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월정(弄月亭)은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의 화림동 계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지붕 양식의 2층 누각이며, 안의면에서 육십령으로 향하는 국도26호선을 타고 도로를 따라 4㎞가량을 오르면 화림동 계곡 맞은 편 월연암 위에 있다. 189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으나 2003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소실되었고, 2015년 함양군에서 기록사진과 도면 등을 바탕으로 옛 모습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복원하였다. 농월정 앞에는 ‘화림동 월연암(花林洞 月淵岩)’, 정자 옆에는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자연 암반 위에 원재의 형태를 잘 살린 누하주를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았으며 뒤쪽에는 1칸의 방을 두었다. 처마는 겹처마로 길게 빼냈는데 활주로 네 귀의 추녀를 받았다. 농월정은 소실 당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10여 년 가까이 복원되지 못하다가 필지 소유자인 박씨문중의 협조로 2015년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예전 사진 및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하여 옛 정취와 멋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안의 삼동 중에서 화려한 자연의 미를 간직한 곳이 화림동(花林洞)으로, 화림동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금천이 ‘팔담팔정(八潭八亭)’을 이루어 옛부터 정자 문화의 보고라 불렸다. 특히 농월정은 ‘달을 희롱한다’는 선조들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으로, 함양군을 찾은 많은 문인과 묵객들이 필히 거쳐간 곳이다.
조선 중기때의 학자인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傅, 1571~1639)는 예조참판, 한성좌윤,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학자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다. 함양군 안의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8세에 글을 지었을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16세에 정온 선생의 부친인 정유명에게 학문을
배웠고, 1590년 19세 때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이듬 해에는 저작(著作)에 제수되었다. 1591년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 부정자의 벼슬을 시작으로 이듬해 승문원 저작을 제수받았으며, 가을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 ~ 1620)를 뵙고 스승의 예를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佑) 군막에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군무(軍務)에 많이 협찬했으며, 1593년에는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환도(還都) 후 박사(博士)를 제수 받았다. 그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해주판관(海州判官)·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당시 합천에 정인홍(鄭仁弘)이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1614년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종용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시키자, 그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축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자 그 해 여름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임명되었다. 1624년 54세에 죽산부사(竹山府使) 56세에 제주목사(濟州牧使), 59세 때 형조참의(形曹參議) 등 좌부승지(左副承旨)·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1631년 61세 때는 진주목사(晋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이라서 부임하지 않았다.
1636년 66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 중에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講和)를 반대하였다.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67세 때인 1637년 9월 마침내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다가, 이후 68세 때인 1638년 조정에서는 예조참판(禮曹參判)·한성좌윤(漢城左尹)·도승지(都承旨) 등에 연이어 제수하면서 지족당의 출사를 강력하게 요구해 왔으나 사양을 거듭하다 어쩔 수 없이 강릉도호부사에 부임해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인 1639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으며 1651년 조정에선 그의 학덕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증을 하였고 화천사에 배향되었다. 지족당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 지족당(知足堂)이라는 편액을 걸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저서로는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 3책이 있다.
정자 앞 오른 쪽 암반에는 선생께서 지팡이를 짚고 노닐던 곳이라는 뜻의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족당 박명부 선생은 지족당집(知足堂集) 권1, '제농월정(題弄月亭)'에서 다음과 같이 풍광을 읊었다.
路傍誰識別區幽
길 옆, 누구도 모를 그윽한 별세계.
山若盤回水若留
산은 소반인 듯, 휘도는 냇물을 머금은 듯.
暎砌池塘澄更滿
섬돌 비친 연못은 맑은 기운 가득하구나.
撲窓嵐翠捲還浮
창 두드리는 산바람에 물총새 휘돌아 앉았네.
兒飢不慍饘糊口
굶주린 아이는 죽으로 허기를 달래고,
客至寧嫌屋打頭
손님 들이다 머리 찧어도 괘념치 않는다네.
莫道散人無事業
한가한 이라 하릴없다 말하지 말게나,
晩專邱壑亦風流
늙으막 이 골짜기 뿐이라도, 이 또한 풍류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