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4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양궁 김재덕 선수 대한민국선수로 최연소 올림픽 금메달 획득
'17세 3개월' '2020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에 첫 금메달을 안긴 양궁 대표팀 막내 김제덕(경북일고)의 나이다.
올림픽 역사상 첫 양궁 혼성전에서 안산(여) 선수와 함께 출전하여 정상에 오른 김제덕은 한국 양궁사로 새로 썼다. 한국 남자 양궁 최연소 메달리스트가 됐기 때문이다.
앞서 가장 어린 나이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는 정재헌이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 참가해 개인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올림픽 개막일 기준으로 만 18세 1개월 25일이었다.
2021년 중국 허난성 기록적 폭우로 56명 이상 사망 5명실종
중국 황허(黃河) 중·하류에 위치한 허난(河南)성 일대에 쏟아진 기록적 폭우로 인하여 56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되었다 중국 기상 당국에 따르면 지난 20일 오후 허난성 일대에는 시간당 최고 201.9㎜의 비가 내렸다. 1951년 기상 관측 이래 최대 강수량이었다. 20일 허난성 정저우(鄭州)시 지하철 5호선 일부 구간이 폭우로 물에 잠겨 침수됐다. 터널에 빗물이 차면서 퇴근길 지하철에 탄 승객 500여명이 갇혔다. 침수로 해당 지하철 구간에서만 승객 1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다쳤다.
20일 이후 많은 차량이 갇힌 정저우 징광루 터널에서도 사상자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 터널은 23일까지 물이 다 빠지지 않아 배수 및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이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허난성 주민 중 750만명 이상이 이번 물난리로 피해를 봤다. 그중 약 92만 명은 거주지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또 57만6600ha 면적의 작물이 피해를 봤고, 붕괴한 가옥도 3800호에 달했다.
2018년 강원 강릉 무더위로 베란다에 놓아둔 달걀에서 병아리 스스로 부화
2014년 경북 의성 돼지농장서 3년3개월 만에 구제역 발생
2014년 알제리항공 부르키나파소 와가두구 공항 출발 니제르에 추락 116명 전원 사망
2011년 박태환 선수 2011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상하이) 자유형 남자 400m 우승(3분42초04)
2010년 ‘윤필용 사건’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 별세
1970년대 초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잘 알려진 윤필용(83) 전 수도경비사령관이 2010년 7월 24일 별세했다. 7년 전 수술을 받은 지병인 식도암이 두 달 전부터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한 윤 전 사령관은 1961년 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와 1963년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분석과장, 1964년 방첩대장을 지냈다. 이후 사단장을 거쳐 1970년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랐다. 하지만 3년 뒤 ‘윤필용 사건’으로 군복을 벗었다.
윤필용 사건은 1970년대 들어 ‘하나회’가 군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와중에 발생했다. 1973년 전두환 등 하나회 멤버들이 처음으로 별을 달았고, 이어 노태우·정호용 등도 장성으로 진급했다. 이처럼 하나회 세력이 부상하자, 군 내부는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과 견제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당시 윤필용 사령관은 하나회 소속 후배들을 적극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하나회 대부’라고도 불렸다.
사건은 1973년 초 윤 사령관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식사 자리에서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윤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은 쿠데타 모의 혐의를 받게 됐다. 그해 4월 29일 열린 군사재판에서 윤 사령관은 업무상 횡령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 8개 죄목으로 징역 15년에 벌금 2000만원, 추징금 590만원을 선고받았다. 그의 참모장이던 손영길 준장 등 장교 9명에게도 징역 1~15년이 선고됐다. 이와 함께 장교 30여명이 사실상 강제 예편됐고, 160여명이 ‘감시 대상’으로 분류됐다.
군 관계자는 “윤필용 사건은 비(非)하나회 세력이 군부 실세로 떠오른 하나회를 견제하는 동시에 군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벌인 파워게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선고 2년 뒤인 1975년 2월, 윤 전 사령관은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석방됐다.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하나회가 실권을 잡은 1980년대 들어 한국도로공사 사장, 한국전매공사 이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1년 인도네시아 와히드 대통령 탄핵으로 직무정지, 후임 메가와티
2000년 타이거 우즈, 브리티시 오픈 우승(최연소 그랜드슬램)
타이거 우즈가 제129회 브리티시 오픈 우승으로 근대 프로골프 역사상 통산 다섯번째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달성하며 ‘골프 황제’에 등극했다. 우즈는 2000년 7월 24일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끝난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3언더파를 추가하며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생애 4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우즈는 마스터스(1997년)와 PGA 챔피언십(1999년) 그리고 US오픈(2000년)에 이어 브리티시 오픈까지 4대 메이저타이틀을 만 24세7개월의 나이로 한번씩 석권함으로써 잭 니클로스(당시 26세 6개월)가 34년동안 갖고 있던 최연소 그랜드슬램 기록을 2년 앞당겼다. US오픈과 브리티시오픈을 한 시즌에 모두 우승한 여섯번째 선수가 됐으며 1990년 닉 팔도가 갖고 있던 올드코스 최저타 우승기록(18언더파 270타)도 1타 줄였다
1997년 경수로 사업 관련 남북한 우편물교환 시행
1993년 러시아, 구(舊) 루블 지폐 사용금지 발표
루블화. 러시아 중앙은행은 24일 93년 이전에 발행된 지폐의 통용을 전면 중단하는 강력한 통화 개혁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7월26일 0시를 기해 지난 61~92년 사이에 발행된 옛 소련 및 러시아 지폐의 통용을 중단, 모두 회수한다고 밝히고 이같은 조치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화폐를 표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개인이나 기업이 소유한 92년 이전 발행 지폐는 8월 7일까지 은행에서 1인당 3만5천루블(35달러) 한도내에서 93년 발행권으로 교환받을 수 있으며 한도 초과분은 6개월만기 계좌에 예치된다고 공표했다.
1991년 농지소유 상한을 20ha로 확대
1989년 소련 그루지아 공화국 수도 트빌리 시에서 독립요구 시위
1988년 김용강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 휴전성명 발표
1977년 지탄역서 열차충돌 160여명 사상
1974년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 사망. 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974년 포르투갈, 헌법 제1조를 폐기해 해외영토의 독립을 승인
1974년 경향신문, MBC에 흡수통합
1969년 흑산도 무장공비사건(2)
1968년 서울지검 동양통신 편집간부 등 기밀누설 4명 반공법 위반혐의 구속
1959년 닉슨-흐루시초프, 부엌논쟁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은 만날 때 마다 체제선전으로 설전을 벌였다. 미국 부통령 닉슨은 무역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닉슨은 박람회가 열리고 있던 소콜니키 공원에서 흐루시초프와 마주쳤다. 박람회장에는 토스터, 식기세척기 등 최신 가전제품이 전시돼 있었다.
거기서 나온 설전이 바로 `부엌논쟁`이었다.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흐루시초프는 닉슨에게 "미국 노동자들이 모두 이런 사치품들을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닉슨은 즉각 "우리 철강 노동자들이 지금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중인걸 아시지요. 그런 노동자들도 누구나 이 정도는 살 수 있지요"라고 치받았다. 이어 "그 사람들 시간당 3달러를 받는데,한달에 100달러 정도씩 25~30년만 불입하면 이런 가전제품이 완비된 집을 얼마든 삽니다"라고 공격했다.
흐루시초프의 반격차례였다. "별로 놀랍지 않네요. 곧 완공될 소련의 주택에는 그런 것들이 완비될 것입니다. 앞으로 소련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누구나 그런 집에서 살 수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들간의 언쟁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는 냉전이었고, 미국에서 닉슨의 인기는 높았다.
1951년 미국의 발명가 알버트 반스 사망
1951년 정부, 탄핵재판소 구성
1950년 유엔군사령부 한국에 설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소집을 요구해 6월 27일 결의 제1511호(유엔의 대북한 군사제재 결의)를 이끌어내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적절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을 결정했다. 이어 7월 7일에는 유엔 안보리결의 제1588호(유엔군 통합사령부 설치 결의)를 통해 한국전쟁을 수행할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 결의에 따라 7월 24일 정식으로 출범한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모든 유엔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정전협정을 체결했고 정전협정 준수 및 집행을 책임지는 행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동시에 가진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취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다.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 실시, 5월 31일 초대 국회 개원,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에 이어 7월 20일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초대 국회 제33차 본회의에서 무기명투표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개표결과 180표로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이 1표를 얻었다. 부통령에는 이시영이 선출됨에 따라 이날 국회 주최로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리게 됐다.
7월 27일 국회에 출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이윤영을 지명했으나 인준이 부결됐고 2차 지명을 받은 이범석이 8월 1일 인준을 받았다.
1945년 부민관에서 폭탄 폭발사건 발생. 대한애국청년당, 부민관에 투탄의거
일제와 친일파가 최후결전의지 고취하려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열자 이를 저지하고 친일파를 처단하고자 대한애국청년당원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이 직접 만든 시한폭탄으로 폭파
1934년 작가 이상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연재 시작
1929년 부전조약(不戰條約) 발효
1927년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자살
“단지 막연한 불안... 나는 근 2년동안 죽은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왔다".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으로 자리매김돼 있는 아쿠타가와상의 장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이같은 유서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도쿄 다바타(田端) 자택에서 음독 자살했다. 향년 35세였다.
용띠 해, 용의 달, 용의 날(辰年辰月辰時)에 태어났다고 하여 류노스케(龍之介)라는 이름이 지어진 그는 생후 8개월경 모친이 정신이상 증세를 보임으로써 외삼촌 댁에 양자로 가게 된다. 이후 생활은 윤택하지 못했으나 문예를 사랑하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아쿠타가와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1910년 제1고등학교에 입학,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재학중 `코(鼻)`를 발표함으로써 나츠메소세키(夏目漱石)의 격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1916년 대학을 졸업하고 `라쇼몬(羅生門)`(1915)ㆍ `고구마죽(芋粥)`(1916)을 발표, 신진(新進)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초기의 그의 작품은 소재를 왕조의 설화에서 구하고 있는데 그후 에도(江戶)시대부터 메이지(明治)시대까지 작품 무대를 넓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과 섬세한 서정성을 갖춘 독자적인 소설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은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과 다채로운 문체로 금새 다이쇼(大正)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구축해나갔다.
1921년 경부터 건강이 쇠약해진데다 신경쇠약 등으로 고생하던 그가 죽기 전 2년간에 걸쳐 느꼈던 `막연한 불안`은 개인적인 감정일 뿐만 아니라 당시 지식인 모두가 공감했던 쇼와(昭和)시대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1923년 연합국-터키간에 로잔강화조약 조인 (그리스-터키전쟁 종결)
1915년 이스트랜드 증기선 시카고강서 전복 812명 사망
1908년 청년터키당 혁명 (익년 황제 폐지)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 조인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단계적 수순으로 제3차 한일협약이 1907년 7월 24일 체결됐다. ‘정미7조약’ 혹은 ‘한일신협약’이라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우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 설치로 내정을 일삼아 온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삼아 한층 강력한 침략행위를 강구했다.
우선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는 한편 순종을 즉위시켰다. 즉위 4일 만인 이날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협약 초안을 제시했고 이완용은 즉각 각의를 열어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후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사택에서 7개조항의 협약을 체결-조인했다. 이외에도 한국 군대해산, 사법권 위임, 일본인 차관 채용, 경찰권 위임 등을 골자로 한 협약 관련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다.
이 조약체결로 통감의 권한이 을사조약 때보다 강력해졌으며, 일본인 관리 등을 통해 한국의 내정에 관한 모든 국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1907년 광무 신문지법 제정
한말 일제가 우리나라의 신문을 탄압-통제하기 위한 신문지법이 1907년 7월 24일 제정됐다. 이완용 내각이 법률 제1호로 공포한 일명 `광무 신문지법`은 1908년 4월 29일 일부가 개정되었고 1952년 4월 4일 법률 제237호 의해 폐지됐다. 모두 41조로 구성된 신문지법은 형식상 일본의 신문지법을 모방한 것이나 내용은 그보다 훨씬 가혹했다.
신문창간시 사전에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점과 신문을 발행하기에 앞서 관할 관청에 2부를 납부케 해 사전검열을 제도화한 점이 그것이다. 이 법은 처음에는 국내 발행의 민간신문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1908년 개정법률에는 미국과 러시아의 한국인교포들이 발행하는 신문과 배설 명의의 `대한매일신보`도 단속대상에 포함시켰다.
결국 해외에서 들어오는 민족지의 유입을 막고, 국내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할 목적으로 제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출판법과 함께 우리나라 언론을 탄압하는 주요무기로 악용돼 조선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한 수많은 신문들이 삭제-압수 및 발매금지-배포금지-정간-폐간되고 언론인이 구속됐다.
1901년 한발로 전국에 방곡령 발포
1897년 여성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 출생
1886년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출생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명의 가톨릭 신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병인박해(1866년) 후 프랑스 함대가 보복할지 모른다는 소문으로 조정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민심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정체불명의 이양선 한 척이 대동강 어귀에 나타났다. 중국 톈진을 출발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무역선이라지만 대포가 2문이나 장착돼 있었고 24명의 선원도 중무장한 80t급의 증기선이었다. 접근불가를 거듭 경고했지만 셔먼호는 막무가내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까지 진입했다. 사태를 관망하던 평양군민이 격분한 것은 이들의 접근을 막으려는 조선 관리 3명을 셔먼호가 감금하면서였다. 흥분한 평양군민들은 소총과 활을 쏘아댔고, 셔먼호 역시 포격으로 맞섰다.
탄약이 떨어져 하류로 후퇴한 셔먼호가 줄어든 대동강의 수위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평안 관찰사 박규수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땔감 운반선 3∼4척을 연결한 뒤 인화물질을 가득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 쪽으로 떠내려 보낸 것이다. 셔먼호는 불타버렸고 선원 역시 전멸됐다. 7월24일이었다. 대원군은 이사건에 고무돼 빗장을 더욱 걸어잠궜으나 5년뒤 신미양요를 겪어야했다.
1857년 덴마크의 사실주의 작가 폰토피단 출생 - 1917년 노벨문학상 수상
1853년 분광태양사진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델랑드르 출생
1841년 노르웨이 의학자 헨리크 한센 출생
1837년 영국 런던서 전신메시지
1802년 프랑스 작가 앙리 뒤마 출생
프랑스 귀족인 아버지와 아이티 출신의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던 뒤마는 1828년 ‘앙리 3세와 그의 궁정’으로 인기작가의 대열에 들어선다. 그리고 7월 혁명(1830년) 후, 왕의 편이 되어 정치운동에 참가하고 스위스, 라인, 이탈리아, 에스파냐, 러시아, 알제리, 튀니스(Tunis: Tunisia) 등을 여행, 그 기행을 남겼다.
뒤마는 등장인물의 활기찬 성격 묘사와 교묘한 줄거리 등 스토리 작가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뒤마가 1844년 8월부터 1846년 1월까지 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단행본 출간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품을 써내며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나 돈을 탕진하고 벨기에로 망명한 이후 이탈리아 독립투쟁에서 맹활약하고 사생아도 낳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뒤마의 유해는 2002년 12월 볼테르, 장자크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앙드레 말로에 이어 문필가로서는 6번째로 프랑스의 팡테옹에 이장되었다.
아이티출신 흑인 노예의 후손인 뒤마는 흑백 혼혈의 혈통과 작품의 통속성 등을 이유로 당대 주류 문학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며, 팡테옹 이장을 두고 학계에서 논란이 일었으나 2002년 3월 시라크 대통령이 뒤마의 팡테옹 이장 포고령을 내렸다.
뒤마는 그의 아들 뒤마 2세와 함께 부자 소설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들 뒤마(Alexandre Dumas fils)는 1848년 ‘춘희’를 발표하여 유명해졌는데, 주로 당시의 풍속이나 도덕, 사회 문제를 그린 작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같은 이름의 아들 뒤마와 구별하기 위하여 대(大)뒤마, 혹은 아버지 뒤마라 불려지고 있다.
1689년 송시열, 서거
918(고려 태조 1) 태봉왕 궁예 왕위에서 쫓겨나 세상 떠남(50세)
612년 을지문덕 살수대첩(고구려 구양왕22)
612년 1월에 113만 3800명의 군사 동원해 고구려 침입. 그중 30만 5천명이 압록강 건너 살수(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을지문덕 공격으로 대승 거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