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긴이(잉걸)의 말 :
이 글의 이름을 보고 독자(이 카페의 회원들과 이 카페에 들르는 한국 누리꾼들)가 선입견을 품을까봐 자판을 두드린다. 이 글을 직접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병한 선생은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해 무슬림이 되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며, 이슬람 세계를 무작정 감싸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와 그곳의 무슬림들이 고대 지중해 세계의 문화와 문명을 이어받았다는 사실, (동로마 신민을 뺀) 중세 유럽 사람들이 헬라스와 로마의 문명을 잃어버리고 수준 낮은 삶을 살 때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 유럽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중세시대에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세계였다는 사실, (오늘날의 한국인이 ‘모범’으로 삼는) 근세와 근대의 서양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아시아 역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제는 우리의 ‘이웃’이 되어가고 있는 무슬림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그리고 그들의 삶과 역사와 문화와 종교를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상대방을 제대로 아는 것은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의 첫걸음이다. 굳이 감쌀 필요가 없고, 아름답게 꾸밀 필요가 없고, 도와줄 필요가 없는 ‘남’, 그러니까 상대방을 평가하는 잣대를 제대로 고른다면, 그 잣대로 ‘나’를 잴 때 나한테 “너, 지금 자신을 제대로 재고 있어?”하고 따져 물을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그 때문에라도 ‘상대방’이자 ‘남’인 무슬림과 그들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을 때는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선입견은 버리고, 오늘날의 상황을 옛날에 들이대는 대신 ‘세상은 바뀔 수 있다. 좋았던 것이 나빠질 수도 있고 나빴던 것이 좋아질 수도 있다. 오늘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비참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고, 오늘날 잘 사는 사람들이 옛날부터 잘 살았던 것은 아니다.’하고 생각하며 역사를 배우기 바란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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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시작)
1. 알렉산드리아
문명은 오리엔트(서西아시아 - 옮긴이)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문자가 등장한 것이 기원전 3200년,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대(흔히 ‘수메르’라고 불린 ‘키엔기르’ - 옮긴이)이다. 비슷한 시기, 이집트(옛 이름 ‘케메트’. 이는 한국의 옛 이름이 ‘고조선’/‘부여’인 것과 같다 - 옮긴이)에서도 문자가 탄생했다.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페니키아 문자도 오리엔트(더 정확히는 오늘날의 레바논인 페니키아 - 옮긴이)에서 전파된 것이다. 가지를 치고 나와 라틴 문자와 키릴 문자가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도 발명된다. 페이퍼(종이 - 옮긴이)의 원조가 되었다. 이집트와 이라크 사이에서는 기독교(그리스도교 - 옮긴이)도 탄생했다. 그래서 성경을 바이블(Bible)이라고 한다. 비블로스(Biblos)라는 레바논의 지명에서 따 온 것이다. 오리엔트는 책(Book)의 기원이자, 문명의 시원이었다.
고대 오리엔트의 대일통을 달성한 이가 알렉산드리아(알렉산드로스 - 옮긴이) 대왕(나는 그에게 ‘대왕’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마케도니아 사람이 아닌 사람들 - 예컨대 페르시아인/테베인/케메트인/바빌로니아인/박트리아인/인도인 - 에게는 침략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서기 19세기, 서양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들이 다른 나라나 지역을 침략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고, 그 나라의 정치인/군인들은 그를 ‘우리의 선배’나 ‘서구의 문명화를 일찍부터 보여준 모범’으로 섬겼다. 아틸라나 테무친을 섬기는 것이 잘못이라면 알렉산드로스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 옮긴이)이다.
이집트부터 그리스(헬라스 - 옮긴이)를 지나 인도(바라트. 더 정확히는 오늘날의 파키스탄 - 옮긴이)까지 하나의 세계를 일구었다. 각지의 개별 문화가 그리스 문화, 헬레니즘으로 합류했다(그러나 12년 전에는 헬레니즘을 맛보고 즐긴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 왕을 따라 그가 점령한 땅 곳곳으로 퍼진 헬라스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점령지의 원주민 지도자들 뿐 이었고, 점령당한 땅의 민중들은 여전히 토착문화 속에서 살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 옮긴이). 제국의 수도에 값하는 곳은 역시 이집트였다. 나일 강의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다. 풍부한 곡물을 생산함으로써 시장경제가 활달(豁達. 시원스럽게 탁 트임 - 옮긴이)하게 작동했다. 자연스레 문화적인 욕구도 증폭되었다.
문화 융성에 몰두한 이가 계몽 군주 프톨레마이오스이다. 본인부터가 역사가이자,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화의 전당을 만들기로 한다. 거점으로 삼은 곳이 알렉산드리아이다. 본래는 군항이었던 곳이다. 수군들이 집결했던 군사 도시를 학술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핵심 사업은 박물관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박물관(Museum)은 신(Muses)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그곳에 신의 뜻을 헤아리는 지식도 집적키로(集積키로. 모아서[集] 쌓기로[積] - 옮긴이) 했음이 혁신의 요체였다. 호메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그리스 문학의 보고가 된다. 최전성기에는 60만 권의 도서를 소장했다고 한다. 시인, 극작가, 지리학자, 천문학자 등이 차례로 도서관장을 역임하면서 문학부터 과학까지 당대의 지식을 두루 집대성시켰다(집대성‘하였다.’ 집대성集大成은 ‘[여러 가지를] 모아[集] [하나의 체계로] 완성함[大成]’이라는 뜻이므로, 이 문장은 ‘모아서 하나의 체계로 완성하였다.’로 고쳐 써야 한다 - 옮긴이). 도서관 운영을 위해 필수적인 목록 작성법도 마련되었다. 저자별로, 분야별로 목록(tables)을 만들어갔다.
자연스레 서방의 제자백가들이 속속 집결했다. 유클리드부터 히포크라테스, 아르키메데스까지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알렉산드리아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도서관은 이들에게 높은 급료를 주고 세금도 면제해주었다. 숙소와 식사 또한 무료로 제공했다. 군주의 자금으로 운영되는 일종의 국책 '싱크탱크'였던 셈이다. 고로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만끽하고 싶다면 아테네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 가야 한다(단, 알렉산드리아로 가면 앎[지식]과 슬기[지혜]는 얻을 수 있지만, 알렉산드리아는 군주제 국가의 도읍이었으므로 직접 민주주의와 민주정은 맛보지 못할 것이다! - 옮긴이).
그 영화가 영원하지는 못했다. 로마인들이 지중해 세계를 석권한다. (그들은 - 옮긴이) 지식과 학문보다는 무용(武勇)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었다. 논쟁보다는 결투를 즐기고, 말싸움보다는 몸싸움에 능했다. 전사와 투사들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영토를 확장해나가면서 발견되는 도서관들을 족족 무너뜨렸다.
그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정통과 이단도 날카롭게 가르기 시작했다. 곧장 이단의 책을 모아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교황의 명령으로, 주교의 실행으로, 도서관을 파괴시킨다. 60만 장서들은 불에 타오르고, 장대한 대리석 건물은 무너져 내렸다. 서방판 '분서갱유'였던 셈이다.
동/서 로마 분리 이후 비잔틴 제국(올바른 이름은 ‘동東로마 제국’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로마’라고 불렀고, ‘비잔틴’이나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다. ‘비잔틴’은 서기 17~18세기에 서유럽 글쟁이들이 동로마 제국에 붙인 이름이다. 동로마 제국의 도읍인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이 ‘비잔티움’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단, 이 나라 사람들은 말은 헬라스 말을 쓰고, 글자도 헬라스 글자를 쓰고, 종교는 동방정교를 믿어서 옛 로마제국과는 성격이 크게 다른 나라를 꾸려나갔다. 이 나라를 ‘동東’자를 붙여서 ‘동로마 제국’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옛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 옮긴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플라톤이 아테네에 세웠던 아카데미들도 모조리 문을 닫는다. 로마 시절 도서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리조트(쉬는 곳/휴양지 - 옮긴이)의 일부가 되었다. 열탕과 냉탕을 갖추고 사우나와 수영장, 마사지실을 구비한 종합 레저센터의 한 모퉁이에 자리했다. 로마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라고 해봐야 3만 권이 고작이었다. 지식과 문화의 암흑기, 이른바 '중세'가 출발한 것이다.
(그나마 동로마는 서유럽이나 남유럽이나 북유럽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 세 지역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은 사람’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고, 그 세 지역에서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던 사람들도 서로마 제국만 알았지 헬라스나 서아시아의 고대 문화를 알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로마에서는 헬라스 문화와 그리스도교 이전의 로마 문화가 어느 정도는 보전되었다.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내가 이 글에 답글 형식으로 덧붙인「시오노 나나미의 지록위마」를 읽어보라 - 옮긴이)
2. 바그다드
빛은 다시 오리엔트에서 왔다. 로마에서 외면당한 그리스 사상은 페르시아에서 계승되었다.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 아라비아 반도가 있었다. 그곳에서 기적처럼 솟아난 것이 이슬람이다. 헬레니즘(헬라스 철학 - 옮긴이)과 헤브라이즘(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더 정확히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단’으로 간주한 교파들과 유대교 - 옮긴이)을 융합시킨(융합한 - 옮긴이) 종합종교였다. 마호메트(무함마드 - 옮긴이)는 모세(아랍어 - 그리고 이슬람식 - 발음은 ‘무사’ : 옮긴이)와 예수(아랍어 - 그리고 이슬람식 - 발음은 ‘이사’ : 옮긴이)의 계승이자 완성을 자처했다(무함마드는 모세를 실존 인물로 인정하고, 예수[본명 ‘요수아’/‘예슈아’]는 ‘신의 아들이 아닌 인간 예언자’라고 선언했다 - 옮긴이). 정통 아브라함(아랍어 - 그리고 이슬람식 - 발음은 ‘이브라힘’ : 옮긴이)의 중흥을 표방했다.
기독교를 유럽의 종교인양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지금도 원시 기독교의 모습이 오롯하게 남아 있는 곳은 시리아이다. 오늘까지도 예수가 말씀하셨을 옛말(아람어 - 옮긴이)로 예배를 드린다. 10대 시절 마호메트는 시리아에도 행차했다. 유대교-기독교의 적통을 잇는 이슬람이 등장한 까닭이다. <코란>은 구약과 신약을 망라한 문헌이다. 그래서 야곱(아랍어 - 그리고 이슬람식 - 발음은 ‘야꿉’ : 옮긴이)과 모세, 다비드(아랍어 - 그리고 이슬람식 - 발음은 ‘다우드’ : 옮긴이), 솔로몬(아랍어 - 그리고 이슬람식 - 발음은 ‘술라이만’ : 옮긴이), 이삭(아랍어 - 그리고 이슬람식 - 발음은 ‘이츠하크/이스하끄’ : 옮긴이)을 아랍어로 만날 수 있다.
더불어 그리스-페르시아의 헬레니즘도 계승했음이 백미이다.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더 성스럽다.'라고 말한 것(사람 - 옮긴이)이 마호메트였다(출처는 이슬람교의 경전인『하디스』다 : 옮긴이). (그래서 이슬람 사회는 - 옮긴이) 학문을 적극 권장하고 장려했다(내가 몇 해 전 미국 다큐멘터리에서 본 내용에 따르면,『꾸란』에도 “너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알게 됨으로써 신을 받드는 마음이 더 커지므로”, 무슬림은 [남에게서] 배우고 [남을] 가르쳐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꾸란』에는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신의 계시가 적힌 글을] 가져가서 읽어라.”하고 명령했다는 구절도 나온다. 글을 가져가서 읽으라는 말은 그 글을 읽을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뜻이고, 그러려면 글 읽는 법을 알아야 하며, 글을 읽으려면 글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하므로, 이론상 이슬람교는 배움과 가르침을 권장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나이지리아에서는 “서구식 교육은 죄악”이라고 주장하고, 여성들이 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아가 여성을 붙잡아서 끌고 가고 성폭행을 일삼는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인 ‘보코 하람’이 악명을 떨치고 있는데, 이 조직을 비난하는 다른 나라의 수니파 무슬림들은『하디스』의 구절과『꾸란』의 이와 같은 구절들, 그리고 중세 이슬람 사회가 배움과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긴 사회였다는 사실[史實]을 [비난의] 근거로 든다 - 옮긴이).
유일신의 섭리를 헬레니즘의 이성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고로 <코란> 또한 경전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철학과 윤리, 민법과 형법, 상법과 국제법을 아울렀다. 가히 당대의 '백과전서'에 해당했다. 게다가 문장까지 아름다웠다. (그 문장들은 - 옮긴이) 암송과 낭독에 최적화되었다(‘적격이었다.’ - 옮긴이). 지중해의 양대 사상을 통합한 마호메트의 가르침(이슬람교. 참고로 무슬림은 “마호메트교”라는 명칭은 인종차별/종교차별이라며 싫어하고 무함마드는 단지 ‘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한, 마지막 인간 예언자’일 뿐임을 강조한다. 당신이 무슬림을 만나야 한다면 참고하기 바란다 - 옮긴이)은 삽시간에, 파죽지세로 확산되었다. 반도의 위치가 절묘했다. 동으로는 페르시아만, 남으로는 인도양, 서로는 홍해, 북으로는 지중해를 끼고 있었다. 포교 활동에 나선 지 불과 100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남유럽)부터 인도의 국경(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총 7000km를 아우르게 된다. 천 년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에도 5000km에 그쳤다. 이슬람의 모험은 알라의 진격인 양 거침이 없었다.
이슬람의 서진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멈춘다. 서유럽은 허허벌판 황무지(wild west)였다. 너무나도 궁색하여 전리품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날씨마저 추웠다. 아라비아 출신의 무슬림들(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이자,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마지겐 족 - 옮긴이)은 이베리아(더 정확히는 이베리아 반도의 중부와 남부 - 옮긴이)에 족하기로 한다(이 때 무슬림들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작은 나라들이 중세 내내 무슬림들의 왕국과 싸우며 힘을 키웠고, 나중에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되어 무슬림들을 몰아내고 포르투갈 왕국과 에스파냐로 탈바꿈했다 - 옮긴이).
이슬람의 동진이 멈춘 곳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 옮긴이) 탈라스였다. 동쪽에는 또 하나의 문명 대국, 대당 제국(당 왕조 - 옮긴이)이 버티고 있었다. 탈라스에서 양 제국이 일합을 다투었다. 이슬람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통합했다면, 대당 제국(내가 고구리와 남부여를 무너뜨리고, 신라와 [당시는 백제 유민들의 식민지였던] 왜국까지 침략하려고 했고, 고창국과 동투르키스탄의 여러 나라들을 침략/점령한 나라에 왜 ‘대大’자를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 옮긴이)은 동아시아의 (사상인 - 옮긴이) 유교와 남아시아의 (종교인 - 옮긴이) 불교를 통합한 또 하나의 문명 대국이었다. 게다가 제지술까지 발달했다.
(아랍 무슬림들은 - 옮긴이) 이슬람의 동진을 멈춘 대신에 최신의 테크놀로지(기술 - 옮긴이)를 얻어왔다. 비로소 마호메트의 계시를 양피지가 아니라 종이 위에 기록할 수 있었다. 태초에는 말씀만 있었다. 그 말씀을 입으로 읊고 외워서 귀를 자극시킴으로써 대뇌 피질에 각인시킨(뚜렷하게 새긴 - 옮긴이) 것이다. 종이 책 <코란>은 양피지 <코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게다가 “종이”는 “양피지”보다 값이 쌌고 질기면서도 부드러웠다! - 옮긴이). 중화 세계(당 왕조 - 옮긴이)의 제지술을 수용함으로써 이슬람 세계는 날개 난 듯 비상할(날아오를 - 옮긴이) 수 있었다. 관료들은 공문서를 기록하고, 상인들은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이슬람 제국은 더욱 더 팽창하고, 이슬람 무역 네트워크는 더더욱 확산되었다.
문서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문서 보관서도 생겨났다. 이슬람 최초의 도서관이 들어선 곳은 다마스쿠스(오늘날에는 수리야의 수도다 - 옮긴이)였다. 샤리아의 관철 아래 다문명 다종교가 공존했던 다문화 도시였다.
계몽 칼리프 시대를 열어젖힌 이로는 만수르를 꼽을 수 있다. 바그다드로 천도하여 아바스 제국의 수도로 삼는다. 바그다드는 아랍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내가 예전에 읽은 다른 글에 따르면, 원래는 아랍인들이 그 도시를 지은 뒤 아랍어로 ‘평화/안녕’이라는 뜻인 ‘살람’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이름 대신 사산조 페르시아 시절부터 [그 도시가 세워진] 지역에 붙었던 이름인 ‘바그다드’를 더 즐겨 썼기 때문에 나중에는 ‘바그다드’라는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 옮긴이). 실지 회복을 호시탐탐 노리는 비잔틴 제국에서 동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아간 것이다. 그곳을 왕년의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문화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지혜의 집"이라고 하는 거대한 도서관을 건설한다. '이슬람판 集賢殿(집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인도에 사절단을 보내 산스크리트어로 된 문헌들을 가지고 왔다. 페르시아의 의학교들도 바그다드로 이전시켰다. 그리스의 고전들도 죄다 수집했다.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유산들이 몽땅 아랍어로 번역된 것이다. 아랍어는 동유라시아의 한문과 더불어 서유라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어이자 문명어가 되었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본이 되는 사람이다. 만수르는 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 대화를 나눌 만큼 학문을 사랑하는 '계몽 칼리프'였다. 탁월한 설교자이자 문장가이기도 했다. 칼리프의 글쓰기, 칼리프의 말하기의 전범을 세웠다.
그의 문화 통치 아래 바그다드는 독서인들의 천국, 서치(書癡. 글[書]에 미친 사람[癡]. 글 읽기에만 정신을 쏟고, 다른 일은 돌아보지 않는 태도나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들의 유토피아가 되었다. 골목마다 마을 도서관이 들어서고, 마을 인문학이 꽃을 피웠다. 도서 시장도 아연 활기를 띄었다. 서점과 서적 판매상들의 전성기였다. 책을 써서 생업을 해결하는 전업 작가들이 생겨났고, 필사가(붓이나 펜으로 글과 책을 베껴 쓰는 사람 - 옮긴이)와 편집자, 마케터라는 신종 직업도 등장했다.
바그다드의 대번역 사업은 다양한 문화를 이슬람이 흡수, 수용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타문화를 몸에 익힌 최고의 지성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함으로써 이슬람을 더욱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확장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이슬람이야말로 유럽과 아랍, 지중해를 마주한 '유라비아'(유럽과 아라비아를 합친 말. 이는 ‘유라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합친 말’인 것과 같다 - 옮긴이)의 지식과 문화를 환류시키고(還流시키고. 방향을 바꾸어 되돌아[還] 흐르게[流] 하고. 그러니까 ‘환류하게 하고’ - 옮긴이) 생기를 돌게 하는 대동맥의 역할(노릇/구실 - 옮긴이)을 한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을 '중세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중국의 신유학(‘주자학’이나 ‘정주학’으로도 불리는 성리학 - 옮긴이)과 더불어 유라시아의 초기 근대를 싹틔운 학문으로 대접해야 온당할 것이다. 르네상스의 원조이고, 계몽주의의 기원이었다. '잃어버린 근대성'의 하나로 이슬람을 복권시켜야 할 것이다.
3. 이베리아와 이탈리아
바그다드는 홀로 빛나지 않았다. 더불어 빛을 발했다. 이웃에는 다마스쿠스가 있었다. 홍해를 지나서는 카이로도 있었다. 인도양과 지중해, 홍해, 그리고 나일 강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가 카이로였다. 세계 최초의 시아파 대학 알 아즈하르가 카이로에 생긴 것이 천 년 전이다. 당시 이미 100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던 하킴 도서관은 바그다드, 다마스쿠스와 자웅을 다투었다.
아랍 세계로 그치지도 않았다. 지중해 건너 유럽으로도 문명의 바람이, 훈풍이 분다. 북아프리카와 마주하고 있는 곳이 이베리아 반도이다. 모로코와 스페인(에스파냐 - 옮긴이) 사이는 바다라기보다는 강이라고 할 만큼 좁고도 가깝다. 쾌청한 날이면 서로의 해안선이 눈에 들 정도이다. 자연스레 이슬람 문화가 흘러 넘쳐 들어갔다.
711년 첫 상륙 이래 1609년 완전 추방(이 말대로라면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가르나톼[유럽식 이름 “그라나다”]’ 왕국이 무너진 지 117년이 흐른 뒤에도 무슬림과 유대교 신자들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 옮긴이)까지, 근 천 년 간 '이슬람적 유럽'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코르도바(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무슬림 왕국의 도시 - 옮긴이)이다. 아라비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한 무슬림들(이마지겐 족과 아랍인 - 옮긴이)이 개척한 신도시였다. 이슬람 세계 및 인도양 교역망과 접속함으로써 진귀한 농산물과 향신료, 약품이 전래되었다. 설탕과 오렌지, 쌀과 후추 등이 처음 유럽으로 전래된 곳도 안달루시아이다. 유럽의 남부까지도 아프로-유라시아(‘아프리카와 유라시아’라는 뜻. ‘아프로’Afro는 ‘아프리카의’/‘아프리카 사람의’/‘아프리카식’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 네트워크가 작동하자 지중해를 누비고 다닌 이들은 유대인 상인이다. '베니스의 상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원시 자본을 이베리아에서부터 축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병한 선생이 “유대인 상인”의 활동을 강조할 때『베니스의 상인』을 예로 든 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선입견이 잔뜩 들어간 작품이고, 유대교를 헐뜯고 유대인을 “돈만 아는, 짐승보다 못한 족속”/“빚을 지게 해 놓고 그 대가로 사람의 심장을 요구하는 잔인한 놈들”로 그렸기 때문이다[당시에는 그리스도교가 강했고, 유대교는 약했으며, 전자를 믿는 사람들이 후자를 억눌렀으므로, 이는 엄연히 종교차별이고 인종차별이다]. 그냥 “유대교 신자인 장사꾼들이 이베리아에서 자본을 쌓았다.”고 쓰면 되었을 일이다. - 옮긴이)
물류는 필시 문류(다양한 문화들의 교류 - 옮긴이)도 수반한다. 당시의 보편어이자 세계어인 아랍어가 보급되었다(오늘날에는 아랍인이 프랑스어나 영어를 배우지만, 중세시대에는 유럽인이 아랍어를 배웠다 - 옮긴이).
이슬람이 집대성한 서유라시아의 지식과 문화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400권의 도서를 보유했던 (천주교 교회의 - 옮긴이) 수도원을 40만 권을 소장한 칼리프 도서관이 대체했다. 안달루시아 일대에 공공 도서관만 70개가 넘게 들어섰고,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마드라사) 또한 30여 개에 달했다.
유럽에서 배움을 갈망하는 이들도 코르도바로 유학 오기 시작했다. 아랍어로 기록된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의 문물을 익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대인들이 <탈무드>를 아랍어로 번역하여 칼리프에 헌사한 곳도 코르도바이다(참고로 중세시대에는 유대교 랍비가 아랍어로 책을 쓰기까지 했다. 중세시대에는 근대나 현대와는 달리 무슬림이 유대교 신자들을 존중하고 권리를 보장했다 - 옮긴이). 코르도바는 아랍과 유럽을 잇는 유라비아의 허브가 되었다. 아라비아의 르네상스가 이베리아부터 전수된 것이다.
이베리아(오늘날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있는 반도 - 옮긴이)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로도 전파되었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탈리아 역시 이슬람의 문물 수용에 유리한 곳이었다. 특히 반도의 남쪽이 거점이 되었다. 시칠리아 섬이 유명하다.
1225년 이탈리아 남부의 로마와 나폴리 사이, 시칠리아 왕국의 영지에서 태어난 이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아퀴나스는 지명이다. '아퀴나스의 토마스'라는 뜻이다. 그의 스승이 바로 안달루시아 출신 수도사였다. 이슬람의 수학과 지리학, 천문학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이슬람의 자연철학과 합리주의를 사사 받은 것이다. 자연스레 아리스토텔레스도 탐독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수도사이기를 거두고 스콜라 철학자로 거듭났다. 비유하자면 신과 이성의 조화를 탐구하는 이슬람의 울마라처럼 되어간 것이다. '유럽 최초의 울라마'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살아생전 인정받지는 못했다. 교황으로부터 위대한 교부라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로 추인 받은 것은 1567년이다. 그가 집필한 <신학대전>이 가장 권위 있는 주석서로 교황의 승인을 받은 것은 1879년이다.
그 토마스 아퀴나스가 공부한 곳이 나폴리 대학이었다. 바그바드의 집현전이 이베리아를 지나 이탈리아까지 전파된 것이다. 아랍의 마드라사가 유럽의 대학을 촉발시킨 것이다. 13세기 서구 최초의 대학들로 꼽히는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대학 공히 안달루시아의 아랍어 텍스트를 주교재로 삼았다. 그래서 대학 입학 자격을 의미하는 바칼로레아부터 박사 학위를 뜻하는 닥터까지 죄다 아랍어에서 기원한 말이다. 흔히 라틴어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라틴어가 대개 아랍어를 번역했던 것이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입는 가운과 모자는 울라마의 복장과도 흡사하다.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을 읽고 사회과학에 눈 뜬 이로는 마키아벨리가 있다(『역사서설』은 김호동 교수가 서기 2003년에 한국어로 옮겼고, ‘까치’에서 펴냈으니,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 구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그 책은 사마천의『사기』와 헤로도토스의『역사』못지않게 수준 높은 책이고, 역사학을 알려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 옮긴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도, 단테의 <신곡>도, 안달루시아의 만화 작가 이븐 아라비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원작이 된 작품은 <신밧드의 모험>이다. 12세기 무슬림 상인 이븐 투파일의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로 집필한 것이다. 창작이라고 추기키도 어렵고, 표절이라고 깎아 내리기도 애매하다면 '번안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이븐 투파일의 책은 존 로크, 뉴튼, 라이프니치, 볼테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다고 말한 이는 아이작 뉴턴이었다. 그가 올라타고 있던 거인이 다름 아닌 지니, 이슬람 문명이었던 것이다. 아랍의 요술램프 마법이 유럽의 과학혁명을 촉발시켰다.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 <돈키호테>가 꼽힌다. 이 역시도 아랍의 역사가가 쓴 책이 원작이다.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창작물이라며 발표한 것이 1605년이다. 마침 이슬람이 이베리아/안달루시아에서 사라진 시점이었다.
1492년 무슬림의 통치가 종언을 고하며, (이베리아 반도는 - 옮긴이) 재차 기독교의 땅이 된다. (천주교 교회와 카스티야 왕국은 - 옮긴이) 무슬림과 유대인을 모두 추방시키며, 그들이 일구었던 르네상스의 흔적도 죄다 지운다. 1499년 그라나다 광장에서 어마어마한 화염이 불타올랐다. 아랍어로 된 책들을 몽땅 불태운 것이다. 자그마치 200만 권으로 추산된다. 약 천 년에 걸쳐 축적된 이슬람의 황금시대가 일소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비극이 반복되고 변주된 꼴이다. 1609년 스페인은 무슬림이 완전히 소거된 신천지, 신세계가 되었다. 그렇게 기원을 말살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 유럽의 '고전'들이 성립되어갔다. 그리스-로마-유럽을 직선으로 잇는 '서양사'의 기본 틀도 마련되었다.
4. 유라비아
완전범죄는 없다. 흔적을 남기고 단서가 남는다. 천만다행으로 이베리아의 서책들이 전소된 것은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필사적으로 필사본을 들고 탈출한 무슬림들이 있었다. 이 난민들이 정착한 곳이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 도시들이다. 모로코부터 튀니지, 알제리, 리비아, 이집트에 '유럽의 아랍어 책'들이 남아 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2002년 재개장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였다. 고문헌 특별실에 깍듯하게 모셔져 있다. 손으로 만져서도 안 되고, 카메라 촬영도 허락되지 않는다. 유럽사를, 유라비아사를, 유라시아사를, 세계사를 다시 쓸 소중한 단초라고 하겠다.
그러나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문법도 어휘도 내가 익힌 현대 아랍어와 차이가 컸다. (간체자로 쓰는 - 옮긴이) 현대 중국어와 (정체자로 쓰며 입말[구어]인 한어[漢語]와는 다른 - 옮긴이) 한문 고전이 별세계의 언어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일 것이다. 눈 뜬 장님 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압도적인 막막함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슬람학을 하고 싶다! 공부심(배우고 싶은 마음 - 옮긴이)이 솟구쳐 올랐다.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미지의 세계가 펼쳐진다.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앎이 시작된다. 눈이 뜨이고 빛이 드는 계몽의 출발에 캄캄하고 막막한 無明(무명)의 시절(자할리야)이 자리한다.
낯설지 않은 경험이었다. 15년 전이 떠올랐다. 보스턴에 있는 옌칭도서관에서였다. 하버드 대학의 동아시아 도서관이다. 웬걸, 나는 읽어낼 수 있는 문헌이 거의 없었다. 영어를 기본으로, 독어와 불어를 보태고 있던 시절이었다. 한문은 까막눈이었다. 부모님 이름 여섯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때이다. 옌칭도서관 서적 가운데 95%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한국 출신인 내가 미국의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門外漢(문외한)의 소외감에 빠져든 것이다. 개항기와 개화기는 물론이요, 일제시기, 해방 이후 발간된 <사상계>조차도 온전히 읽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개념은 죄다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 베트남은 外界(외계)와 다름없었다. 즉 내 교양은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도입한 <창작과비평>이나 <문학과지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 겨우 30년이 내가 기댈 수 있는 한 줌의 유산이었다. 나의 지성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있는가를 처음으로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진보 연했던 패션 좌파의 부실한 밑천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조선 왕조 오백 년은 물론이요, 동아시아 오천 년 유산으로부터 까맣게 단절되어 있다는 황망함에서 동학으로의 회심과 전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대 오리엔트의 영화를 머금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도 1400년 이슬람 문헌들이 빽빽하게 보존되어 있다. 아랍어를 모르면 이슬람 문명은 물론이요 '서양사'조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자각을 이제야 하게 된다. 영어/불어/독어 이전에 라틴어가 있었고, 그 라틴어 앞에 아랍어가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강남과 강북의 변증법(북중국 왕조와 남중국 왕조의 대립과 교류 - 옮긴이)으로 동아시아 문명이 발전되어왔듯이, 해남(海南)과 해북(海北)의 상호작용(‘바다의 남쪽’과 ‘바다의 북쪽’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긴데,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지중해고 바다의 남쪽은 북아프리카이며 바다의 북쪽은 유럽이다 - 옮긴이)으로 유라비아 문명 또한 공진화해온 것이다. 지중해를 사이로 밀물과 썰물이 오고갔던 유럽사와 아랍사를 유라비아사로 회통시켜야 할 것이다.
오해는 삼가자. 아랍이 유럽보다 앞섰다며, 동양이 서양보다 먼저였다며, 선후 관계를 다시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백인들의 진보사관을 처분하고,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사관을 제대로 고쳐 쓰자는 것이다. 이슬람을 기각하면 유럽사도 온전하지 못하고, 아시아사도 제대로 성립하지 못한다. 서양사도 동양사도 불구의 틀인 것이다. 서(유럽)학과 동(아시아)학도 충분치 못한 그릇인 것이다. 20세기의 시공간 관념을 전면적으로 쇄신할 수 있는 첩경이 이슬람학일 것이다. 21세기의 "지혜의 집", 새 천 년의 집현전을 재건하는데 이슬람학이 중추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공간적으로 동(아시아 - 옮긴이)과 서(유럽 - 옮긴이)를 잇고, 시간적으로 고(옛날 - 옮긴이)와 금(오늘날 - 옮긴이)을 엮는 척추에 이슬람이 자리한다. 이슬람은 유라시아의 허브다. 다시 한 번 이슬람학을 권장한다. 부디 후학들의 고군분투를 촉구한다.
- 이병한(역사학자)의 글
- 원문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9814
(<프레시안> 기사)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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