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3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저녁 8시30분경 전주 대성동 UFO추정 섬광 목격
2021년 도쿄 하게올림픽 사상최초 무관중 올림픽 개막
도쿄올림픽은 제32회 하계올림픽이다. 2020년 7월 24일부터 8월 9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릴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개최가 1년 연기됐다. 역사상 올림픽이 취소된 경우는 있으나, 연기된 것은 최초의 일이다. 연기된 도쿄올림픽은 2021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진행된다. 다만, 대회 명칭은 ‘2020’을 유지한다. 또한 코로나 19로 인하여 모든경기는 무관중으로 진행된다. 참가국수는 205개국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시작도 하기전 선수단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 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은 29개 종목 355명이 참가 하였다
2018년 노회찬 의원 자살
드루킹 측으로부터 수천만 원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특검 수사를 앞둔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23일 투신자살했다.
경찰은 노 의원이 이날 오전 9시 40분께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 17층과 18층 사이에서 밖으로 투신해 숨졌다고 밝혔다.
사건 현장에는 노 의원이 남긴 유서도 발견됐다.
유서에는 드루킹 관련해 금전을 받은 사실은 있지만 청탁과는 관련이 없다, 가족에게는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라오스 새남노이댐 붕괴
라오스 아타푸 주 사남사이군 비 438mm 쏟아져 SK건설이 공사 참여한 새남노이 댐 붕괴로 홍수(5억톤) 사망 40명 실종 32명 수재민 1만여명 6개 마을 완전 파괴
2018년 소설가 최인훈 세상 떠남
2017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세상 떠남(91세)
2015년 ‘두 개의 한국’ 저자 돈 오버도퍼 별세
1931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그는 1952년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6·25 종전 직후 한국에서 미군 포병장교로 복무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68년부터 25년간 워싱턴포스트의 국제 문제 전문기자로 베트남전과 소련 붕괴 등을 취재해 명성을 쌓았다. 1997년 발표한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은 6·25 이후 한반도 정치외교사를 다룬 역작으로 꼽힌다. 남북한 분단과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체제 경쟁, 북핵 위기를 분석했다. 그는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에 납치됐다 풀려난 후 가장 먼저 김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여러 차례 방북했으며 2008년에는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그가 최근 몇 년간 알츠하이머를 앓아왔다고 전했다.
2015년 6·25 영웅 노병(老兵) 4명에 태극무공훈장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해 무공을 세운 노병들이 2015년7월23일 한국을 방문해 한국군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각종 훈장과 포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21일 “15개국 유엔군 참전용사와 가족 등 150여명이 23∼28일 우리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엔 미국인 헥터 캐퍼라타(86), 토머스 허드너 주니어(91), 캐나다인 에드워드 존 매스트로나디(90), 영국인 윌리엄 스피크먼(88)도 포함됐다. 이들은 27일 기념식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6·25전쟁 당시 미 해병대 소총수였던 캐퍼라타는 1950년 겨울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자 적을 유도하기 위해 혼자 진지 꼭대기에 올라가 일부러 적의 ‘표적’이 되는 용맹을 발휘하며 진지를 지켜냈다. 해군 전투기 조종사였던 토머스 허드너 주니어는 장진호 전투에서 전투기가 추락해 고립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전투기를 동체 착륙시키는 전우애를 보인 인물이다. 캐나다 왕립연대 중위로 참전한 매스트로나디는 1951년 연천군 고왕산 전투에서 “캐나다 형제들이여, 오늘 밤 죽을 각오를!”이라고 외치며 소대원들을 이끌고 백병전을 벌인 끝에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전공을 세웠다. 윌리엄 스피크먼은 1951년 중공군과 육탄전을 벌이며 방어선을 사수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이들 외에 윈턴 마셜(96) 미 공군 예비역 중장은 국민훈장 모란장을, 브렌트 제트 시니어(82) 미 40사단 6·25 참전용사회장과 샐 스캘라토 뉴욕주 6·25 참전용사회장은 국민포장을 받았다.
2014년 대만 푸싱항공 GE222 대만 펑후섬 인근에 추락 사망 51명
2009년 폴크스바겐, 포르쉐 인수
당시 포르쉐는 연간 판매대수가 10만대 미만이지만 상위 계층에 고가 스포츠카를 팔아 막대한 수익을 벌었다. 경기가 좋았던 2005년에는 현금 보유액도 상당했다.
폴크스바겐은 한 해에 600만대 이상의 자동차를 판매하였지만 대중적인 차량을 생산했다
1990년대 경영난을 겪던 포르쉐를 구했던 벤델린 비데킹 포르쉐 최고경영자(CEO)는 2005년부터 폴크스바겐 인수 작업을 시작했다. 폴크스바겐에 대한 지분율을 51%로 끌어올리는 등 성과를 올렸지만 그 사이 포르쉐의 부채는 약 100억 유로로 늘어 재정 문제가 심각한 화두로 떠올랐다.
독일의 ‘VW법’ 때문에 경영권을 장악하지도 못한데다 금융위기에 따른 실적 악화까지 겹치면서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2009년 6월에는 폴크스바겐이 포르쉐에 인수·합병 제안을 할 만큼 상황은 역전됐다. 결국 포르쉐는 경영권을 폴크스바겐에 매각하고 폴크스바겐에 대한 주식매수선택권을 카타르 투자청에 팔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2002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시티 공습(15명 사망·150명 부상)
2002년7월23일 이스라엘이 새벽(현지시각) F16 전투기를 동원해 팔레스타인 과격단체인 ‘하마스’의 군사지도자를 목표로 하여 가자시티를 공습, 15명이 숨지고 150여명이 부상했다.
이스라엘의 공격 목표였던 하마스 산하 군사조직 ‘이자딘 엘 카삼 여단’의 지도자 살라 셰하데(Shehade)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숨졌다고 하마스측은 밝혔다. 이자딘 엘 카삼 여단은 수차례의 자살폭탄 공격을 포함, 이스라엘에 대해 수십차례에 걸쳐 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격당한 곳은 셰하데가 거처해온 것으로 알려진 가자시티 내 아파트 건물로, 무고한 이웃 주민들도 많이 희생됐다. AFP통신은 팔레스타인 관리들과 현지 의료진의 말을 인용, 사망자 15명 중 8명이 어린이이며 부상자 150명의 대다수도 어린이와 여자들이라고 전했다.
하마스 대변인은 “이번 공격은 시온주의 테러리스트와 미국인들이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살해한 끔찍한 학살”이라며 “우리는 순교자들의 피에 대해 복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이스라엘의 공습은 이 지역에 평화를 가져오려는 노력을 무산시키는 전쟁범죄”라고 비난하고,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이번 사태에 유감을 표했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셰하데가 수백명의 이스라엘인 목숨을 앗아간 테러행위에 책임이 있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라고 밝혔다.
2001년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직 정지
인도네시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민협의회(MPR)가 와히드 탄핵안을 재적 대의원 695명 중 598명이 출석해 591표로 가결됐으며, 와히드를 지지하는 100여명의 대의원들은 탄핵절차를 보이콧했다.
와히드는 인도네시아 사상 최초로 민주적 절차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취임한 이후 21개월간 인도네시아 정국은 혼란과 파탄의 연속이였다
집권 초기 그는 일련의 민주화 정책을 실시해 오랜 독재에 찌든 국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 2월 그는 군부 실력자였던 위란토 장군을 티모르 폭력사태 연루 혐의를 들어 전격 해임했고, 4월에는 2명의 경제관료를 특별한 이유없이 해임하고 뇌일혈로 시력을 거의 상실한 그는 무기력과 무능력으로 정치 혼란 및 경제 침체를 야기, 국민의 신망을 잃기 시작했다. 또 공식석상에서 실언을 일삼고 수차례 독단적 인사를 단행, 정부 관료와 군 경찰마저 등을 돌리기에 이르렀다. 이어 8월에는 `불록게이트` `브루나이게이트`로 불리는 금융횡령 스캔들이 터져 국회의 진상조사특위가 조사에 들어감으로써 탄핵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와히드는 탄핵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궁에 머물 것이라고 밝혔으나 26일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
2001년 대한변호사협회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법치주의에서 후퇴했다”는 결의문 채택
대한변호사협회(회장 정재헌)가 공개석상에서 김대중 정권의 개혁정책 방식을 강하게 비판한 데 이어 이를 명문화한 결의문까지 채택했다. 대한변협의 이 같은 대정부 비판은 5공 전두환 정권 이후 처음이다.
대한변협 소속 변호사들은 23일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현 정부의 개혁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요구하는 실질적 법치주의에서 현저하게 후퇴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총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변협은 결의문에서 “정부의 개혁조치가 목표와 명분을 내세워 법적 절차에 있어서 합법성과 정당성이 무시되는 경향이 있음을 우려한다”며 “정부가 힘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에 의한 개혁을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법치주의와 개혁’이란 주제의 심포지엄 주제발표에서 “김대중 정부의 지난 3년6개월간의 개혁성과는 구호만 요란했을뿐 개혁에 실패한 김영삼 정부의 전철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토론자로 나선 서석구 변호사도 “현 정부는 세무조사를 통한 언론탄압, 대북 퍼주기 정책, 자유민주주의적 통일론자들을 반통일·반개혁 세력으로 매도하는 등 개혁과정에서 국민에게 고통만 안겨줬으므로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정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천정배 변호사(민주당 의원)는 “현 정부의 개혁성과도 인정해야 한다”며 “국제사회가 과거와 달리 한국을 인권 자유국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언론 자유도 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대회에는 최종영 대법원장, 윤영철 헌법재판소장, 최경원 법무장관과 변호사·법학 교수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대한변협은 현재 전국 변호사 511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2001년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에 취임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부통령이 국민협의회(MPR) 총회에 의해 탄핵이 결정된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을 대신해 2001년 7월 23일 제5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취임했다. 메가와티는 2차대전 후 네덜란드에 대해 독립을 선포했던 인도네시아 건국 대통령 수카르노의 맏딸이다. 인도네시아대학 심리학부 등 대학 두 곳을 다녔지만 모두 중퇴했다. 서민층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던 아버지처럼, 오랜 경제 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서민층이 그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다.
1987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992년 민주당 총재가 됐고, 1996년 지지율 상승에 위협을 느낀 수하르토가 군대를 동원해 민주당사를 공격한 사건을 계기로, 일약 `저항의 상징`이자 `독재에 대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후 그가 창당한 민주투쟁당은 1999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민주 선거에서 153석을 획득하며 의회(DPR) 내 제1당이 됐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 그에 대한 국민 지지율은 48%였다. 하지만 막상 MPR 총회에서는 보수적 이슬람 세력이 와히드를 지지하는 바람에 부통령에 만족해야 했다.
1999년 주가 사상 최대 71.70포인트 폭락
국제금리인상 조짐, ‘대우 쇼크’ 등으로 증시가 사상 최악의 폭락사태를 빚고, 장기금리가 치솟는 등 국내 금융-증권시장이 크게 동요했다. 23일 서울주식시장에서는 종합주가지수가 70포인트 이상 떨어지는 사상 최대의 대폭락을 기록했다. 이날 주가는 미국의 추가 금리인상 시사와 대우그룹 문제 등으로 경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전날보다 무려 71.70포인트 하락한 904.96으로 마감됐다. 이는 지난 6월 9일 기록한 50.14의 사상최대 하락폭을 무려 21.56포인트나 경신한 것이다.
또 채권시장에서는 대우에 대한 4조원의 신규자금 지원을 위해 투신사들이 보유채권을 매각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3년만기 회사채 유통 수익률이 0.42포인트 오른 연 9.5%를 기록했다. 3년만기 국고채도 연 8.72%로 전날보다 0.32%포인트 올랐다.
1999년 태풍 올가 호 사망 실종 67명 재산피해 1조 490억원
1995년 유조선 씨프린스호, 전남 여천군 해상에서 좌초
국내 최대의 해양 오염사고 `시프린스호` 유류오염사고가 1995년 7월 23일 발생했다. 오후 2시5분경 전남 여천군 남면 소리도 북동쪽 1.5km 해상에서 태풍 `페이`를 만나 침몰한 호유해운 소속 씨프린스호가 이날 오후 4시경 폭발음과 함께 불이 난 뒤 기관실쪽 선체가 파손되면서 기름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이 사고로 유조선 연료인 벙커시유 1천4백㎘와 탱크에 실려있던 원유 61만배럴 (9만7천kl) 중 2만9천㎘가 흘러나와 광양만 일대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지역까지 해상을 시커멓게 뒤덮는 참사를 빚었다. 흘러나온 기름은 남서풍과 조류를 타고 남해안 일대에 급속히 퍼져 여천, 남해, 사천, 거제 등지의 가두리-새고막 양식장 수만ha가 피해를 입었다. 유조선에 타고 있던 선원 20명중 19명은 배를 탈출해 소리도로 대피했으나 기관장은 실종됐다.
이 사고는 씨프린스호가 태풍을 피하기 위해 22일 오후6시께 광양항에서 서해안쪽으로 출항했으나 기관실에 구멍이 뚫려 기관고장을 일으키면서 사고 당일 태풍을 만나 소리도 근해까지 파도에 떠밀리다 불이 나면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됐다.
1988년 버마 소요사태 악화 집권사회주의계획당 당수 네윈 사임
1985년 남북국회회담 첫 예비접촉(판문점)에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가설 등에 합의
1985년 미국-중국간 핵협력협정 승인
1984년 관보 제1호 발행
1983년 바이타브락 제2봉 세계최초 등반 성공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를 결정
1982년 7월 23일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 이후 상업포경을 전면금지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스톡홀름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며 10년간 포경 금지를 요청하자 10년간의 갑론을박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IWC(국제포경위원회)는 당초에는 고래를 관리해 계속 잡아나가려는 취지에서 1946년 설립됐다. 당시 무분별한 포경으로 고래 자원의 감소 징후가 뚜렷해지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관리 대상은 전체 80여종 중 밍크고래 등 대형 9종. IWC는 산하 과학위원회가 고래 자원 유지가 가능하도록 합리적인 할당량을 제시하면 이에 대한 포경업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본 회의에서 포획량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본회의에서는 보통 할당량을 상향 조정하게 돼 `고래 고갈`에 직면했다. 이같은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 이날의 포경전면금지 결정이다
1982년 일본정부, 방위력증강 5개년계획(83-87) 확정
1978년 서울 시내버스 한강대교서 추락 33명 사망, 13명 부상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 붕괴 7년 만에 민정복귀
1972년 미국, 최초의 실험용 지구자원탐사위성 랜드새트 1호 발사
1968년 7. 23 DMZ 투입병력 피습사건
아군 병력 8명이 DMZ 투입을 위해 진입 중, 공비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음. 피해(전사 4명, 부상 3명)
1967년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
흑인에 대한 실질적인 차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의 전쟁비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가 약속했던 복지정책마저 실행하지 않자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967년 7월 미국의 흑인폭동이 전국적 규모로 번져 동부 뉴욕에서 서부 샌프란시스코까지 그리고 북부 디트로이트와 그랜드래피즈, 또 시카고에서 남부 피닉스와 휴스턴에 이르기까지 전국 17개 도시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뉴욕시 맨해턴의 가장 번화한 5번가에서도 흑인청소년들이 7월 26일 밤 상가를 파괴,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존슨 미국 대통령은 흑인폭동으로 거의 마비된 디트로이트에 4천1백명의 공수부대 병력을 급파했다.
연방군이 투입된 디트로이트시는 27일 밤 저격수들과의 총격전이 그치고 폭동발생 5일만에 점차 평온을 돼 찾았다. 디트로이트시의 사망자수는 36명으로 미국현대사상 가장 큰 폭동 피해를 기록했다. 부상자도 약2천명 정도, 체포된 시민수는 3천5백명에 달하며 방화와 약탈로 인한 피해액은 1억5천만 달러 이상으로 집계됐다.
1967년 터키에 연 2일 대지진 사상자 수천명 발생
1966년 중부지방 큰 비(-7.26) 사망 67명 실종 116명
1965년 이승만 전 대통령 유해 하와이에서 돌아옴
1962년 미국 텔스타통신 위성통해 첫 TV 우주중계
1961년 한국-코트디부아르 국교 수립
1956년 바둑인 조치훈 출생
1954년 국제포경회의 북극해고래잡이금지 결정
1952년 이집트서 쿠데타 발생, 나기브준장 실권장악
30여년간 제한된 독립을 유지해 온 이집트가 1952년, 영국에 대항하는 행동을 시작했다. 1년 전 완전독립을 위한 교섭이 결렬되자 反영 기운과 영국군의 완전철수 주장이 이집트내에서 점점 고조됐다. 이집트의회는 1936년에 체결된 영국-이집트 동맹조약을 파기했다. 위기를 느낀 영국이 군대를 수에즈 운하지대에 집결시키자 이집트 민족주의단체들은 민병조직을 결성해 대항했다. 몇 번의 충돌을 겪고난 1952년 1월, 카이로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영국 소유 건물 750채가 파괴되고, 유럽인 11명이 살해됐다. 사건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양 진영은 함께 군을 철수하고, 계엄령을 발동한다. 하지만 이집트군 내부의 강경론자들은 이것을 봉기의 호기로 생각한다. 장교들은 민족주의적 열정을 갖고 있는 `자유장교단`을 결성했다.
7월, 이들이 카이로의 정부기관들을 제압하자 이집트의 파룩왕은 망명한다. 무혈쿠데타를 이끈 사람은 만민평등의 사상을 품고 있던 34세의 대위 가말 아브달 나세르였다. 그러나 나세르는 연장자인 무하마드 나기브에 통치권을 이양했다. 제1차 중동전쟁의 영웅인 나기브는 혁명평의회의 의장에 취임하고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의회를 해산시켰고, 정당들을 폐지했다. 그러는 동안 나세르는 무대 뒤에서 힘을 축적해 갔다. 1954년, 마침내 나세르는 전면으로 나와 영국지배를 종식시켰다.
1951년 프랑스 파리에 NATO군 최고사령부 설치
1951년 페탱, 옥중 사망
프랑스 현대사에서 영욕의 교차가 가장 뚜렷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앙리 필립 페탱이다. 그는 군인으로는 영웅이었으나 정치가로는 반역자였다.
1차대전 4년간을 거치면서 대령에서 원수로까지 승승장구할 만큼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에게는 늘 ‘베르덩 전투의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병사들에게도 페탱의 인기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가 지휘하면 죽을 확률이 적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성품도 온화했다.
국민적 영웅이 어느날 갑자기 반역자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히틀러가 1940년 6월에 속전속결로 프랑스 국경을 돌파하면서였다. 정부가 남으로 후퇴하자 800만명에 가까운 민간인들도 뒤를 따랐다. 대탈주극이었다. 지도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휴전을 원하는 그룹에는 페탱이 있었고, 항전을 원하는 쪽에는 드골이 있었다. 실권을 잡은 페탱이 라디오로 히틀러에게 휴전을 제의하자 드골은 이튿날 런던으로 망명, 철저 항전을 호소했다.
6월 22일, 독일과 휴전했지만 사실상 항복이었다. 이로써 북쪽에는 독일군이 주둔했고, 남쪽에는 히틀러의 묵인 아래 전원도시 비시에 세운 ‘비시 정부’가 들어섰다. 괴뢰정부였다. 젊은이들은 독일로 끌려갔고, 기업들은 군수품을 생산했다.
전쟁이 끝나고 재판에 회부됐지만 페탱도 할 말은 있었다. 프랑스 남쪽이 그나마 독일군의 군화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에게 협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국가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돼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51년 7월 23일 95세로 되섬에서 옥중 사망했다.
1951년 기록영화의 선구자 로버트 플라어티 사망
1884년 미시간주에서 태어나 광산학교를 졸업한 후 북캐나다의 철광맥 발견 탐험대장을 거쳐 1913년경부터 기록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 제작된 그의 대표작 ‘북극의 나누크’는 기록영화에 대한 그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려준 계기가 됐다. 에스키모인들과 16개월동안이나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은 이 영화는 기록영화의 모범으로 평가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문명에서 격리된 자연과 인간을 담아낸 작품 ‘터부’(1931)와 어부들의 힘든 생활을 그린 ‘아란의 사나이’(1934), 늪지대에 사는 노인과 어린이들을 그린 ‘루이지애나 이야기’(1948) 등은 그를 ‘기록영화의 개척자’로 기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로써 기록영화는 그에 의해 확립되고 진보했다.
1942년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명령
1941년 6월 독일군의 전격적인 소련침공에도 불구하고 동계기간을 이용한 소련의 대반격에 독일군이 패배를 거듭하자 히틀러는 1942년 7월 23일 제4기갑군을 동원,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스탈린그라드는 돈강과 볼가강 사이에 있어 방어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그곳을 점령해야 유전지대인 카프카스를 공격할 수 있고 측후방을 엄호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 지역에 이미 강력한 방어망을 설치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침공을 예상해서가 아니라 이 곳의 상징성을 고려해 방어를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는 이름 자체부터가 스탈린의 권위를 상징하는 ‘스탈린의 거리’였다. 스탈린은 이 지역 사령관에 39세의 예레멘코 대장을 임명했다. 독일군의 대규모 폭격이 시작되었다. 8월 23일 하루동안 2천회의 대공습을 가하기도 했다. 시가는 순식간에 폐허로 일변했고 수천명의 시민이 죽어갔다. 그날 새벽 독일군은 외곽에서부터 시내로 진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일주일이면 끝날 것이라는 공방전은 5개월 이상이나 계속되었고, 마침내 히틀러와 스탈린의 자존심과 인내력의 대결장으로 변했다. 시내로 진입한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이 시작된 것이다. 건물 위층에는 소련군이 아래층에는 독일군이 들어가 싸우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전투는 격화되었고 도시는 폐허화되면서 이 도시에는 군인들만이 가득했다.
11월 19일 소련군이 마침내 반격을 개시하자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했던 독일군은 오히려 역포위되는 상황에 처했다. 겨울이 되자 포위된 독일군에서는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히틀러는 독려했지만 1943년 1월 31일 독일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항복했다. 항복으로 24명의 장군을 포함한 9만1천여명의 독일군 포로들은 영하 30도의 동토위로 시베리아를 향해 한없이 끌려가야 했다.
이 전투에서 쌍방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독일군의 인적 손실은 194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150만명에 이르렀고 소련군도 그 절반 정도를 잃었다. 시가지에서 확인된 전사자만해도 독일군 15만명, 소련군 5만명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대전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룬 분수령이었다. 소련군은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패배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38년 총독부, 교원-관공리에게 제복 착용 지시
1936년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한국형 최루극`의 원조 `홍도야 우지마라`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이었던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에 의해 1936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초연됐다.
가난했던 시절, 비극적인 홍도의 삶에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셨고, 몰려든 인파로 극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홍도야…`의 원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지만 유랑극단들이 임의로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홍도야…`로 널리 알려졌다.
노래로 더 잘 알려진 `홍도야…`는 1940년 김영춘이 노래하고 콜롬비아 레코드가 제작했다. 희곡은 일제시대 최고 인기배우였던 문예봉의 남편 임선규가 썼으나 1948년에 문예봉과 함께 월북하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노랫말만 익숙할 뿐이다.
1931년 소파 방정환 별세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1931년 7월 23일 사망했다. 방정환은 1899년 서울 종로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해 고아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얘기꾼으로 소년들을 끌어 모았고 이 얘기들이 소년들에게 인기를 끌자 `소년 입지회`를 만들정도로 운동가의 기질을 일찍부터 보여주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소파는 선린상고에 진학했으나 2년 만에 중퇴하고 생계를 위해 취직을 해야했다.
당시 청년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던 천도교당을 찾은 것은 소파가 일생을 `어린이 사랑`으로 일관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때 그는 손병희의 눈에 들어 그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하게 된다.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한 소파는 일본 동양대학 문과에 들어가 아동문학에 전심, 1921년 귀국후에는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번안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손진태, 윤극영 등과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행사를 가졌다. 소파는 전국소년지도자대회를 개최하고 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는 등 어린이 사랑에 대한 활발한 노력을 하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이날 생애를 마감했다.
1930년 이탈리아, 나폴리서 대지진. 2534명 사망, 4264명 부상(6000여 사상)
1926년 항일투사 박열의 일본인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옥중 자살(의문사)
1925년 일제, 한국서의 좌익운동자 대량 검거
1921년 마오쩌둥 등 57명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공산당 창당
1916년 영국의 화학자 램지 사망 - 네온·아르곤·크립톤·크세논 등 4가지 비활성 기체를 발견
1907년 도쿄 유학생팀과 기독교청년회원팀의 우리나라 최초의 농구 공식경기 훈련원에서 열려
1906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제3회 범미(汎美)회의 열림
1904년 현대 공중보건 서비스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의사 사이먼 사망
1903년 포드자동차 첫 판매, `모델 A`
1894년 대원군, 입각해서 국정참여
1885년 미국 남북전쟁 말기(1864-65)에 북군 총사령관을 지낸 미국의 장군,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사망
1863(조선 철종 14) 최시형(37세) 동학 북접 대도주 됨
1856년 인도의 사회운동가 발 간가다르 틸라크 출생
918년 왕건, 고려 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