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물감 파는 아가씨 / 강성남
그 손님 앞에선 말이 필요 없었다
말하는 게 귀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계산이 끝나면 목례를 하고 갔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몇 분의 시간이 좋았다
다른 손님들처럼 깎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4B연필이나 톰보우 지우개를 덤으로 넣어주었다
그에게선 묘한 향기가 났다
대숲이나 솔숲에서 불어오는 테레핀 향이 났다
때가 되면 물감을 사러 오고, 골라주면 그만이었다
핑크, 블루, 화이트, 그린, 옐로우, 카키그린……
울트라마린블루, 스카이블루, 코발트블루……
레드와인과 블랙을 제일 많이 사 갔다
곱슬머리에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달고 다녔다
일제 홀바인이나 독일제 스테들러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채화도, 포스터칼라도, 아크릴칼라도, 유화도 낱개로만 사 갔다
내가 백화점이나 다른 매장에 가 있는 날은
그냥 돌아갔다고 동료직원이 전해주었다
내 앞에 서면 눈웃음을 지었는데 저절로 나오는 웃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는 건 가난한 미대생이고 집이 불광동이라는 것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고 했다
포장마차에서 소주와 국수를 먹었다
중학교 때 소년원에 갔었다고, 친구들이 한 여학생을 성폭행했다고
주동자인 그 친구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말없이 강변을 조금 걸었다
황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담뱃갑에 그린 은지화였다
남녀가 가로등처럼 마주 보고 있는 펜화였다
꽃이 필 때마다 편지가 날아들었다
이름 모를 새가 방 앞에 와서 울다 갔다고
귀뚜라미가 새끼를 낳았는데 성냥개비 반만 한다고
딱 한 번 주소지가 있는 편지를 받았다
일부러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의 광기에 찬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어느 순간 우편함에서 편지가 끊어졌다
그 후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직도 그림을 그리는지, 내가 골라준 물감들은 어떤 풍경이 되었는지
지금에야 그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됐다
꼭 살아있기를,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가 나비를 그리면 나는 꽃이 되고
그가 나무를 그리면 나는 새가 된다
그가 빗줄기를 그리면 나는 우산이 되고
숲을 그리면 길이 되고, 수평선을 그리면 나는 햇살이 된다
그가 바람을 그리면 나는 여름나무가 된다
그의 마음에 고인 외로움은 연잎에 앉은 이슬이 되고
그가 강물을 그리면 나는 나룻배가 된다
그의 눈 저 너머에서 불빛이 흘러나오면
어디선가 쇳물 끓는 소리가 난다
그가 밤하늘을 그리면 나는 별이 되고
가을을 그리면 나는 황금물결이 되어 출렁인다
나는 그가 그려준 그림 속에서 시인으로 살고 있다
- 계간 《시산맥》 ( 202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