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139.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15) 일곱 번째 딸의 서원기도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나는 1961년, 딸만 여섯인 가정에서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개성에서 할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셨다니 어머니 쪽으로는 4대째, 아버지 쪽으로는 3대째 기독교 가정이다.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졌던 어머니는 내리 딸만 낳으셨다. 어머니에게 나는 곧 ‘일곱 번째 실패’였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속이 상해서 금방 낳은 나를 당신의 배에 다시 넣고 싶을 정도여서 냉기 도는 윗목에 뉘어 놓았다고 말씀하셨다.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날 위기였던 그 시절 어머니의 심정을 지금은 이해한다. 어머니는 다행히 이후 아들을 낳으셨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내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갖곤 했었다.
그래도 어머니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5세 무렵, 나는 고치기 힘든 병에 걸렸었다. 의사들도 포기해 어머니는 교회 부흥회마다 나를 업고 찾아가 목사님들께 안수기도를 받게 하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토록 나를 살리려 애쓰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고 나를 위로해주는 사건이었다.
남동생은 우리 집안에서 왕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모님이 이루어주셨다. 나는 남동생을 본 딸이라고 ‘예쁜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여전히 남동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언니들과 싸우면 부모님은 감히 언니들과 싸운다고 나를 야단치셨고, 남동생과 싸우면 감히 남동생과 싸움을 한다고 야단을 치셨다. 세상은 태어나면서부터 불공평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 덕에 나는 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으로 중·고등학교까지 등하교하는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명문 대학에 들어가 부모님의 어깨에 힘을 실어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수능시험에서 답이 분명하지 않을 때 두 개의 답에 체크해 성적이 잘 나올 수 없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 부모님께 하고 싶은 효도를 못하는 것 같아 죄송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순종해서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에 입학해 신입생 팝송 경연대회에서 인기상을 타면서 대학생 방송 프로그램인 ‘영 11’과 ‘젊음의 행진’에 출연했다.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는 ‘딴따라’가 없으니 TV에 계속 출연하려면 집을 나가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유럽 배낭여행을 가고 싶어서 대학 4년 동안 저축했고 무용, 스튜어디스, 패션 공부를 위한 일본 유학 등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시집가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모두 반대하셨다. 결국 내 인생의 목표는 결혼을 잘 해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됐다. 그것이 나의 부르심이고 부모님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대학 다닐 때 남서울교회 대학부에서 선교사가 되겠다는 서원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활달한 성격이 한국의 전통적인 사모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나만의 생각으로 선교사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이 분명히 실수하셨다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서원기도를 절대로 잊지 않으셨고 건축자의 버린 돌을 사용하시어 북한 분들이 다시 세워지는 데 사용하셨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 일곱 번째 딸의 서원기도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2) 내 인생의 첫번째 실수 '하나님을 외면한 결혼'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3) 결혼 한달 만에 美서 이혼녀로 "하나님, 왜 저를
…"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4) 핍박받는 세계 기독인 돕는 '서울유에스에이' 설립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5) 미국 노숙인 사역에서 배운 하나님의 사랑법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6) 외증조모-외조모-엄마-딸 4代의 약속 '기도하는 삶'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7) 우리 부부 행복한 사역 출발점은 '성경적인 화해'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8) 北에 성경 보내는 '풍선사업'에도 고난·역경이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9) "하나님 미국인 목사를 주세요" 내 기도에 응답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0) "탈북민, 하나님 군사로 훈련시켜 전 세계 변화"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1) 내 마음 속 잘못된 믿음을 무너뜨려준 '프라소'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2) 우리 부부 말씀 실천의 궁극 목표는 '북한 선교'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3) 남북한 재통일 첫 걸음은 "탈북민부터 사랑하라"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4) 신앙으로 변한 아이들 우리 사역 최대 후원자로
*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5·끝) 내 인생의 실패도 성공도 모두 주님 작품이시니…
◇약력: 1961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대학원 석사, 콜로라도크리스천대 상담학 석사, 리젠트대 리더십 박사, 현 횃불트리니티신학원 MDiv 과정, ㈔서울유에스에이선교회 공동대표, 한국 순교자의 목소리(Voice of Martyrs Korea) 공동대표, 프라소 한국 설립자 겸 회장, 탈북민을 양육하는 유유선교학교와 유티학교 학장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2) 내 인생의 첫번째 실수 ‘하나님을 외면한 결혼’
나의 삶에 있어서 ‘부르심(소명)’은 결혼을 잘해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시절 선교를 하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 집안에는 목회자가 없었고, 서원기도를 한번 했지만 그것이 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치는 기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의 삶은 그것과 상관없이 흘러갔다. 지금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1980년대 대부분의 대졸 여성들의 목표가 나와 비슷했다. ‘커리어 우먼’이라는 단어조차 아예 없는 시기였다. 대학졸업장은 단지 결혼을 하는데 필요한 자격증에 불과했었다.
부모님은 1970년대부터 미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딸들을 재미교포와 결혼시키려는 생각을 하셨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여성에게 많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남편과 아내의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실례로 미국에서는 부부가 집을 구매하게 되면 남편과 아내의 이름을 동등하게 올렸다.
6명의 언니들 중 한 명은 항상 부모님의 골머리를 썩였다. 어려서부터 화려한 남성편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원치 않는 남자를 만나 아버지의 속을 상하게 하느니 차라리 아버지가 원하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그것을 말씀드렸고 배우자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 먼저 여쭤보고 확인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순서를 밟은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 첫 중매로 만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것은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결정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주체가 아니라 내가 주체였고 하나님은 나의 결정을 돕는 도우미였다. 십계명 중 “하나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라는 첫 번째 십계명을 어겼다. 하나님 대신 내 안에 있는 ‘나’ ‘나의 결정’ ‘나의 생각’을 섬기는 큰 죄를 범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8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나는 중매쟁이를 통해 미국에 이민 간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는 뉴욕에 30개의 아파트를 갖고 있는 재력가 집안이라고 했다. 처음 몇 개월간 우리는 편지로만 서로를 알아가다 그가 한국을 방문함과 동시에 급하게 약혼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먼저 미국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결성을 보여줌으로써 남편에게 평생 보상받을 줄 알았다. 남들처럼 연애도 하지 않고 남편을 평생 기다렸다는 증명을 하고 싶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던 나는 보기와 달리 집, 학교, 교회밖에 몰랐다.
홀로 미국으로 가는 준비를 하는 중에 하루는 그 사람의 형님 댁을 방문했었다. 그때 그 사람의 형님이 자신의 아이들과 내 앞에서 아내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결혼지참금 1만 달러 외에 300달러의 비상금을 주셨다. 그리고 이 비상금은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언니들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 값이라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말씀하셨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효도를 못 했는데, 이제 아버지가 원하는 결혼을 해서 떵떵거리고 잘사는 딸이 되어 효도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가장 안전하고 보장된 모험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대학생 때 하나님께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기도한 것은 까마득하게 잊은 채로.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3) 결혼 한달 만에 美서 이혼녀로 “하나님, 왜 저를…”
1985년 뉴욕에 도착했지만 내 결혼생활은 한마디로 절망이었다. 결혼 후 한 달 만에 나는 결혼한 여자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악몽을 겪어야만 했다.
그의 집안이 소유했다는 30채의 아파트는 거짓말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처음 이민 온 한국인들에게 안내를 해 주는 대가로 보험을 파는 보험사였다. 남편은 흑인 동네의 가게에서 가끔 일을 하면서 용돈을 벌었고 적당한 직업도 없었다. 남편의 집안에서 부모님이 주신 결혼지참금 1만 달러, 결혼식 예물, 결혼반지마저 보관해준다고 해서 모두 주었다. 가진 모든 것을 남편 집안에 주었을 때부터 그는 나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처음 당하는 학대가 두려워 방에서 문을 잠그고 숨거나 그의 학대를 피하려다 아는 사람도 없는 거리에서 손에 피를 흘리며 헤맸던 적도 있었다.
3주 후에 부모님이 뉴욕을 방문하셨다. 남편은 나에게 자신이 학대한 사실을 말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자신이 사업체를 시작하기 위한 돈도 부모님께 요청하라고 강요했다.
나는 미국에 올 때 아버지가 주셨던 결혼 지참금을 벌써 그에게 다 주었다. 더 이상 아버지께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날 키워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효도를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부모님께 모든 것을 고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공항에서 내린 부모님 얼굴을 보았을 때 나오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공항에 내린 부모님의 얼굴이 너무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분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기를 바랐다.
1주일 후 부모님이 떠나실 때 나는 비상금 300달러를 아버지께 돌려 드렸다. 내가 비상시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개를 스스로 잘라 버렸다. 이는 내가 그곳에서 죽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부모님이 떠나신 후 더 이상 나의 집안에서 돈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나를 공항으로 데려가서 LA 비행기표를 사 주고 떠나 버렸다. 그가 남긴 한마디는 내가 다시 뉴욕으로 오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LA 공항에 내린 나는 언니의 품에 안기어 한없이 울었다. 부잣집 막내딸이 결혼 한 달 만에 처치곤란의 골칫덩이 이혼녀가 된 순간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북한 사역을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립보서 1:12)
그러나 성매매로 팔렸던 탈북민 여성들을 만나면서 이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이다. 토요일마다 마포역 사무실에서 탈북민 여성을 양육하는 유티학교를 하고 있다. 언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중국 땅에서 성매매로 팔려서 원치 않는 가정을 꾸미고 아이도 낳아 살던 탈북민 여성들에게 나는 내가 당한 일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아마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은 내가 자신들이 당한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의 마음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내가 당한 일을 북한 여성들을 위해 사용하고 계신다. 그러니 내가 당한 일로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4) 핍박받는 세계 기독인 돕는 ‘서울유에스에이’ 설립
첫 결혼의 실패로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아보려고 비기독교인과 결혼했으나 또 실패했다. 그 시간은 내게 가장 힘들고 외로운 시기였다. 마음껏 울 곳도, 말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하나님을 기억했다. 그분에게 나의 길과 진리에 대한 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원망의 기도가 회개의 기도로 바뀌기 시작했을 때 대학시절 선교를 하겠다고 서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님! 제게 선교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를 주십시오.’ 결국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 우물가의 여인처럼 구했던 헛되고 헛된 것들을 버리고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하게 되었다.
2000년 에릭 폴리 목사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각자 아들, 딸 한 명씩 둔 우린 2남2녀의 부모가 되었다. 폴리 목사는 나를 만나기 13년 전부터 이미 노숙인 사역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가장 큰 노숙인 사역 단체인 로스앤젤레스미션의 회장을 역임했다.
2002년, 하나님께선 우리 부부로 하여금 한국에 서울유에스에이선교회를 세우게 하셨다. 폴리 목사는 단체를 소개할 때 “저의 아내는 서울이고 저는 USA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USA입니다”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서울유에스에이는 전 세계의 20여개 ‘순교자의 소리(VOM)’ 단체들과 협력해 핍박받는 50여개국의 기독교인들을 돕는 단체다. 서울유에스에이가 남한에 위치한 관계로 북한 사역에 대한 모든 기금은 주로 우리 단체가 받아 집행한다. 또 세계의 핍박받는 기독교인들을 돕는 국제기독교협회(ICA)와 종교적자유협력(RLP)에 가입된 정식 선교단체다. 대부분의 기금이 전세계에서 들어와 우리가 동역하는 나라를 방문하거나 그 나라에서 우리를 방문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래서 서울 마포 사무실에는 항상 외국 단체의 대표들과 외국인 자원봉사자들로 북적인다.
지난달 한국 사무실에서 미국 VOM 담당자들과 회의가 있었다. 우리는 각 프로젝트를 설명하면서 다음에는 개선할 부분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담당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서울유에스에이는 최고의 프로젝트를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동역자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다른 보고들은 자신들이 잘한 것을 주로 나열하는데, 서울유에스에이는 개선할 점들로 보고를 채우고 있네요.”
오히려 담당자는 우리에게 쉬어가면서 사역하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분에 넘칠 정도의 국제적 신뢰를 얻고 있다. 어떤 단체는 프로젝트 승인도 하지 않았는데 기금을 송금해 놓고 우리에게 어떤 프로젝트에 사용할지 결정하란다. 어떤 단체는 없는 프로젝트까지 해 달라고 요구할 때도 있다. 그 결과 북한 지하교인 사역 외에 성매매로 팔린 중국 내의 북한 여성, 엄마가 북송돼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한 성경학교 등의 프로젝트까지 하게 됐다.
국제적인 기독교 사회에서는 이혼이 그리 큰 이슈가 아니다. 폴리 목사와 나는 재혼 부부로서 이혼 경력이 문제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한국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콜로라도의 세계중보기도센터에 매일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새벽기도를 했다. 그 잔을 나에게서 치워달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네 연약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너를 사용할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고린도전서 1장 28절 말씀처럼 정말 내가 천하고 멸시받는 사람이라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5) 미국 노숙인 사역에서 배운 하나님의 사랑법
사역자로 부르신 나의 삶을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길을 하나님만 의지하며 걸어가는 훈련’이라 표현하고 싶다. 주님만 바랄 수밖에 없는 북한 사역. 그 밑거름에는 노숙인 사역이 있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아름다운 재단을 시작하기 전 미국의 NGO들을 방문한 후 ‘NGO’라는 책을 썼다. 그때 방문한 단체 중의 하나가 폴리 목사가 회장으로 있었던 노숙인 사역단체 LA미션이었다. 북한 사역을 하기 바로 전, 2002년 휴스턴에서 우리는 노숙인 사역을 했다. 노숙인 대부분은 마약 중독자였다. 폴리 목사는 마약을 위해 모든 걸 팔고 목숨을 거는 노숙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주님을 위해서도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미국교회로 사역을 옮기면서 폴리 목사는 노숙인 100명 중 6명을 선정해 도왔다. 우리는 이들에게 직장과 집을 구해주고, 살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챙겨 주었다. 앨프리드라는 청년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 차를 빌려 주었다. 그런데 그가 몇 달 후 갑자기 사라졌다. ‘다른 5명처럼 그도 다시 마약 소굴로 돌아간 것이 틀림없어.’ 폴리 목사는 초조해졌다. 누군가 앨프리드가 있는 곳을 알려줘 미국인 장로, 폴리 목사와 함께 마약소굴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큰 길이었다. 한 블록을 운전해 들어가니 삭막하고 음침한 모텔이 나왔다. 폴리 목사는 갑자기 차를 돌려 빠져나오면서 “이곳은 위험해요. 주변에 총을 든 사람을 보았는데, 경찰을 부릅시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 차를 안내해 주는 장면이다. 그곳은 ‘ㄷ’자 모양으로 생긴 모텔인데 가운데가 주차장이었다. 그곳에 내 차가 있었다. 경찰 때문에 마약중독자들, 총을 들고 망을 보던 사람들이 모두 숨어 버렸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내 자동차가 주차돼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내 차가 멀쩡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부분 차의 부품을 온통 뜯어 팔아버리는 게 그들의 습성인데, 내 차만 아무 손상 없이 얌전히 마약소굴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근처에 있던 흑인 여성에게로 갔다. 그녀는 마약으로 눈이 벌겋게 충혈돼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약에 찌들어 눈의 초점이 없어진 그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예수님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어요?”라고 물었다. 폴리 목사는 사람들에게 이때의 상황을 “나는 자동차로 달려가고, 미국인 장로는 경찰에게 달려갔는데, 제 아내는 매춘부에게 달려가더라고요”라고 말하면서 슬그머니 아내 자랑을 한다. 사실 하나님이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놓았을 뿐, 그분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을 잘 알고 있다.
잊지 못할 또 한 명의 노숙인이 있다. 28세 된 브렛이다. 그는 우리가 아들로 삼아 함께 두 번이나 2년씩 함께 살았던 청년이다. 해군이었던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돼 차를 부수고 경찰을 폭행한 혐의로 수감됐었다. 마약중독자 6명 중 5명이 다시 마약중독자로 돌아갔고 이 한 명만 남았다. 우리는 그를 아들로 삼았다. 덩치가 엄청 큰 미국인 청년이 나를 장난스럽게 “엄마, 엄마!”라고 한국어로 부르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브렛은 차, 직장, 돈, 여자친구 등 자신이 필요한 것을 다 얻고는 우리를 배신하고 온 집을 흔들어놓고 나갔다. 많이 실망하고 아팠지만 우린 사역을 멈출 수 없었다. 사실 이러한 노숙인 사역 과정이 없었다면 북한 사역이 준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6) 외증조모-외조모-엄마-딸 4代의 약속 ‘기도하는 삶’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찬양이 있다. 나는 이 찬양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서울유에스에이의 숨은 중보기도자. 내가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 중보기도로 빛이 돼 준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1930년 개성에서 태어나셨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개성에 있는 교회를 다니셨다고 했다. 어머니도 나처럼 기도를 많이 한 어머니가 계셨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서울로 내려와 한 교회에서 집사님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 그때가 18세였다. 그때 약혼도 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해서 뛰어가 따졌다고 한다.
“왜 저와 결혼을 안 하려고 하나요? 난 할 거예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당돌함에 “이 조그만 여자가 보통이 아니네”라고 생각하고 결국 결혼했단다. 아버지가 결혼을 안 하려던 이유는 하던 장사가 잘못돼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내리 일곱을 낳은 어머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내게 딸만 낳게 하지?”라는 생각에 하나님을 떠났다. 그러다 아들을 낳은 후 다시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오셨다. 그렇게 생각하면 남동생에게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이가 안 태어났다면 나는 영원한 중보기도자를 잃을 뻔했으니.
아버지는 사업에 성공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졌다. 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다니셨다. 어머니는 항상 성경 가방을 들고 교회로 가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세상을 즐길 줄 모른다고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내가 어렸던 60, 70년대엔 목회자들의 생활이 넉넉지 못했다. 부유했던 어머니는 맛있고 귀한 음식은 항상 최고의 부분을 먼저 떼어서 담임 목사님께 갖다드렸다. 아버지는 기독교인이라면 무조건 믿고 속는다고 어머니를 계속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혼자 방에서 성경 보시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왠지 나는 그때마다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나도 어머니 방에 살짝 들어가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다. 어머니 자신은 별로 못 배우셨다고 생각하고 자존감이 낮지만 기도 하나만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박사감이시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어머니가 하도 기도를 크게 하셔서 옆집에서 조금만 작게 기도하라고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가 나는 자랑스럽다. 부유하게 사셨어도 절약하려고 택시도 안 타신 어머니는 그 돈을 절약해서 자식이나 손자들이 신학교에 가면 등록금으로 주셨다. 결국 모든 자식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최근엔 내가 횃불트리니티신학원에 들어갔다고 하자 어머니가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항상 용서를 비신다. 나에게는 이렇게 선교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될 줄도 모르고 태어났을 때 죽기를 바랐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신다. 난 어머니를 백분 이해한다. 어쨌든 그것은 어머니의 최선이었으니까.
어느 날 강의를 하며 어머니의 고향이 개성이라고 하니 “회장님도 우리 동족이구만요”라고 한 탈북민이 말했다. 난 그 말이 너무나 좋았다. 동족. 어머니 덕택에 내가 북한 분들의 영광스러운 동족이 되었다.
폴리 목사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은 담임목사이시고, 저는 부목사입니다”라고 말해서 어머니를 웃게 만든다. 폴리 목사가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기도제목을 여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의 소원은 똑같다. 그것은 기도하는 자세대로 하나님께 열납돼 돌아가시는 것이다. 내가 선교현장을 다닐 때면 목놓아 큰 소리로 나를 위해 기도하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리는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소원을 위해 기도할 차례인 것 같다.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7) 우리 부부 행복한 사역 출발점은 ‘성경적인 화해’
우리 부부관계의 기본 바탕은 ‘성경적인 화해’이다. 남편은 수 년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미국인과 한국교회에서 세미나를 인도했다. 하와이 호놀룰루 예수전도단 DTS에서 수년간 피스메이킹 강의도 했다. 그 곳에 훈련받으러 온 젊은이들은 우리 부부를 보면 “두 분이 정말 보기 좋아요”라고 부러워한다. 이 향기는 하나님께 속한 것 같다. 매 순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갈등 방법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폴리 목사는 나에게 질문했다. “미국 문화를 따르고 싶소? 아니면 한국문화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 문화를 따르지 않고 세상적인 문화를 좇았다면 좋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매 순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려는 의지가 없다면, 우리 부부의 미래도 보장될 수 없을 것이다.
2004년 하나님은 폴리 목사를 미국 피스메이커 본사의 디렉터로 섬기도록 인도하셨다. 이곳으로 가기 전에 섬겼던 단체에서 믿지 못할 경험을 했다. 단체의 비전과 목적의 기초가 됐던 설립자의 책이 표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기금의 잘못된 흐름도 발견했다. 이 문제를 제기하다가 남편은 해고됐다. 올바른 일을 했는데 말이다. 어느 날 남편은 피스메이커라는 단체에 면접을 하러 가자고 했다. 가는 도중에 덴버에서 변호사를 만났는데, “이건 이길 수 있는 내용이에요. 그러니 이 단체를 고소하세요”라는 희망을 주었다. 그의 한마디는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는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갖다 주는 것 같았다.
기쁜 마음으로 피스메이커 미국 본사에 가서 그 당시 CEO인 켄 산데와 면접을 보았다. 그는 정의를 위해서 싸우려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안경을 쓸어 올리면서 “우리가 의로움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아마 아무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라고 말해 주었다. 와, 그 말은 우리 부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진리가 됐다.
폴리 목사는 북한 분들에게 용서에 대해 이렇게 선포한다. “여러분이 김일성 부자를 용서하지 않고 하나님의 북한 사역을 한다면 하나님이 열매를 맺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다 안다면 인간의 힘으로 이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전 인생을 김 부자의 거짓말에 속아왔고, 내 부모 형제가 그로 인해 비참하게 죽었거나, 지금도 고통을 안고 있다면 어찌 용서가 쉽겠는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다. 명령에 대해 우리의 선택이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과 믿음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미국에서 한국을 오가며 북한 사역을 해 왔다. 손을 뻗어 그들을 안아주고 싶은데 만질 수 없고, 함께 웃고 울어줄 수가 없으니 그들이 나의 마음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답답해도 남편의 동의를 기다렸다. 부부관계를 바로 세우지 않고 아무리 북한 사역을 잘 한다고 해도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지난해부터 나는 탈북민들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내가 북한 사역을 하면서 북한 분들과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내가 하는 사역을 축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혹시 상처 드린 것이 있나요?”와 “저를 용서해 주시겠어요?”라는 화해의 언어는 자주 사용된다. 내가 상처를 줄 의도가 없었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상대방이 상처를 받았다면 나는 상처를 준 사람이 된다. 억울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모르신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분이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의 부족일까. 결국 나의 문제인 것 같다.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8) 北에 성경 보내는 ‘풍선사업’에도 고난·역경이
대북 방송과 풍선 사역은 북한을 괴롭게 하는가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때 북한은 두 가지 요청을 했다. 그것이 바로 풍선과 라디오의 중단이다. 이것은 북한 사역에 있어 우리에게 중요한 전략이 무엇인지 말해준 것이다. 다른 프로젝트들보다 우리는 북한이 제공해준 이 두 개의 사역을 먼저 하면 된다.
2010년 서울유에스에이는 한국에서 풍선 사역으로 유명세를 탔다. 풍선 사역을 가장 많이 하는 단체, 매년 5만권의 성경과 복음의 전단지를 보내는 단체,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묵묵히 사역하는 단체로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풍선 사역하는 악덕 외국 단체’로 표현됐다. 우리가 보낸 풍선이 남한에 떨어졌는데 그것을 구경하던 사람이 라이터를 켜는 바람에 풍선 안의 가스가 폭발한 것이었다. 피해자는 목사였는데 화상을 입었다. 기사를 접하자마자 우리는 억수같은 비를 뚫고 경찰서와 피해자의 병원을 찾아갔다. 방송은 다른 풍선하는 단체의 사진을 내보냈다. 아직 우리 단체의 풍선인지 모를 때지만 우리는 기독교인답게 행동했다. 피해자를 위로하고 위로금을 전달하려고 했으나 피해자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우리를 고소함과 동시에 방송을 이용해 사실을 왜곡시키고 과장했다. 미디어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단체를 삼키려고 했다.
진실을 아는 한국의 모든 간사들은 실망과 슬픔에 잠겼다. “이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목사가 이런 거짓말을…”이라고 하면서 왜곡된 보도보다는 피해자 목사 부부로 인해 상처가 컸었던 것 같다. 우리 사무실은 장례식장 같았다. 나는 미디어가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크게 기사화한 것에 놀랐다. 공식 반박문을 낼 생각도 했다. 그때 폴리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들끼리 싸우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으로 합시다.”
폴리 목사는 모든 간사를 모아 영상으로 회의를 했다. 그는 먼저 눅 6:27∼28을 나누면서 “비기독교인들도 자신에게 잘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날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피해자를 위해서 기도합시다”라고 말했다. 우리 가정예배 때에도 아이들과 합심해서 피해자를 위해 기도했다. 경찰은 우리가 아무런 위법을 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불을 붙인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피해 보상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단체의 모든 간사들은 돈을 모아 그분께 전달했다. 또 북한에 비전이 있다는 그 목사를 유유선교학교에서 강의하도록 해 사례비를 드리려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몇 년 전에 우리는 VOM에서 1971년에 북한에 보냈던 풍선 사역의 사진과 자료를 발견했다. 풍선 사역은 VOM의 오래 된 사역인 것 같다. 그 후에는 러시아가 무너지기 전 러시아에 보냈던 오렌지 풍선을 모퉁이돌선교회를 통해 북한에 보내도록 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풍선 사역은 쉬지 않고 있다. 다양한 풍선, 다양한 방법이 개발됐다. 특히 GPS를 이용하는 효과적인 사역을 개발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풍선 사역을 기뻐하시나 보다.
우리 간사들은 “바람이 어때요?”라고 하루 종일 묻는다. 매분 매초 바람을 체크하고 풍선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람만 좋다면 즉시 출발이다. 이렇게 해도 1년치를 다 못 보낼까 염려스럽다. 지난주에 폴리 목사가 다른 곳에서 보냈던 풍선이 북한을 향해 가는 것을 GPS에서 확인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우린 이런 보고는 받고 싶지 않다. “풍선이 남한 쪽에 떨어져 그걸 주우러 가서 늦는답니다.”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9) “하나님 미국인 목사를 주세요” 내 기도에 응답
2000년 에릭 폴리 목사와 결혼했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부부의 만남을 궁금해한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비기독교인과 두 번째 결혼 후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공적인 패션 사업가가 되어 세상의 부와 영화를 누렸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다 건강을 잃으면서 차례로 사업체, 두 개의 집, 결혼 등 모든 것을 잃게 되었고 결국 나는 아이들과 세 든 아파트에 남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잃으니 세상이 헛되고 헛되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 서원했던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기도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새벽기도를 가려는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미국은 13세 이하 어린이들을 보호자 없이 집에 두면 정부에서 아이들을 빼앗아간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남겨진 아이들까지도 나에게 맡겨라. 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의 발목을 하나씩 붙잡고 지켜달라고 절실히 기도했다. “이 아이들이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남들은 나를 뭐라고 손가락질할까?” 등 별의별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인생을 살기로 했다.
자존심 때문에 나의 이혼 사실을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 모든 슬픔, 외로움, 고통을 하나님과 기도로 해결했다. 아침에는 새벽기도, 낮에는 손바닥만한 옷장에 들어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이 시절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새벽기도를 가는 차 안에서 15분 동안 핸들을 부여잡고 미친 듯 “주여!”를 외쳤다. 교회에 도착하면 목이 다 쉬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찬양을 불렀다. 세상적으로 보면 인생의 패배자였지만 나는 누구도 줄 수 없는 기쁨 속에 있었다.
주위에서 재혼을 권유했다. “얘, 미국사람들은 남의 애를 너무 잘 키워놓는대”라는 지인의 소리에 귀가 쫑긋했다. 어려서부터 미군과 연애하는 한국 여성들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절대로 외국인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나의 교만함을 다 무너뜨려 버리셨다. 배우자 기도를 시작했다. “미국인 목사를 주세요. 아니면 선교사.” 그런데 결혼을 두 번이나 한 내가 너무 주제를 모르는 것 같아 “하나님, 그것도 안 되면 장로님이라도 주세요. 그럼 평생을 하나님께 자원봉사할게요. 당신을 섬길 수 있는 단 한번의 마지막 기회를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이왕 기도하는 것 더 구체적으로 잘생긴 사람, 키는 180㎝, 이전 배우자가 악해서 헤어진 사람 등 구체적인 조건을 달았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2개월 후 나의 기도는 100% 응답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폴리 목사를 만났다. 미국사회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를 만난 것은 ‘기적의 하나님’의 증거였다. 우리 부부를 만나면 모든 사람이 부러워한다. 13년간 부부로 살았지만 다른 부부들의 50년만큼 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매 순간 하나님을 부부의 중심이 되도록 모셨기 때문이다. 2004년 사랑의교회에서 “저는 한국에 큰 돈을 빚졌어요”라고 잘못 통역한 적이 있는데, 그는 설교 때마다 “전 한국에 빚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아내 때문이에요. 겉만 미국인이지 제 속은 한국인이에요. 보신탕, 뻔데기 등 다 먹어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나의 결혼을 통해 한 명의 미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드셨다. 그는 한국과 하나님을 미치도록 사랑한다. 하나님이 한국 기독교를 위해 어떻게 폴리 목사를 사용할지를 기대하며.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0) “탈북민, 하나님 군사로 훈련시켜 전 세계 변화”
나는 탈북민들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다. 하나님의 군사로만 잘 훈련된다면 한국과 북한, 더 나아가 전 세계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북한에서 이들을 아주 잘 훈련시켜 준비하셨는데, 한국에 오면 변해 버린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한다. “하나님은 당신들을 선택하셨어요. 그래서 한국에 보내셨어요. 하나님이 왜 여러분을 선택하셨을까요? 여러분은 한국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요?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10년 전에는 과감하게 탈북민에게 프로젝트의 모든 기금을 직접 집행하도록 주었다.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지만, 이후로 탈북민을 훈련시키는 ‘유유선교학교(Underground University)’가 탄생했다. 우리는 말뿐 아니라 철저한 서류와 투명성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 선교방식으로 한다. 탈북민들이 훈련받고, 그들이 직접 세계와 손잡고 일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서울유에스에이가 할 수 있다. 각 프로젝트에 대한 제목과 목적, 수혜자, 위험도, 상황, 염려, 예산 등 구체적으로 제안서도 쓸 수 있어야 하고 영수증, 간증, 사진, 영상, 보고 등을 제출하는 훈련도 해야 한다. 보안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니 가능하다.
작년에 연세가 많은 탈북민들이 유유선교학교에 많이 왔다. 나는 폴리 목사에게 “노인대학도 아니고…희망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폴리 목사는 “하나님이 희망이오. 하나님이 계시는 한 희망이 있소. 나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낸 분들을 최선으로 양육시킵시다”라고 말했다. 캐나다 VOM에서 한국을 방문해 유유학교의 학생들을 면접했다. 그들은 나를 쳐다보면서 “이분들이 유유선교학교가 맺은 열매들입니다”라고 만족해했다.
유유선교학교를 졸업한 분들이 북한 사역에 투입되는 것을 보면 흐뭇하다. 요즘 ‘순교자의 참된 소리’라는 우리의 복음 단파방송이 북한에서 차단하는 상위권에 있다는 미국의 데이터를 들었다. 이 방송의 아나운서가 바로 유유학교 졸업생이고, 풍선사역도 그들이 한다. 위험한 중국에 가서도 목숨을 바쳐 사역한다. 어떤 분은 이 지면에 말할 수 없는 위험한 사역들에도 투입되었다.
작년에 한 유유선교학교 학생이 신천지에 간 적이 있었다. 좋은 성경공부를 한다고 뛸 듯이 기뻐했는데, 그곳의 정보를 주지 않았다. 한 달 후 폴리 목사는 “그가 성경공부하는 곳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사무실에 들이지 마라”고 지시했다. 가까스로 그가 가는 곳이 ‘신천지 비밀성경공부센터’란 것을 알아냈다. 그는 그곳을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우리에게 상담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신천지가 상담소에 가면 감금해놓고 구타한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잘못 배운 교리를 바로 세우는 반증교육까지 상담소에서 마치도록 도왔다. 이 영적인 싸움에는 승리했지만 사탄의 공격에 시달렸다.
신천지를 보면서 나는 회개했다. 작년에 에리트레아 지하교인들을 훈련하러 두바이에 갔을 때에도 이슬람교도들을 보고 회개했었다. 이후 유유학교의 훈련은 세기로 유명하단다.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고픈 그들로 준비시키기 위해서다. 2주 전부터 학생들이 그 많은 암송과 과제를 극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새벽 폴리 목사와 잠을 자다가 유유학교의 구호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다가 내가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그는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더니 마구 웃었다. 삼삼칠 박수에 구호를 넣었다. “예수 짝짝짝, 유유 짝짝짝, 순교자가 됩시다 짝짝짝짝짝짝짝.”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1) 내 마음 속 잘못된 믿음을 무너뜨려준 ‘프라소’
2003년 폴리 목사는 콜로라도의 B단체에서 섬겼다. 이 단체에서 남편은 ‘백만 권의 성경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 세계로 성경을 보내는 사역을 했다. 간사들은 배로 늘어나고 기금도 물밀듯이 모여들었다. 사실 이것은 폴리 목사의 은사이다. 기금을 받아서 단체가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단체도 자원봉사의 문을 열어 놓고 그들이 북한사역에 동참하게 한다. 남편은 미국의 기금모금 분야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약 1300개 단체를 훈련시켰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6개월 후 그 단체의 비리를 알게 되었다. 이를 제기한 남편은 해고당했다. 하나님의 콜링에 순종했던 우리는 많은 재정적 희생을 감수했었다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내 평생 하나님과 멀어진 적은 있어도 그분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이때는 그랬다. “어떻게 이런 단체가 40년씩이나 미국에서 그 큰 기금을 받고 건재할 수 있을까?”
폴리 목사는 어린이 전도협회의 부회장인 버즈 베이커와 만나는 스케줄이 있었지만 상황을 설명하고 만나지 않으려 했다. 그는 그래도 만나자고 했다. 남편이 함께 나가자고 해서 나가니 그쪽도 아내와 함께 왔다. 그들은 자신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노라며 위로해 주었다. 헤어지려는데 그의 아내가 “성경공부 한번 해 보지 않겠어요?”라고 제의했다. 그녀가 바로 프라소의 설립자인 로라 베이커 여사이다. ‘프라소’는 그리스어로 ‘연습하다, 반복하다’의 뜻으로 우리 안의 잘못된 습관을 점검하고, 좋은 습관을 갖도록 알려주는 성경공부 교재이다.
나는 그 당시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100일 동안 하나님과 결판을 짓기로 했다. 매일 새벽에 B단체 건물에 가서 손을 들고 7바퀴씩 돌면서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마치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듯이 이 단체도 무너뜨려 달라고. 후에 세계중보기도센터에 가서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종일 이 프라소 교재에 매달렸다. 영어로 공부하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 100일 후 하나님은 B단체를 무너뜨리신 게 아니라 나의 죄악된 생각과 태도를 허무셨다. 이 교재가 내 마음속의 여리고성이 있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난 이 교재가 한국의 깨진 영혼들을 돕는 데 사용되도록 간구했고,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수년 동안 우리 단체의 모든 사역에 이 교재는 큰 힘을 발휘했다. 요즘 청소년들의 왕따 문제, 자살충동, 우울증, 소외와 진학 등을 성경말씀으로 도울 수 있는 ‘틴 프라소’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 하실 일들을 기대해 본다.
바쁜 일정에도 나는 가끔 남한 기독교인들을 위한 세미나를 하고 있다. 작년에 목사들 모임에서 프라소 세미나를 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교회의 회복은 목사의 부부관계부터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서 부부세미나를 고집했다. 첫째 날부터 눈에 띄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 간에 대화를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서로 대화를 할 때마다 과거의 상처가 독이 되어 서로를 공격하고 할퀴었다. 목사 부부가 앞으로 나와 용서를 비는 시간을 가졌다. “절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예,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정식으로 눈을 맞추고 하는 이런 연습이 잘 안 되어 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모든 부부는 울음바다 속에서 부부 간의 화합이 이루어졌다.
그 문제의 부부는 사모님이 나오지 않겠다고 버텼다. 사모님은 “우리는 안 돼요. 해도 안 될 걸 왜 해요?”라고 말하며 희망을 잃은 상태였다. 우리 모두가 함께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그들은 결국 화해가 이루어지는 격한 시간을 가졌다.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2) 우리 부부 말씀 실천의 궁극 목표는 ‘북한 선교’
서울유에스에이 사역 중 하나는 ‘말씀을 행하는 자(Doer of the Word)’ 양육 프로그램이다. 마태복음 7장 24∼27절 말씀이 모토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라고 단언한다. 한국 기독교는 기도, 묵상, 예배 등 말씀을 듣는 것은 잘하지만 말씀을 행해 하나님의 빛과 소금이 되는 면에는 부족한 것 같다.
폴리 목사는 미국에서 많은 행사를 주관해 왔다. 1999년 로스앤젤레스(LA) 미션의 회장으로 있을 당시 ‘감사의 날’이라는 행사를 해 할리우드 스타들이 직접 노숙인들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하는 행사를 했다. 2000년 크리스마스 땐 성경책을 넣은 선물보따리를 가난한 이웃들에게 전해주는 행사도 주관해 하루에 6000명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도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말씀을 행하는 자’ 양육 프로그램이다.
2002년 미국 교회의 담임목회를 하면서 남편은 누가복음 10장 1∼10절 말씀을 설교한 적이 있다. 자신이 말씀을 행하지 않고 설교한다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설교 중에 “이 말씀대로 선교여행을 갈 사람 있나요”라고 말하며 선교여행 갈 사람을 모집했다. 총 6명이 모집됐다. 우리는 성경대로 전대, 주머니, 여벌의 신을 챙기지 않았다. 그러나 교인들의 염려로 휴대전화와 차, 비디오카메라는 갖고 갔다.
우리는 휴스턴에서 한 시간 떨어진 버몬으로 인도되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매년 사탄을 숭배하는 축제가 열리고, 대낮에도 마약을 밀매하는 지역이었다. 남편은 집을 매매한다는 팻말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어떤 흑인이 현찰 5만 달러를 가지고 나타나 집을 당장 구매하려고 했다. 왠지 집주인은 그에게 집을 팔지 않고, 물만 나오게 하면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그 지역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행한 결과 한 끼도 굶지 않고 매일 새 옷을 공급받았다. 마지막 날에 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소다가 없었다. 갑자기 어떤 차가 와서 끼익 서더니 “혹시 소다 필요해요”라고 물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는 십일조까지 드렸다. 그리고 그 집은 지역 기독교 대학생 서클이 주위의 불우한 아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월 마포역 사무실에 중국 한족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이 훈련을 했다. 사랑의 실천사역 중 ‘선행하기’를 가르쳐 한국어도 모르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 선행하는 실천을 하도록 했다. 돌아와서는 ‘실천 후 점검’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는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첫날은 디모데전서 3장 5절 말씀대로 먼저 가정예배를 통해 아이들을 양육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과제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원의 굴속에 들어가 기도하느라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는 “지도자가 한 말을 행하지 않으면 교인들을 말씀을 행하는 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바빴지만 나는 진도를 나가지 않고, 그들이 약속했던 과제를 그 자리에서 하도록 했다. 나중에 이들은 “저희가 그 많은 양육훈련을 받았지만 이런 큰 배움은 처음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폴리 목사는 어떤 사역을 해도 그 마음속에는 항상 북한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나 보다. 중국에서 했던 100여명의 한족 지도자 양육훈련을 대성공으로 마친 적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안고 통곡하면서 우리와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이때 눈이 빨개지면서 부탁한 폴리 목사의 말이 있다. “여러분, 북한 사람 만나면 잘해 주세요.”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3) 남북한 재통일 첫 걸음은 “탈북민부터 사랑하라”
폴리 목사는 영락교회에서 열린 북한사역 포럼에서 오프닝 설교를 한 적이 있다. ‘재통일’이란 제목으로 이사야 58장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탈북민과 함께 속옷까지도 주고받는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행사 후 부유해 보이는 한 권사님과 점심을 먹었는데, “말씀은 맞는데… 북한 사람은 우리와 달라요”라고 말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떠올라 안타까웠다.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탈북민 자살률 16.3%. 외로움이 그 이유다. 재통일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가 아니라 남한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열어 내 골육인 탈북민을 피하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고 폴리 목사는 외친다. 남한 사람들은 탈북민을 돈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내 집을 열어 내 식탁에서 밥을 먹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유선교학교에서 배출된 탈북민 선교사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뇌졸중으로 태국에서 쓰러졌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살아났다고 한다. 남한 간사들은 건강치 못한 김모 선교사를 섬기려고만 했다. 나는 “김 선교사님도 전화를 받게 하고, 남한 간사처럼 일을 시키세요”라고 지시했다. 김 선교사는 “남들이 전화해서 제가 받으면 ‘웬 북한 사람인가’ 하고 비웃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북한선교를 하는 단체인데 북한 분이 전화 받는 것은 당연하죠. 김 선교사를 남한 분들과 똑같이 대하지 않으면 결국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김 선교사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양육시켜서 하나님의 군사를 만들라고 그분을 주셨다.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서로 장점을 합치면 큰 힘을 낼 수 있다. 특히 탈북민의 잠재력을 우리가 발견해서 배가시키면 재통일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미국 VOM(순교자의 소리)에서 제작한 ‘예수’라는 애니메이션의 더빙을 남북한 성우의 목소리로 녹음한 적이 있다. 담당하셨던 장로님은 “남한 성우들은 자신의 할 일만 하고 가는 북한 성우와 일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는 남한 성우들이 기독교인이고, 특히 예수의 인생을 더빙하는 것이기에 더빙 과정에서 북한 성우들을 보살펴주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재통일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얼마 전 리전트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영웅의 이야기’란 영어책을 썼다. 조지프 캠벨의 12단계에 맞춰 탈북민들이 자신의 갖가지 고통으로 교훈을 얻고, 자신의 고향사람들에게 돌아가 그 교훈을 통해 돕는 이야기를 쓴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먼저 실례로 들고, 그들의 이야기를 끌어냈다. 대부분의 탈북민은 한국에 와서 좋고 다른 고통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고통이 올 때 극복하기 어렵다. 나는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는 그림을 먼저 그리라고 한 후 코칭을 통해 그들의 비전을 끌어냈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자살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선교사는 “대표님의 고통과 우리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어요. 우린 고통을 말하고 싶지 않고 묻고 싶어해요”라고 말했다. 폴리 목사도 나도 그들을 도우려는 목적으로 박사공부를 했는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섭섭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오해도 넘어야 재통일도 이룰 수 있다. 나는 고통이란 하나님께 사용될 때 가치 있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꺼내놓고 치료해야만 한다고 선교사에게 말해 주었다.
이번에 폴리 목사는 3개국 VOM에서 기금을 받아 ‘남북대조성경’을 출판했다. 남북한의 재통일 성경공부를 기대하며.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4) 신앙으로 변한 아이들 우리 사역 최대 후원자로
나는 어려서부터 자신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외국인과 결혼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의 애를 키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다 깨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셨다. 폴리 목사와의 재혼으로 4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남편은 8살 마가렛과 6살 트레버, 나는 9살 다니엘와 8살 크리스틴을 데리고 가정을 이뤘다. 남편의 딸 마가렛은 내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내가 만든 음식을 토해 버리고, 그릇을 다 태우곤 거짓말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주려 하면 울어버리고, 예쁜 옷을 사주어도 탐탁지 않아 했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휴스턴으로 가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의 경우 그 지역을 떠나면 양육권을 전처에게 빼앗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법정에서 싸워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에겐 시험이었지만 하나님을 택했다. 당연히 어려움이 닥쳤다. 매달 전처에게 300만원의 양육비와 위자료를 주어야 하는 재정과 돈 계산도 않고 콜링에 질주하는 남편 때문에 더 힘들었다. 나는 치아의 통증이 심해도 2년간 치과를 가지 못했고, 아이들이 구멍 난 양말을 보여주어도 새것으로 사주지 못했으며, 아이들은 흑인과 멕시칸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를 다녀야 했다. 나는 애들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훈련을 하게 됐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델은 되었지만, 집에서 아이들을 잘 양육하지 못했었다. 가정에서 양육하지 않고 교회에 아이들을 맡기면 될 줄 알았다. 폴리 목사는 항상 세미나와 설교를 하러 미국 전역을 다니니 집을 항상 비웠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만 잘 가면 될 줄 알았다. 그 결과 자녀들은 대학을 가면서 집을 떠났고, 신앙으로 제대로 양육되지 않은 아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역하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
6년 전, 남편의 아이들이 우리와 다시 함께 살게 됐다. 마가렛은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했으며, 트레버는 캘리포니아에서 매일 텔레비전만 보면서 학교도 가지 않고 학교 성적은 바닥을 쳤다. 아이들을 잘 양육하지 못한 죄책감이 많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선교한다고 하면서 내 아이들을 양육하지 못하면 선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매일의 가정예배로 매주 한 개의 성경 이야기와 찬양을 외우게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에 ‘말씀을 행하는 자’ 양육 프로그램이 탄생됐다. 1년 후, 아이들은 놀라운 영적 성장을 했다. 우리가 집을 비워도 가정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리고, 햄버거 가게에서도 멕시칸 동료들을 전도하고 양육한다. 우리가 없어도 집안을 잘 돌본다. 자신이 번 돈으로 단체에 헌금도 하고, 자원봉사도 하고, 선교여행도 함께 간다.
지난번 우간다 선교여행에서 이 양육은 큰 빛을 발했다. 공항에 내리니 어둠이 가득하고 시커먼 사람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게 됐다. 왠지 두려움이 몰려왔다. 가정예배 때에 불렀던 찬양을 내가 시작했다.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 함께 하면 겁없네.” 모든 가족원이 따라했다. 그 순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북한 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온 외국인 선교여행팀으로 한국에도 왔었다. 탈북민들의 집에 통역자와 함께 가서 ‘홈스테이’도 했다. 트레버가 갔던 집의 탈북민이 와서 “어떻게 아들을 그렇게 키웠어요? 난 북한사람인데도 북한사람들이 굶는다는 것을 잊고 사는데….” 트레버가 엄청나게 많은 양의 국수를 국물까지 깨끗이 먹었다고 한다. 남겨도 괜찮다고 했는데, 트레버는 “엄마가 지금도 북한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을 뿐인데 하나님은 우리 아이들을 책임져 주셨다.
***[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15·끝) 내 인생의 실패도 성공도 모두 주님 작품이시니…
폴리 목사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묘사를 이렇게 한다. “이 사람은 내가 머리의 방향만 바꾸어 놓으면, 그 한 곳만 쳐다보고 열심히 뛴답니다. 내가 방향을 바꿀 때까지.” 내 나이 이제 54세. 남편 말대로 방향만 잡히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지난 30년 인생은 사건이 많았던 것 같다.
내 힘으로 살 때는 머리를 굴리고 발버둥도 쳐 보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삶의 방식은 처절한 결과를 낳았다. 성공한 패션 사업가였을 때도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그때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나의 한을 달래려고 어린시절 꿈꾸던 무용도 해 보았다. 마지막 인생을 춤에 걸려고 했다. 무용 시작과 동시에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공부도 했고 인간 무형문화재 전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용계와 학계의 생리는 나에게 또 다른 상처와 실망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하나님께 돌아오면서, 내가 그동안 겪었던 슬픔과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바로 내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 붓을 하나님께 그리시라고 내어 드렸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예전의 수치와 실패들까지도 다 포함해서 내 그림을 걸작품으로 만드시고 있다. 그 그림에는 나의 이혼도 포함돼 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난 이혼사실을 밝힌다. 하나님이 나의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과거 때문에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기 때문이다(고전 1:26∼28).
그동안 이혼을 경험한 한국 목사들과 사모들을 여러 번 보았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있다가 문제가 부각되니 조용히 재혼하던 목사도 있었다. 어떤 사모는 자신의 이혼경력을 완벽히 숨기고 살기도 한다. 정상적인 목사부부인데 이혼한 부부보다도 더 냉랭한 관계로 사는 분들도 보았다. 이혼율이 높은 한국에서 하나님은 이들의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싶으실 것 같다.
프라소 세미나를 하면서 한국의 많은 영혼들이 아파하는 것을 보았다. 몸만 함께 하고 마음은 냉랭한 부부, 아이들 문제와 재정으로 갈등이 쌓인 재혼부부 등, 그들은 달리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희망 없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목회자 부부가 먼저 치유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길 바란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리시는 나의 그림에는 폴리 목사가 빠질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시는 나의 그림을 벌써 본 사람 같다.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기본적인 요리밖에 못하는 병약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희망이 없어 보였을 텐데, 그는 나에게 “당신은 요셉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후에도 여러 번 또 다른 예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나를 상담학 석사와 박사과정까지 마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나를 한국에 보낸 것은 대단한 희생이다. 그렇게 나는 전에 상상치 못했던 모습으로, 그가 예언한 모습대로 그려지고 있다.
역경의 열매는 쓰지 않으려고 했었다. 북한 분들을 포함한 소외된 사람들과 울고 웃으면서 조용히 살려고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것이 그의 기도응답이라고 했다. 역경의 열매는 약한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의 걸작품 전시회 같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국민일보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