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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8: 13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고전 8: 13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
본 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가 바울 자신의 의지 표명(表明)을 통하여 나타난다.
1]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바울의 이러한 결심은 그의 뜨거운 사랑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이것은
(1) 인간적으로 보잘것없는 형제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그를 통해 당신의 사역과 섭리를 이루어 나가신다.
(2) 그리스도인의 영속적인 생활 원칙을 밝히 제시해 주고 있다.
* 마 25: 40, 45 -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한편 '실족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제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Morris).
이 단어는 '스칸달론'(*)에서 온 것으로 원래 '올가미의 덫을 잠그는 나무'를 가리키며 온갖 고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가 '스칸달론'이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1:18),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스칸달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갈 5:11).
본 절에서는 형제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2]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형제는 그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이므로 그에게 잘못을 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잘못하는 것이다. (마 25: 40, 45)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서로 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께서 고난당하시고 피 흘려 사신 형제를 나도 사랑하고 그를 실족하지 않게 하려고 힘쓰겠다는 마음은 바르고 선한 결심이다.
이것을 술과 담배 문제에 적용해 보자. 만일 교회 직분자가 술과 담배를 함으로 초신자가 술에 취하는 자나 애연가가 된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는가?
또 이것을 교회적 교제의 문제에 적용해보자.
만일 어떤 순진한 목사가 자신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서 성경을 부인하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을 포용하는 교단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 3)는 말씀을 실천하기는커녕 진리의 싸움을 싸우기 싫어하며 침묵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 목사의 행동 때문에 많은 성도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에 빠지고 젊은이들이나 신학생들이 자유주의의 악영향을 받게 되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목사들은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교단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밝히 증언해야 한다.
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 박조준 목사
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 당시는 모두가 우상을 숭배하던 때였기 때문에 고기를 위시해서 웬만한 식물은 우상의 제단 앞에 일단 가져다 놓았던 것을 시장에서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게 된 다음부터는 우상을 섬기지 않게 되었는데 그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한 편에서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우상 문화권에 속해 있는데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다면 먹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더구나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상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우상 앞에 놓았던 것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 되겠느냐? 물론 우상 앞에 놓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구해 먹어야겠지만 지금 우리 형편이 그럴 수 없지 않느냐?”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편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인 것을 뻔히 알면서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 그러니 그것은 아무리 우리의 형편을 감안한다고 해도 우리의 신앙 양심이 허락지 아니한다. 우상 앞에 놓였던 제물을 먹는 것은 죄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떤 이유를 들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너희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강력히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시비가 벌어지게 되었고 서로 판단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고린도교회만 아니고 로마에 있는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이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유대교에서 개종한 일부 유대인 가운데는 구약 레위기 11장에 기록한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고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4장 8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왜 영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으로 끝마치려 하느냐?”고 안타깝게 호소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회 안에서 먹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겨 이것 때문에 시비가 생기고 비판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편에서는 고기를 안 먹는 편을 믿음이 약해서 그렇다고 비난했습니다. 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는데 못 먹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먹는 것은 뱃속으로 들어가 밖으로 나가면 그만인데, 예수님도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는데 먹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신자라고 하지만 어떻게 가증한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느냐?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죽는 것은 아닌데 육신을 위해서 먹고 싶다고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다”라고 고집했습니다.
여기서 어느 편이 옳고 어느 편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기 이전에 금욕주의는 신앙적인 교만을 가져 오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3절에 보면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습니다(롬 14:13~17).
본문 말씀 7절 이하를 보세요.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식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했습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날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했습니다.
유대교의 영향을 깊이 받은 사람들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같은 것을 지키면서 이 날들을 다른 날보다 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특별한 절차를 지켜 거룩하게 여기는 가운데 이런 날에는 종교적인 행사에 집착했었습니다.
한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철폐되고 말았고 모든 날은 꼭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날 외에 다른 모든 날은 꼭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음식과 절기의 문제에 대한 사도의 의견은, 그것이 일부 사람들의 습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음식과 절기 문제 같은 것은 무시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불씨는 의견의 차이가 아니라 의견의 차이를 잘못 다룬 데에 있습니다. 가령 믿음이 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약한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우정으로 도와주며 부축해 주어야 할 터인데 이들이 합법적인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것을 보며 그들을 어리석고 미신적인 사람들로 우습게 보고 짓밟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지식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일은 잘못입니다. 재물도 그렇습니다. 권력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극적인 태도는 피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다른 사람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지 아니하고 괴롭히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갖다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의견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 해야 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조롱하는 태도를 피해야 합니다. 어느 사람이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롱을 받을 때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조소하는 일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신념이 내게는 편견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남이 존중하는 것을 조소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를 피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진지한 존경심을 가지고 대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하여 멸시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왜 우리가 형제를 멸시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됩니까?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받아들이셨는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 편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나님은 믿음이 약하다고 해서 참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절대로 내어 쫓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이 강한 신자나 믿음이 약한 신자나,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먹는 사람이나 먹지 않는 사람이나 그들이 참된 신자라면 하나님은 다 인정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받아들이셨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 아니 ‘하나님은 저를 세우셨는데’하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본문 말씀 11~12절을 보세요.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판단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판단하려 하는 것은 더구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중을 판단하고 몇 가지 안 되는 실례를 가지고 그들의 인격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형제들의 주인이 되어서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판단은 정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무엇 때문에 문제가 생겼어요? 먹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사실 이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문제가 되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소극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인데 적극적인 해결 방법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14장에는 그 문제 해결을 사랑으로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15절 말씀에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자기의 양심에 상관이 없다 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생각에 먹어서는 안 되는 식물을 그들 앞에서 먹으면 약한 사람의 양심은 그것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상하게 되고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나 개인의 신념에 있어서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랑의 견지에서는 정당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강한 자보다 약한 자를 생각하고, 있는 자보다 없는 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 볼 때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대하십니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약한 자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는데 강한 자들이 식물 하나를 금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그들을 근심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심령이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면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존 경쟁의 세상이요, 적자 생존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강자는 약자를 눌러 버리고 무시해 버리는 풍토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 다르고 또 달라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서두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로마서 14장 13절에는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라면 어린애가 길가에 있는 돌이나 나무토막에 걸려 넘어졌을 때 넘어졌다고 핀잔 주지 않고 아예 부딪힐 것이나 걸릴 것을 미리 치워 버려 넘어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게 되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였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은 믿음이 강한 자가 가지는 신앙의 자유는 그것이 약한 자의 비방의 대상이 되고 또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라고 칼빈은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 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지 않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이요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 안 먹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어떤 법칙을 제시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딤전 4:4).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어요?
우리는 본래 우리의 지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면 주님께서 나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공로에 힘입어 죄의 용서를 받고 주 안에서 새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결코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는 성화의 단계가 곧 신앙 생활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연습입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가운데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의 마음속에 제일 먼저 임하는 축복은 평강입니다. 성경에도 죄를 토설하지 아니하고 마음에 품고 있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눌림을 받아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바싹바싹 탄다고 했습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는데 마음에 평화가 없어서 그럽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이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한 다음에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왜요? 무서워서 그렇게 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서로 사랑할 때 평화가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불안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음으로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1.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 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끝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희락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처음 세 가지가 사랑, 평화, 그리고 희락(기쁨)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이 있습니다(요 1:12; 롬 8:14).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에녹, 주의 말씀 가까이 듣는 마리아의 기쁨, 주님 품에 안겨 말씀 듣는 요한의 기쁨,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같이 걷는 기쁨).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다.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변하는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하늘의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
* 시 96: 5 -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 시 115: 4-5 – 4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이방 종교들의 신들은 다 허무한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참 신이 아니다. 이방 종교들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나 참된 경건이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만 참 하나님이시다.
둘째,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으면 양심이 더러워진다.
그것은 우상을 신적 존재로 인정한 것이므로 우상숭배가 된다.
셋째, 우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약한 형제를 범죄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이것은 술과 담배의 문제에도 적용되고, 또한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포용하는 교단에 머무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금주, 금연해야 하며 성경을 믿는 목사와 성도들은 자유주의적, 포용주의적 교단에서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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