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6일 오늘의 역사
2020년 의암호 선박 침몰 8명 사상
8월 6일 오전 11시30분쯤 춘천 서면 의암댐에서 경찰 순찰 선박이 와이어에 걸리면서 이를 구조하려던 민간 고무보트와 행정선 등 3척이 전복됐다 사고는 이날 오전 11시 30분쯤 의암댐 상부 500m 지점에서 일어났다. 엿새째 이어진 폭우로 수초섬이 떠내려가자 경찰정이 출동해 고정하는 작업에 나섰다가 댐 보호를 위해 설치해 놓은 와이어에 걸려 뒷부분부터 침몰했다. 이에 민간 업체 직원 1명이 탄 고무보트와 시청 기간제 근로자 등이 탄 행정선 등 2척이 구조에 나섰으나 함께 전복됐다. 이들 선박들은 폭 13m의 댐 수문을 통과해 하류로 휩쓸려 내려갔다.
사고 이틀 만인 7일 오전 경찰관 이모(55) 경위 등 2명이 타고 있던 경찰정이 발견되기도 했다. 구조작업은 민·관·군·경 등 3만4000명 이상의 인력과 총 3500대 이상의 장비, 수색견과 음파탐지기까지 투입, 한달 넘게 이어지며 총 5명의 실종자 시신을 발견했지만 나머지 1명의 실종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9월 중순 종료됐다.
2015년 ‘현대미술의 거장’ 천경자 화백 별세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화백이 2015년 8월 6일 미국 뉴욕 자택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생사 여부를 놓고 10년 동안 이어져 온 논란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1998년부터 천 화백과 뉴욕에서 함께 산 맏딸 이혜선씨는 “2003년 7월 2일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줄곧 병석에 있던 어머니가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급격히 몸이 안 좋아졌다”며 “지난 8월 6일 새벽 5시쯤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의사가 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이어 “어머니의 시신은 화장해 극비리에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히 장례를 치른 뒤 사망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천 화백의 사망 사실을 늦게 알린 점에 대해 “어머니나 나나 생사 논란, 위작 논란 등으로 맘고생이 심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천 화백의 생사 여부는 지난 10년 동안 미술계의 미스터리였다. 그를 직접 만났다는 사람이 없어 화단에선 “이미 숨진 게 아니냐”는 말이 무성했다.
지난 해 초엔 천 화백이 속해있던 대한민국예술원이 생존 여부를 이씨에게 문의했는데 명예훼손이라며 거절당해 논란이 더 커진 바 있다.
1924년 전남 고흥 출생인 고인은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학을 전공했다. 이후 1952년 당시 피란지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뱀 그림 ‘생태’로 스타작가 대열에 들어섰다.
1980년대에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천경자 화백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절필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난 뒤 1998년 11월 일시 귀국해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이후 딸과 함께 미국 뉴욕에 머물던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져 외부 활동을 중단했었다.
2011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66주년 맞아 경남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한국인희생자 추모제
2005년 2005 동아시아컵 여자축구대회 한국 우승
2004년 국내 첫 인형극박물관 개관(관장에 강승균씨 선임)
2003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서 폭탄테러, 160여명 사상
1998년 모니카 르윈스키, ‘클린턴과 10차례 성관계’ 연방대배심서 증언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섹스 스캔들을 빚은 전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25)가 1998년 8월 6일 워싱턴의 연방대배심에서 클린턴과의 성관계 및 위증교사 여부에 대해 증언했다.
르윈스키는 이날 오전 9시쯤 워싱턴 시내 대배심 청사로 들어가 실제 증언 시간만 약 6시간 30분에 달할 만큼 마라톤 증언을 했다. CNN은 르윈스키는 클린턴 대통령이 성관계와 관련해 위증할 것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대통령이 자신에게 준 선물들을 폐기할 경우 검찰이 수사를 위해 이 물건들을 압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사실은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르윈스키와 성관계를 부인했고, 위증교사-사법방해 등의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다. 한때 공공연하게 클린턴을 사랑한다고 떠들었으나, 이제 클린턴의 대통령직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르윈스키는 대배심에서 이를 모두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CNN 방송은 증언후 “르윈스키가 지난 1995년 11월 이후 백악관을 드나들며 대통령과 10여 차례 ‘모종의 성행위’를 가졌음을 23명의 배심원 앞에서 털어놓았다”고 보도했다.
1997년 대한항공 747여객기, 괌 공항 인근 산악지역에 추락
승객 2백31명과 승무원 23명 등 2백54명을 태운 대한항공 801편 보잉747 여객기가 1997년 8월 6일 오전 0시55분쯤 서태평양의 미국령 괌섬의 아가냐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 공항 남쪽 4.8km 지점의 야산 중턱에 추락했다.
추락 직후 사고 현장에 급파된 괌 주둔 미군과 현지 구호요원들이 30명을 구조했으나 한 명이 병원에서 사망, 생존자는 29명으로 집계됐다. 사고기의 앞부분은 동체로부터 떨어져나간 채 불에 타 완전히 녹아버렸고, 동체는 네 동강으로 부서져 있었으나 대한항공 마크가 선명한 꼬리날개 부분을 제외하고는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여서 사고 순간의 참혹함을 짐작케 했다. 동체 파편은 비행기 잔해에서 2백∼3백m 정도 떨어진 곳까지 흩어져 있었다.
이번 사고는 대한항공 801기가 추락할 당시 조종사들은 고장난 줄 알았던 괌 공항의 활공각 유도장치(글라이드 슬로프)가 순간적으로 오작동, 혼란을 일으킨 가운데 지상 충돌 4초 전까지 정상 고도보다 낮게 날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라 사고가 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고를 계기로 국내외 항공기에 대한 안전점검이 진행됐다. 이후 괌 여행객이 대폭 줄어 현지 교민들의 경제활동이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1996년 화성 운석에서 생물체 흔적 발견
박테리아를 닮은 단세포의 미생물이 약 30억년 전 화성에 존재했을지 모른다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1996년 8월 6일 발표했다. 다니엘 골딘 NASA 국장은 성명을 통해 "화성에 생물체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약 1만3천년 전 지구에 떨어진 한 화성의 운석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번에 단세포 박테리아와 비슷한 생명체의 흔적을 발견해낸 운석은 지구상에서 발견된 화성 운석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앨런 힐스` 또는 `ALH 84001`로 불리는 것이다. 이 화석은 1984년 남극 앨런 힐스 빙하지대에서 미 국립과학재단 연구진들이 발견, 1993년까지 연구실에서 보관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 발견은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물체의 기원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뿐 아니라 외계 생물체에 대한 존재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어 인류 기원론과 우주관의 일대 전환을 예고하는 계기가 됐다.
1994년 이탈리아 가수 도메니코 모두뇨 사망
1994년 엑스포과학공원 개장
1993년 93대전엑스포 개막
세계인의 축제 대전엑스포가 새로운 도약에의 길을 다짐하며 1993년 8월 6일 오전 막을 올렸다. 8월 7일 오전에는 간단한 개장식을 갖고 일반공개를 시작했다. 전 세계 1백8개국과 33개 국제기구가 참가, 전문엑스포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진 대전엑스포는 6일 오전 10시30분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엑스포장 내 대공연장에서 역사적인 개회식을 가짐으로써 11월 7일까지 93일간 계속되는 대축제가 개막됐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개회식은 김영삼 대통령과 오명 엑스포조직위원장, 3부요인, 테드 알랜 BIE(국제박람회기구) 의장, 참가국 관계자, 각계 초청인사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엑스포(EXPO)는 영어의 엑스포지션(exposition)의 앞음절을 딴 말로 통상 `박람회`로 번역된다. 1백40여년의 역사를 지닌 엑스포는 그 자체가 산업-과학기술문명의 발달사이자 곧 미래사이기도 하다. 제1회인 런던엑스포는 당시 건축기술을 능가하는 4천5백t의 철골구조물에 30만장의 유리를 씌운 수정궁에서 산업혁명의 총아인 기관차, 선박용 엔진 동력기 등을 소개했다.
1889년의 파리엑스포는 오늘날 지하철 건설의 토대가 된 철골구조물 에펠탑을 선보였다. 이밖에 전화기(1876 필라델피아), 자동차-축음기-냉장고(1878 파리), 지하철-토키영화(1900 ), 나일론-플라스틱-TV(1939 뉴욕), 자기부상열차(1985 쓰쿠바)등이 엑스포에 소개된 당대의 첨단제품들이었다.
1993년 일본 의회, 새 총리에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신당대표 선출
1991년 유엔안보리, 남북한의 유엔가입신청안을 이의없이 채택
1991년 웹브라우저 창시자 팀 버너스 `월드 와이드웹(www)` 공개
1990년 정부 KBS 채널 축소운영계획(3개 TV채널 2개로, 8개 라디오 채널 4개로 축소) 발표
1990 미국-베트남 캄보디아 문제와 관련 최초의 공식회담
1990년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 해임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가 1990년 8월 6일 전격 해임됐다, 굴랑 이샤크 칸 파키스탄 대통령은 이날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족벌주의 등을 이유로 부토 총리 및 내각을 해임하 고 의회를 해산하는 한편 새로운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따라 지난 1988년 12월 35세의 나이로 회교국가의 첫 여성총리 가 됐던 부토는 집권 20개월 만에 군부압력에 의한 준쿠데타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1989년 프랑스 `르몽드` 신문 창립자 위베르 뵈브 메리 사망
1989년 하이메 파스 사모라 볼리비아 대통령에 취임
남미의 최빈국 볼리비아에서 좌우합작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 1989년 8월 6일 취임한 사모라 대통령은 젊은 시절 사제의 길을 걷다 유럽에 유학, 1960년대를 휩쓴 학생운동에 영향을 받아 귀국한 뒤 정치에 뛰어든 급진적인 좌익운동가 출신이다.
1971년 당시 우고 반세르 대령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 후 사모라는 그를 따르던 급진 지식인들과 함께 혁명좌익운동당(MIR)을 결성, 반(反) 반세르 투쟁을 벌이다 1974년 정부전복 기도죄로 6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페루, 베네수엘라 등을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한 뒤 1977년 귀국했다.
사모라는 집권 민족혁명운동당의 곤잘로 산체스 로사다 후보와 민족민주행동당 반세르 후보가 출마한 1989년 5월의 대통령선거에 나서 3위에 그쳤으나 과반수득표자가 없어 의회에서의 결선투표 끝에 자신을 탄압했던 반세르와의 극적인 합의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아이러니컬한 행운을 잡았다.
1988년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 기사불만 정보사 장교에 피습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사회부장이 1988년 8월 6일 출근길에 허벅지를 칼로 찔리는 테러를 당했다. 범인들은 오씨의 칼럼내용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군장성과 이들의 지시를 받고 행동한 장교들이었다.
그들은 오부장이 월간중앙 8월호에 쓴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제목의 칼럼이 군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내용이어서 혼을 내 줄 생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국방부 사건전모발표에 의하면 정보사령부 예하 부대장인 이모 준장이 부하인 박모 소령에게 이같은 지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소령은 부하들을 행동대원으로 뽑아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범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이준장은 사령부 참모장 권모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정보사령관도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군의 위신과 신뢰에 큰 손상을 입혔으며 민주화과정에서 민-군간의 갈등이 표출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86년 인도 비하르 주에서 여객열차 강으로 추락 150명 사망
1985년 무역구조 민간협회 발족
1985년 `깃발` `이화언론`용공유인물로 간주 보안법 적용으로 제작자 구속
1983년 여의도에 만남의 광장 개장
1983년 신흥사 승려살인 사건 발생
1980년 노영문-이재웅, 요트 `파랑새호`로 태평양 횡단 성공
1980년 국보위 상임위, 폭력 사기 밀수 마약등 사회악 일소위한 특별조치 발표
1979년 관훈미술관 개관
1978년 교황 바오로6세 사망
1978년 40억대 국제 필로폰 밀매단 검거
1975년 UN안전보장이사회 한국의 UN가입안 부결
1971년 김일성 `남한의 공화당 등 정당, 대중단체 기타 인사들과 접촉 용의`표명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
1969년 서울 경기지역 집중호우 사망 123명 이재민 3만 명
1969년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사망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1969년 8월 6일 사망했다. 아도르노는 20세기 사상가 중에서 가장 음악에 밝은 인물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성악가였던 덕분에 어린 시절 일찍이 소리의 세계를 깨우쳤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음악 평론을 썼고, 12음계 기법을 창시한 현대 음악가 쇤베르크를 일생동안 존경했다. 아도르노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에 대한 소양도 깊었다. 그만큼 아도르노 사상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달랐다.
학자로서 아도르노의 명성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동료였던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으로 높아졌다. 이 책은 나치즘을 통해 타락한 몰골을 드러낸 서구의 이성과 문명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20세기의 명저이다. 아도르노는 195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로 강의하면서 ‘부정 변증법’ 출간 등 왕성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또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출연, 자신의 비판 철학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68혁명’이라고 불리는 1960년대 말 서구 학생 운동의 폭력 사용을 비판하면서 학생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학생들과 심한 논쟁으로 골치가 아팠던 그는 1969년 스위스로 휴가를 떠났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1968년 제1회 아시아청소년농구대회 열림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 흑인투표권법에 서명
1962년 자메이카,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1년 소련, 보스토크 2호 발사. 지구를 17바퀴 일주
1961년 한국-차드 국교 수립
1960년 쿠바, 전미(全美)자산의 국유화 발표
1955년 제1회 원폭-수폭금지 세계대회
1953년 시인 임화, 北에서 총살
시인 임화(林和)의 삶은 한편의 비극적인 드라마다. 식민지 시절에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일원으로 박해받는 민중을 노래하다가 카프가 해산(1935년)된 뒤에는 친일의 길을 걸었고, 광복 후에는 박헌영과 남로당을 칭송하는 데 열을 올렸다. 미군정 아래서 시집 `찬가`가 유일하게 판매금지될 정도로 문학전사(戰士)로서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박헌영을 따라 월북(1947년 11월)한 후부터는 스탈린과 김일성을 찬미했지만 친일경력과 남로당계라는 꼬리표가 족쇄처럼 붙어다녔다.
그래도 단 한순간 임화가 요긴하게 쓰였던 때가 있었다. 임화가 가사를 쓴 `인민항쟁가`가 빨치산과 인민군의 전의를 북돋는 데 쓰인 것이다.
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임화는 한설야·이기영 등으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했고 박헌영 역시 막다른 곳으로 쫓겼다. 남침 실패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던 김일성에게 이들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1953년 8월 6일, 결국 임화는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총살형에 처해지고 만다.
1952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건립
1949년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병역법 개정
1949년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 내한
1948년 중앙선 도농역서 열차전복 106명 사상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제2차 세계대전 중 1945년8월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와 핏맨으로 불리는 2개의 원자폭탄이 각각 투하되었다
이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20여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일본은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30초. 서태평양 티니안섬 기지를 출발한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히로시마 상공 9600m 지점에서 원자폭탄을 투하, 인구 30만명의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참상이었다.
`에놀라 게이`는 B29 조종사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에서 딴 이름이고, 지름 71㎝, 길이 3.05m, 무게 4t의 원폭 1호는 `리틀 보이(little boy)`로 불렸다.
이날 히로시마는 오전부터 구름이 짙게 낀 날씨였다. 공습경보가 한 차례 지나가고 시민들이 막 일상으로 돌아가던 때, TNT 화약 1만2500t 상당의 원폭이 도시를 강타하자 오렌지빛 섬광과 엄청난 불덩이가 치솟으며 도시의 60%가 파괴됐고 폭심지(爆心地)로부터 반경 500m 이내의 모든 생명체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2km까지는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불에타 없어지고 말았다. 부조종사가 “오,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나이까?”라며 안타까워했다지만 부질없는 탄식이었다. 24만명이 방사능과 고열, 그리고 후유증으로 죽어갔다.
트루먼 대통령은 "첫 번째 원자폭탄은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며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패트 맨(fat man)`을 떨어뜨렸다. 일본의 선택은 항복뿐이었다.
1937년 미소통상협정 성립
1937년 수인선 개통
1932년 제1회 베네치아 영화제 개막
1931년 간디, 무저항주의 제창
1929년 헤이그에서 독일배상에 관한 영국안 수정가결
1928년 팝 아트 운동의 창시자 앤디 워홀 출생
1926년 거트루드 캐롤린 에덜리, 여성 사상 최초 영국 해협 도영
1911년 전염병 격리수용소 순화원 준공
1909년 북경, 천진, 동삼성에서 안봉철도 문제에 항의. 일화(日貨) 거부운동 시작
1902년 시인 김소월 출생
1897년 영국, 노동자보호법 공포
1896년 프랑스, 마다가스카르연합법 성립
1886년 콜롬비아공화국 성립
1881년 페니실린을 발견한 세균학자 플레밍 출생
1879년 독일 천문학자 요한 폰 라몬트 사망
1825년 볼리비아 독립
1817년 중농주의 학파 이론의 프랑스 경제학자 피에르 사무엘 뒤퐁 사망
1809년 영국의 서정시인 테니슨 출생
1806년 신성로마제국 멸망
1610년 허준, 동의보감 25권 완성
692(신라 효소왕 1) 도징 스님 당 나라에서 귀국, 천문도 헌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