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육군 항공대의 전투기. 특이하게 달린 쌍발엔진이 특징으로 이 덕분에 '쌍꼬리의 악마(fork-tailed devil)'란 별명을 얻었다. 기관총 등의 무장이 기수의 콧등에 몰려 있어서 명중률이 높았으며 일반적인 전투기의 몸통이 있어야 할 곳이 텅텅 비어있고 장갑도 비교적 튼튼해 의외로 생존율도 괜찮았다. 설계자는 스컹크 웍스의 초대 보스로 유명한 켈리 존슨.
본래 P-38 시리즈는 미국 본토로 침공해올지 모를 적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격기였기 때문에 개발 초기부터 뛰어난 상승력과 속도, 고공성능에 중점을 둔 기체로 개발되었고 결국 수평비행속도 400mph(약 644km/h)를 돌파한 최초의 전투기로 기록되고 있다. 게다가 가급적 미 본토에서 먼 거리에서 적 폭격기를 요격해야 했으므로 비행거리도 매우 길었다. 요격기로서의 상승력을 높이기 위해 큰 주익을 장착하면서 익면하중이 낮아졌고 그로인해 부차적으로 선회성능이 상당히 좋아졌다.
예외적으로 구형은 고속에서 조종성이 떨어져서 그대로 땅에 혹은 바다에 곤두박질친 적이 많았지만, 후기형에는 다이브 플랩(Dive Flap)이란 것이 붙어서 이런 문제가 줄었다. 다이브 플랩은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스피드브레이크와 달리, 고속에서 주날개의 효율을 높이고 주날개에서 발생하는 후류를 이용, 수평꼬리날개에서 만드는 양력[1]을 줄여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 전술기 수준으로는 높은 외부 탑재능력을 가졌고, 쌍발기라는 특성상 기수에 대형,대량의 장비를 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전투기형 이외의 파생형이 많다.
기수의 무장을 철거하고 고성능 카메라를 여럿 탑재한 비무장 정찰기형인 F-4, F-5[2]는 연합군의 중요한 정보 수집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문학가이자 조종사였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마지막 비행을 함께 했던 기체로도 유명하다.[3]이 정찰기형은 그 활용도 만큼이나 손실률이 매우 높아서[4], 전쟁 말기에는 주력 정찰기의 자리를 내어준다.[5]
P-38들은 유럽전선 전쟁 말기에 이르면 높은 무장 탑재능력을 활용하여 폭격기처럼 편대를 짜서 폭격임무에도 투입되었는데, 이 폭격 편대의 선두기 역할을 위해 무장을 철거하고 기수를 유리로 바꿔서 폭격조준기와 폭격수 자리를 설치한 드롭스누트형이나, 폭격 조준용 대형 레이더를 설치한 패스파인더형으로 개조된 기체들도 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야간전투기형인 M형이 전쟁 말기에 투입되었다. 기수 아래에 소형 레이더를 설치하고 조종석 뒤편에 레이더 조작수 자리를 마련했다.
이외에도 소량의 화물, 인원 수송 임무에도 활용되었고, 각종 실험기로도 활용되었다.
심지어는 전쟁이 끝난 뒤, 인도의 한 항공사는 기수 전체를 유리로 바꾸고 고급 좌석과 편의시설을 갖춘 VIP수송기로 개조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P-38은 특히 태평양 전쟁에서 전투기로서의 명성을 많이 날렸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들과 비교하여 한 급수 이상의 고성능 전투기로, 고고도 성능이 우수[6]하고 고속비행성능도 뛰어났기 때문[7]이었다.
하지만 빠른 속력으로 날아와 강한 화력으로 기총을 퍼붓고 도망치면 일본군 전투기들은 속수 무책이었으나 일격이탈 전술에 숙달되지 못했던 미군은 일본군의 장기인 선회전에 말려들어 격추당하는 일이 속출했다. 무거운 기체를 이용한 급강하이탈도 초기형 기체 자체의 문제점과 대부분의 전투가 중고도 이하에서 벌어진 태평양전쟁의 특성때문에 어려웠고 일본군은 P-38을 '정어리꼬지(페로하치)'라고 라이트닝을 부르며 손쉬운 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일본군은 P-40을 P-38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기체로 평하고 있다. 어떤 조종사는 회고록에서 고고도에서 만난 P-38을 매우 무섭게 여긴 반면, 어떤 조종사는 기동성도 나쁘고 덩치가 커서 맞추기도 쉽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전자는 실력있는 조종사를 만나 고생했던 거 같고 후자는 운좋게도 풋내기 조종사가 모는 P-38만을 만났거나, 문제가 많던 초기형 P-38만을 만났던 것 같다.[8]
초기 미군조종사들의 이런 전술적 실수에도 불구하고, P-38은 제로센 등에 비해 속도와 상승력에서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미국 조종사들은 전투에 임할지 퇴각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고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우수한 고공, 고속성능에 당연히 방어면에서도 더 튼튼했고, 화력에서도 우세했다. 뿐만 아니라 무장이 모두 기수에 장착된 덕분에 화력의 집중도가 높았기 때문에 P-38은 날개에 기관총을 장착한 다른 전투기들에 비해 더 먼거리에서도 더 높은 명중률을 기록했다. 이는 방어력이 취약한 일본 전투기들을 상대로 특히 더 위력을 발휘했다.
미군 조종사들이 P-38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전술에 익숙해지면서 P-38은 제 위력을 발휘, 결국 태평양 전선에 배치된 미 육군항공대 전투기들 중 가장 많은 일본군 항공기를 격추시킨 기종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P-38은 태평양 전선에서 약 1700기의 공중전 격추를 기록했으며, 중국-버마-인도 전선에서도 157기의 격추를 기록했다. 때문에 제로센 전투기의 설계자인 "호리코시 지로"는 "P-38의 쌍발 엔진음이 남태평양의 모든 일본 조종사들에게 익숙해졌으며, 또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역에서 P-38의 최초의 성공적인 전투로 기록된 것은, 1942년 12월 27일 파푸아 뉴기니 포트 모르즈비 상공에서 벌어진 전투로, 제 35 전투기 전대 소속 제 39 비행대대는, 11기의 일본기 격추를 보고했다. 반면 P-38은 단 한 기를 잃었다. 11기 중 2기를 격추한 파일럿은, 이후 40기의 일본기를 격추시키며 P-38 에이스를 명성을 떨치게 되는 리처드 "딕" 봉 Richard "Dick" Bong 이었다. 그를 포함해서, 태평양 전선의 미 육군항공대 에이스 다수가 P-38로 전과를 올렸다.[9]
한편 P-38은 장거리 비행성능을 살려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탄 G4M 폭격기를 격추시키기도 했다. 좀 더 정확한 이유는 작전 당시 미군이 가진 가장 긴 항속거리의 전투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P-38의 전과에 고무된 태평양 전역의 미 육군항공대는 더 많은 P-38을 요구했지만, 미군 육군항공대에게 태평양 전역은 어디까지나 '2순위' 고려대상이었다. 따라서 P-38은 유럽전역의 폭격기 호위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하지만...
정작 유럽전선에서 라이트닝은 전투기로서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 유럽전선에서 P-38이 마주친 Bf109계열은 이 전투기보다 고고도 성능이 더 우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이트닝은 수평비행속도나 상승력에선 독일전투기들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던 반면, 특히 초기형들은 시속 800km 이상 고속에서의 조종성 문제로 급강하 최대속도가 833km/h 정도에 제한된 때문에 급강하시 시속 900km 이상으로 가속할 수 있던 Bf109나 Fw190 등 독일 전투기들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었다. #
이는 P-38 초기형에서, 시속 800Km 이상 고속비행시, 주익 일부의 공기흐름이 부분적으로 음속을 넘으며 발생하는 공기흐름 변화로 인해 수평미익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 탓이었다. 위의 '성능' 항목에서 언급된 것 처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기형에서는 '다이브 플랩'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량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944년으로, 그 시점에는 이미 유럽의 미 육군항공대에는 P-47과 이어 P-51 머스탱이 배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P-38이 일선 전투기로 활동할 기회는 많지 않았고, 독일 전투기들과의 전투에서 기록한 초반 부진의 오명을 씻기엔 조금 때늦은 조치가 되었다.[10]
또한 유럽전선에서 미 육군항공대 소속 전투기들이 주로 맡던 임무는 매우 높은 고도[11]에서 폭격기를 호위하는 것이었는데, 이 정도 고도에서는 P-38의 조종석이 상당히 추웠다고 한다. 대부분의 단발 전투기들은 엔진 바로 뒤에 조종석이 위치하여 어느 정도 엔진 열기로 조종석이 보온이 된 반면, P-38은 조종석과 엔진이 먼 구조적 특성상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태평양에서는 오히려 P-38이 너무 덥다고 투덜거리는 조종사들이 있었는데, 비행 중에 캐노피를 열고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더운 태평양 전선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낮은 고도로 내려오면(주로 전투를 벌이지 않는 이착륙 상황때 특히) 전투기의 캐노피를 열고 다니곤 했는데, P-38은 캐노피를 열고 비행하면 캐노피에서 발생한 후류가 수평꼬리날개에 영향을 미쳐서 진동이 발생했다고 한다. 더워도 추워도 문제
또한 P-38은 일본군 전투기를 상대로 선회전보다는 일격이탈 전술을 주로 사용했지만, 유럽전선에서는 반대로 독일군 전투기들을 상대로 선회전을 벌였다. 이는 Bf109 후기형이나 Fw190같은 전투기들에 비해 P-38의 최대속도가 더 느렸던 대신, 선회성능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축군이었던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 유전지대 공습 당시, 루마니아군의 전투기인 IAR.81에게 선회전을 걸었다가 참패한 전력이 있다.[12] IAR.81이 Fw190과 워낙에 흡사하게 생겨서[13] P-38 조종사들이 Fw190을 상대하듯 선회전을 걸었던 것이다[14].
그러나 유럽전선에 투입된 라이트닝이 겪은 가장 큰 문제점은 항속거리 부족. P-38은 당시 전투기들 치고는 비행거리가 긴 편이었고, 그 때문에 폭격기 호위전투기로 투입되었으나, 영국기지에서 출발하여 독일 본토까지 폭격기를 호위해주기에는 부족했다. 때문에 유럽전선에서는 호위전투기로서의 임무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독일 본토까지 왕복이 가능한 P-51 머스탱이 등장함에 따라 더더욱 전투기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그러나 P-38은 넉넉한 무장탑재공간, 두터운 장갑, 적 대공포에 엔진 하나를 얻어 맞아도 나머지 하나로 살아돌아올 수 있다는 이점[15] 때문에 지상공격임무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16] 독일군에게는 그 독특한 쌍동체 때문에 '악마의 사다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P-38은 여러방면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여줬으나 P-51이나 P-47 썬더볼트 같은 다른 미 육군 항공대의 주력전투기보다는 약간 어중간한 성격의 전투기였다. 특히 값은 1/3 수준이면서도 우수한 공중전 능력과 초장거리 비행능력을 갖춘 P-51이 등장하자 미 육군 항공대는 P-38보다는 P-51을 더 선호하였다. 사실 P-38L-5-LO 같은 후기형은 공중전에 있어서도 P-51D보다 최고속도나 기동성에서 우위를 가지는등 전반적인 성능에서 더 우수했다. 단지 항속거리도 더 짧고 3배나 더 비쌌을 뿐이다. [17]
미 육군 항공대가 육군에서 독립하여 미 공군이 됨에 따라 1948년 당시 남아있던 소수의 P-38은 F-38로 이름이 개칭됐으나, 이들은 1949년에 모두 퇴역하였다. 퇴역한 기체 대부분은 폐기처분되어서 현재 비행 가능한 상태로 남은 기체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아카데미 P-38 라이트닝 은 아카데미 황금기라 할수 있는 1990년대 초반 첫 등장한 제품입니다. 초기에는 아카데미가 제품을 설계할 능력이 없어 미니 크라프트사 (MINI CRAFT) 사가 설계를 맡고 금형제작과 사출을 아카데미가 하는 방식으로 에어로 제품들이 생산되었는데.. 이는 1980년대 초반부터 일부 144 스케일 이나 288 스케일 폭격기 씨리즈들이 미니크라프트사와 협작으로 만들어진 제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아카데미는 B-17 와 B-24 4발 폭격기 시리즈를 내놓게 되는데 이 역시 미니크라프트 사가 설계한 제품이였고 이후 72 스케일프롭기 제품들과 B-29A 폭격기 까지 두 회사의 밀월관계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아카데미는 2000년도 초반까지 미니크라프트사와 관계를 이어오다 2000년도 들어 갈라서게 되는데 여기에는 미니크라프트사의 지나친 라이센스 인상이 이유라는 것과 수출용으로만 계약되어 있던 제품들이 국내용으로 판매되는등 계약에 관계된 이유라는등 의 스토리가 있는데 제 생각에는 두가지가 모두 관계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시 90년대 엄청나게 신제품 라인업을 늘리면서 아카데미는 빠르게 기술을 익혀갔고 90년대 후반 IMF 사태로 국내시장에 유일하게 살아남으면서 거의 국내시장을 독식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에따른 이윤분배등의 여러가지 사연이 복합적으로 있었으리라 생각죕니다.
오늘 소개한 P-38 역시 미니크라프트사와의 협약으로 제작된 제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품의 히스토리는 이렇습니다.
1991년 미니크라프트 상표로 첫 출시된 제품
이어 1994년 아카데미에서 야간형 M형이 출시 수출용인데 국내시장에 일부 풀림..
1994년 J형이 국내에 출시 당시 많이 보던 제품이다.
1995년 E형이 국내에 출시...
미니크라프트 상표로 정찰형 F-5E 형이 출시 이는 국내에서 일부 수출형이 풀림.
1996년경 야간 전투기형 L형이 출시됨.. 수출형 이나 역시 국내에도 풀림...국내에는 2001~2003 년도 국내에 수출형이 풀림.. 아마 미니크라프트사의 계약 파기로 인한 재고 떨이로 보입니다.
2004년 경 재판된 P-38 제품 기존에 J형란 로고가 삐진대신 J/L/E형 부품이 모두 들어가게 된다. 유명한 박스아트로 설계는 일본의 요시다씨가.. 박스아트는 다카니 화백의 박스아트..
1999년 미니크라프트 상표로 나온 제품으로E형을 재현 아카데미와 다른점은 마킹이 다름...
이상 제품들도 미니크라프트사 상표로 2000년도 초반 나온 제품으로 마킹이 다르다. 주로 유럽전선 마킹을 재현중..상표는 다르나 아카데미 제품과 돌일.. 그리고 가격은 더 비싸지...
2005년경 재재판 된 제품 기존 E/J/L/M 형 부품이 모두 들어간 대신 가격이 대폭 오름...
2006년경 출시된 F형 부품이 추가되고 데칼도 바뀜 유명한 글라시어 걸 기체 재현...
1942년 사고로 인해 그린란드에 비상착륙했고 세월에 의해 빙하 속에 파묻힌 P-38 한 대(일련번호 41-7630)를 1992년 발굴했는데 놀랍게도 50년 동안 빙하 속에 파묻혀있던 기체의 외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메가트론?캡틴 아메리카?? 이것을 전세계에 남아있는 오리지널 P-38의 부품을 끌어모아 비행가능하도록 개조한 기체가 바로 그 유명한 빙하의 소녀(Glacier Girl)이다. 현재 세계에서 비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P-38 중 한 대다.
덧붙여 당시에 같이 빙하에 착륙해 파묻혀 있던 B-17폭격기 들은 모두 심한 손상을 입은 뒤였다! [20]
발굴 당시 사진
복원 후 빙하의 소녀의 비행 장면.
1.박스 및 외형
2.내용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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