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에 관한 안내문
망춘문
부용지와 주합루
부용정(좌)과 주합루(우)
어수문과 주합루
주합루(宙合樓, 중앙)와 영화당(暎花堂, 우)
부용지와 주합루에 관한
안내문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려주었으며
활을 쏘는 곳으로 사용했던 장소인
영화당
주합루를 배경으로
이성수
부용지를 배경으로
이성수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이고
2층은 열람실이었던
주합루
어수문(앞)과 주합루(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 宙合樓)
부용지 옆의 우물
부용지와 부용정
창덕궁 부용정(芙蓉亭)
창덕궁 영화당(暎花堂)
창덕궁 금마문(昌德宮金馬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독서를 하기 위해 만든 소박하고 단출한 전각인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으로
들어가는 문]
창덕궁 불로문(昌德宮 不老門)
애련지와 의두합에 관한 안내문
창덕궁 애련지 및 애련정(昌德宮 愛蓮池 및 愛蓮亭)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청해 지은 건물인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
창덕궁 불로문(昌德宮 不老門)
효명세자가
독서와 사색을 하기 위해 자주 들렀던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
창덕궁 금마문(昌德宮金馬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독서를 하기 위해 만든 소박하고 단출한 전각인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으로
들어가는 문]
창덕궁 후원의 연못인
반도지(半島池)
존덕정과 폄우사에 관한
안내문
창덕궁 후원의 연못인 반도지(半島池)에 있는
정자인 관람정(觀纜亭)
부채꼴 선형(扇形) 기와지붕을 한
관람정(觀纜亭)
관람정(觀纜亭)의
나뭇잎 모양의 현판
관람정(觀纜亭)에서 바라본
창덕궁 승재정(昌德宮 勝在亭)
창덕궁의 후원에 있는 연못인
존덕지(尊德池)에 만들어진 정자인
창덕궁 존덕정(昌德宮 尊德亭)
존덕정과 정조의 교시
창덕궁 존덕정(昌德宮 尊德亭)의
천정
창덕궁의 후원에 있는 연못인
존덕지(尊德池)
[ 사진 왼쪽의 정자가 존덕정이다.]
(좌로부터) 관람정, 반도지, 승재정
창덕궁 폄우사(昌德宮 砭愚榭)
[폄우는 ‘어리석음을 고친다’라는 뜻]
창덕궁의 후원 반도지(半島池)에 있는 정자인
창덕궁 승재정(昌德宮 勝在亭)
창덕궁 승재정(昌德宮 勝在亭) 앞의
수석
창덕궁 승재정(昌德宮 勝在亭)에서 바라본
관람정
부채 모양의 정자인
관람정(觀纜亭)
창덕궁 존덕정(昌德宮 尊德亭)
(좌로부터) 관람정, 반도지, 승재정
존덕지와 존덕정
폄우사(좌)와 존덕정(우)
연경당(演慶堂)의 안채
연경당(演慶堂)의 후문
연경당(演慶堂)의 안채
연경당(演慶堂)의 안채
연경당(演慶堂)의 선향재
선향재 현판
연경당(演慶堂)의 사랑채
연경당(演慶堂)의 사랑채
연경당(演慶堂)의 안채
연경당의 정문
연경당(演慶堂)의 안채
연경당(演慶堂)의 안채에서
사랑채까지 이어지는
통로
연경당 전경
연경당에 관한
안내문
[연경당~궐내각사] 구간
탐방로 도중의
고개
[연경당~궐내각사] 구간
탐방로 도중의
고목
[연경당~궐내각사] 구간
탐방로 도중의
느티나무 고목
[연경당~궐내각사] 구간
탐방로 도중의
수로
향나무 천연기념물에 관한
안내문
[연경당~궐내각사] 구간
탐방로 도중의
향나무 천연기념물
2024년01월23일(화요일) 서울 [창덕궁&창경궁] 탐방기 * 11:54~12:12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안국역으로 이동하여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옴 [18분 소요] * 12:12~12:20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번지에 있는 창덕궁 매표소로 이동하여 창덕궁과 창덕궁 후원의 관람권을 구입 [창덕궁 입장요금 : 3천원, 창덕궁 후원 입장요금 : 5천원] 탐방지 : 창덕궁(昌德宮) [창덕궁(昌德宮) 창덕궁(昌德宮)은 조선 왕조의 도성인 한양 북쪽에 위치한 이궁이었다. 응봉(膺峯)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자락에 자리잡았는데, 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동남쪽으로는 종묘가,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이 위치해 있다. 1392년 건국된 조선 왕조는,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왕자들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다. 이때 태종은 무악 아래 새 도성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으로 재천도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태종은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궁궐을 하나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창덕궁은 1411년(태종 11)에 조성한 진선문(進善門)과 금천교, 1412년에 건립한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 이어 여러 전각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세조(世祖)는 즉위하면서 인정전(仁政殿)을 다시 짓고 궁궐의 각 전각 명칭을 새로 정하였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덕궁 역시 다른 궁과 더불어 잿더미로 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궁궐의 재건은 엄두도 못내다가 1605년(선조 38)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1609년(광해군 원년) 10월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공사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던 듯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또다시 정전인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어 1647년(인조 25)에 가서야 복구가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政務)를 보게 된다. 이 사이 창덕궁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도 하고, 화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704년(숙종 30) 12월에는 대보단(大報壇)이 조성되었고, 1776년(영조 52) 9월에는 후원에 규장각(奎章閣, 주합루宙合樓)이 건립되었으며, 1782년(정조 6)에는 인정전 뜰에 품계석이 설치되었다. 1917년에는 내전이 소실되어, 이를 복구하기 위해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과 그 앞의 동·서 행각 등 많은 건물들이 1918년 창덕궁으로 이건되어 대조전(大造殿), 희정당(熙政堂) 등으로 복구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건물들이 대다수 철거되고 몇몇의 주요 건물들만 남은 것을 현재 일부 재건공사 중에 있다.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宣政殿)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樂善齋) 영역, 그리고 북쪽 구릉 너머 후원(後苑)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궐의 중요 건물은 유교 예법에 맞게 중심축을 형성하며 도형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야 하지만,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은 중심축 선상에 배치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창덕궁이 정궁인 경복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으로,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한 데서 생긴 결과이다. 평지에 세워진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북쪽 응봉에서 흘러나온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궁궐을 이루는 건물들은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얼른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궁궐의 서남쪽 모서리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지형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정궁인 경복궁에서 닿기 편한 위치이기도 하고, 예부터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 보이지 않도록 배치하는 기법과 일맥상통한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2층 문루에 큰 북을 걸고 아침저녁으로 북을 쳐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609년(광해군 원년)에 완공하였으며,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로 되어 있다. 본래 넓은 돌계단이 있는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에 거듭된 도로 포장으로 기단부가 아스팔트로 덮여버렸다. 최근 발굴을 통해 계단과 기단 일부가 제 모습을 찾았으나 전면으로 지나는 율곡로 도로면보다 낮은 모습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이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외조의 삼정승(三政丞)을 상징하는 높다란 괴목(회화나무)이 왼쪽에 서 있다. 이 앞을 지나 궁궐 서북쪽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명당수를 건너는 금천교를 지나면 동쪽으로 진선문에 이르고, 이 문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꺾으면 정전의 출입문인 인정문(仁政門)이 나타난다. 진선문과 인정문 주변은 일제 때 훼손되었다가 1996년부터 재건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은 사방이 모두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정문은 1405년(태종 5)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는데, 지금의 건물은 1804년(순조 4)에 재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대에 일제에 의해 주위 행랑과 함께 일본식을 가미하며 변형된 것을 1988년 현재 모습처럼 원상을 회복하였다. 이 건물에서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 왕조의 여러 임금들이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 보물. 인정문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드나드는 문이다. 이 문에서 조선 후기 여러 왕들이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인정전 일곽이 나온다. 인정전은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주위는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1405년(태종 5) 창덕궁 창건 때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1803년(순조 3) 선정전 서행각에서 난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 중건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한말(韓末)에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후 내부의 일부가 서양식으로 바뀌었다. 지붕 용마루 양성(陽城)에는 당시 국장(國章)이던 이화(李花) 문장 다섯 개를 새겨넣었으며, 1908년 무렵에는 내부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어 전돌 바닥 대신 서양식 마루를 깔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각 창과 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다. 선정전은 평소 임금이 신하와 국가의 일상 업무를 논하던 편전이다. 선정전은 인정전 동쪽에 인정전과 평행하게 남향하고 있는데, 이는 경복궁의 편전인 사정전이 정전인 근정전의 북쪽에 배치된 예와는 다른 형식이다. 선정전은 인조반정 때 불에 탄 후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을 이건하여 지은 건물이다. 지붕은 푸른색 유리기와를 덮었는데, 유일하게 궁궐에 현존하는 청기와 지붕이다. 선정전의 동쪽으로 내전 일곽이 전개되는데, 맨 앞에 희정당이 있고, 그 뒤로 대조전이 있으며, 그 뒤 북서쪽에는 경훈각(景薰閣)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대조전 뒤쪽에는 장대석을 사용하여 경사지를 몇 개의 단으로 꾸민 화계(花階)가 있다. 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誠正閣) 등 부속 건물이 있으며, 그 동편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왕세자의 처소였던 동궁과 창경궁이 접해 있다. 희정당은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17년에 내전이 소실되어,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 복구한 것이다. 『동궐도(東闕圖)』에 보이는 희정당은 정면 5칸 규모의 건물이 높은 돌기둥 위에 서 있고, 기단 서쪽 한 곳에는 아궁이가 보이며, 건물 동쪽에는 연못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인데, 정면 9칸, 측면 3칸 주위로 퇴칸을 설치하여 통로로 사용토록 하였다. 정면 가운데 3칸의 주칸은 좌우의 주칸보다 넓고 우물마루를 깔아 전체를 튼 통칸으로 서양식 접객실로 만들었고, 서쪽 3칸도 통칸으로 만들어 회의실로 꾸몄으며,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가 거주하던 곳으로, 궁 밖에서 대조전까지 가려면 돈화문과 진선문, 숙장문을 지나 적어도 5개 이상의 문을 더 통과해야만 한다.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의 목재를 헐어 가져와 1920년에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의 36칸으로 줄었다.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은 통칸으로 하여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각각 정면 2칸, 측면 2칸을 통칸으로 하여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거실의 앞 퇴칸은 월대로 출입하도록 하였고, 뒤 퇴칸은 후원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각 침실 측면과 뒷면에는 작은방을 두어 시종들의 처소로 삼았다. 현재 거실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큰 의자를 두었으며, 침실과 작은방은 온돌로 꾸몄다. 낙선재는 창덕궁의 동남쪽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지(宮闕志)』에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낙선재 상량문(上樑文)에는 1847년(헌종 13)에 낙선당 옛터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6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윤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李芳子) 여사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에 타계하였다. 낙선재는 세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그 동쪽에는 낙선재와 건립 시기가 비슷한 석복헌(錫福軒, 1848년 8월 11일 중수)이 있으며, 다시 그 동쪽으로 182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강재(壽康齋, 1848년 8월 11일 중수)가 있는데, 이 건물들이 위치한 영역을 합하여 일반적으로 낙선재라고 부른다. 낙선재는 왕이, 석복헌은 왕비가, 수강재는 대비가 거처하던 곳이다. 낙선재는 조선시대 궁궐의 침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좌우 대칭의 평면 형식에서 벗어나, 온돌과 마루를 생활 방식과 기능에 맞게 구성한 점에서 돋보인다. 이외에도 낙선재는 다양한 외관과 창호 형식, 그리고 후원의 계단식 화단이 빼어나다. 건물에 장식된 박쥐나 포도송이 무늬는 다복(多福)과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화계 위에는 취운정(翠雲亭), 한정당(閑靜堂)이 있으며, 그 외에 상량정(上凉亭), 칠분서(七分序), 만월문(滿月門), 삼삼와(三三窩), 승화루(承華樓)와 그 일곽이 있다. 이방자 여사가 타계한 후 낙선재 일곽에 대한 보수와 복원이 이루어졌고, 1996년 이후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창덕궁 뒤쪽에는 135,200여 평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왕실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비원(秘苑)이라고도 불리는 창덕궁 후원은 일반 백성들은 접근할 수 없는 조선 왕실의 금원(禁苑)이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상림(上林)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이곳은 왕이 수학(受學)하고 수신(修身)하며 소요(逍遙)하던 곳이다. 때로는 사냥도 하고 무술도 연마하였으며, 제단(祭壇)도 설치해 제사도 올리고 종종 연회도 베풀며 정사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욕허심(無欲虛心)의 경지에서 자족하고 사색하도록 건물과 정원을 조영한 곳이다. 창덕궁에서 후원의 입구인 소양문(小陽門, 지금은 없어짐)을 지나 숲으로 싸인 언덕길을 넘으면 앞이 트인 분지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부터 구체적으로 후원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그 속의 정자나 건물들의 조성 면에서 우리나라 건축의 특성을 알 수 있는 배치 기법과 자연을 이용하는 법식(法式)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부용지(芙蓉池) 일곽의 모습은 가장 두드러진다. 부용지 일곽에 있는 모든 건물은 정원의 일부이고, 정원은 바로 자연 그 자체이다. 건물과 정원과 자연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체되어 있다. 부용지 서쪽으로는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 있고, 남쪽으로는 부용정(芙蓉亭)이 물 위에 반쯤 떠 있다. 부용정 건너 북쪽 산등성이 마루턱 넓은 터에는 다락집인 주합루가 남쪽을 향해 우뚝 서 있고, 그 앞 경사지는 꽃을 심은 여러 단의 화계로 조성되었다. 이곳으로 오르는 첫 단에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이 있는데, 이 문을 지나 사방으로 난간을 두른 주합루에 서면 부용정과 연못은 물론, 주위 경관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정조(正祖)는 실학(實學)으로 팽배한 유능한 신하들을 위하여 주합루 아래층을 규장각이라 하여 수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주합루는 우주의 모든 이치를 합하여 한자리에 모이게 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합루 남쪽 아래에 있는, 사방이 네모난 못인 부용지 속에는 둥글게 생긴 작은 섬 위로 잘생긴 늙은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천원지방을 나타낸다. 후원의 제2영역은 애련정(愛蓮亭) 일대로, П자 모양의 불로문(不老門)을 통하여 드나들게 되어 있다. 불로문은 이 문을 드나들며 늙지 않기를 기원하였다고 하는 문이다. 이곳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후일 익종, 1809∼1830)의 개인 서실(書室)이었던 기오헌(寄傲軒)이 자리한 정숙한 지역이다. 애련정 서쪽으로는 연경당(演慶堂)이 있다. 연경당은 원래 왕과 왕비가 사대부(士大夫) 생활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 효명세자가 1828년에 사대부의 가옥과 유사한 형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효명세자가 지은 연경당은 동궐도에 묘사되어 있는데,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의 연경당은 1846년(헌종12) 다시 지은 것이다. 연경당 서쪽에서 발원하여 앞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인 명당수를 건너, 솟을대문인 장락문을 통해 행랑 마당으로 들어간다. 마당 북쪽에 동·서쪽으로 두 개의 중문이 있는데, 동쪽의 장양문(長陽門)은 사랑채로, 서쪽의 수인문(脩仁門)은 안채로 통하는 문이다. 사랑마당과 안마당은 사이에 담을 두르고 구분되어 있으나, 그 뒤의 사랑채와 안채 건물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사랑채 동쪽으로 서고인 선향재(善香齋)가 있고, 선향재 동북쪽 높은 곳에 정자를 지어 농수정(濃繡亭)이라 하였다. 안채에는 서쪽으로도 행랑이 이어지고 부엌을 안채 건물에 붙이지 않고 안채 북쪽에 독립된 건물로 짓고 담으로 구획하여, 일반적인 사대부 주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후원의 제3영역은 부채꼴 모양의 특이한 평면 형태를 지닌 관람정(觀纜亭)과 지붕이 두 겹으로 된 존덕정(尊德亭)이 각각 연못을 끼고 자리해 있다. 존덕정은 육모정자인데, 정조(正祖)가 절대군주의 의지를 수많은 개울물에 비친 밝은 달에 자신을 비유하여 표현한 '萬川明月主人翁自序(만천명월주인옹자서)'란 기문이 북쪽 창방에 걸려 있다. 존덕정 서남쪽에는 폄우사(砭愚獅)가 있다. 인적이 끊어진 은폐된 곳으로, 이곳에서 남쪽으로 난 경사지를 오르면 승재정(勝在亭)이 위치한다. 승재정은 북동쪽 아래 연못을 사이에 두고 관람정을 마주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제4영역은 후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옥류천(玉流川) 부근이다. 소요정(逍遙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등 5개의 정자가 휘돌아 떨어지는 옥류천 계곡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청의정은 유일한 초가 정자로, 그 앞에는 작은 논이 조성되어 있다. 임금이 농사일을 체험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지어, 여기서 나온 벼로 청의정의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후원의 많은 정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인조 때이다. 인조는 1636년에 지금의 소요정인 탄서정, 태극정인 운영정, 청의정 등을 세우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이라는 인조의 친필을 받아 바위에 새겨놓았다. 그 후에도 낙민정(樂民亭), 취규정(聚奎亭), 심추정(深秋亭), 취미정, 취향정, 팔각정, 취승정(聚勝亭), 관풍각(觀風閣) 등이 세워졌다. 숙종은 주로 영화당(暎花堂) 주변과 애련정 및 그 주변을 조성하였다. 1688년(숙종 14)에는 청심정(淸心亭)을 세웠고, 그 후 능허정(凌虛亭), 희우정(喜雨亭), 영암정 등이 조성되었다. 순조 때 건물로는 의두각(倚斗閣), 기오헌, 연경당, 농수정이 있으며, 조선 말, 일제 초의 건물로는 승재정(勝在亭)과 관람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전통 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축과 원림으로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로는 인정전, 돈화문, 인정문,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구선원전(舊璿源殿) 등이 있고,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관람 매일 09:00 - 17:30 (11월~1월)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 매일 09:00 - 18:00 (2월~5월, 9월~10월)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 매일 09:00 - 18:30 (6월~8월)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 월요일 휴무 (휴무일이 공휴일과 겹칠 경우 다음날 휴무) *단, 창덕궁 후원 특별관람의 경우, 입장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통합관람권을 구매하였어도 관람 당일 매표소에서 현장 구매표로 선착순 교환하시기 바랍니다.] 탐방코스 :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진선문(進善門)~인정문(仁政門)~인정전(仁政殿)~선정문(宣政門)~선정전(宣政殿)~희정당(熙政堂)~대조전(大造殿)~성정각(誠正閣)~낙선재(樂善齋)~석복헌(錫福軒)~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입구] 탐방일 : 2024년01월23일(화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와룡동 : 최저기온 영하 14도C, 최고기온 영하7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0분 소요) * 12:20~13:00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에서 탐방출발하여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진선문(進善門)~인정문(仁政門)~인정전(仁政殿)~선정문(宣政門)~선정전(宣政殿)~희정당(熙政堂)~대조전(大造殿)~성정각(誠正閣)~낙선재(樂善齋)~석복헌(錫福軒)~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입구]의 동선으로 창덕궁 전각을 탐방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 요약 : 1412년 태종 때 건립하였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1609년 광해군 때 복원된 창덕궁의 정문.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 (지번)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 2-77 크기 : 정면 5칸, 측면 2칸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태종(太宗) 12년인 1412년 5월에 건립하였으며, 창덕궁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다음해 돈화문에 큰 종(鐘)이 설치되어 매일 정오와 오후 10시에 종을 쳐 시각을 알렸다.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선조(宣祖) 재위 40년인 1607년에 복원이 시작되어 광해군(光海君) 원년인 1609년에 완공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돈화문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우진각지붕집이다. 중앙의 3칸은 가운데 주열(柱列)에 각각 2짝씩 문짝을 달았으나 좌우 맨 끝의 칸과 측면 앞의 절반은 모두 벽을 쳐서 막았다. 위층은 누마루를 깔고, 4면에 작은 판문(板門)을 돌려 달았으며, 고주(高柱)는 좌우 2개만 있고 가운데는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다른 문루건축(門樓建築)은 고주를 가운데에 한 줄로 배치하는 일이 보통이지만, 이 돈화문은 그 일부를 생략하여 넓은 공간을 활용하도록 새로운 의도를 나타내었다. 공포(栱包)는 상하층이 모두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의 다포집 계통의 것으로 쇠서[牛舌]들의 형태는 아직도 건실한 기풍을 지녔다. 그러나 내부의 살미첨차들은 이미 적지 않게 장식적 요소가 나타나 변형되었다. 한때 돈화문은 창경궁(昌慶宮)의 명정전(明政殿) 등과 함께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를 면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이라 생각되어 왔으나,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건물임이 밝혀졌고 돈화문도 그 세부적인 수법을 서로 비교해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건축임을 알 수 있다.] [진선문(進善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창덕궁의 중문(中門)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中門)이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으며 마당에는 어로(御路)가 나 있다. 마당 둘레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이 있다.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 불리는 북을 태종 때 진선문에 설치했고, 중간에 유명무실해졌다가 영조 때 다시 설치했다고 한다. [창덕궁 인정문(昌德宮 仁政門)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는 출입문이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13호로 지정되었다. 인정문은 태종 5년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 영조 20년 10월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나면서 연소되어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 3월에 복구되었다. 그 후 순조 3년 12월에 선정전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될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대에 일제에 의해 주위 행랑과 함께 왜식을 가미하며 일부 변형되었었으나 1988년 현재와 같이 원상을 회복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주좌가 둥근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상부에는 안초공이 있다. 정면 기단에는 건물 기단과 같은 너비의 계단을 두고, 계단 중앙에 어칸 너비로 소맷돌을 놓아 세 부분으로 구획하였다. 사방에 평주를 돌리고, 가운데 기둥 열 중앙에 두 개의 고주를 세웠다. 가운데 기둥열 세 칸에 각각 두 짝의 판문을 달았는데, 어칸의 문이 그 좌우의 문보다 높게 처리되었다. 공포는 내3출목·외2출목으로 3제공이 중첩되었고, 도리받침 부재는 구름모양으로 깎았다. 내부는 2제공까지는 첨차 끝이 직각으로 절단되고, 그 위는 둥글둥글한 운궁이 되어 도리와 보를 받치고 있다. 고주 위로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종보를 둔 5량가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서까래와 가구를 노출시켰다. 문 위에는 홍살문이 있다.현재있는문화재는 일제강점기때 훼손된것을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으로 따지면 근정문이다.]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 요약 : 창덕궁의 정전(正殿). 1985년 1월 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국보 지정일 : 1985년 1월 8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크기 : 정면 5칸, 측면 4칸 태종 이방원이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건립하면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으나 1418년에 규모가 큰 건물로 고쳐지었다. 인정전(仁政殿)은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고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 2)에 다시 건립되었다. 이후 인정전은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행하였고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창덕궁은 여러차례 화재로 시달렸는데 1803년 선정전에서 불이나 인정전까지 전소되고 말았다. 이듬해 1804년(순조 4) 다시 건립되었다. 인정전의 앞 마당에는 박석(薄石)을 깔았고 품계석을 설치하여 조선왕조의 법전으로 역할했다. 건물의 방향은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이며, 용마루에 한말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다섯 개의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다. 기단(基壇)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상하층으로 된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았고 상하층 월대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돌계단 난간에는 8마리의 석수(石獸)를 새겼고, 가운데 계단에는 답도(踏道)를 설치하여 봉황을 새겼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는 원주(圓柱)이고,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과 4개의 우고주(隅高柱)를 세워 중층가구법(重層架構法)을 따랐다. 두공(枓栱)은 밖이 3출목(三出目)이고 안이 4출목인 다출목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둥머리의 안초공(按草工)으로부터 살미와 첨차(檐 遮)의 세부수법이 조선 말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架構)는 외중층(外重層) 내통층(內通層) 수법이고, 고주(高柱) 몸에 퇴량(退樑)을 끼워서 2층평주(二層平柱)를 받게 하였으며 우고주(隅高柱)가 2층 우주가 되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兩城)하여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이 근정전(勤政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1985년 1월 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선정문(宣政門) 창덕궁 편전 선정전의 정문이다. 1층 목조 문이다. 이름 뜻은 당연히 '선정전의 문'이다. '선정(宣政)' 자체는 선정을 베풀라는 뜻이 아니라[2]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의미이다.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편전 조계청(朝啓廳)을 세우면서 같이 건립했다. 1461년(세조 7년) 12월에 세조가 조계청 이름을 선정전으로 바꾸면서 조계청 정문의 이름 역시 선정문으로 개칭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재건했다. 조선시대 당시 선정전 행각은 남쪽으로 두 겹이 있었다. 현재 선정전 행각 밖에 또 다른 행각이 있었고 그 행각에 선정문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 들어 선정전을 혼전[3]으로 자주 쓰면서 선정전과 선정문 일곽에 복도각을 만들었는데, 선정문의 서쪽 칸과 안쪽 행각 출입문인 돈례문(敦禮門)의 중앙 칸을 복도로 연결시켰다.] [창덕궁 선정전(昌德宮 宣政殿)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와 일상업무를 논하던 편전이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14호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궁궐의 편전은 경복궁의 사정전과 같이 정전의 뒤에 위치하지만, 선정전은 창덕궁의 지세에 따라 정전인 인정전의 동쪽 뒤에 위치해 있다. 태종 5년 창건 당시 이름은 조계청이었으나 세조 7년에 궁궐 건물들의 이름을 바꿀 때 선정전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원년에 복구하였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인조 25년에 재건하였다. 이 건물은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새로 지었던 인경궁의 광정전을 철거한 재목을 이용하였으며, 이때의 모습이 현존하고 있다.] [창덕궁 희정당(昌德宮 熙政堂)은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연산군 2년 궁내의 숭문당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원년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에 재건되었다. 이 때에는 인경궁의 건물을 철거한 자재로 세웠다. 순조 33년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재건되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이건하여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이 여러 차례 불에 탔다가 재건되면서 규모도 달라지고 건물의 용도도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인조 때 재건될 때에는 15칸에 지나지 않았으나 뒤에 편전으로 이용되면서 규모가 늘어나 현재의 큰 건물이 되었다.]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은 창덕궁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곳에서 조선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이 건물은 창덕궁 창건 때인 태종 5년에 함께 지어졌는 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연산군 2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이 불에 타면서 이 건물도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원년 창덕궁 재건 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조반정 때 내전이 모두 불에 타면서 이 건물도 불탔고, 인조 25년 재건되었다. 이때는 인경궁의 경수전을 철거하여 이건하였다. 순조 33년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되었으며, 다시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을 헐어 가져와 1920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정각(誠正閣) 창덕궁의 동궁으로, 왕세자의 공부방이었다. 희정당의 동남쪽에 있다. 이름은 《대학》에서 유래했으며, '성의(誠意)', '정심(正心)'에서 앞 글자를 따서 붙였다. 즉 '성심성의껏(誠) 바른(正)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모르나 《승정원일기》의 이 기사를 볼 때, 숙종 시기에 창건했으며, 1697년(숙종 23년) 《승정원일기》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어 그 이전에 건립한 듯 하다. 그러나 영조부터 고종까지 주로 세자보다는 왕들이 많이 활용했다. 용도는 보통 경서를 읽고 공부하거나, 신하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순종의 황태자였던 의민태자가 일본에 유학이라 쓰고 인질로 잡혀간다고 읽는다가기 전까지 여기서 머물렀다. 이후 일제의 영향으로 창덕궁에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궐내각사 구역에 있던 내의원을 성정각으로 옮겨왔다.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 때는 잠시 순종황제 내외가 머물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동안 비공개 구역이었다가 2000년대 초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성정각의 부속 건물 보춘정(희우루)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이다. 보춘정(報春亭) 현판은 남쪽 면에, 희우루(喜雨樓) 현판은 동쪽 면에 있다. '보춘(報春)' 뜻은 '봄(春)이 옴을 알린다(報)'이다. 봄은 동쪽을 상징하기에 동궁에 속한 건물의 이름으로 쓰인 듯하다. '희우(喜雨)' 뜻은 '비(雨)가 내려 기쁘다(喜)'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 〈희우루지(喜雨樓志)〉를 보면, 1777년(정조 1년)에 매우 가물었는데, 이 누각을 중건할 때와, 완성 후 임금이 처음 행차할 때 비가 내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희우(喜雨)'로 지었다고 한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총 3칸 짜리 누각으로, 아랫 부분에 사다리꼴 모양의 긴 화강석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누하주를 세웠다. 누하주 위에 청방을 설치하고 장귀틀과 동귀틀을 걸어 마루를 구성한 뒤 2층을 세웠다. 2층의 문은 분합문으로 설치하고 바깥에 난간을 둘렀으며 내부는 전부 마루이다. 성정각과 붙어있으나 성정각의 방과는 통하지 않으며 남면의 툇마루에 달린 계단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 《동궐도》를 보면 원래 1층에도 벽과 창, 문이 있어 별도의 공간으로 활용했던 듯 하나 현재는 사라졌다. 관물헌 '관물' 뜻은 '만물(物)을 보고(觀)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로, 중국 북송의 사상가 소옹(邵雍)의 〈관물편〉에서 인용했다. 《동궐도》에는 '유여청헌(有餘淸軒)'이란 이름으로 나와 있으며 이는 '넉넉하고 맑은 마루'란 뜻이다. 그런데 정작 현판의 글씨는 '관물헌(觀物軒)'도, '유여청헌(有餘淸軒)'도 아닌 '집희(緝熙)'이다. 1864년(고종 1년) 1월에 13살이었던 고종이 직접 쓴 것이다. '계속하여(緝) 밝게 빛난다(熙)'는 의미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소년 왕이 앞으로 국가를 잘 이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듯 하다. 어릴 때 쓴 글씨라서 그런지 현판 글씨 치고는 서툴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성인들도 저 정도 못 쓰는 사람 많다. 참고로 경희궁의 동궁 중 아예 정식 이름이 집희당인 건물이 있다. 건립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정조 때에는 존재했던 듯 하다.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을 자주 만나고 문신들을 시험보게 했다. 이후 효명세자도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으로 활용했고, 헌종은 몸이 불편할 때 여기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고종도 즉위 초 많이 사용했으며, 섭정이던 흥선대원군이 궁에 들어올 때 주로 이용했다. 1874년(고종 11년) 3월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여기서 태어났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때는 급진개화파가 본거지로 사용했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데려다 잠시 머물게 하기도 했다. 개화파가 이 곳을 고른 이유는, 창덕궁 내에서도 꽤 높은 곳에 있고, 또한 좁아서 청나라 군대가 와도 방어하기 쉬울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덕혜옹주가 1919년 고종의 승하 이후 1925년 일본 유학 전까지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동남측 부속 건물 성정각 권역 동남쪽에 있다. 1908년(융희 2년)에 제작한 《동궐도형》을 보면 'ㄱ' 형 건물인 양성재(養性齋)가 있었으나 지금 모습과 많이 달라서 같은 건물로 보기엔 힘들다. 현판 2개가 걸려있다. '보호성궁(保護聖躬)'과 '조화어약(調和御藥)'이다. '보호성궁'은 '성궁(聖躬, 임금의 몸)을 보호(保護)한다', '조화어약'은 '임금(御)께서 드시는 약(藥)을 만든다(調和)'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사용할 때 건 듯하다. 잘보면 '성궁(聖躬)'과 '어(御)'자가 다른 글자보다 약간 높이 있다. 왕을 상징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창덕궁 낙선재(昌德宮 樂善齋) 19세기 중반 창덕궁 동남쪽에 건립한 사대부 주택 양식의 건물. 2012년 3월 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의 동남쪽,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 잡은 건물로, 1847년(헌종 13) 건립되었다. ‘낙선(樂善; 선을 즐김)’이라는 명칭은 ‘인의충신(仁義忠信)으로 선을 즐기고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천작(天爵; 하늘이 내린 벼슬)이다’라는 《맹자》의 구절로부터 비롯되었다. 낙선재 오른쪽으로 1848년 헌종의 후궁인 경빈김씨의 처소로 건립된 석복헌과 1848년 중수된 수강재가 옆으로 길게 이어지며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어 이 일곽을 통틀어 낙선재라 부르기도 한다. 각 건물 사이에 행랑과 담을 설치하여 공간을 독립적으로 구성하였다. 세 건물 뒤쪽으로 화초·석물·꽃담·굴뚝 등으로 꾸민 아름다운 후원이 있고,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한정당·취운정 등의 정자가 있다. 낙선재는 왕이 책을 읽고 쉬는 공간, 즉 서재 겸 사랑채로 조성되었다. 국상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는 공간이었다고도 전해진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되었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순종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1963~1970년 영친왕 이은, 1966~1989년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가 기거한 곳으로,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한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는 1926년 순종이 영면한 후 석복헌에서 생활하였고 1966년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는 1968~1989년 수강재에서 기거하다 죽음을 맞았다. 정면 6칸·측면 2칸에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가 딸려 있는 ‘ㄱ’자 형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석복헌·수강재와 달리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맨 왼쪽 편으로 누마루를 앞으로 돌출시켰고, 누마루 뒤쪽으로 온돌방 1칸을 두었다. 누마루 뒤쪽에서 오른쪽으로 온돌방 1칸→대청 2칸→온돌방 2칸→다락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락방 뒤쪽으로도 온돌방을 돌출되게 두었다. 가운데 대청과 온돌방 앞으로 툇마루를 깔았고, 건물 뒤로는 쪽마루를 길게 깔았다. 여느 궁궐 내 침전 건물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 가옥 형식으로 건축하였다. 하지만 여러 자재들을 고도의 기술로 다듬어 섬세하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수준 높고 다양한 창호를 설치함으로써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잘 보여준다. 백미는 누마루와 그 뒤쪽 온돌방 사이에 설치된 만월문이다. 조선 왕가의 여인들이 기거하다 생을 마친 곳으로 국권을 빼앗긴 황실의 마지막 역사를 담고 있고, 조선 후기 장인들의 축적된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크다. 2012년 3월 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창덕궁 석복헌(昌德宮錫福軒) 창덕궁의 낙선재·수강재와 연이어져 있는 공간으로, 낙선재 동쪽에 있다. 1993년 복원공사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헌종 14년(1848)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복헌은 후손을 보기 위해 맞아들인 후궁 경빈 김씨(慶嬪金氏)를 위해 헌종이 마련해준 처소였다. 유난히 경빈 김씨를 아꼈던 헌종은 석복헌을 짓기 한 해 전에 자신의 개인 휴식공간인 낙선재를 먼저 지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 일대의 복원 작업을 마친 후 2006년부터 공개되었다.] 창덕궁 안내도 탐방지 :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창덕궁 후원 동아일보 기사 입력일 : 2009.12.09. 宮 산 숲 돌 흙 길 담 물 꽃 뜰… 그리고 王을 품다 골짜기 따라 형성된 연못 중심 4개 정원 만들어 자연과 하나된 조경… 왕들의 ‘망중한’ 공간으로 《한국의 정원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한국인은 정원 속에서 자연을 만나고 이상을 품었다. 세월이 흐르고 정원의 모습은 변해 왔지만 정원을 향한 한국인의 마음은 여전하다. 2010년 9월 경기 시흥시에서 정원박람회가 열린다. 이를 앞두고 한국 정원의 역사와 변천, 거기 담겨 있는 정신과 문화를 살펴보는 기획 ‘도시. 정원을 꿈꾸다’를 마련한다. 4회에 걸쳐 매주 수요일자에 게재한다.》 우리의 살림집에는 안마당에 정원을 두지 않았다. 안마당은 늘 비워 두어 온갖 행사와 작업을 담았고, 안마당에 꽃밭을 가꾸거나 나무를 심는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들어온 일본풍 취미였다. 집의 정원은 늘 뒤뜰에 있었다. 뒷동산과 연결된 경사지에 계단식 축대를 쌓고 약간의 화초를 심으면 뒷산이라는 자연과 더불어 훌륭한 정원이 되었다. 궁궐의 정원도 늘 뒤편에 자리했다. 창덕궁 뒤편, 산자락 속에 조성한 왕실의 정원을 그래서 ‘후원’이라고 불렀다. 궁궐에 속한 정원이라는 뜻에서 ‘궁원’,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 하여 ‘금원’이라고도 불렀다. 비밀의 정원이라는 다소 동화적 이름인 ‘비원’은 일제강점기에 널리 불러서 이제는 오히려 기피하는 이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왕조들은 그들의 왕실정원을 조성해 왔다. 페르세폴리스의 공중정원은 10층 높이의 구조물 위에 만든 고대의 불가사의였고, 중국 베이징의 위안밍위안(圓明園)은 경복궁 면적의 10배가 넘는 거대한 규모였다. 후원은 규모면에서 중국을 따를 수 없고 기술면에서는 페르시아를 넘을 수 없다. 그러나 세계 어떤 왕실정원도 갖지 못한 독특한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으니 전혀 부러울 것이 없다. 창덕궁 후원은 궁궐에 부속되어, 논쟁과 격무로 가득한 궁궐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하며 긴장을 풀었던 정원이다. 중국의 왕실정원은 피서산장이나 이허위안(이和園)과 같이 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조성한 별궁들이다. 여기에 황제가 행차하면 적어도 하루 이상을 지내야 한다. 비워둔 궁궐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쉬지 못하거나, 아예 정무를 잊어버리고 주지육림에 파묻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궁에서 낮은 고개 하나 넘으면 펼쳐지는 후원은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정원으로 ‘망중한’을 즐기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와 크기를 가졌다. 일과 여가가 동전의 앞뒤를 이룸과 같이, 궁궐과 후원을 앞뒤에 조성하여 정무와 휴식을 일체화했다. 후원은 한순간에 이룩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차근차근 조성한 역사적 정원이다. 조선 태종 때 터를 정하고, 세조 때 연못을 파고 땅을 넓혔으며, 광해군 때 여러 개의 정자를 지었다. 특히 인조는 남다른 정원 취미를 가져서 지금의 옥류천을 만드는 등 현재 후원의 뼈대를 조성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 규장각(지금의 주합루 일대)에 파묻혀 지내며 집권 후 이룰 대업을 준비했으며, 그 손자인 효명세자는 연경당과 기오헌을 짓고 강력한 왕권 회복을 꿈꾸다 제거되기도 했다. 지금의 후원은 조선조 500년 왕실의 역사를 고스란히 축적한 채, 곳곳에서 여러 왕의 풍류와 의지를 읽어 낼 수 있는 공간적 역사서이기도 하다. 인간의 계획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천재적인 조경가나 건축가라도 자연의 섭리와 시간의 변화를 거스를 수 없다. 중국 정원의 달인인 계성이 오죽하면 “정원의 성공 여부는 조경가에게 3할, 주인의 안목과 정성에 7할이 달려 있다”고 했을까. 정원은 갖가지 화초가 피고 지고, 수목들이 자랐다 사라지는 변화무쌍한 곳이다. 그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인간의 계획으로 정지시키려면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원은 350년 전 바로크 정원으로 태어나서 전혀 변하지 않은, 시간이 정지된 정원이다. 비록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광대하다는 꼬리표를 달고는 있지만, 생태계를 거스르고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킨 반자연적이고 반역사적인 정원이다. 정원이란 이상적인 자연을 재현한 곳이다. 베르사유 궁원에서 루이 14세가 꿈꾸었던 자연이란 극히 기하학적이고 고정된 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거대한 역사 앞에서 한순간 허상에 지나지 않는 절대왕정의 과시요, 태양왕의 한 점 허영에 불과한 것이다. 자연은 항상 변화하면서 영원하고, 불규칙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베르사유가 아니라 창덕궁의 후원에서 이러한 자연을 발견할 수 있다. 후원은 자연 지형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북한산의 맥이 흘러내려 한양의 제1봉인 북악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제2봉인 매봉을 이루었다. 그 매봉의 남쪽 능선에 후원과 창덕궁과 종묘를 앉혔다. 매봉 능선은 주름이 많아 후원에는 크고 작은 여러 골짜기가 있다. 이 가운데 4곳의 골짜기에 각각 특색 있는 정원을 만들었다. 부용지 일원, 애련지 일원, 반도지 일원, 옥류천 일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 4곳은 낮은 능선들로 감싸여서 서로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후원은 독립적인 4개 정원으로 이루어졌으며, 후원을 감상한다는 것은 한눈에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이 정원들을 찾아 즐기는 체험이며 움직임이다. 아무리 지체 높은 왕족이라도 후원의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고 땀을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 후원은 바라보는 정원이 아니라 산책하고 소요하는 정원이기 때문이다. 4개의 정원은 모두 물을 주제로 만들어졌다. 부용지에는 큰 사각형 연못을 파고 큰 규모의 전각들을 배열했다. 애련지는 좀 더 작은 사각연못이며 한 칸짜리 작은 정자를 세웠다. 반도지는 불규칙한 곡선형 연못을 두 개 만들어 그 사이의 흐름을 보여주며, 옥류천은 한 줄기 휘돌아 흐르는 시냇물이다.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물의 크기는 줄어들고, 고여 있는 물은 흐르는 물로 변해간다. 그에 맞추어 누각과 정자 따위의 부속 건물들도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규칙적이고 인위적인 모습에서 불규칙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변해간다. 따라서 궁에 가까울수록 공공적인 정원이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사적인 정원이 된다. 부용지 일원은 과거시험을 치를 정도로 개방된 곳이며, 애련지 일원은 허락된 신하들이 드나들 수 있는 반개방적인 장소, 반도지와 옥류천은 소수 왕족만이 즐길 수 있는 개인적인 정원이었던 것이다. 정원의 용도에 맞추어 조경을 계획했고, 자연 생태계의 변화까지 받아들여 최소의 인공만을 가해 최대의 효과를 거두었다. 최고의 성형수술이 자연산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후원은 매우 완벽하여 너무나 자연스러운 정원이 되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 한국 전통정원의 특징은 음양오행 원리 담아 곡선-직선 어울리게 한국 전통 정원은 자연을 모방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이 아닌 자연 자체를 적극 도입하여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며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서울대 양병이 교수는 한국 정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전통 정원은 공간의 구성이 수평적인 구분보다는 수직적인 공간 구분이 강하며, 특히 궁궐에서의 후원과 별정에서 잘 나타난다. 후원 양식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나라 고유의 독특한 특징인데 후원에서는 돈대를 설치하여 좁은 공간에서 공간의 수직적 변화를 느끼도록 하였으며 또한 수목이나 석물을 이용하여 수직공간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담장이 대부분 낮고 정원 내의 정자나 건물에서 주위 경관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정원의 터를 잡을 때부터 주변 경관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을 활용한 기법 또한 독특한데 물이 담겨 있는 연못의 형태가 중국이나 일본은 자연스러운 곡선을 취하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은 직선형으로 되어 있으며 연못의 중앙에는 원형의 섬이 조성돼 음양오행의 원리를 그대로 상징화하고 있다. 한국 전통정원의 미와 풍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서울 종로구의 석파정(石坡亭), 창덕궁의 후원, 강원 강릉시의 선교장(船橋莊), 전남 완도군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 정원, 전남 담양군의 소쇄원(瀟灑園), 대전의 남간정사(南澗精舍), 경남 함안군의 무기연당(舞沂蓮塘), 경북 영양군의 서석지(瑞石池), 경북 경주시의 독락당(獨樂堂), 경북 봉화군의 청암정(靑巖亭), 경북 경주시의 안압지(雁鴨池) 등을 들 수 있다. 오강임 경기농림진흥재단 녹화사업팀] 탐방코스 : [창덕궁 후원(昌德宮 後苑) 입구~부용지(芙蓉池)~주합루(宙合樓)~영화당(暎花堂)~금마문(金馬門)~불로문(不老門)~애련지 및 애련정(愛蓮池 및 愛蓮亭)~기오헌(寄傲軒)&의두각(倚斗閣)~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폄우사(砭愚榭)~승재정(勝在亭)~연경당(演慶堂)~궐내각사(闕內各司)] 탐방일 : 2024년01월23일(화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와룡동 : 최저기온 영하 14도C, 최고기온 영하7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3분 소요) * 13:00~14:03 창덕궁 후원(昌德宮 後苑) 입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창덕궁 후원(昌德宮 後苑) 입구~부용지(芙蓉池)~주합루(宙合樓)~영화당(暎花堂)~금마문(金馬門)~불로문(不老門)~애련지 및 애련정(愛蓮池 및 愛蓮亭)~기오헌(寄傲軒)&의두각(倚斗閣)~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폄우사(砭愚榭)~승재정(勝在亭)~연경당(演慶堂)~궐내각사(闕內各司)]의 동선으로 창덕궁 후원(昌德宮 後苑) 탐방을 완료 [창덕궁 부용정(芙蓉亭) 창덕궁 후원의 정자이다. 주합루의 남쪽에 있으며, 창덕궁 후원을 관람할 때 주합루와 함께 가장 먼저 보는 건물이다. 부용(芙蓉)은 연꽃의 한자어이다. 현재의 현판 글씨는 1903년(광무 7년)에 창덕궁 후원의 감독직을 맡았던 동농 김가진이 썼다. 조선 초 ~ 중기에는 없었으며 1707년(숙종 33년)에 창덕궁 후원에 처음 세웠다. 당시 이름은 택수재(澤水齋)였으며, 이후 1792년(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조 연간에는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와 같은 영역이라 왕과 신하들이 활동 공간으로도 많이 활용했으나, 정조 사후에는 단순한 휴식 공간으로 주로 이용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헐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2012년 3월 2일에 문화재청에서 보물 제1763호로 지정했으며 2012년 9월 보수 공사 때 일제 때 변형된 지붕을 《동궐도》대로 복원했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으로, '丁'자와 '亞' 자를 합친 듯한 복잡한 구조의 형태이며 마치 연못에 발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특징이다. [부용지(芙蓉池) 부용정의 연못이다.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인 네모난 형태로 수심은 약 1.5m이며 연못 가운데엔 둥그런 섬을 두어 동양의 전통 세계관인 천원지방(天圓池方)을 나타내었다. 남쪽엔 부용정, 북쪽엔 주합루, 서쪽엔 사정기비각, 동쪽엔 영화당이 있다. 위에 언급한 '부용(芙蓉)'이란 이름 뜻처럼 원래 연못에는 연꽃이 많았다. 연못 자체는 부용정보다 역사가 훨씬 길다. 1634년(인조 12년)에 연못을 파고 뱃놀이를 했다고 하며 정조 시기에 고쳐지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부용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찾기 어려우며, 창건 당시에는 '용지(龍池)'라 불렸고, 숙종 ~ 정조 시기엔 '태액지(太液池)'라 했다. '태액(太液)'의 뜻은 '큰 연못'이고, 옛 중국 황궁의 연못 이름에서 유래했다.] [경회루와 부용지 한국의 대표적인 왕실 정원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인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해볼 때 정원(원림)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산수가 수려한 까닭에 굳이 인공적으로 정원을 만들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왕실의 정원은 궁궐에 남아 있어 옛 품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왕실 정원은 경복궁의 경회루 영역과 창덕궁의 부용지가 아닐까 합니다. 이 중에 경회루는 한국에서 가장 큰 목조 누각 건축물로 이름이 높습니다. 이 두 정원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겠지만 다소 불완전하게 알려진 바가 있어 이번엔 이 정원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정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보다는, 이 정원들을 어떻게 감상해야 좋은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려 합니다. 인공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자연에 가깝게 만든 한국식 정원 경회루와 부용지는 왕실 정원이라 자유롭다기보다는 조금 딱딱한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연못을 사각형(장방형)으로 판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이와 같이 딱딱하게 연못을 사각형으로 만드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이 사각형이 땅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인위적으로 연못을 만드는 경우는 왕실 정원에서만 발견됩니다. 대표적인 사대부 정원인 담양 소쇄원이나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세연정) 등에는 이런 장방형의 연못이 없습니다. 한국 예술의 특징 중에는 ‘가능한 한 인위적인 손길 가하지 않기’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 왕실 정원은 인위적인 손길을 많이 가한 편에 속합니다. 이것은 형식을 중요시한 왕실의 격조에 맞추느라 그렇게 된 것일 겁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특히 창덕궁의 부용지에는 이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프랑스인에게 한국에서 가장 멋있는 정원을 보여주겠다고 하고 부용지로 안내한 모양입니다. 한참을 설명을 해주고 돌아가자 하니까 프랑스인이 ‘정원을 보여주겠다고 하고 왜 그냥 가느냐’고 묻더라는 겁니다. 그래 ‘지금까지 실컷 보았지 않느냐’고 하니 그제야 부용지가 정원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부용지가 인위적인 손길이 많이 간 곳으로 보이는데 프랑스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여 정원인 줄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식 정원은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우세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정원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부용지를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이거나 혹은 만들다 만 것처럼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차경(借景), 경치를 빌려오다 이 정원들은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요? 이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이 정원이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경회루와 부용지는 서로 성격이 다릅니다. 큰 국가 잔치를 열었던 경회루가 공식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부용지는 왕실의 사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경회루에서 하던 큰 잔치라는 것은 예컨대 중국 사신을 위해 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부용지는 후원이라 불리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실의 최측근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 됐든 이 두 정원에서 주인 노릇을 했던 사람은 왕입니다. 이 두 정원은 이와 같이 왕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왕의 자리에서 감상해야 합니다. 이 정원은 왕의 자리에서 앉아서 볼 때 가장 아름답게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건물들은 물론 밖에서 보아도 아름답지만 그보다는 안에서 밖을 볼 때 더 아름답게 설계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왕의 자리가 어딘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경회루에서 왕이 앉는 자리는 누각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 누각은 바닥이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왕의 자리가 제일 높습니다. 높다고 해봐야 두 계단 정도 높아지는 것이니까 그리 차이는 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분명 격차를 두었습니다. 이것은 당시가 신분 사회이니만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앉아야 가장 훌륭한 경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아직 이 누각에 올라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곳에 올라간 사람들이 사진을 공개해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으면 남산을 비롯해 인왕산, 백악산(청와대 뒷산)이 보이는데 지붕과 기둥이 프레임 역할을 해 아주 아름다운 경치를 선사합니다. 자연은 그냥 보아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틀을 통해 보면 더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옛사람들이 그것을 익히 알고 그런 디자인 개념으로 경회루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 밑으로 내려오면 배를 타고 물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 물에는 하늘과 산, 그리고 아름다운 건물이 비쳐 그것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었을 겁니다. 이것을 차경(借景), 즉 경치를 빌려온다고 표현하지요. 자연의 경치를 물에 반사하게 함으로써 빌려오는 겁니다. 옛모습을 상상하며 감상할 때 더욱 아름다워 부용지(연못)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왕의 자리는 부용정(정자) 맨 앞부분입니다. 이 정자는 아(亞) 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물 위에 기둥을 세워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왕의 자리는 바로 이 물 위에 있게 되는데 왕의 자리답게 가장 높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왕은 이곳에서 연못 위에 핀 연꽃을 감상하거나 물에 비친 하늘과 건너편에 있는 규장각 건물을 감상하게 됩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을 지 잘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런데 관광객들은 이 정자 근처에는 잘 오지 않고 연못 귀퉁이에서 해설사 설명을 잠깐 듣고 음료수를 사기 위해 가게로 갑니다. 이것은 이 정원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이 의도를 모르고 있는 행태가 또 보입니다. 이 연못 가운데에는 하늘을 뜻하는 동그란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을 보면 큰 소나무가 있는데 문제는 이 나무가 정자에 앉아 있을 왕의 시야를 가린다는 것입니다. 옛 그림 동궐도을 보면 이 나무는 이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밖에서 보기가 좋으니까 나무가 자라도록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정원은 완벽한 원형으로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또 보입니다. 그것은 이 정원들이 원래는 지금처럼 개방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부분적으로는 담이 있는데 경회루는 전체가 꽤 높은 담으로 둘러쳐 있었습니다. 그래야 맞습니다. 이곳은 왕실이나 극히 높은 신분의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밖으로 노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 담이 있어야 안이 더 아름다워집니다. 부용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자료의 그림을 보면 영화당(부용지 바로 옆에 있는 건물) 쪽의 정원 입구가 담으로 막혀 있습니다. 물론 문은 있지요. 이 부분이 막혀 있어야 정원 전체가 아름답지 지금처럼 창경궁 쪽으로 개방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만일 위에서 본 대로 제대로 복원되었다면 이 정원들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을 겁니다. 물론 관광객들이 워낙 많아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다음에 이곳에 갈 때 마음속으로라도 정확한 옛모습을 상상하고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 宙合樓)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후원에 있는 규장각 2층 건물. 2012년 8월 16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물 지정일 : 2012년 8월 16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0 (와룡동, 창덕궁) 크기 : 1동(2층 누각)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지역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이익공의 팔작지붕 형태의 건축 양식이다. 누각 앞에는 부용지가 있고, 정면 맞은편에 부용정이 있다.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이고 2층은 열람실이었는데, 이 열람실을 주합루(宙合樓)라고 한다. 요즘에는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합루로 오르기 위해서는 왕과 신하를 물과 물고기로 비유한 어수문(魚水門)을 지나야 한다. 왕은 어수문으로, 신하는 어수문 옆의 작은 문으로 출입했다. 어수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상징적인 문으로, 부용지의 물고기가 현명한 물을 만나 어룡(魚龍)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인재 등용의 등용문이다. 주합루는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해에 완성한 건물로,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박제가, 유득공 등의 문신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이곳에서 정조는 열흘마다 시제를 내렸는데, 젊은 학자들이 밤낮으로 학문의 증진에 매달렸다. 조선 후기의 왕과 신하들이 정사를 논하고 연회를 즐겼던 학문과 예술의 전당이었다. 현판은 학문을 부흥하고자 인재를 과감히 등용한 정조의 친필이다. 주합루가 자리 잡은 곳은 작은 동산의 경사를 잘 이용한 인공적인 조경이지만, 자연과 조화롭게 꾸며져 있다. 건물 기둥은 둥근 것과 모난 것을 조화롭게 배열하여 하늘과 땅의 이치를 상징한다. 주합루에서 바라보는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창덕궁 사정기비각(昌德宮 四井記碑閣)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후원에 있는 비각(碑閣)이다. 창덕궁 후원의 연못 부용지(芙蓉池) 서쪽 물가에 있는 비각이다. 숙종 16년(1690)에 옛 술성각 자리에 세웠다. 비각으로 보호되어 있는 비(碑)에는 부용지를 만들게 된 배경과 과정이 새겨져 있는데 세종 6년 영순군과 조산군을 시켜 우물을 찾게 하였고, 그때 찾아낸 네 우물에 마니(摩尼)·파려·유리(流璃)·옥정(玉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용지의 수원(水原)은 땅 속에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하며, 비가 많이 올 때는 사정기비각 오른쪽에 있는 석물인 용두(龍頭)의 입을 통해 계곡물이 연못에 흘러들었다고 한다.] [창덕궁 영화당(暎花堂)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옆에 있는 건물이다. 주합루의 동남쪽, 부용정의 동북쪽에 있다. '영화(暎花)' 뜻은 '꽃(花)과 어우러진다(暎)'이다. 주변에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어 지은 이름인 듯하다. '暎(영)'은 '비치다'는 의미지만 시에서는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많이 쓴다. 현판 글씨는 영조가 1754년(영조 30년)에 직접 썼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모른다. 공식 기록에는 《광해군일기》에 영화당 건설 중지를 언급하는 내용으로 처음 나온다. 그런데 기존에 있던 건물을 중건한 건지, 아니면 창건한 건지 역시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광해군 때부터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1692년(숙종 18년)에 고쳐지어 오늘에 이른다. 《궁궐지》에 따르면, 영화당에 선조, 효종, 현종, 숙종이 쓴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가 쓴 영화당 현판을 뺀 나머지는 현재 없다. 영화당의 앞쪽에는 넓은 마당 '춘당대(春塘臺)'가 있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어 지금은 구역을 담으로 나누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구분이 없었다. 왕들은 영화당과 춘당대를 함께 묶어 활용했다.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고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려주었으며 활을 쏘는 곳으로 사용했다. 또한 과거 시험도 여기서 열었다. 과거에도 단계가 있는데, 각 지방에서 예비 과거 시험인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보는 최종 시험장이 이곳이었다. 그래서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를 본 곳으로 나왔다. 1760년(영조 36년)에는 청계천 준설 공사를 마친 후 여기서 공로를 치하했다. 그 때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영화당친림사선도(暎花堂親臨賜膳圖)》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한다. 영조 이후 왕들이 대보단이나 문묘에 참배하기 전에 하룻밤 묵는 곳으로도 사용했다. 그리고 주변에 연못 부용지 및 우물들이 있어 습했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거나 작은 논을 만들어 농사를 살피는 장소로도 사용했다.] [창덕궁 금마문(昌德宮金馬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후원에 있는 문이다.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독서를 하기 위해 만든 소박하고 단출한 전각인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창덕궁 후원, 정조가 세운 규장각이 들어서 있는 주합루와 가까우며 영화당을 지나 담장을 따라가면 나타난다. 금마문은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未央宮)에 있던 문으로, 문 안쪽 전각에 왕세자가 있음을 상징한다. 순조의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의 개혁의지를 품고, 약화된 왕권을 세우기 위해 규장각 근처에 전각을 짓고 독서를 했다고 한다.] [창덕궁 불로문(昌德宮 不老門) 조선왕조 궁궐 곳곳엔 왕실의 번영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장치들이 널려 있다. 창덕궁 후원의 불로문(不老門)이 대표적이다.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세워졌다. 이 문을 지나면 늙지 않는다는 뜻으로,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이 불로문을 흉내 낸 짝퉁 불로문이 전국 도처에 만들어져 불로장생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불로장생에 즐거움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다. 창덕궁 연경당의 대문,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자리 잡은 낙선재의 정문 이름은 오래 즐거움을 누리라는 뜻의 장락문(長樂門)이다. 신선들의 궁궐이라는 장락궁에서 따온 이름이다. 건물의 기와 단청에도 번영과 불로의 의미가 담겨 있다. 궁궐의 장식과 그림에는 백성들의 행복을 바라는 애민정신도 깃들어 있다. 이런 염원과 달리 조선왕조 500년은 기구했다. 건국 이후 근대의 격랑에 휘말려 막을 내릴 때까지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민초들의 삶이 평탄할 리 없다. 5000년 역사 이래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린다는 오늘을 지켜보는 선조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도 삼전도의 굴욕을 다시 끌어내고 구한말의 위기를 떠올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과거를 거울 삼아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경계하는 징비(懲毖)의 교훈이 이토록 절실할 수가 없다. 창덕궁 불로문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갈라지고 파였다. 돌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데 사람이 부서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불로장생의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꿈은 무병장수 자체가 아니라 무병장수를 향한 도전에 있는지 모른다. 세상에 태어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불멸을 좇는 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고통일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 김정숙 여사와 멜라니아 여사가 청와대 산책길 불로문을 지나며 무병장수를 빌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트 대통령도 불로문 밑을 함께 거닐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불로문 밑에서 양국 국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나아가 한반도와 동북아,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함께 기여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창덕궁 애련지 및 애련정(昌德宮 愛蓮池 및 愛蓮亭) 요약 : 조선시대 숙종 18년에 세워진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각으로, '애련'이란 명칭은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의 시 '애련설'에서 유래하였다.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인 애련지(愛蓮池)는 창덕궁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애련지 북쪽에 서 있는 간결한 정자가 애련정(愛蓮亭)이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方池)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입수구가 독특한데,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물길을 따라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애련지의 물가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이다, 건물을 받치는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사방으로 평난간을 둘렀는데, 낙양창 사이로 사계절이 변하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愛蓮亭記)’가 ‘궁궐지(宮闕志)’에 전한다.] [창덕궁 기오헌(昌德宮 寄傲軒) 요약 :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전각이며 효명세자의 독서를 위해 건립했다. 창덕궁의 후원 애련지 남쪽에 있으며 금마문(金馬門)을 들어서면 좌측에 위치한다.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기 위한 독서공간으로 건립되었다. 원래는 독서당(讀書堂)이 자리한 곳이었는데 순조 27년에 재건립하여 기오헌(寄傲軒)이라고 이름지었다.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이곳에서 독서를 했다고 전해진다. 집의 방향은 독특하게 북향이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효명세자는 1812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1827년부터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4년만(22세)에 사망했다. 효명세자의 아들이 등극하여 헌종이 되었으며 효명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효명세자'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05.08.20. 글 : 한성희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수릉 왕과 달라서 왕자란 어딘가 친근감이 간다. 얼마 전 네티즌 사이에 '얼짱 왕자'로 화제를 모았던 의친왕(고종의 차남)의 차남 이우공도 잘 생긴 미남왕자라는 것 외에 소신과 기개를 갖고 독립운동을 도왔고 일제에 항거했던 왕자였기에 더 인기를 모았다. 조선시대에 아까운 왕자를 꼽는다면 단연 소현세자와 효명세자를 들 수 있다. 두 왕자의 공통점은 살아서 왕으로 등극했다면 조선 후기 혼탁한 정치가 달라지고 조선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왕세자란 점이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삼전도 굴욕으로 청에 볼모로 끌려가 9년을 살았다. 소현세자는 조국을 위해 능란한 외교관 역할을 해냈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조선이 발전한다는 확신도 갖고 있었다. 돌아와서 두 달만에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 당하는 비운을 맞았고 뒤이어 세자빈 강씨도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인조는 친손주인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마저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려 그중 둘이 풍토병으로 죽는다. 효명세자(1809~1830)는 23대 순조와 순원 왕후의 원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탄생했다. 수릉(綏陵)은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의 합장릉이며 동구릉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 뛰어난 예술가였던 효명세자 효명세자는 왕 중심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세자였지만 정재(궁중무용)를 집대성하는 데 큰 공헌을 남겼다. 봄 꾀꼬리가 노는 것을 보고 창작했다는 춘앵전, 모란꽃을 들고 추는 대표적인 궁중무용 가인전목단, 고구려무, 향령무, 장생보연지무 등 정재를 집대성했다. 조선후기 정재에 황금기를 이뤘다는 공로로 문화관광부는 올해 11월의 문화인물로 효명세자를 선정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22세로 요절한 것이 아쉬운 것은 이러한 궁중무용을 집대성했다는 공이나 탁월한 예술 재능 때문만은 아니다 정조의 죽음으로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순조 즉위 후 벽파가 집권한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인재양성소였던 규장각을 축소해버리고 인재를 몰살해버렸다. 1800년 병환 중에 있던 정조는 죽기 보름 전인 6월 14일 김조순을 불러들여 적극적 정치개입을 비밀리에 요청했다. 이 일은 정조가 후기 세도정치를 불러들인 격이 됐다. 정조 사후 5년간 벽파 집권 이후, 일찍이 정조에게 세도를 위탁받았던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정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꿈과 비원을 외면해 버리며 이후 60년 간 안동 김씨 정국을 좌우하게 된다. 11세에 왕위에 오른 순조의 시대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자리를 굳혀가는 시대였고, 1804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정조의 유지를 받은 김조순이 주도권을 쥐게되면서 인사정책인 과거제도의 문란부터 시작해 정치는 혼탁의 극을 향해 치닫는다. 정사를 세자에게 물려준 순조 15세에 친정을 시작했지만 허수아비 왕이었으며 마음 약하고 착하기만 해서 물러빠진 순조는 뻔히 알면서도 세도정치권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때 순조에게 하나의 방책이 세자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일이었다. 순조 27년(1827) 2월 18일 순조는 "건강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정사를 소홀히 하고 지체시켰다. 이제 세자가 총명하고 영리하니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명했다. 대리청정을 명할 때 효명세자는 19살이었고 순조는 38세였다. 순조는 이미 15세의 효명세자에게 정무를 돌보게 한 바가 있었고 총명했던 효명세자는 개화파 학자였던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등과 친분을 나누었다. 38세의 순조가 정사에 흥미를 잃은 것은 안동 김씨를 제압할 정치력이 없는데다 세도정치로 인한 민란과 수차례 천재지변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809년부터 유례 없는 가뭄과 기근이 들었으며, 1813년 제주도 민란, 1815년 용인 이응길 민란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또 1821년 서해안에 전염병이 번져 10만 명이 목숨을 잃어 국정 전반의 혼란은 극도로 심했다. 순조가 정치를 전혀 돌보지 않고 뒷전에 물러나 있던 상태에서 세자에게 정사를 물려준 것이기에 이에 반대하는 대신들도 없었다. 안동 김씨를 제외한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은 효명세자에게 국가 기강을 바로 잡을 성군을 기대했다. 순조의 뜻을 잘 알고 있던 효명세자는 집권하자마자 철저하게 안동 김씨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순조는 자신의 힘으로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어릴 때부터 효명세자에게 모든 것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효명세자가 4세가 되자 순조가 세자의 교육을 맡을 사부로 정한 사람은 좌의정 김재찬이었다. 안동 김씨를 견제할 유일한 인물인 김재찬을 선택한 것만 봐도 순조의 의도가 읽힌다. 효명세자는 총명했던 군주 정조를 빼닮았고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그가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왕은 할아버지 정조였다. 시를 잘 짓고 궁중무용을 창작할 정도로 예술에 재능이 있었으나 스스로 자제하고 학문에 몰두하기 위해 '만기일력'라는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안동 김씨를 징계하기 시작하고 정치적으로 소외당했던 소론과 남인, 북인을 등용했다. 또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초반에 이른바 기존 대신세력인 삼사의 길들이기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맞서 처리하는 단호함을 보여 강력한 왕권을 회복시키려는 의지를 굳혔다. 안동 김씨에게 편중된 세력을 약화하려고 김조순 권력의 중심이었던 비변사 당상을 전부 감봉 조치해 타격을 주었다. 할아버지 정조를 본받아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치려했던 효명세자는 안타깝게도 3년 3개월이란 짧은 대리청정을 끝으로 아버지 순조의 희망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효명세자는 조선이 마지막으로 회생을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이었지만 22살의 나이에 죽고 만다. 고독한 왕자의 안식처 기오헌과 의두각 효명세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건물이 바로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이다. 창덕궁 후원인 비원에 있는 17개 정자 가운데 기오헌과 의두각은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청해 지은 건물이다. 기오헌과 의두각이란 이름은 효명세자가 정조를 기대고 의지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으로 그의 의중이 보인다. 화려한 궁궐 건축물 중에서 극히 소박해 보이는 이 두 채의 건물 중 왼편이 기오헌이며 오른편이 의두각이다. 기오헌은 온돌방 하나와 작은 대청과 누마루로 구성된 집이며, 의두각은 한 사람 몸을 누일 수도 없는 정면 2간 측면 1간으로 구성된 극히 작은 집으로 단청이 없다. 효명세자가 독서와 사색을 하기 위해 자주 들렀던 이곳은 북향집이며 기오헌과 의두각 뒤에 규장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왕세자답지 않게 지극히 소박한 이런 건물에 와서 독서를 즐긴 효명세자는 기오헌과 의두각에서 정조를 생각하면서 난국을 타개할 정책에 골몰하기도 했으리라. 효명세자는 학문을 좋아하던 왕자답게 12권 6책으로 구성된 경헌집(敬軒集) 6권과 학석집(鶴石集) 등 문집을 남겼다. 효명세자가 죽자 효명세자와 교유하던 서유영과 박규수 등 인재들은 과거를 포기하고 칩거에 들어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세상을 떠났으니 뜻을 펼 수 없다는 낙심과 세상에 나가기 싫은 선비의 곧은 마음이었으리라. 1830년 5월 6일 마지막 희망이었던 조선의 왕자 효명세자가 병으로 죽자 순조는 묘호를 연경(延慶)이라 하고 8월 4일 양주 천장산 의릉(경종) 왼쪽 언덕에 세자를 안장했다. 헌종이 즉위하자 아버지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해 연경묘는 수릉으로 바뀌며 왕릉이 된다. 헌종 12년(1846) 5월 20일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시 양주 용마봉 아래로 옮겼으며 철종 6년(1855) 8월 26일 지금의 자리로 천장한 것이다. 건원릉 이래 마지막 9번째로 효명세자의 수릉이 옴으로써 동구릉(東九陵)이란 이름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시를 잘 짓고 현재 남아있는 궁중무용까지 창작했던 효명세자에게 자유로운 예술가다운 방랑자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 살아서는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그의 끼를 달랠 수 없기에 남달리 궁궐 밖으로 미행하기를 즐겼다. 그 때 만난 사람이 박규수였으며 그들은 친구 이상의 우정과 학문을 교류했다. 다재다능했고 예술을 이해했으며 짧은 기간이지만 단호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펼쳤던 효명세자는 죽어서 이렇게 3번이나 방랑한 끝에 동구릉에 잠들었다. 익종은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899년(광무 3년) 12월 19일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됐으며, 묘호를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바꾼다. 신정왕후(1808~1890)는 일찍 청상이 되었으나 헌종대에 풍양 조씨 세도정치를 펼친 근원이 됐다.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던 신정왕후의 뜻과는 달리 안동 김씨와 쌍벽을 이루며 백성의 민원은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확장에만 힘써 결과적으로 혼탁한 정치를 가속시켰고 조선은 몰락의 길로 치달아 갔다. 후에 조 대비(신정왕후)는 대원군과 손잡고 고종을 등극시켰고 83세로 장수를 누리다 죽어 효명세자와 합장됐다. 수릉 비각에는 고종이 전서체로 쓴 비문이 있어 고종의 어필을 감상할 수 있다. 왕으로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효명세자가 통치했던 동안이 순조의 왕권이 가장 강화됐던 시기였다. 다시금 수릉에 서서 펼치지 못한 효명세자의 부러진 날개를 생각해보며 '최고짱 왕자'라는 별명을 붙여본다. 조선 후기에 잠시 반짝였던 그의 짧은 생애가, 이내 사라질 저녁 해가 마지막 몸부림으로 쏟아내는 노을처럼 못내 아쉬웠다.] [관람정(觀纜亭) 창덕궁 후원의 연못인 반도지(半島池)에 있는 정자. 한반도의 모양을 닮았다는 반도지(半島池)에 있는 정자이다. 1820년경 제작된 조선시대 궁궐을 묘사한 동궐도(東闕圖)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자의 모양은 부채꼴 선형(扇形)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으로 매우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건물의 일부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며 6개의 원주(圓柱)를 세우고 원주마다 주련(柱聯)을 달았으며 난간을 돌렸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추녀마루 6개가 각각 3개씩 모였으며 그 사이에 용마루를 설치하는 양식을 취하였다. 건축적이기보다 공예적인 수법을 많이 구사한 정자이다. [관람정(觀纜亭) 창덕궁 후원 관람지 권역에 있는 정자이다. '관람(觀纜)' 뜻은 관람하는 게 아니라 '뱃놀이(纜)를 바라본다(觀)'는 뜻이다. 원래 '람(纜)'은 닻줄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뱃놀이란 의미로 썼다.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1828년 ~ 1830년 사이에 그린 《동궐도》에는 안보이고 헌종 때 제작한 《궁궐지》에도 관련 기록이 없는데, 1907년(융희 원년) ~ 1908년(융희 2년)에 만든 《동궐도형》에는 보인다. 그래서 고종 때 후원을 정비할 때인 1903년(광무 7년) 경 아니면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1907년(융희 원년) 무렵에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연구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적어도 1901년(광무 5년)에는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인 버턴 홈스(Burton Holmes)가 1901년에 발간한 《The Burton Holmes Lectures》에 관람정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1901년 이전에 지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아직까지는 정확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관람정 앞의 연못은 관람지(觀纜池)이다. 한반도 모양이라 반도지(半島池)로도 부른다.] [창덕궁 존덕정(昌德宮 尊德亭) 요약 : 창덕궁 후원 연못인 존덕지에 있는 정자. 창덕궁의 후원에 있는 연못인 존덕지(尊德池)에 만들어진 정자이며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이다. 조선시대 인조(仁祖) 재위 22년인 1644년에 만들어졌으며 당시에는 육모정이라고 불렀다. 정자의 마루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어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정은 우물정자로 구성되고 보개 천정과 같이 화려한 장식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황룡과 청룡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정조(正祖)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현판이 걸려있다.] [창덕궁 폄우사(昌德宮 砭愚榭)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후원에 있는 건물이다.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 서쪽에 있다. ‘폄우(砭愚)’란 ‘어리석음을 고친다’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1827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고, 정조 때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궐도>에는 ‘ㄱ’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一’자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온돌방 2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된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이며 마루 쪽은 정면과 측면을 개방하여 평난간을 둘렀다.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댄 초익공 형식의 집이다.] [창덕궁 승재정(昌德宮 勝在亭) 창덕궁의 후원 반도지(半島池)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정면 1칸, 측면 1칸에다 겹처마에 사못지붕을 한 작고 간결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각 칸마다 창호를 달았으며 살창이 독특한 문양을 가지고 있다. 정자의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승재정이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경당(演慶堂)은 창덕궁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2년 8월 1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70호로 지정되었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자 1827~1828년(순조 27~28)경에 민간의 사대부가를 모방하여 지은 건물이다. 사대부 주택 형식을 취한 연경당은 건물배치와 공간구성 등을 유교사상에 맞도록 철저하게 적용시켰으며, 민가형태이면서도 궁궐의 조영법식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련되게 꾸민 가구와 세부양식 등이 궁궐건축 고유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어 한국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탐방지 : 창덕궁 [궐내각사(闕內各司)&선원전&주요 전각] 탐방코스 : [창덕궁 궐내각사(昌德宮 闕內各司) 입구~궐내각사 규장각(闕內各司 奎章閣)~궐내각사 검서청(闕內各司 檢書廳)~궐내각사 책고(闕內各司 冊庫)~궐내각사 억석루(闕內各司 憶昔樓)~궐내각사 약방(闕內各司 藥房)~창덕궁 양지당(昌德宮 養志堂)~창덕궁 선원전(昌德宮 璿源殿)~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창덕궁 선정전(昌德宮 宣政殿)~창덕궁 희정당(昌德宮 熙政堂)~창덕궁 성정각(昌德宮 誠正閣)~창덕궁 후원 입구 옆 창경궁(昌慶宮) 입구] 탐방일 : 2024년01월23일(화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와룡동 : 최저기온 영하 14도C, 최고기온 영하7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0분 소요) * 14:03~14:23 창덕궁 궐내각사(闕內各司) 입구에서 탐방출발하여 [창덕궁 궐내각사(昌德宮 闕內各司) 입구~궐내각사 규장각(闕內各司 奎章閣)~궐내각사 검서청(闕內各司 檢書廳)~궐내각사 책고(闕內各司 冊庫)~궐내각사 억석루(闕內各司 憶昔樓)~궐내각사 약방(闕內各司 藥房) ~창덕궁 양지당(昌德宮 養志堂)~창덕궁 선원전(昌德宮 璿源殿)~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창덕궁 선정전(昌德宮 宣政殿)~창덕궁 희정당(昌德宮 熙政堂)~창덕궁 성정각(昌德宮 誠正閣)~창덕궁 후원 입구 옆 창경궁(昌慶宮) 입구]의 동선으로 창덕궁 [궐내각사(闕內各司)&선원전&주요 전각] 탐방을 완료 [창덕궁 궐내각사(昌德宮 闕內各司)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闕內各司)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어 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궐내각사 규장각(闕內各司 奎章閣) :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 설치되었던 규장각을 궐내각사 지역으로 옮겨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궐내각사 검서청(闕內各司 檢書廳) 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건물이다.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대유재(大猷齋)였다. 규장각 검서관들의 사무실, 당직실이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사관을 도와 책을 교정하거나 책 원본을 똑같이 베끼는 일을 하던 관리였다.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창덕궁 후원에다 주합루를 짓고 그곳에 규장각을 두었다. 그러나 규장각의 규모가 커져서 주합루에 많은 책과 문서를 보관하기 힘들자, 1781년(정조 5년)에 옛 오위도총부 자리에 규장각 청사를 새로 지어 이전시켰다. 자연스럽게 규장각 검서관들 또한 새 규장각으로 옮겨 근무했다. 이들이 사무 보고 당직 설 곳이 필요해서 만든 게 대유재이다. 다만, 건물 자체는 정조 시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기존의 건물을 보수, 개조한 것이다. 이름은 검서관 유득공이 짓고 현판의 글씨는 정지검이 썼다. 이후 정조가 선원전과 대보단을 참배하기 전날에 여기서 묵었고, 철종 때 연경당에서 보관하던 역대 임금들이 쓴 글들을 이곳으로 옮겨오기도 했다. 순종 시기에 이름을 검서청으로 바꾸었다.] [궐내각사 책고(闕內各司 冊庫) : 책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궐내각사 억석루(闕內各司 憶昔樓) 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내의원의 부속 건물. 약을 다루던 곳이다. 그러나 위치는 내의원보다 선원전 구역에 더 가깝다. '억석(憶昔)' 뜻은 '옛날(昔)을 생각한다(億)'이다. 《한경지략》에 따르면, 영조가 내의원에다 신농(神農)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라고 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란 글자를 써서 하사했다고 한다. 신농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삼황오제 중 한 명으로, 다양한 풀들을 일일이 먹어가면서 약의 효능을 알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질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의약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즉, 신농을 생각하여 정성껏 약을 만들라는 의미이다. 언제 지었는지 모르나, 상술했듯 영조 시대에는 존재했던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 왕실 의원 기능은 순종의 침전 대조전 근처에 있는 성정각으로 옮겨갔고, 기존 억석루 건물은 헐렸다. 문화재청에서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에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궐내각사 약방(闕內各司 藥房) : 궁궐의 의료기관으로 주로 ‘내의원’으로 불렸다.] [창덕궁 양지당(昌德宮 養志堂)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 서쪽, 임금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왕실 사당인 선원전(璿源殿) 가까이에 있는 전각이다. 양지당(養志堂)은 선원전에 제사를 지내거나 참배하러 갈 때 임금이 머물렀던 어재실(御齋室)이며, 어진(御眞)이나 어서(御書)를 담은 궤를 보관하던 장소였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를 보면 선원전 동남쪽에 양지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진설청과 제관이 머무르던 재실이 선원전에 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지당 남쪽에는 만복문·영의사·억석루 등이 있다.] [창덕궁 선원전(昌德宮 璿源殿) 건립시기 : 1695년 보물 제817호. 정면 7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던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임금을 제향(祭享)하는 건물로 궁궐 밖에 종묘(宗廟)가 있고 궁안에 선원전을 지었으며, 선원전은 경복궁에도 있었고 창덕궁에도 마련되었다. 왕은 삭망(朔望)에 선원전에 나와서 친히 분향·배례를 하며 탄신일에는 차례(茶禮)를 드렸다. 선원전은 1695년(숙종 21)에 처음 마련되었는데, 본래 춘휘전(春輝殿)이라는 건물로, 도총부(都摠府)가 있던 자리에 1656년(효종 7) 경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은 것이다. 그 위치는 인정전(仁政殿)의 서쪽으로, 인정전과는 월당·부속사를 경계로 근접하여 있었다. 여기에는 뒤에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어진(御眞)이 봉안되었었다. 그러나 1921년에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이곳으로 옮긴 뒤로는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궁내에 소장된 주요 유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다. 건물은 장대석 세벌대의 높은 기단 위에 초석과 방주(方柱)를 세워 창방을 끼우고 쇠서 두 개를 결구한 2익공집이다. 전면과 측면의 어간과 협간에는 사분합 井자살문을 달고 후면에서는 어간과 좌우로 한 칸씩 건너 사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벽체로 마감하였다. 익공의 쇠서는 앙서(仰舌)로서 강직하며 안쪽에서는 초각된 보아지를 놓아 퇴보를 받치고 있다. 퇴칸 안쪽으로는 고주(高柱)를 세우고 초각된 몰익공으로 대들보를 받치며 대들보 윗몸에 붙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에는 각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용두·잡상을 두었다. 선원전은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이 가미되지 않은 건물로서, 조선시대 왕실의 제사용 건물의 유례로 중요하다. 이곳에 봉안되었다가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겨졌던 어진은 1950년 6·25전쟁 중 불타 없어졌다.] [신선원전(新璿源殿) 1921년 이왕직에서 창덕궁 후원 옛 북일영 터에 지은 12실의 선원전을 신선원전이라 한다. 1907년 순종의 향사이정에 관한 칙령 이후 창덕궁 내 선원전으로 옮겨졌던 과거 영희전, 옛 선원전, 천한전, 중화전 봉안 역대 왕들의 어진이 신선원전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신선원전에는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 등 12대의 어진이 봉안되었다. 신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영조의 초상화와 타고 남은 태조, 문조, 철종 초상화만이 전한다.] [창덕궁 안에는 두 곳의 선원전璿源殿이 있다. 하나는 인정전 서북쪽 궐내각사 구역(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번지)에 위치한 舊선원전이고 다른 하나는 후원 쪽에 자리한 신선원전이다. 두 선원전은 조선 국왕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곳으로 구선원전은 숙종 대부터 고종 대에 걸쳐 운영되며 어진이 차례로 추가될 때마다 증축되었고, 신선원전은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 세워져 덕수궁에서 옮겨 온 어진들이 봉안되었다. 구선원전 내부에는 각 임금의 어진을 위한 여러 개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비어있다. 반면 신선원전에는 12개의 감실이 설립 당시의 모습대로 남아 있다. 국왕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선원전의 어진들도 함께 옮겨 봉안되었기 때문에, 고종 대에는 창덕궁과 경복궁, 경운궁(덕수궁) 세 궁궐에 모두 선원전이 있었다. 경복궁과 경운궁 선원전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창덕궁 구선원전은 건물의 형태가 상당 부분 고종 대의 모습대로 남아 있다. 구선원전에는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추존왕 문조(익종), 헌종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 어진들은 고종 대에 경복궁 선원전으로 옮겨지고 이후 고종이 새로운 거처로 정한 경운궁 선원전으로 다시 옮겨졌으나 190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 한다.] * 14:23~14:25 창덕궁 후원 입구 옆 창경궁(昌慶宮) 입구에 있는 매표소에서 창경궁 관람권을 구입 [1천원] [창경궁은 매주 월요일 휴궁] 탐방지 : 창경궁(昌慶宮) [창경궁(昌慶宮) 요약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1963년 1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지정일 : 1963년 1월 18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지도 목차 수강궁 시기 창경궁의 창건 임진왜란 때의 소실과 중건 창경궁의 훼손과 창경원으로 격하 창경궁 복원사업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창덕궁의 동쪽에 위치한 궁궐로, 원래는 왕실의 작은 별궁이었던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던 곳이었으나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여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게 되면서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었고, 1980년대부터 창경궁 복원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의 명칭인 '창경(昌: 창성할 창, 慶: 경사 경)'은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이다. 수강궁 시기 창경궁의 자리는 원래 수강궁이라는 조선 왕실의 별궁이 있었던 자리이다. 수강궁은 1418년(세종 1)에 세워진 별궁으로,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등극하면서 머물렀던 곳이다. 태종이 사망한 이후에도 단종과 세조는 수강궁을 사용했으며, 세조는 수강궁에서 별세하였다. 또한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수강궁의 중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창경궁의 창건 1483년(성종 14) 성종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이때 지어진 전각은 명정전·문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등이며 전각의 이름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었다. 정희왕후 윤씨, 안순왕후 한씨,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지어진 궁궐이었으나, 정희왕후 윤씨는 창경궁이 완공되기 전에 사망하여 창경궁에 모시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소실과 중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창경궁, 경복궁, 창덕궁 등 한양 안에 있던 모든 궁궐과 종묘가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경궁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으나,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해 통명전·환경전·양화당 등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1633년(인조 11)에 중건되었고, 1830년(순조 30) 대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건물이 또다시 소실되어 1834년(순조 34)에 중수하였다. 창경궁의 훼손과 창경원으로 격하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었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채결된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하여 도로를 설치하였으며, 창격궁 안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창경궁 복원사업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시설로 이용되다가 1980년대에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워 1983년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해 12월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되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일부 전각을 복원하였으며, 벚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고 한국 전통의 원림(園林)을 조성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철거된 동물원과 식물원에 있었던 동식물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고, 창경궁에 있던 벚나무는 여의도 윤중로에 옮겨 심었다. 2022년에는 일제에 의해 끊겼던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이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탐방코스 : [창덕궁 후원 입구 옆 창경궁 입구~통명전(通明殿)~양화당(養和堂)~경춘전(景春殿)~환경전(歡慶殿)~함인정(涵仁亭)~명정전(明政殿)~숭문당(崇文堂)~함인정(涵仁亭)~환경전(歡慶殿)~양화당(養和堂)~영춘헌(迎春軒)~대춘당지(大春塘池)~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소춘당지(小春塘池)~창경궁 대온실(昌慶宮 大溫室)~관덕정(觀德亭)~대춘당지(大春塘池)~명정문(明政門)~창경궁 홍화문(昌慶宮 弘化門)] 탐방일 : 2024년01월23일(화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와룡동 : 최저기온 영하 14도C, 최고기온 영하7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0분 소요) * 14:25~15:15 창덕궁 후원 입구 옆 창경궁 입구에서 탐방출발하여 [창덕궁 후원 입구 옆 창경궁 입구~통명전(通明殿)~양화당(養和堂)~경춘전(景春殿)~환경전(歡慶殿)~함인정(涵仁亭)~명정전(明政殿)~숭문당(崇文堂)~함인정(涵仁亭)~환경전(歡慶殿)~양화당(養和堂)~영춘헌(迎春軒)~대춘당지(大春塘池)~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소춘당지(小春塘池)~창경궁 대온실(昌慶宮 大溫室)~관덕정(觀德亭)~대춘당지(大春塘池)~명정문(明政門)~창경궁 홍화문(昌慶宮 弘化門)]의 동선으로 창경궁을 탐방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明殿) 창경궁 통명전(昌慶宮通明殿)은 창경궁에 있는 왕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인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전 전각들 중 위상이 가장 으뜸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서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정전(通明殿卽昌慶宮內正殿)’으로 표기한 것과, 영조가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남긴 글, 그리고 《통명전 중건 상량문》에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통달(通)하여 밝다(明)’는 뜻으로, '크게 밝은(明) 전각에 앉아서 백성들의 삶을 통달(通)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 인조 대의 문신 정백창(鄭百昌, 1588 ~ 1635)은 《통명전 상량문》에서 ‘크게 밝은 집(大明宮)’으로 풀이했고 ‘옥황상제의 궁전’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숙종은 《통명전(通明殿)》 시에서 신선의 집으로 풀이했다. 현판은 건물 외부와 대청 한가운데에 2개가 걸려 있으며 모두 순조가 직접 썼다.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했다. 그러나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1633년(인조 11년)에 복구했는데 이 때 인경궁의 청와전(靑瓦殿)을 옮겨지었다. 1790년(정조 14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양화당(養和堂)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건립하였는데, 양화당도 이때 함께 지어졌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창경궁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양화당은 소실되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해 양화당·통명전·환경전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633년(인조 11)에 복구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났던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창경궁으로 환궁하여 양화당에서 거처하였다. 1830년(순조 30) 창경궁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양화당이 소실되었으나, 1833년(순조 33)에 복구되었으며, 1878년(고종 15)에는 철종의 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양화당은 이왕직박물관의 전시실로 사용되면서 건물의 내부와 외부가 일부 변형되었으나, 현재는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창경궁 경춘전(昌慶宮 景春殿)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전각으로, 왕실 가족의 침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경춘(景: 볕 경, 春:봄 춘)은 '햇볕이 따스한 봄'이라는 뜻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었으며,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썼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경춘전은 이때 함께 지어진 건물로 소혜왕후 한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춘전을 포함한 창경궁 전체가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해 통명전·환경전·양화당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경춘전은 그 피해를 면하였다. 영조 때에는 영조의 맏아들 진종(眞宗,1719~1728)과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가 경춘전에 거주했고, 이후 헌경왕후 홍씨가 이곳에서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와 정조를 낳았다. 헌경왕후 홍씨가 정조를 임신하였을 때 사도세자 꿈에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나타나 경춘전으로 들어왔고, 이에 사도세자는 하얀 비단에 용을 그려 경춘전 동쪽 벽에 걸어 두었다. 정조는 즉위 후에 어머니 헌경왕후 홍씨를 자경전으로 모셨고, 자신이 태어난 경춘전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순조가 즉위한 이후 헌경왕후 홍씨는 다시 경춘전으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순조는 경춘전의 역사와 부모에 대한 효심 등의 내용을 기록한 《경춘전기》를 편찬하였다. 이후 효명세자(훗날 문조)의 부부가 경춘전을 침소로 사용하였고, 신정왕후 조씨가 이곳에서 헌종을 낳았다. 1830년(순조 30) 대화재가 발생하여 경춘전을 비롯한 창경궁의 많은 전각이 다시 소실되었고,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창경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경춘전은 창경원의 유물전시실로 사용되었다. 이후 보수 공사를 통해 전시실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춘전의 내부와 외부를 복원하였다. 구조 및 형태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2벌대의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경춘전의 내부는 중앙에 정면 3칸 대청이 놓여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창경궁 환경전(昌慶宮 歡慶殿)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전각이다. 창건 초기에는 왕실 가족의 침전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장례 공간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환경(歡: 기쁠 환, 慶: 경사 경)은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었으며, '기쁘고 경축한다'라는 뜻이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환경전은 이때 함께 지어진 건물로, 1544년에는 제11대 임금 중종이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환경전을 포함한 창경궁 전체가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해 환경전·통명전·양화당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1633년(인조 11)에 다시 중건되었고, 1645년(인조 23)에는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가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환경전은 왕실의 장례 공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1674년(숙종 1)에는 현종의 혼전(魂殿: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 뒤 삼 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전각)이 이곳에 설치되었고, 이후 장렬왕후, 인현왕후, 정조, 정순왕후, 효의왕후, 헌종, 순원왕후, 철종, 철인왕후의 빈전(殯殿: 국상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으로 사용되었다. 1830년(순조 30) 대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을 비롯한 창경궁의 많은 전각이 다시 소실되었으나,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창경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환경전은 창경원의 유물전시실로 사용되었다. 이후 보수 공사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던 환경전의 내부가 복원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3벌대의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순조 때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에는 환경전의 추녀마루에 잡상이 설치되어 있으나, 현재는 잡상이 설치되지 않았다. 전체 7칸 중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양옆의 2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의 가장자리는 툇간으로 설계되었다.] [창경궁 함인정(昌慶宮 涵仁亭)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정자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경서를 읽거나, 국상 때에 향을 올리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함인(涵: 젖을 함, 仁: 어질 인)은 '인(仁)에 젖는다.' 라는 뜻이다. 성종 때 건립한 창경궁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정자로, 인양전은 왕실에서 잔치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되던 전각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인양전을 포함한 창경궁 전체가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양전·환경전·통명전·양화당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633년(인조 11)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인양전 터에 함인정을 새로 지었다. 1830년(순조 30) 대화재가 발생하여 함인정을 비롯한 창경궁의 많은 전각이 다시 소실되었고,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창경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강제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이루어진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함인정 주변의 행각이 모두 철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3벌대의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기와를 얹어 마감하였다. 실내의 바닥은 전부 우물마루로 깔았다. 가운데 한 칸을 크게 하고 나머지 칸들을 툇마루처럼 만들었다. 높이 또한 가운데 칸이 다른 칸보다 높다. 가운데 칸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했으나, 나머지 주변 칸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칸의 도리 사방에는 사계절을 노래하는 시, 《사시(四時)》가 현판으로 걸려있다. 각 계절이 상징하는 방위에 맞춰서 봄 시는 동쪽, 여름시는 남쪽, 가을 시는 서쪽, 겨울 시는 북쪽에 두었다. 하지만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한 〈동궐도〉를 보면,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 창호 문을 달았음을 알 수 있고, 조선시대에는 함인정 주변에 행각과 담, 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방이 뚫려있는 형태로 전하고 있다.]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창경궁의 정전(正殿)이다. 1985년 1월 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창경궁의 정전(正殿)으로,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이다. 전각의 명칭인 '명정(明政)'은 '정사를 밝히다.'라는 뜻으로.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이 지었다. 1616년(광해군 8)에 지어진 전각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며, 조선 5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유일하게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지어졌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고자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건립하였다. 명정전은 이때 함께 지어진 건물로, 제12대 임금 인종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창경궁 전체가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 창경궁이 중건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1830년(순조 30) 창경궁 대화재 등 크고 작은 사건·사고로 창경궁의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으나, 명정전은 큰 피해 없이 중건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2단의 월대와 기단을 만들었다. 월대 정면에 3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좌우측에 각각 1개의 계단을 놓았는데, 임금이 다니는 정면의 계단에는 답도(踏道)와 소맷돌을 두어 다른 계단과 차별을 두었다. 원형의 주춧돌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포식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뚫려있으며, 임금이 앉는 어좌 뒤편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병풍이 세워져 있고, 천장 가운데에는 봉황 두 마리가 걸려있다. 가치 및 의의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으며, 당시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1월 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창경궁 숭문당(昌慶宮 崇文堂)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좌측에 있는 전각이며 전각의 이름은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성종 시기 창경궁 창건 때는 없었고, 임진왜란 이후 1616년(광해군 8년)에 창경궁이 복구되면서 만들어진 전각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동쪽을 바라본다. 숭문당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영조가 직접 썼다. 순조 30년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창덕궁 희정당처럼 왕이 좀 더 편한 분위기에서 국정을 돌보고 경연을 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창경궁 자체가 공식적인 국사보다는 왕실 구성원들의 거주 및 행사에 초점을 둔 궁이라 숭문당을 자주 활용하진 않았다. 조선 후기 들어 공식 편전 문정전을 혼전으로 활용할 때, 숭문당을 곡하는 곳으로 많이 사용했다. 1830년(순조 30년) 화재로 불탄 후 1833년(순조 33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창경궁 영춘헌(昌慶宮 迎春軒)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의 창경궁에 있는 내전(內殿)과 행각(行閣)이다. 창경궁 명정전 서북쪽에 있는 전각으로, 침전 혹은 임금의 서재 등으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영춘(迎: 맞을 영, 春: 봄 춘)은 '봄을 맞이함.'이라는 뜻이고, 현판은 조선 후기의 문신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썼다. 숙종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는 영춘헌을 본인의 집무실 겸 서재로 많이 사용하였고, 1800년(정조 24)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1830년(순조 30) 영춘헌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1834년(순조 34)에 재건되었다. 재건된 이후에도 헌종, 고종 등이 이곳을 서재로 많이 이용하였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체결된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창경궁의 많은 전각이 철거되었으나, 영춘헌은 철거되지 않고 개조되어 창경원의 동물원 관리소로 이용되었다. 해방 이후 1983년 창경원을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하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창경궁의 복원 공사가 진행하였는데, 이때 영춘헌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구조 및 형태 창경궁 집복헌과 연결된 건물로,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기와를 얹어 마감하였으며, 서쪽의 방과 대청 일부를 창덕궁 집복헌과 공유하고 있다.] [창경궁 춘당지(昌慶宮 春塘池) 창경궁(昌慶宮)에 있는 연못으로, 연못의 명칭인 춘당지(春塘池)는 연못 인근에 있는 춘당대(春塘臺)에서 따온 것이다. 춘당대는 창덕궁 영화당 동쪽에 있는 넓은 마당으로, 과거시험을 보거나 기우제를 지내는 등의 용도로 사용된 장소이다. 지금의 춘당지 자리에는 본래 연못이 아닌 권농장(勸農場)이라 불리는 농지가 있었는데, 권농장은 궁궐 내의 작은 농장으로, 농본주의 국가였던 조선에서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는데, 권농지는 춘당지라는 연못으로 바뀌었고 연못의 북쪽에는 '수정(水亭)'이라는 일본식 건물이 세워졌다. 해방 이후 1965년 춘당지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었고, 1967년에는 3층 높이의 '수정궁(水亭宮)''이라는 건물이 새로 지어져 시민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1980년대에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워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창경궁의 복원 공사가 진행하였는데, 이때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수정궁이 철거되었다.] [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 시대 조선 성종 1년(1470년) 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은 서울 창경궁에 있는, 조선 시대의 팔각칠층석탑이다. 기존의 석탑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석탑으로서 지대석과 기단부가 매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일제 강점 초기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할 때 만주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창경궁 내 식물원 앞 연못(춘당지)가에 위치하고 있다. 1992년 1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119호로 지정되었다. 이 팔각칠층석탑은 불룩한 초층 탑신이나 팔각원당형의 기단부, 탑신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서 라마탑의 형태를 연상시킨다고 보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고 석재가 변질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 있는 유일한 중국 석탑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팔각원당형의 기단부를 가진 국내에서 제작되어 현존하는 탑들은 주로 고려시대 원의 영향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남양주 수종사 오층석탑처럼 고려계 다층석탑 계열과 구산선문에서 유래한 승탑들에서 많이 보이는 경향이 있다. 구조 이 석탑은 크게 지대석ㆍ기단부ㆍ탑신부ㆍ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지대석과 기단부가 탑신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며, 탑신부에서도 초층의 탑신이 둥근 복발형으로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특징이 있다.] [창경궁 대온실(昌慶宮 大溫室) 대한제국 순종 시기인 1908년(융희 2년)에 짓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909년(융희 3년) 11월 1일에 개관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실권을 일제에게 모두 빼앗긴 상태였고, 일제는 대한제국의 모든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근심이 많은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창덕궁 옆에 있는 창경궁을 유원지로 개조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었다. 그때 식물원의 대온실로 만든 것이 지금의 건물이다. 설계는 일본 신주쿠 교엔 담당자였던 일본인 원예학자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가 맡았다. 시공은 프랑스 회사에서 맡았지만 어느 회사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창경원 대온실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대온실에는 당시로서도 쉽게 보기 힘든 열대 식물을 비롯한 다양한 화초들을 전시해 두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왕직식물원(李王職植物園)'으로 불렸다. 8.15 광복 이후에도 창경원은 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계속 유원지로 남았고 식물원도 예전과 같이 기능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창경원은 폐원했고, 대온실은 폭격으로 인해 일부 훼손되었다. 정부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1961년 12월, 1976년 4월에 총 3번에 걸쳐 수리했다. 1969년에는 대온실 북측에 돔 지붕을 한 현대식 온실 2동을 지었다. 1980년대에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자는 여론이 생겨났고, 이에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그래서 1983년 12월부터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시킨 후, 일본식 건물 및 놀이시설과 동물원, 식물원 시설 등을 없애고 관련 시설들을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대온실 본관만은 남겨두었다. 아마 근대 건축이라서 건축문화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에 대온실을 국가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했다. 그리고 2016년 8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보수공사를 한 후 일반에 다시 개방했다.] [관덕정(觀德亭) 창경궁의 정자이다.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다. 임금이 신하들과 주로 활 쏘는 곳으로 활용했다. 《예기》의 〈사의(射義)〉 편에 나오는 "활쏘기란 그의 높은 덕을 살펴보는 것(射者所以觀盛德也)"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지방에 있는 관아들에도 관덕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많이 설치되었다. 대표적으로 제주도의 관덕정을 들 수 있다. 현재에도 여러 활터의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궁궐지》에 의하면 '관덕정은 영화당의 동쪽 잠원봉 북쪽에 있고 남쪽에는 잠단(蠶壇)이 있는데 바로 성종 3년(1472)에 채상단(採桑壇)을 옛터에 지었다. 공혜왕후 한씨가 항상 잠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이를 보아 조선 전기에는 누에 관련 행사를 하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642년(인조 20년)에 그 자리에 관덕정을 세웠다. 처음에는 취미정(翠微亭)이라 부르다가 1664년(현종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위에 언급했듯 활쏘는 곳으로 주로 쓰였으며, 이외에도 관덕정 앞 빈터에서 군사훈련과 무과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전각들이 헐렸음에도, 관덕정은 살아남았다. 다만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이후 1980년대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昌慶宮 明政門 및 行閣)은 창경궁 외전 일곽을 형성하는 회랑과 정전인 명정전으로 출입하는 정문이다. 명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공포를 갖추었다. 이 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서 옥천교를 지나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좌우에 행각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행각은 장대석 기단 위에 조성되었으며, 행각의 기단은 명정문 기단보다 낮다. 명정문은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을 지은 1483년(성종 14년)~1484년(성종 15년)에 함께 완공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다른 창경궁의 건물들과 함께 소실된다. 이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되었다. 구조 명정문은 홍화문과 같이 동향을 하였는데, 명정전으로 이어지는 동서 중심축 선상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행각으로 둘러싸인 명정전 앞뜰은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행각은 2칸 폭의 복랑이며, 경복궁의 행랑에 비해 높이가 낮다.]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문화재 지정 국보 제226호 건립시기 1484년 성격 궁궐, 전각(殿閣) 면적 정면 5칸, 측면 3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와룡동) 창경궁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경궁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각. 개설 국보 제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 이용하였다. 조선 1484년(성종 1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합각지붕건물. 역사적 변천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세웠는데,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세웠다. 이후 인조 때와 순조 때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무사히 보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행각 등이 변형되었다. 1983∼1985년에 걸친 중창 공사 때 주변 행각(行閣)과 문정전(文政殿)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용 창경궁 명정전은 사방이 행각과 월랑(月廊: 행랑)으로 둘러 조정(朝庭)을 마련하고 마당에는 장방형으로 다듬은 판석(板石)을 깐 다음 한복판에 어도(御道)를 만들었다. 어도의 좌우에는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여 정전 외부공간에 위계적 질서를 부여하였다. 어도 끝에는 위아래 2층 월대(月臺)를 2.5m 높이로 쌓고 정면과 양 옆면에 각각 다른 모양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정면 계단의 너비는 약 5m이다. 이 월대 위 3.2m 안쪽에 나지막한 기단 1단을 쌓고 윗면만을 고르게 다듬은 다음 그 가운데에 원형 주좌(柱座)를 도드라지게 만든 주춧돌을 배열한 뒤 건물을 세웠다. 정면 5칸(18.03m), 측면 3칸(9.64m)에 뒤로 툇간(退間) 1칸을 내달아 평면을 구성하였는데, 바깥두리기둥은 높이 14척(尺)인 평주(平柱)로 하고 내부에는 앞에서 두 번째 줄에만 고주(高柱)를 세워 대들보를 받게 하였다. 세 번째 기둥을 모두 생략하여 보좌(寶座) 주위를 넓게 마련한 점과 건물 외부 뒤쪽에 퇴를 내달아 복도(複道)를 만든 점이 공간구성이라는 면에서 주목하여야 할 특징이다. 또, 입면구성이라는 점에서는 전체적으로 단아한 맛을 느끼게 하여 주는 간결한 짜임새, 알맞게 치켜올린 추녀의 곡선미, 가지런히 배열된 공포(栱包)의 엮음새 등이 주목되고 꽃살창호의 화려함, 정면과 측면 툇간의 창호 밑에 튀어나오게 쌓은 전돌의 무게감 등이 어우러져 뛰어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구(架構)의 짜임새를 보면 기둥 윗몸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 등 수평 부재를 차례대로 엮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은 다음 포작수(包作數)가 안 7포(包), 밖 5포인 다포집을 짜올려 지붕을 받치고 있다. 지붕 위에는 마루를 높게 양성하고 용마루에는 취두(鷲頭), 합각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선인을 각각 배열하여 건물에 위엄을 더하는 한편 형태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내부의 보좌는 3면에 4단의 나무계단을 설치하고 둘레에 연꽃모양의 기둥을 장식한 난간을 둘러 세운 다음 가운데 뒤쪽에 어탑(御榻: 임금이 앉는 상탑)을 놓고 그 뒤를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장식하였다. 보좌 위에는 화려한 짜임새의 포를 짜올려 만든 보개(寶蓋)를 얹고 보개 한복판에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나무조각을 붙여 왕의 자리임을 상징하게 하였다. 또, 천장의 짜임새를 보면 한복판에 감입천장(嵌入天障)을 마련하여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조각을 매달아 놓았고, 이 둘레에 꽃무늬를 그린 정방형의 소란반자를 둘렀다. 바깥쪽으로는 한 단 낮게 소란반자를 두른 층단천장(層段天障)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견실하게 짠 공포를 장식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내어 천장의 일부를 구성하게 하였다. 특징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등 궁궐의 정전이 거대한 규모의 중층건물인 데 비하여 창경궁명정전은 소규모의 단층건물이라는 점이 특징적 이다. 창경궁이 왕이 정치를 행하는 곳으로가 아니라 왕대비(王大妃)가 거주할 이궁(離宮)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의 좌향(坐向)이 동쪽인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 안팎에 칠한 단청의 색채는 많이 퇴락하였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의의와 평가 창경궁 명정전은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포의 짜임새가 견실하고 쇠서의 곡선이 힘차고 예리한 점, 첨차(檐遮)에 풀무늬를 새긴 수법이 세련된 점, 주춧돌에서 공포까지의 지지체(支持體)와 그 위에 얹은 지붕의 균형이 잘 조화된 점 등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으로 인해 초창(初創) 당시인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 적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1963년 합각머리 안쪽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의 내용이 일치하여, 광해군 때 재건된 것임이 분명하여졌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정전(正殿) 중 가장 오래되고,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과 함께 단층으로 건축된 정전이며, 명정문과 그 좌우 행각·홍화문·창덕궁 돈화문 등과 더불어 17세기 전기의 목조 건축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창경궁 홍화문(昌慶宮 弘化門) 문화재 지정 보물 제384호 건립시기 1484년(창건), 1616년(재건) 성격 궁궐문, 궁문 면적 정면 3칸, 측면 2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와룡동) 창경궁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에 있는 조선전기 에 건립된 궁궐문. 궁문. 보물. 개설 보물 제384호. 홍화문은 1484년(성종 15)에 건립된 창경궁의 정문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타서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내용 창경궁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지어졌고,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그 뒤 1834년의 보수 등 여러 차례의 수리를 겪었으며 1961년 이후의 거듭된 단청공사로 옛 아름다움을 잃었다. 이 문은 정면 3칸(13.35m), 측면 2칸(6.48m)의 2층 우진각지붕건물로, 창경궁(昌慶宮)의 정문(正門)이다. 문 양옆으로 궁장(宮墻: 궁궐을 싸고 있는 돌담)이 이어져 있고, 그 끝에 십자각(十字閣)을 두어 행각(行閣)과 연결하였으며 행각 가운데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수각(水閣)을 마련하였다. 물길 한복판에는 옥천교(玉川橋)를 걸쳐놓아 명정문(明政門) 쪽으로 가는 통로로 삼았다. 위층 기둥의 길이는 8척(尺), 아래층 기둥은 14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포는 다포계로 포작수가 내7포·외5포이며, 따라서 출목(出目) 수는 내3출목·외2출목이다. 쇠서[牛舌]의 조각 형태가 꼿꼿하고 날카로워 조선 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1층은 가운데 기둥 사이에 2짝문을 3곳에 달았고 문짝 위에 홍살[紅箭]을 베풀었으며, 그 위쪽 천장의 가운데 칸은 서까래를 노출시키고 양 옆칸은 반은 반자로 막고 반은 노출시켰다. 문 왼쪽(북쪽)에 2층으로 연결되는 꺾은 계단을 가설하였는데 2층은 4면 모두 판장문을 달아 열고 닫을 수 있게 하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서까래를 노출시켰다. 공포는 1층의 공포와 동일한 특징을 띠고 있으며, 다만 기둥 사이가 좁아져서 공포의 수가 줄어들었다. 공포 위에는 도리를 얹고 다시 부연(副椽: 서까래)을 내단 겹처마를 받쳤는데 추녀의 사래 끝에 토수(吐首: 龍頭나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지붕 위에는 회반죽을 바른 높은 마루를 만들고 용마루에는 용을 돋을새김한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배열하여 건물의 위엄을 나타냈다. 의의와 평가 광해군 때 재건된 창경궁 및 창덕궁의 여러 건물들과 함께 17세기 전반기에 속하는 목조 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창경궁 안내도 * 15:15~15:17 걸어서 창경궁 돈화문에서 서울대학교병원 암병원으로 이동 * 15:17~15:40 서울대학교병원 암병원에 있는 아로마띠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 * 15:40~15:46 창경궁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안국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162번 버스 승차 대기 * 15:46~15:50 162번 버스를 타고 창경궁 버스 정류장에서 안국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4분 소요] * 15:50~15:57 안국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는 3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 15:57~16:27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30분 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