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무인기 한 대가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 지도자인 앙만 알-자오리를 타격해 살해
2021년 그리스 이상고온으로 전국 다발적 화재(산불)발생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파트라스 인근에서 산불이 발생하여 12채의 가옥이 불탔고 5명이 호흡기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 2명이 사망했다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약 210km 떨어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제리아 지역의 4개 마을과 해안 휴양지인 로그고스에서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그리스에서 산불이 가장 심각한 곳은 그리스에서 2번째로 큰 섬이자 관광명소로 아려진 아테네 북부의 에비아섬으로, 이미 2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대피한 상황이다. 에비아섬 주민들이 번져가는 산불을 피해 여객선을 타고 긴급 대피하는 등 많은 이들이 여객선을 타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번 산불은 최근 며칠간 45도 이상 고온기후로 인하여 전국에 다발적인 화재가 발생하여 전국의 수십개 도시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2018년 기상관측 사상 최고기온 갱신
2018년8월1일 오후 우리나라 기상관측 111년만의 역대 최고기온 기록이 새로 작성됐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강원도 홍천의 기온은 오후 1시 59시께 섭씨 40.1도를 기록한 뒤 오후 2시 1분께 40.3도로 올랐다. 오후4시 7분에는 41도로 올랐다
이는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역대 최고 기온이다.
이날 전국 지역별 온도는 강원 홍천 41.0℃(역대 최고기온) 경북 의성 40.4℃ 충북 충주 40.0℃ 서울 39.6℃(자동기상관측장비로는 41.8℃) 강원 춘천 39.5℃(자동기상관측장비로는 40.8℃) 경기 양평 39.5℃ 충북 제천 39.4℃ 경기 이천 39.4℃ 자동기상관측장비로는 경기 가평 41.6℃ 강원 횡성 41.3℃ 경북 영천 40.6℃ 이였다 우리나라에 현대적인 기상관측 장비가 도입된 건 부산·인천 1904년, 서울 1907년 등이다. 이후 전국에서 40도를 돌파한 적은 1942년 8월 1일 대구(40.0도)가 유일했다.
올해 여름 전까지 홍천에서 가장 더운 날은 1994년 7월 23일 38도였으나, 올 7월 22일 38.2도, 24일 38도, 28일 38.3도, 31일 38.5도를 찍는 등 기록적인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2010년 경북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 세계문화유산 등재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2010년 8월 1일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은 14-15세기 조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 사상을 잘 반영한 경관 속에 전통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유교 교육의 중심지답게 유교적 삶의 양식과 전통문화를 현재까지 잘 계승하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유씨(豊山柳氏), 경주 양동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모여 하는 씨족마을로, 하회마을은 16세기에 새로운 정주지(定住地)를 찾아 이주해 정착한 ‘개척입향(開拓入鄕)’의 경우이고, 양동마을은 15세기에 혼인을 통해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를 잡은 ‘처가입향(妻家入鄕)’을 대표한다.
하회·양동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된 명당이며, 마을 곳곳이 문화유산의 보고로 두 마을에서 보물로 지정된 가옥만 6건이다. 또한 하회마을에 있는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국보 132호)과 양동마을의 금속활자본 ‘통감속편(通鑑續編)’(국보 283호) 등 국보급 문헌자료도 풍부하다. 하회마을의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등 무형문화유산도 주목할 만하다.
2010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자문기구인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WHC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행정 구역이 다른 두 마을을 통합관리하는 체계가 없는 점 등을 우려해 ‘보류(refer)’ 결정을 내렸지만, WHC에서 이를 뒤집고 ‘등재’가 결정되었다.
2010년 유네스코 핵실험 비키니 환초를 세계유산으로 선정 발표
2009년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타계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코라손 아키노(Aquino·76) 전(前) 대통령이 암 투병 끝에 2009년 8월 1일 타계했다. 아키노 전 대통령은 16개월간 결장암과 싸워오다 최근 암이 간까지 전이돼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부유한 가문 출신의 평범한 주부였던 아키노 전 대통령은 1983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Marcos) 대통령 치하에서 야당 지도자였던 남편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의원이 군부(軍部)로 추정되는 세력에 의해 암살되자, 남편의 뒤를 이어 반(反)정부 지도자로 변신했다. 그는 남편을 대신해 ‘피플 파워’로 불린 비폭력 무혈혁명을 일으켜 당시 20년간 장기 집권한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 체제를 종식했다. 이후 독재자 마르코스와 부인 이멜다는 하와이로 도피했고 아키노는 1986년 필리핀 첫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당시 필리핀의 민주화 운동은 한국, 태국 등 주변국뿐 아니라 동유럽, 남미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민주화 혁명으로 집권한 아키노 대통령의 재임(1986~1992년) 기간은 결코 순탄치 않았고, 많은 군사 쿠데타에 시달렸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등 필리핀 민주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2006년 이승엽 통산 400호 끝내기 401호까지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이 한·일 통산 400홈런 기록을 달성했다.
이승엽은 2006년 8월 1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1회말 2사 3루에서 상대 선발 이가와를 상대로 선제 투런 홈런을 날렸다. 1995년 프로에 데뷔해 삼성에서 9시즌 동안 324개의 홈런을 친 이승엽은 2004년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반 만에 76개의 홈런을 더하며 통산 400고지에 올라섰다.
이승엽의 홈런 드라마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2-2 동점이던 9회말. 2사 1루서 타석에 선 이승엽은 다시 이가와를 상대로 4대2로 경기를 마감하는 통산 401호 및 시즌 33호 끝내기 2점 홈런을 터뜨려 홈 팬들을 열광시켰다.
2005년 사우디아라비아 파드 국왕 별세
사우디아라비아를 23년간 통치해온 파드 빈 압둘 아지즈 국왕이 1일 오전(현지 시각) 수도 리야드의 한 병원에서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파드 국왕은 지난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대부분의 국정을 동생인 압둘라에게 맡긴 채 상징적인 국왕으로 있으면서 투병 생활을 해왔다.
2004년 파라과이 쇼핑센터 화재 발생, 320여명 사망
2003년 1차 6자회담 열림
2003년 프랑스 여배우 마리 트랭티냥 사망
트랭티냥은 지난 1일 파리 부근의 한 병원에서 뇌출혈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트랭티냥은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서 TV 영화 ‘콜레트’를 촬영하던 중 지난 달 27일 현지 호텔에서 동거남인 록 가수 베르트랑 캉타(Cantat)에게 머리를 맞아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31일 프랑스로 돌아온 뒤 숨졌다.
프랑스식 애정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남과 여’의 주인공이었던 장-루이 트랭티냥과 여성 영화 감독 나딘 사이에서 태어난 트랭티냥은 6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을 뿐 아니라 연극과 시 낭송 활동에도 정열적으로 나선 예술가였다. 그녀는 특히 지난 1992년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영화 ‘베티’에서 알콜중독자 주인공을 맡아 탁월한 연기파 배우로서 명성을 굳혔다.
그녀는 페미니즘을 담은 TV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고, 최근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도 참여하면서 사회 의식을 실천하기도 했다.
그녀는 가수, 영화배우, 연극 연출가 등과 각각 사랑에 빠졌고, 3명의 남자들로부터 모두 4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를 때려 숨지게 한 것으로 알려진 록 가수 캉타는 최근에 사귄 애인이었다. 캉타는 리투아니아 경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술에 취한 채 말다툼 끝에 뺨을 때리기는 했지만, 이번 일은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했다.
2002년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아세안)-미국 반테러협정 체결
2001년 원로가수 고운봉 별세
`선창`의 가수 고운봉(81·본명 고명득)씨가 2001년 8월 1일 별세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칠순이 넘어서도 무대를 지키며 흐트러짐 없이 `선창`을 열창하던 고운봉씨는 한국가요 1세대 스타였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17세 때 가수를 꿈꾸며 30원을 훔쳐 무작정 상경, 1938년 태평레코드에서 노래 인생을 시작했다. 구성진 노래 솜씨로 악극단에 발탁돼 이듬해 `국경의 부두`로 데뷔한다. 1942년 발표한 `선창`은 일제 치하에 고통받던 대중들의 심경을 쓸쓸한 유랑자의 모습에 투영시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평생 부른 노래는 `홍등야곡` `남강의 추억` `백마야 가자` 등 200여곡. "국악만 해도 인간문화재가 있는데 대중가수는 좋을 때만 즐기는 소모품 정도로 여긴다"며 가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1990년대 말까지도 KBS `가요무대` 등에 출연하는 열정을 과시했다. 1998년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았다.
2000년 의약분업 본격 시행
2000년 지하철 7호선 전구간 개통
서울지하철 7호선이 2000년8월1일 오후 3시 이수역에서 개통행사를 갖고 6시부터 전구간 운행을 시작했다. 이날 개통식에는 민중미술가 임옥상씨 등 작가 15명이 꾸민 ‘달리는 미술관’ 전동차가 운행되었고, 3일까지 7호선 전구간에 걸쳐 무료운행이 실시되는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마련됐다.
개통열차로는 유명작가 15명의 작품이 설치된 ‘달리는 도시철도 문화예술관’ 차량이 운행되었다. 미술가 1~2명씩이 8량짜리 열차 한 칸씩을 전담해 ‘역사야 노올자’ 등의 특색있는 테마로 꾸민 이 열차는 9월까지 2개월간 7호선을 운행했다.
개통일인 1일부터 3일까지 7호선 전 구간이 무료로 운행되어, 도시철도공사 직원들이 7호선 각 역 매표소에서 2구간 승차권(600원 상당)을 무료로 나눠주었다.
한편 개통시점에 맞춰 광화문역, 김포공항역, 천호역, 이수역 등 5~8호선 지하철역 중 공연이 가능한 4곳에 상설무대를 만들어 ‘메트로 아티스트’로 선정된 아마추어 예술가 20여팀이 교대로 음악, 무용, 연극, 댄스, 패션쇼 등 각종 공연을 실시했다. 개통행사가 펼쳐지는 이수역에서는 도시철도공사 음악동호회인 ‘메트로매니아’의 공연이 열렸다.
1998년 대만 반체제인사 린이슝, 제2야당 민주진보당 주석에 취임
1997년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사망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83)가 1997년 8월 1일 프랑스 파리 발 드 그라스 육군병원에서 타계했다. 바오 다이는 지난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프랑스의 전 인도차이나 보호령인 안남의 황제로 제위했다.
본명이 구엔 빈 수이인 그는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인 지난 1925년 12세의 나이에 `바오 다이(위대한 자)`라는 칭호와 함께 구엔 왕조의 13대 황제자리에 올랐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계속했던 그는 19세 때 돌아와 `현대화`를 내걸고 의욕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바오 다이는 국민들로부터 독립, 개혁, 현대화의 열망을 한 몸에 받았으나 프랑스의 방해로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45년 3월 일본이 베트남에 진출하자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그 해 8월 일본군이 퇴각하고 호치민이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한 뒤 통치권을 빼앗겼다. 호치민과 프랑스에 모두 환멸을 느낀 바오 다이는 1946년 홍콩으로 건너가 쾌락에 탐닉, 플레이보이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1949년 프랑스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국가원수로 돌아왔으나 이미 정치에 뜻이 없었던 그는 국가통치는 뒷전에 두고 향락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대패한 이듬해인 1955년 고 딘 디엠 총리가 주도한 국민투표를 통해 영구 추방됐다. 그 후 40여년 간 줄곧 프랑스 남부도시인 칸의 별장에 칩거하며 사치스런 삶을 살았다.
1997년 러시아 피아니스트 리히터 사망
러시아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82)가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1997년 8월 1일 심장병으로 별세했다.
독일계로 우크라이나서 태어난 리히터는 달관의 연주, 고집스런 자기세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이었다.
1915년 우크라이나 지트미르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 겐리히 네이가우스 문하에 들어갈 때가 22살이었다. 길렐스 로스트로포비치 프로코피예프와 교유한 것도 이 무렵이었고,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소나타 6번을 초연하면서 모스크바에 데뷔했다. 30살 때 소연방 콩쿠르에 우승했고, 모스크바 음악원을 33살에 졸업했다. 그의 존재를 미국에 알린 것은 밴 클라이번과 에밀 길렐스. 45살(1960년)때 뉴욕 카네기홀 데뷔연주는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서방세계에 그의 명성은 레코드로나 전해질 뿐이었다. 독일에는 1971년 56살 때 데뷔했다.
1996년 고려대 박춘호 교수,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으로 피선
고려대 박춘호 교수가 1996년 8월 1일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박 교수는 해양법 협약에 가입한 102개국 중 1백개 협약 당사국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재판관 선거 1차 투표에서 3분의 2가 넘는 69표를 얻어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재판관이 받는 예우는 유엔 사무차장급이다. 국제해양법재판소는 1994년 발효된 유엔 해양법 협약에 근거해 1996년 10월 발족됐다. 이에 앞서 유엔은 지난 1982년 점증하는 해양분쟁의 틀을 잡기 위해 15년간의 작업끝에 전문과 부칙 4백50개조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바다에 관한 세계법`인 해양법을 만들었다. 해양법재판소는 이 법률을 만든 뒤 협약 가입국들이 법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상정해 강제수단으로 창설케 된 것이다.
1991년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
1991년 경찰청 발족
1991년 8월 1일 경찰청이 발족 했다
경찰청 개청식이 1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정원식 국무총리, 이상연 내무부 장관, 김원환 경찰청장과 경찰관계자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노태우 대통령은 정 총리가 대신 읽은 치사를 통해 “국립경찰 46년의 숙원이었던 경찰청의 출범으로 경찰은 막중한 임무와 방대한 규모에 걸맞는 기구와 조직을 갖추었다”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개청식이 끝난 뒤 정 총리와 김 청장은 경찰청사 앞 현관에서 현판식을 가졌다.
이에 앞서 김원환 경찰청장은 오후1시 경찰청 대강당에서 취임식을 갖고, “경찰청 독립은 국가와 국민이 요구하는 참다운 민주경찰로 탈바꿈하는데 의미가 있다”며 “단순히 외형적인 변신이 아닌 실질적인 체질 개선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는 각오로 창조적인 변화에 임해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경찰이 되자”고 다짐했다.
1990년 AFKN채널반환 결정 발표
1989년 전교조 가입 공립학교 교사 485명 직위해제
1988년 미국 참관 아래 소련 SS12 미사일 폐기 개시
1987년 한국-몰타, 국교 수립
1985년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학인 401인 시국선언
1984년 오트볼타, 4일부터 부르키나파소로 국명 변경 결정
1983년 국제자동전화 개통
1983년 24개국과 국제전화 자동화 개시
1983년 한국고대문화전, 동경 국립박물관에서 개막
1982년 케냐에 불발 군사쿠데타
1982년 전두환대통령, 태평양정상회담 실현 위한 5개항 원칙 제시
1981년 파나마 실질적 독재자 토리호스 사망
1981년 새 여권법 발효
1981년 해외여행 자유화 시작
1981년 미국의 24시간 음악방송 MTV 개국
미국의 워너 아멕스 새털라이트 엔터테인먼트사가 24시간 방송하는 유선TV방송 MTV(Music Television)를 1981년 8월 1일 개국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유선오락TV사인 워너 아멕스사는 3천만달러를 투입해 뮤직비디오, 인터뷰, 콘서트 등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48개주 250만 가구에 송출했다.
12세부터 34세를 대상으로 한 MTV는 폭넓은 시청자를 확보하려는 기존의 대형 TV방송국과 달리 시청대상폭을 좁히는 ‘Narrow Casting’을 지향했다. 개국 1년 만에 시청가구수가 3배로 증가했고 10년후에는 미국과 영국의 록음악을 위성을 이용, 세계각국에 송출했다.
MTV는 흑인 음악가를 소홀히 하고 남성 음악가를 노출이 심한 여성들로 둘러싸이게 하는 성차별의 비디오가 많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0년 국보위, 신원기록 일제정리와 연좌제 폐지 결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지금까지 많은 국민들에게 피해와 불편을 주어온 신원기록을 일제히 정리하는 한편, 연좌제를 폐지함으로써 국민화합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과감한 조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신원기록정리는 합리적인 기준에 의한 심사를 거쳐 신속히 진행될 것으로 발표했는데 주요 정리대상은 1. 6.25 당시 착오나 과장된 소문 등을 확인없이 기록한 내용 2. 적치하에서 생명보존책으로 부득이 부역했거나 그 죄질이 경미한 것 3.위의 두가지 기록이 있더라도 본인 또는 가족이 국가를 위해 충실하게 봉직하는 경우 4. 기타 기록에 있어서도 현재의 대공상 위해도가 약하다고 판단되는 내용 등이었다.
국보위는 이번 조처는 6.25 전란 중 불가피한 상황아래서 본의 아니게 저지른 경미한 과오, 또는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좌경입장에 있던 가족 친지 등 제3자와의 관계에 의해 등재된 기록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공사생활에서 불편과 불이익을 받아왔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7년 북한, 해상군사경계선 설정. 한국 부인성명
1976년 김해 국제공항 개항
1976년 양정모,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해방 후 첫 금메달 획득
제21회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경기가 열린 1976년 8월 1일 캐나다 몬트리올 모리스리처드 경기장. 한국의 양정모는 몽골의 강호 오이도프를 맞아 3라운드 한때 8대 6으로 앞섰지만 결국 8대10으로 역전패했다. 심판은 오이도프의 팔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오이도프는 고개를 푹 숙였고, 기쁨의 만세를 부른 것은 오히려 양정모였다. 양정모는 미국의 진 데이비스를 폴승으로 제압, 데이비스에게 판정패한 오이도프에게 폴패만 하지 않으면 우승이 확정되어 있었다.
양정모의 올림픽 첫 금메달 획득은 국가적 경사였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해방 31년 만의 쾌사요, 건국 28년 만의 개가요, 1948년 런던올림픽 처녀출전 이래의 숙망의 달성이요,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한 이후, 실로 40년 만에 맛보는 국민적 감격"이라고 흥분했다.
양정모는 1980년 은퇴 후 조폐공사 레슬링팀의 트레이너-코치-감독을 지내다가 1997년 퇴직했다.
1975년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 헬싱키선언 조인(몬트리올 시각-7.31/한국시각-8.01)
유럽의 모든 국가(알바니아 제외)와 캐나다, 미국, 소련 등 35개국 정상들이 참여한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가 1975년 7월 30일부터 헬싱키 핀란디아 홀에서 개막됐다.
이 회의는 동서 양진영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상태로부터 탈피, 긴장완화를 향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개막되어 참가국들은 회의 마지막날인 8월 1일 `헬싱키 선언`을 채택했다. 1973년 7월의 제1단계(외무장관 회의), 같은 해 9월부터 1975년 7월 21일까지의 제2단계를 통해 준비된 이 선언은 유럽의 안전보장에 관한 10원칙과 사람과 정보의 교류, 경제-과학-기술협력, 재검토회의 개최에 관한 4부로 구성돼 있다.
문서는 400페이지 길이에 무게만 3kg에 달했다. 조인식은 프랑스어 알파벳 국가명 순으로 행해졌는데 제일 먼저 조인한 사람은 서독의 슈미트 수상이었다. 86세의 유고 티토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조인한 후 회의는 오후 5시30분 폐막됐다.
1973년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의 최고실력자 울브리히트 사망
1972년 마이크로버스 의암호 추락사고, 25명 사망
1969년 장택상 전국무총리 사망
1967년 미국 루나비오터 5호 발사
1966년 시내버스, 승차권제 실시
1963년 국민의당 발족
1961년 중소기업은행 발족
1961년 서울시내 버스 차장 모두 여성으로 바꿈
1928년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여차장 10명 처음 고용, 1985년 없어질 당시 여차장은 전국 2-3만명 정도, 장시간(18시간)노동 저임금 몸수색 등 인권유린행위에 시달림
1960년 다호메국,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9년 미국, 국민당 정부와 대만방위협정 체결
1955년 제네바서 미국-중국 회담 개시
1950년 대구매일신문 창간 (남선경제신문을 개칭)
1950년 미국-대만 방위협정 조인
1946년 제주도(島), 도(道) 승격
1944년 바르샤바 시민 반소련 무장 봉기
1944년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손 사망
1943년 조선인징병제 시행
1943년 버마 독립선언
1943년 일본, 조선에 해군특별지원병 실시령
1942년 대구 40.0℃ 최고기온 기록, 66년 만인 2018년 8월 1일 강원 홍천 41.0℃
1941년 미국, 대일(對日)석유수출 전면 금지
1941년 미소경제원조협정 조인
1939년 부여박물관 개관
1936년 프랑스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태어남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
1000여명의 합창단이 당대의 거장 슈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행진곡에 맞춰 큰 목소리로 합창하는 가운데 나치 돌격대 수천명이 12만명이 운집한 베를린 경기장 안을 거위걸음으로 행진한다. 환영사에 이어 히틀러가 개회를 선언하자 스타디움에 들어선 제1회 아테네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루이스가 성화를 점화한 후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가져온 올리브 가지를 히틀러에게 건넨다. 1936년 8월 1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은 이렇게 개막됐다.
그리스로부터의 릴레이 성화봉송을 처음 채택해 개막식 분위기를 극적으로 고양시켰고, 레니 리펜슈탈에게는 기록영화 ‘올림피아’를 찍게 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정치쇼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차질을 빚었다. 100m 세계신기록을 포함, 200·400m계주·멀리뛰기에서 우승, 4관왕에 오른 미국 흑인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가 히틀러를 난감하게 한 주인공이었다. 히틀러는 오언스가 메달을 받을 때 분노한 표정으로 대회장을 떠났다. 한국인들에겐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올림픽으로 잊지 못할 대회였다.
1935년 중국 공산당, 구국항일통일전선 제창
1933년 시인 고은 태어남
1933년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 태어남
1927년 중국 공산당 최초의 대규모 전투 `남창기의(南昌起義)` 발발
중국 중국 공산당이 일으킨 남창기의(南昌起義)가 1927년 8월 1일 발발했다. 남창기의는 주은래를 중심으로 주덕, 엽정, 섭영진 등이 참여한 대규모 공농(工農) 홍군의 봉기였다.
당시 전투에 참가한 병력수는 약 2만에 달했다. 그때 남창을 지키고 있던 국민당 군 병력은 3000명에 불과했다. 초반의 승리는 기의(起義)군의 몫이었다. 병력도 우세했고, 사전계획과 작전도 치밀했고 지휘체계도 통일적이어서 남창시는 이내 기의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러나 남창 인근 무한과 남경 방면의 지원세력의 사정이 여의치 못한데다, 남창시를 에워싼 적의 규모 역시 기의군의 몇배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이었다. 결국 남창에서 철수하여 남하할 수 밖에 없었고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남창의기는 중국 공산당이 자체 병력으로 적과 대규모로 전투를 벌인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남창의기의 첫 총성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은 자체의 인민혁명군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자체 군대로 무장혁명투쟁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새로운 노선을 확고히 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이 날을 기념해 8월 1일을 건군 기념일로 삼고 있다.
1927년 경성무선국 완성, 통신 개시
1926년 한국 최초의 월간 종합지 `개벽` 강제폐간
1920년 김좌진-이청천, 대한의용군 조직
1914년 독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1911년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 설립
1908년 대심원이하 각급 재판소 개원
1907년 일제, 대한제국 군대 해산(7월31일 해산 조칙 발효, 8월1일 해산식)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하세가와 일본군 사령관은 한국군의 반발에 대비, 먼저 한국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케 한 다음 해산을 감행했다.
무장해제된 군대가 훈련원에 소집되어 해산식을 거행할 때 서울 시위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하고 이 소식이 각 부대에 전달되자, 제1연대는 물론 제2연대 병사들까지 병영사수를 외치며 무장봉기해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 사이에는 서울 시가전이 전개됐다. 해산된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항일의 불길이 일었다.
원주 진위대와 강화 분견대에서도 해산에 저항하며 봉기했지만, 이미 한국에 증파된 대규모의 일본군에게 진압될 수 밖에 없었다. 군대해산은 하루 전인 7월 31일 순종의 군대해산 조칙에 따른 것이지만, 실은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부속된 비밀각서에 근거한다.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1910년의 경술국치는 이미 예정된 수순에 불과했다. 이날부터 한달동안 해산된 군인은 모두 8천8백여명에 달했다.
1906년 미국-독일, 호혜관세조약 조인
1896년 독일, 민법공포
1894년 일본, 청에 선전포고로 청일전쟁 본격화
청나라에 대한 일본의 선전포고로 청일전쟁이 본격화됐다. 청일전쟁은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일본은 대륙진출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청국은 조선의 종주국임을 주장하여 다툼이 격화되던 중 조선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양국이 그 진압을 위해 출병함으로써 충돌하게 됐다. 근대적인 군비를 갖춘 일본은 아산과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과 대전, 청국 해군을 대파 시키고 육지에서는 성환에서 대승을 거둔 뒤 계속 북상, 평양과 요동을 거쳐 여세로 여순 위해위를 공략,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격멸했다.
이에 청군은 강화전권대사 이홍장을 파견해 화의를 요청, 이듬해 4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내용은 1.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파기 2.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섬 할양 3. 배상금 2억냥 지불 4. 통상상의 특권 부여 등이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열강의 중국분할이 본격 시작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시대의 막이 열렸다.
1876년 가뭄으로 곡식을 절약하기 위해 양조 금지
1834년 영국 노예해방 선언
영국 수상 찰스 그레이가 1834년 8월 1일 모든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총 75만에 달하는 노예를 해방한다고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노예를 해방하면서 노예소유주들에게 총2천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영국의 노예해방 선언은 10여년전부터 이어져 온 노예폐지운동과 산업혁명을 통해 노동자가 많이 필요했던 산업자본가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데 따른 것이었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윌버포스, 벅스턴 등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며 노예폐지운동을 벌여왔고 산업자본가는 노예를 해방시켜야 공장노동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이를 적극 지지했다
1648년 스위스,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
1646(조선 인조 24) 임경업 장군 세상 떠남
1439년 조선, 일식 발생
1430년 조선, 월식 발생
1429년 조선, 일식 발생
1420년 조선, 일식 발생
1401년 조선, 등문고(신문고)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