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해군의 차기 이지스 구축함 ‘정조대왕함’ 진수식
2021년 터키 남서부에서 대규모 산불 발생
터키 남부 안탈리아주에서 산불이 발생하여 건조한 기후 탓에 쉽사리 잡히지 않았고 강풍에 의해 무을라주 등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 최악의 터키 산불은 현재 에게해 해안의 화력발전소 인근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터키 당국은 일주일째인 8월 3일까지 모두 145곳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9곳은 여전히 진화작업이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인명 피해도 발생했는데, 고립된 농가 부부 등 8명이 목숨을 잃었고, 무글라 주에서만 만 명이 대피하는 등 이재민도 만 명이 훌쩍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관광지인 이곳은 관광객과 주민들이 배를타고 피신하는 등 혼란을 겪었으며 방화로 지목되 범인을 주목하고 있다
2017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 세상 떠남
2014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사상 첫 직선제 대통령 취임
2013년 국정원 이석기 통진당 의원 내란음모 수사, 의원실 압수수색
2010년 파키스탄 여객기 추락, 탑승자 152명 전원 사망
152명이 탄 파키스탄 여객기가 7월28일 오전 10시(한국시각 오후 2시)쯤 수도 이슬라마바드 인근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추락한 에어버스 A321기는 파키스탄 민영 에어블루항공 소속으로, 이날 오전 7시 45분 승객 146명과 승무원 6명을 태우고 파키스탄 카라치를 떠나 이슬라마바드 부토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사고기는 공항 관제탑과 오전 9시 43분쯤 교신이 끊겼다. 악천후로 시계가 흐린 중에 착륙을 시도하다 공항 인근 마르갈라 힐스 산등성이에 추락했다. 레만 말리크 내무장관은 “관제탑이 활주로 유도 안내를 했지만 사고기는 착륙 전 고도 2600피트(792m) 상공에 있다가 갑자기 3000피트로 상승했다. 이 점이 설명이 안 된다. 활주로 쪽 시계가 너무 안 좋으면 선회했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메드 무카타르 국방장관은 “테러에 의한 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추락한 A321기는 2000년 출고돼 2006년 에어블루에 임대됐다
2004년 농촌운동 이한옥 여사 별세
용신봉사상 제1회 수상자이며, 농촌 운동과 소비자 운동에 일생을 바쳐온 이한옥(李漢玉·91) 여사가 2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유족으로 장녀 김봉영(金鳳榮·66·전 하얏트호텔 홍보부장), 우영(56), 은영(54), 화영(51), 숙영(47)씨와 사위 강신표(姜信杓·인제대 명예교수), 박종덕(朴鍾德·재미 사업가), 김진호(金璡鎬·주 행림 전무), 박광규(朴匡奎·주 세화비나 상무), 하밀튼(의사)씨 등이 있다.
2004년 현대자동차의 누적 수출대수 1000만대 돌파
2004년 7월 28일 현대자동차의 누적 수출대수가 1000만대를 돌파했다. 이로써 현대차는 1976년 국내 첫 고유 모델인 ‘포니’ 6대를 남미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한 지 28년 만에 자동차 수출 1000만대 기록을 달성했다. 금액으론 816억달러에 이르는 수치였다. 지난 67년 창업한 현대자동차가 이날 자동차 수출 1000만대의 금자탑을 쌓기까지는 눈물겨운 곡절이 많았다. 68년부터 포드자동차와 제휴해 조립 생산한 ‘코티나’가 잦은 고장을 일으키자 고(故) 정주영 회장은 주변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내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미쓰비시로부터 엔진 기술을 넘겨받고,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에게 자동차 디자인을 맡겨 76년 1월엔 국내 첫 고유 모델인 ‘포니’를 자체 제작했다. 포니는 당시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현대차는 그해 6월 ‘포니’ 6대를 남미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했다.
현대는 또 80년대 초반엔 캐나다에 포니 생산공장을 지었고,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프터 서비스망이 부족했던 현대차는 곧바로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차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의 마음을 돌리는 데 10년 이상 걸렸다.
유독 품질 경영을 강조하던 정몽구 회장의 취임(99년)과 함께 자동차 품질이 크게 개선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다시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대차 소나타는 2004년 미국 자동차품질 조사기관인 JD파워로부터 중형차 시장에서 1위를 인정받았고, 시장 점유율도 0.9%에서 2.5%까지 끌어올렸다. 2004년 현재 현대차의 수출국은 지난 80년 38개국에서 193개국으로 늘었다.
2003년 미국 사이클선수 암스트롱 ‘투르 드 프랑스’서 5연패 달성
1996년. 생존율 50%도 안 된다는 고환암 말기 판정을 받고 뇌 수술까지 받았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랜스 암스트롱(미국)의 레이스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1999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종합 우승했을 때도 우승 후보였던 얀 울리히(독일)가 약물 파문으로 출전하지 못한 데다 역시 우승후보였던 호세바 벨로키(스페인)도 출전하지 않아 어부지리로 거둔 승리로 저평가됐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3년 7월 28일 암스트롱은 프랑스 도로일주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 5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덕분에 그에겐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5연패를 뜻하는 ‘랜스 V’.
그는 지난 3주 동안 3427.5㎞의 페달 레이스를 펼쳤다. 해발 2000m가 넘는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을 오르내릴 때도 암스트롱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폭풍도, 탈수증세도, 또 40도에 육박하는 더위도 그에게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는 혼자 페달을 밟았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다. 항상 그를 지켜보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체외 수정을 통해 어렵게 얻은 세 아이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이클 역사를 매번 다시 쓰고 있는 암스트롱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들로서 그들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 문육지씨 별세
1990년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에 취임
1990년 일본 방송위성 3호(BS-3) 발사
1989년 하세미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에 선출
1989년 7월 28일 실시된 이란 대통령선거에서 하세미 라프산자니 국회의장이 91.4%의 압도적인 지지로 이란의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34년 8월 농부의 아들로 출생, 14세 되던 해 신학자가 되기 위해 회교성지인 콜시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신학강사였던 호메이니는 어린 라프산자니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 보았고 이때부터 라프산자니는 호메이니가 주도한 왕정타도를 위한 시위대열에 뛰어들었다. 1979년 회교혁명 당시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라프산자니는 호메이니의 후광에 힘입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라프산자니가 서방에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유엔이 제시한 이란-이라크전 휴전안 성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때 부터였다. 당시 그는 국회의장 겸 군총사령관으로 호메이니옹을 설득, 8년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성공함으로 차기 이란지도자로서 서방 언론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88년 독일 람슈타인에서 에어쇼 중 전투기 3중 충돌 사망 50여명 부상 500여명
1985년 가르시아 페루 대통령에 취임, 40년 만에 평화적 정권교체
1984년 제23회 LA올림픽 개막
140개국 7800명의 선수가 출전한 제23회 LA올림픽이 1984년 7월 28일 개막됐다. ‘반소활동 때문에 선수단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소련 등의 동구권 14개국이 출전을 거부했지만 개막식은 9만3천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화려하게 거행됐다.
동구권 국가중 유일하게 출전한 루마니아 선수단은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최고의 스타는 육상 100m, 200m, 400m, 멀리뛰기에서 4관왕인 칼 루이스였다. 대회조직위원회는 ABC방송국에 방영권을 2억3천9백만달러에 팔고 기업으로부터 찬조금을 받아 운영해 1억5천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은 금6, 은6, 동7개로 종합 10위를 차지했다
1983년 북한 청진항 중국에 개방
1981년 한국-인도네시아 해상화물 분담에 관한 해운협정 체결
1981년 정부, 교육세 신설
1980년 영국-사우디 외교관계 재개 합의
1980년 첫 여성기술사(박광자, 정영선) 탄생
1979년 한국 레슬링선수단에 몽고서 첫 비자
1978년 경북도교위 가짜교사 자격증사건 관련 74명 구속
1976년 서울형사지법 명동사건의 김대중 피고에 징역8년 자격정지 8년 선고
1973년 김영주 조절위 북측 위원장, 남북대화 일방적 중단 선언
1971년 사법파동 시작
1971년 7월 28일, 사법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이 무더기로 사표를 낸 것이다. 검찰이 이날 새벽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 등 3명에게 뇌물수수혐의를 적용,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이 발단이었다.
두 판사가 제주도 출장시 사건담당 변호사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제공받았다는 것이 검찰측 주장이었지만 시국 사건에 무죄판결을 잇달아 내린 이범렬 판사를 겨냥한 꼬투리 잡기였다.
영장은 기각됐지만 분개한 판사들이 들고 일어섰다. 서울민사지법 판사 40명의 사표를 필두로 전국 415명의 판사 중 153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외부 압력에 시달려 온 그동안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사태가 좀처럼 가라않지 않자 박 대통령은 신직수 법무장관을 불러 사건을 확대하지 말도록 지시한다. 신 장관이 민복기 대법원장 집을 찾아 수사 백지화 등 수습방안을 제시하고 판사들도 8월 27일 사표제출을 철회함으로써 파동은 일단락됐지만 두 판사는 판사직을 그만두었다. 무덥고 긴 여름 한 달 동안 사법권 수호를 위한 판사들의 몸부림이었다.
1970년 경북 영덕 해안 간첩선 사건
1968년 핵분열 발견으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독일 화학자 오토 한 사망
1962년 장면 전 총리 반혁명음모혐의로 법정 구속.
1962년 전남 순천 저수지와 하천 둑 붕괴 사망 163명 실종 63명 이재민 8,988명
1961년 혁명재판 개정 민족일보 사건 3명(조용수 안신규 송지영) 사형 선고
이상두 양수정 이건호 정규근 등 5년-15년형 언도, 조용수는 끝내 사형 집행
‘민족일보 사건’=4월 혁명 이후 조용수가 진보적 언론기관의 창출을 절감하던 서상일 이동화 고정훈 등 혁신계 인사/이종률 조윤제 등 학자, 민자통과 민민청의 청년운동가들과 협의해 민족일보 창간(1961.2.13.), 민족일보는 비동맹운동과 중립화선언 등 국제정세의 데탕트 흐름을 자세히 보도하고 농촌의 궁핍한 현실 및 학생들의 통일운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등 조국의 통일과 근로대중의 이익 대변을 사시로 함, 5.16 쿠데타 이후 혁명재판부가 중립화와 평화통일 적극 추진하는 민족일보 92호만에 폐간시킴
1957년 멕시코시와 아카폴코 부근에 지진
1955년 우주인(1947.7 미국 뉴멕시코 주 로즈웰에 추락한 UFO에서 발견) 시신해부사진 22개국 TV 통해 방영
1953년 제1차 판문점 정전회담 개최
1946년 북조선노동당 결성(위원장 김일성)
지금의 조선노동당은 북조선노동당(북로당) 창립대회를 제1차 당대회로 규정하고 있다. 결성 당시 총 당원수는 36만 6,000명으로 전체인구의 약 4%를 차지했으며, 김두봉·김일성 등 총 42명으로 중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김두봉, 부위원장은 김일성이 맡았으나, 실권자는 김일성이었다.
조직구성은 크게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으로 나뉘었다. 중앙조직으로는 당대회·정치위원회·중앙위원회, 그리고 조직부 등 10개 부서가 있었으며, 도당위원회에서 초급당위원회에 이르는 지방조직을 두고 있었다. 당 강령은 13개항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 수립과 제반 민주주의 개혁의 수행, 집회·출판의 자유 등을 규정하고 있었으며, 당 규약은 총 4장 41조로 구성되었다. 1949년 6월 남조선노동당과 합당하면서 조선노동당으로 되었다.
1945년 미국 B25폭격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9층에 충돌. 14명 사망
1945년 미군 B29기 일본 중소도시 폭격 격화
1945년 호치민 베트남공화국 임시정부 수립
1943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해체
1937년 화북주둔 일본군, 총공세를 개시 북경 점령
1930년 온 나라 큰 비 사상 2,657명 가옥피해 37,438호 선박유실 3,153척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 개막
1926년 미국-파나마동맹조약 성립
1922년 경성도서관 개관
1902년 철학자 칼 포퍼 출생
1902년 미국, 프랑스 파나마운하회사로부터 파나마에 대한 권리를 4천만불에 매수
1887년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마르셀 뒤샹 출생
1858년 대서양에 해저전선 매설작업 시작
1821년 페루,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804년 독일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출생
1794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화성(현재의 수원) 기공
1794년 로베스피에르 처형
혁명이 발발하고 루이 16세가 처형(1793년 1월)된 뒤 프랑스 전역에 공포정치가 몰아쳤다. 권력을 장악한 자코뱅당의 산악파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공안·보안위원회를 구성하면서 피의 역사가 시작됐다.
의회인 국민공회는 임시정부를 혁명정부로 개칭하고 공포정치를 승인함으로써 힘을 실어줬다. 부자들에게는 강제로 부채가 부과됐고, 최고가격제와 물자통제는 더욱 강화됐다. 위반자는 가차없이 처형했다. 30만∼80만명이 용의자로 체포됐고 4만∼5만명이 처형됐다.
공포정치의 한가운데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있었다. 검소·단정했고, 여자도 돈도 쾌락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한 그는 남에게도 엄격함을 요구했다. 1인 독재가 본격화되자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반대파들은 선제공격을 준비했다. 국민들도 공포정치에 지쳐 있었다. 내부에서조차 비판을 받게 된 로베스피에르가 파리코뮌에 지지를 요청했지만 반대파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이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체포됐고,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공포정치도 끝났다.
1750년 바흐 사망
독일의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1750년 7월28일 생애를 마감했다. 바흐는 죽고 나서도 한참동안 무명으로 지냈다.
1829년 베를린에서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지휘하면서 본격적인 바흐 복원운동을 펼치는 것을 계기로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다. 멘델스존은 리스트, 슈만 등과 함께 바흐 서거 100주기이던 1850년 바흐협회를 창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흐의 음악은 `평균율 클라비어`나 연주되었을 뿐 성악곡은 악보로 출판되지도 않았다.
바흐가 남긴 작품 전체의 출판은 1900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말로는 `바흐는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라고 말했고, 베토벤도 `바흐는 아무리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풍성함 때문에 bach(작은 시냇물)가 아니라 meer(바다)로 불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으로 유명한 바흐는 17세기 초에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총괄자였다. 당대 유럽 음악의 온갖 전통과 양식이 그의 천재적 개성속에서 융화돼 최고 수준의 작품들을 낳았다.
1749년 괴테 태어남
1741년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 사망
1741년 7월 28일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린의 거장인 비발디가 사망했다. 비발디는 후기 바로크 기악음악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였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산마르코대성당의 관현악단의 정규단원인 아버지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 그는 어린시절 칠삭둥이로 태어나 허약하게 컸다. 1693년에는 수도사가 되었고, 1703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여자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왕성한 음악활동을 했다.
비발디는 마르첼로와 알비노니의 영향으로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고, 여러차례 연주회도 열었다. 그는 79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18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12개의 첼로를 위한 3중주곡, 38개의 오페라와 미사곡, 모데토, 오라토리오 등 교회를 위한 종교음악을 남겼다.
비발디는 생전에는 작곡가로써 보다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더 유명했었다. 비발디의 성격은 낭비벽이 심하고 자만심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비발디의 작품을 건반악기용으로 편곡하여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신포니아 23곡`, 합주협주곡 `조화의 영감`,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사계`가 있다.
1645년 국제법 자연법의 아버지 네덜란드 법학자 유고 그로티우스 세상 떠남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430년 로마시대의 가톨릭 성자 아우구스티누스 세상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