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덕궁(昌창성할창德큰덕宮집궁,changdeokgung palace, 큰 덕의 기세가 크게 일어나 잘 뻗어 나가는 집)/자연과 조화를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사적 122호(지정일 1963년 1월 18일)
* 昌(창성할창), 德(큰덕)
- 창 : 기세가 크게 일어나 잘 뻗어 나가다. 영원히 전해질 말. 만물이 창성하다.
- 덕 : 도덕,윤리적 이상 및 선의지를 실현 해 나가는 인격적 능력
* 창덕궁에 정문격인 돈화문. 보통 궁궐문(왕이 산다)은 3문인데 돈화문(백성을 돈독하게 하다. 사랑과 인정을 도탑게 하는 문)은 황제(중국 궁궐)가 산다는 의미의 격식을 갖춘 5대문(황제국)이고 2층 문루에는 종을 매달아 통행금지(인정, 밤 10시 28번)와 해제(파루, 새벽 4시, 33번)를 알리는 종을 쳤다 함. 돈화문은 지어진 이후 화재로 소실(임란)되지 않은 유일한 건물, 2층에는 현재 종각은 없음, 처음 1412년 태종때 지어짐, 임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1609년에 새로 건축. 보물 382호로 1963년 1월 21일 지정 됨.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다포식 우진각지붕 건물. 태종 12년 1412년 창건, 임란 때 소실, 광해군 즉위년 1608년 재건 후 오늘날 까지. 돈화문은 창건 당시에는 소규모이었으나 문종 1년 1451년 돈화문 1차 수리, 연산군 12년 1506년 높고 크게 지음. 처음에는 별궁 용도 였으나 창덕궁이 법궁 구실을 하면서 외국사신 배알, 국상시 상여 통행을 위해 정문을 위엄있고 크게 만듬.
태종 13년 1413년에는 1만 5천여근의 동종을 문루에 걸었다는 기록/조선왕조실록. 초기 건물이 소실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음.
동화문 상층은 판문으로 닫여져 있고, 상태극문이 그려져 있음. 창방과 평방의 단청은 연화머리초와 주화머리초이다.
- 7개의 잡상(어처구니) : 대당사부, 손오공, 저팔개, 사오정, 마화상, 삼살보상, 이구룡 , 명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을 형상화. 잡귀를 막는다는 벽사 의미. 잡상 뒤에는 용두(용머리가), 용마루 끝에는 취두(독수리 머리)
- 삼지창 모양은 머름쇠로 새들이 앉는 것을 막는 기능.
- 문 천장 : 우물반자, 오연화(연꽃)문
* 영조 때 돈화문 문루에 영조가 직접 올라 "이인좌의 난"를 진압, 탕평책
* 창덕궁(昌창성할창德큰덕宮집궁,changdeokgung palace))/사적 122호/종로구 율곡로 99(와룡동 2-71)
태종 5년 1405년 조선 제2의 왕궁으로 창건. 경복궁의 이궁(떠날리,집궁, 궁성 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처) 서쪽에는 경복궁(법궁,정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 임진왜란(선조, 1592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임란 후 270여년 동안 조선 마직막 임금인 순종때 까지 조선 왕궁 구실을 함. 1차(방석,5, 무인정사).2차(방간, 4, 박포의 난) 왕자의 난으로 어수선하고 풍수지리상 경복궁이 좋지 않다는 설,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 태종 이방원이 창덕궁 창건 함. 창경궁과 함께 사용 돼 동궐(동궐도)이란 별칭 有. 일반적으로 왕궁은 남북 중심축에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 되었으나(경복궁, 북경 장안성, 베르사이유 궁전 등)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춰 축조한 한국적인 궁궐임. 돈화문에 맞취 인정전, 대조전이 있는게 아니라 돈화문을 들어서 우측에 위치 했고 인정전(인정전 바로 뒤가 산이 있어 뒤로 구궐 확대를 할 수 없음), 대조전이 자리한 위치가 돈화문에 비해 높음. 1917년 대조전 및 내전이 소실되자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와(경복궁 강년전) 옮겨 짓는 등 원형이 변형, 훼손, 철거 되었던 것을 1991년부터 복원사업 진행 중.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됨.
- 태종 4년 윤신달, 이양달을 보내 이궁을 알아보고 궁궐(이궁)조성도감 설치.
- 태종 5년 1405년 : 인정전(정전, 국보 225호), 선정전(편전, 보물 814호), 희정당(침전, 보물 815호), 대조전(침전, 보물 816호), 후원 건립.
- 태종 11년 금천교 건립
- 테종 12년 1412년 : 돈화문(보물 383호) 건립.
- 세종 원년 : 세종 즉위. 경복궁 근정전에서 창덕궁으로 이어 함.
- 세조 9년 1463년 : 후원를 6만 2천평에서 15만여평으로 확장.
- 성종 승하 : 성종 25년 1494년 대조전에서 승하.
- 연산군 2년 1496년 수문당에서 희정당으로 개칭. 편전으로 사용 함.
- 1592년 선조25년 임란으로 궁궐 모두 소실.
- 1593년 선조 26년 의주에서 환도. 현재 덕수궁 자리 월산대군 후손 저택을 시어소(時御어거할어所바소, 당시의 임금(선조)이 거처하는 집)로 함.
- 임란으로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 1607년 중건 시작해 광해군 5년 1613년 공사 마감.
-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 전각 소실(실화로 소실 됨).
- 1623년 인조 경운궁(덕수궁) 즉조당(침전)에서 즉위식 함.
- 인조 2년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 창경궁이 소실, 경덕궁(광해군때에는 경희궁을 경덕궁으로 부름)으로 이어 함. 1637년 1월 30일(인조 15년) 남한산성에서 45일만에 삼전도의 굴욕(삼배구고두(三拜절배九叩두드릴고頭머리두)- 한번 절하고 세번 땅에 머리를 찧는 것을 3회 반복(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자꾸 숙이는 것 : 청태종에 이 삼배고구두는 인조 뿐만 아니라 왕세자. 대군(강화산성에서 잡혀 온 소현세자, 봉림대군, 공주 등, 강화산성 함락시 김상용은 자결함- 삼학사 김상헌의 형님), 신하 등이 모두 예를 갖추었다 한다) 하기위해 남색 옷을 입고 남한산성 서문을 통해 말을 타고 삼전도에 예를 아침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하고 두척에 배에 나눠타고 한강을 건너 인정때 쯤 창경궁 양화당으로 환궁했다 한다. 한강을 건너려고 할 때 배가 두척밖에 없어 인조 옷을 끌어잡고 배에 타려고 신하들이 야단법석 이었고 환궁하는 모습을 본 백성들은 인조를 보며 "임금님 우리를 버리고 어데로 가시나이까 ?" 하며 통곡했단다. 병자호란 후 청에 끌려간 조선인은 50 ~ 70만 정도.(당시 조산인구는 350만명 정도). 창경궁 양화당은 철종비 철인왕후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 1647년 창덕궁 인조 25년 복구 완료.
- 숙종 30년 1704년 대보단 건립(임란때 명의 도움에 대한 사례. 명 신종을 위해)
- 정조 즉위년 1776년 후원에 규장각 설치.
- 정조 2년 1777년 인정전 뜨락(조정)에 품계석 설치.
- 정조 6년 1782년에 중희당을, 1785년에 수강재 건립.
- 순조3년 1803년 인정전 소실로 1804년 중건 함.
- 순조 33년 1833년 대조전, 희정당, 행각, 침전 소실로 1834년 9월 재건 함.
- 헌종 13년 1847년 후궁 경빈 김씨 등을 위해 낙선재 건립.
- 철종 8년 1847년 인정전 완전해체 수리 함
- 1863년 고종 즉위식 창덕궁 인정전에서 함.
- 1897년 광무1년 고종 황제 즉위. 대한제국 선포
- 1905년 광무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 1907년 융희 1년 순종 덕수궁(경운궁) 돈적전에서 즉위 함.
- 1908년 융희 2년 인정전 보수와 진선문 철거 함.
- 1910년 8월 22일 융희 4년 한일합방 강제 체결 됨
- 1910년 8월 29일 융희 4년 경술국치 대조전 홍복헌 어전회의에서
- 1917년 대조전 서쪽 갱의실에서 화재로 대조전 외 내전 대부분 소실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후원 연경당으로 피신 함.
- 1917년 대조전, 홍복헌, 경훈각, 함원정, 희정당, 소실된 것을 1920년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 등 건물을 철거 재 건립.
- 1926년 4월 26일 순종 대조전에서 승하 함.
- 1976 ~ 1978년 창덕궁 정비사업 시작.
- 1990 ~ 1998년 :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낙선재, 후원 건물 복구
- 1995 ~ 1997년 : 돈화문 해체 복원.
- 1995년 ~ 1999년 : 진선문, 숙장문, 어도, 행각 복원
-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이 정궁으로 사용한 후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흥선대원군 이하응) 중건할 때 까지 258년 동안 역대 임금들이 정사를 펼친 곳.
- 창덕궁 역사 기록 :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국보 249호, 1830년경 제작, 창덕궁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그림) 등
- 향나무(찬연기념물 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251호, 대보단(현 신선원전 동남쪽 30m 위치)), 후원의 뽕나무, 돈화문 뒤 회화나무.
-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 참고 : 세계문화유산 : 세계적으로 뛰어나고 보편적 가치가 있어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
- 찾아가는 길 :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5분 소요
* 참고 : 1. 왕자의 난.
- 1차 왕자의 난(이방원, 무인정사,정도전의 난, 1398년 8월 25일, 무인년)
태조 이성계에게는 첫째부인 신의왕후 한씨(건국전 개성에서 사망) 소생 여섯아들(방우, 방과(정종), 방원, 방간 등)와 신덕왕후 강씨(정릉) 소생 두아들(방번(5), 방석(6))를 두었고, 전처 왕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씨 소생 여섯째 방석(11살)을 세자로 책봉하자 개국 반대세력 포은 정몽주 제거, 왕대비 안씨를 강압 공양왕 폐위 등 조선건국에 큰공을 세운 방원(태종, 26살, 하륜.이거이 등 방원 측근)의 불만이 가장 컸다.
이에 정도전, 남은 등이 왕싱의 힘을 약화(사병혁파)시키고 유신중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자 정도전, 남은, 심효생(방석 부인의 아버지)등 제거와 세자 방석, 방석의 형 방번을 제거한 난이 1차 왕자의 난 임.
* 신의왕후 한씨 소생 여섯아들들 : 이방우(1, 진안대군. 술독에 걸려 사망), 방과(영안대군. 2, 정종), 방의(3.익안대군), 방간(4, 회안대군), 방원(5, 정안대군), 방연(6, 덕안대군, 사마시 진사 합격, 혼인 전 사망)
* 신덕왕후 강씨 소생아들 : 방번(1, 무안대군, 1차 왕장의 난때 조준에게 살해 됨, 자식이 없어 양자 들림), 방석(2, 의안대군, 자식이 없어 금성대군을 양자로)
- 2차 왕자의 난(정종(방과) 2년, 1400년 1월, 방간, 박포의 난) : 1차 왕자의 난 후 정치적 입장을 고려 해 형인 방과가 세자 책봉되어 정종이 되었으나 정종과 정비 정안왕후 사이에 아들이 없자 또다지 세자자리를 두고 방원(5)과 방간(4)의 대립이 시작 됨. 이러던 중 공신책정 문제로 불만이 있던 박포가 방간을 충동. 급기야는 방원과 방간이 무력대결을 하고 병력 숫자가 우세한 방원 승리 함. 이후 정종으로 부터 왕위를 양여 받아 1400년 11월 조선 3대 임금으로 등극함.
- 1398년 8월 25일 1차 왕자의난(방원 난, 무인정사- 강씨 자식들 방석, 방번, 정도전 제거) 후 태조 이성계는 종종(방과)에 왕위를 선양하고 상왕으로 물려남(1392 ~ 1398)
선위를 받는 정종은 피비린내 나는 경복궁이 싫어 개경 신의왕후 한씨 묘소를 참배 후 개경 수창궁에 물려 앉음.(개경환도)
1400년 1월 2차 왕자의난(방간의 난 - 방간(방원의 형), 박포 제거)로 정종은 방원에게 양위함.
양위받은 태종은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 후 지내다 한양 천도. 1405년 이궁 창덕궁 건립.
- 창덕궁 : 태종당시에는 287칸, 경복궁은 700칸
창덕궁 종묘 문 하나로 연결, 경복궁은 건물 자체 규모가 크고 창덕궁은 작다.
- 중종반정(1506년), 인조반정(1623년) 인정전 소실, 인조 경희궁(이괄의 난)
- 선조 말엽에서 광해군 2년 까지 중건, 광해군 창경궁, 경덕궁, 인경궁 건립. 260년 광해군부터 고종때 까지 지냄
- 북문 : 북(백)악 숙정문
2. 창덕궁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 : 사육신 참변(세조 2년 1456년, 경훈각 1층 광연전), 연산군(윤씨폐출사사사건, 윤씨의 연산군 어머니, 선정전)과 광해군(인목대비 김씨 경운궁 석어당 유폐 1618년와 영창대군(이목대비 아들) 강화도 유배 및 사사, 1614년) 의 패륜, 중종반정, 인조반정(1623,인조, 광해군 폐위 및 강화도 유배), 이괄의 난, 임오군란(1882년, 대조전에서 대원군 청에 압송, 데조전에서 단봉문을 통해 여주, 이천 장호워느 충주로 도피)),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과 창덕궁 집희,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박영교, 서재필 등), 조선왕조 마지막 어전회의(창덕궁 대조전 흥복헌,1910년 8월 22일, 이완용 데라우찌 , 통감부, 오후 5시)
3. 창경궁 건립 배경 외
- 태종 이방원이 세종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현 창경궁 자리에 수강궁을 짓고 살았던 것이 창경궁의 연원이고 이곳에서 이성계 태조와 이방원 태종이 승하.
- 창덕궁에 붙어 있는 수강궁 터 새롭게 지운 별궁이 창경궁(성종때 짓기 시작) : 세조 비 정희왕후, 성종 어머니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3분의 대비 거처 마련을 위해 건립 시작, 창경궁은 창덕궁 보조역할을 함.
- 창경궁 임란 때 소실, 광해군 중건, 이괄의 난(인조, 1624년) 화재 소실, 인조 인경궁 전각을 헐어다 재건.
- 창경궁 역사적 사건들
* 숙종 때 인현왕후(2)와 장희빈의 반목 갈등. 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희빈 장씨,숙빈 최씨, 명빈 김씨, 3남 6녀
* 사도세자(장조)의 죽음 : 8일 뒤주속, 문정전
* 창경궁 취선당 : 인현왕후 저주 장소, 경종 출생장소(경종은 경덕궁 숭정문 앞 즉위)
- 창경궁 을사늑약(1905) 후 공원화, 한일합병 이후 창경원으로, 일본 국화 사꾸라 심음, 동물원 조성 유원지 화(뱃놀이 등)
- 종묘와 동궐사이 신작로(율곡로) 냄.
* 태종 12년 1412년 : 돈화문(도타울돈,될화, 사랑과 인정 도텁다. 보물 383호) 건립.
- 중용에 "대덕돈화(大德큰덕敦도타울돈化될화, 큰덕은 변함을 도탑게 한다)" 소덕천류(작은 덕은 냇물처럼 흘러가다에서 돈화는 백성교화. 정면 5칸, 측면 2칸 5문은 황제국, 3문은 제후국
- 태극 문양 위치에 북, 종설치 했으나 화제로 소실 현재 모습은 1608년 광해군 때 모습(상량문에서 확인 함). 1910년까지 월대 있었으나 사라짐.
- 인조반정, 이괄의난(1624년) 때 창덕궁 도끼로 부숨.
- 인장위조 남편 사형언도를 홍호사라는 부인이 돈화문 앞에 매일같이 엎드려 빌자 남편을 10년 징역형으로 감형해 주고 영조는 유배형으로 감형 해줌.영조실록에는 부인의 애틋한 모습을 기려 정절의 문을 세워 줌.
- 대덕돈화(大德큰덕敦도타울돈化될화) : 출전 중용
* 직역 : 큰덕은 교화를 두텁게 한다.
* 의 :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사랑한다.
* 1977년 세계문화유산, 본부 파리, 세계인류문화유산 11개(남한산성(2014), 안동 하회와 양동(2010)조선왕릉(2009),고창.화순.강화 고인돌(2000), 창덕궁(97), 화성(97), 종묘(95), 석굴람 불국사(95), 해인사장경판고(95), 자연유산 :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 후원가는 길 약도
* 창덕궁 사적 122호
* 창덕궁의 역사
* 참고 1392년 이성계 개경 수창궁 즉위, 1398년 방우(2남)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방원(신의왕후 한씨 5남)의난, 정도전, 방석 제거, 신덕왕후 강씨의 2남)을 계기로 개경천도,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박포의 난, 방간(신의왕후 한씨 4남)의 난(방원의 바로 위 형니) 1400년 1월 태종 (방원)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
- 1405년 태종 5년 한양재천도, 창덕궁 준공
- 1412년 돈화문 준공,
- 1418년 인정전 준공
- 1592년 창덕궁 임란으로 화재로 전소
- 1606 ~ 1610년 광해군 창덕궁 재건
- 1615년 경운궁에서 광해군 창덕궁으로 이어
- 1623년 인조반정(경운궁 즉조당 즉위)과 1624년 이괄의난(공주 15일 피난- 몽진) 화재 소실.
- 1647년 인조 창덕궁 재건
- 1704년 대보단(황단, 숙종) 건립)
- 1803년 순조 3년, 인정전 화재 다음에 재건
- 1833년 순조, 대조전, 희정당 소실.
- 1884년 12월 4일/갑신정변(집희-관물헌, 순종 출생 장소) - 김옥균,(홍종우, 중국 상해 동화양행 호텔서 제거 됨)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3일 천하 신정가 14개조, 경무궁
- 1894년 창덕궁 전기시설(고종)
- 1907년 8월 29일 순종 덕수궁에서 창덕궁 인정전으로 이어
1910년 8월 29일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경술국치, 한일합병 조약(이와용과 데라우치, 합병조약, 남산 통감부(현 한국의 집 옆)에서, 5시정도에 체결)
* 천연기념물(natural monument) 창덕궁 회화나무(scholar tree, 학자나무, 선비나무, 괴목) 이외에 3점
후원에 뽕나무(천연기념물), 향나무(천연기념물, 194호), 다래나무(후원 600년, 대보단(현 신선원전 동남쪽 30m 위치)
천연기념물 회화나무 8그루가 돈화문 안마당에. 키 15 ~ 16m, 둘레 90 ~ 178cm, 수령 약 300 ~ 400년. 임란 후 창덕궁 재건 시 심은 것으로 추정. 1830년 동궐(창덕궁)도에 나옴. 돈화문 주변 조정관료 집무공간, 선비 거주촌에 주로 심어짐.노란색꽃은 잡귀, 액운을 물리침. 잎은 홀수
* 뽕나무 : 딸, 오동나무는 혼수사용 목적으로 심고, 아들은 회화나무
* 넘어진 회화나무, 바로뒤가 금호문 - 신하들 통행, 갑자사화, 인조반정, 임오군란 진입문
*돈화문 우측에 위치 : 왕실가족, 상궁이 드나들던 문, 1882년 6월 임오군란시 명성황후가 대조전에에서 사인교를 타고 단봉문을 통해 충주까지 피신.
* 단풍 든 돈화문 안마당에 느티나무
* 창덕궁 세계문화유산 등재/1997년 12월 6일(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규약)
* 금호문/승정문, 홍문관 관리들 출입문, 역사적으로 갑자사화(1504년 3월 20일), 인조반정(1623년 3월 20일,21일), 임오군란(1882년 6월 10일) 금군(궁성호위군)과 반란군이 금호문에서 대치했던 현장임. 단봉문(왕족, 상궁들 출입문, 성종이 어우동을 만나려 밤에 출입궁한 문)으로 임오군란시 명성황후 도피 충주까지 피난.
* 윤영남 창덕궁 길라잡비님의 창덕궁 안내도 설명 중
* 내병조(內兵曹마을조, 궁안에 있는 병조)/돈화문 오른쪽 편 50m/궁중 각 문의 자물쇠 관리, 임금 행차시 어가 앞을 선도, 시위나 의장할 때 질서유지 등, 1999년 복원 됨.
* 원역처소(員수효원役부릴역處곳처所바소) :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거처.
참고) 상의원 : 임금의 의복, 궁에 생활용품, 보물관리(사랑방 건물), 교자고 : 가마(교자)를 보관, 관리하던 창고, 연치미각(어필치미각, 輦가마연致이를치美아름다울미,閣누각각) : 임금의 의복과 금은보화를 보관하던 전각, 대은원 ?
* 상서원 : 의복관리, 내병조 뒷편 돈화문 앞, 원역처소 옆에 위치.
* 창덕궁 안에 이정표
* 참고 : 동궐내각사 - 왕실과 직접 관련있는 궁궐안에 있는 여러 관청(금천을 사이에 두고 설치 됨), 금천에 있는 금천교를 지냐야 본격적인 궁궐에 모습을 접할 수 있음.
- 홍문관(弘넓을홍文글월문,館집관,성종때 설치) : 정치 보좌, 세종때 집현전의 개편 관청.
- 내의원 : 왕싱의료기관, 임금건강 보좌.
- 예문관 :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
궐내각사는 일제시대 소멸된 것을 2005년 복원한 것임.
* 규(별규)장각(1781년 정조 5년) : 세종때 집현전, 성종때 홍문관(옥당), 정조때 규장각, 학문연구 및 왕의 정치 보좌기관, 국립도서관 격.규수 별자리는 부극성 다음으로 높은 별자리 - 인재/시, 문장 보관(임금의 시, 글 보관)/숙종 때는 규장각에 어제, 어필 보관/1781년 규장각 제조 유원호의 의견(궁 깊숙한 곳에 있어 이용불편 정조에 건의 후 후 현 위치로 이전)
후원 부용지에 있던 주합루 1층에 있던 규장각(정조 즉위년 1776년 건립)을 이후 궁안으로 이전 현재 자리에 건축.
* 규장각도 : 단원 김홍도
* 내 규장각(이문원) : 도총부자리, 개혁정치의 산실./외규장각 도서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에 도난 . 2011년 반환(154년만에 귀환)
* 주합류 : 정조 어진 모심
* 규 : 28개 별자리 중 글씨(시)와 문장을 관장하는 별자리.
* 내각 : 내규장각(창덕궁 규장각, 후원 규장각은 정조 즉위년 1776년 세움), 외규장각(강화 행궁)
* 정도전(서얼 출신)
* 서얼 : 서는 양인(良어질양人) 첨의 자손(식), 얼은 천인(賤천할천人) 첩의 자손(식), 박지원의 제자들 : 이덕무(청정관전소), 유득공(발해고), 박제가(북학의), 서호수 등
* 검사청 : 책을 살펴 검사하던 곳. 책임자 검서(사서)관
* 봉모당(奉받을봉謨꾀모堂집당)
- 정조 즉위년 1776년 주합루 규장각(1층 서고, 2층 얄람실, 왕실도서관, 정책연구,협의,토론)
- 정조의 어진(초상화), 어제(임금이 친히 과거 시험장에 나와 과거시험 글을 출제했던 글), 어필(임금의 글씨), 보책(선왕, 왕대비, 왕비 등의 묘호, 시호 등을 기록한 문서), 인장 등을 보관하던 건물.
- 현재 주합루 남서쪽에 위치.
- 1857년 철종 8년 규장각 이문원 대유제(규장각 본부 격)로 얾김.
- 1969년 창경궁 장서각으로 이전.
- 1981년 한국학 중앙연구원으로 이관.
* 참고 : 포쇄(曝쐴포曬말릴쇄) : 젖거나 축축한 것을 바람에 쐬고 햇볕에 말림.
* 이문원(摛널리알려질리文글월문院집원, 정조 5년 1781년, 금호문 안 북원 도총부 자리에 규자장각 설치)
- 조선 역대 임금의 어진, 어필, 어제, 선적(왕실 족보), 교명(왕비, 왕세자, 세자빈 책봉시 내린문서)금보(추상,존호 새긴 도장), 옥인(옥으로 만든 도장), 옥책(왕, 왕비, 대비 등에게 존호를 내린 문서), 죽책(세자, 세자빈 책봉하고 존호를 올릴때 대나무에 새겨 엮은 문서), 서적 등을 보관하던 관서.
- 정조 5년 1781년 창덕궁 금호문안 북원에 건물을 짓고 설치한 규장각(이전 도총부 자리)에서 관할.
- 정청에 이문지원(摛文之院) 이라는 정조 어필을 써서 붙인 데서 명칭 유래.
- 창덕궁 규장각의 부대시설.
- 이문원 물품 4년마다 포쇄
- 도총부 자리(창경궁으로 이전).
- 이문원 정원에 동측우기 설치, 학 한쌍 사육
- 정조 대보단(황단) 참배시 머무르며 유교경전 토론
- 정조 5년 1781년 설치.
* 창덕궁의 은행나무. 바로 뒤에 책고(책보관 관청) 있음
* 창덕궁의 금천(錦비단금川내천,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흐름) : 예전에는 물이 흘렀다 하나 지금은 흐르지 않음.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자연수가 흘렀다하고 보통 금천하면 금은 금할금을 쓰는데 창덕궁은 비단금 임./바닥을 약간 층단지게 만들어 배수 용이 위함./박석을 깔아 하상면 보호/멀리 책고가 보이네요.
* 금천교(태종 12년,1411년)/서수(천록, 성스러운 상상속의 동물, 모두 웃는 모습) 4개, 다리교 옆 아래 석주 사이 사이에(도깨비상-귀면형 벽사상), 동자석(교각사이에 장고모양), 다리아래 아치형은 홍예, 북쪽 거북이, 남쪽에는 해태상(서수. 찬록)/전형적인 아치형 다리/금천교는 백성과 임금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의미 지님, 즉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 주는 경계 역할/현재 궁궐내에서 가장 오래 된 다리.
* 구선원전/보물 817호. 임금의 어진(초상화) 보관 및 왕실 제례 거행 하던 건물./우측이 내찰당 - 재관들이 머무는 곳/좌측은 진설청 - 재물을 보관, 관리 하던 곳
* 종묘와 선원전, 산릉(묘)의 차이점
- 종묘 : 왕의 혼백(신주)를 모시고 제례 지냄.
- 선원전 : 왕의 인격을 모시(왕의 어진)고 제례
- 산릉 : 왕의 육신에 제례.
빈전(시신, 신주, 5개월), 혼전(신주, 3년), 종묘(신주, 혼전 3년산이 지난 다음 모셔짐)
- 선원전(璿아름다운 옥 선,源근원, 오랜원,殿대궐전, seonwonjeon, 원래이름 조계청) : 어진(임금의 초상화)를 모시고 왕실 제례를 거행하던 곳./정숙문을 들어서면 구선원전이, 보춘
태조 이성계, 영조, 정조 등의 어진이 있었으나 일제시대 1921년 신선원전을 후원에 건립 제사기능을 이전함으로써 빈건물이 됨. 부속건물들은 2005년 복원. 진설청, 내당과 재실 양지당 설치(제사의례 때 사용. 제사 전날 임금이 와서 머물던 곳). 선원전 뒤 의풍각은 일제시대 신축 건물. 제사용 그릇과 도구 보관 창고. 신선원전(대보단-향단, 1921년 대보단 터에 건립)을 만든 이유는 일제가 왕실제례를 정리하기 위함(향사 이정, 1908년 칙령 50주년). 경화당 건물을 경덕궁으로 이전, 구선원전 : 어진 보관, 종묘에는 신주 보관
- ㅗ 자 모형 벽돌 : 쥐나 동물들이 건물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용도로 사용.
- 만안문으로 나가 인정전으로 감.
구선원전 마당에 있는 ?나무
* 양지당 : 임금이 제사 전날 와서 쉬는(머무르던) 어재실, 궁궐 보수시 중요 물건과 어진 보관
* 부러진 향나무, 제사에 쓰였다고
* 향나무 천연기념물 194호, 이외에 다래나무(천연기념물), 회화나무(정문 바로 뒤), 뽕나무(후원)
* 창덕궁 194호, 수령 750년, 높이 5.6m, 뿌리부분 둘레 5.9m, 2010년 9월 2일 곤파스(kompasu, 최대풍속 40m/초당, 뜻은 "컴파스" 이다) 태풍으로 가지 부러짐. 바로 옆 선원전 제례때 사용 됨. 1830년 무렵 창덕궁 동궐도에서 찾아 볼 수 있음/동궐도는 1830년경 효명세자(23세 사망, 순조의 장남. 후에 익종 추존, 고종때 문조로 추존 돼 정전에 보셔짐)가 서궐도(경덕궁)안과 함께 도화서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
* 천연기념물 194호/창덕궁 향나무
*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푸른 하늘
* 참고 : 박자청 : 조선초기 제일의 건축가, 창덕궁 공사로 내시(문지기)에서 1품 벼슬까지 오름.
- 고려말 내시출신.
- 조선초 궁궐 문지기
- 태조 이성계의 눈에 들어 경호 담당. : 이지춘이 궁궐에 입궐하려 하자 제지 당함 그 일화를 태조에게 고함. 박자청의 올바른 근무태도, 바른생각이 태조에 마음에 들어 발탁. 이후 궁궐 건축의 대부분을 하게 됨.
- 창덕궁 건축 감독
- 각종 궁궐 건축 공로로 공조판서, 우군도총제부판사를 지냄.
- 주요 건물 건축 : 창덕궁, 건원릉, 제릉, 경복궁 수리, 청계천 준설, 경회루, 무악이궁, 헌릉 등
* 만자살창
* 만자살창
* 정자살창
* 띠살창
* 정자살창
* 만자살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