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폰테인의 자화상...
나는 사실 발레리나나 발레리노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과 율동만큼은 아주 잔잔한 심정으로 보고는한다. 아주 어렸을때,
우연히 텔레비젼 앞에 앉아있다가 뉴스를 접한적이있다. 브레이킹 뉴스로 전하는 얘기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망명 소식이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가 유명한 발레댄서였는지, 그의 망명소식이 텔레비젼의
뉴스란에서 보여질만큼 대단한 '이슈'였는지 난 전혀 모르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유명인사였고 공산주의체제를 벗어나 자신의 꿈을 펼쳐보이고 싶다는 열정을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 여고 시절, 여학생들이라면 한번쯤 반상위의 천사를 꿈꿔봤을<호두까기 인형>
-마고 폰테인(1919~1991)
페기 후크햄은 댄서로써의 운명을 타고났다. 부친의 직업과 브라질계인 모친을 따라 8살무렵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녀는 6년간을 그곳에서 지냈다. 하지만 부친은 일본의 전쟁참여로 중국에서
돌아오지못하고 모친과 돌아온 그녀는 로얄 발레스쿨에 들어가 자신의 운명과마주쳤다. 영국 서레이 지방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때 이름을 바꾸고 '마고 폰테인'으로 출발을했다. 전설적인 안무가 '타마라 카사비나'와
'올가 프레오프란젠스카'의 조력으로 런던,파리 무대에서 열화와같은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조지 발란친'과의 완벽한 호흡은 이후 프리 마돈나들의 정석적인 교본이 되었다.
그녀의 내츄럴한 재능과 무대에서의 흡인력은 세계적인 성공의 열쇠였다. 그녀는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콘스탄스 램버트'와 사랑에 빠져 더욱 감미롭고 주옥같은 연기를 펼쳤다.
그녀는 이후, 파나마정부의 UN대사로 정계에도 뛰어들었고 영국 황실로부터
1956년 'Dame' 작위를 수여받았다. 훗날 최고의 발레리노 중의 한 명인 '루돌프 누레예프'를
만난 것은 1962년이었다. 그녀 나이 43살때였고 누레예프는 불과 24살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를 초월한 호흡또한 완벽했고 그 기반을 바탕으로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경험담과 안무를
전수해주었다. 로버르토 티토 알리아스와 1955년 결혼하여 그가 죽을때까지함께했다.
☞대표작품 <백조의 호수>,<잠자는 미녀>,<로미오와 줄리엣>,<호두까기 인형>
루돌프 누레예프(1938~1993)
'루디' 루돌프 누레예프의 위대하고 단편적인 삶은 영화 <나는 댄서다,1972>를 통해 잘 드러나있다.
흡사 전설적인 무성영화 스타였던 '루돌프 발렌티노'의 연상케했던 외모로 인해 그는 <발렌티노,1977>이라는
영화에서 발렌티노의 삶을 자연스럽게 그려내기도했다. 1981년 프랑스 감독 '클로드 를르슈'는
다큐멘타리 형식을 빌어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서 그의 삶을 집중 조명하기도했다.
그는 항상 발레리나를 방불케하는 아름다운 스텝으로 유명한 댄서였다.
"상대가 무덤덤하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는 댄서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만큼
그는 모든 일에 낙천한 기질이 있었고 댄서로써의 자부심이 대단한 예술가이이기도했다.
연출가 '피에르 주르당'과 자신의 영적 파트너였던 '마고 폰테인'과의 오랜간의 호흡은
발레댄서로써 누구보다도 깊이있는 연기로 로얄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였던 그의 입지를 튼튼히
해주었고 러시아의 고전발레 무용을 전세계에 설파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위해 조국을 등지고 망영했다는 오명과 에이즈로 사망함으로써 얻게된 동성애에
대한 불명예는 그의 업적과 삶이 남긴 유일한 오점이 되기도하였다.
1983년 파리 오페라단에서 예술감독으로 재직시 남겼던 <라 바야데르>는 그의 유작이되었다.
☞대표작품 <레이몬다>,<로미오와 줄리엣>,<백조의 호수>,<호두까기 인형>,<돈키호테>,<엑스포즈>
나탈리아 마카로바(1940년생)
발레리나이기전에 아주 뛰어난 연극무대의 연기자로써도 명성이 높았던
나타샤는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대표적인 무용수였다. 안소니 도웰의 로얄 발레단과
함부르크 발레단에서 주옥같은 연기를 펼쳐보였던 그녀는 무대연기로 1985년 로렌스 올리비에
연극상을 수상하기도했다. 그녀는 그후 브로드웨이 무대와 뮤지컬 무대를 오가며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으며 1988년 키로프 발레단과 함께했던 런던 무대의 <백조의 호수>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내 삶은 힘들었다. 그러나 다시 그일을 하고싶다"라며 자신이 걸어온
발레리나로써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녀의 인생도 에드워드 카카르와의 결혼으로
안정을 찾았다. 두 사이에는 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알렉산드라 페리, 줄리 켄트 등과 함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대표적인 무용수로 한 시대를 풍비한 정통 프리 마돈나였다.
☞대표작품 <잠자는 숲속의 미녀>,<백조의 호수>,<바트플라이>
-미하일 바리시니코프(1948년생)
영화 <백야,White Night>를 본 사람은 그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남자라는걸
알게될것이다. 그 시절의 다른 많은 예술가가 그랬듯이 그도 구소련의 탄압을 이기지못해
고국을 버리고 서방세계로 도망쳐나와야했다. 절제되고 안정된 동작으로 <돈키호테>,<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작품이되었다. 2001년 초 겨울, 그는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이미 그때 그는 전성기를 지났을 나이였고 이미 은퇴를 한거나 다름없었지만 20대의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적인 연기로 수많은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어쩌면 나는 물론, 발레리노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발레'라는 개념을 각인시킨 무용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태어나 발레광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 발레리노가
되기위한 꿈을 키웠다. 수영,축구,육상 등 못하는 운동이 없을만큼 만능 재주꾼이었던 그는 알렉산더
푸스킨과 루돌프 누레예프의 안무를 보면서 점점 발레에 매료되었고
레닌그라드의 키에프 발레단에 들어가는 행운까지 얻게되었다. 여타 발레리노들이
무대위에서 자신의 신기를 발휘한 반면 그는 좀 더 대중적인 발레리노였다. 그는 영화배우로써도
충분히 인정을 받았고 아내였던 '제시카 랭'과 결합으로 그일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불어를 조금하는 그녀와 영어를 조금하는 그의 만남은 순식간에 불타올랐고 두 사람은 금새
동거생활로 들어갔다. 한때, 전설이 되버린 나탈리아 마카로바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던 그가 우리의
시선 가까운 곳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내가 정직한 첫 댄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지막도 아니다"
아마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조국으로부터 달아났다는 주변의 같은 예술가들의
의혹에 찬 시선때문에 뱉은 말인것 같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발레산업'을 양지로 끌어올렸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영화 <백야>, <터닝포인트>는 그것을 말해준다.
☞대표작품 <터닝포인트>,<호두까기 인형>,<카르멘>,<돈키호테>,<댄서>,<지젤>,<백야>
-안나 파블로바(1881~1931)
러시아의 대표적인 예술산업이기도 한 발레는 그녀와 함께 시작되었고 또 그녀가 존재하던
그 시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무성영화 시대, 그녀는 영화와 무대를 오가며
자신이 미래에 남겨놓은 대단한 유산들을 보급하고 선사하였다. 러시아의 성 페테스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녀는
모친 페드로브나 파블로바의 이름을 빌어 이 세상에 나타났다. 부친의 강력한 지원아래 그녀는
성 페테스부르크의 발레스쿨에 들어가 자신의 전설을 시작했다. 친구이며 라이벌이기도했던
'타마라 카사비나'의 응원은 그녀에게 큰 힘이되었고 1899년 마린스키 발레단의 일원으로 데뷔무대를 치렀다.
무난한 데뷔을 시작으로 그녀는 1910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 데뷔하였고
미국과 유럽을 총망라하는 세계적인 투어에 들어갔다. 특히 유럽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호주에서의
평가는 대단했다. 모두들 그녀의 안무에 반했고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런 성공은
그녀의 사업가적인 기질을 야기시켰다. 댄서였던 파트너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합작 회사를 차려
후배들을 양성하고 자신들만의 작품을 쏟는데 최적의 기반을 마련하기도했기때문이었다.
사업가인 귀족 '빅터 단드레'와의 결혼으로 그녀는 안정감과 동시에 물적으로도 충분한 지원을
받게되었고 그러한 그녀의 안정된 심리상태는 그녀의 연기에서 그대로 표현되었다.
그녀의 대표적인 파트너이며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과의 8년간(1899~1907)의 마린스키
발레단 시절은 그녀 발레인생의 최고 전성기였다. 두 사람은 안무는 물론, 외적인 사생활면에서도
부부라 할만큼 특별한 일치를 보여주었지만 쉰살이라는 아직 창창한 나이에 늑막염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뜨고말았다. 이후, 그녀가 남겨놓은 예술적 유산은 모든 후배 발레리나들의 지침서가되었다.
그 밖에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대표적인 무용수였던 "줄리 켄트'와
너무나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던 "버릴 그레이"도 최고의 발레리나로써
지난 시대와 현시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댄서'들이었다.
-줄리 켄트의 연기 모습...
-버릴 그레이의 연기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