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번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극진한 사랑도 체험해보지 못하고, 위로도 받아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죽으라고 ‘쌩 고생’만 하다가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느님 축복 속에 이 세상에 태어났지요. 다행스럽게도 물로 세례를 받으며 두 번째로 태어나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성령의 불로 또 다시 한 번 태어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진정 ‘위로부터’ 태어날 때 얻게 되는 축복은 또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모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처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흘러갑니다.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모든 세상만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물건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지루하고 고달프게만 느껴졌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영롱하게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매일 다가오는 갖은 형태의 십자가들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세상이 바뀝니다. 인생관이 바뀝니다. 거치관도 바뀝니다. 내 인생 전체, 우주 전체가 축복의 꽃밭으로 변화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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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7ㄱ.8-15)
<피, 새로 태어나게 하는 힘>
독일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errer, 1471-1528)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로서 독일이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 이전 독일 화폐에 그려져 있던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기도하는 손’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기도하는 손’에는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깃든 감동적인 사연이 함께 전해져 내려옵니다.
뒤러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지만 워낙 가난하여 자신의 재능을 불태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침울한 소년기를 보낸 뒤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 둘은 더 큰 도시로 나가 정식적으로 그림을 배워볼 결심을 하고 낯선 지방으로 가게 되었지만 도시는 그들에게 먹을 것도 잠을 잘 자리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둘이 가져온 돈도 다 떨어지자 둘은 더 이상 도시에서 버틸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둘 다 공부를 못할 것이니 한 사람이 공부하는 동안 한 사람은 일자리를 구하여 뒷바라지를 하고, 학업이 끝나면 서로 교대하여 공부하자고 제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뒤러의 친구는 삼류식당에 뛰어들어 먼저 취업을 했고 그 친구가 힘들게 번 돈으로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러의 첫 그림이 팔리던 순간 친구의 얼굴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그림은 친구의 피로 탄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들고 친구가 근무하는 식당으로 뛰어갔습니다.
캄캄한 친구의 주방을 들어서려는 순간 뒤러는 문틈으로 친구가 방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뼈마디가 굵어지고 거칠어진 두 손을 함께 모으고 뒤러를 위해 진실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끌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뒤러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기에는 부적절하게 변해버린 친구의 모은 손을 기억에 담아 그렇게 ‘기도하는 손’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알브레이트 뒤러는 문학에서의 괴테와 함께 독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그의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뒤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진리입니다. 누군가의 노력 없이 건물이 지어지거나 예술품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새로 무엇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일본에서 천민이었지만 사무라이가 된 이야기를 여러 번 한 것 같습니다. 이 아이는 훈련을 받다가 그리고 귀족 훈련생들 때문에 몇 번이고 뛰쳐나가고 싶을 때마다 성 기둥 안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그 기둥 속에서 아들에게 끊임없이 힘을 주고 계셨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소년은 그 기둥 안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받고 끝까지 버티어 훌륭한 사무라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죽는 것은 에너지를 배출합니다. 가장 큰 에너지는 누군가를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할 때입니다. 이 사랑을 위한 희생만이 누군가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니코데모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도 무언가 새로 태어나게 하려면 피를 흘려야 하는데 어찌 하늘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란 예언인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며 흘리신 피로써 새로 태어나 이젠 자신의 가진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리마테아의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누군가 새로 태어나려면 또 다른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새로 나는 것도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태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아이가 기둥 안에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기만 한다면 그분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새로 태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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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7-15 :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태어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과 함께 머무를 자녀들을 낳으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성사로 태어났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8절) 즉, “너희는 그분의 소리를 들을 테지만 그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말씀이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8절)고 하신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9절)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듯하다. 이 태어남에 대해서도 구약과 관계가 있다. 창조된 첫 사람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여자,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의 잉태, 물로써 행해진 기적들, 예를 들면, 갈대바다를 건넌 일, 천사가 물을 출렁거리게 한 못, 요르단 강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깨끗하게 된 일 등, 이 모두가 미래에 이루어질 영적 태어남과 정화의 상징이다. 이사악도 이러한 탄생의 예형이었다. 이런 것을 암시하듯이 예수님께서는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10절)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11절) 아드님은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이시기에, 증언을 하실 때 복수로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남과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에게서의 탄생과 비교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새로이 태어남은 하늘의 일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드님의 탄생에 비교하면 우리의 일은 세상의 일인 것이다. 그 세상일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고 하시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12절) 하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이’라는 말은 그분의 기원이 성령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분은 말씀으로서는 하늘에 계시며 육으로는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 육의 기원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께 있다. 그래서 육이 되신 말씀은 비록 육이시지만 결코 말씀이 아닌 적이 없으신 분이다. 그분이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올라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땅에 속한 인간이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될 때, 영적 탄생이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께 결합될 때, 그리스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14절) 십자가가 들어 올려져 땅 위에 나타난다. 그 십자가는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흠숭을 받으시고 십자가로 선포되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뱀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집어 삼키던 죄를 의미한다. 그 뱀을 들어 올린 표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분을 통하여 그 뱀에게 죽음을 선고되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게 된 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5절)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원인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신 분이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믿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어찌 멸망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더 확실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향하는 삶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 즉 우리도 우리가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영광을 입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인간완성을 이루어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또한 영광을 드리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며 열심히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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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은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 묻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믿어 왔던 율법 정신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새로운 길을 예수님 안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남들의 눈을 피해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전히 자신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힌 채,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가능함을 믿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입은 사도 시대의 신자들은,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룹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기에, 그들은 소유와 집착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고, 나누며 살았기에 궁핍하다고 좌절하지 않고, 타인을 내 만족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공산(共産)’의 삶은 본디 교회가 꿈꾼 이상이었고, 비록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로 이념화되어 실패했지만, 여전히 교회 안팎에서 수행의 삶이나 수도원 공동체를 통하여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상적인 삶은, 어둠과 탐욕에 덮인 인간의 영이 성령으로 정화되어 하느님의 진리를 향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느님께 돌아갈 것임을 알기에, 세상에서 죽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비록 세상의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심어 주신 양심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돌아갈 하느님을 매순간 기억한다면, 어둠이 아닌 빛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국장/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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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됩시다>
오늘 복음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선문답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예전에 인천 대공원에 가서 자전거를 탄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나와서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식사도 하는 걸 보았습니다.
당연히 길가에도 많은 사람들이 걷고 운동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자전거를 타고 빨리 달릴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빨리 못 달렸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방향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데, 아이들은 어디로 향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가다 갑자기 뒤로 돌아서고, 갑자기 왼쪽으로 크게 돌아서 턴하기도 하고... 속도를 냈다가는 정말 사고가 날 것 같아서, 최대한 천천히 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문득,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람’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며, 마음 이끌리는 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듯이,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도 하느님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마음 이끌리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다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 계시죠.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다 가셨습니다.예수님은 자신을 구속하는 틀 안에 갇혀 살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이라는 틀을 벗어던지셨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의 틀도 벗어버리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틀도 벗어던지셨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틀도 벗어던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람처럼 자유롭게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으시지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를 구속하는 것들을 조금씩 치워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 세상이 주는 만족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기억한다면, 지금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를 구속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성령으로 새로 태어났던 순간들을 회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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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7ㄱ.8)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에 의해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즉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즉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즉 구원을 받으려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 5절을 보면,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태어나는 일”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은 같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라는 뜻인데, 이 말씀은,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으로 믿으려고 노력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라.”)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라는 말씀은,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사람들이다.”라는 뜻인데, 이 말은 다시, “위로부터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먼저 믿음을 가져야 하고, 성령의 인도에 믿음으로 응답하여라.”라는 뜻이 됩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9-12)
여기서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는 니코데모의 말은, “그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그런 일이 이루어집니까?”라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려면, 또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꾸짖으시는 말씀이지만, 뜻으로는 “나의 말은 확실한 증언이니 나의 말을 믿어라.”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어라.”)
앞의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11절의 말씀을, “표징만 찾지 말고, 표징이 없더라도 나의 말을 믿어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50)라는 말씀이 있고, 6장에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들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들을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하려고 헛심 쓰지 말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먼저 믿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니코데모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믿음으로.”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이런 질문과 대답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이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3-15)
이 말씀은,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고, 예수님만이 사람들을 구원해서 하늘로 데려가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또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암시하신 말씀인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뱀을 들어 올려 사람들을 구하신 것처럼(민수 21장),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뜻입니다. (“...을 해야 한다.” 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다.”입니다.
지금 계속해서 ‘믿음’을 강조하는 말씀들이 나오는데, 이런 말씀들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일부 종파의 모습이 연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구호를 외치는 종파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종파들인데, 사실상 사이비 종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7,21).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마태 7,26).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특히 사랑 실천을 안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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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인>
요한 3,7ㄱ.8-15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땅에서 태어나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사람 하늘에서 내려와 땅 속 깊이 뿌리 내리는 사람 그러기에 땅을 딛고 하늘을 받치는 사람
영원 안에 하루의 의미를 소중히 보듬는 사람 하루의 삶 속에 영원을 담는 사람 그러기에 하루와 영원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
두 발 넓이 자그마한 땅만을 딛고 선 사람 무한한 마음으로 온 세상을 품에 안는 사람 그러기에 소유와 무소유의 벽을 허문 사람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안에서 참된 사람을 만나는 사람 하느님이신 아드님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 그러기에 하느님과 사람의 하나 됨 안에 사는 사람
끝이 없는 하느님 영의 품 안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 보잘것없는 몸과 마음이지만 성령으로 가득히 채워진 사람 그러기에 하느님과 자신이 하나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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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나 같은 죄인도...>
어느 농장에 병아리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병아리가 병들어 시름 시름 앓더니 급기야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의사가 진단을 하더니 암탉을 한 마리 잘 고아서 먹이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수의사를 향해 “당신 정신 나갔소? 병아리를 살리려고 암탉을 죽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하며 막 화를 냈습니다. 만약 수의사가 송아지를 잡아 먹여야 한다고 하면 그 말을 따를 농장주가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병아리를 살리려면 농장 주인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면 그 말대로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바보여서 그렇게 귀한 아들을 내어 주셨을까요? 그럼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무지무지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 뵙기를 간절히 바라는 고운님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기도를 드리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수시로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예수님께서 영으로 만나주시고 말씀해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기쁨과 평안을 주시고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삶의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살 것입니다...그러면 그는 용서를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그리고 그는 이제 그리스도 주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살아가면... 이 다음에 고운님들이 천국에 가면 3가지 때문에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천국에 당연히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 곳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둘째는... 천국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고운님들! 조 두레박 사제와 함께 십자가의 그 예수님을 바라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고운님들 마음속에 초대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저와 고운님들이 하느님 앞에서 평화와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있기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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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오늘부터 17일까지 피정을 합니다. 교구는 사제들이 피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핸드폰은 매일 충전을 해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에게 피정은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8일 동안 충전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영적인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강의를 듣고,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기쁨입니다. 마치 신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으면 약속 시간 전부터 기분이 좋아지듯이, 아직 피정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벌써 기분이 좋아집니다.
며칠 전에 암 치료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암의 치료는 크게 3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암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외부의 치료는 효과는 있지만 부작용이 있습니다. 식욕부진, 구토, 탈모와 같은 것입니다.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세포가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몸의 면역체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진화하였습니다. 면역체계는 건강한 식생활, 긍정적인 생각, 규칙적인 운동, 적당한 휴식을 통해서 강화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이용하는 치료방법을 찾고 있으며 곧 실용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나노로봇을 이용해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나노로봇을 이용한 치료는 암뿐만 아니라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새로운 치료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세먼지가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듯이 나노로봇은 어쩌면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 새로운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靈’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주 아름답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할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이겨낼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공동체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우리가 이런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면 종교가 달라도, 세대가 달라도, 이념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지구별에서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입니다.
(강론은 피정 다녀와서 18일부터 올리겠습니다. 좋은 피정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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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충만한 삶> -위에서 태어난 사람들-
절의 자산은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이라 합니다. 수도원 뜨락의 벗나무가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30년전 젊었던 나무가 이제 노목이 되어 일부는 썩어 꺽였고 곳곳에 죽은 가지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남은 가지는 여전히 청초한 봄꽃들 피어내고 있습니다.
-시간을/세월을 넘어섰다 봄엔/봄만 산다 노쇠한/고목들 꺾이고/삭아 무너져 내려도 남은 가지들 여전히/새롭게/피어내는 봄꽃들 육신은/늙었어도 영혼은/젊다 영원한 현재/오늘 하루만 산다-
절망은 없습니다. 바로 위에서 태어난 이들이, 영에서 태어난 이들이 이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늘 새롭게 오늘 지금 여기서 부활의 삶을 사는 성령충만한 이들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이 바로 위에서 태어난 이들이요 영에서 태어난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오늘 제1독서의 사도행전 초대교회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자유입니다. 성령의 사랑입니다. 성령의 생명입니다. 성령의 창조입니다.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령에서 태어난 이들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합니다. 성령에서 태어난 이들은 위로부터 태어난 이들입니다.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태어난 이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의 모습이요, 세례받아 위로부터 태어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성령따라 사는 이들이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한번으로 끝난 창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위로부터, 영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우리들이요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이루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참 좋은 선물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하늘길은 예수님뿐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영원한 생명의 하늘길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가 바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이런 위로부터 태어난,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사도행전의 공동체요 우리 믿는 이들의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의 공동체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합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고 선물처럼 주어지는 참 좋은 공동체입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사람들이 성취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바로 공동체 중심에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공동체요 우리 교회공동체입니다. 성령을 통한 사랑의 일치 공동체의 생생한 모델이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이요 끊임없이 계속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날마다 이를 새롭게 확인하는 우리들입니다. 미사시 성찬전례중 감사기도 제3양식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아버지, 성자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저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몸이 되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며 한마음 한몸의 일치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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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동하는 믿음>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 벚꽃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미선나무도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긴 겨울의 추위를 견뎌 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영양을 충분히 지닌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들이 드러납니다. 밑거름이 중요한데 웃거름으로 겉만 다스렸던 나무들은 힘이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밑거름이 충분하지 못하면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웃거름에 매달리게 됩니다. 결국은 튼실하지 못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신심단체활동 등 생색내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의 생활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함으로써 증거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17,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 수사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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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갑곶성지에 있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 되냐고요? 그건 아니고요...
사실 오늘부터 4월 22일까지 유럽 성지순례를 갑니다. 솔직히 가기가 싫습니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거든요.
이번에 가는 성지순례 코스도 세 번째이기 때문에 처음에 가졌던 설렘도 전혀 없고, 오랜 시간을 비행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참으로 신기한 것은 막상 순례가 시작되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또 끔찍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오늘부터 자리를 비웁니다. 새벽 묵상 글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곳의 인터넷 사정이 많이 좋아졌으면 묵상 글을 올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22일까지 조금만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묵상 글을 올립니다.
버섯을 성분 조사하면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 90%, 단백질 3%, 탄수화물 5%, 지방 1%, 미네랄 1%. 문득 그러면 독버섯과 식용버섯의 구성 상 차이가 궁금해졌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구성 성분 안에 독이 들어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글쎄 1%의 미네랄 안에 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독버섯과 식용버섯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의외였습니다. 겨우 1%에 해당하는 부분에 의해서 사람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것이 말이지요.
버섯 전체 구성 성분의 1%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들으면서, 문득 사람의 말도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말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죽을 만큼의 아픔과 시련을 주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죽이는 말이 사람이 쓰고 있는 말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아마도 1%? 어쩌면 0.1%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얼마 안 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독으로 다가가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나의 말이 독이 되는 말이 아닌 생명이 되는 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에게 하시는 말씀 역시 바로 생명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 역시 생명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이는 말을 쓰면서 결코 주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이었을까요? 남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조금 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서 말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으로만 말한다면 결코 주님을 믿는 사람의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강한 독성을 가진 죽이는 말이 아닌, 생명을 가진 살리는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쓴다면, 특히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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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자의 대화}
아버지가 직장 없이 빈둥빈둥 집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에디슨은 너 나이 때 전기를 발명했다. 너는 지금껏 뭐했냐?”
아들은 이 아버지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그런 소리 마세요. 링컨은 아버지 나이에 대통령 했어요.”
비교하는 말은 절대로 힘이 되는 말이 아닙니다.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이 바로 살리는 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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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파주분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hayah)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qum, heqis) 라는 뜻을 나타내는 용어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을 드러내주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셨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죽었는데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당혹스런 것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다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드높여졌다고 합니다. 분명 누명을 쓰고 죽는 실패인데도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겨 승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바로 ‘이 놀라운 변화’, 역전의 대전환을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물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위’란 무엇인가?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를 말합니다. 두 가지 방식, 곧 그 질서 안에 놓인 특별한 방식을 말합니다.
‘아래’ 질서의 통치원칙은 자기중심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위’ 질서의 통치원칙은 사랑의 성령입니다. 이는 우리는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위”로부터 태어날 수 있는가? 곧 ‘위’로 올라가는 일이 가능한가?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신원에서 가능합니다. 그분이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길은 “내려오신 분”과 함께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함께 올라가게 됩니다. 내려와 죽음을 건너 지나가신 분, 곧 아래로 내려옴(katabasis)을 통해 ‘위’로 올라가는 분을 따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아래의 것들로부터 위의 것들로 지나갈 때, 파스카는 ‘위를 향해 지나감’(anabasis)가 됩니다. 이를 <필립비서> 2,6-12절의 <그리스도 찬가>는 잘 드러내줍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내려가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 내려감에, 올라가는 대 역전의 삶이 있고, 거룩한 바꿈, 거룩한 교환이 있게 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콜로 3,1-3 참조). 아멘.
그가 그렇게 고백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강한 믿음 때문이라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아직도 그의 믿음이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3,5.7)
'다시 태어남!'
이는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 안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하고, 오늘 독서(사도4,32-37)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 아름다운 신자들의 공동체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사도3,32.3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의 모습이고, 지금 우리가 건설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요즘 우리 안에 팽배해 있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너에 대한 무관심주의! 여기에서 파생되어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는 양극화 현상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사람답게 오늘도 굳게 믿고, 또 이 믿음이 삶으로 실현되어 아름다운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그런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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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어제는 하느님의 은총의 이끄심을 느끼는 하루가 되셨는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영적 대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 즉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니코데모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지만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시며,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어쩌면 오늘 니코데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는 때로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얕은 지식을 내세우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의 상황을 앞세워, 하늘의 일을 뒷전으로 미루어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고의로 눈을 감고, 마음을 닫아 버림으로써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어둠 속에서 헤매는 답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루카는 오늘 독서를 통해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그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공유하도록 직접 당부하신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형제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들을 헐고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눔으로써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체는 서로가 행복해지는 삶을 체험할 수 있었고, 나아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기쁘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의 모습이고,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을 믿고,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닫힌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최소한 니코데모가 새로운 가치관을 갈망하여 밤의 암흑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듯이, 우리 또한 살아 있는 ‘영적 세계’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찾고 또 그렇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위로부터 태어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갔듯,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실업자 100만 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절대적, 상대적 가난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내어놓을 부분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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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성주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우리 집에 머물도록 청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어제 복음에 이어 니코데모와 예수님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제는 아니었지만 율법을 공부하는 열심한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코데모는 자기의 생각이 맞다고 무조건 우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틀리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우리에게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열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데, 니코데모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도 아직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름이 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이 공부해야 되고, 지켜야할 율법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외우고, 또 실천까지 해야 되기에.....
그렇게 이름이 난 니코데모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미처 몰랐던 것이고 그냥 외울 수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은 외워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새로 나야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교시절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이해하기보다는 무조건 외우려고만 했습니다. 아니 기도문도 외우려고만 했습니다. 이해하지는 않고, 남들보다 못하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성령의 힘으로 부활신앙이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지고, 예수님에 대한 기도문이 마음으로 와 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름난 스승 니코데모가 율법을 외우지 못해서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이 손수 인간이 되신 그 사랑을 알고 싶고, 받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찾아갔지만,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 나야 되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니코데모는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을 끌고 오지 않은 성전경비병들에게 질책하는 수석 사제들과 다른 바리사이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7,51-52).”라고 핀잔을 주는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지고,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 4장이 전하는 독서의 말씀이 이를 잘 알려줍니다.
초대교회 신자 공동체는 자기가 남들보다 못하면 어떻게 되지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꺼이 자기 것을 내어 놓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율법 속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랑표현입니다.
부활신앙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고, 내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힘을 받아드리는 용기입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이 주는 믿음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니코데모처럼 예수님을 찾아가야 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귀를 활짝 열고서 들어야 되고, 또한 주님을 우리 집에 머물도록 청해야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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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우정 베드로 신부님]
<대화를 하십니까?>
사람들이 일상을 풀어나가는 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대화가 오가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여러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며, 때로는 생각지 않은 이익을 얻기도 합니다.
이처럼 유익한 대화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이 악화되기도 하고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며 엄청난 손해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대화 속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화가 때로는 논쟁이 되고, 또 논쟁이 이따금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서로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화·논쟁·싸움으로 이어지는 구도에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할 때 자신이 말할 것을 미리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아는 것, 경험한 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그보다는 내가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상대방에게 내가 설득당하지 않을까 하는 데 더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계속되는 대화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신 안에만 머뭅니다. 그래서 니코데모처럼 자신의 이해를 위한 질문에만 급급합니다. 그러다 보면 일반 상식조차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시기보다 언제나 우리의 말을 경청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상대방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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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2000년대 인간들에게 야단칠 일>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2~15)
예수님 정말 너무 말씀 잘 하셨습니다. 바로 요즈음이 특히 그렇거든요. 세상에 있었던 예수님관련 이야기 열나게 해도 하늘나라 무시하거든요.지금 사람들 니코데모보다 훨씬 진화한 신형 인간들인데도 영 안 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