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1일 오늘의 역사
2019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연출가 해럴드 프린스 세상 떠남(91세) ‘오페라의 유령’ ‘에비타’ 토니상 21번 받음
2015년 ‘자본론’ 최초 완역 김수행 교수 별세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 김수행(73)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별세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좌파 경제학자로 꼽혔던 김 교수는 1989년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이후 2008년 정년퇴임까지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했다.
1942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해방 직후 귀국한 뒤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대학 시절에는 서울대 상대(商大) 서클인 ‘경우회’에 가입해서 종속이론과 제국주의론을 공부했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보름간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69~1975년 외환은행에서 근무했다. 외환은행 런던 지점에서 근무할 당시 영국 경제의 불황을 지켜본 뒤 사표를 내고 런던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귀국 직후 한신대 교수로 임용됐다.
당시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경제학부 교수로 임용됐다. 이전부터 번역하던 ‘자본론’은 1989~1990년 차례로 출간됐다.
그는 정년 퇴임 강연문에서 “어릴 적부터 가난에 관심이 많았다. 매우 똑똑한 친구들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고교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2007년 회고록에서는 “앞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더욱 발전해 이 세상의 소금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썼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김 교수는 이론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자본론’과 더불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번역했으며 2010년에는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춘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 ‘청소년을 위한 국부론’을 펴냈다.
2010년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마셜 제도 비키니 환초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2009년 한국형 첫 기동헬기 ‘수리온’ 출고식
방위사업청과 한국항공우주산업은 2009년 7월 31일 오전, 경남 사천에서 KUH 출고식을 거행했다. 수리온은 산악이 많은 우리나라에 맞게 설계된 첫 한국형 기동헬기(KUH)이며,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 11번째 헬기 개발 국가가 됐다. 2006년 6월 개발에 착수한 지 38개월 만이며, 오는 2012년 6월까지 200여 대가 양산된다.
내년 3월 처음 비행하는 KUH는 9명의 중무장 병력을 태우고 최대 140노트(시속 259km) 이상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다. 분당 150m 이상의 속도로 수직상승해 백두산 높이(2744m)에서도 제자리 비행이 가능하다.
KUH는 동체길이 15m, 높이 4.5m, 기폭 2m로 최대이륙중량은 8천709kg, 최대순항속도 259km/h, 항속시간 2시간 이상이다. 엔진은 ’T-700 터보 샤프트’고, GPS(인공위성항법장치)와 INS(관성항법장치), RWR(레이더 경보수신기) 등 전자장비를 갖추고 있다.
2009년 ‘가고파’ 작곡가 김동진 선생 별세
2009년 7월 31일 별세한 작곡가 김동진(金東振) 선생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12월 임진강을 건너 월남했다.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평양교향악단의 전신(前身)인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창단하며 지휘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공산 치하에 염증을 느꼈다.
그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헌병의 검문을 받았다. 아무런 신분증이 없었지만 자신이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라고 소개하자 헌병은 아무 말 없이 놓아주었다. 삶과 죽음이 말 한마디에 갈리는 치열한 전시(戰時)에도 ‘국민 가곡’의 힘은 그만큼 컸다.
1913년 조부와 부친 모두 목사였던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난 김동진 선생은 어릴 적 혼자 노력으로 오르간을 쳤고, 그 모습을 본 부친이 11세 때 바이올린을 사줬다. 그는 숭실중 5학년 때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로 시작하는 가곡 ‘봄이 오면’을 작곡했다. 그의 첫 작품인 이 노래는 당시에도 널리 불려서 그가 숭실전문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숭실중 재학 시절 그는 김동환·주요한 등의 시집을 늘 지니고 다니며 애독했고, 이 독서는 평생 아름다운 가곡을 작곡하는 원동력이 됐다.
김동진 선생이 ‘가고파’를 작곡한 것은 1933년 약관 20세 때였다. 양주동의 강의를 통해 이은상의 동명(同名) 시를 알게 된 그는 곧바로 곡을 붙였다. 이 무렵 벌써 가곡뿐 아니라 관현악도 쓰기 시작했으며 일본에 유학해서는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귀국 직후 1938년 제1회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에선 자작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직접 연주해서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남한으로 온 김 선생은 6·25전쟁이 끝난 뒤 서라벌예대 교수와 경희대 음대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다. 특히 1969년 경희대 개교 20주년 기념으로 작곡한 교성곡 가운데 ‘오 내 사랑 목련화야’로 시작하는 ‘목련화’는 따로 가곡으로 널리 불리며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영화음악부터 군가까지 폭넓은 분야에 족적을 남겼고 1952년 군가 표창상, 1966년 청룡영화제 영화음악상,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0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9년 동의보감 세계기록유산 등재
보물 제1085호 동의보감이 2009년 7월 31일 조선시대 어의 허준 주도로 편찬된 조선시대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한국의 7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됐다.
2009년 7월31일 중앙아메리카 바베이도스 수도 브리지타운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9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한국이 지난해 3월 등재 신청한 동의보감 초간본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은 1997년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의 두 건을 시작으로 직지심체요절과 승정원일기(이상 2001년),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조선왕조의궤(이상 2007년)에 이어 모두 7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이번에 등재가 결정된 동의보감 판본은 1613년(광해군 5년), 편찬 총책임자인 허준 자신이 직접 간행에 관여해 나온 초판어제본(初版御製本)으로, 국립중앙도서관(오대산사고본)과 한국학중앙연구원(적상산사고본)에 각각 소장돼 있다. 이들은 보물 제1085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세계기록유산은 인류의 소중한 기록유산을 가장 적절한 기술을 통해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가능한 많은 대중이 기록유산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에서 유네스코가 1992년부터 추진해온 사업으로 2년마다 등재 유산이 정해진다.
2002년 장상 총리서리 국회 인준동의안 부결
2002년 7월 11일 김대중 대통령은 이한동 국무총리를 교체, 새 국무총리서리에 장상 이화여대 총장을 임명하고, 장관급 7명을 바꾸는 개각을 단행했다. 여성이 국무총리에 기용된 것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장 총리서리는 국회 인준동의안이 처리되면 정식으로 총리에 취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7월 31일 국회에서 장상 국무총리서리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찬성 100표, 반대 142표로 부결됨으로써 張서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3공화국 이후 국회 동의를 받지 못한 첫 총리서리가 됐다. 헌정史로는 일곱 번째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승만(5번)·윤보선(1번) 전 대통령에 이어 자신이 선택한 총리가 국회에서 신임을 얻지 못한 세 번째 대통령이 됐다.
7월 29일과 30일에 걸친 인사청문회 전만 해도 민주당·자민련은 인준 통과에 이견이 없었고, 한나라당 역시 첫 여성 총리 인준 부결시 정치적 부담에 크게 신경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청문회에서 張서리의 세 차례 위장전입, 청문회 발언 번복 등 새로운 문제점들이 부각되고, 아들의 국적 포기 배경·학력 변조 논란 등 이미 제기됐던 쟁점에 대해서도 장 내정자가 "시어머니, 비서가 한 일"이라는 등 책임을 미루는 반응을 보이면서 국민 여론이 급격히 악화됐고, 의원들도 이런 여론에 동요된 것으로 분석됐다
2000년 산악인 엄홍길,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4좌 완등
산악인 엄홍길씨가 2000년 7월 31일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K2(8611m) 정상에 올라,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4좌 모두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이자, 세계에선 일곱번 째였다. 이로써 엄씨는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12년에 걸친 도전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1986년 오스트리아의 라인홀트 매스너가 처음으로 성공한 뒤, 이제까지 6명밖에 이루지 못했던 전세계 등반인의 꿈이었다. 그러나 엄씨는 국제산악연맹으로부터 14좌 완등을 인정받지 못해 2001년 5월 16일 히말라야 로체봉을 다시 등정함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1960년 경기도 의정부시 도봉산 골짜기에서 태어난 엄홍길은 어려서부터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산악인의 꿈을 키웠다. 1m68cm, 60kg의 작은 체구지만 최정예 부대인 해군 수중파괴대(UDT)에서도 잠수실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엄청난 폐활량과 지구력의 소유자였다. 25세때인 1985년 에베레스트 첫 원정과 1986년 두번째 원정에서 정상정복에 실패했으나, 1988년 비로소 세계 최고봉에 오르면서 그의 히말라야 도전 성공사가 시작됐다. 1998년 안나푸르나 등정 때는 추락하는 셸파를 구하려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고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는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다.
2000년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 철도연결 합의
1999년 강원 철원 7.31-8.2 동안 752.9mm 비가 내려 최고값 기록
1997년 베트남 구엔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84세) 세상 떠남
1995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유엔주재 미국대표부에서 30여개국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총회 개최
1995년 고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씨 판문점 귀환 구속
1993년 보두행 벨기에 국왕 스페인에서 휴가중 심장마비로 세상 떠남
1992년 신행주대교 공사중 붕괴
일산 신도시 입주에 맞춰 연말에 완공예정이던 신행주대교가 1992년 7월 31일 교각 14개가 쓰러지면서 다리상판 1천4백60m중 고양시쪽 8백m가 강물로 무너져내렸다.
신행주대교는 주탑과 교각위 상판을 콘크리트 기둥으로 연결, 지탱토록 하는 사장교로 부분 상판 60m를 얹는 작업을 남겨두고 있었다. 너비 14.5m(3차선)인 이 다리는 서울 서부외각지역 교통량 처리를 위해 1987년 10월 1백70억원을 들여 기존 행주대교에서 하류쪽으로 30m쯤 떨어진 곳에 착공했으며 공정률 82%로 이해 말 완공될 예정이었다.
이 사고는 남해 참선교 붕괴, 지하철 2호선 벽면 균열 등과 함께 건설행정 전반에 문제점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싼 가격으로 입찰자를 정하는 정부공사입찰방식에 따른 건설업체간 과당 입찰경쟁과 국내에서 시공경험이 없는 콘크리트 사장교 방식의 무리한 도입이 사고원인으로 지적됐다. 신행주대교는 12월에 재착공,1995년 5월 19일에 개통됐다.
1991년 국산 대형컴퓨터 개발계획 확정
1991년 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조인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1년 7월 31일 러시아 크렘린궁 성 블라디미르홀에서 역사적인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조인했다.
이곳은 지난 1972년 당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조인했던 유서깊은 장소로 이를 기념하듯 양 대통령은 중거리 미사일 탄두를 녹여 만든 펜으로 각각 서명했다. 1982년 무기감축 논의가 처음 제기됐을 때만해도 양측의 선전적 차원이 강했으나 국제환경의 변화, 특히 소련이 군사기술 경쟁에서 한계를 실감하고 군사투자를 경제건설에 돌려야 할 절박한 상황에 이르자 소련의 일방적이 양보끝에 이날 타결됐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협정 체결후 부시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오늘은 전 세계적으로 의미있는 날"이라며 "이로써 수년간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 논평했다. 부시 대통령도 "START협정을 통해 반세기에 걸친 군비증강의 역사를 역류시켰다"고 말한 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반세기에 걸친 불신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새 역사의 장을 연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의 조인을 계기로 양 강대국은 완전한 동반자의 시대를 개막했다.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에 서명함으로써 냉전시대는 종식되었으며 국제정치의 판도는 상호 공존을 바탕으로 재편이 불가피해졌다.
1989년 미국 유엔평화유지군 사령관 윌리엄 히긴스 피살
1987년 메카 유혈사태. 이란인 순례자 400명 사망
1980년 문공부, 정기간행물 172개 등록취소
정부는 1980년 7월 31일 사회정화의 일환으로 주간, 월간, 계간지 등 1백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했다.
등록이 취소된 간행물 중에는 기자협회보, 월간중앙, 씨알의소리, 뿌리깊은나무,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주간국제, 주간부산 등이 포함돼 있으며 서강타임스 등 대학간행물 등이 포함돼 있었다. 등록이 취소된 간행물은 유가지 1백20개, 무가지 52개 등으로 일간-통신을 제외한 전체등록 정기간행물 1천4백34개중 12%에 해당한다.
문공부는 정화대상 간행물들은 1. 각종 비리, 부정, 부조리 등 사회적 부패요인이 되어오거나 2. 음란, 저속, 외설적이거나 사회범죄, 퇴폐적 내용, 특히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에 유해한 내용을 게재해 왔으며 3. 계급의식 격화 조장, 사회불안을 조성해 왔거나 4. 발행목적 위반 내지 법정발행실적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지적, `신문 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8조에 의거, 등록을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신군부에 비판적이었던 잡지가 다수 포함돼 있어 언론탄압으로 비판받았다.
1980년 계엄사령부, 김대중 등 37명을 내란음모혐의로 기소
1972년 한국남자배구 뮌헨올림픽 아시아예선서 북한 제압
1969년 강원 화천 폭우로 산사태 사망 81명
1968년 연천 백학 아군 GP요원 4명이 관망대로 가던중 무장공비 8명과 조우, 교전 끝에 1명 사살 피해(전사 2명, 부상 1명)
1965년 영국 소설가 조앤 롤링 태어남
1965년 한일조약 비준 저지를 위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 결성
1964년 월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한국군부대의 해외파견동의안 국회가결
1964년 미국 레인저6호 달표면을 촬영한 4316장의 사진을 지구로 전송
1962년 정부, 언론정책 시행기준 10개 항목을 발표
1961년 태국-필리핀-말레이지아 3개국회의, 동남아연맹(ASA)설립 발표
1959년 조봉암 사형집행
죽산 조봉암이 예정보다 하루앞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전날 대법원의 재심청구 기각에 재심청구를 다시 제출하기로 변호사들과 결정한 상태였으나 이날 갑작스럽게 사형이 집행돼 가족들과 지인들을 비통케 했다. 검찰발표는 마지막 형장에 나선 조봉암이 "할 말은 없다"라고 말끝을 맺으면서 "마지막 물한잔을 달라"고 전했다.
조봉암은 1958년 1월 진보당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간첩혐의로 기소됐고, 그 해 7월 2일 선고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이듬해 2월 27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조봉암은 제3대 대통령선거에 진보당 추진위 후보로 출마해 총투표수 900여만표 가운데 216만여 표를 얻어, 보수 일변도의 당시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조봉암은 이 지지를 바탕으로 진보당을 결성한 뒤, 당시로서는 금기였던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 총선거안`을 주창했다. 이것이 탄압의 빌미가 되어 이승만은 진보당을 해체했고 정적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세웠다.
1958년 소련 흐루시초프, 중국을 방문 모택동과 회담
1957년 말레이시아 독립
1954년 이탈리아 등산대 세계 제2봉 K2 등정
1952년 일본 보안청 발족
1950년 나치스에 굴복한 벨기에 왕, 국민들의 반대로 퇴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가 1950년 7월 31일 퇴위했다. 2차대전 중인 1940년 5월, 레오폴드 3세는 독일에 대한 조기항복을 결정해 국민의 분노와 연합국의 불신을 샀다. 전쟁 중 독일의 포로로 억류됐던 국왕은 전쟁이 끝난 후 국왕으로 복위하려 했으나 국회는 이를 거부했다.
3월 12일 국민투표에 의해 가까스로 복위와 귀국을 승인받았지만 7월 1일에 50만명이 귀국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고, 26일에는 60명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유혈폭동으로까지 발전하자 혼란수습을 위해 국왕은 퇴위를 결정했다. 왕위는 미성년인 보드윈 왕자가 계승했다.
1950년 유엔안보리 한국 구호 결의안 채택
1949년 네덜란드-인도 정전협정 조인
1948년 이범석, 제1대 국무총리 취임
1948년 뉴욕국제공항(현 케네디공항) 개항
1946년 좌익학생단체에 대항하려 전국학생총연맹 결성(위원장 이철승)
1944년 생 텍쥐페리 실종
프랑스인이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자랑하는 생 텍쥐페리의 삶에서 비행기를 떼놓고는 온전한 이해가 불가하다. 첫 인연은 군복무 때 조종사 자격증을 따면서 맺어졌다. 첫 작품 `남방우편`(1929)과 대표작 `야간비행`(1931)은 제대후의 민간 항공조종사 경험을 살린 작품이다. `남방우편`에서는 주인공인 조종사가 사막에서 죽고, `야간비행`에서는 앞날을 예감이라도 하듯 어디론가 멀리 날아간 조종사와 지상 간의 교신이 두절된다.
2차대전 발발로 프랑스 항공부대에 복귀했으나 이듬해 프랑스가 독일에게 함락되면서 미국으로 탈출, 그곳에서 `전투 조종사`와 출세작 `어린 왕자`를 출간했다.
1943년에는 43세의 늦은 나이로 재입대, 자유 프랑스군 조종사로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됐다. 1944년 7월31일 오전8시30분, 생 텍쥐페리가 그의 고향 리옹 부근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의 이동을 추적하기 위해 정찰기를 타고 코르시카섬 미 공군기지를 이륙했다. 채워진 연료로는 6시간 만 비행할 수 있었다. 결국 오후 2시반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실종이 확인됐으나 지금까지도 잔해가 발견되지 않아 실종을 둘러싼 소문만 무성하다.
1932년 나치, 독일 총선거에서 제1당으로 부상
1932년 7월 31일 실시된 독일 총선거는 민주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선거결과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나치스)이 37.4%의 득표율로 230석을 차지해 제1당으로 부상했다.
선거기간동안 우익의 나치스는 좌익의 공산당과 치열하게 대립해 유혈사태까지 빚었으나 공산당도 89석을 차지해 좌우양당 모두가 승리한 선거가 됐다. 이번 선거결과는 예견된 것이었다.
4월의 대통령선거에서 히틀러는 비록 현직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패했지만 37%의 득표율을 얻어 자신만만해 있었다. 게다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구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았던 중도파 수상 하인리히 브뤼닝이 재정파탄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사임하고 후임에 파펜이 올랐다. 파펜은 이날의 총선거에서 패하자 11월 국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했으나 나치스당은 61석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제1당을 유지했다.
1925년 온 나라 큰 비 사망 행방불명 647명 가옥유실 파괴 10만 3,391호
1919년 독일 국민회의 `바이마르 헌법` 가결
독일공화국 국민회의가 1919년 7월 31일 찬성 262표, 반대 72표로 독일공화국 헌법을 가결했다. 신헌법은 국민회의가 개최된 지명을 따 바이마르 헌법이라고 불렸다.
바이마르 헌법은 국민주권을 권력의 유일한 기초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제를 채택한 획기적인 헌법이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도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파괴돼 위험에 처할 경우`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이 부여되었다. 이 조항으로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게 됐지만 이것이 후에 히틀러 독재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신헌법은 8월 14일에 공포, 시행됐다.
1917년 조선 국유철도 경영권을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 위탁
1914년 프랑스 정치가 장 조레스 피살
1914년 7월31일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反戰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가 29세의 광신적인 국수주의자에 의해 파리에서 피살됐다. 55세였다.
피살 전 조레스는 당시 프랑스 정부가 외교ㆍ군사적 동맹체제로 구축한 프랑스ㆍ영국ㆍ러시아 사이의 삼국협상에 반대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反제국주의 세력이 힘을 모아 유럽의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이 그에게 반감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굴욕적으로 패배해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은 복수의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레스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사회주의 운동과 정치를 이끈 인물이다. 1859년 상인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지식인의 산실로 불리는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26세의 나이에 무소속 의원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한 그는 중도좌파의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주의 정당 가운데 가장 온건한 독립사회당에 가입했다. 1904년, 뒷날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가 된 `뤼마니테`를 창간했고, 프랑스 사회당의 전신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를 결성, 의회의 부의장을 맡아 진보파의 유력한 지도자로도 활약했다. `드레퓌스 사건` 때는 드레퓌스를 옹호한 탓에 낙선했지만 1902년 다시 의회에 복귀, 이날 피살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1914년 러시아, 오스트리아 총동원령. 독일 러시아에 최후통첩
1912년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태어남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조칙 발표
1907년 7월31일 늦은 밤,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 비용절감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은 일주일 전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비밀각서에 의해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조칙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위조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일제는 대한제국의 군사ㆍ사법권의 무력화를 시도했고, 군대해산도 그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강행됐다.
8월1일 오전 10시, 서울 지역의 대한제국 군대가 영문도 모른 채 동대문 밖 훈련원에 소집됐다. 그리고 순종의 조칙이라며 군대를 해산한다는 발표가 전해졌다. 어느새 일본군은 우리 군대의 군모를 벗기고 계급장을 뜻어낸 뒤 해산을 종용하고 있었다. 이때 서대문에 있던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은 군대해산 소식을 듣고는 울분을 참지못하고 자결했다. 부대원들도 남대문으로 뛰쳐나가 일본군을 상대로 대한제국 군대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전투를 벌여 70여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봉기는 하룻만에 진압됐지만 이는 8월2일부터 예정돼 있던 지방 8개 진위대의 해산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해 전국적인 군대항전의 도화선이 됐다.
1896(조선 고종 33) 안동에 관립소학교 설립
1886년 헝가리 태생 피아노의 거장 리스트 사망
1877년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 축음기 발명
발명왕 에디슨이 1877년 7월 31일 축음기를 발명했다. 11월 미국 특허국에 특허권을 제출할 당시의 축음기 이름은 `토킹 머신`이었다. 글자 그대로 말하는 기계에 불과했다.
8월 12일 에디슨은 뉴저지에 있는 작업실에서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상최초의 녹음을 시도했다. 녹음한 내용은 자신과 친구들이 함께 부른 동요 `메리에게 작은 양이 한 마리 있었네(Mary Has a Little Lamb)`였다. 그러나 에디슨의 녹음방식은 왁스를 녹인 원통에 바늘로 기록하는 것으로 오늘날처럼 대량생산을 위한 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에디슨의 축음기는 1878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출품됐다. 그후 1888년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열린 헨델 페스티벌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이 에디슨의 축음기로 녹음됐다.
에디슨 이전에도 녹음기 발명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57년 프랑스 발명가 레옹 스콧이 포노토그라프라는 원시적 형태의 녹음기를 만들었다. 오늘날과 같은 평평한 원형 음반에 소리가 담긴 것은 독일 하노버 태생의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가 미국에서 음반 제작에 성공하면서부터다.
1875년 앤드류 존슨 미국 제17대 대통령 사망
1826년 미국 교육자 클라크(1826-1886) 태어남
1784년 백과전서학파의 디드로 사망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가 1784년 7월 31일 사망했다. 그는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1713년 유복한 가톨릭 장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디드로는 성직자의 길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가정 환경과 그에게 처음 교육을 시킨 사람들인 예수회 수도사들과 관계를 끊고 스스로 폭넓은 교양을 쌓기 시작했다.
1745년경부터 철학적인 저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철학적 에세이, 소설, 희곡, 미술비평, 연극론 등 다양한 장르의 저서들을 남겼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 것은 ‘백과전서’의 집필 때문이다. 과학아카데미의 J.R.달랑베르를 감수자로 하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J.J.루소 등 당시의 계몽사상가들을 총동원하여 1751년에 제1권을 내놓았고, 21년이 지난 1772년에 본문 17권, 도판(圖版) 11권의 전서를 완성했다.
이 ‘백과전서’의 내용은 종교·교회의 비판, 중세적 편견의 타파, 전제정치의 비판 등을 반영한 것이어서 도중에 수많은 탄압과 발행정지 명령을 받았으며, 1759년 이후에는 비밀리에 편집·인쇄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이 사업에 바쳤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함대 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