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앞에서 바라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왕의
옥좌(보좌)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인
조선국왕의 어보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
숙종 어필각석 龍자
숙종 어필각석 龍자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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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수원화성 행차를
묘사한 그림
규장각 서가 재현물
동궐도에 보이는
창덕궁과 창경궁
동궐도에 보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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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곤룡포
영친왕비 적의
영친왕비 적의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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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황가 가족의 방을
재현한 공간
순종 황제의 어차(좌)와 순정효황후 어차(우)
순정효황후 어차
순종 황제의 어차
순정효황후 어차
고종 황제의 어진
황제를 상징하는 색인 황색
조선 황실 궁궐 내부 모습
조선 황실 궁궐 내부 모습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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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이 사용하던 가구
대한제국 황실이 사용하던 가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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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식탁과 식기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식탁과 식기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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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이 일본에서 일시 귀국했던 1918년에 찍은
조선황가 사진
(좌로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의
사진
물시계
물시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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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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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보는
천상열차분야지도
해시계
왕실 잔치상
왕실 잔치상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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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를 맞이하는 절차
왕가가 행차 때 탔던
정식 가마인
연
왕가가 장거리 행차 때 탔던 가마인
가교
가교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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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신실
종묘 신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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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기 중 하나인
어
타악기 중 하나인
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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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기 중 하나인
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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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서화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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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서화
궁중서화
연잎 모양 큰 벼루
연잎 모양 큰 벼루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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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에서 사용했던
기명절지도 병풍
기명절지도 병풍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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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의
층별 시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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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앞에서 바라본
북악산(좌)과 경복궁(우)
경복궁역 복도에 전시 중인
조선왕실이 사용한 보자기
영상물
경복궁역 복도에 전시 중인
조선왕실이 사용한 자개
영상물
경복궁역에 있는
창덕궁 후원의 불로문
재현물
2024년01월25일(목요일) 서울 [종묘&탑골공원&조계사&경복궁&국립고궁박물관] 탐방기 10:56~11:16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종로3가역 11번 출구로 나옴 [20분 소요] 11:16~11:20 서울 종로구 종로 157 번지에 있는 종묘 매표소로 이동하여 종묘 관람권 구입 [종묘 관람요금 : 1천원] 탐방지 : 서울 종묘(宗廟) [종묘(宗廟) 박석의 삼도를 따라, 왕의 혼을 따라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종로 155 휴관일 : 매주 화요일 휴관 ※화요일이 공휴일(대체공휴일 포함)일 경우에는 개방하며, 그 다음날(비공휴일)이 휴관일입니다. 가는 법 지하철 1·3·5호선 종로3가역 11번 출구. 간선버스 100, 103, 143, 150, 160, 201, 260, 262, 270, 271, 273, 370, 601, 708, 710, 720, 721번, 지선버스 0212번, 마을버스 종로12번 종로4가 종묘 하차 사이트 http://jm.cha.go.kr 이용 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3~10월 평일), 오전 9시~오후 4시 30분(11~2월 평일) 목차 종묘광장공원, 그 비밀의 문 바람과 함께 지나는 왕의 영혼 자유와 형식의 걸음이 새로워라 종묘 살펴보기 종묘의 길은 여느 왕의 길과는 다르게 비스듬하다. 바닥에는 잰걸음에 시비를 거는 박석이 깔렸다. 부러 먼 길로 이끌거나 느닷없는 지름길이다. 길과 건축은 그리 사람의 걸음을 간섭한다. 그러므로 길의 물음에 걸음이 답한다. 종묘의 비밀스런 가르침이다. 종묘광장공원, 그 비밀의 문 종묘는 종(宗)의 묘(廟)라 했다. 왕들의 잠든 혼을 모시는 사당. 조선의 시작은 종묘와 사직단이었다. 종묘는 조상에게, 사직단은 신들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궁궐에 앞서 종묘와 사직단을 지었다. 조선왕조 철학의 근간인 유교 문화의 상징이었다.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왕가의 제의 성전. 유교는 사람이 죽은 후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된다 여겼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에 모셨다. 종묘는 왕과 왕비들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이었다. 사계절의 첫날과 섣달에 다섯 차례 정기적으로 제례를 지냈다.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도 제례를 지냈다. 종묘는 다시 크게 신주를 모시는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제를 준비하는 공간들로 나뉜다. 정전은 태조 때 일곱 칸으로 창건됐다. 네 개의 칸에 태조의 4대조(추존왕)까지 모셨다. 하지만 세종 때 이르러 일곱 칸이 모두 차자, 서쪽에 영녕전을 세웠다.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실 네 칸과 좌우 협실로 지어졌다. 이후 왕조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정전과 영녕전을 확장했다. 정전은 세 차례에 걸쳐 네 칸씩 확장해 오늘의 열아홉 칸에 이른다. 서쪽이 상위로 태조를 모신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확장했다. 영녕전 역시 두 차례 확장해 현재 열여섯 칸에 이른다. 정전과 달리 좌우로 확장했다. 정전에는 비교적 공덕이 있는 왕을 중심으로,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세자에 책봉된 후 죽은 추존왕이나 어린 나이에 운명한 왕들을 모셨다. 각 칸은 안쪽부터 신실·협실·월랑으로 구성된다. 정전과 영녕전은 폭 3미터의 칸들이 칸칸이 붙어 수평적 위용이 장엄한데 안쪽으로 스며드는 그 깊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약 10미터에 달한다. 단순한 깊이만이 아니다. 그 자체가 제례로 다가서는 마음의 자세와 순서를 담는다.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이지만 그 가치는 낮아지는 데서 나온다. 화려하지 않지만 평온하고 평온하지만 가볍지 않다. 길은 아비가 아들을 어르듯 세세한 가르침으로 왕의 걸음을 이끈다. 서두르지도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그 단정한 매무새의 길을 시간이 지나 후대가 다시 걷는다. 첫걸음은 종묘광장공원이다. 탑골공원에서 이어진 어른들의 쉼터다. 그 나른한 오후를 지난다. 벤치에는 상체를 기울여 앉은 『삼대』의 소설가 염상섭의 동상이다. 그는 종로에서 태어났다. 동상의 좌우에는 노인 두 분이 친구처럼 양팔을 걸었다. 한 편의 소설 같은 풍경이다. 노인들의 하루, 그 종일이 머무는 땅. 백발이 성성한 그들은 그곳에서 웃고 숨 쉰다. 많은 이들이 종묘의 밖에서 종묘를 가늠한다. 하지만 서로 기대고 나누는 삶의 쌈지를 어찌할까. 유교의 으뜸이 효(孝)와 경(敬)이고 보면 종묘 앞 노인들의 무리지음이 괜스럽지 않다. 혼의 사당 종묘의 곁이 우연 같지 않다. 그러니 종묘광장공원의 풍경을 품지 않고서는 그 거대한 비밀의 문은 열 수 없다. 바람과 함께 지나는 왕의 영혼 모두를 말에서 내리게 만드는 하마비(下馬碑)와 왕의 우물인 어정(御井)을 지난다. 외대문(外大門)이 맞는다. 종묘의 정문이다. 홍살로는 왕들의 영혼이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는 길이 곧 영혼들의 행로다. 단청은 화려하지 않으며 외대문의 전체 형상도 지극히 검소하다. 제례의 공간을 대변한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모든 풍경들이 그러하리라. 외대문은 조선시대에는 3단의 계단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계단 높이와 평행한 도로가 났고 계단은 소실됐다. 단이 없는 걸음이 외대문 아래를 통과한다. 곧장 북쪽을 향해 길게 뻗은 주도로다. 삼도(三道)다. 세 가지 길은 하나로 어울려 주도로를 이룬다. 가운데의 높은 길인 신향로(神香路)는 신의 길인 신로(神路)와 향(香)·축(祝)·폐(幣)를 들여오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길이며, 왼편은 세자의 길(世子路), 오른편은 왕의 길(御路)이다. 왼편이 오른편보다 상석이나 신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랐다. 신로와 어로는 각각 역대 왕실의 신주를 모신 정전(正殿)의 신문과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불리는 재궁(齋宮)의 남문을 향한다. 신은 정전 안 월대(月臺)의 신로를 따른다. 왕과 세자는 어숙실에서 목욕재개 후 제례를 위한 준비를 한다. 다시 서협문(西夾門)을 나서서는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서 신들과 만나 제를 진행한다. 길은 제를 맞는 마음의 자세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듯하다. 정전과 영녕전(永寧殿), 어숙실과 향대청(香大廳) 등에 이르는 진입로는 직선로의 끝에 위치하지 않는다. 평행과 직각으로 열리지도 않는다. 비껴서듯 정전의 모서리를 향해 사선으로 잇는 길에서 가지를 치듯 다시 열린다. 정전 역시 정면이 서남향에 가깝다. 정전과 영녕전의 축도 완전한 평행을 이루지는 않는다. 길과 건축의 배치는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다. 자연에 순응하고 그 기운을 받는다. 모퉁이를 돌 듯 어숙실로, 정전의 신문으로 잇댄다. 지름의 길인 듯 가로지르지만 또 숨을 죽여 방향을 튼다. 제례의 긴장감이 따른다. 그 엄숙함은 발끝에서 한층 도드라진다. 길에는 부러 표면이 거친 박석을 깔았다. 걸음이 편치만은 않다. 위태롭게 내딛게 되므로 조심스럽다. 경박할 수도, 서두를 수도 없다. 자연스레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그 걸음을 위로하는 것이 사선의 지름길이다. 어긋나듯 서로를 보듬는 길의 원리. 그렇게 이른 정전 마당의 단 위에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의 월대가 펼쳐진다. 지상 1미터 위다. 중앙으로는 상월대를 향한 신로가 났고 기단 위에 신위를 모신다. 태조와 태종·세종 등 49위의 신위가 열아홉 칸 안에 자리한다. 좌우에는 두 칸의 협실과 다섯 칸의 월랑이다. 그 안에서 신실·협실·월랑의 순으로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를 달리해 위계를 반영했다. 영녕전은 정전에 신위를 모실 공간이 부족하자 세종 때 새로 지은 별묘다. 정전과 비슷한 구조이나 중앙부 네 칸을 솟을지붕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문종과 단종 등 34위의 신위를 모셨다. 자유와 형식의 걸음이 새로워라 종묘의 문화는 중국을 따랐지만 정전과 영녕전의 건축 양식은 독창적이다. 우리만의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가치가 탁월하다. 간결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수직이 아닌 수평을 지향한다. 땅과 나란하므로 안정감이 있다. 날 수 없는 사람의 걸음은 늘 수평과 친숙하다. 느릿하게 걸으며 시간을 가로질러 눈으로 건네는 대화들. 왕이 사라진 시대에 옛 임금은 말없이 인자하다. 하지만 단으로 이루어지므로 신전의 위엄을 잃지 않는다. 이제 종묘에서 정해진 걸음이란 없다. 매해 5월 첫째 주에 제례를 지내지만 그날을 제외하면 누구든 자유로이 넘나든다. 왕과 신의 걸음은 여전히 삼도를 따라 열고 닫히며 옛 흔적을 전한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 길의 차례만을 따르지는 않는다. 풍경을 따라 제 걸음을 걷는다. 그러다 다시 삼도의 흔적과 만나 옛 사람의 걸음을 흉내낸다. 이제 종묘의 길은 형식과 무형식의 틀을 넘나들며 다져진다. 종묘의 전각들 주변을 야트막한 구릉이 둘러안는다. 사당의 신성한 기운을 위해 태종이 조성했다. 지금은 그 길의 그늘과 그 길의 단풍이 깊다. 종묘의 삼도는 그 틈새로 들고나며 전각과 길을 잇고 다시 전각과 사람의 걸음을 떼어놓는다. 옛 제례의 행로다. 그 숨길마다에 나무는 따로 또는 무리지어 들고난다. 그것이 절묘하다. 걸음이 놀라 멈춘다. 전각의 흐름과 조화로운 자연의 배치다. 삼도는 그 길에서 다시 박석으로 급한 마음을 잡아두고 사선의 길로 시선을 끈다. 수평의 전각은 높이 치솟아 풍경을 해하지 않으므로 조화롭다. 그러므로 또 종묘의 길은 가능하다면 그 의미를 한번쯤 되새기고 걸을 일이다. 왕이 없는 시대에 누구도 왕가의 형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길이 간직한 의미를 알고나면 미로 같고 비밀 같던 길들과 대화할 수 있다. 옛 왕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릴 게다. 그때 비로소 마음도 놓고 욕심도 지운 채 느리게 걷는다. 어느덧 종묘는 그 전체의 틀로써 하나의 제기(祭器)가 된다. 자연과 전각과 사람이 어우러져 서로의 감성을 교류하므로 성대한 제례가 이루어진다. 그 사이로 정전 악공청에서 흐르는 종묘제례악이 울린다. 비디오의 영상이지만 사계절 끊이지 않으므로 족하다. 여전히 그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유산이다. 단박에 알 수 없는 세심한 길의 비밀들. 그 앞에 겸손하고 소박한 걸음. 옛 왕의 걸음도 그러했겠지. 가만히 그 뒤를 좇는다. 낮아져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걸음이다. 그러니 종묘광장공원을 너머 종묘의 길을 거닐어보라 권하고 싶다. 거니는 그 길 위에 옛 왕의 혼이 안위하듯 떠도는 듯 할 것이다. 종묘 살펴보기 외대문(外大門) : 종묘의 정문.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함. 정문 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음. 망묘루(望廟樓) : 향대청 남쪽에 위치하며, 제향(祭享) 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는 곳.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공민왕 신당 : 망묘루 동쪽에 있는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함. 향대청(香大廳) : 종묘에 사용하는 향(香)·축(祝)·폐(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 재궁(齋宮) : 임금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 정전 동남쪽에 위치.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함.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御齋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던 어목욕청이 있음. 공신당(功臣堂) : 조선 왕조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곳. 칠사당(七祀堂) : 인간의 삶과 생활에 관여하는 일곱 신을 의미하는 칠사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 정전(正殿) :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신 곳.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함. 정전 수복방(正殿 守僕房) : 종묘를 지키고 제사를 돕는 낮은 계급의 관리나 노비가 지내던 곳. 전사청(典祀廳) : 제례 때 사용하는 그릇이나 물건, 운반기구 등을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하던 곳. 제정(祭井) :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 정전 전사청 동쪽에 위치. 영녕전(永寧殿) : 조선 태조의 선대 4조 및 종묘의 정전에 봉안되지 않은 조선 역대 왕과 그 비(妃)의 신위(神位)를 모신 곳. 정전 악공청(正殿 樂工廳) : 종묘제례시에 주악하는 악사들이 대기하거나 연습하던 곳. 영녕전 악공청(永寧殿 樂工廳) : 종묘제례시에 주악하는 악사들이 대기하거나 연습하던 곳.] [종묘 관람안내 종묘의 신성함과 정체성 유지를 위해 입장 시간의 제한이 있는 시간제관람과 자유롭게 입장하여 관람할 수 있는 일반관람으로 나뉩니다. 청소년단체(50명 이상)는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하셔야 합니다. 시간제관람 종묘는 언어권별로 정해진 시간에 입장하여 문화재해설사와 함게 하는 관람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월·수·목·금) 문화재 해설 동영상 촬영 및 음성 녹음은 반드시 해당 문화재 해설사의 사전 동의가 필요합니다. 해설시간(월·수·목·금·일, 문화가 있는 날) 종묘관리소의 시간제관람의 각 언어별 입장시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국어 9:20 10:20 11:20 12:20 13:20 14:20 15:20 16:20 (3월~9월 16:40) 청소년단체 10:40 12:40 13:00 14:40(홈페이지 사전예약 필수) 영어 10:00 12:00 14:00 16:00 일본어 9:40 11:40 13:40 15:40 중국어 11:00 15:00※ 일요일과 문화가 있는 날에는 청소년 단체 해설이 없습니다. 일반관람 일반관람일 : 토·일, 공휴일, 문화가 있는 날(매월 마지막 수요일) 토요일과 공휴일에는 국어 해설만 5회 있습니다.(10시, 11시, 13시, 14시, 15시) 일요일과 문화가 있는 날에는 시간제관람 해설시간과 동일합니다.(청소년 단체 해설은 없음) 관람 시간 : 오전 9시~오후 5시(3~10월 평일), 오전 9시~오후 4시 30분(11~2월 평일) 관람요금 대상 관람요금 통합관람권(종묘·4대궁) 비고 내국인(만 25세 이상, 만 64세 이하) 외국인(만 19세 이상 , 만 64세 이하) 1,000원 10,000원(구입일로부터 3개월 유효) 단체할인 없음 내국인(만 24세 이하, 만 65세 이상) 외국인(만 18세 이하, 만 65세 이상) 무료※ 종로구 주민 50% 할인(관련 증빙 제시) ※ 문화가 있는 날은 무료입장입니다. 관람정보 1회 관람인원은 최대 200명이며,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을 해주십시오. 10인 이상 단체가 예약없이 오시면 입장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50명 이상 청소년단체는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을 하셔야합니다. 예약하신 분은 관람권 구매 시 예약확인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장에서 관람권(예약 후 잔여분 + 현장 판매분)을 구매 하실 수 있습니다. 외국어 해설 시간에는 외국인을 동반하지 않은 내국인은 참여할 수 없습니다. 문화재 해설 동영상 촬영 및 음성 녹음은 해당 문화재 해설사의 사전 동의가 꼭 필요합니다. 단체 해설 예약은 별도 해설이 아니며, 해당 시간의 다른 개별 관람객과 함께 참여합니다. 해설은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므로 초등학교 저학년 및 미취학 아동은 반드시 보호자의 관람 지도가 필요합니다. 통합관람권을 구매하시면 종묘 및 4대궁(경복궁, 창덕궁(후원 포함), 창경궁, 덕수궁)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탐방코스: [종묘 외대문~망묘루~공민왕 신당~향대청~재궁~공신당~칠사당~정전(국보 제227호)~정전 수복방~전사청~영녕전(보물 제821호)~영녕전 악공청~정전 악공청~ 종묘 외대문] 탐방일 : 2024년01월25일(목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종로3가 : 최저기온 영하 10도C, 최고기온 0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2분 소요) * 11:20~12:22 종묘 외대문(宗廟 外大門)에서 탐방출발하여 [종묘 외대문~망묘루~향대청~재궁~공신당~칠사당~정전(국보 제227호)~정전 수복방~전사청~영녕전(보물 제821호)~영녕전 악공청~정전 악공청~종묘 외대문]의 동선으로 종묘(宗廟)를 탐방 로 이동 [종묘(宗廟) '창엽문(蒼葉門)의 유래' 우리 조상들은 조선의 敗亡시기를 알고 宗廟의 정문을 작명했던 것일까? ■ 宗廟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宗廟의 정문을 창엽문(蒼葉門)이라 하는데, 鄭道傳이 작명했다는 설과 無學대사가 작명했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한다. 종묘 외대문의 원래 명칭이 창엽문이다. 漢字풀이로 蒼葉門은 ‘푸른 잎의 문’이다. ‘조선왕조가 무성하게 번창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蒼葉門의 漢字를 파자(破字) 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재야 학자들의 분석). △ 蒼자를 破字하면 <十十, 八, 君>이 된다. 合字하면 스물여덟 임금이 된다. 현재 宗廟의 위패가 모두 28위(位)이다. 마지막 왕손 李玖를 끝으로 조선 왕조는 28세(世)로 끝났다. △ 葉자를 破字하면 <十十, 世, 木>이 된다. 이를 모두 合字하면 20代가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조선왕조 왕계도를 보면 代數가 20代이다. 이와 함께 창(蒼)은 14획이고 엽(葉)은 13획으로 합이 27획인데, 이것이 조선왕조가 27대 순종까지 이어짐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과연 우리 조상들은 조선의 敗亡시기를 알고 宗廟의 정문을 작명했던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훨씬 깊고 넓다는 생각이 든다.] [종묘 망묘루(宗廟 望廟樓) 요약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종묘에 있는 건물이다. 망묘루(望廟樓)는 제향(祭享) 때 임금이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종묘사직과 백성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처음 보이는 건물로, 향대청 남쪽에 있다. 건물 중 한 칸은 다락처럼 높은 누마루이며, 맞배지붕의 소박한 다른 종묘 건물과는 달리 누마루 쪽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망묘루 옆에는 세종 25년(1443년)에 만든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 향나무가 있다.] [종묘 공민왕신당(宗廟 恭愍王神堂) 요약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의 종묘(宗廟)에 있는 별당(別堂)이다.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고려의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을 위하여 건립한 별당으로, 종묘를 창건할 때 함께 세워졌다. 망묘루(望廟樓)와 향대청(香大廳) 사이에 있다. 신당 안에는 중앙의 벽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함께 그린 영정(影幀)이, 옆면의 벽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른 전각들과 함께 재건되었다.] [향대청(香大廳) : 향대청은 제향에서 올리는 향과 축문, 예물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종묘제사가 있을 때는 헌관들이 제사에 참여하기 전에 기다리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은 임금이 직접 제사를 올리는 친향이냐, 그렇지 않은 섭향이냐에 따라 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한 명의 제관이 모든 신실에 절을 올려야 해서 나중에는 무릎이 바닥에 너무 많이 부딪혀 피가 고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종묘 재궁(宗廟 齋宮) 요약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의 종묘(宗廟)에 있는 재실(齋室)이다. 어재실(御齋室) 또는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임금이 제향(祭享)할 때 세자와 함께 머물면서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으로 들어가 망묘루(望廟樓)와 공민왕신당(恭愍王神堂), 향대청(香大廳)을 지나면 있다. 뜰을 중심으로 북쪽에 임금이 머물던 어재실이 있고,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으며, 서쪽에 임금이 목욕을 하던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임금은 제사를 올리기 3일 전부터 매일 목욕재계를 하고, 하루 전에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제사 당일에 임금과 세자는 서문(西門)으로 나와서 각각 어로(御路)와 세자로(世子路)를 따라 정전의 동문(東門)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공신당(功臣堂) 건립시기 : 1395년(태조 4) 성격 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2-1 요약 : 조선시대 종묘의 묘정에 건립한 배향 공신의 위판을 모신 사당. 공신당은 종묘 내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1395년(태조 4) 종묘 준공 때에 공신당도 5칸짜리로 세워졌다. 배향 공신은 국왕이 승하한 직후에 대신들의 논의를 거쳐 선정되어 배부(配祔)되었다. 정부에서는 위판을 조성하여, 본가에서 교서 선독과 제주, 치제를 차례로 행한 다음, 위판을 국왕 부묘 때 봉안하였다. 종묘의 담 밖에 있던 당은 1410년(태종 10)에 담 안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에 중건 증축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1778년(정조 2)에 또 한 차례 증축이 이루어졌다. 현재 공신전에는 역대 왕의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태조 - 조준, 의안대군, 남재, 흥안군, 이지란, 남은, 조인옥 정종 - 이방의 태종 - 하륜, 조영무, 이천우, 이래 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성종-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정광필 인종- 홍언필, 김안국 명종- 심연원, 이언적 선조-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효종- 김상헌, 김집,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현종- 정태화,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숙종-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경종- 이유, 민진후 영조-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추존왕으로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 이종성, 민백상 정조- 김진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은신군, 조만영 문조(추존왕으로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철종-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내용 종묘 준공의 실록 기사에는 공신당 5칸이라 하였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의 도설에는 3칸으로 되어 있으며,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종묘의궤(宗廟儀軌)』 등의 그림에도 모두 3칸이다.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또 4칸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도설 상의 칸수는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는 듯하다. 그런데 1410년(태종 10) 5월의 실록 기사를 보면, 태종이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의 모퉁이에 있는 빈 당을 보고서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묻자, 만세 후에 공신을 배향할 당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은 건물이 소략하면서 향배의 동서도 분변할 수 없으며 묘정과의 거리도 멀어 불편하다고 지적함에 따라, 담 안의 동계(東階) 아래로 옮겼다. 바로 남신문의 오른쪽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신당은 비어있는 상태였다가 태조 부묘 때인 1410년(태종 10) 7월에 처음으로 배향공신 의안대군(宜安大君) 등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따라서 초기 공신당의 위치는 종묘의 담 밖이었는데, 그것은 묘정에 배향하는 신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432년(세종 14) 6월에 박연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시 이설을 건의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 삼등공신은 공신당에 앉아서 흠향하지 못하고, 그 위패를 내다가 3줄을 만들어서 악현의 동쪽, 공신당 문의 서쪽에 설위하게 된다. 이때 제집사의 배례하는 위치와 신위가 서로 아주 가까워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는 문제점과 함께, 헌가(軒架) 진설의 불편함, 제사 때에만 묘정에 설치하는 유공지신(有功之臣)으로 묘정의 배향 신하가 아니라는 점, 묘정에 배향할 필요가 없다는 점 등으로 묘정 밖으로 옮길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는 세종의 동의를 받았지만, 결국 이 결정은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공신당의 변천에 관한 기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1608년(광해군 즉위) 5월 종묘의 중건을 낙성했을 때, 공신당도 새로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처음으로 증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78년(정조 2), 배향의식 전에 당우(堂宇)의 간가(間架)가 부족하여 증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칠사당(七祀堂)은 정전 월대 아래 서쪽에 있는 건물로 7사(七祀)에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은 작은 건물로 이곳은 일곱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작은 문으로 들어서며 서쪽부터 사명지신(司命之神), 사호지신(司戶之神), 사조지신(司窕之神), 중류지신(中霤之神), 국문지신(國門之神), 공려지신(公蠣之神), 국행지신(國行之神) 등 일상생활과 관련 있는 일곱 신을 모시고 국가 안위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명지신(司命之神)은 인간의 운명과 만물의 생명을 주관하는 신으로 봄철에 제사를 드리고, 사호지신(司戶之神)은 집, 출입을 주관하는 신으로 역시 봄철에 제사를 드리며, 사조지신(司窕之神)은 부엌이나 음식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름철에 제사를 드리고, 중류지신(中霤之神)은 거처를 주관하는 토지의 신으로 여름(6월)철에 제사를 드리고. 국문지신(國門之神)은 관문, 문(門)을 주관하는 신으로 가을철철에 제사를 드리고, , 공려지신(公蠣之神)은 살상과 형벌을 주관하는 신으로 역시 가을철에 제사를 드리고, , 국행지신(國行之神)은 도로의 행작(行作)을 주관하는 신으로 겨울철에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종묘제례때와 음력6월 정한 날에 하나 또는 두 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했다고 한다.] [종묘 정전(宗廟 正殿) 문화재 지정 : 국보 제227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훈정동) 종묘 요약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묘에 있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제사 관련 건축물. 단묘. 국보.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종묘 정전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제사를 모시는 국가적 제례 시설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궁궐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광해군 원년(1608)에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종묘 정전은 조선시대 초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상하의 월대로 구성되었으며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낮은 초석과 원기둥을 세우고 각 기둥 위에는 1출목 2익공 포작을 구성하고 앞, 뒤칸에는 기둥 높이에 우물천장을 설치하였으며 안쪽은 고주 높이로 우물천장을 설치하였다. 뒷면 벽체 전체는 두터운 전돌로 쌓았다. 초익공 이익공 모두 수서로 장식하고 안에서는 고주로 연결되는 퇴량을 받치는 보아지로 했다. 고주칸에 걸려 있는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상중도리를 받치는 종보를 받쳐주며, 종보 중간에 파련대공을 세워서 종도리를 받쳐주는 7량구조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19칸의 정전 좌·우에는 2칸의 제기고 건물이 연속되어 있고, 상월대 좌·우 끝에는 5칸씩의 동월랑과 서월랑을 정전의 직각방향으로 배치하여 전체모양은 ㄷ자 형식을 구성하게 된다. 종묘 정전의 각 신실은 건축 구성의 기본 단위이다. 신실은 한칸으로 되어 있으므로 결국 종묘 정전은 건물 한칸 한칸이 모여서 전체를 이룬다. 한 칸의 구성을 보면 우선 평면에서 제일 뒤에 신위를 모신 감실이 있고 그 앞에 제사를 지낼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끝에 판문이 설치되어 문 밖으로 다시 퇴칸 1칸이 있다. 이처럼 정전은 단순한 구성을 한 신실이 모여 하나의 장대한 수평적인 건축 형태를 이룬다. 한편 정전의 양끝은 협실로 이어지고 동·서월랑이 직각으로 꺾여서 정전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 사이에 큼직큼직한 박석들로 덮인 넓은 월대가 광대하게 펼쳐지면서 정전의 공간은 장대하면서도 엄숙하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종묘 각 신실의 건축 구성은 지극히 단순 질박하다. 이 단순 질박한 각 실이 옆으로 길게 연속되면서 종묘 정전의 전체 공간 구성은 압도적인 장엄함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이 점은 우리나라의 다른 어떤 건축도 흉내낼 수 없는 종묘만이 갖는 건축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종묘는 동시대 단일 목조건축물 중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 데에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정전 동문 옆의 ‘수복방(守僕房)’은 종묘를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하던 곳이며, 그 앞에 찬막단과 성생위가 있다. 찬막단은 제사에 바칠 음식을 상에 올리고 검사하는 곳이며 성생위는 제물인 소, 양, 돼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전사청(典祀廳) : 평상시에는 제례에 쓰일 제물과 제기 등 제사 도구들을 보관하고, 제례가 있을 때는 제사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전사청에는 돌 판이 두 개 있다. 큰 돌판은 찬막단(饌幕壇)으로 이곳에 천막을 치고 제사에 쓰일 음식을 검사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작은 돌판은 희생대(犧牲臺) 또는 생성대(牲省臺)라 불리는데, 제사에 쓰일 소와 양 그리고 돼지의 상태를 검사하던 곳이라 한다.]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 문화재 지정 : 보물 제821호 건립시기 : 1421년 (건립), 1608년 (재건), 1667년 (중건) 성격 사당 면적 일곽, 16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훈정동) 종묘 요약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묘에 있는 조선전기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이안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 보물.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종묘 영녕전(永寧殿)은 1421년(세종 3) 정종(定宗)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태실(太室)이 부족하므로 정전(正殿)에 대한 별묘(別廟)를 건립하여 태조(太祖)의 4대조를 함께 옮겨 모신 이후로도 정전에 계속 모시지 않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다. 역사적 변천 조선에서는 국왕이 승하하면 종묘 정전에 모셔두었다가 5세의 원조(遠祖)가 되면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게 되므로 영녕전을 천묘(遷廟)한다는 뜻의 ‘조묘(祖廟)’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영녕전에는 중앙의 4실을 양 협실(夾室)보다 높게 꾸미고 각 실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쪽 제5실에서부터는 정종(定宗)과 왕비, 문종(文宗)과 왕비, 단종(端宗)과 왕비, 덕종(德宗)과 왕비, 예종(睿宗)과 왕비, 인종(仁宗)과 왕비, 명종(明宗)과 왕비, 원종(元宗)과 왕비, 경종(景宗)과 왕비, 진종(眞宗)과 왕비, 장조(莊祖)와 왕비,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영친왕)와 태자비 등 32위의 신주가 제16실에 이르기까지 모셔져 있다. 의례(儀禮)를 중요시하던 조선시대에는 특히 왕가(王家)의 조상신(祖上神)을 제사 지내는 종묘를 중요시하여, 건축 형식도 엄격하게 규정된 제도를 따르게 마련이었다. 즉, “천자(天子)는 7묘(廟), 제후(諸侯)는 5묘”라고 제도화되어 있었고, 이를 원형으로 삼아 종묘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의 증건이나 신축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세종대에 이르러 정종이 죽자 그의 신주를 모실 방이 없어서 이미 정전에 모셔져 있는 4조(穆祖·翼祖·度祖·桓祖)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였다. 이 때 의논을 거듭하여 정전 서쪽에 별묘를 두는 송나라의 제도가 시의(時宜)에 적절하다고 하여 채택하였다. 이것이 영녕전(永寧殿)을 창건하게 된 동기이다. 1421년 당시 건물의 규모는 태실(太室) 4칸에 양옆 익실(翼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재건할 때 정전 4칸, 동서익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건물로 재건되었다. 다시 1667년(현종 8)에는 동서익실의 좌우 끝에 각각 1칸씩 늘어나 태실 4칸, 좌우익실 각 4칸으로 모두 12칸 건물이 되었다. 또 1836년(헌종 2)에 증건되어 태실 4칸, 좌우익실 각 6칸으로 모두 16칸 건물이 되었으며 이 규모가 현재 영녕전의 규모이다. 이렇듯 건물의 크기는 계속 확대되었으나 그 때마다 전체를 새로 지은 것은 아니며, 일부는 헐어 새로 짓고 일부는 새로 첨가하는 등 특이한 변천을 겪었다. 양식적인 면에서 17세기 중기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내용 영녕전은 정전의 서쪽에 남향으로 세워져있는데, 구성형식을 보면 4면을 낮은 돌담으로 둘러막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외부공간을 형성하고, 정면인 남쪽에는 3문 형식의 남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기 동문 3칸, 서문 1칸을 두어 제사 지낼 때의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남문 안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2벌로 쌓아 나지막한 월대(月臺)를 조성하고, 그 한복판에 상징적인 중심이자 건축의 기하학적인 중앙 축으로서 신도(神道)를 두었다. 신도의 끝에는 다시 월대를 쌓아 제관(祭官)들이 건물 앞에서 의례의 절차를 거행할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이 상월대(上月臺) 위에 장대석 1벌로 기단을 쌓고 여기에 가운데 태실 4칸, 좌우 각각 익실 6칸씩을 두어 16칸을 조성한 건물을 세우고, 익실 양끝 툇간에 덧붙여서 동월랑(東月廊)과 서월랑(西月廊) 5칸씩을 연결하였다. 태실과 익실을 합한 정전 부분의 평면구성을 보면 너비 방향으로는 정전부와 월랑부로 나누어지고, 다시 정전부는 태실과 좌우익실로 나누어진다. 깊이방향으로는 월대에 면하고 있는 맨 앞 1칸은 모두 퇴(退)로 개방하였고, 그 뒤로는 칸마다 문 2짝을 달아 안으로 열게 만들었다. 이 문 내부는 각 실의 구분 없이 옆으로 탁 터진 2칸 깊이의 공간이 있고, 다시 그 안쪽에 각 실을 나누고 신주를 모신 감실(龕室)을 마련하였다. 즉, 깊이 방향으로 본 평면구성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제사를 거행하는 예법을 충실히 따를 수 있도록 이루어져 있다. 한편, 동월랑과 전퇴(前退) 및 서월랑 앞 일부에는 바닥에 전돌을 깔아서 의례의 절차에 따른 통로를 마련해 놓았다. 동월랑과 서월랑은 모두 월랑이라고 불렀으나 평면구성상 차이점이 있는데, 동월랑은 앞쪽 4칸을 퇴로 개방하고 익실과 연결된 부분 1칸만을 3면을 둘러막고 퇴 쪽으로 문을 내었으며, 서월랑은 5칸 모두를 벽으로 둘러막고 가운데 칸에만 두짝문을 달았다. 건물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원기둥의 열(列)과 세 부분으로 나뉜 거대한 지붕면에 의하여 간결하고도 장중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졌는데, 이는 영녕전이 제사를 드리는 일종의 신전(神殿) 건축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하였기 때문이며, 구조와 장식·색채 등에도 간결함·장중함·상징성 등을 강조하는 설계의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건물의 지지체인 주춧돌과 원기둥을 두툼하고 굵게 만들고 이 위에 간결하게 이익공(二翼工)을 짜올려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다. 같은 이익공이면서도 영녕전의 태실은 바깥으로 출목을 두어 익실과 위계에 차별을 두었다. 중앙계단의 섬돌과 문설주 양옆에는 태극무늬를 새겨 놓았다. 색채는 붉은색과 청록색 2색만을 사용하여, 흔히 밝고 화려한 다채색을 칠한 궁궐과는 상당한 대비를 보이고 있다. 특징 종묘정전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나, 벽체와 기둥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정전에서 전퇴의 열주(列柱)를 제외한 모든 기둥을 벽 속에 숨긴 데 반하여, 영녕전에서는 원기둥을 노출시켜서 벽을 나누고 있다. 의의와 평가 17세기 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이 건물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구조와 장식·색 등이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었다. 일부 구조에서는 옛 방식을 따라 입구에 널문을 달고 발을 쳤으며, 건물 안쪽 방 사이에는 담벽을 치지 않고 발을 늘여 나누어 놓았다. 신위를 모시는 집으로 옛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이다.] [영녕전(永寧殿) 영녕전은 종묘의 별묘(別廟)로 세종 때 건립되었으며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었다. 세종 원년에 2대 임금인 정종이 승하하자 정종의 신위를 모시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종은 당시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묘호도 받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공정왕이라 불렸다. 이 정종을 정전에 모시는 것이 문제가 되자 세종은 별묘인 영녕전을 건립해 태조의 4대조 신위와 정종의 신위를 영녕전에 모셨다. 그 후 영녕전에는 추존왕의 신위 그리고 단명하거나 대가 끊기는 등 위상이 적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졌다. <영녕전> 세종 때 처음 건립될 당시는 모두 6칸의 건물이었으나 점차 증측해 16칸이 되었다. 영녕전은 가운데 네 개의 신실을 크게 두고 양쪽에 작은 협실을 두었다. 가운데 큰 신실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위를 모시고, 서쪽 협실에 2대 정종, 5대 문종, 6대 단종, 덕종, 8대 예종, 12대 인종의 위패를 그리고 동쪽 협실에 13대 명종, 원종, 20대 경종, 진종, 장조, 영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덕종 :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로 훗날 그의 아들인 자을산군이 성종이 되어 왕으로 추존했다. 원종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으로 인조의 아버지입니다. 인조가 왕으로 추존했다. 진종 : 영조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입니다. 죽은 뒤에 정조를 양자로 입적해 왕으로 추존되었다. 장조 : 영조의 둘째아들인 사도세자로 정조의 친부입니다. 정조가 즉위한 후 왕으로 추존했다. 영왕 :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이다.] [정전 악공청(正殿 樂工廳)&영녕전 악공청(永寧殿 樂工廳) 대제 때 악공들이 머물던 건물로 정전과 영녕전 밖에 하나씩 있다.] 종묘 안내도 * 12:22~12:29 서울 종로구 종로 157 번지에 있는 종묘 외대문에서 서울 종로구 종로 99 번지에 있는 탑골공원으로 이동 [이동거리: 0.8km] 탐방지 : 서울 [탑골공원&조계사&서울 우정총국&서울 공예박물관&열린 송현녹지광장] 탐방코스 : [탑골공원~옛 조선일보 사옥~조계사~서울 우정총국~서울 공예박물관~열린 송현녹지광장~경복궁 매표소1] 탐방일 : 2024년01월25일(목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종로 : 최저기온 영하 10도C, 최고기온 0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6분 소요) * 12:29~12:35 서울 종로구 종로 99 번지에 있는 탑골공원을 탐방 [탑골공원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있는 공원이다. 뼈모양의 탑이 있어 탑골(塔骨) 공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골공원은 국내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는데 이곳은 고려시대 흥복사가 있던 자리였는데 탑이 생기면서 탑동(塔洞)으로 불리다가 탑동공원(塔洞公園)·파고다공원이 되었다. 위치 원래는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으며 면적은 15,051 m²이다. 수도권 전철 1, 3, 5호선이 만나는 종로3가역과 수도권 전철 1호선 종각역이 가깝고 근처에는 낙원악기상가가 위치해있다. 서울에 마련된 최초의 공원이며,[1] 한국에서 한국인을 위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공원이다.[2] 유래 탑골 공원은 고종 때 원각사 터에 조성한 최초의 공원이다. 탑골이라고 불린 것은 최근의 일이고 이전에는 탑이 있는 공원이라고 해서 영어식 발음으로 파고다라고 했다. 일제에 대한 최대 규모의 민족 저항운동이었던 3·1 운동이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보지정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며,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수법이 세련되고 화려해 조선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최근에는 노인들의 휴식처로도 알려져 있고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찾아보기 힘들정도가 되었다. 역사 고려시대 이곳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이 흥복사는 조선 태조 때 조계종의 본사였다.[3] 1464년(세조 10)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이 공사를 위하여 동원된 군사는 2,100인이었고, 13인의 부장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제2호) 근처의 가옥 200여 호를 철거하여 3년 후에 완공된 이 사찰의 규모는 굉장한 것이었고 도성 안 제일의 대가람이었다. 이 절은 당우나 문루의 규모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특히 전국에서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한 대종과 1468년에 완성하여 그 안에 석가여래의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안치하였다는 10층석탑이 있었다. 비교적 숭불정책이 시행되던 것이 성종 때 들어와서는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연산군대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혹하여졌다.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는 1504년(연산군 10)에 시작되었지만 당장에는 철거하지 않았고, 그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에 옮겨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여 인과 악사 1,000인, 감독 40인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되었으며, 그 이름도 연방원(聯芳院)으로 바뀌었다. 연산군이 실각한 뒤 이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호조에서 원각사의 재목을 헐어 여러 공용건물의 영선에 쓸 것을 계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한 뒤 얼마 안 가서 이 사찰건물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비와 10층석탑만 남아 있다. 고종의 명을 받은 영국인 브라운이 조선 고종 34년인 1897년 서양식 공원으로 만들어서 1920년 대중에게 개방하였다. 브라운은 1893년 조선에 입국하여 총세무사, 도지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조선 정부의 재정과 관련한 일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가 폐허로 변한 원각사지를 공원으로 바꾸자고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는 김홍집 내각 때부터 서울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뒤에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를 바랐기 때문이다. 아울러 서울 시민이 가장 모이기 쉬운 곳으로서 주변에 장시가 서고 있었다는 점도 공원 개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고종은 공원에서 민의가 수렴되는 등 언론의 장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파고다 공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탑이 있는 그 주변을 탑동 또는 탑골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탑공원, 탑동공원, 탑골공원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로 여겨지며, 이곳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1967년에는 상가 건물인 ‘파고다 아케이드’를 공원 둘레에 짓는 것을 포함하는 현대화 계획이 발표되어, 같은해 12월 완료되었다. 1983년 7월 파고다 아케이드의 철거 이후, 그해 말까지 재정비사업이 진행되었다.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고, 1992년 5월 28일 탑골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공원 내에는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탑골 공원 팔각정(서울 시도유형문화재 제73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 12:35~12:44 옛 조선일보 사옥(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38 번지 : 현재 NH농협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사용되고 있음)을 거쳐서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번지에 있는 조계사로 이동 [옛 조선일보 사옥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38 번지 조선일보, 이후 조선중앙일보 사옥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조선중앙일보는 양평 신원역에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님이 사장을 할 때,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받은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로 자진 폐간한 일이 있다. 현재는 농협중앙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조계사는 대한불교 직할 교구 본사로서 조계종 총무원, 중앙종회 등이 자리하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심 사찰이다. 원래 고려 말 현 수송공원(전 중동고등학교 위치)에 창건된 사찰로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10년 한용운, 이희광 스님 등에 의해 각황사란 이름으로 중창되었다. 그 뒤 태고사로 개칭되어 1936년 한국 불교의 최고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다가 1954년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려는 불교 정화 운동이 일어난 후 지금의 조계사로 바뀌었다. 조계산은 중국 선불교의 육대 조사인 혜능대사(638~713)가 주석하셨던 산의 이름이다. 육조 혜능대사는 여러 선사 가운데에서도 특히 존경받는 분으로 그 일생과 가르침은 끊임없이 연구되어 수행의 지표가 되고 있다. 오늘날 조계사는 한국불교와 그 대표 종파인 조계종의 주요 사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조계사 법당은 불교 행사의 중심 장소로서 거의 일 년 내내 법문이나 염불, 강좌, 또는 제사라든가 그 밖의 의식들이 거행되고 있다. 조계사 법당 뒤에 자리한 건물은 조계종 총무원으로서, 조계종단 전체를 관할하는 행정기관인 만큼 다양한 행사와 활동으로 분주하다. 1층의 불교회관은 전시회나 각종 행사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 건물 안에 자리한 불교 신문사에서는 주간으로 불교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법당 앞에는 1930년에 조성된 7층 석탑이 있다. 석탑 안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사리는 스리랑카의 달마바라 스님이 1914년 한국에 모셔 온 것이다. 이 석탑 양편에는 석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법당을 바라보면서 왼편으로 종각이 보인다. 종각에는 큰북과 범종, 운판과 목어가 있어 아침, 저녁 예불 때마다 울린다. 이는 비단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인데 큰북은 네발 달린 짐승을, 범종은 타락하거나 지옥의 고통을 받는 이들을, 운판은 하늘의 날짐승을, 목어는 물에 사는 짐승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 12:44~12:51 조계사 탐방 * 12:51~12:54 서울 우정총국을 거쳐서 서울 공예박물관으로 이동 [서울 우정총국(郵政總局)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9 (견지동) 우정총국(郵政總局)은 조선시대 말기 우체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은 사적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계사 대웅전의 북동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건물이 우정총국(郵征總局)이다. 일본과 미국을 두루 돌아본 홍영식(洪英植)의 건의로 재래의 역전법(驛傳法)을 고쳐 근대식의 우편제도가 창설되면서, 1884년 (고종 21) 3월 옛 전의감(典醫監) 자리에 전의감의 건물을 보수해서 이용했다. 우정국은 국내의 우편사무 보다는 인천, 부산, 원산 등의 항구를 경유하는 국제서신 교류 사무에 역점을 두었다. 우정국은 최초의 근대적 우편제도가 시작된 곳이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과 민씨 척족 세력이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위협을 느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개화파가 정권을 탈취하고자 우정국 개업 축하연 당일 정변을 일으켰다. 이날 우정국 옆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를 신호로 보수파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들이 당시 공포한 혁신정강은 양반중심의 정치사회 지배질서를 타파하고 민중의 평등과 자유를 실현하는 부국강병의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민중의 이해와 관심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하고, 믿었던 일본군마저 청군에 격파되면서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문을 닫았던 우정총국이 128년만에 우체국 기능을 갖추고 2012년 개국하였다. 개국한 우정총국은 우정사료 전시공간과 우체국 업무공간으로 나눠져 있으며, 우정총국이 사적으로 지정된 건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우편서비스만 제공하여 운영한다. 우정국의 건물은 여러 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현재의 건물 한 채만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은 우리나라 우편사업의 발상지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우편업무 주관 관청의 하나로 꼽힌다. * 면적 - 2,588㎡ ] * 12:54~12:55 열린 송현녹지광장으로 이동 [열린 송현녹지광장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현동 48-9 열린송현 녹지광장은 종로구 송현동 부지에 있는 공간으로, 경복궁과 종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광장이다. 송현동 부지는 일제강점기 식산은행 사택, 해방 후 미군 숙소, 미대사관 숙소 등으로 활용되어 오다가 1997년 우리 정부에 반환되었다. 하지만 이후 별다른 쓰임 없이 폐허로 방치되어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2022년 7월 한국주택공사로 소유권이 넘어오고, 서울시로 다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쉼과 문화가 있는 열린송현 녹지광장]으로 단장하고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높이 4m 담장에 둘러싸여 오랜 기간 닫혀있던 공간은 돌담을 낮추고 야생화로 어우러진 녹지로 조성하였다. 이로 인해 율곡로, 감고당길에서 드넓은 녹지광장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돌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광장 중앙에 서울광장 잔디보다 넓은 중앙잔디광장이 펼쳐진다. 광장 주변으로는 코스모스, 백일홍과 같은 야생화 군락지가 조성되어 있다. 경복궁과 북촌은 송현동 부지가 열리면서 광장 내부로 난 지름길로 연결된다. 광장을 가로지르며 걷다 보면 청와대, 광화문광장, 인사동 그리고 북촌 골목길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 12:55~12:58 사진촬영 * 12:58~13:05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번지에 있는 경복궁 매표소1로 이동 서울 탑골공원 지도 [조계사&서울 우정총국] 지도 [열린송현녹지광장&서울 공예박물관] 지도 * 13:05~13:06 경복궁 매표소1에서 관람권 구입 [경복궁 관람권 : 3천원] [관람시간 경복궁은 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입장은 오후 5시까지 가능합니다. 다만, 겨울철에는 운영시간이 단축될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궁궐 내 일부 건물은 특정 시간대에만 관람이 가능하므로, 관람 계획을 세울 때 이 점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탐방지 : 서울 [경복궁&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景福宮) 이칭별칭 : 북궐(北闕) 건립시기·연도 : 1395년(태조 4) 규모(면적) : 43만 2702.87㎡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 사적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목차 정의 개설 연원 및 변천 내용 특징 의의와 평가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전기에 창건되어 정궁으로 이용된 궁궐. 정궁. 사적. 개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되었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낙성되었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내용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 근정전(국보, 1985년 지정)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보물, 1985년 지정)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경회루(국보, 1985년 지정)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보물, 1985년 지정)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의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보물, 1985년 지정)에 묘사된 십장생 무늬가 특히 주목된다.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보여 주는 한국식 정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 화문(花文) 장식의 경복궁 아미산 굴뚝(보물, 1985년 지정)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풍기대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1985년 지정).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경천사십층석탑을 비롯한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용산에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겨져서 현재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 일부만 남아 있다. 특징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의의와 평가 경복궁은 비록 궁내의 건물들 대부분이 없어져서 근정전과 경회루를 제외한 많은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창건 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조선왕조 정궁의 면모를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탐방코스 : [경복궁 매표소1~경복궁 광화문~근정전~사정전~수정전~경회루~강녕전~교태전~동궁~소주방~자경전~흥복전~향원정~건청궁~집옥재~태원전~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역 5번 출구] 탐방일 : 2024년01월25일(목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 최저기온 영하 10도C, 최고기온 0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 소요) * 13:06~15:06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번지에 있는 경복궁 매표소1에서 탐방출발하여 [경복궁 매표소1~경복궁 광화문~근정전~사정전~수정전~경회루~강녕전~교태전~동궁~소주방~자경전~흥복전~향원정~건청궁~집옥재~태원전~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역 5번 출구]의 동선으로 경복궁(景福宮)을 탐방 [경복궁 광화문(景福宮 光化門) 경복궁의 정문이다. 건물의 명칭인 '광화(光化)'는 '빛이 널리 비춘다.'라는 뜻으로, 건립 당시에는 정문(正門) 혹은 오문(午門)으로 불리다가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광화문'이라 명명되었다. 역사 1395년(태조 4)에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건립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으며, 1865년(고종 2)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도 함께 지어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복궁 흥례문 권역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으면서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되었고,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1968년에 남아있던 광화문의 석축을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 앞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으나,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문루를 복원하였고, 위치도 원래의 자리에서 뒤쪽으로 밀려지고 각도도 틀어져서 세워졌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하였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광화문은 2006년에 철거되었고, 2010년 고종 때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원래의 위치에 광화문이 복원되었다. 2023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전차의 선로를 설치하면서 훼손되었던 광화문의 월대를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구조 및 형태 3개의 아치형 문을 낸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門樓)를 올렸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가운데 아치문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그려 넣었으며, 광화문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대한민국의 국보 제223호 (1985년 1월 8일 지정) 시대 조선 고종 4년(1867) 주소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1-1) 근정전(勤政殿)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다포계 팔작 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1395년 조선 태조가 조선의 정궁으로 경복궁을 조성할 때, 중추를 이루는 건물로 중건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 전반이 불에 타면서 같이 소실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공사 때 다시 세워졌다. 조선 국왕의 정무와 나라의 큰 행사, 즉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는 등 국가 의식이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국왕의 즉위식은 근정전의 주요 기능 중 하나였으며, 정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가 근정전에서 즉위를 치렀다. 이와 더불어 과거 시험의 거행과 합격 발표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으로서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고, 내부관람도 실시하고 있다. 야간개장 때는 근정전의 내부를 공개했으나, 어좌를 제외한 모든 근정전의 내부는 불을 키지 않아 어둡게 보인다. 경복궁 근정전은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왕의 즉위식 등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르던 경복궁의 정전이자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의 상징이다. 개요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규모 건물이며, 지붕은 전형적인 팔작지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처마를 받치는 기능을 하는 장식 짜임새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다포식 건물이다.[2] 내부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둘러쳐진 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御座)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용 2마리를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근정전의 기단인 월대에는 각 네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여러 동물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는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갖는 위상을 근정전의 격식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월대의 난간에는 방위신에 해당하는 사방신(四方神)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맞게 조각해 놓았고, 상월대와 하월대의 난간 곳곳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과 상서로운 동물들을 조각해 근정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붕이 용 문양으로 장식된 청자기와로 지어져서 푸른 유리 지붕처럼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행사를 치를 때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차일 고리가 아직도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주변으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에워싸는 형태로 되어 있다.[2] 역사 조선 초기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고 3년차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4][5] 1395년(태조 4년) 8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 달인 9월 29일에 우선 궁궐 중심부의 건축이 완료되었다.[6] 태조는 그 다음달에 경복궁에 입궐한다. 이 때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궁궐의 이름을 비롯하여 근정전 등 여러 건물의 명칭을 짓는다. 정도전이 근정(勤政)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한 것만 가르쳐서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하게 봉양하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구경거리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해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때 지어진 근정전은 사정전과 함께 조선에서 청기와를 덮은 단 두 채 뿐인 건물이었다. 1553년(명종 8년) 9월에 강녕전에서 시작된 불로 경복궁의 대부분이 소실될 때에도 근정전은 소실되지 않았다. 파괴와 중건 근정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경복궁이 파괴될 때 마찬가지로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렇게 소실된 경복궁 근정전 자리는 여전히 여러 행사에서 사용되었다. 그 후로 근정전은 복원되지 못하다가, 1865년(고종 2년) 수렴청정중인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된다. 1866년 3월 10일에 영건도감에서 제출한 근정전 공사일정에 따르면, 터는 6월 8일에 세우고, 초석은 8월 25일에 놓았다. 근정전의 상량문 제술관은 10월 9일에 정했는데, 경복궁 영건도감 도제조이던 조두순이 맡았다. 상량은 1867년 2월 9일에 했다. 상량시 물 수(水)자를 윤곽으로 그 안에 용(龍)을 1천자 이상 새겨 넣은 종이를 올려 넣었고, 마찬가지로 용 그림도 같이 올려 넣었으며, 6각형 은판의 각 모서리에 물 수자를 새겨 넣은 것도 함께 넣었다. 이는 화재로부터 근정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종은 완공된 근정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기는 아관파천을 일으킨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거기서 정사를 보다가, 1897년에는 외국 공사관이 밀집한 지대인 정동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법궁으로 사용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이 훼철되어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설 때에도 건사하였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중에는 식장으로 사용되었고, 행각에는 진열장을 배치하였다. 1927년에는 전국축산대회를 개최하는 등 여러 행사에서 총독부에서 번갈아가며 사용하였다. 해방 후 해방 후에도 근정전은 여러 행사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다. 1946년에는 문맹퇴치학생계몽대 출동식, 전조선학교음악제전이 열렸다. 1948년에는 최초로 보수공사하였다. 이후 1964년에는 반자를 수리하였고, 1970년에는 기단을 보수하였다.. 1987년에는 북측 월대를 보수하였고, 1988년에는 현판을, 1996년에는 정면 창호를 보수하였다. 이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해체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용도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써 기능했다. 조선 왕실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큰 조회인 조하(朝賀)와 망궐례(望闕禮)가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그 외에도 과거시험 및 연회 등 여러 왕실의 행사가 이루어졌다. 구조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정면과 측면의 칸수는 같지만 주칸의 너비가 더 넓다. 총 25칸에 중층 목조 건물로, 내9포 외7포의 공포로 되어있으며 기둥 높이는 16척이다. 보칸은 어칸 11척, 전후 협칸 각각 11척, 전후 뒷칸 각각 17처깅며 도리칸은 어칸 22척, 좌우 협칸 각각 21척, 동서 툇간 각각 17척이다. 지붕은 상층 지붕에는 용마루, 합각마루(내림마루), 추녀마루(귀마루)로 구성되어있으며 용마루의 양단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의 아래끝에는 용두를 놓았다. 추녀마루에는 상하층 모두 7개의 잡상을 놓았으며 그 뒤에는 용두를 두었다. 하층 지붕은 추녀마루로만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도 7개씩 잡상을 놓았다. 천장에는 칠조룡 두 마리가 여의주를 놓고 희롱하는 장식인 쌍룡희주(雙龍戱珠)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월대 근정전은 2층의 월대 위에 놓여있다. 월대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과 십이지신이 조각되어 새겨져 있다. 주작은 월대 상층부의 남단에, 현무는 월대 상층부의 북단에, 청룡과 백호는 월대 하층부의 북단에, 십이지신은 월대 하층부의 남단에 아로새겼다. 권역 근정전은 사방이 행랑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그 중 동, 서측 행랑에는 통로가 있고 북측과 남측 행랑에는 문이 나 있다. 북측 행랑에 있는 문은 사정전으로 통하는 사정문이다. 근정문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문이자 경복궁의 내문이다. 현판은 경복궁 중건시 신석희가 썼다. 월화문과 일화문 월화문과 일화문은 근정전 좌우에 있는 협문이다. 정전에서 조회를 볼 때 무인은 월화문으로, 문인은 일화문으로 출입했다. 달은 음양에서 음을, 해는 양을 의미하므로 각각 서쪽과 동쪽의 문 이름으로 지었다. 행랑 근정전의 동쪽 행각에는 서방색(書房色), 관광청(觀光廳), 양미고(粮米庫), 융문루(隆文樓)가 있었고, 서쪽 행각에는 내삼청(內三廳), 충의청(忠義廳), 예문관(藝文館), 향실(香室), 액정시(掖庭厮), 융무루(隆武樓)가 있었다. 계인문 계인문(啓仁門)은 근정전 동행랑에 있던 문이다. 협의문 협의문(協義門)은 근정전 서행랑에 있던 문이다.] [경복궁 사정전(景福宮 思政殿) 왕의 집무 공간, 사정전(思政殿)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勤政殿)의 뒤편에는 사정전(思政殿)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근정전이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는 의전용 공간의 기능을 했다면, 사정전은 왕이 신하와 경연(經筵)을 하고 정무를 보는 집무실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京都)편에 ‘사정전은 근정전 북쪽에 있는데, 아침마다 공사(公事)를 보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부분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궁궐 조성의 책임을 맡은 정도전은 이러한 기능을 고려하여 이 건물의 이름을 ‘사정전’이라 지었다. 여기에서 ‘사정(思政)’이란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뜻이다. 정도전은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고 하며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서경]에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고 했으니, 생각이란 것이 사람에게서 작용되는 것이 지극하다고 본 것이다. 정도전은 백성들 중에는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한 사람이 섞여 있고, 모든 일에는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임금이 된 자가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펴야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일을 마땅히 처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도전은 이 건물에서 왕이 매일 정사를 보고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기에, 한 번 더 생각하여 결정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사정전’이라 이름 하였음을 그의 문집인 [삼봉집(三峯集)]에 밝혀두었다.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곳에서 실제로 조선 전기의 왕들은 신하들과 경연을 벌였고, 국사(國事)를 돌보았다. 특히 세종대에는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는 책을 완성하여 주목된다. 1435년(세종 17)에 세종은 윤회ㆍ권도ㆍ설순에게 명하여 문신 40여 인을 모아 [자치통감]의 훈의(訓義)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때, 세종은 친히 교정을 보고 때로는 늦은 밤까지 열중하는 정성을 보였다. 이 책이 완성되자 이름을 내려 ‘사정전훈의’라고 하였는데, 책의 제목에 ‘사정전’의 이름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사정전이 갖는 의미가 컸음을 엿볼 수 있다. 사정전은 좌우에 만춘전과 천추전을 두고 사정전의 공간 기능을 보완하도록 했다. 현재는 이 두 건물이 독립된 전각의 형태이지만 원래는 복도각으로 연결되게 하여 사정전에서 왕이 행하는 주요 활동이 이곳에서도 행해졌다. 세조대인 1456년(세조 2)에는 사정전 앞에 큰 종을 주조하여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신숙주가 쓴 종명서(鍾銘序)에서는 “우리 전하께서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군정(軍政)을 엄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큰 종을 주조해서 사정전 앞에 설치하여 금군을 호령하여 정돈되도록 하셨다.”라고 종을 설치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아침저녁으로 경계시키기 위해 사정전에 설치한 이 종은 후에 종각에 안치되었다. 사정전에서 공놀이[打毬]를 즐긴 세종 왕과 신하가 공부를 하고 정사를 돌보던 사정전. 그런데 이곳에서 세종대에는 이벤트성 행사가 자주 벌어졌다. 사정전에서 종친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공을 치는 놀이[打毬]가 벌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타구(打毬)는 장치기라고도 했는데, 길 위에 여기 저기 구멍을 파놓고 긴 막대기로 둥글고 작은 공을 쳐서 그 구멍에 들어가게 하는 놀이이다. 오늘날의 골프와 비슷하다. 구멍은 가능하면 공이 잘 들어가기 어려운 자리에 움푹하게 만들었는데, 아슬아슬한 승부를 맛보게 하기 위해 다리 끝과 같은 곳에 파기도 했다. 타구에 쓰이는 공의 크기는 달걀 정도였고 나무나 차돌멩이로 만들었다. 각자의 공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재미있는 이름을 공에다 붙이기도 했다. 공을 치는 채의 모양은 긴 숟가락처럼 생겨 오늘날의 골프채나 하키채를 연상시킨다. 세종은 왕자시절부터 하인들과 어울려 타구를 했다. 특히 날씨가 추워 궁궐 밖에 나가기 어려운 겨울부터 연초까지 이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세종은 왕이 되어서도 타구를 즐겼음은 실록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시절 세종은 부친인 태종과 함께 타구를 치면서, 부자간의 정을 돈독히 한 모습도 기록에 나타난다. 왕이 주최하는 타구가 사정전 앞에서 자주 거행되었던 사실은 [세종실록]이나 [세조실록] 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세조실록]에는 “사정전 남랑(南廊)에 나아가서 종친의 봉희(棒戲)를 구경하였다.”고 기록하여, 타구를 막대기로 하는 놀이라는 점에서 봉희라고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사정전, 세조와 사육신의 악연의 공간 사정전 앞에서는 역사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바로 사육신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해 이곳에서 세조에게 국문을 당한 일이다. 1456년 단종복위 운동을 주도한 성삼문, 박팽년등의 거사는 김질 등의 고변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났다. 분노한 세조는 이들을 사정전 앞으로 압송하게 하였다. [세조실록]에는 “왕이 사정전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신의 아비였습니다.’라고 하였다.”고 기록하여 세조의 친국이 벌어진 현장이 사정전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조는 사정전에서 친히 거사 참여자들을 국문하면서 협박, 회유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세조의 왕위 찬탈의 부당성을 공격하면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칭하여 세조를 자극하였다. 또한, 그는 세조의 신하가 아니기 때문에 세조가 준 녹봉을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였고, 달구어진 쇠로 고문을 더욱 모질게 가했다. 이날 사정전에서 벌어진 상황은 [연려실기술]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세조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 성삼문이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부(君父)의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나으리가 평일에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선위를 받을 때에는 어찌하여 저지하지 않고, 도리어 내게 붙었다가 이제 나를 배반하는가.”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사세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원래 그것을 저지하지 못할 바에는 물러가서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임을 알지만, 공연히 죽기만 해야 소용이 없겠으므로, 참고 지금까지 이른 것은 뒤에 일을 도모하려 함이라.” 하였다. 세조가 말하되,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하는데, 네가 내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이다. 겉으로는 상왕을 복위시킨다 하지마는, 실상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박팽년 역시 세조를 ‘나으리’라고 칭하였고 세조가 준 녹을 받지 않았다. 이는 그가 국문 과정에서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박팽년은 장계에 신이라 일컫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모두 그와 비슷한 ‘거(巨)’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조에 의해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사정전은 조선시대 왕이 정사를 보는 대표적인 공간이었고, 왕과 신하가 머리를 맞대며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이 자주 벌어지기도 한 곳이었다. 또한 심신을 단련하려는 왕과 종친들의 타구 자주 벌어진 생동의 현장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453년 계유정난으로 파생된 불법적인 왕위 찬탈은 사정전 앞마당을 처참한 고문의 현장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경복궁 수정전(景福宮 修政殿)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60호로 지정되었다. 근정전 동편 경회루 바로 앞에 자리한다. 입지 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수정전은 근정전 서측에 있는 건물로써, 북으로는 경회루가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기 전인 세종 연간에는 학문을 연구하며,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으로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치의 본산이었던 집현전이 있던 곳으로 왕의 영역과 신하들의 영역이 만나는 접점인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고종 때 중건되어 이후에도 외조공간에 자리 잡은 왕의 편전으로 사용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를 여기에 두었으며, 이후 내각청사로 사용되었다. 4면에는 행각과 남쪽의 외행각이 일곽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일제 때 철거되고 현재의 본전 건물인 수정전만 남아있다. 연혁 조선 초 조선 초기 왕조실록에는 수정전과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조선 초기에 작성된 경복궁 전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경복궁이 궁궐로써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 조에는 집현전으로 사용되었고, 세조 때에는 예문관으로도 사용되었다. 그 후 선조25년(1592) 4월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함께 소실되었다. 근대 지금 전해지는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등과 함께 중건한 것이다. 중건 당시에는 4면의 행각과 남쪽으로 외행각이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내부 벽체와 창호가 훼철되었고 수정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다. 1915년 가을에 조선의 정궁을 훼철하고 조선총독부를 세우고자 하는 일제의 전초작업으로 시정 5주년 기념사업인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헐게 된 것인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정(修政)’은 ‘정사를 잘 수행함’이란 의미로 현판글씨는 중건 당시 조석원이 썼으며, 조선 후기 문신으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으며,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구조 경복궁 근정전 서편의 외조공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다른 궁궐의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넓은 월대(月臺)를 갖춘 장대한 건물외관, 가구부재 등이 중건 당시의 모습을 현재까지도 잘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고종 때 중요한 자료인 궁궐지에는 수정전과 이에 부속된 행각의 명칭, 규모, 양식, 주칸 등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정면 10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긴 장대한 건물로 남향으로 앉혀진 1고주 7량가의 이익공양식 단층 팔작지붕이다. 수정전 정면에는 네 벌대의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 월대에는 정면에 계단을 3곳 설치하였고, 중앙의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좌우계단과 차별화시켰으며, 이것은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 다섯 벌대나 되는 높은 건물기단 위에는 4각 초석위에 각기둥을 세우고 띠살창 분합문과 빗살창교창을 사방 전면으로 둘러 설치하였다. 높은 기단의 좌우 측면에는 불을 넣는 아궁이를 설치하여 온돌방을 두었다. 평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앞면 퇴칸 주간을 넓게 하여 10칸의 도리방향을 모두 대청으로 터져 있으며 좌우 및 후면의 퇴칸이 연결되어 내부 회랑 역할을 한다. 공포는 길게 뻗은 쇠서의 이익공 위에 소로를 높고 양봉한 보머리를 받으며 주심도리를 받아준다. 지붕의 용마루 및 내림마루엔 양성을 하고 취두, 잡상을 배열했다. 건물의 짜임이 견고하고 창의력 있는 구조다. 지정 가치 수정전은 외관, 가구부재 등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로 중건 당시의 모습이 잘 유지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1592) 이전에는 한글창제의 본산인 집현전으로 사용되었으며, 고종 중반 우리 역사의 대격변기(1890년대)에 여러 제도가 급변할 때 중추적 역할을 했던 건물로서 사회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또한 광화문에서 근정전 서편에 해당하는 외조공간에서 궐내각사가 모두 훼철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높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에 연회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을 접견하던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경회루는 성종 때 고쳐 지으면서 누각의 돌기둥을 화려하게 용의 문양을 조각하였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의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역사와 구조 임진왜란 이전 원래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짓도록 명하여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완성하였다. 초기의 모습은 《궁궐지》, 《태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전한다. 이후 성종 6년(1475)에 근정전, 광화문, 흥례문의 기와를 청기와로 덮으며 경회루도 증축한다. 연산군 대에는 경회루를 화려하게 치장했다가 중종이 기물들을 헐어냈다. 중종은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격이 맞도록 경회루에도 청기와를 올리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임진왜란 전의 경회루는 유득공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10m)이나 되고 모두 마흔 여덟 개인데. .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 때 다시 지은 경회루와 같은 규모인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3층 구조에 높이는 100척에[주해 1]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용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용재총화》에서는 류큐국의 사신이 조선의 세 가지 장관 중에 하나로 경회루 돌기둥을 꼽으면서 이르기를 ‘돌기둥에 가로세로 그림을 새겨 놓아서 용이 거꾸로 물 속에 그림자를 지어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보이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모습을 들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는 고종 당시 중건할 때 반영되지 않는다.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이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현재의 경회루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돌기둥만 270여 년 남았던 것을 경복궁을 중창할 때 재건한 것으로, 고종 4년(1867) 4월 22일에 상량하였다. 재건 후 130여 년이 지난 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하였다. 새로 지은 건물로서 경복궁의 편전(便殿)인 사정전과 천추전(千秋殿)의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경회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인공으로 만든 커다란 방형 연못 안 동쪽에 치우쳐 있는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건물 하층의 바닥은 네모난 전돌을, 상층 바닥은 장귀틀과 결합하는 동귀틀이 각 칸에 하나로 구성된 장판자를 깔았고, 동쪽과 서쪽에는 하층에서 상층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을 두었다. 1층 천장, 2층 마루의 귀틀 밑부분은 소란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단청해 놓았다. 경회루 서쪽으로 있는 네모난 섬 두 개는 당주(當洲)이며, 이곳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경회루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은 네모 반듯한 섬 위에 세워졌으며, 세 벌로 조성된 돌다리를 통하여 연결되는데, 남쪽의 것이 임금을 위한 다리다. 다리의 돌난간과 네 귀는 짐승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섬을 이루는 돌 기단 둘레에도 돌난간이 둘러있고,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돌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로 구성되었다.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에서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의 경회루 1층 부분은 민흘림을 한 높은 사각 돌기둥이 외부 둘레에, 원형의 돌기둥이 내부에 배열되어 있고, 2층 부분은 나무기둥으로 조영되어 있다. 1·2층 바닥에는 모두 건물 공간 사용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깥보다 안쪽의 바닥을 조금씩 높였고, 2층에서는 중앙부분의 바닥을 더 높여서, 외진(外陳)-내진(內陣)-내내진(內內陣)을 형성했다. 2층의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공간의 위계를 명확히 했고, 필요에 따라 들어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토록 했으며,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현재 내진과 내내진 사이에 문은 없고, 문선만 있다. 2층 둘레로는 계자난간을 설치했고, 기둥과 창방 아래 부분에는 당초문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이 곳 2층에서는 북쪽으로 백악, 서쪽으로 인왕, 남쪽으로 남산을 멀리 볼 수 있어서 이 곳이 자연과 함께 하며 연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2층 상부의 가구(架構)형식은 11량 구조로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결구되어 있다.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얹어서 하중을 균등하게 분포시켰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 매우 거대하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추녀마루·용마루는 모두 회반죽을 바른 양성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용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설치했으며, 지붕 합각면에는 풍판과 쫄대를 사용하여 판벽을 구성하였다. 고종 때 재건된 경회루는 당시 유가(儒家)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건설되었는데, 그 내용은 정학순(丁學洵)이 경복궁 중건 후인 1865년에 쓴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나타나 있다. 1층 내부 기둥을 원기둥, 외부 기둥을 사각기둥으로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2층 기둥은 외진주만 사각기둥이고, 내진주는 모두 원기둥이다. 외진-내진-내내진 3겹으로 구성된 2층 평면의 제일 안인 내내진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 세 칸을 둘러싼 여덟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제일 안 세 칸을 둘러싼 다음 겹인 내진은 12칸인데 1년 12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16칸에 달린 64문짝은 64괘를 상징한다. 가장 바깥을 둘러싼 24기둥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는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경회루에는 불을 잡아먹는 짐승인 불가사리 둘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연못 속에 넣어 화기(火氣)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을 정학순은 기록하였는데, 이 상징물 하나가 최근 경회루 방형 연못을 청소하면서 나왔다. 방형 연못 서북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물 속에 담겨 있는 육각형 평면의 하향정(荷香亭)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평가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으로 인왕산·북악산·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연못의 물과 섬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경복궁 강녕전(景福宮 康寧殿) 경복궁의 내전으로 임금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었던 공간. 강녕전은 경복궁 사정전 뒤편에 위치한 임금의 침전(寢殿)으로, 왕이 일상을 보내던 공간이다. 전각의 명칭인 '강녕(康寧)'은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오복(五福)에서 따왔으며 '근심 걱정 없이 안녕함'이라는 뜻이다.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었고, 현판의 글씨는 1995년 강녕전을 복원할 때 서예가 김응현(金膺顯. 1927~2007)이 썼다. 역사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지어진 전각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의 침전과 각종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에 중건되었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되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강녕전도 새로 지어졌으나, 1876년(고종 13)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888년(고종 25)에 다시 복원하였다. 강녕전이 복원된 이후에는 주로 외국 공사를 접견하거나 연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하기 위해 강녕전을 해체하여 창덕궁 희정당의 부재로 사용하였고, 이후 강녕전 터는 빈 터로 남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하였다. 경복궁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강녕전 및 침전 권역 복원은 1995년에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월대와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는 없으며,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용두와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양 측면의 툇마루 부분은 장주초석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강녕전의 내부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이 놓여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경복궁 교태전(景福宮 交泰殿) 경복궁의 내전으로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었던 전각. 건립자 : 조선 세종 건축양식 : 익공계 목조건축 규모 : 정면 9칸, 측면 4칸 별칭 : 중전, 중궁 경복궁 강녕전 뒤편에 위치한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왕비가 일상을 보내던 공간이다. 전각의 명칭인 '교태(交泰)'는 《주역(周易)》의 64괘 중 11괘인 '태괘(泰卦)'의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완림군 이재원(李載元,1831 ~ 1891)이 썼다. 역사 세종대에 지어진 전각으로, 조선 초기에는 왕비의 침전이 아닌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에 중건되었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되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태전도 새로 지어졌고, 이때부터 교태전이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876년(고종 13)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으나, 1888년(고종 25)에 다시 복원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하기 위해 교태전을 해체하여 창덕궁 대조전의 부재로 사용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하였다. 경복궁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교태전 및 침전 권역 복원은 1995년에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는 없으며,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용두와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기단의 양 끝에는 작은 초록색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문 안에는 아궁이가 위치한다. 교태전의 내부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이 놓여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동궁(東宮) 목차 1) 계조당(繼照堂), 춘방(春坊), 계방(桂坊)과 그 주변 건축(周邊建築) 2) 비현각(丕顯閣)과 자선당(資善堂) 및 등촉방(燈燭房), 수라간[水刺間] 등 궁궐 내에는 왕세자의 궁인 동궁(東宮)을 마련하여 세자와 세자빈을 거처하게 한다. 궐내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정전, 편전, 침전의 전각들을 갖추어 작은 궁궐과 같은 모습을 이룬다. 1) 계조당(繼照堂), 춘방(春坊), 계방(桂坊)과 그 주변 건축(周邊建築) 근정전의 동쪽,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의 안쪽 터에는 계조당(繼照堂)과 '금무'(今無)라 표기된 춘방(春房), 주방 등 여러 채의 건물들이 〈북궐도형〉에 그려져 있다. 계조당은 남쪽과 동쪽에 행각을 두르고 서쪽과 북쪽에 담장을 쌓았는데, 그 평면은 정면 5간 측면 3간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전후좌우에 툇간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조당은 세자의 수조당(受朝堂: 세자가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 곳)이다. 계조당의 북쪽에는 행랑과 담장으로 둘러쌓은 곳에 여러 채의 건물들이 각 마당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중 춘방(春坊)은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중앙 2간 폭은 대청이고 좌우 1간 폭은 방이라 추측되는데, 이곳은 왕세자의 시강원(侍講院)이다. 춘방 앞 남쪽의 계방(桂坊)은 익위사(翊衛司)의 별칭으로 세자의 시위를 맡던 관아인데 태조 때 두어 고종 32년(1895)에 폐하였다. 춘방과 계방의 서쪽에는 문기수청(門旗手廳)이 있는데, 훈련도감에 속하였던 군사인 문기수들이 있던 청으로 후일에는 궁내의 심부름을 맡아 하였다. 문기수청(門旗手廳)의 서쪽에는 궁궐문 옆에서 숙직하며 호위하던 무예별감(武藝別監)의 으뜸장수 통장(統將)의 관아인 통장청(統將廳)이 자리 잡고 있는데, '금무'(今無)라 명기되어 있다. 춘방의 북쪽 터에는 동에서 서로 나아가면서 행랑으로 둘러싼 3채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원역처소(員役處所)이고, 세 번째가 오상방(五相房)이며, 모두 '금무'(今無)라 표기되어 있다. 원역(員役)은 이서(吏胥)의 하나인 아전(衙前)으로, 이들의 처소는 고종 때 복원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오상방(五相房)은 고종 때 악공(樂工)들에게 처용무(處容舞)를 가르치던 장악원(掌樂院)의 한 부서이다. 2) 비현각(丕顯閣)과 자선당(資善堂) 및 등촉방(燈燭房), 수라간[水刺間] 등 비현각과 자선당은 궁궐 동쪽 담장에 건립한 작은 대문인 연청문(延淸門)의 서북쪽이자 오상방의 북쪽인, 사정전(思政殿)의 동쪽 터에 자리 잡고 있다. 비현각(丕顯閣)은 정면 6간 측면 2간의 장방형 평면으로 동쪽에 앞뒤로 방을 두고 그 서쪽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대청, 다음 정면 1간 측면 2간의 방, 다시 전후 방 1간씩을 두었다. 조선 초기의 비현각에 세조(世祖)가 납시어 세자로 하여금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강서(講書)하게 하고 또 질문도 하게 하였는데, 바로 이 당이 왕세자의 편전(便殿)이기 때문이다. 비현각의 서쪽 자선당(資善堂)은 정면 7간 측면 4간의 장방형평면을 이루는 전각으로 중앙에 대청, 그 좌우로 방을 두고, 주위를 툇마루와 협실로 둘러싸고 있는 동궁의 침전(寢殿)이다.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일차적으로 복원되었으나, 그 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된 것이다. 비현각과 자선당의 외곽은 장방형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행랑은 방과 청, 아궁이부엌[廚]으로 구성되었다. 또 비현각 서쪽 행랑과 자선당 동쪽 행랑 사이에 측간(厠間)들이 3간 있고, 비현각 동쪽에 수라간(水刺間)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궁을 모신 궁중 나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라 생각된다. 비현각 동쪽에는 건물 좌우와 남쪽을 둘러싼 3개의 마당을 형성하는 두 채의 건물이 남과 북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남쪽 동으로부터 장방(長房), 등촉방(燈燭房), 수라간(水刺間)이라 하고, 북쪽은 3개의 마당 모두에 장방(長房)이라 하였다. 이들은 방과 청, 부엌으로 구성되었는데, 장방은 서리(書吏)가 있던 처소이고, 등촉방은 궐내에서 쓰는 등촉을 관장하던 곳이며, 수라간은 동궁에 올리는 음식을 전담하던 곳이다.] [경복궁 소주방(景福宮 燒廚房)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와 궁중의 잔치음식 등을 장만하던 경복궁의 부엌이다. 경복궁에서 음식을 조리·보관·제공하던 공간으로, 흔히 수라간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소주방과 수라간은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는 두 공간을 구분하여 소주방은 음식을 조리하는 기능, 수라간은 음식을 차리는 기능이 강하다고 기록하였다.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867년(고종 4)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세워졌고,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일제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최한 일종의 박람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복궁의 여러 전각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경복궁 2차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 10월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15년 1월 건물 17동의 복원이 완료되었고, 같은 해 5월 일반에 공개되었다. 소주방 복원은 2004년 주요 건물과 부속시설물의 배치상태와 규모 등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실시한 소주방지(燒廚房址) 발굴조사와 《조선왕조실록》, 《조선고적도보》, 《궁궐지》, 《왕궁사》, 《북궐도》 등의 고문헌 고증을 거쳐 이루어졌다. 한편 건물터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 144점, 도자기류 227점, 금속류 46점, 기타 3점 등 총 420점에 이른다. 소주방은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동쪽,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 남쪽, 동궁인 자선당과 비현각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내소주방, 외소주방, 생물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소주방(內燒廚房)은 왕과 왕비 등이 먹는 아침 수라와 낮것상이라고도 하는 점심 수라, 저녁 수라 등 일상식을 만들던 공간으로, 안소주방이라고도 불린다. 일상 주식과 각종 찬품(반찬)을 만들고, 간식은 생과방의 협조를 얻어 같이 올렸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2칸에 동·서행각 각각 5칸과 남행각 9칸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밖에 동외행각 6칸과 남외행각 15칸, 창고 2칸이 딸려 있고, 우물도 있다. 외소주방(外燒廚房)은 연회음식을 장만하던 공간으로, 밖소주방 또는 난지당(蘭芝堂)이라고도 불렀다. 정월, 단오, 추석, 동지 등의 명절과 궁 안 왕족 및 궁 밖 종친의 생일, 왕족의 관례나 가례 때 올리는 잔칫상을 준비했다. 건물은 정면 11칸·측면 2칸에 동·서행각 각각 5칸과 남행각 13칸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밖에 동외행각 13.5칸과 남외행각 15칸이 딸려 있다. 생물방(生物房)은 생과, 숙실과, 조과, 차, 화채, 죽 등 임금의 별식과 휴식을 준비하던 공간으로, 복회당(福會堂), 생과방, 생것방이라고도 불렀다. 왕가의 친척이나 손님이 왔을 때에도 다과상을 차려 올렸다. 건물은 정면 11칸·측면 2칸에 동·서행각 각각 5칸, 남행각 9칸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밖에 동외행각 23칸이 딸려 있다.] [경복궁 자경전(景福宮慈慶殿)은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고종 4년(1867년)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경복궁에 지은 전각으로, 고종 10년 12월 화재로 불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다시 지었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경복궁 자경전은 왕비의 정침인 경복궁 교태전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승하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大妃)로 승격되어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주로 사용하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재의 자경전은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자미당(紫微堂) 터에 조대비(趙大妃, 神貞翼皇后)를 위해 지은 것이다. 준공 후 고종 10년(1873년) 12월 화재로 인해 고종 13년 다시 세웠으며, 다시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하였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구조와 쓰임새 자경전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寢房)인 욱실을 둔 복안당(福安堂)은 겨울을 위한 공간인데 정면 5칸 반, 측면 2칸이다. 중앙부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2칸, 전·후 툇간의 자경전은 낮시간에 거처하던 공간이고, 동남부의 다락집 청연루(淸讌樓)는 누마루가 돌출되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동쪽의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은 시녀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전면 마당 동·남·서쪽에는 각각 동행각·남행각·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좌측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우측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건물의 중심되는 곳의 평면은 교태전과 같이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그 왼쪽과 오른쪽으로 커다란 온돌방을 둔 침전의 기본 형식을 갖추었다. 협경당 전면은 담으로 구획하여 자경전과 구분되지만, 후면은 건물이 한 몸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기단 높이와 지붕 용마루 높이를 자경전보다 낮게 하고 공포도 몰익공으로 간략하게 하여 자경전에 비해 격식을 낮추었다. 자경전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직접 놓아 끝이 날카로운 수서를 낸 출목이 없는 이익공으로 결구되었고, 겹처마를 걸어 지붕을 받도록 하였다. 쇠서와 보머리에는 초각을 하였고, 안쪽으로는 조각된 보아지를 내었다. 주두 위에는 도리 방향으로 첨차를 놓아,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있다. 도리 밑에 보 방향으로 화반을 놓아 도리를 받게 하였다. 가구(架構)는 앞면과 뒷면의 퇴주(退柱)와 안쪽의 고주 사이에는 툇보를 걸었으며, 내부의 두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고 그 대들보 윗면에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합각면은 전돌로 마감하였다. 전면 중앙 3칸은 전퇴(前退)를 개방하여 마루를 깔았고 기타 부분과 청연루·협경당의 외부 기둥사이에는 모두 띠살창호를 설치하였다. 청연루 누마루는 높직한 돌기둥이 받치고 있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달아 운치를 돋구었고, 후면에는 단(段)을 둔 쪽마루를 두었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용두·잡상을 얹었다. 자경전 전면(前面)을 둘러싼 동·서·남 행각은 무익공(無翼工) 3량 구조로 내정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띠살문을 설치하였고, 외측벽은 두벌대의 장대석 위에 사괴석으로 아랫부분을 쌓고 그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남행각 중앙에는 정문인 만세문(萬歲門)이 나 있다. 자경전 후원(後園) 북쪽 담과 이어진 굴뚝에는 왕족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무늬가 베풀어졌고, 서쪽 벽돌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상문자가 액자처럼 조성되어 있다.] [경복궁 흥복전(景福宮 興福殿) 흥복전은 왕의 후궁들이 살던 공간인 빈궁嬪宮이었다. 신정왕후 조대비趙大妃(1808~1890)가 1890년(고종 27년) 4월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기 위해 흥복전 일곽이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식 정원을 조성하였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건립했다. 완전히 새 건물을 지은 건 아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경복궁 중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녕전, 교태전 등 내전의 주요 건물들이 2차례에 걸쳐 불타 없어지자, 임금이 사용하면서 경연, 신하들과 외국 공사를 만나는 등 공식적인 업무와 행사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후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머물렀고 이 곳에서 승하했다. 문화재청은〈경복궁 복원 2차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2015년 9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총 174억원을 들여 약 3년 3개월에 걸쳐 복원 공사를 진행했고 2019년 7월에 시범 개방했다. 궁궐 복원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식 화장실과 빔 프로젝터, 전기 시설을 설치하여 화제가 되었다. 단순히 보존만 하는 게 아닌, 회의, 교육, 공연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기 위함이라고. 사실 예부터 보존 된 건물을 건드린 것도 아니니 큰 문제는 없고, 박제된 궁이 아닌 시민들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전기 시설 등 화재 위험 요소와 관련하여 보다 철저한 관리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현대시설 갖춘 ‘경복궁 흥복전’ 복원문화 새 방향 제시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세계일보 기사 입력일 : 2019-07-16 고종이 사신 접견했던 전각… 1867년 건립 / 1917년 창덕궁 재건때 목재 사용위해 헐어 / 10일 개방… 단청은 2022년 이후 칠하기로 / 냉·난방, 현대식 화장실, 빔프로젝터 설치 / 문화재 관리 원칙 원형보존 최선이지만 / 건축물 특성에 맞는 활용방안 마련 필요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경복궁을 찾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 장소 중 하나로 경복궁을 염두에 두고 사전 확인차 들른 것이다. 경회루 등을 둘러본 정 실장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들이 단청 작업을 제외하고 최근 복원을 사실상 마무리한 흥복전으로 이끌었다. 내부시설까지 꼼꼼하게 체크한 정 실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정 때문에 경복궁 행사가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정 실장의 경복궁 방문, 궁능본부의 흥복전 소개 등은 궁궐과 같은 고건축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최근의 인식과 방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흥복전이 냉·난방시설, 현대식 화장실, 전기시설, 빔프로젝터 등 고건축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 장비를 갖추어 복원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문화재 관리의 대전제인 원형에 다소 변형을 주어서라도 건축물의 성격에 맞는 활용을 적극 모색하겠다는 분명한 신호인 셈이다. ◆빔프로젝터 갖춘 궁궐 전각, 회의장 등으로 활용 기대 흥복전은 고종(재위 1863∼1907)이 외국 사신을 접견한 경복궁의 전각이다.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건립됐으며, 고종의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정왕후가 1890년 승하한 장소이기도 하다. 큰불이 난 창덕궁의 침전 권역을 재건할 때 경복궁의 전각 일부를 옮겨 사용했는데 1917년 교태전, 강녕전, 함원전, 만경전과 함께 흥복전도 헐렸다. 2015년 복원이 시작돼 2019년7월10일 시범개방된 흥복전은 현판을 달지 않았고, 단청도 2022년 이후에나 칠할 것으로 보이지만 경복궁의 전각으로서 위엄과 품격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외관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언뜻 보면 궁궐 전각에는 어색해 보이는 내부의 현대적 장비다. 복원된 흥복전을 단순히 관람의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계단계부터 포함했다. 궁능본부는 교육장소나 세미나, 각종 회의 등의 장소로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흥복전은 본전과 행각(行閣·궁궐, 절 등의 주요 건물 좌우에 지은 행랑)을 합쳐 전체 615㎡이고, 회의장 등으로 활용 가능한 본전은 250㎡로 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게 궁능본부의 설명이다. 현대적 장치를 설치해 활용도를 높인 경복궁의 건물로 소주방이 있다. 1915년 일제가 훼손하고 꼭 100년 만인 2015년 복원된 소주방에는 전기설비를 복원 작업이 끝난 뒤 추가했다. 경복궁의 주방 역할을 했던 소주방의 특성을 살려 전통음식 시식행사 등이 자주 열리는데, 음식 준비를 위해 전기설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흥복전이 안성맞춤의 전통공연 장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대청이나 방을 이용하면 무용의 호흡, 선 등을 생생하게 느끼며 관람이 가능하고, 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실내에서 감상하는 전통의 방식을 재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한 전통공연 전문가는 “예전에는 마당에서 하는 공연을 실내에 앉아 보는 형식이었고, 발디딤새 하나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공연자와 관람객의 거리가 가까웠다”며 “이런 방식을 구현할 수 있는 공연장이 없다시피 한 게 현실인데, 흥복전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건축물 특성 감안한 활용 방안 적극 고려해야” 복원된 전통 건축의 활용을 위해 현대적 장비를 갖추는 게 익숙한 시도는 아니다. 경복궁처럼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가 큰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문화재 정책의 대전제인 ‘원형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대적 장비의 설치는 원형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경복궁 자선당이 이런 사례 중 하나다. 자선당은 세자의 생활·교육 공간으로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것을 1999년 복원했다. 궁궐 전각의 활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때라 건물을 본모습대로 되살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집중됐다. 활용을 위해 원형과 다른 설비를 하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은 당연지사. 자선당은 지금도 외부 관람만 가능할 뿐 내부 관람은 제한되고 있다. 물론 보수, 복원을 하는 전통 건축물 모두에 현대적 장비를 설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활용보다는 엄격한 원형 유지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 대상도 많기 때문이다. 일단 흥복전처럼 없어졌던 건물을 새로 짓는 경우에는 활용을 위한 설비를 갖추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활용의 내용이 건물의 성격에 부합하는가도 살펴야 한다. 궁능본부 이정연 과장은 “해당 건물이 당대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감안해서 활용의 방식을 결정하고, 그에 맞는 최소한의 설비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국보, 보물 등으로 지정돼 잘 보존되고 있는 건물에 변형을 가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고건축 전문가는 “건물의 원래 성격을 유지하는 범위에서 내부의 변형을 허용해야 한다. 예전처럼 원형만 고집할 경우 문화재 활용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경복궁 향원정(景福宮 香遠亭)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에 있는 누각(樓閣). 2012년 3월 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0 (세종로) 경복궁 건청궁 남쪽에 위치한 누각(樓閣)으로, 누각은 사방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여러 층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말한다. 전각의 명칭인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라는 뜻으로, 중국 북송시대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참고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이 직접 썼다. 역사 1885년(고종 22) 즈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오늘날까지 잘 남아 있다. 향원정의 연못을 건너는 다리인 취향교는 6.25 전쟁 당시 훼손된 것을 1953년에 복원하였으나, 그 위치와 형태가 다르게 복원되었다. 2017년 향원정 보수공사를 하면서 취향교를 원래의 위치에 본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기로 하였고, 2021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구조 및 형태 2층 규모의 건축물로,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위에 육각형의 장주초석을 올렸다. 1·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 창문을 두었다. 공포는 익공계로 1출목 2익공 형태이며, 바닥의 가장자리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가치 및 의의 향원정은 고종이 휴식을 취했던 공간으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대표 건물이다. 심미성과 비례감이 뛰어나며 주변의 풍경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3월 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건청궁(乾淸宮)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궁궐이다.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는데, 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년 10월 18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건청궁 복원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 4개월 만에 완공됐다. 고종은 건청궁을 왕의 사비인 내탕금으로 건립했다.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벗어나 친정을 선언한 1873년에 지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건청궁 창건은 정치적 자립 선언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 및 낙선재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이 배치돼 있다. 뜰에는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고종시' 감나무가 경상남도 산청군의 기증으로 식재되어 있다. 2007년 복원 이후 목재가 썩는 등의 현상이 보였고, 조사 결과 지붕이 잘못 지어져 누수되는 것으로 알려져 부실 복원 논란이 일었다. 장안당 장안당(長安堂)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사랑채의 개념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측면 3칸, 7량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북행각과 동행각이 딸려 있는데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이 곳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곤녕합 곤녕합(坤寧閤)은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된다. 곤녕합 내부에는 문화재청이 의뢰해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궁중유물기준에 따라 복원한 자개침대 등 궁중생활용품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9] 장안당과는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금성의 곤녕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옥호루의 명칭은 옥호루(玉壺樓)가 아닌 옥곤루(玉壼樓)라는 주장도 있다. 복수당 복수당(福綏堂)은 별채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궁인들의 거소로 추정된다. 관문각 관문각(觀文閣)은 고종의 서재로, 원래 전통적인 목조건물 관문당이었다. 그러다 1891년에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설계로 개축되었다. 경복궁 안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로, 2층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문각은 양관이라 불리며 주로 외국인을 접견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 다만 공사 과정에서 관리들의 비리와 부실 공사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 부실공사로 1901년 헐리게 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알려지지 않아 경복궁 복원 계획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건청궁 복원 사업이 진행될 때도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 터만 복원되었다. 1992년 1월 관문각의 존재가 사진첩 등을 통해 확인되었다. 향원정 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궁처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경복궁 태원전(景福宮 泰元殿) 경복궁 서북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국상(國喪)이 있을 때 발인하기 전까지 시신을 모셔두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태원(泰元)은 하늘이라는 뜻이다. 역사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새로 지어진 전각이다. 1890년(고종 27) 신정왕후 조씨의 국상 때와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의 국상 때에 관을 모시는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태조와 원종의 어진을 모사하기 위해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어진을 태원전으로 옮겨 잠시 봉안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태원전은 훼철되었고, 그 자리에는 일본인 관료들의 관사가 들어서게 된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수도방위사령부 제30경비단이 지금의 태원전 자리에 주둔하게 되면서 1996년까지 군부대 부지로 사용되었고, 2005년에 태원전 일부가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전각의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國立古宮博物館,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은 궁중유물의 연구·조사·수집·보관 및 전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소속기관이다. 2005년 8월 16일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경복궁 내)에 위치하고 있다. 관장은 고위공무원단 나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 또는 학예연구관으로 보한다. 조선, 대한제국 시대의 왕실 복식 및 생활 관련 유물 약 40,000여 점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내에 위치하고 있다. 연혁 1908년 9월에 황실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92년 10월에는 4대 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 석조전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궁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 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혔기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이자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다. 이후 철저한 준비 끝에, 광복 60주년인 2005년 8월 15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경복궁 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이전 개관하였다. 2004년 11월 '조선왕실역사박물관추진단'을 발족하여 박물관 설치를 준비했으며, 다음해 3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명칭을 확정하고 그해 8월 개관하였다. 이후 2007년 11월 전관개관하였다. 연표 1992년 10월 30일: 문화재관리국 소속으로 궁중유물전시관 설치. 1999년 5월 24일: 문화재청 소속으로 변경. 2005년 8월 16일: 국립고궁박물관과 덕수궁관리소로 개편. 조직 관장 기획운영과 전시홍보과 유물과학과 소장품 국보와 보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으며, 이것 외에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을 장지까지 운반했던 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남은들상여가 있다. 국보 번호 등록명 한자명 등록일 위치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310호 백자 달항아리 白磁 壺 2007년 12월 17일 보물 번호 등록명 한자명 등록일 위치 837호 복각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複刻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1985년8월9일 과학문화실 839호 신법 지평일구 新法 地平日晷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40호 신법 지평일구 新法 地平日晷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41호 간평일구·혼개일구 簡平日晷·渾蓋日晷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44호 창덕궁 측우대 昌德宮 測雨臺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45호 앙부일구 仰釜日晷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56호 소총통 小銃筒 1986년 3월 14일 과학문화실 860호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1986년 3월 14일 과학문화실 932호 영조어진 英祖御眞 1987년 12월 26일 궁중회화실 1189-2호 박문수 초상 朴文秀 肖像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1442호 일월반도도 병풍 日月蟠桃圖八 疊屛 2005년 8월12일 궁중회화실 1443호 왕세자탄강진하도 병풍 王世子誕降陳賀圖十 疊屛 2005년8월12일 궁중회화실 1444호 은입사귀면문철퇴 銀入絲鬼面文鐵鎚 2005년 8월 12일 궁중회화실 1479호 유숙 초상 및 관련 교지 柳潚 肖像 및 關聯 敎旨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1490호 이성윤 초상 李誠胤 肖像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1491호 연잉군 초상 延礽君 肖像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1492호 철종 어진 哲宗御眞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등록문화재 번호 등록명 한자명 등록일 위치 318호 순종어차 純宗御車 2006년 12월 4일 대한제국실 319호 순종황후어차 純宗皇后御車 2006년 12월 4일 대한제국실 452호 은제이화문탕기 銀製李花文湯器 2009년 10월 12일 대한제국실 453호 은제이화문화병 銀製李花文花甁 2009년 10월 12일 대한제국실 ] 경복궁 안내도 국립고궁박물관 위치도 * 15:06~15:17 경복궁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는 지하철 3호선 승차 대기 * 15:17~15:39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22분 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