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가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건설한 백제의 도읍지 북성(北城) '풍납리토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그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리토성(사적 제11호)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북성지(北城址)로 거의 확실시 되는 곳이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에 패배하고 북성을 폐성할 때까지 473년간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에 수도를 둔 '한성백제시대'라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조선시대 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고산성(古山城)' 이라고 나와 있다. 이를 보아 중세인들도 백제의 오래된 성곽이라 추측한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리토성이 처음 학계에 발견된 것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다.
한강 하류 풍납리 땅 속에 묻혀 있던 백제의 토성(土城)이 물난리로 남서쪽 일부가 무너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지난 1997년 1월 4일 이형구 선문대교수가 아파트 건설을 위한 터파기 공사 현장을 잠입해 다량의 백제 유적과 유물이 발견한다.이를 계기로 이 왕성에 대한 집중 발굴 연구를 한 결과 풍납리토성이 초기 백제의 북성임에 거의 틀림없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백제시조 온조왕이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북한산)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내려다보았다.
10신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서로는 대해로 막혀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 기원전 18년]
풍납리토성은 한강가 평지에 도성을 세우고 성을 보호하기 위해 외곽을 둘러쌓은 흙으로 쌓은 성곽으로,
성 내부 면적은 축구장 20개 크기의 26만평에 현재 길이가 약 2.5㎞ 정도가 남아 있는 왕성이다.
이 왕성은 국내 최대이지 아시아 최대 규모의 판축토성(版築土城)으로 평지토성(平地土城)이다.
현재 토성 안쪽에 수십 동의 아파트를 비롯해 각종 빌딩이 들어서 있으며 거주 인구만도 1만8000여 세대 4만8000명 정도이다.
현재 풍납토성 성벽은 지상 5m, 지하 3m 높이다.
1999년 6월∼9월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성벽 발굴이었다. 풍납토성 보존정비 계획의 하나로 서울시가 의뢰한 성벽 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맡았다.
발굴단은 원래는 3.5㎞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중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골라 잘라 보았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성벽은 높이 5m가 될까 말까 했고, 너비는 맨 아래쪽이 기껏해야 20m 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성벽을 잘라가던 발굴단은 끝간데 없이 펼쳐지는 규모에 놀랐다.
형편없어 보이던 성벽이 잘라보니 맨 아래쪽 폭이 무려 40m, 높이만 9m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의 성벽이 백제 당시보다 많이 깎였을 터이고 또한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이자 연못인 해자까지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백제 당시 성벽은 대단한 규모였음이 드러났다.더구나 절개한 성벽 단면을 살펴보니 단순히 흙만 쏟아부은 게 아니라 아래층에는
두꺼운 뻘층을 깐 다음 10㎝ 정도 간격으로 흙을 다져 한켠 한켠 쌓아올린 판축토성임이 밝혀졌다.
비록 두 군데 밖에 잘라보지 않았지만 풍납토성이 한강과 바로 맞닿은, 구릉 하나 없는 평야지대임을 감안할 때
둘레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을 같은 수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처럼 거대한 성벽을 치밀하게 쌓았다면 그것을 왕성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이곳은 또한 풍납토성이 한국의 폼페이 유적이니, 한국의 트로이니 하는 유명한 말을 낳기도 했다.
폼페이는 한신대발굴단 일원인 권오영 교수가 풍납토성을 비유한 말이고,
트로이는 배기동 교수(한양대 고고인류학과)가 풍납토성 보존을 촉구하는 한 신문 기고문을 통해 밝힌 말이다.
풍납토성을 비유하는 폼페이니 트로이니 하는 말들이 풍납토성 보존에 큰 몫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에 있는 성(城)이라고 해서 풍납리토성이 공식적 유적이름이다.
풍납리토성을 기념하는 사적비는 '風納里土城 事績碑'으로 비문을 기록하고 있다.
유적의 고유명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행정동 이름을 따서 그 이름으로 한다는 게 문화재청의 입장이다.
현재 정식 명칭은 풍납동토성이라고 해야 옳다. 아직도 '풍납토성'으로 잘못된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풍납리토성 뒷면에 기록된 비문을 그대로 옮긴다.
由來-이 토성(土城)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백제(百濟)의 사성(蛇城 배암드리)으로서 그것이 바람드리(風納)로 변한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사성은 백제의 책계왕(責稽王)(三八六~三九八)이 고구려(高句麗)을 막기 위해 쌓아 그 안에 궁(宮) 건물들까지 세웠던 거성(巨城) 겸 술성(戌城)이었으나 서기 四七五년 백제가 고구려에 패배하고 웅진(熊津 公州)으로 천도(遷都)하면서 폐성(廢城)되고 말았다. 이 토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며 원래 둘레가 四千미터에 이르렀으나 한강(漢江) 쪽의 서벽(西壁)은 1925년의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三벽은 잘 남아있으며 북벽(北壁)의 경우는 아래 너비는 三十미터 높이가 五미터 이상이고 동벽(東壁)에는 두 군데 문자리도 남아있으며 또한 이 성은 현존하는 삼국시대 유일의 평지성(平地城)으로서 귀중하지만 1964년 서울대학교의 성안발굴에 의하면 지하 三미터 깊이에서 서기 三세기 축성을 입증하는 주거지와 유물들이 나와 백제 건축초기(建國初期)의 생활유적으로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서기 일 천 구 백 칠 십 삼 년 십 이월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