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에 카페에 들어와서 편지를 읽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했던 재준이에게. 다들 재준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인지 게시판에 네가 수신자인 편지가 이미 많이도 쌓여 있지만, 나도 그 수북한 네 행복 더미에 내 마음을 한 스푼이라도 더하고 싶어서 편지를 적어 봐.
요 근래 비가 참 많이도 오는데 오늘 우리 동네는 아침엔 비가 오더니 그래도 반짝 해가 났었답니다요. 재준이는 오늘 하루 쾌적한 실내에서 뽀송하게 보냈었다면 참 좋겠는데! 워언래 나에게 소중한 사람은 내가 느꼈던 행복뿐만 아니라 내가 갖지 못했던 행복까지도 누렸으면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절대 지금 내 앞머리가 습기 때문에 다 축 처져서 눈을 찔러서 하는 말은 아니고🥺 행복이라는 말이 가끔은 엄청 대단하게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엔 진짜 별것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잖아. 내가 재준이에게 기원하는 행복은 전자와 후자 모든 것을 다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서도, 너무 굉장한 것만을 소원하다 보면 가끔은 그 무게에 눌려서 앞이 깜깜해지곤 하니까. 그래서 나는 주머니 속에 가득 넣어 둔 유리구슬처럼 작지만 반짝이는 행복이 잘그락거리며 너를 잠깐이나마 웃게 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그리고 그 잠깐이 계속 쌓이고 연장되어 그게 재준이 시간의 대부분을 이루기를.
지난 금요일엔 말이야, 정말 말 그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갑자기 변한 상황은 차치하더라도, 나는 진짜 내가 어디서 돈 떼먹고 도망이라도 친 기분이었다니까? 안 그래도 얼이 빠져있는데 전화가 와서 한두 마디 하고 끊어지고 나면 거의 곧바로 그 다음 전화가 걸려오고 그걸 몇 번이나 했게! 진짜 내가 티에엔꺼 뭐라도 업고 튄 건가(?) 했답니다. 이렇게 쉼 없이 나한테 전화하게 만들 수 있다면 다음엔 진짜로 뭐라도 업고 튀어볼까... 하면서. 그런데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재준이가 처음 영통이 연결되고 나서 나한테 용기 내서 와줘서 고맙다고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르는 거야. 물론 내가 전에 써서 전달했던 편지에는 한동안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내용도 꽤나 많았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용기라니, 우리 그렇게까지 어려운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요 헤헤. 아무튼 그래서 그 말이 생각나서 푸흐흐 웃었고 네 생각하다 조금 더 울어서 타박은 들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네 덕분에도 많은 힘을 얻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팬콘 때 재준이가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이제 이별하는 게 너무 싫다고 그랬었잖아. 나는 왜 이렇게 항상 재준이가 하는 말을 들을 때면 그게 어떤 마음인지 내가 알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지 그게 참 문제야. 내가 우리 회사에 처음 들어와서 '와, 나 진짜 잘못 들어왔구나.' 하고 느꼈던 지점 중에 하나가 우리는 정말 잦은 이별을 해야 한다는 거였거든. 구조 상 어쩔 수 없이 수없이 사람이 바뀌고 나 또한 계속 이동해야 하는 곳인데 어쩜 모든 사람들이 하나하나 아쉽고 모든 이별이 쓰리기만 한지, 더 어른이 되고 여러 번 경험을 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아진다고들 하던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는 사람 관련으로는 도무지 면역이 생기지를 않더라구. 다들 처음 하는 이동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 묻던데, 이건 요 근래 너희 관련으로 듣는 질문이기도 하네👀 아무튼 그래서인지 재준이가 했던 그 말을 듣는데 네가 참 안쓰럽고 또 그래서 마음이 아렸어. 내가 지나온 작고 가벼운 헤어짐들로부터 네가 불가항력적으로 겪었을 그 이별들의 무게를 가늠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내가 아는 이재준은 너무 선한 사람이라 그게 더 무거웠겠다 짐작도 해보고. 근데 재준아, 내가 미국에서 해리 포터에 나오는 타임 터너를 사 와서 참 많이도 돌려봤는데 시간은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라. 완전 사기당했어. 나도 전화를 왕창해서 따져볼까보다(ㅋㅋㅋ) 아무튼 그래서 내가 시간을 그대로 멈추고 싶었다는 재준이의 바람은 이루어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수없이 많은 것이 변한대도 나랑은 네가 싫어하는 그 이별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볼게. 그건 내가 노력해 볼 수 있는 영역이잖아.
제법 진지해진 편지 분위기를 환기할 겸 예전 얘기를 하며 편지를 마무리해 보려고! 나 의외로 꽤나 낯을 가리는데, 그래서 재준이랑 초반에 대화할 때에 어색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텐션을 끌어올려서 이야기를 하곤 했었단 말이야? 오오, 오늘 잘생기셨네요? 오오, 오늘 니트 무늬가.. 반반이라 멋지시네요? 오오... 오늘...... 되게 멋지세요....!(이 정도쯤 되면 속으로는 울고 있음) 왜냐면 나도 아이돌 팬이라는 위치에 맞게 롤플레잉을 해줘야 너희도 나랑 말하는 시간이 힘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꽤나 노력했다구🤸 그때쯤의 우리는 굉장히 크고 높은 톤으로 우하하 잘생기셨습니다! 우하하 그럼 저를 최애로 삼으시죠? 우하하 옆이 비었네요 넘어가겠습니다 으하하 그럼 다음에 봐요 하는 식으로 대화를 했었어ㅋㅋㅋ 요 근래의 재준이는 옆에 소리에 묻혀서 뭐라구? 하고 가끔 되물어야 할 만큼 작고 느릿한 목소리로 얘기해 주곤 했어서 어쩌면 그때의 재준이도 조금은 낯가림을 숨기려 뽜이팅하고 있던 중이었을까 생각하다 보면 좀 귀엽고 그래. 이제는 어떤 말투로 어떤 크기로 말해주든 재준이가 하는 말들은 하나하나 다 소중히 귀 기울여 듣고 있답니다요.
예에전에 재준이에게 Our Youth 가사가 너무 슬프지만서도 고맙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 지인짜 롱타임어고.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나에 대해서 이렇게까지나 생각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너무 예뻤거든. 그 가사처럼 지금 나는 너희를 사랑한 만큼 행복해서 네가 노래에 적어 준 기원이 이루어진 셈이야. 네가 이번에 내게 해준 말처럼 너도 좋은 사람이니까 우리 잘 지내보자. 앞으로 같이 더 행복해질 거니까! 그리고 나 좀 뿌듯해. 그 짧고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꼭 해줘야지 했던 말은 다 했거든. 난 우리 재준이는 늘 잘 해내니까 걱정 안 한다구 그리고 행복하자고.
우리 이재준, 요 행복한 왕자야. 내가 전에 편지에 적었던 그런 왕자 말고 진짜로 말 그대로의 행복한 왕자가 되자✨️
곧 또 볼 수 있겠지, 그때까지 지금처럼 멋지라구. 내가 많이 아껴!
(+ 편지를 올리고 나서 이 말 쓸걸! 하고 뒤늦게 생각나서 덧붙이는 이야기. 우리네 운에 대해서 대화했던 걸 재준이가 기억할지 모르겠어. 나는 지금까지 내가 참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그제 소다들이랑 약속이 있었거든? 그런데 하루 종일 비가 오다가 딱 약속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그 시간에 비가 멈추고는 식당 안에 들어가니 비가 다시 내리는 거야. 그러고 나서 한참을 수다 떨고 귀가하는 버스를 타러 갈 때는 또 안 오다가 탑승하는 그 순간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는 버스 타고 있는 내내 진짜 무서울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 거 있지? 그리고 내가 하차해서 한 15분을 걸어야 하는 순간에는 또 마법처럼 비가 그쳤어. 그리고 또 나는 너희도 만나고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잖아. 그래서 비가 그친 길을 걸어가던 그 순간에 나 생각보다 운이 나쁜 사람이 아닐지 모르겠다고, 사실은 매 순간마다 운이 나빴진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을 적고 싶었어서 후다다닥 덧씁니다. 쓰다보니 또 움청 길어졌네 으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