조선후기 화원이었던 단원 김홍도 기념미술관. 소재지 : 경기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 422 번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에 위치하며 미술관 대지면적은 11,315㎡, 건축면적은 2,717㎡이다. 단원 김홍도의 영인본(影印本)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원이었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7~8세부터 약 20세가 될 때까지 안산에서 살았다. 스승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안산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집에 기거하며 그림과 글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김홍도가 안산에 살았던 인연으로 이곳에 미술관이 세워졌다. 김홍도는 풍속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에도 매우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20대 초반에 도화서 화원으로 발탁되어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초상화(어진)를 그렸다. 이후 만년에는 소박한 서민들의 삶을 표현하는 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의 풍속화들은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조선후기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술관 명칭은 설립 당시 단원미술관이었다가, 2022년 3월 김홍도미술관으로 변경되었다. 건물은 모두 네 동. 현대미술전이 펼쳐지는 1•2관, 단원콘텐츠관인 3관, 그리고 아동들을 위한 상상미술공장으로 구성했다. 너른 뜰엔 조각 작품도 많다. 이용요금 : 무료 이용시간 : 10:00~18:00(입장마감 17:00) *마감시간은 전시별로 상이할 수 있다.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추석 당일] [소년 김홍도의 족적, 미술관으로 서다 브라보마이라이프 기사입력 2023-01-06 09:29 기사수정 2023-01-06 09:29 박원식 객원기자 [감성 솔솔! 미술관 여기] 김홍도미술관 경기도 안산이냐, 서울 마포냐, 단원 김홍도의 고향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고증이 없어 미지수다. 그런데 단원이 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할 만한 단서가 있다. 안산은 18세기 조선 예원(藝苑)의 총수였던 표암 강세황이 30여 년을 머문 고장이다. 표암의 시문집 ‘표암유고’에 단원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가령 ‘단원은 젖니를 갈 때부터 나의 집을 드나들었다’고 했다. 일찍이 맺어진 표암과 단원의 사제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단원을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 일컬은 이도 표암이었다. 정황이 이러니 안산 사람들은 뿌듯하다. 안산의 풍토와 풍정이 표암의 가르침과 함께 단원을 거목으로 길러냈다고 보기에. 안산시가 김홍도미술관을 만든 연유가 완연하다. 김홍도미술관은 안산시 외곽 노적봉 기슭에 있다. 야산 치맛자락을 거머쥔 형국이다. 노적봉 산책과 미술 관람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입지다. 건물은 모두 네 동. 현대미술전이 펼쳐지는 1•2관, 단원콘텐츠관인 3관, 그리고 아동들을 위한 상상미술공장으로 구성했다. 너른 뜰엔 조각 작품도 많다. 전체적으로 독특할 것 없는 구색이지만 미술 작품으로 얼마든지 활갯짓할 수 있는 공간이라 훤칠하다. 뒷산의 수목들은 제법 울창해 조연으로 손색없다. 산기(山氣)를 싣고 스쳐가는 청명한 바람과, 연달아 착륙하는 햇살의 대열도 도회를 벗어난 관람객에겐 반가운 작품이다. 미술관 입구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다. 단원콘텐츠관으로 들어간다. 이렇다 할 꾸밈과 치레 없이 간결한 전시관이다. 김홍도미술관의 핵심 공간이다. 단원의 광활한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기획한 콘텐츠 전시가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년 김홍도, 노적봉에서 세상을 담다’전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 때 안산에 있었던 단원이라는 이름의 숲과 서호(西湖) 바다를 모티브로 한 전람회로, 단원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안산의 옛 풍경을 상상해보게 하는 전시회다. 어물 장수나 고기잡이 풍속을 그린 단원의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단원이 교유한 표암, 심사정, 최북의 작품도 있다. 단원의 예술 정신을 현대적 관점에서 풀어낸 애니메이션과 미디어아트도 등장해 볼거리를 확대했다. 안산의 고지도를 전시한 건 관객을 과거의 안산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일 테다. 흥미롭기론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다. 아집도? 아집은 아회(雅會)와 같은 말로 묵객들이 모여 시와 술을 나누며 노니는 야유회다. 그걸 그린 게 아집도다. 즉 ‘균와’라는 산골짝에 화가 여럿이 모여 소풍을 즐기는 광경을 그린 게 ‘균와아집도’다. 때는 1763년 4월. 봇물처럼 터진 춘색이 영롱해 어지러웠으리라. 봄꽃 필 때 묵객은 유난한 ‘심쿵’으로 설렌다. 산야에서 작당해 꽃과 더불어 한잔 아니 마실 수 없다. 모인 이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그림 상단 오른편에 쓰인 발문에 다 나온다. 보자.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 강세황이다. 그 곁엔 어린 김덕형이 있다. 담뱃대를 물고 앉은 이는 현재 심사정이다. 차건을 쓰고 바둑을 두는 이는 호생관 최북이며, 퉁소를 부는 사람은 단원 김홍도다.’ 등장인물 모두 안산과 연이 깊었더란다. 다들 일세를 풍미한 거장이다. ‘균와아집도’는 조선 후기 묵객들의 놀이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준다. 단원이 퉁소를 불고, 강세황이 거문고를 탔으니 고급스러운 피크닉이다. 일행이 한자리에 모여 그린 합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이채로워 우뚝하다. 학자이자 서화가인 허필이 쓴 발문의 귀띔에 따르면 그림의 전체 구도를 잡은 건 표암이다. 능란한 필치로 휘늘어진 솔과 옹골찬 바위를 그려 담황색을 입힌 건 심사정과 최북이다. 당시 19세였던 단원은 가는 붓을 날렵한 속필로 휘저어 인물들을 묘사했다. 10대 청년이던 단원이 대가들과 어울려 붓을 적셨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단원의 예술적 기량이 일찍부터 수승한 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쉬운 건 전시장에 나온 작품 전부가 영인본이라는 점이다. 애초 단원의 진본 작품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으나 빗나갔다. 단원의 현존하는 그림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파악하기 어려운 개인 소장 작품을 빼더라도 300점이 넘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이 다수를 소장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신선의 무리를 그린 ‘군선도 병풍’(群仙圖 屛風, 국보 제139호)을 소장했다. 안산시도 7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김홍도미술관이 2년마다 펼치는 진본 기획전을 통해 공개된다. 2021년엔 ‘표암과 단원’전을 열어 진본들을 전시했다. 진본 가운데 ‘공원춘효도’는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의 풍속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신기루처럼 미묘한 매화를 그려 단원 김홍도는 조선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이름을 들날린 화가다. 그의 돛을 밀어준 건 표암이었다. 인생의 눈을 트이게 하고 예술의 길을 열어준 이가 표암이었다. 단원을 궁중 화가로 천거한 이도 표암인데 단원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표암이 괜한 선심을 베풀었으랴. 그는 일찌감치 단원의 됨됨이와 천재성을 발견했다. 단원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용을 보았다. 표암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써 단원을 극찬했다. ‘단원의 화풍은 새로워 개벽을 이룰 정도다.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저마다 부르짖었다. 그림을 구하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단원이 잠을 자고 밥을 먹을 겨를이 없을 지경이다.’ 나는 모자라 단원에 대해 아는 게 드물다. 그럼에도 김홍도미술관을 관람하며 그의 아우라가 허공에 감도는 것 같은 환(幻)을 느낀다. 전시작이 많지 않아 단원이 항해한 예술의 바다에 풍덩 빠졌다 나온 기분을 맛보긴 어렵다. 다만 단원의 옷깃에 살랑대는 실바람 한 오라기를 움켜쥔 느낌이다. 생각나는 건 언젠가 화첩에서 본 단원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가 불러일으킨 쓸쓸한 정취다. 주상관매라, 배 위에서 매화를 보다! 단원은 매화 마니아였다. 매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매화를 가슴에 담았으니 생애엔 매향이 난분분? 단원은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주상관매도’의 매화는 어이 아득한 허공에 떠 우련한가. 백일몽처럼, 신기루처럼 미묘한 매화를 그렸다. 천길 벼랑에 걸린 매화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엔 강물이 있지만, 뿌연 안개처럼 경계 없이 흐릿하게 그려 천하가 아득하다. 강기슭에 멈춘 조각배에 비스듬히 앉아 매화를 지켜보고 있는 노인의 모습엔 우수가 실려 있다. 초연하다기보다 쓸쓸한 기색이 여실하다. 노경이란 외로워 매화마저 무상감을 돋운다는 걸까? 이 그림은 단원의 노년기 작품이다. 이상을 좇는 열정보다 허무의 성분이 커진 시절에 그렸다. 말년의 단원은 곤궁했다. 정조가 붕어하면서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됐다. 가세가 기울어 고달프게 살았다. 단원의 종신(終身)은 미스터리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전해오는 게 없다. 작품이야 불멸! 그가 그림 안에 가둔 자연과 인간사의 총량은 장강(長江)과 맞먹는다. 대중 요구에 부응하는 기획전으로 전진 정미영 김홍도미술관 문화예술교육사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와 입체파 창시자 피카소. 둘은 사제지간이었다. 마티스는 일찍이 피카소의 천재성을 읽어 지지와 조언을 했고, 피카소는 마티스를 평생 따랐다.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 이 조선의 커플 역시 사제지간으로, 예술적 동지로, 지음(知音)으로 평생 교유했다. 정미영 김홍도미술관 문화예술교육사의 얘기는 이렇다. “복 중의 복은 인연 복이라 하는데, 단원이 표암 강세황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최고의 스승을 만났으니까. 작품 하나를 완성하면 단원은 흔히 표암에게 먼저 보여줬고, 표암은 강평을 해주었다.” 단원이 표암으로부터 화풍의 영향도 받았나? “단원이 그 누군가에게 화풍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없는 걸로 알려졌다. 표암은 정신적 스승으로서 단원을 북돋았던 셈이다. 단원은 천재였다. 게다가 못 말릴 노력파였다. 부단한 노력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거다.” 단원은 풍속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사회의식도 호감을 산다. “안산시가 소장한 단원의 진본 7점 중 하나인 ‘공원춘효도’에도 사회의식이 드러난다. 과거제도에 만연한 부정행위를 풍자한 그림이니까. 단원의 풍속화는 30대 초반에 이미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단원의 작품 스펙트럼은 훨씬 드넓다.” 표암과 더불어 정조 임금 역시 막강한 스폰서 역할을 함으로써 단원의 순항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단원이 표암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됐다고 보더라. 그런데 단원의 출중한 재능을 알아본 정조가 대단한 후원을 했다.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단원이 주장하도록 하라’고 할 정도였다. 궁중 화가로서 단원은 일종의 공공그림을 그렸으나 퇴근 뒤엔 자기 그림을 그렸다. 단원의 집 문간엔 그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었다고 한다.” 단원의 성향을 알 만한 일화가 있다면? “풍류에도 일가견 있는 단원이었다. 특히 매화 사랑이 지극했다. 언젠가 한번은 단원의 그림을 원하는 이가 찾아와 작품값으로 3000전을 내놓고 갔다. 단원은 그중 2000전으로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는 술을 사 친구들과 매화를 즐기며 대작했다. ‘매화음’(梅花飮)이라는 이름의 술자리였다. 결국 남은 돈은 200전뿐이었는데, 이걸로 쌀과 장작을 사 집에 들였으나 하루 땟거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인(中人, 양반과 평민의 중간 계급) 출신인 단원의 신분 상승 욕구도 정진의 발판이었던 것 같은데. “선비가 되고 싶은 마음, 선비정신의 정상에 선 삶을 갈망하며 끝없이 노력했다. 말년에 그린 ‘포의풍류도’에 이와 같은 지향이 드러난다. 문방사우와 악기 등 갖가지 기물과 선비의 모습 등을 그린 작품이다.” ‘포의풍류도’에는 이런 화제를 붙였다. ‘종이로 만든 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지만,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고 시가나 읊조리며 살고자 한다.’ 단원의 유토피아가 구현된 그림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말년은 고단했다. “정조가 별세하면서 단원의 고난이 시작됐다. 아들의 월사금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으니까. 그러나 선비다운 태도는 끝까지 지니고 살았다. 이게 단원의 빛나는 정신이지 않을까?”] [김홍도(金弘道)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천재 화가 출생 – 사망 : 1745 ~ ?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의 글이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다 김홍도는 1745년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이다. 증조할아버지가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림과 아무 연관 없는 집에서 태어난 중인 소년이 당대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뛰어난 문인화가이자 명문사대부인 강세황에게 어떤 연유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홍도는 “젖니를 갈 때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강세황은 마흔 살 무렵으로 벼슬 없이 경기도 안산에 있는 처가에 살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김홍도가 안산 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스무 살 무렵 이미 당대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김홍도는 스무 살 이전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되어 있었던 듯하다. 1765년 영조가 71세가 되어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望八)에 이른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고 이를 위해 병풍을 만들었는데,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한 김홍도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로 임금의 큰 잔치 그림을 홀로 그렸다는 것은 당대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773년 스물아홉의 김홍도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그림 인생에 중요한 인연을 또 한 사람 만난다. 뒷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은 당시 김홍도의 솜씨가 썩 마음에 들었다. 뒷날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이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화사(畵事)에 속한 일은 김홍도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듯이 이후 정조는 김홍도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후원자가 된다. 영조의 초상화를 그린 김홍도는 그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 사포서(司圃署)의 감목관(監牧官)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마침 두 달 뒤 스승 강세황이 사포서의 별제로 발령을 받아 사제지간이 함께 근무했다. 이때의 일에 대해 강세황은 이렇게 회상했다. “일찍이 군과 더불어 사포서의 동료가 되었을 때, 매번 일이 있으면 군이 나의 노쇠함을 딱하게 여겨 바로 힘든 일을 대신했으니, 이는 내가 더욱 잊을 수 없는 바이다.” 삼십 대에 김홍도는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는 말이 전할 만큼 그림으로 높은 이름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 가운데서도 풍속화는 인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각 장면의 극적인 구성이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하는 백성들이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거나 집을 짓는 장인들, 밭을 갈고 꼴을 베는 사람, 물을 긷고 빨래하는 사람, 장사하는 상인들의 모습 등 서민들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그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현감의 자리에 오르기도 김홍도는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았다. 그에 대해 강세황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벼슬살이를 하고 돌아온 40대의 김홍도는 화조화, 기록화 등을 주로 그렸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 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렸고, 그 이듬해 사신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모시며 현륭원을 건설할 때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의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해, 조선 후기 불화의 명작 중 하나를 남기기도 했다. 입체감을 나타내는 음영을 넣어 독특하게 표현한 이 불화들은 기존의 화풍을 뛰어넘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만 3년 뒤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파직됐다. 백성들 중매를 해주던 인간적 관리였으나 행정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현감 자리를 내주고 평민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자유롭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전념해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명작들을 쏟아냈다. 50대에 이른 김홍도의 그림들은 보다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대담한 생략과 거침없는 붓길이 대가다운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시기의 대표작들은 [해산선학도], [마산청앵도], [세마도] 들이다. 아름다운 풍채가 신선 같았다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서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낭만적인 예술가였지 생활력 있는 가장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김홍도는 매우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증언도 있고,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도 즐겨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 한두 곡을 연주하며 스스로 즐겼고, 즉석에서 한시를 남길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갖고 있었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두 살이던 1806년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현재 300점 정도의 작품이 전한다.] [김홍도의 대표 작품으로 《군선도병풍》, 《풍속화첩》, 《투견도》, 《소림명월도》,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옥순봉도(玉筍峰圖)》 등이 있다. 김홍도 <군선도> (1776년) : 국보 제139호, 호암미술관 소장, 서른두 살 때 그린 병풍 그림. 신선이 신선동자를 데리고 서왕모의 생신잔치에 가는 모습을 그렸다. 1971년 12월 21일에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도석인물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도석인물화란 불교나 도교에 관계된 초자연적인 인물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원래는 8폭의 연결된 병풍그림이었으나 지금은 8폭이 3개의 족자로 분리되어 있다. 이 그림은 모두 연결한 상태에서 가로 575.8㎝, 세로 132.8㎝의 크기이며, 그것이 분리된 3개의 족자는 가로 48.8㎝, 세로 28㎝ 내외이다. 종이 바탕에 먹을 주로 사용하고 청색, 갈색, 주홍색 등을 곁들여 채색하였다. 여기서 묘사된 신선들의 명칭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른쪽에 외뿔소를 타고 도덕경을 들고 있는 노자를 선두로 복숭아를 든 동방삭 등의 신선들과 동자들이 모두 3무리로 나뉘어 있다. 선학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제1군의 10명 중, 붓을 들고 두루마리에 글을 쓰는 인물은 문창, 복숭아를 든 소년은 동방삭, 푸른 소를 탄 도인은 노자이다. 제2군의 6명 중 대나무 통처럼 생긴 어고간자를 든 젊은이는 한상자, 딱따기(박판)를 치는 인물은 조국구, 나귀를 거꾸로 탄 노인은 장과로이다. 제3군에서 호미를 든 여인이 하선고, 복숭아를 진 여인이 마고이다. 김홍도는 각 신선의 도상을 충실하게 지키되 이들을 자유롭게 재구성하여 19인의 형상에 활기찬 생명력을 부여했다. 10, 6, 3으로 축소되는 인물군과 그들의 다양한 동세, 밀착된 군상을 안배한 여백, 그리고 무배경 처리. 이는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김홍도만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19명의 신선은 진귀한 물건을 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시 곤륜산에 머물고 있다는 서왕모(불로장생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불로장생을 꿈꾸는 이들과 신선도 수행자들에게 깊은 숭배를 받아온 선인들을 다스리는 최고위 지위에 있는 신)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것은 아닐까. 김홍도가 재현한 군선의 당당한 자태를 보면서, 일간지의 카피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개성과 조화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신선, 포스가 장난 아니네’. 인물들의 시선과 옷자락이 모두 왼쪽을 향하고 있고 그 방향으로 갈수록 인물의 수를 점차 줄어들게 하여 화면의 전개와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인물의 윤곽을 굵은 먹선으로 빠르고 활달하게 묘사한 뒤 얼굴과 손, 물건들은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처리하여 인물들의 표정을 살렸다. 아무런 배경 없이 인물을 나열한 구성과 감정이 살아 있는 듯한 인물들의 묘사, 그리고 얼굴의 둥근 눈매 등은 그의 풍속인물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비록 화본에 따라 그렸으나 호방한 필치로 독특한 인물묘사를 한 작품이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후에 김득신, 이명기 등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신선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풍속화 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풍속화는 거의 대부분 그가 30대에 그린 것이다. 그의 풍속화는 그가 34세인 1778년 그린 8폭의 〈행려풍속도〉 병풍과 30대 중후반에 그린 25점의 〈풍속화첩〉(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김홍도가 풍속화에 눈뜨고 관심을 가지게 된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행려풍속도〉병풍은 강세황이 각 폭마다 그림을 설명한 평을 써넣었고, 비단 위에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섬세하게 농어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행려풍속도〉는 필력과 화면의 짜임새가 미숙한 대로 흑립을 쓴 선비와 관료, 머슴과 농어부들의 생활상 등 일상 속에서 흔한 소재로 현장감 있는 배경처리와 함께 회화적으로 이끌어내려한 김홍도의 의욕이 배어있다. 〈행려풍속도〉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인물 소묘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풍속화첩〉이 있다. 한 폭의 크기는 27.0X22.7cm이고 전체 25점으로 꾸며진 이 화첩은 정확한 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물들의 묘사기법과 필치로 볼 때 30대 후반 작품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풍속화첩〉는 배경을 생략하고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본격적인 풍속 그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투견도 조선 말기에 화원이 그린 그림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린 이를 몰라서 아직까지 '작자作者 미상未詳'으로 남아 있는 그림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투견도鬪犬圖> 또는 <맹견도猛犬圖>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이 그림 제목을 <투견도>로, 그리고 다른 명칭으로 <김홍도 필 투견도>라고 기재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 인정하는 데도 불구하고 관련 학계나 전문가들은 거의 작자 미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고희동의 술회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1886~1965)은 1910년대에 서울 북촌의 한 고가古家(지은 지 오래된 집)에서 이 그림은 처음 발견하고서, 우리나라 동양화를 이끌던 선배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등 셋이서 이 그림을 감식했다. 당시 우리나라 동서양화단을 좌지우지하던 세 화가의 감식 결과 이만한 작품은 단원 김홍도나 그릴 수 있다고 결론 내리면서, 세 사람은 이 그림에 단원 김홍도의 가짜 주문방인朱文方印을 찍어서 화상畫商에 팔아넘긴 돈으로 여러 날 같이 호음豪飮했다고 고희동이 술회한 것이다. 그 후 이 그림을 이왕가李王家에서 사들일 때에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인정했다고 하는데, 이는 세 사람이 만들어 찍은 '사능士能'과 '김홍도金弘道'의 가짜 주문방인 때문이었다(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에는 주문방인이 보이지 않는다). <투견도>는 생동감 넘치는 정확힌 필묵筆墨(붓과 먹)의 묘妙로 보건대 단원의 그림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화기畵技(그림 그리는 기술)인 것은 분명하지만, 작품 주제인 개 자체가 서양개일 뿐만 아니라, 음영 표현이나 구도가 서양화의 기법인 요철법으로서 단원풍의 선묘線描(선을 그리는 기법)보다는 묵법墨法(먹을 칠하는 기법)이 강한 것으로 보아 단원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다.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 단원이 평생 남긴 작품들 중에서「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만큼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없다. ‘성긴 숲에 걸린 밝은 달’이란 뜻이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숲에서 달 뜨는 걸 본 사람은 안다. 그 허황하면서도 소연한 분위기를 말이다. 소림명월도는 저밀도의 감흥, 즉 성긴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명품이다. 이 그림은 나무와 달만 등장하는 순전한 무언극이다.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은 이 무대는 소박하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기막히게 우려내고 있다.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는 김홍도의 단 폭 그림 중에서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세로 164cm에 가로 76cm나 된다. 그럼에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대상은 적게 그리고, 여백은 넓게 남겨 둔 특이한 구성 때문이다. 실제 그림을 보면 화폭에 그린 그림은 전체 종이의 일부분밖에 되지 않는다. 간결하다 못해 덜 그린 것 같은 모습이다. 주인공 두 사람이 조각배에서 술상을 앞에 두고 비스듬히 몸을 젖혀 강물 건너편 벼랑 위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고 있다. 차림새로 보아 붉은 빛 옷을 입은 이는 자연을 즐기러 나온 선비로 보이고, 한 사람은 선비를 모시고 나온 인물로 보인다. 선비가 바라보고 있는 꽃나무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좋아하던 매화이다. 선비와 매화의 거리가 멀진 않지만 안개가 둘러싸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꽃이나 사람과 강이 모두 하나가 되어 말 그대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다. 그림 중간에 화제가 적혀 있는데 “노년에 보는 꽃은 안개 속인 듯 희뿌옇게 보이누나(老年花似霧中看)”라는 내용이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 ‘한식날 배 위에서 짓다(小寒食舟中作)‘에 나오는 한 구절을 따왔다. 두보가 59세의 나이로 죽던 바로 그 해에 쓴 시로, 만년의 고독하고 쓸쓸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 속의 인물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구절이다. 이를 보면 배위의 노인은 만년의 두보이면서, 만년의 김홍도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김홍도는 시조를 한 편 남기기도 하였는데 “봄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아래 물이로다/ 이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속인가 하노라”라는 내용이다. 이 또한 ’주상관매도‘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소동파(蘇東坡)가 왕유(王維)의 시와 그림을 보고 했다는 ’시가 그림이고, 그림이 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 그대로이다. 역시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예인이다. 그처럼 완전한 미술인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는 듯하다. 옥순봉도(玉筍峰圖) 하늘로 솟구쳐 오를 듯 굳센 모습을 가진 네, 다섯 개의 바위기둥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바위기둥 너머로는 희미하게 먼 산들이 나타나고, 돌기둥 아래쪽 물가에는 두 명의 갓을 쓴 선비들이 선유하면서 이 멋진 절경을 감상하며 담소하고 있다. 이처럼 이 그림의 주제는 명쾌하다. 멋진 명승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화면의 왼쪽 위에는 ‘병진춘사 단원(丙辰春寫 檀園)’이라는 관서와 ‘홍도(弘道)’, ‘사능(士能)’이라고 새겨진 주문방인과 백문방인이 있어 김홍도가 1796년에 제작한 것을 알려준다. 이 장면은 충청도 단양의 명승인 옥순봉을 그린 것이다. 옥순봉은 이황 이후 수많은 선비들이 방문하여 글과 시를 지었고, 18세기 이후에는 진경산수화의 유행과 함께 자주 그림으로 표현된 명승이다. 현재는 단양팔경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보통 ‘사군산수(四郡山水)’로 손꼽히던 곳이다. 사군은 단양, 제천, 청풍, 영춘 등 네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에 위치한 옥순봉, 도담 삼봉, 구담, 사인암, 삼선암, 의림지, 청풍의 금병산과 한벽루 등이 명승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홍도는 1795년 이후 충청도 연풍의 현감으로 재직한 적도 있어 이 사군산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병진년화첩》에는 옥순봉 이외에도 여러 곳의 명승이 실려 있다. 김홍도는 흔히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홍도는 산수화와 진경산수화도 자주 그렸다. 그러나 궁중에서 화원으로 봉직한 이후 그는 다양한 화제를 그렸다. 때로는 왕과 왕세자의 영정 그리고, 관념적인 산수화와 화조화 등도 그렸다. 한마디로 김홍도는 모든 화제를 잘 그린 다재다능한 화가이다. 그 가운데 진경산수화와 관련하여서는 특히 1788년 정조의 명을 받고 영동구군(嶺東九郡)에 파견되어 그 경치를 그려온 사실이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영동구군이란 관동팔경이 위치한 행정구역을 이르는 용어였다. 따라서 김홍도가 영동구군에 파견된 것은 곧 관동팔경과 금강산, 설악산 등 강원도 지역의 명승을 그리라는 임무를 받은 것을 의미한다. 김홍도는 선배화원인 김응환과 함께 이 지역의 진경을 답사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정조께 바쳤다. 이 여행은 김홍도에게 화가로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김홍도는 진경산수화를 자주 그렸고, 지금 보는 <옥순봉도>는 그 이후 김홍도가 구사한 진경산수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옥순봉이라는 주제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김홍도의 특기인 생기와 변화있는 필묘를 구사하면서 화강암봉의 모습을 세세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암봉의 중량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화면을 가득 채우는 강렬한 구성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김홍도의 <옥순봉도>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정선과 달리 강한 필세와 짙고 윤택한 먹은 사용하지 않았다. 어떠한 점에서는 현장의 사실감을 구체적, 설명적으로 묘사하려는 의지가 강하며, 정선과 같은 주관적인 인상을 강렬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다만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성방식은 정선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김홍도는 진경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특기인 필묘를 주로 하고 사실적인 인상을 성실하게 전달하는 직업화가답게 객관성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개성을 가진 화가들에 의하여 서로 다른 수법이 형성되었기에 진경산수화가 다양한 계층 및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이칭별칭 : 60폭 금강산화첩 성격 : 산수화, 실경산수화 재질 : 비단에 수묵담채 작가 : 김홍도 지역(소장처·전승지) : 개인 소장 크기 : 세로 30.4㎝, 가로 43.7㎝ 정의 : 김홍도(金弘道)가 1788년(정조 12) 정조의 어명으로 그린 화첩.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라는 명칭은 널리 알려진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나오는 ‘명사금강사군산수(命寫金剛四郡山水)’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화첩이 포함하는 지역은 4개 군(郡)뿐만 아니라 남으로 평해(平海) 월송정(越松亭)에서 북으로 안변(安邊) 가학정(駕鶴亭), 그리고 금강산 접경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사군첩(四郡帖)’이라는 명칭보다는 ‘김홍도필 금강산화첩(金弘道筆 金剛山畵帖)’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조선시대에는 ‘해산첩(海山帖)’이라고도 불렀다. 이 금강산화첩은 김홍도가 44세 때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다닌 금강산 및 관동8경 지역을 그린 것이다. 김홍도는 여행에서 그려 온 초본(草本)에 의거해 채색횡권본(彩色橫卷本)과 화첩본(畵帖本, 5권 70폭) 두 가지를 정조에게 진상했다. 그 중 횡권본은 정조가 이덕무(李德懋)와 서유구(徐有榘) 등 신하들에게 보여 주며 제화시(題畵詩)를 짓게 하기도 했으나 그 후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화첩본은 순조가 1809년(순조 9) 매제인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에게 하사하였다. 홍현주의 수장품은 나중에 아들 홍우철(洪祐喆)에게 전해졌으나 그 이후의 전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이 화첩의 제작경위와 전래상황 등에 대해서는 강세황(姜世晃)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와 「송김찰방홍도김찰방응환서(送金察訪弘道金察訪應煥序)」,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서유본(徐有本)의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홍현주의 형인 홍석주(洪奭周)와 홍길주(洪吉周)의 문집 등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동주(李東州)의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나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을 통해 ‘금강사군첩’으로 소개된 60폭으로 이루어진 화첩은 김홍도의 진작(眞作)이 아닌 임모작(臨模作 : 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린 작품)으로 판단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화풍상 두 사람의 필치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폭 금강산화첩은 뛰어난 화가가 정밀하게 임모하였기 때문에 김홍도 원작의 구도를 완벽히 보존하고 있고 화풍상의 특징도 상당히 잘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김홍도의 금강산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60폭 금강산화첩 외에도 이와 거의 유사한 40폭 금강산화첩이 전한다. 또 김홍도의 금강산화첩을 임모한 수많은 작품들이 전하고 있어 김홍도가 후대에 미친 영향을 잘 보여 준다. 강세황의 『풍악장유첩(楓岳壯遊帖)』 중 몇 폭, 이의성(李義聲)의 『해산첩(海山帖)』, 이풍익(李豊翼)의 『동유첩(東遊帖)』, 필자미상(筆者未詳)의 『금강와유첩(金剛臥遊帖)』,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과 『해산도권(海山圖卷)』 등이 그 예이다. 이상의 작품들을 상호 비교하여 검토해 보면, 김홍도의 여정과 당시에 그렸던 금강산도의 내용을 복원해 볼 수 있다. 그 결과 김홍도의 여정은 한양(漢陽)→영동 9군(嶺東 9郡)→진양(淮陽)→내금강(內金剛)→외금강(外金剛)→회양(淮陽)→한양이었고, 당시 경치를 그린 75곳 이상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강세황의 「유금강산기」에 의하면 김홍도와 김응환은 당시 각자 1백여 폭의 초본을 그렸다고 한다. 이들 내용은 장차 김홍도의 금강산도와 임모작들이 더 밝혀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김홍도의 금강산화첩 제작은 그가 생애의 후기에 개성적이고 한국적인 산수화풍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발전에 있어서 정점을 이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연녹색 나무와 풀이 싱그럽다. 탁자 위에는 몇 권의 서적과 붓통이 놓였다. 악기와 바둑판도 갖췄다. 누군가는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 것이다. 바둑을 두기 위해서 빙 둘러앉았다. 이야기꽃이 만개한다. 웃음소리 사이로 얼비치는 계곡물소리가 시원하다.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이 살랑인다.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가. 드디어 모임의 주인공들이 도착했다. 안산 터줏대감인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과 연객(烟客) 허필(1709~1768)이 먼저 자리를 잡고 손님을 기다린다. 당대 화력이 높은 현재(玄齋) 심사정(1707~1769)이 오고, 호생관(毫生館) 최북(1712~1786년경)도 왔다. 안산에서 10세 무렵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단원(檀園) 김홍도(1745~1806?)는 신입 화원이 돼 참석했다. 김덕형( 1750~?)과 추계(?~?), 균와(?~?)도 자리를 잡았다. 이 모임을 그린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는 조선 후기를 빛낸 화가들이 야외에서 모임을 갖고 기념촬영을 하듯이 남긴 작품이다.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아집도(雅集圖)' 혹은 '아회도(雅會圖)'라고 한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문사들이 풍광 좋은 곳이나 정원에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문예 활동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모임의 장소는 안산에 있는 '균와'라는 곳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 심사정과 최북, 김홍도가 그림을 그렸고 강세황이 그림의 구도를 기획했다. 허필은 발문을 적었다. 그림의 무대인 경기도 안산은 한양의 변두리 지역이다. 가문이 몰락하거나 정계에서 밀려난 유명 문인들이 안산에 자리를 잡고 문예집단을 이루었다.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의 가문 여주이씨와 강세황의 처남 유경종(1714~1784)의 가문 진주유씨가 안산 문화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안산은 '예원의 총수' 강세황이 오랫 동안 거주한 곳이다. 허필 역시 집안이 몰락하자 안산으로 내려와 강세황과 절친한 지기가 된다. 안산은 남인·소론계의 문예활동의 근거지로 유명한 화가와 문인을 배출했다. 이 모임의 회원인 심사정은 예술에 조예가 깊은 명문가 집안의 출신이다. 할아버지가 역모에 연루되는 바람에 집안이 몰락한다. 그는 그림에 의지해서 당대 유명한 학자, 화가, 감식안,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살았다. 중인 출신인 최북은 시서화에 뛰어나 심사정과 강세황, 허필 등과 고화를 감상하고 그림도 제작하는 친밀한 관계였다. 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홍도는 젊지만 이 모임에 참여할 만큼 기량이 뛰어났으며 강세황에게 신임 받는 화가였다. 13세의 김덕형과 추계가 모임의 회원이고, 균와는 신광익(申光翼·1746~?)이라는 설이 있다. '균와아집도'는 여덟 명의 회원이 멋스럽게 휘어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둘러앉은 모습이다. 주위의 풍광은 수려하다. 잘 생긴 바위틈 사이로 물이 흘러내린다. 날씨가 선선하니 야외에서 즐기기엔 적합하다. 왼쪽 화면 앞에는 김홍도가 퉁소를 불고 박자를 맞추며 거문고를 타는 이는 강세황이다. 그 옆에 어린 김덕형이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바둑을 두는 이는 최북이고 한쪽 다리를 세우고 무릎에 손을 올린 이는 허필이다. 최북과 마주앉아 긴 담뱃대를 물고 바둑을 두는 이는 추계, 오른쪽 제일 앞에 비스듬히 앉은 이는 균와다. 이 그림은 나이와 상관없이 50대와 10대가 1763년 4월10일 모임을 가진 후 합작했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진경산수화풍보다는 시적 여운과 문기가 흐르는 남종화풍으로 그렸다. 먹 선으로 옷 주름을 세밀하게 그린 인물화는 젊은 시절 김홍도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심사정이 소나무와 바위, 숲을 사실적이면서 사의적으로 그렸다. 그의 노련한 기법이 그림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채색은 최북이 맑고 고아하게 마무리했다. 오른쪽 위에 그림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 '캡션' 같은 허필의 발문이 있다. 요즘도 화가들이 모여서 전시회를 개최하면 거나하게 뒤풀이를 한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작업의 열정을 확인하며 창작의 의지를 다진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쉽게 만날 수가 없다. 그리운 화우들을 생각한다. 우리도 '균와아집도'에 모인 화가들처럼 만나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다 [출처] : 김남희 화가 :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 27.심사정·최북·김홍도 외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 퉁소 부는 김홍도·거문고 타는 강세황…조선 최고 화가들의 '풍류 모임' / 영남일보. 2021.07.23.]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화풍 비교-미술인문학 이시종 기자 이코노미 퀸 기사 승인 : 2014.07.03. 10:43 ‘마음’ vs '눈‘으로 그린 그림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화풍을 알아보는 미술인문학 강의가 지난 5월 30일 겸재 정선 기념관에서 있었다. 겸재 정선에 대한 연구에서 정평이 난 명지대학교 문화예술 대학원장 이태호 교수가 강의한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화풍 분석. 글 이선용(독문학 박사, 문화칼럼니스트sunny658@hanmail.net) “관료 출신, 감성의 화가 정선 겸재 vs. 도화서 화원 출신, 오성의 화가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1676-1759)과 단원 김홍도(1745-?)가 활동한 시기는 영, 정조 시대로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였다. 겸재는 자연 그대로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리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느낀 대로 성리학적 이상을 표현한 감성(感性)의 화가이다. 반면, 단원은 현실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오성(悟性)의 화가로 일컫는다. 겸재는 화가이면서 고위 관료였다. 70세까지 양천 현령을 지냈고 장수를 예우 받아 종2품을 하사받았으며 사후에는 한성판윤(서울시장)으로 추증되었다. 반면, 단원은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가문이 무관이면서 관아에 물건을 납품하여 부를 누렸다. 단원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은 단원을 평하기를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정도로 잘 그려 예전에는 이런 솜씨가 없었다’라고 극찬했으며, 그는 ‘신필(神筆)’로 불리기도 했다. 겸재 정선-마음을 담아 그린 진경(眞景) 겸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중국 산수화풍이 대세이던 때, 실경보다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겸재의 그림은 조선 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함에 있어서 관념미에서 현실미로 바뀌는 과도기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겸재의 <박연폭포>는 다른 화가들의 박연폭포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처럼 겸재는 실제 경치를 표현할 때 폭포의 리얼리티를 담기보다는 그림에 장쾌한 폭포 소리를 담는 방식을 추구했다. 겸재는 경치가 뛰어난 명승지를 그릴 때 그대로 옮겨 담지 않고 독창적(표현 대상을 중앙에 부각시키거나 전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을 사용하는 등)으로 재구성했다. 겸재의 시각은 신선경의 맑은 숲과 샘의 마음인 ‘임천(林泉)의 마음’으로 대상에게 다가서야 가치가 커지고 교만과 사치의 눈으로 보면 값이 떨어진다는 곽희의 ’산수 보는 법‘과 일맥상통한다. <박연폭포>의 장쾌한 폭포소리나 <만폭동도>의 자글거리는 개울소리, <금강전도>의 만이천봉을 감도는 바람소리가 느껴지는 원형 구도. <인왕제색도>에서 소나기 내린 이후 암벽의 모습을 실감나게 구성한 겸재의 이미지 구성력은 조선 풍경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진경산수화의 완성자라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실경과 닮게 그리는 것이 선(善) 남인 실학파인 성호 이익(1681-1763)은 ‘형상을 닮지 않고 어찌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고 주장했고, 표암 강세황은 ‘산천을 초상화처럼 꼭 닮게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실경과 닮게 그리는 것이 선(善)이라는 주장은 단원에 이르러 찬란한 결실을 보게 된다. 단원의 진경산수화는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스케치한 후, 화가가 서있는 위치에서 바라본 대로의 형상을 화폭에 담았다. <총석정도>,<옥순봉도>,<소림명월도>가 그 좋은 예이다. <소림명월도>는 달밤에 사립문 밖 풍광을 마치 렌즈의 뷰파인더로 본 듯 평범한 대지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실제로 단원의 그림은 현장 답사한 사진과 비교해도 거의 일치하는 구도를 보여준다. 단원은 특히 먹을 사용하는 농담(濃淡) 조절에 탁월했다. 단원의 진경 화법은 대상의 실제 모습을 그만의 방식으로 인식해 정확하게 그렸다는 의미에서 근대화풍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원의 이러한 화풍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문인화풍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이후 눈에 비친 대상보다는 심상(心象)을 표현하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문인화풍이 대세를 이루어 조선 화단의 르네상스가 막을 내리고 정치권도 소용돌이치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겸재의 <계상정거>(1746) 겸재의 그림 중 <계상정거>를 보여주면서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 아니냐는 교수님의 물음에 거의 답을 못하던 중에 어디선가 ‘천원짜리 화폐에서요’라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지갑에서 천원을 들고 화폐와 그림을 서로 견주면서 살펴보았다. 양천 현령을 그만둔 해에 그린 작품으로, 원래 하나의 시점에선 전경을 화면에 다 담을 수 없는데 겸재는 마음으로 그리는 특징을 발휘했다. <강의 및 자료 제공> 이태호(명지대학교 문화예술 대학원장) 문화재청 위원 역임, 우현 고유섭학술상 수상. 주요 저서로는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한국미술사의 라이벌> 등이 있다.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하면 단연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수풍경을 그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 ‘눈’과 ‘마음’으로 그린 김홍도와 정선의 대표작들을 최고의 해설과 곁들인 미술 인문학의 향연은 그야말로 눈의 호사였다.] [“정선과 김홍도, 조선의 천재화가는 금강산에 미쳐 있었다” 김슬기 기자 sblake@mk.co.kr 매일경제 기사 입력 : 2023-11-30 11:22:49 수정 : 2023-12-06 11:07:17 ‘금강산을 그리다’ 펴낸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 “제가 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집중했고 글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핵심은 늘 금강산이었고, 조선의 천재 화가들은 금강산에 미쳐 있었습니다.” 진경산수화를 탄생시킨 겸재 정선을 비롯해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진재 김윤겸, 표암 강세황, 호생관 최북, 유당 김하종 등 천하제일 비경 금강산을 화폭에 그린 화가들의 작품과 사연을 생생하게 담은 책이 나왔다. ‘금강산을 그리다’(마로니에북스)를 출간한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72)를 서울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이 책은 1998~2019년 다섯 번의 금강산 탐승을 바탕으로 금강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우리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해설이 있는 전시 ‘아트스토리M’를 마포문화재단에서 올해 두 차례 열며 대중과도 소통하고 있는 학자다. 그에 따르면 18세기 조선에 산수화 혁명이 일어났다. 중국 영향을 받은 화풍으로 그려온 화가들이 우리땅을 그리기 시작한 것. 그 시작은 겸재 정선이었다. “겸재는 스케치북을 안 갖고 다녔어요. 뒷짐 지고 산보하면서 머릿속에 그 풍경을 담고 또 가끔 흥이 돋으면 시를 쓰는 다른 사람의 붓을 빼앗아서 스케치를 하곤 했죠. 겸재는 기억만으로 수천 개 봉우리를 그리는 천재였어요.” 그는 “겸재가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미디어 아티스트였을 것”이라고도 했다. 근래의 디지털 화법은 합성화법을 말하는데 ‘단발령 망 금강전도’는 올라가면서 본 광경, 금강산을 그리는 자기 모습, 먼 금강산 풍경까지도 한 화폭 속에 마치 드론처럼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18세기 중반까지 정선이 주도한 진경산수화 유행은 단원 김홍도에 이르러 변화를 맞는다. 궁중 화원으로 1788년 화원 김응환과 함께 정조의 어명을 받아 금강산과 영동 9군을 여행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를 기점으로 금강산 그림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사실적 표현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김홍도의 ‘해산첩’은 70폭이라는 방대한 규모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을 골고루 담았다. 정선과 김홍도 중 누가 조선 최고의 화가였냐는 ‘우문’을 던졌지만 그는 “정선은 이른바 좋은 그림을 그린 화가로 ‘마음 그림’을 그렸고, 김홍도는 잘 그리는 화가로 ‘눈 그림’을 그렸다. 그럼에도 정선이 한국 미술을 통틀어서 최고의 화가”라고 ‘현답’을 했다. 5번이나 찾은 금강산에서 그가 기억하는 최고의 비경은 뭘까. 그는 “개인적으로는 외금강의 만폭동과 내금강의 구룡포다. 금강산이 개방되기 직전에 강요배 화가와 금강산을 갔습니다. 그때 한국에선 처음으로 정양사에도 올랐다. 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인데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최근 타계한 ‘단색화 거장’ 박서보 선생의 홍익대 회화과 제자였던 그는 작업실이 스승의 기지재단 지척에 있어 자주 왕래하며 지냈다. 작업실에는 스승의 ‘묘법(描法)’을 추억하며 그린 드로잉이 걸려 있었다. “최근 5년을 정말 가깝게 지냈다. 저녁마다 전화도 주시고. 그래서 너무 허전한 마음이 크다”라고 말했다.] 12:51~13:29 김홍도미술관(단원 미술관) 관람 [김홍도미술관 1관 관람요금 : 4천원] 탐방지 : 안산시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안산 산업역사박물관&경기도 미술관&안산 화랑공원&안산 호수공원] 탐방코스: [김홍도 미술관~(3.5km)~안산 문화예술의전당~(300m)~안산 와 스타디움~(970m)~안산 산업역사박물관~(630m)~경기도 미술관~(369m)~화랑유원지 인공암벽등반장~(400m)~안산 화랑공원 단원각~(3.3km)~안산 중앙도서관~(646m)~안산호수공원 호수광장~(780m)~안산호수공원 실내수영장~(724m)~별빛광장~(2.3km)~국민초밥 안산점~(424m)~한대앞역 2번 출구] (14.343km) 탐방일 : 2024년 01월 20일(토요일) 날씨 : 구름이 낀 날씨 [안산시 상록구 : 최저기온 3도C, 최고기온 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52분 소요) 13:29~14:04 경기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 422 번지에 있는 김홍도 미술관을 출발하여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로 312 번지에 있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으로 이동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은 안산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지하철 4호선 고잔역 1번 출구 바로 맞은편에 있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은 해돋이극장, 달맞이극장, 별무리극장 등 3개의 공연장과 1개의 국제회의장이 있으며, 4개의 전시실을 갖춘 복합문화 예술공간이다. 해돋이극장은 대규모 다목적 공연장으로 승강무대와 회전무대, 오케스트라 피트 등이 갖추어져 있어 각종 콘서트와 오페라, 발레, 뮤지컬 등 다양한 실내 공연이 개최되는 곳이다. 달맞이 극장은 중극장으로 승강무대와 영사 시설을 갖추고 있어 연극이나 무용 발표회, 실내악 공연과 독주회, 영화 상영 등의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별무리극장은 가변식 무대와 좌석을 갖춘 소극장이며 소규모 연극이나 국악 공연, 전위 연극 등의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공연동 앞뜰에 마련된 야외공연장은 약 1,000석의 계단식 좌석을 갖추고 있으며 각종 마당놀이와 대중음악 등의 공연과 영화 상영 등 다양한 야외 공연이 이곳에서 열리며, 기획전시실에서는 회화나 서예, 조각품, 사진전, 조형예술 등의 전시회가 개최된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내에는 베이커리 카페도 두 곳이나 있어 공연 전이나 후에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14:04~14:08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로 260 번지에 있는 안산와스타디움으로 이동 [안산와스타디움은 천연잔디축구장과 육상경기장을 갖춘 종합운동장이다. 1,128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2003년 4월 착공, 2006년 11월 완공하였다. 국내경기장 중 최초로 브랜드네임을 도입한 와스타디움(WA Stadium)은 ‘와~’하는 관중의 함성, 웰컴투안산(Welcome to Ansan), 월드안산(World Ansan) 등의 복합적 의미이다. 넓이 16만 8,437㎡, 관중석 3만 5,000석의 지하1층·지상4층 규모이다. 2007년 3월 28일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2008베이징올림픽 축구예선전으로 개장경기를 치렀다.] 14:08~14:17 경기 안산시 단원구 화랑로 265 번지에 있는 안산산업역사박물관으로 이동 [안산산업역사박물관은 우리나라 산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안산의 산업 종류와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다. 이곳은 ▲산업과 도시 ▲산업과 기술 ▲산업과 일상이라는 주제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다. 작은 어촌마을이었던 안산이 많은 인구가 유입되며 도시로 성장하는 과정을 자료와 영상을 통해서 알아갈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PC, 휴대전, 가전제품, 포니 승용차 등 다양한 산업유물까지 전시되어 있어 온 가족이 함께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고 이용 요금은 무료다.] 14:17~14:40 안산산업역사박물관 관람 14:40~14:50 경기 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 번지에 있는 경기도 미술관으로 이동 [경기도 미술관은 국내외 작가의 전시, 미술품 수집을 비롯해 연구, 교육, 홍보사업 등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문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전문성과 예술성, 지역성과 세계성이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기획 전시를 통해 미술 문화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공원 내 생태 호수를 배경으로 한 미술관 건물은 전면을 유리로 시공해 맑고 쾌적한 느낌을 주는 한편, 다양한 기획전이 이루어지는 높은 층고의 전시실을 중심으로 현대미술관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경기도 미술관에서는 누구나 쉽게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매월 마지막 주에 [문화가 있는 날]을 운영하는데 경기도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직접 전시, 작품, 아카이브, 건축 등 매월 새롭고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 통해 더욱 편안하고 즐겁게 예술을 즐길 수 있으며, 미술전문가가 아닌 일반인과 아이들까지 누구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미술관으로 호평 받고 있다.] 14:50~15:20 경기도 미술관을 관람 15:20~15:25 경기 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 번지에 있는 화랑유원지 인공암벽등반장으로 이동 [화랑유원지 인공암벽등반장은 폭 24m, 높이 18m 규모로 국제공인규격의 스피드 2면과 초·중·고급 코스 및 연습용 암벽장으로 구성됐으며 직장인들이 퇴근 후 야간에도 이용할 수 있도록 라이트시설과 경관조명이 설치됐다. 2014년03월22일 개장식과 함께 ‘OBS컵 전국 스포츠 클라이밍대회 겸 안산시장배 스포츠 클라이밍대회’가 열려 당시 클라이밍 세계랭킹 1위의 김자인 선수가 시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 바 있다.] 15:25~15:30 안산 화랑공원의 단원각으로 이동 [화랑유원지(안산화랑공원) 위치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 화랑유원지는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도심 유원지이다. 총 면적 632,107㎡의 유원지 내에는 화랑호수, 경기도 미술관, 화랑오토캠핑장, 갈대습지 등이 있다. 또한 인라인스케이트장, 족구장, 농구장, 게이트볼장 등 다양한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화랑호수에는 갈대, 부레옥잠, 연꽃 등이 서식하고 있어 수생 식물 관찰이 가능하며,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여 벚꽃 명소로도 각광 받고 있다. 화랑호수에 있는 단원각에서는 매년 새해맞이 천년의 종 타종 행사가 열린다.] 15:30~15:51 경기 안산시 단원구 안산천남로 14 번지에 있는 안산 중앙도서관으로 이동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호수동에 위치한 공립(시립) 도서관이다. 2006년 7월 21일 개관했으며, 안산시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다. 장서 수는 약 36만 권. 정식 명칭은 '안산시 정보문화사업소 중앙도서관'이다. 안산 시민들은 이 도서관을 '중도'라고도 부른다.] 15:51~15:58 경기 안산시 상록구 사동 1509 번지에 있는 안산호수공원 호수광장으로 이동 [안산호수공원 안산 호수 공원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고잔 신도시 안에 조성된 면적 약 66만 ㎡ 크기의 근린공원이다. 고잔 신도시가 건설되기 전부터 있던 고잔 저수지를 보존하고 주변에 다양한 체육시설과 공연장, 광장, 갈대습지, 산책로 등을 꾸미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공원을 둘러싸고 안산천과 화정천이 흐르고, 두 하천이 모이는 곳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와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다. 공원 둘레에 3.6㎞ 길이의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를 할 수 있게 했다. 생태환경을 고려하여 설계된 공원은 8차선 도로를 경계로 하여 사동 3 공원과 4 공원 등 2개의 공원으로 나뉘고 두 공원은 보행용 육교로 연결해 놓았다. 산책길과 둘레길 코스가 연계되어 있어 걷기 좋고 매년 무궁화 축제를 개최하는 무궁화동산도 유명하다. 실내 수영장, 농구장, 족구장, 축구장 사이로 다양한 조형물을 설치해 놓아 가족단위나 연인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00:00~24:00 쉬는 날 : 연중무휴 주차시설 : 있음 문의 및 안내 : 031-481-3355 화장실 : 있음 입장료: 무료 ] [안산 호수공원은 안산시의 가장 큰 공원이다. 이 공원을 둘러싸고 사방에 안산 내에서 부유한 아파트 단지가 위치한 탓에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모습을 매우 쉽게 볼 수 있고, 호수 중앙에는 높이 20m의 고사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2017년 KBS가 주최한 한국-베트남 수교 25주년 기념 우정슈퍼쇼 촬영이 있었다. 좌 호수공원과 우 호수공원으로 나눠져 있으며 두 호수공원은 석촌호수처럼 광덕대로에 의해 좌우로 분리되어 있다. 주로 좌 호수공원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호수가 있는 호수공원의 모습이라면 우 호수공원은 농구장, 인라인 스케이트장, 축구장, 수영장 등이 모여있는 야외 복합 체육시설의 느낌이다. 주변행사가 있거나 어린이날이 되면 주차장이 미어터져 대로변까지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매년 여름마다 안산호수공원 야외수영장이 운영된다.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이 어린 아이들 데리고 나와서 더위를 식히고 간다. 2009년까지는 이곳에서 안산 국제거리극 축제가 진행됐었던 역사가 있다.] 15:58~16:00 안산호수를 사진촬영 16:00~16:15 경기 안산시 상록구 광덕대로 70 번지에 있는 안산호수공원 실내수영장으로 이동 16:15~16:20 경기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 있는 별빛광장으로 이동 16:20~16:49 경기 안산시 상록구 광덕1로 365 1층에 있는 국민초밥 안산점으로 이동 16:49~17:16 국민초밥 안산점에서 냄비우동으로 간식 [4천원] 17:16~17:21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이동 505-38 번지에 있는 한대앞역 2번 출구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7:21~17:24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이동에 있는 한대앞역에서 삼각지역으로 가는 6호선 전철 승차 대기 17:24~18:59 한대앞역에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삼각지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1시간35분 소요] 안산 갈대습지 안내도 안산시 노적봉 폭포공원 지도 김홍도 미술관 위치도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위치도 안산산업역사박물관 위치도 안산시 [화랑유원지&경기도미술관] 지도 안산 호수공원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