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7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호주 룰로 광산에서 세계 최대 핑크 다이아몬드 ‘룰로 로즈’를 발굴
룰로 로즈라고 명명된 이 다이아몬드는 170캐럿 크기에 무게 34g으로, 300여년 전 발견된 185캐럿의 ‘다리아-이-누르 다이아몬드’ 이후 최대 크기로 평가된다.
2015년 조선일보 연재 ‘조용헌 살롱’ 1000회 맞아
천리(天理)와 지기(地氣), 동서고금(東西古今)을 종횡한 지 만 11년, 조선일보 연재 칼럼 ‘조용헌 살롱’이 27일로 1000회를 맞았다.
1회 ‘이판 사판’(2004년 9월 2일자)을 시작으로 초기엔 주 3회, 2009년부터는 주 1회씩 쌓아서 이룩한 1000계단이다. 그는 ‘술·담배 안 하고, 사업 안 벌이고, 인터넷 모임 안 들고, 자정 전에 잠들고, 하루 1시간 반 산책하는 것’을 1000회 연재를 이끈 자계(自戒)로 들었다. 또 1000회 중 “적선(積善)하라. 좋은 선생 만나라. 명상하라. 독서하라. 제 팔자를 알라. 명당에 살라”는 내용을 담은 ‘팔자를 바꾸는 방법 여섯 가지’(7회·2004년 9월 16일자)를 호응이 가장 컸던 글로 꼽았다.
조씨는 원광대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했고, 석·박사 학위는 같은 학교에서 고려 불교 연구로 받았다.
2015년 ‘미사일 맨’ ‘국민 대통령’ 압둘 칼람 전(前) 인도 대통령 타계
인도를 핵보유국이자 군사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역으로 국민적 존경을 받아온 과학자 출신의 압둘 칼람(84) 전 인도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이날 저녁 인도 동북부 실롱의 인도경영대학원(IIM)에서 ‘강의하던 중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칼람은 12억 인도 인구 중 13%에 불과한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이라는 신분상 한계를 딛고 ‘인도의 역대 최고 인기 대통령 중 한 명’(워싱턴포스트)이 됐다.
그런 생애의 단면을 말해주는 두 애칭이 ‘미사일 맨’과 ‘국민 대통령’이다.
인도양의 낙도 라메스와람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칼람은 코코넛 열매로 끼니를 잇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부모와 은사들의 격려 속에 과학 영재로 성장했다.
마드라스 공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60년 인도국방연구개발기구(DRDO)에서 헬리콥터를 설계하는 것으로 과학자 이력을 시작했다. 이후 인도우주연구소(ISRO)로 옮긴 뒤 1979년 자체 기술로 개발한 위성 ‘로히니’가 성공적으로 발사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며 ‘국민 과학자’로 떠올랐다.
이후 칼람은 탄도미사일 개발과 2차 핵실험(1998년) 등 인도의 국제적 영향력을 끌어올리는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여느 정치인보다 높은 인기를 누렸고, 국방개발연구소장과 정부수석과학고문을 지냈다. ‘미사일맨’이라는 별칭에 ‘국민 대통령’이 추가된 것은 인도국민당(현 집권여당) 소속으로 2002년 대통령에 선출(의회간선)되면서다. 국정 운영의 실권이 총리에게 있는 인도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국가원수이다.
2006년에는 인도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방한해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했고,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앞둔 2011년에도 자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와 이명박 대통령과 만났다.
2011년 서울 서초구와 강남 폭우 사망 16명 실종 6명 부상 41명 건물 7,500동 침수, 강원도 춘천 산사태 봉사활동 대학생 10명 포함 사망 13명 부상 26명,
2009년 박세직 향군회장 별세
박세직(朴世直·76)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장이 2009년 7월 27일 오후 4시16분쯤 자이거스성 급성폐렴으로 서울아산병원에서 별세했다.
경북 구미에서 출생한 박 회장은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으며, 1956년 육사 12기로 졸업한 뒤 베트남전에도 소령으로 참전했다. 1961년 육사 교수를 시작으로 76년 국방부장관 보좌관을 거쳐 81년 수도경비사령관을 역임했다. 82년 소장으로 예편한 뒤 안기부 2차장, 총무처장관을 지냈으며 86년 체육부장관에 임명돼 체육계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같은 해 서울올림픽위원장을 맡아 2년간 대회를 준비했고 이후 안기부장·서울시장 등을 거쳐 92년 14대 민자당 소속으로 구미에서 당선돼 15대까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6년 4월 제31대 향군회장에 취임해 3년 임기를 채운 뒤 지난 4월 32대 회장에 재선됐다.
화랑무공훈장과 보국훈장 천수장, 청조근정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받았다.
2005년 행정계층구조 개편을 위한 주민투표 제주에서 첫 실시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를 하나의 광역자치단체로 만드는 방안을 선택했다.
제주도가 행정계층구조 개편과 관련, ‘단일광역자치안’(혁신적 대안)과 ‘현행유지안’(점진적 대안)을 두고 주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혁신안이 전체 유효투표 14만5388표 가운데 57%인 8만2919표를 얻었다. 또 점진안은 43%인 6만2469표를 얻었다.
혁신안은 제주시·북제주군, 서귀포시·남제주군을 묶어 2개의 시로 통합하는 방안이다. 시장 2명은 도지사가 임명하며, 시·군의회도 폐지하게 된다.
이번 제주도의 주민투표는 작년 7월 시행된 주민투표법에 따른 첫 주민투표이다.
화교 111명과 일본인 3명 등 제주에 영주하는 114명의 외국인도 사상 처음으로 투표권을 얻었다.
2005년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미국의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오후 11시 39분(한국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州) 케이프커내버럴 케네디우주센터에서 발사됐다.
7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디스커버리호는 12일 동안 우주왕복선의 안정성 시험,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보급품 및 장비 전달의 임무를 수행한다. 엄청난 불꽃과 연기를 내뿜으며 발사대를 떠난 디스커버리호는 발사 2분 만에 2개의 연료추진탱크를 성공적으로 분리하고 8분 40초 만에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우주왕복선의 발사 장면과 고도 상승 장면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2개의 항공기가 상공을 비행했으며 지상에서는 무려 100개 이상의 카메라가 동원됐다.
이로써 지난 2003년 2월 컬럼비아호 폭발 사고 이후 중단됐던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왕복선 계획은 2년 반 만에 재개됐다. 디스커버리호는 당초 지난 13일 발사 예정이었으나 발사 2시간 전 연료탱크 센서 결함이 발견돼 발사가 미뤄졌었다.
나사의 우주 비행 계획 예정표에 따르면 디스커버리호는 비행 3일째에 국제우주정거장에 도킹해 임무를 시작하게 된다. 우주에 머무는 12일 동안 총 3차례(비행 5일째, 7일째, 9일째)에 걸쳐 선체 밖 우주 유영을 실시하며 일본인 노구치 소이치와 1명의 승무원이 참가한다.
2003년 미국 코미디언 밥 호프 별세
‘20세기 가장 위대한 연예인’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받았던 밥 호프가 2003년 7월 27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호프는 배우이자 코미디언, 가수, 쇼프로그램 진행자 등 만능 연예인이었다. 70여년간 75편의 영화와 475개의 TV 프로그램, 1000여개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특유의 재치와 웃음을 선사했다. ‘미스터 엔터테인먼트’, ‘코미디의 왕’, ‘백만불짜리 웃음’ 등으로 묘사되는 호프는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연예인이었으며,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엔터테이너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는 특히 한국 등 전 세계에 주둔하는 미군들을 위한 위문 공연에 애정을 보였는데, 1941년부터 50여년간 1000만km를 여행하며 미군 1000만명을 직접 만났다. 이런 공로를 기려 미 정부는 ‘밥 호프 미국 애국자상’을 제정했다,
1903년 영국 엘샘에서 7형제 중 5번째로 태어난 그는 4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로 이민와 12세 때인 1915년 찰리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일찌감치 연예인 자질을 보였다. ‘싱가포르로 가는 길’, ‘모로코로 가는 길’, ‘리오로 가는 길’ 등 7편은 당시 인기 폭발의 시리즈 영화였다. 첫 영화 ‘1938년의 대방송’에서 셜리 로스와 함께 부른 노래는 오스카상을 탔다.
2002년 정부 ‘항공기운항 안전법’ 시행 결정 - 기내 휴대폰·흡연 벌금 최고 100만원
항공기안전운항법 세부 규정이 정비됨에 따라 기내 난동 승객에 대한 단속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항공사들은 별도 방송이나 안내문을 나눠주지 않고, 규정 사항을 위반하는 승객들에게만 따로 경고문을 보여준 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착륙 후 곧바로 경찰에 넘길 방침이다. 그동안 외국과 달리 법적 제재 방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던 항공사들은 이번 조치를 통해 기내 질서가 어느 정도 잡힐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처벌 대상이 되는 행위는 다양하다. 일단 비행 안전을 위해 승무원들이 필요로 하는 경우 승객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재량이 대폭 확대됐다. 폭행·협박·위계 등으로 승무원의 정당한 직무 집행을 방해하고 안전 운항과 승객 위험을 초래하면 10년 이하 징역을 받을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 폭언, 고성방가, 흡연, 성추행을 하거나 노트북컴퓨터·휴대전화 등 전자기기를 허락없이 사용하면 100만원 이하 벌금, 항공기 착륙 후 내리지 않고 점거·농성하면 3년 이하 징역 혹은 1000만원 이하 벌금이다. 기장 승낙 없이 조종실에 가려 하거나 기장 업무를 방해하면 1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 벌금이다.
테러를 시도하거나 협박으로 항로를 변경하려는 등 폭력적인 행위는 최고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2002년 우크라이나 에어쇼에서 저공곡예 전투기가 관중석 덮쳐 83명 사망
2002년 7월27일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리비프에서 지역 공군부대 창설 60주년을 기념하는 에어쇼가 열렸는데, 저공곡예를 선보이던 전투기가 느닷없이 화염에 휩싸인 채 관중석을 덮치는 바람에 83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한 것이다. 사망자 숫자로 보면 이번 사고는 에어쇼 사상 최악의 사고다.
행사 첫날인 이날, 주말을 맞아 대개 가족 단위로 약 1500명이 에어쇼를 보기 위해 모였다. 2분 정도 곡예 비행을 하던 수호이(Su)27 전투기 1대가 돌연 활주로 근처의 나무와 충돌한 뒤 활주로에 있던 다른 항공기의 날개를 치고, 불길이 솟은 채 약간 상승했다가 관중석으로 추락했다.
현지 TV 방송사 마르타 브루트코프스카 기자는 “폭발하는 순간 집 한 채만큼 거대한 화염 덩어리와 함께 시꺼먼 연기가 솟아올랐다”며 “수백명의 관중들이 피를 흘리며 대피하느라 마구 달려 나갔으며, 행사장에는 손·발 등이 떨어져나간 시체가 나뒹굴고, 가족들을 찾기 위한 확성기 안내 방송이 이어지는 등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고 말했다. 탑승했던 2명의 조종사는 추락 직전 비행기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사고 원인이 엔진 결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고 상황을 찍은 필름을 본 러시아 전투기 조종사들은 조종사의 실수로 보고 있다. 구 소련 전투기 조종사 안토쉬킨은 러시아 NTV와의 회견에서 “Su27은 성능은 물론 안전성을 입증받아 조종사들이 선호하는 기종”이라며 “사고기가 지나친 저공곡예를 시도한 것이 사고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에어쇼는 일반적으로 관객석으로부터 적어도 150~2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날 사고기는 관객석에 지나치게 근접 비행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사고는 에어쇼 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됐다. 지금까지 최악의 사고는 1988년 독일의 미군 공군기지에서 열린 에어쇼 도중 이탈리아 전투기가 관객석을 덮치며 70명의 사망자와 400명의 부상자를 낸 것이다.
1999년 ‘해방신학’ 대가 카마라 주교 별세
브라질 빈곤층의 대부이자 중남미 ‘해방신학’ 운동의 기초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엘데르 카마라 주교(90)가 1999년 7월 27일 브라질 동북부 페르남부쿠주 레시페에서 지병으로 숨졌다.
카마라는 1964~1985년 브라질 군사독재 시절 활발한 인권옹호 운동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기독교 복음운동의 사회적 참여를 정당화한 해방신학 이론작업에 참여해 반대자들로부터 ‘붉은 주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1952년 43살 때 레시페 주교에 오른 카마라는 이 해에 초대 브라질 주교회의 의장이 됐으며, 1962~1965년 제2회 바티칸 공회를 주도하면서 교계의 광범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또 교외 빈곤층 지역에서 검소하게 살았으며,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등 가난한 사람들의 사제로서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등장 뒤 가톨릭 교회내에서 해방신학 운동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그의 영향력은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1985년 주교 자리에서 물러났다.
1998년 클린턴 미국대통령 섹스 스캔들과 관련, 클린턴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르윈스키양이 특별검사에게 실토
1996년 집중호우로 군부대 매몰
경기-강원 북부지방에 내린 집중호우로 1996년 7월 27일 전방 군부대 막사들이 매몰되고, 경기도 연천군과 문산읍 일대가 물에 잠기는 등 1987년 태풍 셀마호 이후 최악의 물난리가 빚어졌다.
이날 새벽 최고 5백77mm의 폭우가 쏟아져 내린 전방 산악지대 군부대 막사들이 산사태로 매몰되는 사고가 속출했다.
육군 7개 부대와 공군 1개 부대에서 산사태 등 수해사고가 발생해 60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실종됐으며 27명이 중상을 입었다.
또 오전 5시30분쯤엔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소재 육군 승리부대 공병부대 막사 주변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대대막사 2채를 덮치면서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실종했으며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오전 6시쯤에는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대성산 공군 레이더 기지에서 산사태가 발생, 장병 15명이 매몰돼 이중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실종됐다.
전날인 7월 26일에도 강원도 철원군 소재 군부대 군막사를 강타해 20명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1996년 애틀랜타 도심 올림픽공원서 폭탄테러 - 2명 사망, 110명 부상
1991년 콘돌호 통일쌀 5천톤 북송
42년 만에 남북 직교역의 물꼬를 트는 호남산 통일쌀 5천톤이 제3국 수송선인 콘돌호(3천6백톤)에 실려 1991년 7월 27일 오전 11시 출항식을 갖고 목포 삼학도 부두를 출발해 29일 북한 나진항에 도착했다. 교역 당사자인 천지무역측이 마련한 출항식에는 김흥래 목포시장, 천지무역 회장, 콘돌호 선원, 시민 등 5백여명이 참석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봤다.
콘돌호는 당초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나진항으로 직항할 예정이었으나 계획이 변경돼 공해상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 이번 직교역은 1991년 5월 개시될 예정이었다가 북한측 사정으로 두달여동안 지연된 끝에 남북무역 당사자간 합의로 재개됐다. 이에따라 콘돌호는 7월 18일 목포항 삼학도 부근에 입항, 20일부터 하루 6백~1천톤씩 7일동안 5천톤의 쌀을 모두 배에 실었다. 이 쌀은 전남지역 16개 시군, 13개 도정공장에서 찧어 통운차량을 이용, 목포로 수송됐다.
1989년 인도에 태풍과 홍수 강타 사망 800명
1989년 대한항공 여객기, 리비아 트리폴리공항에 착륙중 추락
대한항공 KE 803편 DC10기가 1989년 7월 27일 오전 7시12분쯤 리비아의 트리폴리공항에 착륙하려다 추락, 80여명이 사망했고 119여명이 부상했다. 여객기에는 승객 181명과 승무원 18명 등 모두 199명이 타고 있었으며 한국인 승객 대부분은 중동진출 건설업체 근로자들이었다. 사고 여객기가 추락할 당시 트리폴리공항 상공은 가시거리 2백40m의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으며 여객기는 착륙 직후 화재에 휩싸인 채 동채가 두동강이 나 부서졌다. 사고 여객기는 7월 26일 오후 6시40분 서울을 출발, 방콕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를 거쳐 이날 트리폴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1989년 살아있는 사람의 간이식 수술 세계최초로 성공
세계최초로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간의 일부를 추출, 이식수술이 성공했다. 호주의 로열 알렉산더병원은 1989년 7월27일 일본인 어머니가 자신의 간을 떼내, 담즙관이 없어 사망직전에 이른 자신의 한 살짜리 아들 후지야마 이이치로군에게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 두 사람 모두 건강하다고 발표했다. 병원측은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옮겨진 어머니는 간이 6주일 내에 원래 크기로 되돌아갈 것이며, 아들은 아직 위험한 단계지만 양호한 상태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병원측은 지난 1985년이후 1백여건의 간이식 수술을 해왔으며 살아있는 어른의 간을 잘라 이식하는 방법을 연구, 이번에 세계최초로 성공했다고 덧붙혔다. 지금까지 간이식 수술은 주로 뇌사상태 등 사망에 이른 사람들로부터 간을 절제, 이식수술을 해왔다.
1989년 울릉도 관광헬기 추락
1989년 7월 27일 오후 3시 25분경 경상북도 울릉군의 울릉도와 영덕군을 오가는 우주항공 소속 헬리콥터가 바다에 추락해 13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 6명이 구조되었다.
울릉도 관광 헬기는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의 영덕삼사해상공원과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을 오가는 관광 헬기이다. 당시 헬기는 취항한지 다섯 번째 밖에 되지 않았다. 헬기는 울릉도를 출발해 경상북도 영덕군의 강구면으로 가기 위해 7월 26일 오후 2시 54분 울릉도에서 이륙했다. 그러나 이륙 18분만에 헬리콥터의 엔진오일이 갑자기 0으로 떨어졌고, 기장은 빠른 시간안에 울릉도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엔진을 최대속도로 가동시켰다. 그러나 오후 3시 25분, 울릉도를 1 km 남겨두고 헬리콥터의 고도가 빠르게 떨어지자 기장은 바다 위에 착륙하기 위해 부유기 장치를 가동시켰다. 그러나 왼쪽 부유기의 이상으로 헬리콥터는 낙하산이 펴지고 바퀴에서 풍선이 떠오른 채 바다에 추락했다. 이때 기체는 3분의 1가량이 수면위에 떠있는 상태였는데, 이때 기체 창문을 깨고 빠져나온 탑승자 6명은 사고해역 부근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에 의해 구조되었고 나머지 14명은 빠져나오지 못해 결국 13명은 숨진채 발견되었고 1명은 실종되었다.
1985년 63빌딩 준공
동양최고를 자랑하는 서울 여의도 63빌딩이 1985년 7월 27일 개관돼 일반인에게 첫 선을 보였다. 아침부터 몰려든 관람객들로 연건평 5만2백평에 지하3층 지상60층 건물은 하루종일 인파로 북적거렸다. 관람객은 모두 3만여명이었다.
관람객의 인기품목 1위는 최고층에 자리한 전망대로 동시 수용인원이 1천2백여명이나 됐지만 관람 희망자가 넘쳐 장사진을 이루었다. 지하 1,2층의 대형수족관에도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총규모 1천32평인 수족관은 모두 54개의 전시수조로 구성됐으며 이 수조사이로 나있는 관람통로길이도 2백50m에 이르렀으나 발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별관 지하1층에 있는 입체영화관은 특히 어린이에게 인기가 높았다. 관람객들은 가로 25m, 세로18m로 일반영화관보다 3배나 되는 초대형 화면을 보고 신기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개관기념으로 처음 상영한 영화는 미국영화 `창공을 날아라`였다
1981년 경남 거창서 신석기시대 지석군 발견
1981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남북체육회담 개최 촉구
1980년 팔레비 전 이란국왕 사망
팔레비 전 이란국왕이 1980년 7월 27일 사망했다. 1941년 아버지의 퇴위로 이란 팔레비왕조 제2대 황제에 즉위했으나 영국, 소련의 점령 및 황제제도 반대세력의 대두등으로 황제권의 기반은 약체였다. 이에 1957년 사바크(비밀경찰)를 설치하고, 미국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함으로 황제권을 확립했으며, 그 해 팔레비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1963년에는 석유수출을 배경으로 농지개혁, 여성참정권을 골자로 한 근대화정책 `백색혁명`을 단행했고, 1973년에는 제5개년계획을 실시했으나 1975년부터 석유, 중공업 편중정책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해 1978년에는 반정부 데모를 초래했다. 결국 1979년 1월 이집트로 망명한 뒤 복권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로코, 바하마, 멕시코, 미국, 파나마를 전전하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1979년 고려대 등반대 북미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 봉 오름
1976년 중국 당산에 강진 65만명 사망
1976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수상, 록히드사건으로 구속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수상이 1976년 7월 27일 구속돼 동경구치소에 수감됐다. 1973년 8월부터 1974년 2월까지 약 7개월동안 록히드사로부터 4회에 걸쳐 5억엔의 현금을 받은 혐의였다.
1976년 2월 미 상원 처치위원회에서 록히드사의 공작자금이 일본 고관에게 전달되었다는 증언이 발단이 돼 일본의 여당은 전후 최대의 혼란에 직면케 되었고 미키수상은 정치생명을 걸고 강력 수사를 지시해 마침내 이날 다나카 전수상을 체포하게 됐다.
일본의 언론들은 사건의 결말에 대해 `일본판 워터게이트` 즉 여론의 승리라 보도했지만 다나카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집권당내 파벌싸움의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록히드사건은 집권당의 자주적 개혁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 미국에서 폭로된, 움직일수 없는 증언에 의한 사후수습책이었으며 전후의 민주개혁에도 불구하고 명치유신이래 오랫동안 구조화된 보수금권정치의 구조적 오직(汚職)현상이었다
1974년 미국 하원 사법위 닉슨대통령 탄핵 결의
1972년 AFP통신, 임표(林彪) 쿠데타사건 보도
1969년 양평서 시외버스 남한강 추락, 50여명 사상
1965년 고 이승만 전대통령 장례식
1965년 미군기 월맹미사일기지 첫 폭격
1963년 박정희 의장, 민정(民政) 이양 일정 발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 7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10월 중순, 국회의원선거를 11월 하순에 실시할 것이며 군정후 최초의 국회는 12월 중순에 소집해 제3공화국의 탄생이 선포될 것이라는 총선거실시계획을 발표했다.
박의장의 민정 이양 일정 발표에 대해 재야 각 당은 "이번만은 다시 번의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전제를 붙여 환영했다. 박의장이 밝힌 민정 이양 일정은 다음과 같다.
1.공고중인 개정헌법의 개정안의 철회를 위한 조치를 즉시 취한다
2.대통령선거는 1963년 10월 중순경에 실시하고 국회의원선거는 11월 하순경에 실시한다
3.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해 정부는 선거관계법의 정비 및 그 운용에 만전을 기한다 4.총선거 후 최초의 국회는 12월 중순경에 소집되며 동시에 제3공화국의 탄생이 선포될 것이다.
1961년 한국-니제르 국교 수립
1959년 과학연구소에서 한국 최초의 로켓 발사
국방부 과학연구소, 인천 고잔동(古棧洞) 해안에서 2단 로켓인 67호 로켓, 3단 로켓인 556호 로켓 시험발사 성공했다 본격적으로 로켓 개발을 시작한 것은 1989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의 창설과 1993년 과학로켓 KSR-I의 발사를 꼽는다. 1997년에는 중형과학로켓 KSR-II의 발사를 성공하였고, 2002년에는 액체연료과학로켓 KSR-III의 발사에 성공하였다. 한편 1996년부터 자력 위성 발사능력의 확보를 목표로 삼기 시작하여, 수 차례의 시도 끝에 나로호의 발사에 성공하여 대한민국의 우주발사체 개발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되었다.
1956년 야당계 민의원 지방선거에 대한 관권개입 규탄(국민주권옹호투쟁위 결성)
1955년 오스트리아 독립
1954년 베트남, 제네바협정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
1953년 6ㆍ25전쟁 휴전협정 조인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6.25전쟁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3년1개월,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을 개최한 지 2년만의 일이다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과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가 최종적으로 서명한 협정은 영어와 한글 한문으로 작성했다
이 협정으로 남북한 사이에서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되고 적대행위가 정지되는 국지적 정전 상태에 들어갔다
1952년 10월 이후 교착상테에 빠져있던 양측의 협상은 1953년 6월 핵심쟁점이었던 포로교환 문제가 타결되면서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과 공산군은 일시에 한국에서 철퇴하되 그 전에 한·미 양국간에 공동방위조약이 체결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이 대통령은 이후 반공포로석방, 북진통일주장, 등으로 유엔과 미국을 압박해 정전협정 조인 전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골자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1950년 공산군, 하동서 진주방면으로 침입(채병덕소장 전사)
1949년 최초의 제트여객기 `코멧` 비행 성공
세계최초의 제트여객기 `코멧`이 1949년 7월 27일 첫 비행에 성공했다. 코멧 1호기는 7월 25일에 완성돼 26일 지상주행 테스트를 거친 후 마침내 이날 최초비행에 성공했다.
코멧은 길이 28.35m, 폭 35.05m의 날씬한 유선형 기체였다. 주날개에 장착된 터보제트엔진은 총중량 48톤이나 되는 비행기를 시속 760km의 순항속도로 최장 4000km나 비행할 수 있게 했다.
4명의 승무원과 36명의 승객이 별도의 장비없이 고도 1만2천m 상공에서 쾌적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됐다. 영국은 최초 비행에 성공한 후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로부터 주문을 받아 1952년 5월 2일에는 영국 런던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간의 정기항로에 취항했다
1945년 영국 총선거(26일)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애틀리 내각 성립
1938년 서울 시장에 가격표를 붙인 상품 등장
1917년 스위스의 외과의사 코허 사망 - 1909년 갑상선 연구로 노벨상 수상
1915년 평남북에 대홍수
1914년 주시경 선생 사망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 한말의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1914년 7월 27일 타계했다. 38세였다.
황해도 평산 태생으로 호가 한힌샘인 선생은 우리 말과 글을 과학적이고 체계화한 국어 중흥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의 국어사랑은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쓰자는 주장으로부터 시작됐다. 독립신문 교열을 보면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쏟은 선생은 이 신문에 기고한 `국문론`을 통해 한글이 한자에 비해 과학적으로도 훨씬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생은 1897년부터 배재학당에서 4년간 신학문을 공부했고,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협성회보를 발간했고, 한글 기사체에 대한 통일과 연구에 몰두했다. 여러 학교와 강습소를 찾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김두봉 이규영 최현배 장지영 이병기 등 선생이 길러낸 문하생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창설했고 1933년 드디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요절한 탓에 비록 우리말 연구의 끝을 맺지는 못했지만 선생이 길러낸 제자들은 20세기 전반기 국어학의 대가로 우뚝솟아 선생의 뜻을 이어갔다. 1980년 선생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저서로는 `국어문법` `월남망국사` `한문초습` `국어문전음학` `국문초학` `말의 소리` 등이 있다.
1909년 舊 한국은행 조례 공포
1907년 보안법 공포
1894년 갑오경장 단행
1877년 `자장가 변주곡`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도흐나니 출생
1862년 신소설 작가 이인직 출생
1844년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돌턴 사망
1830년 프랑스 7월혁명 (~7.29)
1830년 7월 27일 小부르주아, 노동자, 학생이 주축이 된 파리 민중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7월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혁명은 이틀 전인 25일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가 발표한 `7월 칙령`이 발단이 됐다. 출판 자유의 정지, 하원의 해산, 선거자격의 제한 등을 포함하고 있는 칙령은 정부에 불만을 품은 저항세력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28일에는 바리케이드가 파리 전역으로 확산되며 다시 그 다음날 파리 민중은 치열한 시가전을 통해 군대를 제압하고 왕궁으로 돌진했다.
혁명은 성공했고 국왕은 영국으로 달아났다. 국왕 샤를 10세는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에서 사라진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입헌정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구제도에로의 복귀를 원해 극단적인 반동정책을 실시했다. 시민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경제침체도 그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자유주의자들은 1830년 5월 총선거에서 하원에 대거 진출하는 성과로 국왕에 맞섰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7월 선거를 실시했으나 또다시 반정부세력이 다수를 점하자, 국왕은 결국 당시 알제리 진출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강압수단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 것이 `7월 칙령`이었다.
7월 혁명은 부르봉가(家) 샤를 10세의 보수적 입헌왕정을 오를레앙가 루이 필리프의 자유주의적 입헌왕정(7월 왕정)으로 바꾸는 것에 그쳤다. 바리케이드 뒤에서 시가전을 치른 세력 가운데는 공화파도 많았지만 자유주의 저널리즘을 통해 혁명을 이끈 부르주아지는 입헌왕정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 7월 왕정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1498년 무오사화 일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