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마당
조선시대 극락 간 사람들
조선시대 극락 간 사람들 머리말
조선시대 ‘극락에 간 사람들’을 가리면서 가장 먼저 검색해 본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러나 생각했던 대로 조선시대를 기록한 방대한 기록으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실록에서 극락 간 이야기를 찾은 것은 어려웠다. ‘극락’ ‘왕생’ ‘아미따불’ 같은 용어를 검색해 보았지만, 극락 간 이야기를 명확하게 밝힌 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화장을 반대한 상소문에 화장하는 불교도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극락에 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서녘 정토(西方淨土)에 갈 수 있다”라고 한다며 죄 줄 것을 건의하고 있다(세종 2년, 1420년 11월 7일). 배불 정책이 바탕이 된 조선시대 정사에서 ‘극락 간 이야기’를 찾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실록의 논조 속에서 ‘극락에 간 이야기’와 관련된 2가지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정섭 · 오청환, 『한국고승전』 - 조선편(하) - (불교정신문화원, 2014)에서 꽤 많은 성현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은 대부분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래서 CBETA에 실린 『조선불교통사』를 검색하여 원문을 다운 받아 하나씩 대조하면서 다시 꼼꼼히 옮겼다.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 조선편 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초판, 2003 2판 1쇄)에서 찾아 5~6편을 추가했다. 그리고 나모아미따불 소릿값 연구를 위해 모았던 『염불보권문』에서도 3편의 극락 간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밖에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용성 스님까지 이미 염불과 정토에 대한 저서가 있어 유명한 대사들을 하나씩 검토하고 특히 서산대사와 용성 대종사는 거의 논문 수준의 검토를 거쳐 긴 꼬리말을 달았다.
고성 옥천사 청련암 서봉 스님 기록은 인터넷에 마치 설화처럼 떠 있는 것을 현장 확인을 통해서 자세하게 밝힌 것은 마지막에 이룬 성과였다. 그밖에 창신동 안양암, 진주 연화사 같은 곳도 이미 2008년부터 현장 답사하고 자료수집과 사진을 확보하고 있어 이번에 구체적으로 실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는 지관, 『한국고승비문총집』 (가산불교문화연구원출판부, 2000) 조선조 · 근현대편을 늦게 구입해 대조했으나 비문 332편이나 되어 바진 것이 있을 수 있다. 현대편을 쓸 때 좀 더 자세하게 보려 한다.
1. <조선왕조실록 1> 태상왕 이성계 “우리는 이미 서녘 정토를 향하고 있다”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1402) 1월 28일
임금이 태상왕(태조)을 소요산에 가서 뵈었다. 임금이 조용히 잔에 술을 부어 올렸다. 태상왕과 임금은 술이 거나하자 시를 읊고 화답하였다. 술자리에 함께한 종친과 성석린成石璘 등이 태상왕이 대궐로 돌아가실 것을 힘껏 청하였다.
또 사뢰기를,
“염불하고 불경을 읽음에 어찌 꼭 소요산이라야만 되겠습니까?”
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뜻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다. 내가 붇다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들도 이미 서녘 정토(西方淨土)로 향하고 있다.”
고 하였다. 태상왕은 무인년에 병이 든 뒤로부터 마음이 항상 답답하여 즐겁지 아니하기 때문에, 놀기 위한 행사가 점점 잦아졌다.
卍 보정의 꼬리말
유명한 함흥차사 이야기는 실제 많이 부풀려진 것이라고 한다. 『태종실록』은 태조 이성계가 성석린의 요청을 받아들여 태종 원년인 1401년 4월에 한양으로 환궁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이해 11월에 다시 한양을 떠나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逍遙山 절로 갔다. 이듬해 정월에 태종이 직접 성석린과 소요산을 찾아 환궁을 권유하는 장면이 바로 앞에서 본 내용이다.
태조 이성계가 염불하는 것은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라고 했는데, 두 아들은 태종 이방원에게 죽은 이방번과 이방석, 한 사람의 사위는 역시 이방원에게 죽은 경순공주의 부마 이제李濟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어서 큰소리로 “우리들도 이미 서녘 정토(西方淨土)로 향하고 있다”라고 한 것은 아미따 붇다를 향한 염불을 그만큼 극진하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왕자의 난으로 아들과 사위가 죽은 현실을 비관하고 시작한 염불은 독실했을 것이다. 고리 시대 태어나 불교가 생활화된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 기도한 전설에서 꿈을 풀어준 무학대사와 이야기들은 불교와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그러므로 말년 세상을 비관할 때는 자연히 불교에 의지했을 것이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염불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미따불의 48원으로 이루어진 극락은 그런 태상왕 이성계도 받아주지 않았을까?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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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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