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됨(유일한 길)-(요17-18장)
성경에서 바벨론이라고 하면 분열이다. 요즘 우리나라가 꼭 바벨론 같다. 분열되어서 난리다.
세상에는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다. 아무 것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인간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무조건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벨론을 생각하니까 벽돌 구워 단단히 만들었는데 그것이 다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허물어지지 않을 것을 허물겠는가? 허물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허물어지는 것이다.
흙으로 사람 지으셨다는 것은 흙을 경작해서 농사를 지으라는 것이다. 무슨 농사인가? 인격 농사를 지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생명 받아서, 영과 생명이신 하나님을 받아서, 그것을
인격으로 경작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세가 산에서 무엇을 봤다.
그 본 것을 자기 인격으로 풀어낸
것이 율법이다.
하나님은 언어가 있는가? 없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뇌성벽력 치는 것을 봤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인격으로 풀어낸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을 자기 형상과
자기 모양대로 만들어서 자기를
표현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이 없다. 언어가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어떤 사인을 하는데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있는 기능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 차리는 것이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알아차리고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당연히 지도자 되는 사람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징조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똑 같다.
눈으로 본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눈이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증거한 것이 십자가다
그렇지 않으면 다 헷갈린다.
보기에 따라 다 다를게 아닌가?
에덴동산에 사람을 만들어 놓고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은 그런 교통이다.
근원이 안 보이면 혼란이 생겨 버린다. 근원을 본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지 없는 상태라면 어둠이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예수가 오신 이후에 우리가 왔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쉽게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된 것인데 그것마저
잘못 봐 버리면 갈 데가 없다.
요17장, 18장은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소원이고 유언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창조 안으로 들어가야 근원이고,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야 그것이 근본이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하나도 없다. 전부 아버지다.
자기 근원이라는 말이다.
창세기 1장 1절의 내용은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 때문에 빛이 있으라 하셨고, 사람 때문에 이러고
저러고 했다는 그런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다 잘 되었다 했다.
왜냐하면 다 과정이니까
과정이 잘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시고
난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하셨다. 완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말은 지금까지 행한 모든
과정은 다 사람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다시 흙으로
만들어서 동산을 경작하게 했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세계를
지키고 개발하게 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분을 형상화하는 것이나 그분을 개발하는 것이나 비슷한 말이다.
하나님의 첫 창조는 미완의 창조인가? 그래서 사탄의 방해에 위치이탈하는 사건이 왔나? 이것은 둘 다 맞다.
사탄이 왔더라도 우리가
성숙했다면 속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숙했다면
사탄이 와서 거짓말 할 수도 없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십자가로 향해 가시면서 죽으실
것을 알고 가시는 길이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이것이 17장에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이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가 된다.’는 이것이 구원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영생이라는 말이나
하나 됨이나 같은 말이다.
하나 되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면
그것이 영생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연합하면 그게 영생이다.
영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들은 뭐라고 말하는가?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요17:11)라고 하면서 하시는 말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우리와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고,
십자가로 가신 목적이기도 하고,
우리 인생의 종착역이기도 하고,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하나 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으면
‘하나로 가는 길이다.’라고 해야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이것이
분명해야 한다. 어디로 가는가?
천당으로 간다는 것은 안 된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하나 되는 것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늘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형상과 모양이니까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것이다.
하나가 안 되면 온전한 것이 안 된다.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무엇이 온전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갈 길이 없다.
연합을 떠나서는 인간이 갈 데가 없다. 스스로 자기를 수양해서 연단하고
그렇게 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자기와 연합할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사람을 지식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온전해진다,
이렇게 수양을 해라, 이렇게 기도해라,
이렇게 노력을 해라, 가르치고 있으니까 이것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역적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인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게 최대 방해물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답게 키워야한다.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 아닌가?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 너는
하나님에게 종속될 필요가 없고,
너도 스스로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이다. 이 정신이 사실은 현대 정신이지만
정신 나간 망령의 소리다
하나가 되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혼자 온전한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고, 좀 자극적인 말로 하면
그것은 진짜 병신이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하나가 되어 온전하게 하옵소서,
하나가 되는 것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이라는 말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거룩함, 구별됨, 진리는 구별된다.
구별된 것이다. 섞여 있는 것이
아니고 구별된 것이다.
사람들이 왜 방황하는가?
원인은 자기 정체성 없어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같은 땅에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이 호흡하고
있지만 구별된 길이다.
같은 길이 아니다.
세상과 같은 길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어떻게 좋게 하느냐?
어떻게 하면 이것이 되겠는가?
그것은 정치가들에게 맡길
일이지 우리가 한다고 되겠는가.
만유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하나가 된다. 다른
데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근원에서는 하나인데
세상에서 근원이 있는가? 없다.
세상과 다르다. 우리가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말이 세상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근원이 없다. 근원이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근본을 떠나 왔는데 어디 근본이 있겠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분열됐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갈라졌다.
그런데 누구와 하나가 되겠는가?
세상은 분열된다.
이것이 바벨탑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결국 바벨탑으로 갔다. 분열이다.
선악과의 목표는 분열이다.
누가 먹으라 했든지 아니면
내가 일부러 먹었던지 간에
그 목적지는 분열이다.
각자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무슨 신학으로 돌아가면 되고,
무슨 신학으로
가면 하나가 되겠는가?
여기서 모든 것을 떠나서
우리가 참 연합 안으로 들어
가려면 근본으로 돌아 가야된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
십자가 밖에 더 있는가?
십자가 외에 무슨 어느
사상으로 우리가 돌아가겠는가?
십자가밖에는 없다.
십자가 안에 가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똑같다.
왜? 이 자리에서는 못이 박히니
내려오지 못하고 다 죽는다
이 말씀의 주요 내용은 신과 사람이
확실하게 구별된 세계를 보여준다
십자가 안에 가면 다 허당이다.
그 자리에 우리가 환원된 것이 구속이다. 십자가 밑으로 가는 그것이 구속이다. 거기 가보면 인간이 너무 초라하다.
화려하던 인간이 어디로 가고 없다.
신의 한수는 십자가뿐이다.
하나님도 별수 없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한데,
하나님과 연합하려면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못하고 죽은
예수가 아니면 연합이 불가능하다.
예수와 연합하려면
십자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예수 만날 자리가
거기 밖에 없다. 다른 데서
안 예수는 그것은 누구든지
다 알 수 있지만 연합이 안된다
근본이 그냥 있는 한
역시 십자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십자가 없이는 내가
내 자리로 돌아올 수가 없다.
아담은 십자가 없이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 돌아갈 것 같으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나는 이 길이 너무 쉬운 길이고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거룩하게
되는 일이 무슨 어려운 일이 아니고,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한 것이 당연한 일이지 내려오는 것이 당연하겠는가?
만일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놓았는데 내려왔다면 그것은 괴물이다. 그것은 참 사람이 아니고 괴물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기다렸다.
얼마나 존귀한 사람들이
거기 있는가! 세계가 좁고도 넓고,
넓고도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