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전쟁을 만난 것은 다섯 살 때다. 해방과 더불어 함경북도 나남에 살던 가족들이 15년 만에 어렵게 고향에 돌아왔지만 작은 아버지에게 맡겨놓고 간 논 일곱 마지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형님과 두 누님에 모두 여섯 식구가 목숨 걸고 찾아온 고향은 가난이 대신 맞아주었다. 아버지는 대목장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도록 일하였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가난한 삶은 전혀 나아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미래의 희망도 요원하였다. 나는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 남의 집 문간방 하나에 여섯 식구가 오글거리며 생활하는 중에 다섯 형제의 막내로 해방 된 다음해 여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덕분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독한 가난과 같이 살아야 하였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는 이웃집 소를 먹여주고 아침저녁을 얻어먹으며 배를 채우는 것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였고 학교를 갔다 와서는 꼴도 베고 방학 때가 되면 아침 먹고 출발하여 저녁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오는 먼 산에 땔 나무를 하러 다녔으며 늘 집안일을 도우면서 공부는 틈틈이 하였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는 중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은 한국전쟁 때 내가 보았던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대목장이셨던 아버지께서 먹고 살기 위해서 가게를 하려고 한길 가에 한창 집을 짓는 중에 철모와 어깨에 나뭇가지를 꼽고 기다랗고 큰 대롱(대포) 같은 것을 몇 사람이 어깨에 메고 많은 군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군군 아저씨인 줄 알고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지르고 반겨주었는데 훗날 알고 보니 바로 인민군이었던 것이다. 한반도 땅 끝인 삼천포, 지금의 사천시에까지 인민군이 점령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 일개 소대 병력인 5~6명은 우리 집 바로 옆,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 대문 옆방을 점령하였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돌아가면서 모두가 먹을 것이 없어서 닥치는 대로 훌쳐 먹던 보릿고개 시절인데도 하얀 쌀밥을 하여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인민군들에게 갖다 주던 일과 그 하얀 쌀밥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낮에는 인민군들 하고 같이 놀기도 하고 인민군들이 어딘가를 향하여 총을 쏘면 옆으로 떨어지는 총 껍데기를 서로 주우려고 박을 찍고 달려들었으며 총 껍데기 주워 모으는 것이 우리들의 취미였고 구슬치기와 같이 총 껍데기 치기도 우리들의 재미난 놀이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버지는 혼자 남아서 집을 지키고 다른 가족들은 모구가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간단한 옷 보따리를 들고 깊은 산 쪽으로 걸어서 가다가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숲이 우거진 곳 여기저기 바위들이 널려 있는 멋진 숲속에서 잠시 쉬는데 나는 어린 마음에 소풍 나온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물장난을 치며 신나게 뛰놀던 생각은 잊을 수가 없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던 중에 그때 그 추억이 생각나서 일부러 찾아가보았더니 피난길에 보았던 그런 숲이 아니고 물도 그 물이 아니었으며 그냥 산골 마을 앞의 나무 몇 그루와 작은 개울이어서 조금은 실망을 하면서 되돌아왔던 일이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 온 가족이 피난을 가서 알지도 못하는 산골 마을에서 며칠을 보대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행이 아버지도 무사하였고 집에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전쟁은 계속 중이라 낮에는 수시로 비행기가 머리 위로 굉음을 울리며 지나가고 멀리서는 총소리가 들려서 밤낮 불안하게 지냈으며 특히 밖에 나갔다가도 비행기가 뜨면 얼른 실내로 들어오거나 집으로 쫒아왔던 생각과 어느 날은 전쟁이 좀 심해서 그랬는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는 비행기가 폭격을 한다고 하여 가족들이 집을 비우고 들판으로 가고 있는데 마침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모두가 논두렁 밑으로 내려가 내 키만큼 자란 벼 사이 무논에 엎드려 몸을 숨겨서 비행기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던 간절함이 지금도 전율되는 듯하다.
하루는 아버지 가게에 가서 놀다가 아버지 눈을 피해서 몰래 오징어 눈(사실은 주둥이)을 빼먹다가 아버지께 들켜서 집으로 와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저녁밥을 먹으면서 아버지 눈치만 보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야단대신 막내 밥 많이 줘야 되겠다고 하시던 말씀이 한참 커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웃 동네에서는 어느 날 밤 선량한 주민이 팔에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에게 산으로 끌려가서 다리에 총을 맞고 죽을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아 다리를 절면서 다니던 아저씨가 있었다.
한국전쟁 때 사망한 숫자가 우리 민간인이 373,599명. 아군이 14만 칠천 명. 북한 민간이 52만 명. 북한군이 2백만 명에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36,991명으로 세계2차 대전을 제외하고는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다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만큼 큰 전쟁이었고 치열했으며 또 세계 16개국, 물자지원까지 22개국에서 지원을 해준 그런 예는 한국전쟁 밖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도 동족끼리의 전쟁이었으니 얼마나 아픈 역사인지는 경험해보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하는 바이다.
금강산으로 가던 철길이 끊어진 채 지나온 74년의 세월
최전방 태풍전망대를 가보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큰 돌기둥에 한국전쟁 때 사망한 미군의 숫자가 36,940위라고 적힌 것을 보면서 위에 적은 숫자와 조금은 차이가 나지만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의 나라 그것도 자기 민족끼리 싸우는 전쟁에 참전해서 한창 젊은 나이에 인생의 참맛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꽃다운 생을 마감하였으니 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은 오죽했겠으며 피부가 다른 민족을 위해서 희생한 그들의 희생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초등학교 시절 해마다 불렀던 6,25 노래가 생각난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려 땅을 치며 의분했던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어찌 우리가 이 날을 잊을 수가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러나 작금의 사회와 정치 현실을 보면 심히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는 누가 주었으며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는 어떻게 지켜온 것인가? 일제하를 제하고라도 해방이후 80년 동안 얼마나 많은 희생과 선진들의 노고가 있었으며 보릿고개를 넘으려고 온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밤낮을 구별하지 않고 일한 덕분이요 먹을 것 제대로 먹지 않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절약한 한 푼 두 푼을 모아서 저축을 하여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 하였고 심지어는 쌀 한 톨을 아끼기 위해서 쌀막걸리를 금하고 학교에서는 혼분식을 장려함과 동시에 도시락 검사까지 하면서 정부시책에 온 국민이 동참하였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러던 것이 불과 4~50년 전 일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망각을 잘 해서 그런가? 그런 과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우리 사회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에 빠져서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찾아보기 어렵고 정치가들은 권력에만 눈이 멀어 민생은 입으로만 외칠 뿐 여야는 극한 대립만 일삼는 현실에 국민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불신만 팽배해진 것 같아 심히 안타깝다. 하물며 생명을 헌 신짝처럼 여기는 일부 몰지각한 현상을 보면서 이 나라 발전을 위해서 살아온 선인들에게, 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한국전쟁 74주년을 맞아 잊어서는 안 될 이날,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다짐하며 “어찌 우리 이날을?” 오래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