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삼익(三益)이고, 자는 여우(汝友)이다. 그 선대는 경주(慶州)의 흥해(興海)가 본관이다. 고려 때 휘 경분(景分)이 곧 공의 비조(鼻祖)이니, 관직이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이르렀다. 4세 휘 영지(榮至)는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 상호군 평양 윤(典理判書上護軍平壤尹)이다. 그 아들 휘 전(詮)은 충렬(忠烈)ㆍ충선(忠宣) 두 왕을 차례로 섬기면서 벼슬이 성근 선력 익대 좌명 공신(誠勤宣力翊戴佐命功臣) 삼중대광 첨의평리(三重大匡僉議評理)에 이르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그 아들 휘 상지(尙志)는 통훈대부 판사복시사(通訓大夫判司僕寺事)이다. 고려 말에 중서랑(中書郞)이 고사(故事)를 들어 조정에서 공을 변절시키려 하자 공은 곧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떠나니, 친구가 만류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드디어 안동부 서쪽 금계촌(金溪村)에서 숨어 살면서 측백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그 가운데 집을 짓고는 이에 몸소 이름을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서도 변절하지 않고 생을 마쳤다. 《백죽당집(柏竹堂集)》을 남겼으나 잃어 버려서 전하지 않는다. 뒷날 아들 환(桓)이 귀하게 되어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현달하였다. 장남은 권(權)인데 사헌부 지평이다. 그 아들은 휘 효장(孝長)인데 녹사(錄事)이다. 그 아들은 휘 임(袵)인데 소위장군(昭威將軍)이니,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이순(以純)인데 성균 진사이고,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妣〕는 김씨(金氏)인데, 숙인(淑人)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헌(巚)은 성균 생원이고,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박씨(朴氏)인데 숙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휘가 천석(天錫)인데 병절교위(秉節校尉)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이고,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처사 세호(世豪)의 따님으로 가선대부 검교 한성 윤(尹)인 휘 원후(元厚)의 5세손이다.
공은 가정 12년(1534, 중종29) 갑오 8월 3일 정유에, 부(府)의 서쪽에 있는 단지촌(丹地村)의 외왕부(外王父) 집에서 태어났다. 무오년(155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갑자년(1564)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을축년(1565)에 밀양부 교수에 제수되었으며, 무진년(1568)에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학유(學諭)가 되었다가, 겨울에 봉상시 부봉사에 임명되었다. 기사년(1569), 학록(學錄)으로 승진했고, 경오년(1570)에는 학정(學正)으로 승진하였다. 신미년(1571)에는 박사로 승진하고, 겨울에 호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임신년(1572)에 그만두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계유년(1573, 선조6)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해년(1575)에 복(服)을 마치고, 형조 좌랑ㆍ성균관 전적ㆍ예조 좌랑ㆍ형조 정랑에 잇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여름에 사간원 정언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다가 드디어 풍기 군수로 임명되었다. 병자년(1576)에는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경진년(1580)에 임기를 마치고, 승문원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신사년(1581)에 안동 현감(安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본관(本官)이라는 이유로 사양하니, 드디어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임명했다. 계미년(1583) 겨울에는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고, 이어 사헌부 장령으로 부름을 받고 부임하였다. 성균관 사예로 체직되었다. 갑신년(1584)에는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사간원 정언, 성균관 사예, 사헌부 장령, 성균관 사성, 사간원헌납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여름에 성균관 전적으로 체직되었다. 가을에 다시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사간원 사간으로 전직되었다. 을유년(1585)에는 성균관 사성으로 체직되었고 종부시 정,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역임하였다. 가을에 교리,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으로 전직되었다. 겨울인 12월에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올랐다. 병술년(1586) 봄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가을에 좌부승지에서 의흥위 상호군(義興衞上護軍)으로 체직되었다. 오래지 않아 장례원 판결사로 임명되었다가 용양위 대호군(龍驤衛大護軍)으로 체직되었다. 겨울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때 명나라에 빙문(聘問)하러간 사람 중에서 어떤 이는 방물(方物)을 잃어버리고, 어떤 이는 옥하관(玉河館)에 불을 내기도 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20) 봄에 공은 진사(陳謝)의 명을 받았다. 성균관은 많은 선비가 경유하는 곳이어서 책임이 중대하므로 하루라도 장관직을 비워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상소하여 사직하니, 드디어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받고 사행(使行)을 떠났다. 돌아와서 우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여, 첨지로 체직되었다.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5월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여 결국 병을 무릅쓰고 바닷가에 있는 여러 고을의 통치 실적을 조사하고 감영으로 돌아온 뒤에 병이 위독해졌다. 윤6월에 다시 사직하니 비로소 윤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해주(海州)의 청단역(靑丹驛)에서 별세하니, 때는 만력 16년 무자년(1588) 7월 1일 임자(壬子)이며, 향년은 55세였다.
공은 나면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구두(句讀)를 익히자마자 글의 뜻을 파고들어 물으니, 가르치는 사람이 대답하지 못했다. 뒷날 공이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기를 “아무개가 다시 왔네. 내가 어떻게 대답한다지?”라고 하였다. 11세 때 참판공을 따라 서울에 유학하였는데, 말을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좀 성장하여서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경신년(1560, 명종15)에 퇴계(退溪)에서 이 선생(李先生)을 찾아뵙고, 《심경(心經)》과 《시전(詩傳)》을 배우고, 학문하는 중요한 방법을 들을 수 있었다.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31세였다. 권지(權知)로부터 낭관(郞官)이 될 때까지 직무에 부지런하였고, 풍기 군수로 있을 때에는 몸가짐을 청렴하게 하고 삼갔으며, 정무의 처리를 곧고 바르며 민첩하게 하였다. 특히 교화를 두터이 하고 풍속을 가다듬는 것을 먼저 할 일로 삼아 선한 일을 하는 자는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일을 하는 자는 미워하였다. 또 그 고을은 풍속이 억세고 사나워서 예로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졌는데, 교활한 관리들이 법문(法文)을 농락하던 일을 하는 자를 반드시 법으로 바로잡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니, 관리들이 비로소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군수로 있는 6년 동안 절약하여 재정이 풍족하게 되어 곳간에는 남은 곡식이 있었다. 드디어 여러 해 동안 미납 세금이 기록된 장부들을 가져다가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백성을 모아놓고 불사를 것이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또 어찌 쓸모 있는 것을 쓸모없이 버리겠는가.’라고 생각하고, 모두 벽을 도배하는 용도로 주었다. 떠난 뒤에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비록 공에게 망신을 당한 사람이라 해도 돌이켜 그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양양 부사로 나갔을 때 지방의 풍속을 살피고 전임자의 정사를 변화시켜 모든 일을 관대하고 간략하게 다스렸다. 베풀고 시행하는 조치가 이전에 비하여 더욱 주도면밀하고 상세하였으며, 선비들에게 과업을 권장하여 더욱 힘쓰게 하였다. 관가의 부속 건물이 무너진 것을 수리하는 일에 요령이 있어서 한 사람도 징발하지 않고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매년 여름이나 가을에 지역 산물로 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다달이 공물로 바쳤는데, 연어와 송어, 은어 등이었다. 관례대로 일경(一境) 안의 가구에 전부 구실을 매겨 산초 뿌리의 독을 채집하여 물고기를 잡으니, 백성들이 생업에 힘을 다할 수가 없었다. 공이 그들을 위하여 차례로 쉬게 하고 돌아가면서 채집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공은 제사에 관한 일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공사(公私) 간에 차이가 없었다. 석채(釋菜)와 같은 것 외에 사직(社稷)ㆍ성황(城隍)ㆍ여제(厲祭) 등의 제사에도 공은 모두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내며 몸소 일하였다. 아전 중에 제사를 담당한 사람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거동과 펴고 굽혀 절하는 동작이 예법에 맞지 않으면 공이 몸소 지도하여 가르쳤고, 두 차례 지방관으로 나가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양양에서는 동해신(東海神)을 제사 지내는데, 매년 봄에 축책(祝冊)이 서울에서 왔다. 공은 제사를 받들기를 더욱 조심스럽고 엄숙하게 하였다. 날이 개기를 빌거나 비가 오기를 비는 제사에 이르러서는 또한 남에게 맡긴 적이 없었고, 희생과 폐백을 갖추어 명산대천에 몸소 고하여 구석지고 험한 곳을 피하지 않았는데, 모두 응답을 받았다. 또 이곳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성황사(城隍祠)의 지전(紙錢)이 언덕이나 숲처럼 쌓여 있었다. 공이 걸어 다니다 불태우게 하고, 깨끗이 한 뒤에 제사하였다. 처음에 관리들이 부하를 데리고, 매년 5월 5일 사당에서 귀신을 맞이하면서 무사(巫史)를 불러 요망한 행위를 하였다. 아마 이는 예맥(濊貊)에서 온 풍습인 듯한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근절되었다.
공이 장령으로 부름을 받았을 적에 이쪽과 저쪽이 격하게 비방하여 형세가 매우 의심스럽고 불안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관직에 있어서 사퇴할 수 없지만 또한 조정에 오래 머물 수도 없으리라.”라고 하고는 드디어 가솔(家率)을 고향으로 떠나보냈다. 조정에서는 삼척 첨사(三陟僉使)인 노(魯)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에 따라 동해에서 큰 배를 건조하여 남쪽 지방의 쌀을 운반하고자 하였다. 공이 경연(經筵)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양양 부사로 있을 때에 삼가 살펴보건대 동해라는 바다는 구름과 파도가 하늘에 닿고 아득하고 넓어서 끝이 없으며, 바람을 피할 만한 크고 작은 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을 만나서 가라앉는 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작은 배라면 민첩하여 부리기 쉬우므로 침몰하는 일이 드뭅니다. 비록 불행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잃는 것이 또한 적을 것입니다. 만일 큰 배라면 실린 물건도 무겁고 배의 군사도 많을 것이므로 조금이라도 풍파가 일면 부서지기 쉽고 잃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건조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아뢰기를 “근래에는 동성(同姓) 집안끼리 혼인하는 것을 두 집안이 대수롭지 않게 보아 수치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엄히 금하는 법령을 천명하소서.”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주현(州縣)에서는 사전(祀典)이 심하게 무너져서 수령이 하급 관리에게 전적으로 떠맡기는 데에 이르렀고, 태만하여 몸소 행하지 않으니, 신령이 돌아보고 흠향하지 않습니다. 홍수와 가뭄, 재해와 역병이 일어나는 일이 꼭 이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주상이 정신(廷臣) 아무개를 물리치라고 반복하여 말씀했는데, 안색이 매우 엄정하였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사람을 알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니, 가려서 사귀는 것을 잘못하여 친밀하게 지낸 사람을 한순간에 잃기도 합니다. 만약 국가에 해악이 될 것을 이미 알았는데도 두루 편당을 지어서 말하지 않았다면, 벗에게 신용을 지켰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나라를 저버림에야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다시 장령이 되었을 적에 아무개가 대사헌이 되었다. 그가 경연에서 전조(銓曹)를 논박하여 말하기를 “요사이 주의(注擬)는 단지 수령만을 택하고 간관(諫官)은 택하지 않으니, 완급(緩急)과 경중(輕重)의 마땅함을 심하게 잃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인혐(引嫌)하여 물러나니, 그는 성을 내며 안색을 바꾸고 언성을 높여 만류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무개가 발탁되어 대사헌으로 승진되었을 때는 상(上)이 바야흐로 신료들이 서로 비방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간원(諫院)이 논박하고자 하였으나 어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화복(禍福)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마땅히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다해야 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논의가 결정되었다.
안당(安塘)은 중종(中宗)조의 어진 재상이었다. 노비였던 송사련(宋祀連)이 거짓으로 고변하니, 안(安)씨를 무고하여 거의 죽이고, 또 자신은 거짓으로 속죄하고 작위를 얻은 뒤에 죽었다. 그 아들인 한필(翰弼)과 익필(翼弼)은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과 친교를 맺어 방자하고 멋대로 함이 유별나게 심하였다. 사람과 귀신이 원통함을 쌓아온 지가 50여 년인데, 안(安)씨의 자손이 비로소 장례원(掌隷院)에 송사하게 되어, 사건이 장차 결판나려 하자 사람들은 모두 화를 피할 방법을 꾀하였다. 공이 곧 거짓된 훈작을 삭탈할 것을 아뢰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통쾌해 하였다.
공이 연경에 조회 갔을 적에 황제(皇帝)가 주상의 정성스럽고 부지런함을 가상히 여겨 망의(蟒衣) 한 벌을 특별히 하사하고, 또 칙서를 하사하여 칭찬하였다. 공이 돌아오다가 평산(平山)에 이르렀을 때 설사병을 앓았는데, 상이 몸소 마중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예법에 잘못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서는 음식을 먹지 않고 복명(復命)하였다. 또한 《대명회전(大明會典)》과 본조(本朝)의 종계(宗系)를 기록한 초본(草本)을 구해서 올리니, 상이 글을 내려 장려하기를 “만일 사신(使臣)의 충성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것을 얻었겠는가. 게다가 나로 하여금 이미 선왕(先王)의 잘못이 없어졌음을 알게 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라고 하고는 이어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오래지 않아 우승지로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받들지 못했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자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이때는 해서(海西)에 8, 9년 동안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죽음이 지난해에는 더욱 심해졌다. 구황(救荒)을 위해 재촉하여 길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병으로 사직하고 쉬기를 권하였다. 공은 개연(槪然)히 길에 오르며 말하기를 “나는 시골 출신인데 발탁하여 이런 지위에 이르게 하시니, 영예가 저승에 계신 조상에게까지 미쳤다. 그런데 주상께서 이제 백성의 굶주림을 중요하게 여기시니, 이는 신하가 지쳐 쓰러져도 힘을 다해야 할 때이다. 일이 이보다 어려운 것이라도 사양할 수 없는데, 하물며 병이 덜해짐에랴.”라고 하였다.
이전에 서장관(書狀官) 원사안(元士安)이 조정에 있는 친구에게 사실이 아닌 말을 퍼트려 이 말이 주상에게 아뢰어졌다. 상이 크게 노하여, 일행과 역관(譯官)을 잡아다 신문하고, 아울러 원사안을 하옥시켰다. 바야흐로 전번 사행(使行)에서 방물을 잃어버린 일을 무겁게 죄주려 하니, 사태가 예측할 수 없었다. 말하는 자가 공을 아울러 논죄(論罪)하여 잡아서 신문하고자 하였는데, 주상은 구황 때문에 들어주지 않으면서 하교(下敎)하여 말하기를 “배삼익은 사람됨이 충직하다. 알지 못하는 것을 거짓으로 꾸미지 않았을 것이니 신문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공은 황정(荒政)에 있어서 요령있게 처리하고 자세히 살펴 조치하니, 백성이 비로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있었고, 주상이 따로 홍세영(洪世英)을 보내어 마을에 드나들며 구황(救荒)하게 하였다. 홍세영은 공이 조치한 것을 보고서 공에게 말하기를 “황정을 공이 이미 완수하였으니, 나는 단지 돌아볼 뿐이다.”라고 하였다. 연안(延安) 관아의 곡식이 넉넉하지 못하여 백성이 굶주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공이 금곡창(金谷倉)을 열어 쌓아둔 곡식으로 구휼하니, 백성들이 힘입어 소생하여서는 집에 목패(木牌)를 만들어 두고 절하였다. 해주 목사(海州牧使) 이응기(李應麒)가 그 지역을 지나다가 그것을 보고서 묻기를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라고 하니, 백성들이 답하기를 “관찰사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패입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 때에 만일 곳간을 열지 않았더라면 지금 저희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재령(載寧)ㆍ봉산(鳳山) 바닷가의 소금밭을 나라에서는 방죽을 쌓아 수전(水田)을 만들고, 백성들이 경작ㆍ수확하여 나라의 쓰임을 돕게 하였는데, 이를 둔전(屯田)이라 하였으니, 곧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이 시작한 것이다. 골을 이루며 흐르는 바닷물이 부딪치는 곳에 밭이 있어서 방죽은 쌓는 대로 곧 무너져 버렸다. 근방의 백성들이 봄에 쌓고 가을까지 운용하였는데, 매년 변함없이 시행하였기에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간 사람이 열에 아홉이었다. 그러나 박충간은 바야흐로 공로를 쌓아 자랑하려고, 메벼〔秔稻〕가 무성하게 자란 곳을 골라서 기준으로 삼고, 나머지 부실한 밭에서도 반드시 세를 받아 채우려고 하였다. 독촉이 매우 심하여 백성은 모두 빚을 내서 채워 넣었다. 공이 이곳에 이르자 온 지역의 백성이 등에 짐을 지고 서서 길가에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공이 주청(奏請)하기를 “가을에 추수할 때 찰방이나 훈도 같은 한가한 관원을 보내주시면 감독하여서 고르게 거두어서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제거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호조에서는 어렵다고 하였다. 공이 앞서의 의논을 더욱 견지(堅持)하자 주상이 그것을 따르니 백성은 안정되었다. 박충간은 다시 민원(民願)을 이유로 둔전에서 가까운 곳에 별도의 곳간을 세워 백성이 수납(輸納)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봉산에 공문을 보내서 백성의 사정이 불편하다는 것을 살펴 알고 주청하기를 “재령과 봉산은 그 사정이 같습니다. 수납하러 오는 길의 멀고 가까움도 대략 서로 같습니다. 봉산의 백성은 바라지 않는데, 재령의 민심이 봉산 백성과 달라서 유독 세우기를 청하겠습니까? 하물며 해마다 기근이 든 나머지 백성은 오로지 죽음을 벗어나느라 경황이 없는데, 또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백성의 소원이 아닌 듯하니, 청컨대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소서.”라고 하였다. 호조는 이미 박충간의 말을 따르고 있었고, 공은 또 병이 위독해졌다. 탄식하여 말하기를 “둔전은 나라에 도움이 될 것을 구한 것인데, 백성에게 해를 끼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利)를 꾀하는 신하는 쓸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공이 과로하여 몸이 상한 나머지 또 이질〔血痢〕을 앓았는데 모든 약이 효과가 없었다. 간혹 사람들이 휴식하기를 권하니, 곧 답하기를 “각 고을의 관리들이 오래 지연시켜 폐단이 헤아리기 어려운데, 숨이 아직 남아있으니 어찌 그만 두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병이 더욱 심해지자, 조정의 사우(士友) 중에 공을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공에게 사직하고 돌아갈 것을 권하였고, 공도 면직(免職)을 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내가 즉시 다시 사직할 것을 권하니, 공은 불가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사람이 반드시 처자의 보살핌 속에서 죽은 뒤에야 마음이 기쁘겠는가. 내가 이미 조정에 몸을 맡겨 벼슬하고 있으니, 직무를 수행하다가 죽는다 해도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사람이 죽고 사는 데는 명(命)이 있거늘 관직을 그만두고 명에서 달아날 수 있겠는가. 주상이 이미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감히 번거롭게 하겠는가. 응당 세월을 조금 늦추어 다시 청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소고기가 원기를 보충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구해서 올렸더니 공은 물리치고 들지 않으며 말하기를 “한 지역의 법을 지키는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법을 짓밟는다면 그것은 기탄(忌憚)하는 일이 매우 없는 것이다. 네 아비를 죄에 빠뜨리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다시 병으로 사직을 아뢰니, 체차의 명령이 이르렀다. 드디어 그날 길에 올랐는데 병 때문에 길을 갈 수가 없어 중지촌(中旨村)의 가옥에서 머물렀는데, 감영에서 30리 거리였다. 이때 도사(都事) 김익현(金翼賢)ㆍ찰방(察訪) 안백지(安百之)ㆍ판관(判官) 유해(柳海)가 따라왔는데, 서로 의논하여 해주로 되돌아가서 병을 치료하자고 하였다. 내가 들어가 고하자 공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너희는 어째서 의혹하는가? 서늘할 때 일찍 길에 올라 청단역을 향해 나아가라.”라고 하고는 이어 수레를 갖추라고 명하였다. 출발할 즈음 도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이미 병들었으니, 자제들 곁을 멀리 떠나 있을 수 없다. 또한 이미 체차되었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뒤에 남아야 한다. 아마도 그대들의 되돌아가자는 계획은 이미 병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죽은 뒤의 일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리라.”라고 하니, 공의 말을 듣고는 감히 속일 수가 없었다. 마침내 청단을 향하였는데, 길 위에서 병세가 위독해져서 수레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도사와 찰방이 몸소 입관(入棺)하는 것을 보살피고, 상구(喪具)를 빈틈없이 감독하였으며, 그날로 역마를 타고 가서 주상께 아뢰었다. 주상이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리고, 예조 정랑 박경신(朴慶新)을 보내어 강나루 근처에서 제사를 지내 주었다. 또 각로(各路)에 공문을 보내 배와 수레를 대주어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항상 녹봉(祿俸)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원통해 하였으니, 그 말을 할 때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14살 때 어머니가 죽었고, 서모(庶母)는 공을 대하는 데 사랑이 적었다. 공의 친구가 참판공에게 고하자 참판공이 서모를 쫒아내려 하였다. 공이 시를 지어 참판공의 자리 구석에 두었는데, 참판공이 그것을 보고 결국 내쫒지 않았다. 참판공이 병들었을 적에는 허리띠를 풀지 않고 돌보았으며, 약을 올릴 때는 반드시 먼저 맛보았다. 참판공이 죽자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통곡하였으며, 거적자리에 앉고 흙 베개를 베고 누워서 중습(中濕)에 걸렸다. 장례를 겨우 치르고는 하반신이 저리고 약해져서 기거(起居)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했는데, 초수(椒水)에 목욕하고는 조금 나았다. 염습(殮襲)을 하고 장례 도구를 갖추는 비용은 모두 공이 냈고, 동생이나 누이에게 괴로움이 되지 않게 하였으며,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삼 년 동안 집에 내려오지 않았다. 여러 아우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뒤 공에게 분배된 밭에서 서모가 경작하여 살게 하였다.
이전에 참판공이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첩 하나를 두었다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었다. 공은 명절과 기일(忌日)마다 제사를 지내 주었다. 아우와 누이를 사랑하여 입은 옷을 벗어 주었으며, 만년에는 옷상자 속에 오래 입은 옷이 없었다. 친가나 외가 중에 가난하여 시집을 못 보내는 집에는 반드시 비용을 대어 시집보내 주었다. 공시(功緦)를 입는 친척은 반드시 소복(素服)으로 달수를 마쳤다. 동료나 벗의 부고가 있으면 또한 연회를 그만두었고, 여러 날 동안 채식하였다. 제사는 일체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여 반드시 고조까지 지냈고, 기제(忌祭)는 일위(一位)에 그쳤다. 정지삭망(正至朔望) 같은 때에는 새벽에 배알하였고, 외출할 때 고하고 돌아와서 참배하는 예를, 살아 계신 분을 뵈는 듯이 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속절(俗節)에는 묘소에 올라가 보았는데, 또한 함부로 풍속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풍속은 매우 거칠다. 집안에서 제사를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도 이미 예가 아니거늘 하물며 신주 앞에서 지내지도 않고 각자 집이나 절간에서 지내니, 정성스럽지 않고 공경하지 않음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종법(宗法)은 무너진 지 오래고 옛날과 지금의 형편은 다르니, 문중의 여러 어른들이 즐겨하지 않는 것을 내가 시킬 수는 없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내 마음을 다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낡은 풍습을 고쳐서 모든 제사를 가묘(家廟)에서 지내고, 또 자세히 헤아리고 계획하여 장자(長子)가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집안의 법으로 삼았다.
7대조인 참판공의 묘소가 가수촌(嘉水村)에 있었는데, 거의 황폐하였다. 공이 재우(齋宇)를 세우고, 후손들을 모아 1년에 한 번씩 제사 지냈다. 6대조인 지평공(持平公)과 5대조인 녹사공(錄事公)의 묘소가 모두 부치의 서쪽에 있었는데, 동족인 배영언(裴永言)과 함께 곡식을 내어 제수(祭需)를 장만하였다. 공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고조의 묘소가 부의 남쪽 미가암리(米家巖里)에 있었는데 절기마다 보살피고, 또 서(序)와 명(銘)을 비석에 새겨 묘도(墓道)를 표시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예에 따라서 반혼(返魂)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조금이라도 조심하지 않는다면 그 죄가 클 것이다. 또 중재(中材) 이하는 악(惡)으로 흐르기 쉽고 간혹 빈부가 고르지 않아서 먹고 자고 기거하는 것이다. 몸가짐이 예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시묘(侍墓)하는 게 차라리 낫다.”라고 하였다.
자제를 대함에는 엄격하고 예법을 두었다. 말과 얼굴빛을 경솔하거나 거짓되게 한 적이 없었다. 우리들에게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안색이 하루 종일 편하지 않았다. 저보(邸報)를 보고자 할 때면 경계하여 말하기를 “네가 힘써야 할 것은 책을 읽어 옛 성현의 언행을 살피고 몸으로 체득하는 데에 있지, 저보를 보는 일은 너에게 급한 일이 아니다. 또 지금처럼 어린 나이에 조보(朝報)를 구해 보는 것을 일로 삼아서 조정(朝政)의 득실에 대해 시비하기를 좋아한다면 벼슬하지 않는 무리도 또한 각기 붕당을 나누게 될 것이니, 너희는 삼가 그러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호사스런 옷과 좋은 음식을 깊이 경계하였기에 감히 명주 비단으로 만든 옷소매를 보이지 못하였다. 사람과 사귐에 정성을 다하여 진심을 보이고, 경계를 설정하지 않으며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으니, 화기애애하게 기뻐하여 종일토록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술을 마셔도 적게 취하였고, 간혹 읊조리거나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맑고 높았다. 남의 좋은 점을 들으면 자기가 지닌 것처럼 여겼을 뿐만이 아니었고, 남의 나쁜 점을 보면 끓는 물에 손을 넣는 것보다도 싫어하였다. 이는 평생토록 타고난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운수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직 서화(書畫)를 보는 것을 즐겼다. 산업(産業)을 경영한 적이 없었기에 관리로서 입신(立身)한 뒤에도 대대로 이어온 가업 외에는 조금도 증가한 것이 없었다. 관직에 있을 적에는 청탁에는 응하지 않았으니, 비록 배경을 지니고 오는 사람이 있어도 또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국고(國庫)를 개인 재산보다 더 아꼈고, 공사(公事) 처리를 집안일보다도 급하게 하였다. 일찍이 자기를 뽐내서 이름을 얻는 일과 구차한 이익이나 빠른 효과를 구하는 일은 매우 수치스러워 하였기에 혁혁(赫赫)한 사업을 일으키지 않았고, 급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나랏일을 논할 때에는 정밀하고 정중하게 행동하려 힘썼고, 요행으로 남의 뜻을 엿보려는 꾀를 내지 않았다. 마음속에 정해짐이 있었기 때문에 사물의 이익이나 손해로써 움직이지 않았다. 양양 부사로 있을 적에 한 재상의 위세가 매우 높았는데, 어떤 사람이 교류하기를 권하면서 “전복 먹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아래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을 군자는 수치로 여기나니, 나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장수(將帥)를 감당할 재능이라고 공을 천거하자, 상이 손자와 오자의 병서를 하사하였다. 공이 읽고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용병에는 방법이 있으니,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우는 일에 관한 것은 꼭 옛사람이 남긴 재강〔糟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항상 피차간에 편안치 못한 것을 근심하여,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가 편안해질 날을 알지 못하겠구나.”라고 하였다. 특히 신진(新進)으로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반기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끝내 일을 그르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에 걸려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집안일을 언급한 적이 없었고, 중지촌(中旨村)에 있을 때도 저보가 이르자, 내게 읽게 하여 들었다. 북쪽에서 도깨비불이 괴이하게 나타나자, 공은 오히려 손으로 취하여 살펴보았으니, 바로 죽기 하루 전 밤이었다. 보첩(譜牒)이 성취되지 않은 것을 참판공이 근심하다가, 임종에 이르러 공에게 완성을 당부하였는데, 공이 죽기 수일 전에 엮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두 권을 필사하라 명하여 하나는 안악(安岳)의 동족에게 부치고 하나는 집에 보관하였다. 또 손자들의 이름을 지어 보첩에 기록하였다. 참판공이 만년에 부의 동쪽에 있는 임하현(臨河縣) 도목리(桃木里)의 낙동강 북쪽 언덕에 터를 정하였는데, 공은 그곳의 맑고 수려한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동쪽 기슭에 정자를 짓고 산수정(山水亭)이라고 편액하였다. 또 그 집을 임연재(臨淵齋)라고 이름 하였으니, 늙어 은퇴한 뒤 한가롭게 쉬려던 계획이었다. 공이 집안에서 시행한 일이 이미 이와 같았기에 행사(行事)에 나타나는 것이 또한 저와 같았다. 이는 곧 마음속에 온축된 아름다운 재능이 발현된 나머지, 사업이 만년에 이르러 더욱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주상이 그것을 매우 깊이 알아주었고, 사람들의 기대도 또한 장원(長遠)하고도 컸던 것이다. 이로 인해 공의 부고가 알려지자 모두 탄식하며 조문하고, 조정에서는 자신을 잊고 나라에 헌신하는 한 신하를 잃은 일을 한탄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당시의 사람들에게 추앙받았다. 시문을 지으면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단정하고 격식이 있었다. 성실하지 못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비록 흥에 겨워 짓는 일이 있어도 번번이 바로 없애 버렸다. 시문(詩文)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필법은 힘차고 굳세며 더욱 본질에 핍진(逼眞)하였다.
공이 장가든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공의 작위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는데, 처사 신신(藎臣)의 따님이며, 통정대부 공조 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추증된 민생(敏生)의 6대손이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용길(龍吉)ㆍ용필(龍弼)이다. 용길은 을유년(1585, 선조1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용필은 일찍 죽었다. 맏딸은 사인(士人) 이유성(李惟聖)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충의위(忠義衛) 이형(李迥)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은 상길(常吉)이다. 손자는 숙전(淑全)이니, 바로 임종 때 지은 이름이다. 딸은 셋인데 모두 어리다. 유성은 아들이 하나인데 수풍(壽豐)이고, 딸은 어리다.
그해 10월 기사에 부치 북쪽에 있는 내성현(奈城縣) 호애산(虎崖山)의 참판공의 묘소 뒤쪽 진좌태향(震坐兌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공이 평소에 말씀한 것을 따랐다. 공이 하세(下世)한 지 이미 10여 년이 지났는데, 난리 중에 일이 많아 묘도에 비문을 새기는 일을 오히려 제때에 하지 못하고 세월을 오래 끌었다. 공의 덕을 끝없는 후세에 아름답게 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서 감히 그 대강을 서술하여 이 시대의 입언군자(立言君子)에게 채택되기를 청한다.
못난 자식 용길이 피눈물을 흘리며 쓰다.
첫댓글 이원장님이 계속 선조 관련 글을 올려주시네요. 제가 볼때 임연선조는 살아 계실때는 붕당에는 관계하지 않았으나, 돌아가신 뒤에 붕당으로 피해를 보신 분입니다. 이덕일 선생은 사계 김장생의 실질적 스승이 송익필이라 말합니다. 겉으로는 율곡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송익필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한 송익필을 장례원 판결사로 계실 때 노비로 환천시킨 분이 임연재 선조입니다. 서인들은 이것을 잊지 않았지요. 종계변무 관련 공신을 책봉할 때 임연재 선조와 같이 갔던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임연재 선조는 제외되었습니다. 그 전개 과정은 조금 복잡합니다.
아랫대인 금역당께서는 북인 정권의 지도자였던 내암 정인홍을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분이지요. 내암이 그 스승의 문집인 남명집 발문을 썼는데, 강하게 비판한 글이 금역당집에 있습니다. 남인과 북인의 관계가 첨예하던 시절이지요. 임연선조에 대한 평가는 집권 세력인 북인과 서인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