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중앙고등학교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164, 계동 1)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문 (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 )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기호학교는 중앙학교로 바꾸었으며, 1915년 4월 인촌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우리나라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 (雄遠, 높은 이상), 용성(勇聖, 강건한 용기), 성신 (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교훈(校訓)으로 삼아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이며, 1917년 12월 김성수의 백부(伯父 : 아버지의 맏형) 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교를 이전했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3.1운동을 계획했으며, 백두산을 상징 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 고보)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해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을 벌였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 하였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가 일어나 본관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이 본관이 바로 지금의 본관 건물이다
1941년에는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강당과 수위실을 세웠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교명을 바꾸었으며, 1939년에 일제가 무궁화 모표를 폐지 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모표를 바꿨다
1940년에는 당시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 로 '5인 독서회'를 조직했는데, 1941년 한 학생의 연락 편지가 일경(日警)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 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 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대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유산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고,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면 서 이 땅의 고등학교 가운데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 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그러나 지금은 없다)
♤ 은행나무
교문 옆에는 푸른 커다란 은행나무가 살포시 뿌리를 내렸다
높이 20m, 가슴둘레 3.1m로 무려 500여 년을 헤아리는 지긋한 나이를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오랫동안 숭상을 받아와 매년 가을에 오곡백과(五穀百果)를 차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중앙고등학교가 들어선 이후에는 학생들 등교길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그들을 응원한다
또한 1987년 천안 독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를 삼목이식하기도 했다
♤ 본관
원래 본관은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가 일어나 본관이 속절 없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첫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이 본관이 바로 지금의 본관 건물이다(사적 제281 호)
일제강점기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물의 하나이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있게 쌓아올렸다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 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풍긴다
♤ 6.10만세 기념비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 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해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황제의 대여(大輿)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운동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 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5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 보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동경(東京) 유학생인 송계백(宋繼白. 1896~1920)이 중앙학 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 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운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웠다
♤ 원파도서관(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본관을 약간 닮은 서구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으킨 원파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개원한 인문학박물관이 야심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인문학(人文學) 자료들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던 착한 박물관이었으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하듯, 결국 10년도 못채우고 문을 닫고 말았다
♤ 서관(西館)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자형 구조로 본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피부의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 소년군 창설과 6.10만세운 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쓰이고 있다(사적 제282호)
♤ 동관(東館)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지붕 포함하면 3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사적 제283호)
♤ 대강당(창립 30주년 기념관)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옛 숙직실 (3.1운동 기념관)
여기가 바로 1919년 당시 중앙학교 숙직실 자리로 처음으로 3.1운동을 계획하고 논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중앙고보 숙직실은 1917년 완공된 중앙고보 본관 동남쪽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1937년 9월 신본관이 완공될 때 같이 지어진 강당 자리가 중앙고보 숙직실 자리였다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다가 강당 북쪽에 3.1운동 기념관으로 복원되었다
기념관 뒤로 담장과 울창한 수목이 보이는데, 담장 너머는 동궐(東闕)이라 불리는 창덕궁이다
♤ 김성수는 2005. 2.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 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 된 이후, 대법원은 2017년 4월 김성수가 일제의 징병·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정·선동 했다며 그의 친일행위를 인정했다
이어 정부는 2018년 2월 김성수의 공적은 허위라 며 56년 만에 김성수의 서훈을 박탈했다
대종교 중광 터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70, 가회동 10-3)
대종교는 단군을 모시는 종교로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명맥이 끊어진 상태였다가 1909년 1월 15일 나철(羅喆) 등이 이곳에서 단군 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 을 거행한 뒤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 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로, 중광이라 함은 새로이 창교(創敎)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고 있었던 교단을 중흥하였다는 의미이다
1910년 8월 단군교라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민족종교의 교세확장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자 2대 교주 김교헌이 1917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총본산을 중국 간도(만주)지역 으로 본거지를 만주로 옮겨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일제의 갖은 보복을 당하면서도 꾸준하게 교세를 확장하여 왔으며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서울로 돌아왔다
미군정 때 대종교는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과 함께 5대 종단의 일원으로 등록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천주교를 포함한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었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 받았다
지금은 교세가 많이 약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 개천절 행사 발상지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29, 원서동 181)
1909년 대종교에서 음력 10월 3일을 환웅이 지상 에 내려왔다하여 개천절로 정하고 이곳에서 첫 행사 를치렀다
♤ 개천절(開天節)
개천절이 시작된 것은 국조단군을 모시는 대종교 에서 1900년 1월 15일 교문(敎門)을 다시 열면서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기리는 날로 정하여 경하식을 거행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개천절 행사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식민지배하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정부가 계승하여 음력 10월 3일에 지내던 행사를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지금의 개천절이 되었다
♤ 대종교(大倧敎 - 단군교檀君敎)
단군을 교조로 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이다
대종교의 자체적인 입장은 과거로부터 이어오다 백봉이 드러낸 한민족의 고유한 신앙을, 나철이 다시 복구(중광重光) 했다는 것이다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경전으로, 삼진귀일을 교리로 한다
흔히 단군을 '숭배'하는 종교라 오해받는데, 물론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신은 상제(上帝), 즉 하느님이다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 '한얼(한군의 정신)님'이라 부른다
즉, 민족의 뿌리에 위치, 따지고 보면 이 종교에서의 단군은 기독교의 예수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총본사는 서대문교 홍은동에 있고, 대종교의 교당을 '시교당'이라 부른다
교단을 대표하고 통괄하는 교주격 직위로 '총전교 (總典敎)'가 있다
1대 교주인 나철이 중심이 되어 1909년 음력 1월 15일, 오늘의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오기호 등 발기인 10명과 함께 모아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 으로 개창한 것을 시초로 본다
1910년 8월 1일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훈모를 중심으로 한 일부 신도가 단군교 교명의 고수를 명분으로 삼아 분립하였다
일제는 1911년 종교취체항으로 민족종교를 탄압 하기 시작, 대종교 교단 지도부는 국내에서의 할동 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14년 아예 북간도 화룡현 청호로 총본사를 옮겼다
1916년 음력 8월 15일에 교주 나철이 대종교 성지인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본의 폭정에 통분하여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후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었다
김교헌 시기에 대종교는 종교조직으로서 체계가 갖춰지기 시작한다
대종교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항일 무장투쟁으로, 1920년 청산리대첩에 가담했던 북로군정서군이 바로 대종교가 양성한 조직인 대한군정부의 이명 (異名)이다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서일, 현천묵,김좌진, 이범석 등이 있고, 장병들은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인이었다
독립전쟁사에 기록된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의 실질적인 지휘부는 대종교였다
이상설, 김좌진, 홍범도,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이상용, 김동삼, 이범석 등 애국지사들이 그들이었 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정인보를 비롯해 김두봉, 이극로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김두봉은 1916년 구월산에서 나철이 순교할 때 시봉하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섰고, 환국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대종교의 지식인들이 정부의 고위관리로 입각 해 활동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 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
홍익대, 단국대, 경희대 등이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듯이 대종교 역사 자체가 교육과 독립운동이었다
♤ 대종교와 관련 있는 대학
- 국학대학
초대 이사장 집안부터 초대교장, 초대학장 위당 정인보까지 모두 대종교 관련 인물이었다
물론 대종교 교단차원의 설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종교측 자료에는 홍익대학과 함께 교단내의 대표적 교육기관 설립이라고 되어 있다
이후 1967년 우석(友石)대학교에 흡수되어 없어졌 고, 그 우석대학교도 1971년 고려대학교에 흡수되 어 사라지고 만다
(전북 완주군과 충북 진천군에 분산 위치되어 있는 현재의 우석又石대학교와는 다른 대학이다)
- 홍익대학교
학교명 부터가 단군의 홍익인간에 따온 것이다
대종교 지도자였던 독립운동가 이흥수가 사재를 출연 재단법인 홍익학원으로 1948년 8월 설립되 었으나 친일 정치권력의 강압 등으로 인하여 재단이 바뀌면서, 1960년대 이후로는 대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단국대학교
학교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장형이 1914년 대종교에 입교,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를 지낸 교단의 원로급 인사이다
단국이라는 교명도 단군과 애국을 뜻한다
- 신흥대학(경희대학교 전신)
1911년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이어 1947년 설립된 신흥대학의 설립자인 초대 부통령 이시영 역시 대종교의 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으로 도 선출되었던 대종교 원로급 인사였다
1960년 경희궁에서 이름을 따와 경희대학교로 개칭하였다
♤ 나 철(羅喆)
1863.12.2(음) 전남 보성군 금곡부락(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나용집(羅龍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5.12.30(음)일 밤에 서대문역 앞에서 단군교 (檀君敎)에 입교(入敎)하였다
자는 문경(文卿)이고 호는 경전(耕田, 혹은 經田) 이다
본디 이름을 두영(斗永)이라 하였으나, 과거와 벼슬길에 오르면서 인영(寅永 혹은 仁永)을 사용 하여 인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09년 대종교를 중광(重光)할 당시, 외자인 철(喆) 로 개명했고 호를 홍암(弘巖)이라 바꿨으며 당호(堂號)를 일지당(一之堂)으로 하였다
1909. 1.15(음)[47세] 단군교(대종교)를 중광(重光
: 다시 일으킴)하고「단군교포명서」를 발행하였다
1910. 8. 5(음)[48세] 단군교를 전래의 교명인 대종 교로 개칭하였다
1916년 8.15(음) 구월산 삼성사에서 고유의 제천 의식인 선의식(襢儀式)을 거행한 후 유서를 통해 김교헌에게 교통(敎統)을 전수하고 순명(殉命)하 여, 11.20(음) 유언에 의해, 백두산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봉장되었다
♤ 1907년 홍암 일행이 을사5적 처단을 위해 의혈 지사들을 모집하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해왔고, 이들은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거액의 거사 자금을 모아 의거에 나섰고, 의거는 비록 실패로 돌아가 홍암이 유배 10년형을 선고받는 등 법적 처벌을 받았지만 장거 소식은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0년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로 유배 갔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풀려난 홍암은 마지막 4차 항일 외교를 마치고 돌아와 1909년 단군교를 중광 (重光, 다시 일으켜세움)하게 된다
항일외교와 을사5적 처단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 간 뒤의 결단이다
현상윤 집터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98, 가회동 1-35)
납북되기 전까지 살면서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와 '조선사상사(朝鮮思想史 - 미 출판)'를 집필(執筆) 저술(著述)한 곳이다
♤ 현상윤
189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고 1913년 보성학교를 졸업했다
3·1운동 당시 48인으로 피검되었으나 1920년 10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고, 1932년 5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재 취임했다
1934년 3월에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를 맡았다
중일전쟁 이후 친일단체 활동과 강연뿐만 아니라 언론매체에 많은 친일 글을 기고해 전쟁협력을 강조했다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다수 기고하고 국민정 신총동원조선연맹 간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을 지낸 사실이 발견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 어 있다
그러나 창씨개명은 끝까지 거부했다)
해방 후인 1946년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 하였다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인가되면서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월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던 도중 9월 15일에 미군의 폭격 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유해는 재북 인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 대한민국 최초의 박사 학위로 잘못 알려져 있다
고려대에서 학위 수여를 결의하고 문교부의 승인을 받은 것은 1952년 12월 31일이지만, 이미 1952년 4월 26일 서울대학교 학위수여식(졸업식)에서 전풍진 등 6명에게 이학박사(3명), 의학박사(1명), 문학박사(2명) 학위가 수여되었다
같은 날 동시수여되었으나 학위번호가 1번으로 가장 빠른 전풍진 박사가 대한민국 1호 박사 타이틀을 갖고 있다
♤ 차남인 현인섭(玄寅燮)의 3남 현재현(玄在賢) 은 동양그룹 창업주 이양구의 장녀 이혜경(李惠卿) 과 혼인하였고, 1989년 장인이 타계하자 동양그룹 회장직에 취임했다
첫댓글 제 지인 중에 중앙고등학교 출신이 여럿 있습니다. 배재, 경기, 휘문, 보성은 모두 강남이나 송파로 옮겼는데 중앙은 굳세게 견딘 것이 신기합니다. 어느 분 자제가 다녀서 그런 것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더 눈이 반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