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기원(起源)과 전래(傳來) --------------------------------- |
제 1 절 기원(起源)
1. 음다(飮茶)의 기원
이 때 맛있고 향기롭게 하는 방법은, 나무의 열매나 이파리를 따서 물에 섞어 함께 끓여서 향기와 맛을 한결 좋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용차라고 하는 음료수가 발견되었고, 후에 차나무의 약효와 맛과 향기를 알게 되어, 차나무 잎으로 만들어 마시는 음료가 발달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최초로 차를 마시게 된 경위가 아닌가 한다. 이후 원시적인 차나무 이파리 이용법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지금의 과학적인 방법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럼 처음으로 차나무를 발견하여 마신 사람은 누구인가.
2. 원산지(原産地)
차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운남성, 사천성)이라는 설과 인도(아샘지방)라는 양설이 대립되어 오다가, 1900년대 초에 이르러 인도의 대엽종(大葉種)과 중국의 소엽종(小葉種)이 각기 다른 종류의 원종(原種)이라는 점에서 원산지가 두 곳이라는 이원설(二元說)과 중국의 운남성(雲南省) 일대에 자생하는 고려종(皐廬種)이 차나무의 원종이며 원산지는 한 곳이라는 일원설(一元說)이 나와 서로 맞서게 되었다.
첫째, 인도가 원산지라는 설은 영국이 인도를 침략한 후, 인도 동북부의 아샘지방에 차밭(茶田)을 개발하려고 할 때(1823년), 영국군 브루스(R.Bruce)가 중국의 국경 근처 사디야(Sadiya) 산 중턱에서 야생하는 대엽종(大葉種) 차나무를 발견하고 이듬해(1824년) 그의 형 브루스(C.A. Bruce)가 와서 시비사갈(Sibsagar)에서 유사한 야생 대엽종 차나무를 발견 보고하므로 인하여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인도의 아샘지방이 차의 원산지라는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차나무의 이원설을 주장한 네덜란드의 식물 분류 학자 코헨 스튜어트(C.P. Cohen Stuart)는「세계 사상 겨우 아샘지방에서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였다. 중국의 고서(古書)에 큰 차나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까지는 중국에서 대엽종 차나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며, 인도의 대엽종을 차나무의 원종으로 보았던 것이다.
둘째로 중국이 원산지라는 설은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대엽종 차나무가 발견되어 소개된 지가 오래이며, 육우(陸羽)의 다경을 위시해서 동군록(桐軍錄:386~589年)과 송(宋)의 매요신(梅蕘臣:1002~1060年)의 시구(詩句) 등에 소개되었으며, 1898년 카파촙(A.H. Kpachob)이 발견한 이후 1939년 귀주(貴州)에서 높이가 7.5m짜리 발견, 이듬해(1940년)에는 무천(婺川)에서 6.6m 정도의 대엽종 수십 주 발견, 1951년에는 운남성의 맹해(勐海=佛海)에서 3.5~4m 짜리 발견, 1956년에는 맹해의 남유산(南糯山=茶竹山) 중턱에서 20m 짜리 「다수왕(茶樹王)」이 발견되었는데 수령이 8백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이 근처에서 생산되는 차를 보이차(普洱茶)라고 한다. 전설에는 삼국시대(서기220~265년)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남만을 정벌할 때 이곳에 들렸는데 이곳 사방 주위의 산에 차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공명을 다조(茶祖)로 모시고 그 차를 「보이차」라고 하며 이 산을 공명산(孔明山=楠糯山)이라고 부른다.
고문헌에 나타난 대엽종 차나무
문 헌 명 |
편저자 |
년 대 |
내 용 |
동군록(桐君錄) |
미 상 |
386~589 |
남방유과로목(南方有瓜蘆木), 역사명(亦似茗), 지고인(至苦인),취위설다음(取爲屑茶飮),역가통야불면(亦可通夜不眠) |
다 경(茶經) |
육우(陸羽) |
760 |
다자(茶者),남방지가목야(南方之嘉木也),일척(一尺),이척내지수십척(二尺乃至數十尺),기파산(其巴山),내천유양인합포자(崍川有兩人合抱者) |
상신다시(嘗新茶詩) |
매요신(梅堯臣) |
1002~1060 |
건계명주성대수(建溪茗株成大樹)파주초월소좋다(頗殊楚越所種茶) |
몽계필담(夢溪筆 談) |
심괄 (沈括) |
1031~1095 |
건다개교목(建茶皆木),오(吳),촉회남유총교이기(淮南唯叢茭而己) |
기동계다수야설(記東溪茶樹也設) |
송자안 (宋子安) |
1130~1200 |
감엽다수고장여(柑葉茶樹高丈余), 경칠,팔촌(經七,八寸) |
용아주소(甬雅注疏) |
학의행 (郝懿行) |
사종현 |
금다수고혹류장(今茶樹高或數丈), 소내류척(小乃數尺) |
운남대리부기( 雲南大理府記) |
점창산산다수고일장(點蒼山産茶樹高一丈) | ||
귀주통지(貴州通志) |
도설다출무천자(都設茶出婺川者), 명고다수(名高茶樹) |
이 산은 중국의 6대 다산(茶山) 중의 하나이다. 이 다수왕의 발견 이후, 1961년 맹해현 대흑산(大黑山)의 원시림 속에서 높이가 32.12m, 직경이 1.03m, 수폭이 10m에 이르는 대엽종 차나무를 발견하였다. 이 나무는 수령이 약 1천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며, 먼저 발견된 다수왕의 차나무에 반해서 이 차나무는 세계 제일의 차나무로 「다왕수(茶王樹)」라고 부른다. 이 주변에는 이처럼 큰 차나무들이 많이 있는데 1977년도에 운남농업대학(雲南農業大學)의 조사반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운남성 내에서만도 8지구 13개 현(縣)에 분포되어 있다. 그 중 난창강(攔滄江), 노강(怒江)의 중․하류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대엽종이 휘귀해진다고 하였다.
지금 이곳은 타이족(傣族)의 자치주로서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운남성 서쌍판납타이족자치주(中華人民共和國 雲南省 西雙版納溙族自治州)」라고 부르며 경홍(景洪)이 소재지이고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 난창강이다. 이 강줄기 하류 언덕의 원시림 속에 대엽종 차나무가 많이 군생하고 있는데 이곳을 차의 원산지로 보는 것이다.
근세에 발견된 대엽종 차나무
발견년도 |
발 견 장 소 |
높 이 |
엽 장 |
1939 |
貴州省, 婺川縣 |
7.5m |
13~16m |
1940 |
貴州省, 婺川縣(老饔山) |
6.6m |
12.2m |
1951 |
雲南省, 勐海縣(南糯山) |
3.5~4m |
25cm(3주) |
1956 |
雲南省, 勐海縣(西雙版納) |
20m |
(茶樹王) |
1956 |
雲南省, 勐海縣(맹宋區) |
13m |
20cm |
1958 |
雲南省, 勐海縣(南糯山) |
5.5m |
15cm |
1959 |
貴州省 赤水縣(米山谷) |
12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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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雲南省 勐海縣(郡哈山) |
11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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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
雲南省 勐海縣(大黑山) |
32.12m |
(茶王樹) |
1965 |
貴州省 普安縣 |
두아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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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雲南省 雙江縣(大佛山) |
10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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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雲南省 金平縣(原始林) |
17.9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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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雲南省 金平縣(原始林) |
12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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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貴州省 道眞縣 |
13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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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
雲南省 師宗縣(雲南農大 調査班) |
25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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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雲南省 勐海縣(大黑山) |
20m |
|
1978 |
雲南省 勐海縣(大黑山) |
16m |
(9주) |
이와같이 원산지가 중국과 인도라는 양설로 대립되어 오던 중에 190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차나무 원종은 둘이므로 원산지도 두 곳이라는 이원설과 차나무 원종은 하나이므로 원산지도 하나라는 일원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첫째「이원설」은 네덜란드의 코헨 스튜어트(C.P. Cohen Stuart) 교수가 주장한 설로 차나무의 줄기가 크고 잎이 넓은 인도 아샘지방의 「대엽종」과 중국의 동남부에 주로 자생하는 「소엽종」으로 차나무의 줄기가 작고 잎이 뾰족한 두 종류가 있으며 이 두 종류는 그 원산지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인도 대엽종은 그 자생지가 인도(아샘), 버마, 라오스, 베트남, 타이, 중국의 운남, 사천성 일대이며, 중국 소엽종은 중국의 동남부와 동부 지방에 자생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원산지가 대엽종과 소엽종이 각기 다른 두 곳이라는 이원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둘째 「일원설」은 일본의 시무라(志村喬)씨가 주장한 설로, 중국의 소엽종이나 인도의 대엽종이 모두 염색체 수효(2n=30)가 같은 한 종자라는 것이다. 또 인도종이나 중국종이 모두 세계의 거봉 히말라야 산맥 동남부에 있고 인도종의 원산지 아샘지방과 중국종의 원산지 운남성, 사천성이 다 가까이 인접해 있으며 서로 다른 변이종이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차나무는 중국의 운남성과 사천성 일대의 대엽종이 원종이며 이것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양설이 대립되어 있지만 대체로 많은 학자들이 중국의 운남성 일대에 자생하는 대엽종(고려종)이 원종이라고 보는 일원설을 더욱 믿고 있다.
제 2 절 전래(傳來)
1. 가락국의 전래
가락국(駕洛國, 加洛國:42~562년)은 기원 초에 낙동강 하류 김해평야를 중심으로 일어난 나라이다. 6가야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금관가야금해(金官伽耶金海)가 가장 세력이 커서 다른 5가야는 이 금관가야를 맹주(盟主)로 삼았다. 금관가야는 수로왕(首露王)이 세워 491년 동안 다스렸던 나라이다. 이 나라에 차가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보면,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종자라고 한다.(金海 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 特來之茶種云)」라고 적고 있다.
수로왕비 허왕후(許黃玉)는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로서 부왕의 명을 받아 16세의 어린 나이에 수륙만리 이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때 금은비단 등 많은 패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 차씨앗도 함께 가져왔다는 것이다.
「왕후는 산너머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어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그 나라에서 시종해 온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 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명인데 가지고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 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에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王后於山外別浦津頭 維丹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稜袴爲贄 遺于山靈也 其地侍從媵臣二員 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號慕貞慕良 或藏獲竝計二十餘口 所䝴錦繡綾羅 衣裳疋緞 金銀珠玉 瓊玖服玩器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不衆人 就階不而見之卽退)』
이상의 기록은 일연선사(一然禪師:1206~1289년)가 쓴 삼국유사(1281~1283년간에 지음) 가운데 들어 있는「가락국기」의 일부분이다. 이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文宗) 대강(大康:1075~1084년)년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金海)로 있던 김양감(金良鑑)이 지은 것을 일연선사가 그 대략만 추려서 옮겨 적은 것이다.
이 기록의 내용은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김해지역에 서기 42년 3월에 건국하여 10대 구형왕(仇형王)이 532년(일설에는 562년)에 신라에 영토를 바치고 항복하기까지 491년(520년) 간의 가락국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가락국이 망한 뒤 550여 년만에 쓰여졌으며 그 뒤 200여 년만에 삼국유사에 실리게 되었다. 이 기록에 공주가 차씨앗을 가지고 왔다는 내용이 없는 것을 본다면, 아마 차씨앗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똑같은 기록(가락국기) 말미에는 차와 과일 등을 갖추어서 시조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온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賡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王位田)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 차(茶)와 과일 등을 갖추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삿날은 거등왕(居登王)이 정한 연중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王之十七代孫 賡世級干祗稟朝旨 主掌厥田 每歲時釀료醴 設以餠飯茶菓庶羞等奠 年年不墜 其祭日不失居登王之所定年內五日也 奔芯孝祀 於是乎在於我』
위의 기록으로 본다면 차를 가지고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서기 661년에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수로왕의 15대 방손)의 어명으로 60여 년간 끊어졌던 제사가 다시 이어지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차를 갖추어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거등왕 때부터인지 아니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낼 때부터인지, 그리고 인도차의 전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견해와 부정적인 견해를 함께 보이고 있다. 먼저 긍정적인 견해를 보면,
첫째 이능화 씨의「조선불교통사」하권 461면에 허왕후가 인도에서 차씨앗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불교통사) 둘째 일연선사의 「삼국유사」중에 실려 있는「가락국기」 가운데 수로왕릉에 차로써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셋째 인도에는 바라문교(Brahmanism)의 베다(Veda)경전에 차(茶)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우리 나라 고유음료 개발에 연구) 넷째 인도에는 이미 기원전 2천 3백년 전 인더스 골짜기에 문화를 꽃피웠던 인도인들이 마셨다는 「마야차」가 있다. (맛좋은 황금빛 차) 다섯째 야유타국은 고대 인도의 「아요오디아(Ayod -hya)」라는 나라로서 일찌기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이룩했다. 아요오디아의 왕 라아마(Rama)의 사랑과 모험을 노래한 대서사시(기원전 5세기경에 성립) 「라아마야아나(Ramayana)」에 보면, 아요오디아는 태양왕조(太陽王朝)로서 거대한 물고기 모양을 한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막강한 군대의 보호를 받아 편안하고 자유스럽게 살며 부처(佛)를 신봉하여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그 세력을 널리 뻗쳤다고 한다. 이처럼 발달된 문명을 소유한 아요오디아는 고대 인도 문화의 중심지요, 갠지스강 문명의 원류(源流)이다. 여섯째 아요오디아의 유물과 가락국의 유물과는 비슷하거나 같은 것이 많이 있다. 이것은 가락국과 아요오디아가 일찍부터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이다. (가락국 탐사) 일곱째 김해의 동쪽에 금강지(金崗趾)라는 계곡이 있는데 옛 지명은 다전리(茶田理)이다. 이 일대에는 차나무가 많이 야생하고 있다. (가락월보) 여덟째 일본의 고대국가인 야바다이(邪馬臺)의 히미꼬(卑彌呼) 여왕이 수로왕의 왕녀(공주)일 가능성이 있다. (가락국 탐사) 그리고 이 히미꼬 여왕 시대부터 차나무가 있었다고 일본의 고고학자는 증언하고 있다.(茶文化史)
다음은 부정적인 견해이다.
첫째,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허왕후가 차씨앗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없다. 둘째, 세종지리지(世宗地理誌)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이나 대동지지(大東地誌) 등과 같은 지리지나 기타 어느 문헌에도 김해 백월산의 죽로차가 인도에서 허왕후가 가지고 온 차씨라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셋째, 조선불교통사(1918년 간행)의 기록이 허왕후가 차씨를 가져왔다고 하는 해(48년)로부터 48년) 1870년이나 지난 뒤에 세상에 전설처럼 전하는 이야기를 기록했기 때문에 문헌의 신빙성이 적다. 넷째, 만약 허왕후가 차씨를 가져왔다고 한다면 차(茶)와 과일로써 제사를 지냈다고 가락국기에 기록하면서 어찌하여 차씨를 가지고 왔다는 말은 기록을 하지 않았는가. 다섯째, 허왕후가 차씨를 가지고 왔다는 서기 48년경에는 차의 원산지인 중국이나 인도에서도 음다풍이 성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섯째, 인도 아유타국에서 차생활을 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으며 차나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일곱째, 서기 48년경에는 인도나 중국이나 모두 음다생활의 가치성이 높이 평가받기 전이라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차나무를 가지고 온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차나무를 꼭 가지고 와야만 한다는 가치의 필요성이 강조 되지를 않았다고 본다. 여덟째, 허왕후가 가지고 왔다는 차종자가 죽로차(竹露茶)라고는 하나 녹차의 차나무 종류인지 아니면 대용차의 종류인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확인이 안된다. 아홉째, 허왕후가 가지고 온 것이 차나무 묘목(苗木)이라고 한다면 두 달 정도 배 안에서 시달리고 왔는데 열대성 기후에 익숙한 차나무가 김해의 가을(도착은 음력 7월 27일, 양력은 9월말)의 쌀쌀한 기후나 겨울의 눈보라에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왕후와의 혼례가 치루어진 후에도 계속해서 아유타국과 가락국 사이에는 문물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이때 허왕후가 차를 즐겨 마셨다고 가정한다면 후에라도 차의 전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허왕후가 차를 좋아하지 않거나 아유타국에 차가 없다면 전래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인도차의 전래설은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더 많은 문헌과 기록에 의해 고증되어야 할 과제이다.
2. 고구려의 전래
고구려(高句麗)는 3국의 하나로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강역으로 하였던 왕조이다. 고구려족(族)은 만주지방에 살던 부여족의 지족(支族)으로 처음에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살았는데, 기원전 2세기 경부터 남하하여 동가강(지금의 桓仁지방) 유역에서 압록강 유역에 걸친 산악지대에 살면서 수렵생활을 했다.
처음에 고구려족은 현도군(玄菟郡)의 지배를 받았으나 민족의식이 강한 이들은 부족을 중심으로 집권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주몽(高朱蒙:東明聖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桓仁지방)에 나라를 세운 것은 기원전 37년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서울을 백두산 아래 국내성(國內城:通溝)으로 옮겼고, 제 6대 태종왕 때부터 차츰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토를 넓히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고구려가 융성해지자 중국과 충돌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도 고구려는 세력을 계속 뻗쳐나갔고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과 장수왕(長壽王) 때에는 가장 넓은 강토를 가지게 되었다. 북으로는 송화강에서 서로는 요하(遼河)를 넘었고, 남쪽으로는 아산(牙山)과 삼척(三陟)을 연결하는 방대한 땅을 영토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강대국으로 부상한 고구려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해 놓았다. 이와같이 고도로 발달된 문화와 긴 역사를 간직한 고구려에는 어떻게 차의 전래가 이루어졌을까.
고구려에는 차의 전래가 이루어졌다는 가능성을 확실하게 해주는 자료로는 일본인 아오끼(靑木正兒)가 제시한 병다(餠茶)이다. 이미 고인(故人)이 된 아오끼 씨는 왜정시대에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한국차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으며 그 결과 고구려의 병다를 수중에 입수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그가 밝힌「병다」에 대한 기록은 중국인 모문석(毛文錫)이 지은「다보(茶譜)」라는 책을 역주(譯註)할 때에 남긴 기록이다. 이 책(靑木金集 262쪽 15행)에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의 옛 고분(古墳)에서 출토되었다는 모양이 둥글고 얇은 작은 병다(餠茶) 한 조각을 포본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직경이 4cm정도의 엽전(葉錢) 모양에 두께는 닷푼(5分) 가량이 된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아오끼가 가지고 있는 병다는 전형적인 한국의 전다(錢茶)가 아닌가 한다. 생김새가 엽전 모양으로 둥글고 크기가 전남 강진, 장흥, 해남 지방에서 많이 만들어지던 전다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병다는 떡처럼 모가 나고 각이 졌지만 전다는 동전(엽전) 모양으로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병다가 어떻게 해서 아오끼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또 고구려 때 어떤 고분에서 출토되었는지도 알 길이 전혀 없다. 그 출처나 입수경로를 밝혀서는 안될만한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오끼씨는 밝히지 않았다. 추측컨대 그 고분은 분명 고구려의 옛 영토에 있었을 것이며 함께 출토된 부장품들이 고구려의 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오끼씨는 이「병다가 고구려의 차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때(왜정시대 말) 왜인들이 우리나라의 고분들을 무차별 발굴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출토된 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실려가 지금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만 이 병다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아오끼씨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는 입수 경로나 발굴 경위를 밝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차는 고구려 차의 전래성을 가장 확실하게 뒷받침해주는 유일한 유물이다.
이 작은 한 덩어리의「병다」가 고구려의 고분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고구려 사람들이 차를 애음했으며, 사자(死者)를 위해서 묘실에까지 차를 넣어주는 관습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차를 애음하던 사람이 죽으면 그 묘실에 차를 넣어 주는 관습이나 사원의 불탑(佛塔) 속에 차를 넣는 관습은 오래 전부터 동양삼국에 다 같이 있어 온 일이다. 그러므로 고분 속에 평소에 애음하던 차를 넣어 죽은 사람을 위로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1940년대 발굴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찻잔과 같은 잔을 들고 공양하는 인물상이 발견되었다. 이런 공양상은 음다생활의 일면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 전래와의 관계를 통해서 살펴본다면, 고구려의 불교는 일찍부터 민간에 보급되어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소수림왕 2년에 공인이 되었다. 이후에 급속도로 전파되어 성 내 곳곳에 절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주로 왕명으로 지은 절이 대부분이었다. 나라에서는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順道)와 아도(阿道) 화상을 머물게 하였고 광개토왕은 평양에 9개의 절을 더 세워서 흥법에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고구려에 불교가 성행하게 되자 중국의 승려들이 속속 고구려에 들어왔고 고구려인으로 승려가 된 사람이 중국에 유학하는 예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같이 유학승과 중국승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자 차(茶)도 따라서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차는 승려들에게 있어 소중한 공양물(供養物)이기 때문이다. 옛부터 차는 향, 꽃, 등촉, 쌀(香花燈燭米)과 함께 오공양(五供養)에 속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전래와 함께 공양물의 하나인 차도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음은 도교(道敎)를 통하여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진단해 보도록 하겠다. 도교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영류왕 7년(624년)으로 당 고조(高組)의 명을 받은 도사(道士)가 천존상(天尊像)과 도덕경(道德經)을 가지고 와서부터이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이미 도교가 들어와 민간에 퍼져 있었다. 다만 공인된 것이 영류왕 7년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에는 선교(仙敎)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터이고, 이 선교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이 중국에 건너가 도교로 발전한 것이고 보면, 고구려인들이 도교를 큰 반발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며, 그 수련과정이 신선술(神仙術)과 대동소이 하니 같은 맥락에서 보급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신선사상과 도교는 자연스럽게 융합되었고 연단술(鍊丹術)과 연금술(鍊金術)에 능통한 고구려인들은 차(茶)를 사용하여 장생(長生)하는 비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옛 기록에 선인(仙人)들이 사용했다는 단차(丹茶)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고려 때 거란(契丹)이 이 지역에 나라를 세워 2백여년을 다스렸는데 그 세력이 자못 융성하여 중앙아시아 카라코트(黑水城)에 이르렀다.
이 거란에 고려 때 뇌원다(腦原茶)를 공물로 보낸 일이 있었고, 흑수성의 옛 터에서는 얼마 전에 차다(茶)자가 쓰여진 찻잔(茶盞)이 발굴되기도 했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여진족(女眞族)들이 이 땅에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고구려의 유민이요, 동이족(東夷族)의 후예이니 분명 고구려의 유풍을 받아서 차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많은 양의 차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 마셨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영토가 추운 지방이라서 차를 재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고구려 땅에서는 차가 생산되지 않고 수입되었으며 음다생활은 했을지 모르나 차 생산은 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고구려의 전래설은 제품(製品) 자체의 전래이지 차나무의 전래는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고구려는 차를 사다가 마시는 소비국으로 중국이나 백제에 좋은 교역국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접한 중국의 차 생산지로부터 많은 양의 차가 손쉽게 수입되었을 것이며 차나무의 전래보다 차 제품의 전래가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볼 때 신라나 백제보다는 더 일찍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3. 백제의 전래
백제란 백가제해(百家濟海)가 줄어서 된 국명이다.
3국의 하나로 서남쪽에 있었던 왕조, 시조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고구려 시조 주몽과 졸본왕녀 소서노(召西奴)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비가 다른 형제이다. 앞서 부여에서 낳은 배다른 형제 유리(瑠璃)가 와서 태자가 되니, 그의 형 비류와 함께 어머니(소서노)를 모시고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대방고지(帶方故地:황해도)로 망명하여 나라를 세웠다.
그 후 낙랑군에 쫓겨 남하하여 형 비류는 미추홀(아산군 인주면 밀두리 포구)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를 세우니 해양국가로서 백가제해(百家濟海)의 비류백제가 되었으며(BC.17년), 온조는 분리되어 하남 위례성(천원군 입장면 호당리 위례성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내륙국가인 온조백제이다.(BC. 7년) 이처럼 둘로 갈라져 건국하니 백제는 두 개의 나라가 된 셈이다. 그 차이점을 여기에 도표로 싣는다.
두 개의 백제
시 조 |
초 기 국 호 |
초 기 도 읍 |
관 제 |
건국연도 |
멸망연도 |
비류(형) |
백제(해양국가) |
해빈 미추홀 |
담로제 |
BC 17 |
AD 396 |
온조(동생) |
십제(내륙국가) |
하남 위례성 |
오방제 |
BC 7 |
AD 660 |
이와같이 둘로 갈라진 백제는 각기 다른 집권제도를 세워서 다스리게 되었다. 형 비류는 주로 해양국가이기 때문에 왕족친권의 담로제(憺魯制)를 채택하여 왕실의 자체종친을 분거시켜 22개 담로제를 실시했으며 동생 온조는 내륙국가로서 건국 초부터 멸망 때까지 5방10군제(五方十郡制)를 채택하여 중앙귀족(행정관료)을 임명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온조백제는 해안선을 낀 서남부지방, 내륙을 주로 다스리게 된 반면에, 형 비류백제는 해안선을 낀 서남부 해안과 중국의 산동반도를 낀 동남부 해안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를 대륙백제(비류백제)와 반도백제(온조백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동이강국(東夷强國)으로 성장한 비류백제는 중국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조백제는 내륙에서 편안하고 차분하게 문화를 꽃피웠다. 지금 우리가 지칭하는 백제는 주로 온조백제를 의미하며 비류백제는 무시되고 있는데 비류백제(대륙진출함)를 백제의 문화권에 소속시킨다면 중국의 산동반도 일대가 모두 백제 문화권에 소속되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백제의 차 전래는 두 가지 상황에서 거론되어야 한다. 즉 중국대륙에 진출한 비류 백제에 차의 전파와 내륙에서만 국가를 형성한 온조 백제에 차의 전래 상창이다. 그러나 백제에 차의 전래가 이루어졌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 원효방(元曉房)
백제에 차가 전래되었다는 점을 가능케 하는 자료로는 간접적이지만 원효대사에 얽힌 일화를 들 수가 있다. 고려 때 학자 이규보가 쓴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보면,「다음날 부령현재(扶寧縣宰:扶安) 이군(李君)과 다른 손님 6~7명과 함께 원효방(元曉方)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통이나 되어 발을 후들후들 떨면서 천천히 올라가니 뜰 계단과 처마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다. 듣건데 종종 호랑이와 표범이 인연을 구하여 올라오려다가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사포(蛇包)성인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라 한다. 원효가 와서 사니 사포도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원효대사께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때에 갑자기 물이 바위 틈에서 솟아나왔는데 물맛이 젖같이 매우 달아(甘)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尺)이요 한 노승이 거처하는데 삽살개 눈썹과 다 헤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孤高)하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대사의 진용(眞容)을 모셨고 외실에는 병(甁)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 뿐, 취사도구도 없고 시자도 없으니 다만 소래사(蘇來寺:지금은 래소사)에 가서 하루에 한 재(齋)를 참예할 뿐이라 한다.」
『明日與扶寧縣宰李君及餘客六七人 至元曉房 有木梯高數十級 뢰足凌競而行 乃得至焉 庭階창戶 上出林抄 聞往往有虎豹摩緣而未上者 傍有一庵 俗諺所云蛇包聖人所昔住也 以元曉來居故 蛇包亦來侍 俗試茶進曉公 病無泉水 此水從巖忽湧出 味極甘如乳 因嘗點茶也 元曉房才八尺 有一老사梨居之 尨眉破衲 道貌高古 障其中爲內外室 內室有佛像 元曉眞容 外則一甁雙屢茶자經机而己 更無炊具 亦無侍者 但於蘇來寺』
원효방은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개암사(開巖寺)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산 중턱에는 복신이 왕자 풍을 왕으로 모시고 백제의 유민을 모아 복권운동을 전개한 주유성이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백제의 바닷가 요충지로서 삼림(森林)이 무성하고 의식이 풍족한 지역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많은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으며 백제승 사포와 신라승 원효의 차 이야기가 얽힌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사포가 원효대사께 끓여드린 차는 가루차(粉抹茶)로서 신라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백제 땅에서 생산된 것인지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아마도 백제 땅에서 생산된 차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첫째로 원효방이 백제땅 깊숙히 자리하고 있어서 신라의 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신라에서 차를 수송해 오기가 불편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원효방이 소속된 부안현은 차의 생산지로서「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차의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셋째는 고려 때 원효방에 거주하는 노승이 원효대사의 다풍(茶風)을 흠모하여 차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노승이 마신 차가 부안 땅에서 생산된 차(茶)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를 통해서 본다면 고려 때 이미 부안 땅에는 차의 생산이 있었고(다만 기록이 전하지 않음), 고려 때 차생산이 확실하다면 백제 때에도 차생산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후조건이 알맞아 차재배가 가능하며 현재에도 부안군 일대에는 많은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는 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이 원효방에 백제 때부터 차가 있었다면 부안 땅에서도 차가 재배되었을 것이며 부안 땅에 차가 재배되었다는 것은 백제에 차의 전래가 있었다는 이야기이이고 하다.
○중국과의 문화교류
백제는 일찍부터 낙랑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학(漢學)이 발달해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는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의 역사를 편찬케하여 이를 「서기(書記)」라 하였다. 또 백제는 중국 남조(南朝)의 동진(東晋), 송(宋), 양(梁), 진(陳)과 외교관계를 맺어 자주 내왕하고 문화교류가 빈번했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년)에는 동진에서 인도승(印度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하니 임금은 그를 맞아 궁중에 머물게 하고 이듬해(385년)에는 한산(漢山:南漢山)에 절을 세우고 십여명의 승려와 함께 머물게 하였다.
박사(博士)의 제도도 일찍부터 생겨서 오경박사(五經博士:易, 詩, 書, 禮, 春秋에 통달한 사람)와 각종의 전문적인 박사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왕인(王仁)박사와 같이 일본에 초빙되어 일본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아스까(飛烏)문화의 기반을 형성해 주기도 했다.
일반 서민들도 모두 말타고 활쏘기에 능하며 경사(經史)를 읽고 문장에 밝은 사람들이 많았다. 또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과 바둑, 점 치는 일 등도 매우 좋아하였다.
이처럼 백제의 문화는 삼국 중에서 가장 발달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불교문화 뿐만 아니라 제반 문화에 많은 발달을 이룩한 백제의 차의 전래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당연한것 같다. 하지만 기록이나 문헌의 인멸로 확인 고증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분명히 어디에선가 고증할만한 자료가 발굴되리라고 믿는다.
○일본과의 관계
백제에 차가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줄만한 자료로 일본의 나라(奈良)에 있는 동대사(東大寺)의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에 행기(行基)라는 스님이 절 주변에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동대사는 백제인이 세운 대찰로서 동양 최대의 동불(銅佛)이 모셔져 있으며 백제시대의 건축양식과 가람배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행기스님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행기스님은 일본문화의 비조(鼻祖)라고 일컬어지는 왕인박사(王仁博士)의 후손이다.
일본 우에노공원(上野公園)의 「박사왕인비(博士王仁碑)」에 보면,
「박사 왕인은 백제인으로서 당시 백제에서 홍유거벽(鴻儒巨擘)과 현인달사(賢人達士)들의 존경을 받은 문장 도덕의 군자였다. 백제 구수왕(仇首王) 때 일본국 응신천황(鷹神天皇)은 박사왕인을 초빙했다. 왕인은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지고 와서 황태자의 사부가 되었다. 태자는 성인의 학문과 도를 익혀 천하를 양휘함형에게 양위함으로써 후세에 수범(垂範)하였다. 왕인의 가르침은 날로 크게 보급되니 조정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인륜도덕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이때 뜻있는 사람들은 왕인사당(王仁祠堂)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돌을 세워 위업을 아로 세겼다. 왕인의 자손으로서 유명한 이가 많았지만 특히 대승정(大僧正) 행기(行基)는 걸출하다.」
왕인의 후예들은 고관대작으로부터 서민층인 농공상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서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그들은 왕인후예라는 이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행기대정승」이다. 행기스님은 왜국(倭國) 땅에 49개의 사원(寺院)과 46개의 사회사업 외에도 많은 정신적 문화유산을 남겼는데, 그는 당시 율령정부(律令政府)의 무지한 탄압과 민족적 차별을 받으면서도 서민들을 보호하여 그들의 등불이 되었다. 그래서 서민들은 그를 「행기보살(行基菩薩)」이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이 행기스님이 동대사에 심었다는 차나무는 백제에서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중국에서 가져간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데 백제의 모든 문물이 조수처럼 밀려서 왜국으로 건너갔던 때이니 만큼, 먼 중국보다 가까운 백제 땅에서 옮겨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하튼 백제인이 일본 땅에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백제 유민의 차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연기조사의 전래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의 창건주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절 뒤의 장죽전(長竹田)에 처음으로 차를 심었다는 설이 있다. 일제시대 화엄사 주지(住持)로 있던 만우(曼宇:鄭秉憲)스님이 편찬한「해동호남도지리산대화엄사사적(海東湖南道智異山華嚴寺事蹟)」을 보면,
「신라의 차는 지리산에서 비롯되었다. 연기조사가 진흥왕 때(544년)에 지리산에 절을 세우고 화엄사라고 하였다. 이것이 지리산에 절이 있게 된 시초이다. 연기조사는 차씨를 가져와서 절을 세움과 동시에 부근 절 뒤의 긴 대밭(長竹田)에 심었으며 흥덕왕도 또한 이곳에 차를 심으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장죽전의 죽로차(竹露茶)라고 이름하였다. 호남일대가 조선의 다향(茶鄕)인데 그 고적을 상고하면 화엄사가 처음이라고 하겠다……」
『新羅之茶 始於智異山 緣起祖師眞興王代창寺於智異山之陽額曰華嚴寺此智異山有寺之始 緣起以茶種持來창寺同時幷植于附近 此後之長竹田而興德王亦命植于此由是長竹田 竹露茶名于國中湖南一帶 朝鮮之茶鄕也 老其古蹟則先以華嚴宗傳布地爲始而 後爲禪宗之蔚興故茶亦隨而植之遂爲茶 産本鄕也』
연기조사가 지리산에 처음으로 절을 짓고 화엄사(백제 성왕 22년:544년)라고 하였으며, 절 뒤 장죽전에 차씨를 심어 가꾸니 훗날 흥덕왕도 대렴(大廉)이 가져온 차씨를 이곳에 심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럼 처음 차씨를 이곳에 가져온 「연기조사」는 어떤 분인가. 연기조사에 대해서는 범승(梵僧) 즉 인도승이라고만 전해질 뿐 그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 이름자도 대체로「緣起」라고 쓰나 烟起, 또는 煙起라고도 하며 연(鷰)을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고 해서 「연기(鷰起)」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와 함께 처음 지리산에 와서 화엄사를 창건했다. 그 후 천은사(泉隱寺), 연곡사(鷰谷寺), 산청 대원사(大源寺), 흥덕 연기사(烟起寺), 나주 운흥사(雲興寺) 등을 창건했다고 한다.
이처럼 연기조사에 대한 기록이 단편적이고 불분명하므로 자세한 것은 밝힐 수가 없다. 이 스님이 인도에서 올 때 차씨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이 전래설은 신라 흥덕왕 때(828년) 대렴이 가져온 것보다 284년 앞서는 연대며 차가 있었다고 하는 선덕여왕 때(632~646년)보다 약 1백년이 빠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래설도 가락국의 전래설과 같이 신빙성이 없다.
첫째로 차씨를 가져와서 장죽전에 심었다고 하는 연기조사의 행적이 분명하지 못하며,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알 수가 없다. 둘째로 연기조사와 화엄사에 대한 기록을 적은 문헌으로는 8가지가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제일 나중에 쓰여진「해동호남도지리산대화엄사사적(정만우 저)」에만 연기조사가 차씨를 가져다가 장죽전에 심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그 전에 쓰여진 7가지 문헌에는 그와 같은 기록이 없다. 셋째는 정만우 스님이 지은「화엄사사적」에 나온 기록이 연기조사가 차씨를 가져왔다고 하는 해(544년)로부터 1천 3백여년이 지난 후의 기록으로 신빙성이 적다. 이 기록은 후대에 조작하여 기술한 듯하며 믿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화엄사 장죽전(長竹田)에는 지금도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스님들은 연기조사가 화엄사 창건 당시에 차씨를 가져다 심었다고 믿고 있다.
○결론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씨는 그의 「다고사(茶故事)」에서,
「신라의 차는 당에서 들어왔고 일본의 차는 송에서 들어갔으니 비록 연대의 전후는 있으나 모두 불교를 따라 전래했었고, 또 불교를 따라 발달했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로보면 불교가 성행했던 그 당시 고구려, 백제에도 당으로부터 차종자의 전래가 없었을 리가 없다. 고구려는 북쪽 추운 지방이므로 재배에 부적당하나 백제는 남쪽 따뜻한 지방인 만큼 신라보다 오히려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 일찍 들어와 재배가 되었더라도 사실이 전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할 바다. 그러나 지리산을 중심으로 논할 때 신라의 옛 땅이었던 경상도 방면에 비하여 백제의 옛 땅이던 전라도 방면에 차 산출이 더 많다고 한다. 이는 백여 년 전에 된「여지승람」에도 적혀 있거니와 금일에 이르도록 의연히 변함이 없다. 전라도는 지리산 외에도 모든 명산에 거의 차가 없는 곳이 없다고 한다.」
위의 기록을 보면 호암선생은 백제의 차전래는 거의 분명하나 사실을 밝힐 수 없음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 듯 하다.
이상 백제에 차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여러 가지 간접기록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신뢰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첫째로 비류백제가 다스리던 땅이 중국의 산동반도를 포함한 남부 해안선 일대로 지금도 차 생산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온조백제가 다스리던 땅이 우리나라 서남부 지방인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충청도 일대인데 지금 생산되는 차의 80%가 모두 백제의 옛 땅에서 재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 재배되고 있는 차나 산중 사찰 근처에 야생하고 있는 차나무가 언제 전래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푸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 전래 가능성에 대한 타진은 거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백제의 차는 언제쯤 전파와 전래가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이 이 문제의 키가 되는 셈이다. 이 문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백제의 차 전래나 전파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백제의 문화가 삼국 중에서 가장 발달되었으며, 또 중국과 밀접하게 문화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중국의 땅을 점령하여 다스렸던 바, 그 문물을 손쉽게 소화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백제의 차문화는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검토 고증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4. 신라의 전래
신라(新羅)는 3국의 하나로 7세기 중엽 반도를 통일하였던 왕조이다. 국호를 신라, 사라(斯羅), 서나(徐那:徐那伐)라고도 불렀으며, 한반도의 동남쪽,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대를 강역으로 삼고 일어난 부족 연합국가이다. 거의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진 부족들끼리 모여 연합체를 형성,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았다. 그 후 56대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고 종묘사직의 문을 닫을 때까지 무려 천년(993년)의 역사를 간직한 나라이다.
초기에는 지정학적으로 동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문물을 직접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서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3국 중에서 모든 문화 발달의 속도가 늦고 더딘 편이었다. 그러나 23대 법흥왕(法興王) 때에 와서는 왕권을 확립하고 가락국을 쳐서 병합하고 율령(律令)을 공포(公布)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비로소 제정하였으며(528년), 불교를 공인하고(527년), 연호를 건원(建元)으로 제정(536년)하는 한편, 밖으로는 백제의 사신을 따라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521년)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어 진흥왕(眞興王) 때에 와서는 국토를 확장하고 영토의 경계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워 기념으로 삼았는데 창녕(昌寧), 북한산(北漢山), 황초령(黃草嶺), 마운령(磨雲嶺)이 그곳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화랑도(花郞道)를 길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세력이 융성하여지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당(唐)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쳐서 공략하기 시작하였으며 끝내 백제를 멸망시켰다.(660년) 그리고 뒤를 이은 문무왕(文武王)도 고구려를 쳐서(668년) 3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당(唐) 나라에 고구려의 영토 절반을 내주고 반도(半島)만 통일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으니, 우리나라 반도의 역사는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형제지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쳐서 국호를 없애고 그 영토의 압록강 이북은 당나라에 빼앗기고 다시는 되찾지 못하고 만 것이다.
여하튼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고도의 문화 발달을 이룩했는데, 그 중에서 손꼽히는 것이 불교문화이다. 5교(敎宗), 9선문(禪宗)이 일어나고 원광(圓光), 자장(慈藏), 원효(元曉), 의상(義湘)과 같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곳곳에 사원(寺院)이 들어서고 불교 건축물과 석조물(石造物)이 조성되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홍륜사,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감은사, 불국사, 부석사, 해인사, 화엄사, 법주사, 동화사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석굴암 같은 석굴법당(石窟法堂)은 독특한 양식으로 세계적인 자랑거리이며 불상(佛像)과 석탑(石塔) 역시 신라 예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수두룩하다.
이처럼 찬란한 문화예술을 완성해 낸 신라 천년의 역사 가운데 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또 신라인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차생활을 하였을까. 이제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전래 상황부터 알아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에 차가 처음으로 전래되기는 선덕여왕(善德女王:632~646년)때로 전한다. 그러나 정식 국교를 통해서 차종자가 전래된 것은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흥덕왕 3년 겨울 12월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조공(朝貢)하니, 당문종(文宗:826~839년)은 인덕전에 불러서 보고 등급을 가려 잔치를 베풀었다. 당나라에 갔던 사신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興德王)은 지라산(地理山: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가 선덕여왕 때부터 있기는 했으나, 이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興德王 三年 冬十二月 遺使入唐朝貢 唐文宗召對干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
이상의 기록을 통해서 본다면 차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으나 약 2백년 뒤인 흥덕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았던 신라 말기 여왕으로 14년간 치세(治世)하였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당나라와 외교를 맺어왔다.그로부터 수십차에 걸쳐서 왕사(王使)나 불승(佛僧)들의 왕래로 인하여 문화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때 당의 건국 초기부터 성행하던 음다습속(飮茶習俗)이 신라에 전래된 것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이점에 대해서 서거정(徐居正:1420~1488년) 등은 동국통감(東國通鑑:1484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라기 흥덕왕 3년 겨울 12월 대렴(大廉)을 당나라에 보내니 임금이 인덕전에 불러서 등급을 가려 잔치를 베풀었다.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얻어오니 왕이 지리산(智異山)에 심도록 명하였다.」
『新羅記, 興德王 三年, 冬十二月 遺大廉如唐帝召干麟德殿, 宴賜有差 大廉得茶子來 王命植智異山』
이상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내용을 간추린 것인데 사신이 간 목적도 생략되었고 당 문종의 왕명(王命)도 생략되었고 지리산(地異山)을 지이산(智異山)으로 고쳐서 기록했다. 그리고 사신의 이름을 대렴으로 하고 돌아온 사신(廻使)의 이름도대렴으로 하는 등 기록에 오차를 보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다음은 노사신(盧思愼) 등이 찬(撰)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6년)에 나와 있는 기록이다.
「진주목 토산차,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 온 사신인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오니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성덕왕(또는 신덕왕)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행하였다.」
『普州牧 土産茶 新羅興德王時 入唐回使大廉持茶種來植智異山 至聖德王[一作 神德王] 始盛焉』
이상의 기록에서 차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는 말이 빠져 있으며, 흥덕왕 때 성행하게 도었다는 것을 성덕왕(聖德王:702~737년) 때에 성행하게 되었다고 하고 또는 성덕왕이 아니라 신덕왕(神德王:912~917년) 때 성행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많은 혼돈과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다음은 이행(李荇)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해서 만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1530년)을 보자.
「진주목 토산조에 차, 신라 흥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었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행하였다.」
『普州牧 土産茶 新羅興德王時 入唐回使大廉持茶種來植智異山 至聖德王時始盛焉』
이상의 기록에는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종자를 가지고 와 지리산(智異山)에 직접 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성행하게 된 때가 흥덕왕도 아니고 신덕왕도 아닌 아예 성덕왕으로 못을 박았다.
○지봉유설(芝峰類設)
다음은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1563~1628년)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設下卷 食物部 藥)에 실린 기록이다.
「신라 흥덕왕 때에 사신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차종자를 얻어 가지고 오니 지리산에 심으라고 명하였다. 지금 남방의 여러 고을에서 생산되는 차는 곧 그때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新羅 興德王時 使臣自唐還得茶子來命植智異山 今南方諸郡産茶 乃其時所種云』
이 지붕유설에서는 차종자를 얻어가지고 돌아온 사신의 이름이 빠졌으며 전래 연도도 누락되었으며, 잔치를 베풀어 준 일과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다는 기록도 빠졌다. 다만 남방의 여러 고을에서 나는 차가 그때의 유종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상으로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첫째로 신라의 차는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로부터 들어왔으며 둘째로 사신으로 갔던「대렴」이 정식 국교노선을 통해서 가지고 왔다는 점과, 셋째로 차종자를 지리산에 심었다는 것과 넷째로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마셔왔으나 흥덕왕 때 비로소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 등을 알 수가 있다.
제 2 장 고조선(古朝鮮)의 음다생활(飮茶生活) ---------------- |
제 1 절 신농(神農:三皇五帝)
문헌에 나타난 것에 의하면 인류 최초로 차를 마신 사람은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라고 기록되어 있다. 초의선사(艸衣禪師)의 동다송(東茶頌) 제3구에 보면,「염제 신농씨가 일찍이 (차의) 맛을 보고 그의 식경(食經)에 기록해 두었네(炎帝曾嘗載食經). 염제 신농씨의 저서인 식경에 이르기를 차를 오래도록 마시면 사람이 힘이 나고 기분이 황홀해진다.(炎帝食經云 茶茗久服 人有力恍志)」고 하였다.
그리고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제6 차마시기(六之飮)에 보면,
「차를 음료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신농씨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노(魯)나라 주공(周公) 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茶之爲飮 發乎神農氏 聞於魯周公云)」고 하였으며, 제7 차의 옛일(七之事)에 보면,
「삼황(三皇)때에는 염제 신농씨가 차를 마셨다.(三皇炎帝神農氏)……신농씨가 지은 식경(食經)에는, 차를 오래도록 마시면 사람이 힘이 나고 즐거워진다.(神農 食經 茶茗久服 人有力悅志)」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염제 신농씨는 인류 최초의 차인(茶人)이라고 할 수 있다. 염제 신농씨(神農氏)는 삼황(三皇)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으로서 옛날 전설상의 제왕이다. 백성을 교화하여 농업(農業)을 일으켰으므로 신농씨(神農氏)라고 하며, 또는 불(火)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해서 화덕왕(火德王)이라고도 하고 또는 염제(炎帝)라고도 한다. 처음에 열산(烈山)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열산씨(烈山氏)라고도 하며, 진(陳:하남성 진주부)에 도읍을 두었다가 나중에 곡부(曲阜:산동성 곡부현)로 옮겼다. 성은 강(姜)씨이며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 같은 우상(牛相)을 한 모습이다.
백 가지 풀을 씹어 맛을 보아 약초를 가려내어 약을 만들었으며 이로써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니 의약의 신으로 숭배받기도 했다. 이와같이 처음으로 방서(方書:의약서)를 지어 백성의 질병을 치료했고, 시장을 세우고 화폐를 사용하였다. 왕위에 오른지 1백 40년만에 죽었다. 나라는 8세에 5백 20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염제가 차의 맛을 보고「식경(食經)에 차(茶)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을 보고 후세의 사람들은 문헌상으로 차를 마신 최초의 사람으로 염제를 꼽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식경」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 기록만 전한다.
그러면 염제를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삼황오제는 누구누구이며 어떠한 사람들인가, 또 어느나라 사람들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염제를 포함한 삼황오제를 고대 중국의 제왕들이라도 믿고 있으며 중국인들이 말하듯이 전설적인 인물, 또는 신화적인 인물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이 모두 우리의 옛 조상이었던 동이족(東夷族)이라고 한다.
1. 삼황(三皇)
삼황이란 세분의 황제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6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 있는데 이 설은「사기 진시황본기(史記 秦始皇本紀)」에 나와 있다. 둘째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인데 「사기보삼황본기(史記補三皇本紀)」에 나와 있는 설이다. 이것은 하도 「35력(河圖三五曆)」을 인용한 것이다. 셋째는 복희(伏羲), 여왜(女媧), 신농(神農)인데, 풍속통의(風俗通義) 황패편(皇 霸篇)에 나와 있는 설이다. 이는「춘추위운두추(春秋緯運斗樞)」에서 인용한 설이다. 넷째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축융(祝融)인데, 백호통(白虎通)에 나와 있는 설이다. 다섯째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공공(共工)인데, 통감외기(通鑑外紀)에 나와 있는 설이다. 여섯째는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인데 풍속통의(風俗通義) 황패편(皇霸篇)에 나와 있는 설이다. 이는 예위함문가(禮褘含文嘉)에서 인용한 설이다. 그러나 공안국(孔安國)인들은 수인씨를 빼고 황제(黃帝)를 넣어 삼황이라고도 한다. 이상의 설을 알기 쉽게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황(三皇)에 대한 각종설
삼 황 명 |
문 헌 명 |
비 고 | ||
첫째 |
둘째 |
세째 | ||
天皇 天皇 伏羲 伏羲 伏羲 燧人 伏羲 |
地皇 地皇 女媧 神農 神農 伏羲 神農 |
泰皇 人皇 神農 祝融 共工 神農 黃帝 |
史記, 秦始皇本記 史記, 補三皇本記 風俗通義, 皇霸篇 白虎通 號篇 通鑑外記 風俗通義, 皇霸篇 孔安國 |
河圖三五曆 引用 春秋緯運斗樞 引用
禮緯含文嘉 引用 |
이상의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대부분이 풍속통의 황패편에 나오는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씨를 삼황으로 알고 있다.
2. 오제(五帝)
옛날 중국에 있던 전설상의 다섯 임금인데, 이에는 3종류의 설이 있다. 첫째는 황제(皇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말하는데 이 설은
「사기 오제본기(史記 五帝本紀)」에 나와 있는 설이다. 둘째로는 태호(太皥:伏羲), 염제(炎帝), 황제(皇帝), 소호(少昊), 전욱(顓頊)을 말하는데 이 설은「예기월령(禮記月令)」에 나와 있는 설이다. 세째는 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帝學),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말하는데 이 설은 황보밀(皇甫謐)의「제왕세기(帝王世紀)」에 나와 있는 설이다. 이외에 당(唐)나라의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이르기를, 오제(五帝)는 동방청제영위앙(東方靑帝靈威仰), 남방적제적표노(南方赤帝赤熛怒), 중앙황제함추축(中央黃帝含樞紐), 서방백제백초거(西方白帝白招拒), 북방흑제즙광기(北方黑帝汁光紀)라는 설이 있다. 이를 알기쉽게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제(五帝)에 대한 각종 설
오 제 명(五 帝 名) |
문 헌 명 | |||
黃帝 太皥 少昊 靑帝(東) |
顓頊 炎帝 전頊 赤帝(南) |
赤學 黃帝 帝學 黃帝(中) |
唐堯 少昊 唐堯 黑帝(北) |
史記,五帝本紀 禮記,月令 帝王世紀,皇浦謐 唐, 賈公彦, 疏 |
이상의 학설이 있으나 대부분이 사기 오제본기(史記 五帝本紀)에 나오는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임금을 오제(五帝)로 알고 있다.
3. 삼황오제는 동이족(東夷族)이다.
염제 신농씨를 포함한 삼황(三皇)과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포함한 오제(五帝)가 모두 다「동이족」이라고 한다. 동이족이란 우리나라의 옛 조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孟子) 권8에 보면,「맹자가 말하기를 순(舜)임금은 제빙(諸馮)에서 태어나서 부하(負夏)에 옮겨 살다가 명조(鳴條)에서 죽었는데, 동이(東夷) 사람이다.(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라고 하였다.
순임금이 동이(東夷) 사람이라면 순임금에게 제황(帝皇)의 자리를 양위한 요(堯)임금도 동이족(東夷族)일 것이며, 요임금의 아버지인 제곡(帝嚳)도 동이족이요, 제곡의 아버지인 전욱(顓頊)도 동이족이요, 전욱의 아버지인 소호(少昊)도 동이족이요, 소호의 아버지인 황제(黃帝)도 동이족일 것이다.
황제(黃帝)의 세 계보
黃帝 → 少昊(靑陽氏) → 顓頊(高陽氏) →帝嚳(高辛氏) → 唐堯(陶唐氏) |
이와같은 설은 중국의 학자들도 마찬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공자(孔子)의 10세손(十世孫)인 공빈(孔斌)의 저서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보면,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었다. 다스리기를 백왕(百王)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자부선인(紫府仙人)이 있는데 학문에 통달하여 인간의 지혜를 넘은 사람이다. 황제는 그 문하에서 모든 황문(皇文)을 지도받았다.(舜生於東夷而入中國爲天子 至治卓冠百王 紫府仙人有通文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其門下云)」라고 하였다.
다음은 하우(夏禹)가 엮고 유수(劉秀)가 보수(補修)한「산해경(山海經)」권7에 나오는 기록이다.
「대황(大荒:만주)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不咸:白頭山)이라고 한다. 숙신(肅愼:朝鮮) 씨의 나라이다. 숙신씨의 나라는 백의민족이 사는 나라이며, 북쪽에는 수(樹:人物이 모이는 곳)가 있는데 이름을 웅(雄:장부, 무사, 화랑)이라고 한다. 항상 삼황오제(三皇五帝:八代帝)를 여기에서 선발(取)하여 왔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肅愼氏之國. 肅愼之國在白民之國 北有樹 名曰雄 常先八代帝 於此取之)」라고 하였다.
숙신국(肅愼國)은 백의민족이 가진 여러 국가의 종주국이며 숙신(肅愼), 조선(朝鮮), 환국(桓國), 한국(韓國), 한국(汗國)은 모두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옛 국명이다.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숙신국에서 삼황오제를 모두 선발하여 제황으로 삼았다면 복희, 신농, 요, 순 등이 모두 만주(滿洲)에 자리한 숙신국 사람들이며 그분들은 동이족이요, 옛날 우리의 조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인류 최초의「다인」이라고 일컬어지는「염제 신농씨」도 동이족이요, 우리의 옛 조상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제 2 절 동이족(東夷族)
동이족(東夷族)이란 우리나라의 옛 조상(古朝鮮人)들을 가리키는 말로써 중국 사람들이 지칭하는 말이다.
동(東)이란 해동(海東) 또는 동국(東國)을 가리키며 이(夷)란 큰 활(大弓)을 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동이(東夷)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후한(後漢)시대의 정치가이며 설문학(設文學)의 대가인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設文解字)를 보면,
「이(夷)는 큰(大) 활(弓)을 쓰는 동쪽사람이다.(夷從大從弓爲東方人者)」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이(夷:夸)자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문자로서 큰 활을 쓰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큰 활(大弓)을 잘 썼기 때문에 이와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여하튼 동이(東夷)는 고조선(古朝鮮)을 지칭하는 말로써 일찌기 중국의 동북방을 점거하여 살았다.
우리나라의 상고사(上古史)는 신시시대(神市時代)와 단군시대(檀君時代)로 구분되는데, 신시시대는 씨족사회(氏族社會)의 완성시대이고 단군시대는 국가기원(國家紀元)시대로서 국가시대 즉 민족시대(民族時代)의 완성이었다.
동이(東夷)는 바로 단군시대의 명칭이다. 그래서 중국의 각종 문헌에는 여러 종류의 이인(夷人)의 명칭이 나온다. 이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구이(九夷)를 꼽을 수 있다.
1. 구이(九夷)
구이는 구서(九黍)라고도 하며 이족(夷族)의 아홉 개 분파(九派)를 말하는데, 그 구이란 첫째 견이(畎夷), 둘째 우이(嵎夷), 세째 방이 방이(方夷), 네째 황이(黃夷), 다섯째 백이(白夷), 여섯째 적이(赤夷), 일곱째 현이(玄夷), 여덟째 풍이(風夷), 아홉째 양이(暘夷)를 말한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道不行 乘桴 于海 欲居九夷)」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자께서 중국 대륙에 도(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보고 탄식하면서 한 말이다. 여기에서 구이(九夷)란 모든 동이족이 사는 곳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 그래서 훗날 허신(許愼)이 서룬(設文)에서 말하기를,
「오로지 동이(東夷)는 대(大)를 좇으니 대인(大人)인데, 동이의 풍속이 어질므로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다고 하니, 공자와 같은 성인도 뗏목을 타고 가려고 했다.」라고 하였다. 또 진(晋)나라 때 시인 곽박(郭璞)도 말하기를,
「동방의 어진 나라에 군자의 훈훈한 덕이 있어 예절로 사양하는 것을 좋아하며 예(禮)는 이치로써 따진다.」라고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또 공자의 십세손(十世孫)인 공빈(孔斌)도 동이열전(東夷列傳)에서 말하기를,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교만하거나 뽐내지 않고 그 군사가 비록 강하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는다. 풍속은 순후(淳厚)하여 길을 갈 때는 서로 양보하고 식사를 할 때는 밥을 서로 권하며 가위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요 군자의 나라이다.」
『其國雖大 不目驕矜 其兵雖强 不侵入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 君子國也』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동이는 어진 사람이 사는 군자의 나라로 존경과 추앙을 받아온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동이(東夷)는 동쪽 오랑캐가 되어 천대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면서 이(夷)의 이름을 오랑캐(戎狄)와 더불어 더러운 것이라고 지칭하면서부터 일 것이다. 이는 대단히 슬픈 일이다.
여하튼 이후에 구이(九夷)를 가리키는 말로 남이(藍夷)와 서이(徐夷) 그리고 우이(于夷), 북이(北夷), 서이(西夷), 남이(南夷)가 있었는데 이러한 말들도 모두 동이(東夷)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동이족(東夷族)들은 어디에 근거지(根居地)를 두고 활동했으며 문화를 꽃피웠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2. 동이족의 강역(彊域)
동이족의 활동무대에 대해서는 중국 사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서량지(徐亮之)의 저서인「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은주(殷周)가 다스리던 동이족의 활동무대를 보면 금일의 산동(山東), 하북(河北), 발해연안(渤海沿岸)의 강남 동남과 강소(江蘇) 서북과 안휘(安徽)의 중북과 호북(湖北)의 동쪽 언덕까지 미치고 요동반도(遼動半島)와 조선반도(朝鮮半島) 등 넓은 지역을 포함하는데, 산동반도(山東半島)가 그 중심지였다.」
『殷周之世 東夷活動面 實乃包括 今日之 山東 河北 渤海沿岸 江南東南 江蘇西北 安徽中北 湖北東隅以及 遼動半島 朝鮮半島等 廣大地域而 山東半島中心也』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양자강(長江) 이북인 강소성과 안휘성, 호북성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북성 그리고 북쪽으로는 요동반도와 길림성 그리고 동쪽으로는 조선반도에 이르고 있다.
이상의 지역은 광할하고 모든 산물이 풍부한 곳으로 지금도 차(茶)의 생산이 많은 곳이다. 지금 차가 생산되는 곳은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호북성 등인데 산동성에는 봉래(逢萊), 연태(烟台), 청도(靑島), 교남(膠南), 일조(日照), 임기(臨沂), 몽음(蒙陰), 태안(泰安) 등이 유명하고 강소성에는 육합(六合), 의정(儀征) 등이 유명하고 안휘성에는 가산(嘉山), 전초(全椒), 금채(金寨), 육안(六安), 곽산(霍山), 서성(舒城) 등이 유명하고 호북성에는 응상(應山), 희수(浠水) 등이 유명하다. 이들 지역은 동이족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양자강 이북이다. 오래 전부터 차가 생산되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곳들이다. 이곳에 언제부터 차가 재배되었으며 또 동이족이 이곳의 차를 마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唐)나라 이전부터 차가 생산된 고장들이다.
다음의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은왕조 제 25세 왕조를 보면,
「무을 때에 이르러 동이가 점점 강성해져서 마침내 회수 대산에 분천하여 점차 중국 본토를 점거하고 살게 되었는데 소위 서이(徐夷)라고 한다.」
『及武之 東夷寢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工 所謂徐夷是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은나라 제25대 무을왕 때에 이르러 온왕조의 세력이 점점 쇠퇴해지고 동이가 강성해져서 회수, 대산 지역까지 쳐들어가 빼앗아 살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이곳을 점거하고 사는 동이를 서이(徐夷) 또는 서국(徐國)이라고 불렀다. 회수 대산 지역은 지금의 하남성 일대로 호북성과 안휘성에 인접해 있다. 이곳 역시 예부터 차가 많이 생산되었는데, 그 주요 산지를 보면 신양(信陽), 라산(羅山), 광산(光山), 신현(新縣), 고시(固始)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천문지(天文誌) 28숙진(軫) 사성도(四星圖)를 보면,
「문 동쪽에 일곱 개의 검은 별 청구자와 청구자의 아래에 기부(器府)라는 별이 있네(門東七烏靑丘子 靑丘之下名器府)」라고 하였으며, 그 주(注)에 이르기를 청구자의 주인은 동방의 삼한지국이다(靑丘 主東方 三韓之國)라고 했으며 이 별이 움직이면 그 군사가 지경을 침범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청구자는 중국의 분야도(去極98度)에서 초(楚)나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의 호북성 일대이다. 이곳 역시 예부터 차가 많이 생산되는 고장이다.ㄴ
이상의 각종 문헌에서 보았듯이 우리 동이족의 활동무대는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 가운데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 호북성 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차가 생산되어 애음해 오던 고장으로 동이족이 이 고장을 점령하여 다스릴 때 차마시는 생활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염제 신농씨(神農氏)가 차를 마시며 생활한 고장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제 3 절 고조선(古朝鮮)
고조선은 우리의 옛 조상인 동이족(東夷族)들이 세운 나라로 기원전 수십세기경에 발해만 연안을 중심으로 문화를 발달시켰다. 이들이 세운 나라는 신시시대(神市時代)와 단군시대(檀君時代)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신시시대는 다시 환인시대(桓因時代)와 환웅시대(桓雄時代)로 구분이 되고 단군시대(檀君時代)는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의 삼한시대(三韓時代)로 구분할 수 있다. 신시시대는 구이족(九夷族)이 세운 씨족사회(氏族社會)이고 단군시대는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로서 민족국가시대(民族國家時代)이다. 전자의 신시시대는 거의 만년사(萬年史)에 이르고 후자의 단군시대는 삼천년사(三千年史)에 이른다.
1. 환인시대(桓人時代)
원동중(元董仲) 선생이 찬(撰)한 삼성기(三聖紀) 하편에 보면,
「인류의 시조는 나반(那般:나바이, 아버지의 뜻)이다. 처음에 아만(阿曼:아마이, 어머니의 뜻)과 만난 곳은 아이사타(阿耳斯它)였다. 꿈에 하느님(天神)의 가르침을 받고 혼례를 치렀다. 구환족(九桓族:九夷族)은 모두 그 후예들이다.(원문 생략)
위의 기록을 보면 인류의 시조는「나반과 아만」이라고 한다. 이들이 신의 계시를 받아 혼인을 하여 자손이 번성하여 구환족이 되었다.
또 안함노(安含老) 선생이 찬(撰)한 삼성기 상편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우리 환국(桓國)의 건국은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사백력(斯白力:시베리아)의 하늘엔 한 신(一神)이 계셨는데, 홀로 신이 되어 광명으로 우주를 비추었다. 세상에 나타나서 만물을 낳고 오랫동안 살면서 언제나 즐겁게 지냈다. 지극한 기운을 타고 놀면서 묘하게 자연(自然)을 맺을 뿐만 아니라, 형상은 없으나 보고, 하지 않으나 만들며, 말하지 않으나 행했다. 어느날 흑수(黑水:흑룡강)와 백산(白山:백두산)의 땅에 동남동녀(童男童女) 8명이 내려왔는데 이때에 환인(桓因)께서 감군(監群)의 직분으로 천계(天界)에 살면서 돌을 부딪쳐 불(火)을 일으켜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 천계(天界)를 가리켜 천제환인(天帝桓因), 또는 안파견(安巴堅:아버님)이라고 했다. 7세(世)를 전했으나 연대를 알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원문생략)
이상의 기록은 우리나라의 건국이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 이루어졌으며, 건국은 제왕「환인(桓因)」이라고 하며 시베리아 땅에서 일어나 백두산 근처에 나라를 세웠음을 알 수가 있다.
또 삼성기 하편에 보면,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 백성들은 부유할 뿐만 아니라 수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桓因)이 천산(天山)에서 살면서 도(道)를 얻어 죽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 덕을 베풀어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힘을 써서 굶주림과 추위가 없었다. 혁서환인(赫胥桓仁), 고시리환인(古是利桓仁), 주우양환인(朱于襄桓仁), 석제임환인(釋提壬桓仁), 구을리환인(邱乙利桓仁) 등으로 전하니 지위리환인(智爲利桓仁) 즉 단인(檀仁)에까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원문생략)
<환인 7대 제왕년표>
왕대 |
제 명 |
즉 위 |
즉 위 |
기 타 | ||
환 기 |
간 지 |
서기(B.C) | ||||
1 2 3 4 5 6 7 |
환인(안파견) 혁서 고시리 주우양 석제임 구을리 지위리(단인) |
1565 |
무 진 |
7199 |
옛날에 환인께서 파미루고원(波奈留山) 밑에 도읍을 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환국(桓國)이라고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가 되는데, 구막한국(寇莫汗國)과 구다천국(句茶川國) 등 12개 나라로 나누어서 다스렸으며, 7대에 걸쳐 계승하였다.
2. 환웅시대(桓雄時代)
환웅(桓雄)이 환인시대를 이어서 제왕이 되었는데, 삼성기 상편에 이르기를「천신의 조서(詔)를 받들어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에 내려왔다. 천평(天坪:신시의 들)에 자정(子井:샘)과 여정(女井:샘)을 파고 청구(靑邱)에 정지법(井地法:토지분배법)을 정했을 뿐만 아니라 천부인(天符印:風伯, 雲師, 雨師의 三神을 거느리는 印綬)을 갖고, 다섯 가지 일(五事)을 주관, 인간세상에 살면서 다스리고 교화하며 모든 사람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했다. 또한 신시(神市)에 도읍, 나라를 「배달(倍達)」이라 했다. 3․7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를 지내며 외물(外物)을 경계하고 조심해 문을 닫고 스스로 수양할 뿐만 아니라 주원(呪願)해 공을 쌓고, 약(藥)을 복용해 신선(神仙)이 됐다」라고 하였다.(원문생략)
이상은 환인시대를 이어 환웅시대가 열리는데, 환웅도 마찬가지로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에 하강해서 하느님(天神)의 조서를 받아 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렸다. 신시에 도읍을 했는데 나라를 배달(倍達)이라고 했다. 이때부터「배달민족」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 같다. 또 이들은 연단술(鍊丹術)을 발달시켜 약을 만들어 복용해 신선이 되었는데 약을「단약(丹藥)」 또는 「단차(丹茶)」라고 했다. 지금도 한의학(韓醫學)에서는 약을 차로 복용하거나 차(茶)를 약으로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삼성기 하편에 보면,
「환웅이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정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이르니, 이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했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主病), 주선악(主善惡)하고, 무릇 인간의 39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였으며 인간세상에 살면서 다스리고 교화하며 모든 사람을 널리 이롭게 했다」라고 하였다.(원문생략)
환웅천왕이 3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백성을 교화했는데, 신시에 도읍하고 비, 구름, 바람의 3신(三神)을 함께 대동했다. 배달국의 환웅시대는 18세를 전했는데, 역년은 1565년이었다. 환웅천왕의 역대기는 다음과 같다.
<환웅천왕의 역년기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거발환 거불리 우야고 모사라 태우의 다의발 거 련 안부련 양 운 갈 고 거야반 주무신 사와라 자오지 치액부 축다리 혁다세 거불단 |
원 년 94 180 279 386 479 577 658 731 827 927 1019 1124 1191 1300 1389 1445 1517 |
계해 정유 계해 임인 기축 갑자 임슬 신유 갑슬 경슬 경인 임슬 정미 갑인 계묘 임신 무진 경진 |
3898 3804 3718 3619 3512 3419 3321 3240 3167 3071 2971 2879 2774 2707 2598 2509 2453 2381 |
94 86 99 107 93 98 81 73 96 100 92 105 67 109 89 56 72 48 |
3. 단군시대(檀君時代)
단군시대는 환웅시대를 이어서 일어났는데 진한, 마한, 번한 등 삼한시대를 말한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세운 나라인데, 진한은 왕검이 직접 통치를 하였고, 마한은 웅백다(熊伯多)를 부왕(副王)으로 삼아 다스렸고, 변한은 치두남(蚩頭男)을 부왕으로 삼았다.
이암(李岩) 선생이 찬(撰)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보면,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며 어머니는 웅씨(雄氏) 왕녀인데, 신묘년(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박달나무 아래서 낳았다. 신인(神人)이 덕이 있으므로 원근(遠近)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나이 14세 갑진년(BC 2357년)에 웅씨 왕이 그 신성함을 듣고 왕검을 비왕(卑王:副王)으로 삼아 대읍(大邑)의 국사를 맡겼다. 무진년(BC 2333년) 당요(唐堯) 때에 단국(檀國)에서 아사달(阿斯達) 단목(檀木)의 터로 왔다.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천제자(天帝子)로 삼으니 구환(九桓)이 합하여 하나가 되고, 신화(神化)가 먼곳에까지 미치었다. 이를『단군왕검』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원문생략)
단군은 그를 다르는 무리 8백명을 이끌고 아사달로 와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조선」이라고 했는데, 제위에 올라 개천한 날이 10월 3일(기원전 2333년)이다. 이로부터 단군의 덕화가 멀리 퍼져 구역(九域)에서 먼 바닷가 탐랑(耽浪)에까지 미쳤다. 이때에 천하의 땅을 구획하여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삼한은 5가(家) 64족(族)이었는데, 마한과 번한은 각각 비왕(卑王)을 두어 다스렸으며, 그 안에 여러 개의 소국이 있었다. 이 소국의 장은 한(汗)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단군조선(진한)은 시조 단군왕검으로부터 47대 단군 고열가(古列加)에까지 이어졌으며, 박조선(마한)은 비왕 웅백다로부터 35대 맹용까지 이어졌으며, 번조선(번한)은 비왕 치두남으로부터 75대 기준에까지 이어졌다.
제 4 절 선교(仙敎)
고조선의 음다생활을 기술하다가 보니 고조선의 역사와 종교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앞장에서는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이야기했고, 이제는 고조선의 종교인 선교(仙敎)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할 것 같다.
강력한 신권통치(神權統治)를 해온 고조선은 당시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최고 권위자로서 하늘을 섬기는 단군선인(檀君仙人)을 정점으로 하여 그로부터 여러 부족이 종교의식의 일부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신정적(神政的) 결합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종교적 배경 위에서 성립된 고유종교를「선교(仙敎)」라고 한다. 이 선교를 신봉하는 이들에 의해 선도수련(仙道修鍊)의 방법이 발달되었고 이를 성취한 사람을 선인(仙人) 또는 신선(神仙) 또는 신인(神人:사야먼)이라고 한다. 이 선인을 중심으로 고조선은 정치, 종교, 제천의식(祭天儀式) 등이 계승되었는데 이 선인 집단에서 인재(人才)도 길러 등용하였다. 고조선의 자부선인(紫府仙人)이나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모두 이 선인 출신이요, 고구려의 선인도랑(仙人徒郞) 제도, 신라의 풍류도(風流道)나 풍월도(風月道:花郞)가 다 이 제도의 전승이다. 이 풍류도의 풍류정신(風流精神)이 훗날 한국의 차정신으로 발전하였지만 이 제도의 집단에 참여하여 선도를 수련하는 모든 선인들은 거의 의무적으로 다도수련을 쌓아야만 했다.
고조선 때에는 이 선도를 수련하는 곳을 웅(雄) 또는 대웅(大雄)이라고 하였는데, 산해경(山海經, 卷七, 海外四經)에 보면,
「숙신의 나라는 백의민족이 사는 나라에 있는데, 북쪽에 큰 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웅(雄)이라고 하는데, 일찌기 선대의 8대 왕조의 제(三皇五帝)들을 이곳에서 선발해 왔다.(肅愼之國 在白民之國 北有樹名曰雄 常先八代帝 於此取之)」라고 하였다.
이 곳 웅(雄)에서 선도를 수련하는 고조선의 선인들은 교과서 격인 옥전결(玉篆訣)을 읽어야만 했는데 이 옥전결의 중권(中卷)에는 설생불사(設生不死)의 장생법(長生法)과 단차(丹茶)를 만들어 마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 풍월도의 낭도였던 충담사(忠談師)나 월명사(月明師) 또는 사선(四仙)의 무리였던 영랑선인(永郞仙人), 원술랑(元述郞) 등도 모두 차의 달인(達人)이요, 다도수련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선도수련을 하는 선인들이 신봉한「선교」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선교의 도사상(道思想)과 선인들의 차생활에 대해서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선교(仙敎)란 어떤 종교인가
선교란 삼신(三神)의 한몸이신 일신(一神:하나님)을 받들고 기원하여 하나님이 계신 복되고 빛나는 천궁(天宮)에 올라가 영원토록 참되고 보람있게 살며, 지혜와 복덕(福德)을 함께 닦아 밝은 사람(哲人:仙人)이 되고자 하는 종교이다. 선교의 경전(經典)으로는 천부경(天符經)과 음부경(陰符經) 그리고 오행론(五行論)과 삼일신고(三一神誥)와 구월소서(九月소書)가 있는데, 삼일신고의 제2장(章) 일신(一神)조에 보면,
「하나님(一神)은 위없는 첫자리에 계시며 큰 덕(大德)과 큰 지혜(大慧)와 큰 힘(大力)을 가지고 하늘 이치(天理)를 내며, 수없는 세계(宇宙)를 차지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되 티끌만한 것도 빠뜨림이 없으며 밝고도 신령스러운 감히 이름지어 헤아릴 길이 없느니라, 소리(聲)와 김(氣)로 원하고 빌면, 친히 볼 수 있도록 하리니 자기 성품(性) 속에서 그것을 찾아라. 그러면 너의 머리 속에 내려와 있느리라(원문생략)」라고 하였으며 제3장 천궁(天宮) 조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천궁이 있는데 온갖 착함으로써 계단(階)을 하고 온갖 덕(德)으로써 문(門)을 삼았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모든 밝은 이들(諸哲:諸仙)이 모시고 있어 대길상(大吉祥) 대광명(大光明)한 곳이다. 오직 참된 성품에 통하고(性通) 모든 공덕을 다 닦은(功完)이라야 천궁에 나아가 길이 쾌락을 얻을 수 있느니라(원문생략)」고 하였다.
이와같이 백성을 교화해서 밝은 이(哲人)가 되게 하고(化成象哲), 속된 세상을 이화(理化)해서 하늘나라로 만든다(化成天國)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다. 그래서 뭇 사람들은 아득한 땅(迷地)에 태어나서부터 세 가지 가닥(三妄)의 뿌리를 박나니, 이것이 마음(心), 김(氣), 몸(體)이다. 마음(心)은 성품(性)에 의지한 것으로써 착함(善)과 악함(惡)이 있으니 착하면 복되고 악하면 화가 되며 김(氣)은 목숨(命)에 의지한 것으로써 맑고 흐림이 있으니 맑으면 오래 살고 흐리면 일찍 죽으며, 몸(體)은 정기(精)에 의지한 것으로써 두텁고(厚) 엷음(薄)이 있으니, 후하면 귀(貴)하고 박하면 천(賤)하게 된다. 이와같이 착하고, 약하고, 맑고, 흐리고, 두텁고, 엶음이 서로 섞여서 가닥길(境途)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말지만 밝은 이(哲人:仙人)는 느낌(기쁨, 슬픔, 두려움, 성냄, 탐색, 싫음)을 그치고 숨쉼(향내, 술내, 추위, 더위, 마름, 물낌)을 고르게 하며, 부딪힘(소리, 빚깔, 냄새, 맛, 음탕, 닿음)을 금하고 한 뜻으로 되어 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함에로 나아가 크게 하늘 기틀(天理)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性通), 공적(功積)을 마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인(仙人)이 되는 길이다.
이와같이 우리 겨레는 개천이래 삼신(三神) 한몸이신(三神一體) 단군 천신도(天神道)를 교로 삼고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 경천숭조애인(敬天崇祖愛人)을 3대 이념으로 삼고 삼진귀일(三眞歸一), 반망즉진(返妄卽眞), 반진일신(返眞一神)하는 철학으로 삼일논리(三一論理)의 사상을 세워 그 전통을 오래도록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면 선교의 사상과 철학을 기록한 경전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2. 선교의 경전(經典)
① 천부경(天符經)
천부경은 천제(天帝) 환국에 구전되는 글로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을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보고서 다시 문서로 만들어 세상에 전한 것이다. 총 81자(字)로 되어 있는데 우주의 근본 이치와 세상 만물이 형성되는 원리와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3극(三極)이 근본이며 천하는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진다고 되어 있다. 또 이 근본이란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一)요, 이 하나는 우주의 근본이요 곧 마음이라고 하였다.
② 음부경(陰符經)
음부경은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 또는 황제외경(黃帝外經)이라고 하는데 황제내경(黃帝內經)과 쌍벽을 이루는 경전이다. 글자 수가 총 437자로서 경전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이다. 내용은 상․중․하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상편은 주로 하늘의 이치와 땅의 조화를, 중편은 인간의 지혜와 성인의 은공을, 하편은 인간이 지나친 욕심을 내지 말고 적당하게 행해야 하며 순리대로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③ 오행론(五行論)
오행론은 음양오행론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35자로 되었으며 오행과 오행의 생극(生極)으로 짜여졌다. 오행이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를 말하는데, 서로 생生)하면 좋아지고 극(剋)하면 나빠진다는 주역(周易)의 근본 원리이다.
④ 삼일신고(三一神誥)
삼일신고는 모두 5장(章) 366자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한다(執一含三)는 뜻과 셋을 모두어 하나로 들어간다(會三歸一)는 뜻으로 근본을 삼고 천신조화의 근원과 온 세계의 사람과 만물을 교화하고 다스림에 대한 것을 논술했다.
⑤ 구월소서(九月소書)
구월소서는 191자로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은 천하의 큰 근본은 마음이 중정(中正)에 이르는 길이다. 사람이 중정을 잃으면 성취되는 일이 없고, 사물이 중정을 잃으면 기울고 없어지게 된다.
이상은 선교의 주요 경전들인데 선사상을 잘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으로 모두가 구전되던 것이 후에 문자화된 것이다.
3. 선교의 도사상(道思想)
선교의 도사상은 우리 고유의 민족종교로서 이상향이요, 정신문화의 근원이자 선도수련(仙道修鍊)의 선인(仙人)들에게는 귀의처(歸依處)요 풍류도(風流道)의 근본으로서 풍류정신(風流精神)의 발원지이자 차정신의 원천(源泉)이다.
그러므로 동이족의 후예인 우리들에게는 민족정신의 뿌리를 파악하는 셈이 되며, 차를 좋아하는 차 애호인에게는 우리 차의 정신을 재확인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럼 선교의 도사상은 어떠한 것인가.
묘향산(妙香山)에 은거한 유위자(有爲子)라는 선인(仙人)이 말하기를「도(道)의 대원(大原)은 삼신(三神)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도는 이미 대(對)가 없고 칭(稱)도 없으니, 대가 있는 것은 도가 아니며 칭이 있는 것 또한 도가 아닌 것이다. 도는 상도(常道)가 없으며 때(時)에 따른다. 곧 도의 귀(貴)한 바다. 칭은 상칭(常稱)이 없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곧 칭의 실(實)한 바다. 그밖으로는 이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안으로는 이것보다 작은 것이 없다. 도는 곧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기(機)가 있는데 내 마음의 기(機)에서 보며, 땅에는 상(象)이 있는데 내 몸(身)의 상(象)에서 보며, 물(物)에는 재(宰)가 있는데 내 기(氣)의 재(宰)에서 본다. 곧 하나(一)를 잡아서 셋을 품고(執一而含三), 셋이 모여서 하나(一)로 돌아가는 것(會三而歸一)이다」라고 하였다.
도의 큰 근원은 삼신에서 나왔는데 대(對)도 없고 칭(稱)도 없으며 항상 머무르지 않고 때(時)에 따라 작용한다고 했다. 또 크기로는 이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작기로는 이보다 작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큰 것이 없으며 작기로는 이보다 작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선교에서는 하나(一)라고 하는데 천부경(天符經)에 보면,「하나(一)는 모든 것의 시초(始)이니 이보다 먼저 비롯됨(始)은 없느니라(一如無如一)」하였고 이것「하나(一)에서 하늘(天), 땅(地), 사람(人)이 나왔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고 이 근본을 마음(心)이라」고 하였으며 이「하나(一)는 근본으로 돌아가면 마침(終)이 되나 마친 하나(終一)는 없느니라(一終無終一)」라고 하였다.
또 대일(大一)--천지(天地)가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의 혼돈의 원기(元氣)--즉 극(極)은 양기(良氣)가 그 이름이다. 없는 듯 있는 듯 혼(混)하고 빈 듯 거친 듯 묘(妙)하다. 삼일(三一)--천지인(天地人)의 태극의 원기,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의(義)--은 그 체(體)요 일삼(一三)--하나에서 천지인(天地人) 셋이 나옴--은 그 용(用)이다. 혼묘(混妙)는 하나의 고리(環)로 체와 용은 갈라지지 않느다. 커다란 허공에 빛이 있으니 이것이 신(神)의 모습이다. 커다란 기운이 오래 있으니 이것이 신의 조화(造化)이다. 참 목숨(眞命:天命)의 근원만법(根源萬法)이 모두 다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면 삼신일체의 주신이요 만법의 근원이며 도(道)의 본체인 삼일(三一)의 작용은 무엇인가, 삼일은 체(體)요 일삼(一三)은 용(用)인데 체는 일신(一神)이요, 용은 삼신(三神)이다. 일신이 작용할 때만 삼신이 되는데 삼신은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을 말한다. 그러면 일신의 작용인 삼신이란 무엇인가.
고려사(高麗史) 팔관기(八關記)에 보면,「상계(上界)의 주신(主神)은 천일(天一)이라 한다. 조화를 주관 절대 지고의 권능을 갖고 있다. 무형이형(無形而形:모양이 없으나 나타냄)해 만물로 하여금 저마다 그 성품을 통하게 한다. 이것이 청진대(淸眞大)의 몸(體)이다. 하계(下界)의 주신(主神)은 지일(地一)이라 한다. 교화(敎化)를 주관, 지선유일(至善唯一)의 법력을 갖고 있다. 무위이작(無爲而作:일하지 않으나 만듬)해 만물로 하여금 저마다 그 목숨(命)을 알게 한다. 이것이 선성대(善聖大)의 몸(體)이다. 중계(中界)의 주신(主神)은 태일(太一)이라 한다. 치화(治化)를 주관 최고무상(最高無上)의 덕량(德量)을 갖고 있다. 무언교화(無言敎化:말없이 교화함)해 만물로 하여금 저마다 그 정(精)을 보전하게 한다. 이것이 미능대(美能大)의 몸(體)이다」
이와같이 삼신(三神)의 체(體)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용(用)은 무궁무진하여 신(神)의 여의자재(如意自在), 지미지현(至微至縣) 함은 끝내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삼신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태초에 일찌기 위 아래와 사방도 없이 암흑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다만 하나의 빛만이 있었는데, 그 빛이 상계(上界)에서 물러나자 삼신(三神)이 있었다. 이가 곧 한분 뿐인 상제(上帝)이었다. 상제는 주체이기 때문에 일신(一神)이다. 삼신은 저마다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할 때만 삼신이 된다.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고 온 누리를 통치할 수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슬기와 지혜가 있다. 그 형체는 보이지 않으며 가장 높은 하늘에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곳이 없다. 언제나 빛을 크게 발하고 신묘(神妙)함을 크게 나타내며 지극히 복되고 가장 빛나는 것을 크게 내린다. 기(氣)를 불어서 만물을 감싸주고 열을 쏟아내며 씨앗을 기르고 신묘함을 행하여 세상 일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고 암흑 뿐인 이곳에 하나의 빛이 있었다. 이 빛이 사라지자 삼신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삼신은 일신(一神)인 상제가 작용하여 나타낸 몸이다. 그러므로 신통만변(神通萬變)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 이 분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기르며 감싸주고 온갖 세상 일을 주관하신다. 이 상제는 형체가 없으므로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높은 하늘나라에 계시며 이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 이 삼신일체(三神一體)인 하나님(一神)을 믿고 그 도를 실천함이 곧 선교이다.
이와같이 삼신일체의 도(道)는 대원일(大圓一)에 뜻이 있다. 그러므로 조화의 신(造化神)은 내려와서 우리의 성(性)이 되고 교화의 신(敎化神)은 내려와서 우리의 명(命)이 되며, 치화의 신(治化神)은 내려와서 우리의 정(精)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높은 것이다. 본시 인간과 물건의 생김은 균일한 것으로서 그 진원(眞源)은 삼관(三關)--성품(性), 목숨(命), 정기(精)--에 있다. 성품은 목숨을 떠나지 않고 목숨은 성품을 떠나지 않으며 정기는 그 가운데 있다. 사람의 마음(心), 김(氣), 몸(身)을 삼방(三房)이라고 하는데, 방房)은 성화(成化)의 근원이다. 김는 마음을 떠나지 않으며 마음은 김를 떠나지 않는다. 몸은 그 가운데 있다.
그리고 느낌(感), 숨쉼(息), 부딪침(觸)을 삼문(三門)이라고 하는데, 문(門)은 행도(行道)의 세 가지 법(三法)이다. 느낌은 숨쉼을 떠나지 않고 숨쉼은 느낌을 떠나지 않는다. 부딪침(觸)은 그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성품(性)은 진리의 원관(元關)이며 마음(心)은 진신(眞神)의 현방(玄房)이며 느낌(感)은 진응(眞應)의 묘문(妙門)이다.
그래서 자기 본래 성품(自性)을 보고 이치를 궁구하여 진기(眞機)를 크게 발해 신(神)의 존재를 마음 속에서 구하고 진신(眞身)을 크게 나타내 서로 감응(感應)하여 진실한 대업(眞業)을 성취해야만 한다.
이와같이 진업(眞業)을 성취한 사람을 선인(仙人) 또는 신선(神仙) 도는 신인(神人)이라고 하는데, 다음은 그들의 차생활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제 5 절 선인(仙人)
선인이란 선도(仙道)를 수련하거나 성취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선인 집단이 고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집단체요 최고 지배층이었다. 그리고 최고 통솔권자도 이 선도를 성취한 선인이요, 교육자도 선인이다. 이처럼 고조선의 상류계층은 모두가 선인이었다. 이들 선인이 선도를 수련하는데 차(茶)를 마시거나 부적(符籍)을 태워 그 재를 찻물(茶水)에 타서 마시는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예는 독특한 음다풍속으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이르려는 주술적(呪術的)이요, 제의적(祭儀的)인 특이한 경우이다. 그러면 먼저 선인 몇 분을 소개하고 그들이 차를 만들어 마시는 연단술(鍊丹術) 몇 가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단군선인(檀君仙人)
단군왕검(王儉)은 환웅천왕의 아들로서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환웅시대를 이은 제왕이다.
이 단군이 선도를 성취한 선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東川王) 21년조 주(註)에 보면,
「평양이란 곳은 본시 선인왕검(仙人王儉)의 집터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도읍을 해서 왕검이라 한다고 하였다(원문생략)」
또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 17세 단군여을(檀君余乙)조에 보면, 청포 입은 도인이 단군여을의 공덕을 칭송하는 게송을 지어 헌상했는데, 그 송은 다음과 같다.
「장생선인(長生仙人)의 나라/ 즐거이 선인의 백성이 되네./ 제덕(帝德)은 일그러짐이 없고,/ 왕도는 치우침이 없네./ 백성이여 이웃이여/ 수고(愁苦)함을 볼 수가 없네./ 믿음으로 책화(責禍)하고,/ 은혜로 관경(管境)하니,/ 성(城)이여 나라여,/ 전벌(戰伐)을 보지 못하네」하고 칭송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단군이 다스리는 나라를 불로장생 선인지국(仙人之國)이라고 하며 선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역대 모든 단군은 선인(仙人)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선인이 되어 능력이 출중해야만 나라의 백성들을 다스릴 수가 있으니 자연히 선도를 수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자부선인(紫府仙人)
자부선인은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선인 발귀리(發貴理)의 제자로서 신시시대 말부터 단군시대 초기에 걸쳐서 산 선인이다. 당시 최고의 수승한 도를 이루어 그 명성이 원근에 자자했다.
한단고기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제5에 보면,
「자부선생은 발귀리의 후학이다. 나면서부터 신명(神明)하여 도(道)를 얻고 날아오르며(飛昇) 일찌기 해와 달의 운행을 측정, 오행의 수리(五行之數理)를 추고(推考)해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만들었다. 이것이 칠성력(七星曆)의 시작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은 자부선생이 헌원(軒轅:黃帝)에게 주어서 그것을 사용하여 마음을 씻고 의(義)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찌기 삼청궁(三淸宮)에 살았다. 궁은 청구국(靑邱國) 대풍산(大風山:백두산)의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헌후가 직접 치우(蚩尤)를 조현(朝見)하려고 가는 길에 자부선생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얻은 것이다. 경문은 신시의 녹도(鹿圖)로 기록했다. 3편으로 나누어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자부선인은 인간의 지혜를 넘는 사람이다. 대능력자로서 못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보면「발해의 가운데에 일찌기 가본 사람이 전하기를 삼신산은 모든 선인(仙人)과 불사약(不死藥)이 다 있고 그곳 물건과 짐승은 다 희고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했다」그리고 또 선가(仙家)의 글을 보면,「삼신산에는 혼을 불러 죽은 자를 되살릴 뿐만 아니라 늙지 않게 하는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고 한다」고 했다. 과연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옛 사람의 말이니 믿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 그들 선인들이 불로장생을 위해서 행한 연단술 가운데 차(茶)를 사용한 몇가지 예를 소개하겠다.
3. 연단술(鍊丹術)
연단술은 그 방법과 종류가 다양하고 또 기원하는 목적도 각각 다르다. 또 연단술에 대한 서적은 그 종류가 많아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지 알 수가 없으며 입공법(入工法)도 각각 다르기 때문에 많이 수련을 한 사람이 아니면 잘못을 구분해 내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차(茶)에 관계된 연단술 가운데 몇 가지 예만을 소개해서 음다생활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① 제십이천녀법(祭十二天女法)
깨끗한 방 하나를 준비해 분향하고 동쪽을 향해 주문을 외우며 지성으로 재계(齋戒)를 드리면 한 달 또는 49일만에야 구하고자 한 도(道)가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치국안민(治國安民) 보신원해(保身遠害)하며 일체재복(一切災福)의 일을 미리 알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데 함부로 누설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 도움이 없어진다.
○제물(祭物)
新度四領, 祭巾四條, 香花五菓, 淸淨酒脯, 細茶, 糖餠, 鹿脯, 細食, 白笋, 棗二升.
○입공식(入工式)
갑자기 묘시(卯時)에 입실하여 분향하고 6갑신인(六甲神印)과 6갑신주(六甲神呪) 5편을 향안(香案) 위에 올려 놓고 오시(午時)에 다시 분향한 뒤 밤 해시(亥時)에 천녀(天女)를 부르며 육갑인으로 부적 5장을 찍어 태워서 재를 깨끗한 정화수에 타서 눈을 깨끗이 씻고(중략) 이경(二更)에 종이 4번째 울릴 때 오제(五帝)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고 문밖에 고요해질 때 부인(符印)을 엿본다. 이때 붉은 하광(霞光)이 비치면서 오방(五方)으로 하늘과 통하게 되고, 단(丹) 5알(粒)이 든「단차(丹茶)」를 마실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마시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해안이 열려 금은보화가 묻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게 되는데, 그 중 3분의 1은 가난한 자를 위해 써야 하고 3분의 1은 초제(醮祭) 때 신에게 감사비용으로 나머지는 자신이 쓸 수 있다. 또 이 물로 목욕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만병이 치료되어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새로 나며 눈과 귀가 밝아진다고 하였다.
② 천지대신차력법(天地大神借力法)
법사가 수도를 하려면 입산하여 3일동안 재계(齋戒)하고 산당(山當)을 깨끗이 수리한 뒤 4일째 되는 날 신시(申時)에 산신제(山神祭)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입공을 한다.
○제물(祭物)
餠, 飯坍, 造 , 淸酒, 脯, 禮幣, 灸, 水, 菜, 果.
○산제지법(山祭之法)
산제를 지내는 법은 진설한 후에 축문 1편과「진다문(進茶文) 3편」을 읽고 백배를 드리고 엎드려 소원을 빌며 상을 치울 때는 산왕경(山王經) 1편을 읽고, 사자위(使者位)의 상을 물리고 동구밖에 나가 일체 모든 마귀(一切諸魔)를 불러 밥 한 그릇을 주나니 이때 시식주(施食呪)와 보공양주(普供養呪)와 퇴송주(退送呪)를 각각 3번씩 염송한다.
○진다문(進茶文)
今將甘露茶 奉獻山王前 曲祭虔誠意 願須愛納受 稽首歸依禮 云云.
○입공식(入工式)
깨끗한 방 하나에 부기(符旗)를 사용하여 방을 호법하고 부적을 사용하여 몸을 보호한 뒤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검은 망관을 쓰며 검은 버선을 신고 오장군환(五將軍丸) 약을 7일동안 복용하고(중략) 매일 안토지신주 1편과, 정천지해세경 1편, 도량경 1편, 사십팔 원주, 원주와 연송주를 7일동안 염송하면 골절(骨節)이 울고 몸이 1장(1丈)이 높이 뜬다.
③ 왕생정토부법(往生淨土符法)
정토부를 먹는 날은 1월 1일, 2월 3일, 5월 9일로 이 3일동안은 서쪽을 향해「나무아미타불」을 1천 번 염송한 뒤에, 다시 「음 마다리 홈 바탁」주문을 백팔 번 외우고 정토부(淨土符)를 태워서 「찻물(茶水)」에 타서 마시면 현세에는 부귀하고 내생에는 극락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제 6 절 신인(神人:샤아먼)
신인(神人) 즉 샤아먼(Shaman)이란 말은 영적 능력자 또는 신의 말을 전달하는 전달자 또는 신과 접신하는 영매, 즉 접신자를 의미하며 마술사, 예언자 및 의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샤아먼 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샤아먼의 신기를 우리나라에서는 무당들의 관습과 능력에서 아직도 목격되지만 옛날의 능력자들에 비하면 지금의 무당들은 정말 보잘 것이 없다. 이들 신인들은 정령과 접촉하기 위해서나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차를 마시거나 차를 향(香)처럼 피우던 관습이 아주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왔는데 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문상희(文相熙)씨가 번역해서 소개한 엘리아데의「샤마니즘(The Shamanism)」에 보면,
「브르야트족(Buryat)은 어떤 때는 입무의례(入巫儀禮)뒤에 최초의 성별의식, 곧 케레게-굴케(Khrege-Khulkhe)를 거행하게 되는데, 전 공동체가 그 비용을 함께 분담한다. 공물(供物)은 샤아먼과 그의 조수들(아들들)에 의하여 수집되는데, 그들은 말을 타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행진하며 다닌다. 공물은 보통 머릿수건과 리본이며 드물게는 금전일 경우도 있다. 그들은 나무로 된 컵, 마장(馬杖:말 모습 장대)에 매달 작은 방울, 병주, 포도주, 그 밖의 다른 물건들을 사들인다. 빨라간스크(Balagansk)지역에서는 샤아먼 후보자와 아버지 샤아먼과 9명의 샤아먼의 아들들(조수)이 천막 속으로 물러나서 9일간의 단식을 하게 되는데, 차(茶)와 끓인 밀가루죽 이외에는 아무 것도 들지 않는다」
브르야트족은 신시베리아족으로 야쿠트족보다 작은 부족으로 시베리아 남부지역에 위치하며 전통적인 세습샤아먼과 직업샤아먼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또 백샤아먼과 흑샤아먼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이 처음으로 샤아먼이 되고자 하면 입무의식을 치르게 되고 이어서 성별의식을 거행하는데, 이때에 차(茶)를 음료로 마신다는 것이다. 다른 음식은 삼가하고 오직 차와 밀가루죽만을 먹는데 이것은 몸과 마음의 정화제로서 신성한 정령과 접합하기 위한 특별한 의식이다. 이들이 마신 차가 무슨 차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아주 오랜 전통으로 영롱한 신술을 얻어내는 데 사용했다고 하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또 다른 예가 있다. 폴란드인 니오라쩨(Dr. Geor Nioradze)가 1925년에 독일에 가서 발표한「시베리아 제민족의 원시종교(Der Schamanismus beiden Siberschen Vӧlkern, Strecker und Schrӧder in Stuttgrad)」라는 저서에, 야쿠트족(Yakut)은 샤아먼이 되기 위해서 백산차(白山茶)를 향처럼 피웠다는 것이다.
「야쿠트족의 장래 샤아먼은 윤가(允可)를 얻기 위하여 그 선생으로 하여금 고산대하(高山大河)에 유도되어 무복(巫服)을 입혀서 마고(魔鼓)와 방망이(撥)를 주고 우편에는 처녀 9인 좌편에는 동정(童貞) 9인을 정렬시킨다. 노샤아먼도 역시 무복을 입고 윤가를 받을 자의 뒤에 서서 그의 말을 청년에게 복창시킨다. 이때에 제자는 서언(誓言)을 부르되 그의 생애를 영귀(靈鬼)에게 바치고 그 명령을 항상 수행하겠다고 한다. 이 의식이 끝날 때 샤아먼은 영귀가 있는 곳이 어딘가 또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어루만져 달랠 수 있을까를 말하여 주고 다음에 희생으로 동물을 잡아서 그 피를 제자의 옷에 뿌린다.
샤아먼의 전권력을 얻으려면 장래 샤아먼은 꿈에 그 수호신령 세온(Seon)을 보고 그것에서 모자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또「저승」인 부니(Buni)에 출입하는 허가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이 샤아먼은 단장하여 그를 위하여 소지식물(沼地植物)인 백산차(白山茶)를 피우는데 한 사람 내지 세사람의 조수를 뽑고 향당(鄕黨)을 초대하여 희생(돼지 9마리, 두서너 통의 물)을 올리고 자기의 수호신(세온)에게 노래를 드리고 엄숙하게 그가 샤아먼이 된 것을 선언한다.」
야쿠트족은 신시베리아족으로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사는데 직업적, 개인적인 샤아먼이 많다. 이들 샤아먼이 윤가를 받아 진정한 샤아먼으로서 전권력을 얻으려면 그의 수호신령인 세온에게 부니(저승)를 출입하는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세온을 위하여 백산차를 향처럼 피웠다. 이때 피우는 백산차는 소지식물로 백두산 근처에 자생하는 철쭉과(躑躅科)와 석남과(石南科) 두 종류가 있는데, 철쭉과에는 가는잎백산차, 긴잎백산차, 백산차, 산백산차, 왕백산차, 아기백산차, 털백산차 등 7종이 있고 석남과에는 각시석남과 화태석남 2종류가 있다. 이는 주로 함경북도 백두산 근처 삼림 속이나 습지대에 주로 자생하며 5월달에 흰꽃이 여러 개 피며 가을에 열매가 맺고 표고 1천5백~2천3백m 내외에 분포한다. 상록활엽관목(常綠闊葉灌木)으로 잎은 피침형(披針形)이고 끝이 뾰족하다. 이파리 뒷면에 갈색털이 나 있고 향기가 많이 난다. 나무의 크기는 1m 내외로 연한 잎을 따서 차로 만들어 마신다.
길림외기(吉林外記)에는 이것을 안춘향(安春香)이라고 하며 바위의 깨끗하고 맑은 곳에서 나며 높이는 1자 가량이고 잎은 버들잎형으로 맛있고 향기로우며 제사(祭祀)에 쓴다. 그 잎은 말려서 차의 대용으로 한다고 하였다. 청 건륭(高宗) 때에 어용차로 사용하기도 한 백산차는 일찍부터 제사용으로 또는 샤아먼의 입무의식 때 사용되었다. 또 차를 질병퇴치의 제물로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박용숙(朴容叔)씨의「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에 보면,
「반자로프(Dordji Banzarott)나 미하일로브스키(Mikhailowski)의 보고에 따르면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 지역의 샤아먼들은 대체로 환자를 고치는 굿(Kut)을 할 때에는 반드시 차(茶), 담배, 술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 점은 그러한 물질들이 병의 치료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샤아먼들은 병을 고치거나, 자기의 수호신령에 제사를 올리거나, 또는 몸과 마음을 정화할 때 차를 사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차가 가지는 어떤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제사를 올리고 병을 고치는 약으로 차를 쓰고 있으며,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차의 성분과 효능 때문이다. 다음은 샤아먼들이 호신부(護身符)로 사용하였던 차부적을 한 두 가지 소개하였다.
1. 신다부(神茶符)
신다부는 질병, 잡귀를 물리치는 부적으로 백미고사(白眉故事)에 보면,
「황해바다(중국의 동해)를 건너 삭산(朔山)에 큰 복숭아 나무가 있는데 그곳에 길이가 천리나 되는 반굴(蟠屈)이 있고 그 안에 귀신이 있다. 문 앞에서 신다(神茶)와 울루(鬱壘)라는 두 신이 굴 속의 귀신들을 지키고 있다. 그러므로 황제(黃帝)가 두 신의 모습을 복숭아 나무 판자에 그려 대문에 걸어서 흉악한 잡귀들을 쫓았다」
위의 기록을 보면 신다와 울루라는 두 신이 잡귀를 잡아서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들의 모습이나 이름을 써서 문앞에 걸어두면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2. 대명부(大明符)
대명부는 잡귀를 쫓는 부적으로 신혼부부가 많이 쓴다고 한다. 대명(大明)이란「큰 광명」이란 뜻으로 산하를 비추는 햇볕과 같아 귀신을 쫓는다. 귀신은 음기로 어둠과 음습한 곳을 좋아하는데 큰 광명은 어둠을 물리쳐 악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다다(茶다)는 차다자와 귀신 쫓을 다자로「차로써 귀신을 쫓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부적은 신혼례를 치룬 신랑신부가 몸에 지니면 잡귀들의 모든 재액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 3 장 삼국시대의 음다생활 ---------------------------------- |
제 1 절 신라(新羅)
1. 신라 최초의 다원(茶園)
신라에 차가 있기는 선덕여왕(善德女王:632~646) 때부터라고 한다. 이때부터 민간에서 마셔지다가 정식 국교를 통해서 차를 수입한 것은 홍덕왕(興德王) 때의 일이다.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돌아오면서 차종자를 가져오니 흥덕왕은 이를 지리산(智異山)에 심도록 한 것이다.
「당에 갔던 사신 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入唐廻使大廉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삼국사기 흥덕왕 3년)
이상과 같이 국교를 통한 차의 수입은 신라에만 있고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에는 없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흥덕왕 때 사신 대렴을 통해서 수입한 차종자는 신라가 정식 국교를 통해서 들여온 것을 말하며, 백제나 고구려의 사례는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학자들이나 차 애호인들은 흥덕왕때 수입한 차가 우리나라 최초의 전래이며(정식국교를 통한)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도록 한 것을 우리나라「최초의 다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이다.
흥덕왕(826~835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가 발해(渤海)가 건국(699년)함에 따라 남북조시대(남쪽은 신라, 북쪽은 발해)로 양분된 후기신라시대(後新羅)에 치세(治世)를 한 임금이다.(보기 참조)
보기
시 대 구 분 |
나 라 이 름 |
연 대 |
삼 국 시 대 |
고구려, 백제, 신라 |
BC 57~AD668 |
통일 신라 시대 |
신라(32년간) |
668~699 |
남북조 시대 |
신라, 발해 |
699~935 |
물론 흥덕왕이 다스리던 땅이 백제나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지만, 백제 땅에는 백제가 멸망하기 이전에 차가 있었다.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에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정식 국교를 통한 차종자의 수입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백제사(百濟史)와 고구려사(高句麗史)가 왜곡(歪曲) 말살될 때에 함께 문헌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신라사(新羅史) 중심으로 윤색된 삼국사(三國史)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고 보면, 백제사나 고구려사 가운데 어느 곳에 정식 국교를 통한 차종자의 수입에 대한 기록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착상이 아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런 기록들을 찾아내 고증하는 길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라 최초의 다원은 어디일까, 흥덕왕은 이를 지리산에 심도록 하였다는데 지리산 어느 곳일까 이 지점이 확실치 않다.
지리산은 대단히 광범위한 산으로 예부터 지리산(地理山), 두류산(頭流山), 방장산(方丈山)이라고 했으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신성시해온 영산(靈山)이다. 남한 제2의 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축으로 형성된 대산맥으로 동쪽의 천왕봉에서 서쪽의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주능선으로 반야봉, 촛대봉, 토끼봉 등 10여개의 고산준봉이 자리하고 있어, 그 산세가 웅대 광활하기 비길 데 없다. 행정구역상으로 전남, 전북, 경남의 3개 도와 구례, 남원, 하동, 산청, 함양의 5개 군에 걸쳐 잇으며 산둘레만도 8백여리, 넓이는 439평방km로 약 1억 3천만 평에 달한다.
이처럼 광활한 산협에는 예부터 불교문화가 찬란히 꽃을 피웠다. 그 대표적인 사찰을 보면 화엄사(華嚴寺)를 위시해서 10개 사찰을 들 수가 있다. 지리산 남록으로 화엄사, 천은사(泉隱寺), 연곡사(燕谷寺), 쌍계사(雙磎寺), 칠불암(七佛庵)을 들 수 있고, 북록으로는 남원의 실상사(實相寺), 벽송사(碧松寺), 영원사(靈源寺)가 있고, 동쪽으로는 산청의 대원사(大源寺)와 법계사(法界寺)가 그것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수목이 우거져 원시림을 이루고 기온이 높고 강우량이 풍부하여 824종의 많은 식물이 분포하며, 206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와같이 광대하고 풍부한 자연 가운데 어느 곳에 처음으로 차씨를 심었을까, 이에는 양설(兩說)이 있는 듯하다.
조선의 다와 선(朝鮮の茶と禪)의 지리산조에 보면
「김대렴이 이식한 장소가 어느 절의 경내인지 판명되어 있지 않으나, 먼저 정다산(丁茶山)은 이를 쌍계사일 거라고 하고, 화엄사의 전 주지 정병헌(鄭秉憲)씨는 화엄사의 장죽전(長竹田)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왜정 때 일본인(諸岡存)이 쓴 것으로 화엄사의 만우(曼宇=鄭秉憲) 스님의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인데, 조사차 가입일웅(家入一雄)씨가 이 화엄사에 들러서 듣고 전해준 말이다. 이와같이 대렴이 가져온 차씨 파종설이 쌍계사와 화엄사로 양설이 생겨나게 된 것이 만우스님에 의해서이다. 만우스님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다산선생이 쌍계사 파종설을 주장했다고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고증도 안되고 있다. 또 화엄사 장죽전의 파종설도 설득력이 없다. 차라리 양론을 야기시키지 말았어야만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파종설의 각 주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양론을 만들어낸 화엄사의 만우스님은 화엄사 파종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은 가입일웅(家入一雄)에 의해「조선의 다와 선」에 실려 있다.
첫재로 「그 당시 신라는 9주(九州)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리산은 9주 중에 진주권(普州圈)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화엄사가 진주권에 편입되어 있는 것은 동국여지승람에도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설득력이 없고 확실한 이유가 못됨). 둘째로「흥덕왕 당시 지리산록에는 주민의 수도 극히 적고 사찰도 화엄사 하나 뿐이었다」(화엄사 위로 6개 사찰이 있었음). 세째로「화엄사는 연기(緣起), 원효(元曉), 의상(義湘), 정행(正行) 등의 고승이 배출되어 있는 관계상 융성하고 있을 때라 차를 화엄사에 명하여 심은 것이라고 본다」(긍정이 가나 지배적인 이유가 못됨). 네째로「특히 화엄사의 산림 내에 있는 장죽전의 차는 전라, 경상의 양도를 통하여 예부터 유명하고 대렴은 이 장죽전에 차를 심고 그것으로 조선의 차가 보급된 것으로 보아 이른바 화엄사는 조선차의 발생지가 아니겠는가」(근거가 없음). 다섯째로「지리산 쌍계사에도 옛날부터 차나무가 있다. 다산(茶山) 선생은 이 쌍계사 차를 대렴이 이식한 차라고 주장했지만 쌍계사는 대렴이 죽은지 150년 뒤에 창건된 절로서, 이 설은 오류같이 생각된다. 그것은 절이 없는 심산유곡에 차를 뿌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고증이 안됨) 이상과 같이 주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주장을 화엄사 사적기인「해동호남도지리산대화엄사적」에 기록해 놓았다. 「연기조사는 차씨를 가져와서 화엄사를 세움과 동시에 절 뒤의 긴대발(長竹田)에 심었으며, 흥덕왕도 또한 이곳에 차를 심으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장죽전의 죽로차라고 이름하였다. 호남 일대가 조선의 다향인데 그 고적을 상고하면 화엄사가 처음이라고 하겠다」(조작한 내용임)
만우스님은 화엄사 파종설을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쌍계사 파종설을 주장하는 설도 있다. 첫째로「정다산 선생은 쌍계사 차를 대렴이 이식한 차라고 주장하고 있다」(고증이 안됨), 둘째로「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를 창건한 진감국사(774~850)나 최치원 선생이 심었으며 지금도 야생차가 가장 많다」(고증이 안됨), 세째로「흥덕왕이 쌍계사를 좋아하여 이 절에 심게 하였다.」(근거가 없음)
이상의 양설이 대립하고 있지만 두 설이 모두 설득력이 없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그러므로 양설을 대립시켜야 할 이유가 없다. 다만 화엄사나 쌍계사가 다 같이 차 재배지로서 적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지리산권에는 이 두 사찰 말고도 흥덕왕 때 차를 심을 만한 곳으로 연곡사(544년), 천은사(828년), 칠불암(수로왕대), 실상사(828년), 법계사(544년), 대원사(548년)가 있다. 이 중에서 칠불암과 법계사는 고산준봉에 있어 장소가 협소하고, 실상사는 북쪽에 있어 춥고, 대원사 역시 깊은 산중이고, 연곡사나 천은사는 따뜻하고 좋은 곳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지리산남록」이 파종지로 유력하며 화엄․쌍계․천은․연곡사가 다 남록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들 사찰주변에 파종했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화엄사나 쌍계사에 국한시켜 고집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따르고, 고증도 안되는 상태이니, 차라리「지리산남록」을 시배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결과적으로「김대렴공차시배추모비」는 성급한 경사가 되었다.
2. 신라차의 개조(開祖) 충담사
충담(忠談) 스님은 경덕왕(景德王 : 742~765년)대에서 혜공왕(惠恭王:765~780)대에 걸쳐서 살다 간 다승(茶僧)이요, 시승(詩僧)으로서 그 인품이 고결한 분이다. 스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전하는 문헌이 없어 그 행적을 분명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일부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역사적 배경과 활동 상황, 그리고 사상과 신분을 약간 규명할 수 있는 것뿐이다.
삼국유사 권제2, 경덕왕 충담사(忠談師)조에 보면,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신(三山神)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뜰에서 모시었다. 삼월삼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상(樓上)에 납시어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 고승(榮服僧)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이때 마침 위의(威儀) 있고 깨끗한 대덕(大德) 하나가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우러러보고 인도하여 뵙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고승이 아니다』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스님 한 분이 있는데 누더기옷(衲衣)을 입고 등에는 걸망(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이 기쁘게 보고 누상으로 맞아들였다. 그 걸망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 :『그대는 누구시요?』
스님:『충담(忠談)이라 하옵니다.』
왕 :『어디서 돌아오시는 길이요?』
스님:『소승은 해마다 삼월삼짇날(三月三日)과 구월중구날(九月九日)이면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공양을 올리는데, 지금도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 :『과인에게도 차 한잔을 나누어 줄 수 있는지요』하시니,
스님은 이내 차를 달여 바쳤는데 차의 맛이 특이하고 찻잔 안에서 기이한 향내가 풍겼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짐이 일찌기 들으니 대사가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한가』하시니,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러하옵니다』하였다. 왕이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시오』하시니 스님은 즉시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를 아름답게 여기고 왕사(王師)로 책봉하였으나 스님은 재배(再拜)를 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스런 어머니시라,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라 여기시니,
백성이 그 은혜를 알리,
꾸물거리면서 사는 물생(物生)들에게, 이를 먹여 다스리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
임금답게 신하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이다.』」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域現寺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 適月一大德 威儀鮮潔 徜佯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一作荷簀) 從南而來 王喜見之 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 僧曰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조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 知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朕生以支所音 物生 此朕喰惡支治良羅 此地朕捨遣只於 冬是去於丁 爲尸知國惡支持以 支知古如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爲內尸等焉 國惡 太平恨音叱如』
이상의 문헌 속에서 우리는 몇가지 차에 대한 중대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로 충담사가 삼월삼일과 구월구일에는 매년 남산의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다는 일이다.
중삼중구절은 일년 명절의 하나로 산천에 제사하거나 조상님 사당에 제사 지내는 일이다. 우리네 선조들은 일년 중 매달 명일을 정하고 명일마다 헌다(獻茶)하는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는데, 역년기(歷年紀)에 보면, 원조(元祖:설), 상원(上元:정월대보름), 삼월(三月:삼짇날), 단오(端午:5일), 유두(流頭:6일), 칠석(七夕:7일), 중양(重陽:추석), 동지(冬至:11월), 납월(臘月:12월), 삭망(朔望:1일, 15일) 그리고 어른들 생신(生辰)날까지도 다례(茶禮)를 지내는 의식이 행해졌으니 이러한 제전(祭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민속의식의 하나로 계승되어야 할 민속문화 유산이다.
둘째로 충담선사가 차를 끓일 수 있는 일체의 다구들을 걸망 속에 넣어 짊어지고 다녔다는 점이다. 차를 달일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당시에 차생활을 하는 승려들이 거주지를 옮기거나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할 때는 으례 다른 소지품과 함께 다구를 가지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무 곳에서나 차를 마시고 싶거나 헌다할 일이 생기면 다구를 내어 차를 달였다. 그래서 이처럼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간편한 다구들이 발달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 다구를 가지고 다니는 풍속이 충담선사 한 사람에게만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차생활을 하는 승려나 화랑들은 거주지를 자주 옮기는 생활습관 때문에 차도구를(자기 것은)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습속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셋째로 충담선사가 경덕왕의 부탁을 받고 귀정문 누상에서 차를 달여 왕께 드렸다. 충담사는 미륵세존께 헌다하기 위해서 산상(山上)에서 차를 달였으며, 다음에는 경덕왕께 드리기 위해서 귀정문 누상에서 차를 달였다. 이처럼 때와 장소가 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필요하면 다구를 꺼내 차를 달인 것이다. 이것은 차는 어느 곳에서나 마시고 싶을 때는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때와 장소를 초월해서 들에서나, 산에서나, 성루(城褸)에서나, 뜰에서나, 낮이나, 밤이나, 구별없이 차를 마시고 싶을 때는 항상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다는 점이다.
넷째로 충담사는 화랑(花郞)이자 승려였다. 삼국유사의 찬자 일연선사(一然禪師)는 순수한 스님과, 스님이면서 화랑인 경우를 확실하게 구별해서 기록해 놓았는데 순수한 스님일 경우에는 석(釋)자를 이름자 앞에 붙였고, 스님이면서 화랑인 경우에는 사(師)를 이름자 뒤에다 붙여 놓았다. 예를 들어 순수한 스님인 경우에는 석양지(釋良志), 석영재(釋永才), 석원광(釋圓光)과 같이 석(釋:중석) 자를 이름자 앞에다 붙여 놓았고, 스님이면서 화랑인 경우에는 월명사(月明師), 융천사(融天師), 충담사(忠談師)와 같이 사(師:스승사)자를 이름자 뒤에 붙여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충담사를 화랑이면서 승려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 제4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조에 보면,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의 생의(生義)스님은 항상 도중사(道中寺)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서 그를 데리고 남산(南山)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시를 해놓게 하고는 다시 산 아래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청컨대 스님은 나를 파내다가 고개 위에 편하게 묻어주시오』하고 사라졌다. 생의스님이 꿈에서 깨어나 친구와 함께 표시를 해놓은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니 거기에서 돌미륵(石彌勒)이 나와서 삼화령 위로 옮겨 모셨다. 그 후 선덕여왕 13년 갑진(644년)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뒤에 절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고 했다.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성의사(性義寺)라고 한다. 충담사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날에 차를 달여서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님이다.)」
『善德王時, 釋生義常佳道中寺 夢有僧引上 南山而行 令結草爲標 至山之南洞 謂曰 我理此處 請師出安嶺上 旣覺 與友人尋所標 至基洞掘地 有石彌勒出 置於三化嶺上 善德王十三年甲辰歲 創寺而居 後名生義寺(今訛言性義寺. 忠談師每歲重三重九, 烹茶獻供者, 是此尊也.)』
생의사는 선덕여왕 13년(644년)에 도중사의 생의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꿈 속에 현몽한 미륵불의 안내로 삼화령 밑 남쪽 골짜기에 매몰되어 있던 돌미륵불을 파내어 삼화령 고개 위에 옮겨 모시고 그곳에 절을 지었다. 그 후 폐사가 되었다가 다시 중건하여 고려 때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찬할 때는 「생의사」를 「성의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절의 폐사 연도는 정확치 않으나 충담선사가 미륵세존께 헌다 공양할 때는 이미 폐사가 되어 없어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충담사가 헌다한 미륵세존을 가리켜 「삼화령미륵세존」이라 지칭했다.「생의사미륵세존」이라는 절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절이 있었다면 절 이름을 붙여 「생의사미륵세존」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3. 신라차의 종류
신라시대 차의 종류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각종 문헌이나 비문 등에 나오는 기록들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기록이 매우 적다. 신라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선생이 왕명을 받아서 찬(撰)한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에 있는「진감선사 대공탑비명(眞鑑禪師大空塔碑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호향(胡香)을 선사하니 기와에 잿불을 담아 환(丸)을 짓지 않은 채 태우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 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뿐이다』했으며, 다시 중국차(漢茗) 공양하는 이가 있으니, 섶나무로 돌솥(石釜)에 불 지피고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 끓여 마시며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배(창자)를 적실 뿐이다』했으니 참(眞)됨을 지키고 속(俗)됨을 싫어함이 다 이와 같았다.」(원문생략)
진감선사는 선물받은 중국차(漢茗)를 가루를 내지 않고 덩어리차를 그대로 돌솥에 넣어 끓여서 마셨다. 돌솥의 끓는 물 속에 덩어리차를 넣어 달여 마시는 풍속은 최근까지도 해남, 강진, 장흥 근처의 농가에서 행하던 다법이다. 진감선사가 선물받은 중국차는 가루를 내지않은 덩어리 차로서 단다(團茶:둥그런 차)나 병다(餠茶:떡차)였을 것이며, 이 덩어리 차를 맷돌(茶磨)에 갈아 분말을 만들어 돌솥의 끓는 물에 넣어 달여서 마시는 것이니, 이때 신라에는 단다나 병다 그리고 분말차(粉末茶)가 있었던 것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경덕왕(景德王)과 충담사(忠談師)조에 보면,
「충담: 소승은 해마다 삼월삼짇날과 구월중구날이면 차를 달여(烹茶)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공양을 올리는데 지금도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 : 과인에게도 차 한잔을 나누어 줄 수 있는지요.
하시니 충담스님은 이내 차를 달여(煎茶) 바쳤는데 차의 맛이 특이하고 찻잔 안에서 기이한 향내가 풍겼다.」
충담선사가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 올릴 때는 「팽다(烹茶)」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경덕왕께 차를 달여 드릴 때는 「전다(煎茶)」라는 말을 썼는데, 미륵세존께 올린 차나 경덕왕께 드린 차가 두 종류가 아니고 한 종류의 차일 것으로 사료되는 바 차를 달인다는 용어만 다르게 사용한 것 같다.
또 삼국유사의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 조에 보면,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성의사(性義寺)라고 한다. 충담사가 해마다 중삼중구(重三重九)날 차를 달여서(烹茶)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이다.」
이 기록에서도 충담사가 미륵세존께 올린 차는 「팽다(烹茶)」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또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 보면,
「두 태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煎茶)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중략) 또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忉利天)의 신(神)이 3시(三時)로 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
은 차를 달여(烹茶) 바치고 40명의 성인(聖人)은 열자 높이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었다.」
「二公每汲洞中水, 煎茶獻供. 至夜名庵修道.(중략) 又修眞五十年. 도利天神三時聽法. 淨居天衆烹茶供獻. 四十聖승空十尺. 常時護衛」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태자는 강원도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를 했는데, 매일 아침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문수보살께 차를 달여(煎茶) 올렸다. 그 후 득도를 해서 정거천의 천인(天人)들로부터 차대접을 받았다. 이때에도 「전다(煎茶)」라는 말과 「팽다(烹茶)」라는 용어가 함께 쓰여졌다.
또 삼국유사,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보면,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우통수(于洞水:午重水)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서(煎茶) 일만진신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兩太子幷禮拜. 每日早朝汲于洞水. 煎茶供義一萬眞身文殊」
이 기록에서도 보천, 효명 두 태자는 우통수의 물을 길어다 문수보살께 차를 달여(煎茶) 공양을 했는데 이때는 전다(煎茶)라는 용어만 썼다.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보면,
「차를 달여 원효대사께 바치려고 했으나 샘물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바위 틈에서 물이 솟아나왔다. 물맛이 아주 달아 젖과 같았다. 그래서 사포는 이 물로 차를 달였다.(點茶)」
부안의 원효방에서 사포스님이 원효대사께 차를 달여 올릴 때에는 점다(點茶)라는 말을 썼다.
이상의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용어는 전다(煎茶)와 팽다(烹茶)와 점다(點茶)이다. 이런 말들은 차의 이름(상품명)이 아니고, 차를 달인다는 뜻으로 사용된 용어들이다. 그러나 전다(煎茶)란 잎차(葉茶)를 달일 때 쓰는 말이요, 팽다(烹茶)란 덩어리차(餠茶)나 가루차(末茶)를 탕관(湯罐)에 넣어서 끓일 때 쓰는 말이요, 점다(點茶)란 다완(茶碗)에 가루차를 넣고 탕수를 부어 다선(茶筅)으로 저어서 마실 때 쓰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신라에도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떡차와 잎차와 가루차가 모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잠시 호암(湖岩)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호암 문일평(文一平:1888~1939년) 선생은 그의 다고사(茶故事:1939년)에서 「신라차의 종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차(茗)가 금석문(金石文)에 나타나기는 무염국사보다 수십년 선배인 진감국사의 비명에 「한명(漢茗)」이라고 적힌 것이 처음이다. 진감국사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12년(850년)에 적화(寂化)한 고승으로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재수입하던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에는 그의 나이 55세였다. 그러므로 이 한명(漢茗) 운운의 기사는 대렴의 그것과 전후하여 되었을 것이며 이때 신라에서 토산차(土産茶) 외에 한명(漢茗) 곧 당나라 차를 진중(珍重)하여 병용하였음을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신라인이 음용(飮用)하던 차는 말차(末茶:가루차)냐 잎차(葉茶)냐 하면 「삼국유사」에는 「전다(煎茶)」라고 적히고 「남행월일기」에는 「점다(點茶)」라고 적혀 있는 즉, 전자는 잎차를 말함이요, 후자는 말차를 말함이다. 이것이 사실을 전함일진대 잎차도 있었고 말차도 있었다. 그러나 잎차보다 말차가 흔히 음용된 것 같다.」
문일평 선생의 말처럼 신라 때에는 잎차보다는 가루차가 더 많이 마셔졌을 것이며, 이런 차들은 당에서 수입하는 것 외에 신라에서 만들어진 토산품들이다. 그러면 신라에서는 어떠한 차가 만들어졌으며, 당나라에서는 무슨 차가 수입되었을까, 이점을 규명한다면 신라차의 종류는 자명해진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당에서 관직에 머물 때 차(茶)와 약(藥)을 사서 고국의 부모님께 보내드린 일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당나라의 차가 신라로 많이 유입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당시 당나라에는 어떤 종류의 차가 있었을까, 이점은 당시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보면 확실해진다.
「마시는 차에는 추차(觕茶), 산차(散茶), 말차(末茶), 병다(餠茶)가 있다」라고 하였다. 추차는 거친 차잎으로 만든 잎차이고, 산다는 지금의 잎차와 같은 것이고, 말차는 가루를 낸 분말차이고, 병다는 떡처럼 만든 떡차이다.
이상 네 종류의 차가 있었다. 이러한 차들이 신라로 흘러들어 왔을 것이고, 신라에서는 이런 차들의 제조법을 익혀서(유학승) 국내에서도 재배, 생산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에도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네 가지 종류의 차가 다 생산되었을 것이며, 적어도 품질의 우열을 떠나 당에서 수입된 것과 신라에서 생산된 각종의 차가 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신라차의 다구(茶具)
신라인들이 사용한 다구(茶具)의 종류는 자세히 알 수가 없고, 다만 문헌상에 나오는 것과 안압지(雁鴨池)에서 나온 「토기다완(土器茶盌)」과 기타 유물 등에서 그 생김새와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신라 때의 다구들은 무엇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① 석부(石釜)
돌솥은 덩어리차(餠茶, 錢茶, 團茶)나 가루차(粉末茶)를 끓이는 도구이다. 신라 때는 돌솥을 많이 사용했는데,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명」에 보면 「돌솥(石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국차(漢茗)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니, 섶나무로 돌솥(石釜)에 불을 지피고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 끓여 마시면서 말하기를『나는 이 맛이 어떠한 지 알지 못한다. 배(창자)를 적실 뿐이다.』라고 하였다.」
진감선사가 사용한 돌솥은 그 형태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부뚜막을 만들어 걸어두고 섶나무로 불을 때서 차를 달여 마셨던 것 같다. 이때 차를 달여 마시는 방법은 돌솥에 물을 붓고 섶나무로 불을 지펴 물을 끓인다. 그 끓는 물 속에 덩어리차나 가루차를 넣어서 잠시 기다리면 차가 우러나게 되는데, 이 때 차를 떠내 찻잔에 나누어 마신다.
② 토기다완(土器茶盌)
토기다완은 신라 때 다완으로 유일한 것이며 경주 안압지 발굴조사 때 출토된 것으로, 그 몸통에 「차다(茶)」자가 쓰여져 있어 다완으로 판명된 것이다.
1975년 3월부터 76년 12월까지 약 2년여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조사 보고한 「안압지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차다(茶)」자가 먹글씨(墨書)로 쓰여진 다완(茶盌)이 나왔는데, 높이(高)가 6.7cm이고 구경(口徑)이 16.8cm로 직립구연(直立口緣)을 한 밑이 둥근 원저완(圓底盌)으로서 구연(口緣)의 외면에 한 줄의 침선(沈線)이 둘러져 있다. 그릇 외면에 정(貞), 언(言), 영(榮)의 3자(三字)와 구름문양(雲文)과 풀꽃모양(草花文)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져 있다. 영(榮)자와 정(貞)자 사이에는 엷고 잙은 글씨로 「차다(茶)」자가 쓰여져 있고, 정(貞)자와 언(言)자 사이에는 타(唾)자와 정(貞)자가 엷게 쓰여져 있다. 태토(胎土)는 정선된 것을 사용하였으나 토기를 구운 소성도(燒成度)는 매우 낮다. 빛깔이 그릇 외면은 백회색(白灰色)이고 구상부(口像部)에서 안쪽 내면의 태반은 흑회색(黑灰色)이다.
이상과 같은 완(盌) 종류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완(盌)들도 찻잔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완(盌)의 형태와 크기는 훗날 고려청자나 분청다완으로 그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게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토기다완의 출토는 신라시대 음다사의 한 면을 명백하게 밝혀주는 큰 수확이며 보물이 아닐 수 없다.
③ 석구(石臼)
돌절구는 덩어리차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 때 사용하는 절구통이다. 이 돌절구는 본래 「다구(茶臼)」라고 하는데 돌(石)로 만들었다고 하여 「석구(石臼)」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강릉대도호부조에 보면,
「한송정은 부 동쪽 15리에 있는데 큰 바다가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다천(茶泉), 돌아궁이(石竈), 돌절구(石臼)가 있는데 술랑선인(述朗仙人)들이 놀던 곳이다.」
돌절구가 있다는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은 지금은 「녹두정(綠荳亭)」이라고 부르는데 정자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오직 옛날의 다천(茶泉)과 돌절구(石臼)만이 남아 있다. 강릉시 하시동(下詩洞) 소재의 녹두정에 있는 석구(石臼)는 여러자의 명문의 새겨져 있는데, 한 면에는 「녹두정」이라고 새겨져 있고, 상단부에 직사각형으로 홈이 파여 있으며 양옆으로 「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新羅仙人永朗鍊丹石臼)라고 두 줄로 쓰여져 있다. 신라 때 선인 영랑이 사용했다고 하는 이 돌절구는 사실은 신라 때의 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고려 때 한송정의 비석 좌대였는데, 고려말 송(宋)에서 귀화한 호종단(胡宗旦)이란 자가 비를 뽑아 바다에 던져버려 좌대만 남았는데, 강릉부사를 지낸 윤종의(尹宗儀)씨가, 이 좌대가 영랑의 연단석구인 줄 알고 그 좌대에 「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라고 새겨 놓은 것이다.
④ 석조(石竈)
석조(石竈)는 돌로 된 부뚜막이다. 풍로(風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돌풍로」라고도 한다. 본래는 「다조(茶竈)」라고 하는 것인데 돌로 만들면 「석조」라고 한다. 이 석조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고려 때 익재 이제현의 「묘련사석지조기(妙蓮寺石池竈記)」와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가 있다. 묘련사석지조기를 보면, 삼장(三藏) 순암법사(順庵法師)가 금강산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그 길로 한송정을 유람했는데, 그때 석지조를 보고 돌아와 묘련사에 있는 석지조를 찾아서 가져다 뜰에 두고 사용했는데 그 형상을 보면, 석조는 「다른 하나는 두 곳이 움푹하고 둥근 데가 있는데 이것은 불을 때는 곳이요 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 구멍을 좀 크게 하여 옴폭하고 둥근 데 통하게 하였으니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으로 합하여 이름하면 석지조라는 것이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석조는 그 생김새가 옛날 말(斗)과 같이 사각형으로 생겼는데 두 곳에 옴폭하게 파여진 둥근 데가 있다. 하나는 물을 담아 그릇을 씻는 곳이요, 한 곳은 밑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되어 있는데 불을 때는 곳이다.
⑤ 석지(石池)
석지는 돌로 만들어진 찻물을 담아 보관하는 그릇이다. 맑은 샘물을 길어다 담아두고 필요시에 떠서 찻물을 끓인다. 이 석지는 한송정과 묘련사에 있었는데, 그 생김새는 「묘련사석지조기」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 하나는 네모나게 갈아서 말(斗) 같이 하고 그 가운데를 둥글게 절구 같이 옴폭 파냈으니, 샘물을 담는 곳이다. 그 아래에는 구멍이 있어 입 벌린것 같으니, 흐리고 막힌 것을 뽑아 맑은 물을 고이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석지의 모양은 사각형으로 다음은 돌의 가운데를 둥그렇게 파서 물을 담을 수 있도록 했다. 옴폭 파인 밑에는 구멍이 옆으로 조그맣게 뚫려 있어서 물이 탁해지면 갈아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항상 맑은 물을 보관해 두고 필요하면 떠내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⑥ 기타(其他)
그 외로 충담선사가 사용하던 야외용 다구와 경덕왕이 월명사(月明師)에게 선물한 다구가 한 벌 있다. 충담선사는 항상 걸망 속에 야외용 다구를 넣어 짊어지고 다녔는데, 미륵세존께 차공양을 올리기도 하고 경덕왕께 차를 끓여 올리기도 했지만, 그 다구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서 그 생김새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야외에서 간편하게 끓일 수 있는 다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경덕왕이 월명사(月明師)에게 선물한 다구는 차를 품평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일습 한 벌을 주었는데, 이것 역시 다구의 모양을 설명하지 않아서 그 생김새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외에도 한송정과 경포대에는 차를 끓일 수 있는 다천(茶泉), 다정(茶井), 석정(石井)이라고 불리는 샘(泉)이 있었고, 그리고 경포대에는 차 끓이는 부뚜막인 다조(茶竈)가 있었다.
5. 신라차의 정자(亭子)
신라 때 다정(茶亭)이나 다실(茶室)로 사용되었던 곳은 많았을 것으로 사료되나, 그에 대한 문헌이나 자료의 빈곤으로 많이 밝힐 수 없다. 다만 그때 차를 애호한 사람들의 신분을 분류해서 그 형태에 따라 다정과 다실을 규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라 때 차를 즐겨 마신 사람들을 보면 대개 네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가 있는데 첫째는 왕궁의 왕과 왕족들이고, 둘째는 사원의 승려들이며, 세째는 민간의 귀족들이고, 네째는 국선(國仙)의 무리인 화랑들이다.
이들이 주로 차생활을 하던 곳을 살펴보면, 왕궁에서는 안압지의 임해 같은 별궁(別宮)에서 마셨을 것이며, 사원의 승려들은 창림사의 다연원 같은 다실이 적당했을 것이며, 귀족들에게는 별채나 사랑채의 대청마루가 알맞을 것이며, 화랑들에게는 한송정이나 경포대 같은 명승지의 정자나 누대가 좋았을 것이다.
① 안압지 임해전(雁鴨池 臨海殿)
안압지와 임해전은 문무왕(文武王)이 창건한 것으로 신라왕실의 별궁이다. 이 별궁에서 차를 마시던 토기다완(土器茶盌)이 나와서 왕공귀족들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보면 문무왕 14년(674년) 2월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궁내천지(宮內穿池) 조산종화초(造山種花草) 양진금기수(養珍禽奇獸)〕」고 했다. 이것이 처음으로 안압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효소왕(孝昭王) 6년(697년) 9월에는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연군신어림해전(宴群臣於臨海殿)〕」고 하였는데, 이것은 임해전에 군신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기록이다.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안압지와 임해전은 문무왕 14년(674년)부터 효소왕 6년(697년) 사이(23년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2년여(1975~76년)에 걸쳐 안압지를 발굴 조사했는데 이때 안압지에서 바닥에 까는 보상화문전(寶相華文傳)이 나왔다. 이 전돌에 「조로2년 한지벌군 0소사 3월3일작(調露二年漢只伐君0小舍三月三日作…)」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조로2년은 당년호로 문무왕 20년(680년)에 해당된다. 이 전돌은 임해전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바, 문무왕 20년 3월 3일에 만들었다. 그렇다면 임해전은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문무왕은 14년(674년)부터 20년(680년)까지 6년여에 걸쳐 안압지와 임해전을 창건했는데, 연회도 한 번 베풀지 못하고 병을 얻어 이듬해(21년:681년) 7월 1일에 죽었다. 그 뒤 임해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고 역대 임금들은 임해전에 군신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지난번에 발굴된 토기다완(貞言茶)은 연회 때 사용했던 것으로 안압지에 빠져 매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역대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푼 기록이 보이는데, 혜공왕(惠恭王) 5년(769년) 3월에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연군신어림해전(宴群臣於臨海殿)〕」고 하였고, 헌안왕(憲安王) 4년(860년) 9월에 「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왕회군신어림해전(王會群臣於臨海殿)〕」고 하였고 헌강왕(憲康王) 7년(881년) 3월에 「군신들을 임해전에 모아 향연을 베풀고 왕은 주흥에 겨워 거문고를 타고 좌우의 신하들은 모두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연군신어림해전(宴群臣於臨海殿) 주감상고금(酒酣上鼓琴) 좌우각진가사(左右各進歌詞) 극환이패(極歡而罷)〕」고, 경순왕(敬順王) 5년(931년) 2월에는 「고려 태조를 임해전에 모셔 잔치를 베풀었다.〔치연어림해전(置宴於臨海殿)〕」고 하였다.
이와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다가 보니 이때 사용하던 기물이 안압지에 많이 빠져 매몰되었다. 발굴 당시에 수많은 기물과 그릇이 나왔는데 이때 「토기다완」도 함께 출토되었다.
② 다연원(茶淵院)
다연원은 경주 남산의 창림사(昌林寺)에 있었던 신라 때 사원의 다실이다. 이 다실 지붕에 올렸던 와당이 20여년 전에 발견되었다. 이 와당 표면에 「다연원」이라는 당호(堂號)가 새겨져 있는데 와당 연구가인 최귀주(崔貴柱)씨가 소장하고 있다. 세로 12cm, 가로 13cm, 두께 2cm 정도의 암막새 파편으로 글자 크기는 사방 2cm 정도의 정자체인데 사방연속문양으로 인각(印刻)된 형태이다. 이 다실은 폐사된 지 오래되어 지금은 건축양식이나 규모를 알 수가 없다. 이 다연원이 있던 창림사는 창건연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신라고찰의 하나로 한때는 문성왕(文聖王:839~857년)의 원찰(願刹)이기도 했다. 경주 남산 서쪽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데 오능(五陵)에서 라정(蘿井)을 거쳐 남간사지(南澗寺址)로 오르는 계곡을 따라 줄곧 올라가다 보면 들판이 나오고 그 옆에 마을이 있다. 이 마을로 가는 논 사이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남간사지의 당간지주다. 여기를 지나 계곡을 오르면 「창림사지」가 나온다.
절터 주변에는 논밭이 있고 남산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근래 복원된 「창림사지삼층석탑(昌林寺址三層石塔)」이 있다. 이 탑 아래 풀섶에 쌍두구부(雙頭龜趺)가 뒹굴고 있는데, 비신(碑身)은 파괴되어 없어진 지 오래지만 전하는 말로는 김생(金生)이 쓴 비문이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송나라 말 조자앙(趙子昻)이 쓴 창림사비의 발문(跋文)이 전하는데, 「이 글은 신라의 스님 김생(金生)이 쓴 창림사비인데 자획(字劃)이 깊고 법도가 있어 비록 당나라의 이름난 조각자(彫刻者)라도 그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느 곳엔들 재주있는 사람이 나지 않으랴하였는데 진실로 그러하구나」하였다.
김생스님은 성덕왕(聖德王) 10년(711년)에 나서 원성왕(元聖王) 7년(791년)에 죽었다. 김생스님이 창림사비문을 썼다면 창림사는 8세기 초에 창건된 사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창림사삼층석탑에서 발견되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에 의해 고증된 석탑명(石塔銘)인 「국왕경응조무구정광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光塔願記)」가 있다. 이 탑원기를 보면 창림사삼층석탑은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은 이곳 창림사에 「무구정광탑(無垢淨光塔)」을 세우고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곳이다. 또 삼국유사에 보면, 이곳 창림사는 「반월성(半月城) 이전의 궁터로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왕궁이었다고 한다〔영실지어남산서록봉양이성아금창림사(營室至於南山西麓奉養二聖兒今昌林寺)〕.
이상의 기록을 보면 창림사는 700년대 초에 이미 창건된 절로서, 옛 왕궁터에 절을 지어 선왕(先王)을 봉안하고 기원을 드렸던 왕의 원찰(願刹)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국왕 일행이 와서 기도를 하고 묵어야 할 객실(客室)이 필요할 것이다. 이때 국왕이 쉬면서 기도할 객실과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 「다연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하튼 다연원은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 역할을 충분히 했을 것이다. 현판도 「다연원」이라고 달았을 것이며, 지붕의 기와에도 모두 「다연원」이라는 명문을 새겨서 올렸던 것이다. 이와같이 온갖 정성을 기울여 건물을 지었다면 이것은 반드시 지체높은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지어진 건물일 것이다.
여하튼 문성왕(文聖王)은 무구정광탑(無垢淨光塔)을 세울 때 각별히 마음을 기울였다. 당시 최고의 석공을 시켜 탑을 조성했고, 또 김입지(金立之)라는 대석학을 시켜 「탑원기문(塔願記文)」을 찬(撰)하게 했으며,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하기도 했다. 그러면 문성왕이 드나들면서 기도를 할 때 잠시 거처하던 다실 겸 객실의 역할을 하던 곳이 바로 「다연원」이었을 것이다. 이때는 이미 대렴(大廉)이 가지고 온 차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다원을 만들었고(828년) 왕실이나 사원에서도 차가 보편화되어 많이 애음하던 때이기도 하다.
③ 한송정(寒松亭)
한송정은 신라 때부터 이름난 명승지로 선랑(仙朗)들이 차를 달여 마시며 놀았던 곳이다. 강릉부지(江陵府誌)인 임영지(臨瀛誌)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이나, 동유기(東遊記)에 보면, 한송정에 대해서 상세히 나와 있다.
한송정은 「강릉부의 동쪽 15리(里)에 있는데, 큰 바다에 인접해 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다천(茶泉), 석조(石竈), 석구(石臼)가 있는데 이는 술랑선도(述朗仙徒)들이 놀던 곳이다.〔재부동십오리 임대해창송울연 정반유다천석조석구술랑선도소유 (在府東十五里 臨大海蒼松鬱然 亭畔有茶泉石竈石臼述朗仙徒所遊 〕라고 했고, 또 이곡(李穀)의 동유기를 보면, 「이 정자 역시 사선(四仙)이 놀던 곳인데 고을 사람들이 유람자(遊覽者)가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집을 헐어버렸고 소나무도 들불(野火)에 타버렸으며, 다만 석조(石竈)와 석지(石池)와 석정(石井)만이 그 곁에 남아 있을 뿐인데, 이것 역시 사선(四仙)의 다구(茶具)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본다면 한송정은 신라 때 화랑도들이 차를 달여 마시며 심신수련을 하던 수행처(修行處)요, 유람지로서 그들이 사용하던 다구(茶具)들이 전해오는 곳이다. 특히 문박(文朴)의 제자인 영랑(永朗)을 위시하여 술랑(述朗), 안상(安詳), 남석행(南石行) 등 사선(四仙)과 그를 따르는 낭도(朗徒)들이 무리를 지어 놀던 곳인데, 이 정자는 동해바다의 절벽 위에 의지해 있으며 주위에는 푸른 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지금은 강릉시 병산동(柄山洞)에 소속해 있지만, 옛날의 아름답던 정자는 무너져 찾을 길이 없고 초석조차 깊은 모래톱에 묻혀 보이질 않는다. 이제는 「한송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들물고 촌노들을 붙들고 물으면 「녹두정(綠荳亭)을 가리켜 준다. 지금은 녹두정이라고 알려진 한송정의 옛터에는 옛날 선랑들이 차를 달여 마셨다고 하는 다천(茶泉)과 「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新羅仙人永朗鍊丹石臼)」라고 새겨진 비석의 좌대만이 덩그랗게 남아 있고 주위는 온통 푸른 소나무와 모래벌만이 발목을 묻는다.
④ 경포대(鏡浦臺)
경포대 역시 신라 때 선랑들이 차를 달여 마시며 놀던 곳으로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경포대는 강릉부의 동북쪽 15리에 있다. 경포호의 둘레가 20리이고 물이 깨끗하여 거울같은데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아 겨우 사람의 어깨가 잠길만하며 사방과 복판이 똑같다. 서쪽 언덕 위에는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는 누대가 있으며 누대갓에 선약(仙藥)을 만들던 돌절구(石臼)가 있다」라고 했고, 또 이곡의 「동유기」를 보면, 「경포대에 올랐다. 대에는 전에 집이 없었는데 요즈음 호사자(好事者)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으며, 옛날 선랑의 돌아궁이(石竈)가 있다. 이것은 차를 달이는 다구(茶具)이다」라고 하였다. 또 안축(安軸)의 경포대기(鏡浦臺記)에 보면, 「옛적에 영랑이 이 대에 놀았으니 반드시 좋아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박공(朴公:淑)이 좋아한 것도 영랑의 마음과 같은 것인가. 박공이 고을 사람에게 이 정자를 짓도록 명하니 고을 사람이 다 영랑선인이 이 대에서 놀았으나 정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천년이나 지난 뒤에 정자는 지어서 무슨 소용이랴 하고 드디어 음양가의 꺼리는 말로써 고하였다. 그러나 박공은 듣지 않고 일구을 독촉하여 흙을 깍다가 정자 옛터를 발견하였다. 주초와 섬돌이 그대로 남았으니 고을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 감히 딴말이 없었다. 정자터가 이미 오래되어 까마득하고 묻혀지기까지 하여 고을 사람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우연히 발견되었으니, 이 일을 보면 영랑이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상의 문헌들을 보면 경포대는 경포호수의 서쪽 언덕의 봉우리에 있고, 이 정자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영랑선인이 그의 무리들과 함께 차를 끓여 마시며 놀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당시 선랑들이 차를 끓여 마시던 석조(石竈), 석지(石池), 석구(石臼)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경포대의 정자도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박숙이 중건(1326년)한 이래 8차에 걸쳐 중수를 하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18년(1742년) 강릉부사 조하망(曺夏望)이 중건한 것이다. 지방 문화재 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경포대는 정면 6칸, 측면 5칸, 팔작지붕이다.
⑤ 기타
위에서 소개한 정자들 이외에도 사원(寺院)과 화랑도들이 차생활을 하던 몇 군데의 사선대(四仙臺)와 총석정(叢石亭)과 영랑호(永朗湖) 등을 들 수가 있다. 사원으로는 지리산 쌍계사와 보령 성주사(聖住寺)와 장흥 보림사(寶林寺)와 남원 실상사(實相寺)와 제천 월광사(月光寺)를 꼽을 수 있다. 쌍계사는 진감선사가 중건한 절로서 우리나라 제일의 차밭(茶田)이 있는 곳이다. 조선 말까지만 해도 차를 만드는 제다장(製茶場)이 육조탑전(六祖塔殿) 앞에 있었다. 진감선사는 돌솥(石釜)에 항상 차를 달여 마셨는데 다정(茶亭)이나 다실이 별도로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평상시 거처하던 방에서 손쉽게 차를 끓여 마셨을 것이라는 추측 뿐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을 싫어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성주사(聖住寺)는 백제 때 창건된 절로 신라 때에는 9선문(九禪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백제 법왕(法王)이 창건하여 오합사(烏合寺)라고 하였다. 그 뒤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낭혜화상(朗慧和尙)이 왕자 흔(昕)의 도움을 받아 대가람을 세우니 이것이 곧 성주사다. 문성왕은 성주사를 원찰로 삼고 사시로 차와 향을 보내주었다. 「성주사사적비문」에 보면 이때 중건한 건물이 9백여 칸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왕실의 원찰에 다실이나 다정이 없었을까. 같은 때 문성왕의 또 다른 원찰인 경주 남산의 창림사에는 다연원이라는 다실이 있었지 않은가. 더우기 창림사 「무구정광탑」의 탑원기를 찬(撰)한 김립지(金立之)가 성주사의 사적비를 찬하였으니 문성왕과 김립지가 창림사의 불사를 했고, 또 성주사의 대역사를 주도했다는 점을 보면 성주사에도 「다연원」과 같은 다실이 하나쯤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에 관한 자료가 하나도 발굴되지 않고 있다.
보림사(寶林寺)는 헌강왕(憲康王) 때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개산(開山)한 9선문(九禪門) 중의 하나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본도량이다. 보조선사는 한때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 귀국했는데, 헌안왕(憲安王)이 깊은 정의(情宜)로 항상 차(茶)와 약(藥)을 보내주었다. 보림사에는 지금도 차나무가 많이 야생하고 있으며, 6․25 직전까지만 해도 전다(錢茶)를 만들던 제다공장(製茶工場)이 경내에 있었다. 그리고 남원 실상사(實相寺) 역시 9선문 중의 하나로 증각대사(證覺大師)가 개산하고 수철화상(秀澈和尙)이 일으킨 절이다. 수철화상은 증각대사의 뒤를 이어 실상사를 크게 중흥시켰는데, 차를 매우 즐겨 마셨다고 한다. 실상사는 차산지에 인접해 있는 사찰이다.
그 외에도 화랑도들이 차생활을 하던 사선대(四仙臺), 총석정(叢石亭), 영랑호(永朗湖) 등이 있는데 이곳들은 화랑들의 주거지요 수행처이다. 여기에서 화랑들은 먹고 마시며 도를 닦고 생활을 했다. 이곳 역시 한송정이나 경포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사용한 다구(茶具)들이 전해졌을 것으로 사료되나 지금은 찾을 수가 없고, 다만 그들이 선유하던 자취와 흔적만이 완연하다.
6. 신라의 풍류도(風流道)와 화랑
고조선(古朝鮮)의 선교(仙敎)는「풍류도(風流道)」를 만들어냈고, 이 풍류도의「풍류정신」은 훗날 한국의 차정신으로 발전하였다. 신라의 화랑인 난랑(鸞郞)을 위해서 건립한「난랑비서(鸞郞碑序)」에 보면,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그 교(敎)를 창설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실은 삼교(유교, 불교, 도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다. 즉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孔子)의 뜻과 같은 것이요, 무위(無爲)로 일을 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老子)의 종지(뜻)와 같은 것이요,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釋迦)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글은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지은 비문으로 그 일부인 서문(序文)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한다. 전문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더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신라에는「풍류도」라는 숭고한 가르침이 있어 화랑도는 이 가르침을 실천하며 수련했다는 것이다. 이 풍류도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상세히 전한다고 했으나, 선사가 전해지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풍류도는 삼교(三敎)의 장점을 다 겸비하고 있는 훌륭한 가르침이며,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인「선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신라의 대표적인 국선(國仙)이자 화랑인 사선(四仙)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풍류도는 신라 화랑의 정신적인 지도이념이자 실천수행의 덕목(德目)이 되었다. 이들이 산수간에 살면서 세속적인 것은 피하고 자유분방하며 호쾌한 생활을 즐겼다. 이 점에 대해서 이능화(李能和) 선생은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라의 화랑을 국선(國仙)이라 하고 그 교(敎)를 풍류(風流)라고 한 것은 대개 얼굴에 분(粉) 바르고 구슬(珠)로 장식하고 산수를 찾아 가악(歌樂)으로 즐긴데서 생긴 이름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신라를 논하는 사람은 그 정체(政體)가 무위자연의 교(無爲自然之敎)와 같다고 하지만, 오직 그 뿐이 아니라 신라 일대(一代)에는 모든 사람이 산수(山水)에 소요하고 풍월(風月)을 음영(吟詠)했던 것은 모두 선(仙) 사상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래서 명구승지(名區勝地)에는 신선의 자취가 많다고 한다.」
이처럼 화랑은 그 근본이 선(仙)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풍류도」를 교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말하기를,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三韓)의 소도(蘇塗)의 제관으로서, 고구려는 조의선인(皂衣仙人)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조의선인도 따지고 보면 신라의 국선과 같은 선인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에 제사를 주관하는「제사장」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의 제사장은 곧 통치자이자, 왕이요, 임금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선맥(仙脈)이 어떻게 신라의 화랑인 국선으로 이어져 왔으며 풍류도가 전해졌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여적(趙汝籍:朝鮮)의 청학집(靑鶴集)에 보면,
「우리나라 도류총서(道流叢書)에 환인진인(桓因眞人)이 동방선파(東方仙派)의 조종(祖宗)이고 환웅천왕(桓雄天王)은 환인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풍우(風雨)와 오곡(五穀) 등 360여 가지의 일을 주재하여 동방 백성을 교화시키더니, 단군(檀君)이 또 그 업을 이어 교화를 편 지 천년만에 구이(九夷)가 함께 받들어 단군을 천왕으로 모셨다. 작은 정자와 버들 대궐(蓬亭柳闕)에 살면서 머리를 땋아 드리우고 소를 타고 다니면서(陶髮跨牛) 백성을 다스린 지 1048년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그 후 문박(文朴)씨가 아사달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눈동자가 모난 특출한 분으로 단군의 도를 잘 전하였다. 영랑(永郞)은 향미산(向彌山) 사람으로 나이가 90이 되어도 안색이 어린아이 같았으며 노우관(鷺羽冠)을 쓰고 철죽장(鐵竹杖)을 짚고 산수에 소요하며 마침내 문박(文朴)의 업을 전하였다. 또 마한시대(馬韓時代)에 신녀(神女) 보덕(寶德)이 바람을 타고 다니며 거문고를 안고 노래를 부르니 그 모습은 가을물의 부용과 같이 아름다웠다. 이 이가 영랑의 도를 이어 받은 것이다.
홍만종(洪萬宗)이 지은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신라 때 사선(四仙)은 즉 술랑(述郞),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詳)인데, 모두 영남사람이라고도 하고 혹은 영동사람이라기도 한다. 고성(高城) 해변에서 사흘을 같이 놀고도 돌아가지 않으므로 그 지명을 삼일포(三日浦)라 한다. 포 남쪽에 작은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봉우리 위에 돌굴(石龕)이 있고, 봉우리 북쪽 벼랑에는 붉은 글씨로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란 여섯 글자가 쓰여 있다. 여기 남석행이란 남랑(南郞)을 말한 것이다. 작은 섬에 예전에는 정자가 없더니 존무사(存無使), 박공(朴公:淑)이 정자를 세우더니 즉 사선정(四仙亭)이다. 또 단혈(丹穴)이 군 남쪽 십리되는 곳에 있고 통천(通川)에는 사선봉(四仙峰)이 있으니 모두 사선이 놀던 곳이다. 간성(杆城)에 선유담(仙遊潭)과 영랑호(永郞湖)가 있고, 금강산에 영랑봉이 있고, 또 장연(長淵)에 아랑포(阿郞浦)가 있고 강릉에 한송정(寒松亭)이 있고 정자 밑에 다천(茶泉)과 돌솥(石釜)과 돌절구(石臼)가 있는데 다 사선이 놀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또 백악총설(白岳叢設)에 보면, 향미산인(向彌山人:永郞)이 말하기를,「선도가 천하에 있다면 중국은 황제(黃帝)가 광성자(廣城子)에게 배운 것이고, 우리 동방은 문박(文朴)이 환인(桓因)의 연원을 얻음으로써 깨끗하고 맑은 학문을 전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또 남석행(南石行)은 말하기를,「환인진인(桓因眞人)이 대왕씨(大王氏)에게 시켜서 시서(始書)를 짓게 하고 종서(終書)는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천지산천의 이치와 성명(性命)의 근원과 신도묘덕(神道妙德)의 교훈을 쓴 것으로서, 대왕씨로 하여금 이 글을 중외(中外) 선관(仙官)에게 펴게 하였다. 대왕씨는 그 무리들과 함께 환인(桓因)을 문조씨(文祖氏)라 하니 그 글이 문박(文朴)으로부터 을밀(乙密), 영랑(永郞), 안류(晏留), 보덕(普德), 성녀(聖女)들에 전하여졌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선맥은 환인(桓因)으로부터 환웅(桓雄)에게 이어지고 다시 단군(檀君)으로 이어지며 단군에게서 문박(文朴)으로 문박에서 영랑과 을밀(乙密)로 이어지며 영랑에게서 보덕(寶德), 남석행(南石行), 술랑(述郞), 안상(安詳) 등으로 이어졌다. 신라 때의 대표적인 국선을 들면 영랑, 술랑, 남석행, 안상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차(茶)의 달인이요, 이름 높은 화랑이다. 처음에는 화랑을 가리켜 국선(國仙), 선랑(仙郞) 또는 원화(源花)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모두 화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효(元曉), 충담(忠談), 월명(月明), 최치원(崔致遠) 등 신라차의 달인들 대부분이 화랑 출신이거나 신선사상을 가진 분들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고조선의 신선사상을 가진 「선인」들의 차생활이 신라 화랑으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가 있다.
7. 신라시대의 헌다의식(獻茶儀式)
신라시대의 헌다의식은 문헌에 자세한 설명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의식(儀式)과 절차(節次)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헌다의식(獻茶儀式)을 지냈던 사례와 그 대상과 헌다의식을 지냈던 사람들의 신분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헌다의식의 큰 형태와 종류를 구분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헌다의식이 고려시대의 진다의식(進茶儀式)으로 발전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 뿐이다. 그러면 헌다의식을 지냈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① 가락국(駕洛國)의 헌다의식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묘(首露王廟)에 헌다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보면 나와 있다.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文武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661년) 3월일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倻國) 시조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奴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率支公), 공의 아들 서운잡간(庶云雜干:舒玄)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묘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이에 그 옛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묘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을 공영의 자(資)로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에 소속시키니,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更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였다. 그리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 차(茶)와 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사날은 거등왕(居登王)이 정한 연중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199년)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부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 묘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 원년 신유(申酉:661년)에 이르는 60년 사이에는 이 묘에 지내는 제사를 이따금 빠뜨리기도 했다.」
『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衡王之 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 率友公之子, 庶云匝干之女, 文明皇后寔生我者,
玆故元君於幼沖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己曾敗. 所葬廟者今尙存. 合于宗조. 續乃祀事. 仍遺使於黍離之趾. 納近廟上上田三十頃. 爲供營之資. 號稱王位田. 付屬本土. 王之十七代孫 世級干 祗과朝旨. 主掌厥田. 每歲時釀취醴. 設以餠飯茶菓庶差等尊. 年年不墜. 其祭日 不朱居登王之所定年內五日也. 芬苾孝祀. 於是乎在於我. 自居登王卽位己卯年置便
「房, 降及仇衡朝末, 三百三十載之中, 享廟禮曲(典), 永無違者. 其乃仇衡失位去國. 逮龍朔元年辛酉. 六十年之間. 享是廟禮, 或闕如也』
신라 30대 문무왕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15손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조서를 내려 수로왕의 묘를 종묘에 합하고 왕위전(王位田) 30경을 내려 거등왕(가락국 2대)이 정한 연중 5일의 제사날을 지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 수로왕의 17대손인 갱세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해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술과 단술, 떡과 밥, 차(茶)와 과일을 제수로 마련하여 올렸다. 이와 같이 수로왕묘에 제사를 지낼 때 차(茶)를 올리는 헌다의식이 있었는데 그 절차나 의식은 알 수가 없지만은 대단히 성대하게 지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연유는 가락국의 구형왕이 신라에 나라를 바치고 항복한 이후로 약 60여 년간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한 문무왕의 각별한 배려로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니, 그 절차나 제물이 모두 격식에 맞고 법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헌다의식은 「제례시 헌다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식행사이다. 그리고 수로왕의 제사에 차를 올리는 헌다의식은 선왕묘(先王廟)에 헌다하는 의식의 효시이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선왕묘에 헌다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위풍이다. 그 격식과 절차는 유가적(儒家的)이며 불가적(佛家的)인 성격을 함께 띠고 있을 것이다.
② 보천 효명(寶川 孝明)의 헌다의식
보천 효명 두 태자가 문수보살(文殊菩薩)께 헌다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3 대산 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에 나와 있다.
「두 태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수도를 했다.(중략)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忉利天)의 신이 삼시로 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바치고 40명의 성인(聖人)들은 10척 높이 하늘을 날며 항상 그를 호위해 주었다」또 삼국유사 권3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보면,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서른 여섯 가지 모양(36형)으로 변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일만진신(一萬眞身)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眞如院地. 文殊大聖每日寅朝化現三十六 形. 雨太子竝禮拜. 每日早朝汲于洞水. 煎茶供養一萬眞身文殊』
보천 효명 두 태자는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골짜기에 들어가 수도를 했는데 매일 아침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문수보살게 공양을 했다. 두 태자가 문수보살게 헌다한 의식과 절차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고, 다만 불보살(佛菩薩)께 헌다하는 의식이 이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문수보살께 헌다공양한 의식은 「불교적 헌다의식」으로 그 대상이 불보살과 역대조사 스님들에게까지 확대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 「사원다례(寺院茶禮)」의 시원은 신라 때 헌다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당시 헌다의식은 그리 까다롭고 복잡하지 않으며 예나 지금이나 차 한 잔을 정성껏 달여 불전(佛殿)에 올리고 예배하면 되는 것이다. 그 뒤 보천태자가 오대산 신성굴(神聖窟)에 들어가 50년 동안 수도를 했는데, 정거천의 천인(天人)들이 감동하여 매일 차를 달여 공양을 했다. 하늘나라 사람들이 인간에게 차공양을 올린 예는 보기 드문 일이다. 이처럼 헌다하는 마음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덕있는 사람이나 어진 선비에게 올리는 최상의 예우이다.
③ 충담사의 헌다의식
충담사가 미륵세존께 헌다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사에 나온다.
「스님 한 분이 있는데 누더기 옷(衲衣)를 입고 등에는 걸망(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이 기쁘게 누상(歸正門)으로 맞아들였다. 그 걸망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이, 그대는 누구시오? 스님이, 충담이라 하옵니다. 왕이, 어디서 오는 길이요? 스님이, 소승은 해마다 삼월삼짓날(3月3日)과 구월중구날(九月九日)이면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공양을 올리는데 지금도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충담사는 신라차의 개조라고 일컬어지는 분인데, 매년 삼월삼짓날과 구월중구날이면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차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충담선사가 차 공양을 올리는 중삼중구(重三重九)날은 우리나라 일년 명절의 하나로 조상님께 모든 백성들이 산천에 제사 지내거나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이날 충담선사는 승려로서 「미륵세존」께 차(茶)로써 제사를 올린 것이다. 이처럼 미륵부처님께 차로써 공양을 올리는 「헌다의식」은 신라 때 유행하던 풍속이다. 충담선사가 헌다공양을 하던 의식과 절차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지만, 간단한 다구를 걸망 속에 넣어 메고 다니는 점으로 보아, 야외에서 간편하게 차를 달일 수 있는 정도로 편리하고 간단했을 것이다. 그저 간단하게 차 한 잔을 달여 올리고 배례하는 것으로 마쳤는지도 모른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신라시대 헌다의식의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정리를 해본다면 첫째로 가락국 시조 수로왕묘에 헌다하는 의식은 「제례시 헌다의식」의 예가 되었고, 둘째로 보천 효명태자가 문수보살에 헌다하는 의식은 「불교적 헌다의식」의 예가 되었으며, 셋째로 충담사의 미륵세존께 헌다하는 의식도 부처님께 헌다하는 「불교적 헌다의식」의 실례이다. 결과적으로 헌다하는 대상은 불보살과 선왕께 하는 의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8. 신라차의 유적(遺蹟)
① 법주사 희견보살 찻잔
속리산 법주사 희견보살상(俗離山 法住寺 喜見菩薩像)은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제38호(1976년 12월 23일 지정)로 미륵대불상 앞에 있다. 머리에 커다란 찻잔을 이고 있는데 마치 시골 여인네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19년(720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하는 희견보살상은 미륵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리는 공양상으로 머리에 이고 있는 찻잔과 찻잔받침, 그리고 보살상과 보살이 밟고 있는 지대석으로 구분된다. 그러면 미륵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리는 희견보살이란 어떤 분인가.
불학대사전(佛學大辭典)에 보면 희견보살은 약왕보살(藥王菩薩)의 전신으로 일찌기 자기 몸을 태워 법화경(法華經)에 공양한 이로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이라고 한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제23조에 보면
「이 일체중생희견보살이 고행을 즐겨 익히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의 법 가운데서 정진하고 수행하여 일만이천년 동안을 일심으로 부처를 구하더니, 마침내 일체색신삼매(一切色身三昧)를 얻었느니라. 이 삼매를 얻은 일체중생희견보살은 마음이 크게 환희하여 생각하기를 내가 일체색신삼매를 얻은 것은 다 이 법화경을 들은 힘 때문이니라. 나는 이제 일월정명덕불과 법화경에 마땅히 공양하리라 하고 즉시 삼매에 들어가 허공 가운데 만다라꽃과 전단향을 구름처럼 비오듯 내려 공양했다. 이처럼 공양을 마치고 삼매에서 일어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신통력으로 부처님께 공양했으나 몸으로써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리라 하고 곧 여러 가지 전단, 훈육, 도루바의 향과 필력가, 침수, 교항들을 먹고, 또 일천이백년 동안 첨복 등의 꽃향유를 마시며 또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 앞에서 하늘 보배옷으로 스스로 몸을 감싸고 거기에 향유를 부어 적신 뒤 신통력의 발원으로써 몸을 태우니 그 광명이 80억 항아사의 세계를 두루 비추셨다.」
이와 같이 자기 몸을 태워서 일월정명덕불게 공양한 이가 희견보살로서 지금은 약왕보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보살이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께 차공양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보살이 올리는 공양구가 「향로」라고하여 향공양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공양기는 향로라기 보다는 찻잔에 가깝다. 이형석(정신문화연구원)씨도 밝힌 바 있지만, 기형을 보면 향로와 찻잔은 분명히 다르다. 향로는 향을 피울 수 있도록 화로처럼 길다란 발이 달려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찻잔은 찻물을 담을 수 있도록 완(碗)이나 잔(盞)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공양기는 완과 잔의 모양을 하고 있다. 잔의 외면에는 앙련(仰蓮) 문양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고 잔굽도 전형적인 잔의 굽을 닮고 있다. 이 희견보살공양상의 크기는 213cm로 보살상이 136cm이고 찻잔이 42.5cm이며 지대석이 34.5cm이다.
② 석굴암 보현보살 찻잔
토함산 석굴암 보현보살입상(吐含山 石窟庵 普賢菩薩立像)은 국보 제24호로 지정(1934년 8월 27일)되어 있는 석굴암의 주실인 원형 돔 안 오른쪽에 맨발로 연화대 위에 서 있다. 이 석굴암은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신라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金大成)이 그의 전생 부모를 위하여 경덕왕10년(751년)에 석불사(石佛寺)를 짓기 시작하여 20여 년에 걸쳐 조성된 인공석굴사원이다. 김대성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으니(774년)나라에서 즉시 이 일을 맡아 완성하였다고 전해온다. 가히 동양불교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이 석굴암은 석실 앞에 전실(前室)을 마련하여 좌우로 팔부신중(八部神衆)이 도열해 있고, 본존에게로 들어가는 비도(扉道) 입구 좌우에는 금강력사(金剛力士)와 사천왕(四天王)이 지키고 있고, 원형 돔 안에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십대제자와 보살과 천신(天神)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 주실 오른편에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굴 안의 본존불을 바라보는 측면상으로 부조되어 있는 보현보살입상이 있다. 머리 주변에는 원형의 광배가 부각되어 있고 화려한 보배관을 쓰고 눈, 코, 입이 유려하며 입술에는 채색한 자국이 역연하다. 가슴에는 목걸이를 걸었으며 양어깨와 목에서 연결된 영락은 가슴에서 모였다가 두 줄로 길게 밑으로 늘어뜨렸다.
오른손은 높이 들어 찻잔을 받쳐들고 왼손은 내려 가볍게 옷자락을 밀치고 있는데 살이 포동포동한 팔에는 체온이 감도는 듯하다. 우아하고 유연한 몸매의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자애로운 미소에서 이 보살이 지닌 중생교화의 자비심을 엿볼 수 있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여래의 협시(脇侍)보살로 유명한데, 문수보살은 여래의 왼편에서 여러 부처님의 지덕(智德) 체덕(體德)을 맡고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이덕(理德),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는다. 문수보살과 함께 일체 보살의 으뜸이 되어 언제나 여래의 중생제도하는 일을 돕고 중생들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보현연명보살(普賢延命菩薩) 또는 연명보살이라고도 한다. 이 보살이 오른손에 찻잔을 받쳐들고 부처님을 향하고 있다. 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다.
③ 화엄사 연기조사 효대
지리산 화엄사 연기조사 효대(智異山 華嚴寺 緣起祖師 孝坮)는 국보 제35호로 지정(1934년 8월 27일)되어 있는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앞에 있는 석등(石燈)이다. 각황전(覺皇殿) 뒤 잔등에 이 3층석탑과 석등이 있는데, 한국불교연구원에서 간행한 화엄사 편에 보면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연기조사의 효성을 추앙하여 건립한 불사리(佛舍利) 공양탑(供養塔)이라고 한다. 따라서 석탑의 기본형은 이중기단에 삼층석탑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意匠)을 보이고 있다. 즉기단의 귀퉁이 기둥과 받침 기둥을 생략하고 사방에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로써 석탑을 받치고 있으며, 또 그 중앙에 직립한 승상(僧像) 역시 합장하여 머리로써 탑을 받들고 있다.
이 승상이 바로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 스님의 모습이라 하며, 또 이와 병행하여 바로 앞에는 같은 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석등이 있다. 이 석등 역시 아래쪽에 궤좌(跪坐)한 승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발한 석탑과 석등은 결국 연기조사의 효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석탑 중앙에 직립한 승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 비구니상이며, 그 아래 석등을 이고 궤좌한 승상은 연기조사의 모습이라 한다.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불탑을 받들고 서 있는 어머니께 석등을 머리에 이고서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3층석탑을 받치고 있는 승상을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상이며, 석등을 이고 있는 승상을 연기조사상이라고 하여 연기조사가 찻잔을 들고 어머니께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보면,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아니고 자장율사상이라고 하며, 석등을 이고 있는 승상이 왼손으로 들고 있는 것은 찻잔이 아니고 사리(舍利) 같은 것을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1916년 3월 31일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권 4,489면의 사진을 보면 당시 사진에는 둥그런 구슬 같은 것이 찻잔 같은 그릇 위에 올려져 있다. 그런데 언제인가 이 구슬 같은 것이 떨어져나가고 지금은 잔같은 모양만 남아 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말을 만들어 찻잔이라고 하고, 연기조사에까지 소급시켜 찻잔 이야기를 꾸며내기에 이른 것이다.
9. 신라시대 행다법(行茶法)
① 팽다법(烹茶法)
팽다법이란 찻물을 끓이는 탕관(湯罐)에 차를 넣어서 끓여 마시는 방법인데 먼저 찻물을 돌솥에 넣어 끓인다. 찻물이 다 끓게 되면 탕관 뚜껑을 열고 그 탕 속에 덩어리차(團茶, 餠茶)나 가루차(덩어리차를 맷돌에 갈아서 가루로 만든 것)를 넣어서 한 번 살짝 더 끓인 다음에 뚜껑을 열고 표주박으로 떠내서 찻잔에 골고루 나누어 따라서 마신다. 이렇게 끓인 차는 맛이 쓰고 떫으며 향도 좋지 않기 때문에 훗날 점다법(點茶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보면 신라 때 왕자 김지장(金地藏) 스님이 읊은 다시(茶詩)가 한 편 전해지는데 그 싯귀에 「물갓 집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워 달을 청하던 일도, 차를 달여 잔 속에 꽃놀이도 그만 두려네(漆甁澗底體招月 烹茗甌中罷弄花)」하였다. 지장법사(地藏法師)는 중국의 청양현 구화산(九華山)에 들어가 수도를 해 등신불(等身佛)이 된 스님으로 진덕여왕(647~654년)의 네째 아들이다. 법사는 팽다법으로 차를 달여 찻잔에 따라 물결지는 문양과 꽃송이를 띄워서 보고 즐기는 꽃놀이를 하였다.
최치원 선생이 찬한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명(眞鑑禪師大空塔碑銘)에 보면 「중국차(漢茗)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니 섶나무로 돌솥에 불지피고 가루를 만들지 않은 채로 끓여 마시며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배(창자)를 적실 뿐이다 했으니 참(眞)됨을 지키고 속(俗)됨을 싫어함이 이와 같았다.」
어떤 사람이 진감선사에게 선물한 중국차는 덩어리차(餠茶)였다. 이 덩어리차를 선사는 가루로 만들지 않고 덩어리 채로 끓여마셨는데 당시에는 덩어리차를 가루를 내서 마시는 방법이 일반화되어 있을 때였다. 이 덩어리차를 마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덩어리차를 맷돌(茶磨)에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돌솥의 끓는 물 속에 넣어 끓여서 마시는 방법이고, 둘째는 덩어리차를 맷돌에 갈지 않고 덩어리 채로 돌솥의 끓는 물 속에 넣어 끓여서 마시는 방법이다. 전자는 끓는 물 속에 찻가루를 넣어서 잠시 끓이면 차가 우러나게 된다. 이때 차를 표주박으로 떠내 찻잔에 골고루 나누어 따라 마시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은 훗날 말차(末茶) 마시는 방법으로 발전하였는데 찻가루를 더욱 미세하게 갈아서 다완(茶碗)에 넣고 끓인 탕수를 한 잔쯤 다완에 부어 다선(茶筅)으로 저어서 거품을 내 마시는 것이다. 이처럼 마시는 방법은 고려 때 들어와서 더욱 성행하였다. 후자는 덩어리차를 돌솥의 끓는 물 속에 넣어 잠시 더 끓이면 우러나게 되는데 그때 차를 떠내 찻잔에 나누어 따라 마신다. 이러한 방법은 후에 서민들이 약용으로 마시는 음다법으로 이어져왔다.
지금도 전라도 강진 해남 장흥 등지에서는 감기몸살이 나면 덩어리차를 약탕관에 냉수(冷水)와 생강(生薑)을 함께 넣고 달여서 마신다. 이것은 차라기 보다 약(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까지 이 지방에서는 차를 음료보다 약으로 더 많이 애용해 왔다.
② 전다법(煎茶法)
전다법이란 다관(茶罐)에 잎차(葉茶)와 탕수(湯水)를 넣어 우려서 마시는 것을 말하는데, 먼저 탕관에 찻물을 끓인다. 다관에 잎차를 넣은 다음 알맞게 끓인 탕수를 부어 넣는다. 다관 뚜껑을 닫고 잠시 기다리면 차가 우러나게 되는데 이때 차를 찻잔에다 골고루 나누어 따라서 마신다. 오늘날 우리들이 많이 상용하는 방법인데 주로 잎차를 우려 마시는 방법이다. 신라 때 전다법으로 차를 끓인 사례를 보면, 첫째 충담사가 규정문 루상에서 경덕왕께 끓여드린 예가 있고, 둘째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면서 매일 문수보살께 차를 달여 올린 때가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충담사가 매년 삼월삼짓날과 구월중구날이면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 올리는데 그때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 경덕왕은 귀정문에 올라 잠시 쉬고 있었는데, 문득 고승 한 분을 모시고 고담청론(高談淸論)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주위 신하들을 시켜 고승 한 분을 모셔오도록 명했다. 마침 충담사가 반월성(半月城) 남쪽 길을 가다가 경덕왕께 불려갔다. 경덕왕의 부탁으로 차를 한 잔 정성껏 달여 올렸는데, 찻잔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나고 맛이 특이했다. 경덕왕께 달여 올린 차는 전다법(煎茶法)으로 끓인 잎차였다. 경덕왕은 충담사께 차대접을 받고나서 안민가(安民歌)를 지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충담사는 명을 받아 안민가를 지어드리니 왕은 국사로 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담사는 굳이 사양하고 산문으로 돌아갔다.
둘째 보천 효명 두 왕자는 신문왕의 아들로서 일찍이 출가할 뜻이 있어 두 형제가 서로 상의하더니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보천)은 상원사(上院寺) 터 아래 연꽃이 피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동생(효명)은 그곳에서 북쪽으로 6백보쯤 떨어진 곳에 역시 연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 암자를 지었다. 두 형제는 항상 골짜기의 물(于洞水)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煎茶) 1만진신의 문수보살께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로 돌아가 도(道)를 닦았다. 이처럼 보천 효명 두 왕자는 매일 아침 차를 달여 문수보살게 올렸는데 이때 끓여 올린 차가 잎차로 끓이는 전다법(煎茶法)으로 달인 차이다. 또 이들이 차를 끓여 올리던 물은 한강의 발원지인 우중수(牛重水)를 말하는데 찻물로는 천하에 이름이 나 있는 물이다.
③ 점다법(點茶法)
점다법이란 가루차를 다완에 넣고 탕수를 부어 다선(茶筅)으로 저어 거품을 내서 마시는 차인데, 먼저 찻물을 탕관에 넣고 알맞게 끓인다. 찻물이 다 끓으면 다완(茶碗)을 준비하고 다완에 가루차(粉末茶)를 조금 넣고 표자로 탕수를 떠내서 부은 다음에 다선으로 저어 거품을 일군다. 거품이 구름처럼 파랗게 피어오르면 그 거품과 함께 마시는 것이다. 이러한 점다법은 돌솥에 차를 넣어서 끓여 마시던 팽다법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 때 가장 성행하였고 조선 중기 때까지 계승되어 오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급격히 쇠퇴하고 전다법이 성행하기에 이른다.
신라 때 점다법으로 차를 끓인 사례를 보면, 원효성사(元曉聖師)가 전라도 부안땅 원효방(元曉房)에 가서 살 때 백제승 사포(蛇包)가 달여 올린 차가 있다. 고려 때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쓴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속전에 의하면 사포성인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성사가 와서 사니 사포도 또한 와서 모시고 살았는데 차를 달여 원효성사께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게 여기던 차에 갑자기 바위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왔는데 맛이 젖같이 매우 달았다. 사포는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點茶)」고 한다.
시중을 들던 사포가 원효스님께 늘 달여 올리던 차는 가루차(粉末茶)로서 점다법으로 차를 달인 것이다. 이러한 다풍(茶風)을 흠모하던 한 노승이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잊지 않고 부처님과 원효스님의 진용을 모시고 시자도 없이 혼자서 살고 있다. 방 안에는 취사도구도 없이 찻잔 한 개 뿐이다. 배가 고프면 래소사(來蘇寺)에 가서 하루 한 끼만 얻어 먹는다고 한다.
이러한 점다법(點茶法)은 가루차(粉末茶)를 끓일 때 전용하는 방법으로 우리나라는 다례의식(茶禮儀式) 때에만 주로 행하다가 쇠퇴해버렸다.
10. 신라의 다인(茶人)
신라의 다인(茶人)은 왕족과 경공귀족(卿公貴族) 그리고 사원의 승려와 화랑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서 신라 차문화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불승(佛僧)과 화랑 그리고 중국에 유학을 간 사람들이다. 특히 중국에 유학을 간 사람들 가운데 지장법사(地藏法師)나 최치원(崔致遠) 같은 이는 중국 차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해상왕국(海上王國)을 건설한 장보고(張保皐) 역시 중국 차문화에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그러면 이들 다인들의 빛나는 업적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등신불(等身佛)이 된 지장법사(地藏法師)
지장법사(地藏法師:696~794)는 중국의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九華山)에 들어가 수도를 해 등신불이 된 신라의 스님이다. 성덕왕(聖德王)의 장남으로 태화7년(太和:696.7.15)에 신라 땅 서라벌에서 태어났다. 법사의 속성은 김(金)씨요, 이름은 교각(喬覺)이며 지장(地藏)은 법명(法名)이다. 언제 중국으로 건너갔는지 알 수 없지만 스님의 나이 스물네 살 때(719년) 흰 개(白狗) 한 마리를 데리고 구화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차(金地茶)와 벼(黃粒稻) 씨를 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중국에서 간행된 「사대명산지(四大名産地)」에 보면 지장법사가 가지고 간 금지차(金地茶)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구화산지(九華山志) 권8 금지차(金地茶) 편에 보면 「금지차는 곧고 속이 빈 것이 가는 대나무와 같다. 전하기를 김지장스님이 가지고 온 종자라고 한다(金地藏 梗空如篠 相傳金地藏携來種)」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구화산에서 생산되는 금지차는 지장법사가 가지고 들어가 심어 가꾼 차의 이름이다.
스님이 가지고 간 차이기 때문에 스님의 이름자를 따서 「금지차(金地茶)」라고 부른 것 같다. 하지만 이 구화산에는 금지차 말고도 민원차(閔源茶)가 있다. 이 민원차는 지장법사에게 구화산을 헌납한 민공(閔公)의 땅에서 생산되던 차의 이름이다. 구화산지 권8 민원차(閔源茶) 편에 보면 「민원차는 민씨의 원소산지의 차이다(閔源茶 乃閔氏源所産之茶)」라고 하였다.(석성우스님 제공)
민공이 법사의 덕화에 감복하여 구화산을 헌납했는데, 이 산에서 차가 생산되었다. 이 차 이름을 민공의 인연을 따라 민원차(閔源茶)라고 부른 것이다. 훗날 민공의 아들이 출가하여 법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름을 도명(道明)이라고 하였다. 도명은 항상 스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정성껏 법사를 모셨는데 어느날 도명이 집생각을 하고 떠나고자 하므로 눈물로 작별을 하면서 써준 시(詩) 한 편이 있다.
「절 집안이 적막하니 네가 집생각을 하는구나/작별의 예를 드리고 구화산을 내려가니/나 홀로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하일없이 금지에서 수도나 할꺼나/물갓집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워 달을 청하던 일도/차를 달여 잔 속에/꽃놀이도 그만 두려네/이제 그만 눈물을 그치고 떠나려무니/노승은 연하(烟霞)가 있으나 그와 벗하리라」(원문생략)
어린 동자승을 구화산에서 떠나 보내면서 읊은 시인데, 눈물을 흘리며 동자와 작별하는 노승의 정겨운 모습이 역연하다. 이와 같이 이국 땅에서 한생을 보낸 지장법사는 죽어서 20년만에 등신불이 되어 다시 살아난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구화산 성화사(成化寺) 지장편에 보면, 스님은 신라 국왕의 후손(示生新羅 王家萃裔)으로 얼굴은 못생겼지만 마음은 한없이 자비로웠다고 한다.(慈心而貌惡) 키가 7척(尺) 장신이며 이마에 기이한 뼈가 솟아 있고 힘이 천하장사라고 했다. 구화산에서 수도를 한 지 70여 년만에(99세) 입적을 하였는데 온 몸이 사리(舍利)가 되어 썩지 않고 지금도 중국 땅 구화산 성화사(成化寺) 신광령(神光嶺)에 스님의 육신탑(肉身塔)이 모셔져 있다.
2) 신선(神仙)이 된 최치원(崔致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신라 땅 사량부(沙梁部)에서 헌안왕 원년(憲安王元年:857년)에 태어났다. 부친의 휘(諱)는 견일(肩逸)이고 성은 최(崔)씨요, 이름은 치원(致遠)이며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하고 호(號)도 역시 고운이라고 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12살의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찾아 배움에 힘써 당희종(唐僖宗) 건부원년(乾符元年:874년)에 예부시랑 배찬(裵纘)의 아래에서 단번에 급제하니 그때 나이 겨우 18세였다. 처음에 율수현위가 되었는데 나라에서 업적을 상고하여 승진시켜 승무랑시어사내공봉이 되고 자금어대를 받았다. 선생의 나이 24세 때(880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매 고변(高騈)이 제도행영 병마도통이 되어 토벌할 때, 선생을 불러 종사순관(從事巡官)의 벼슬을 주고 서기의 책임을 맡겼다.
그때 표장서계(表狀書啓)와 징병하는 고격(告檄)이 모두 선생의 손에서 나왔는데, 이로 말미암아 선생은 필명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28세 때 사신이 되어 조서를 받들고 귀국하여, 헌강왕(憲康王)을 뵙고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뜻을 펴지 못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후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차생활을 했는데,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 권18에 보면, 고변 태위에 올린 「사탐청요전장(謝探請料錢狀)」이라는 장계 한 편이 있다. 이 글에서 선생은 모처럼 본국의 사신이 다녀가는 배편을 만나 고국에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하고 차와 약을 사서 서신과 함께 보냈다고 한다.
「하물며 오래도록 고향 사신이 없어 가서(家書)도 부치기 어려웁고 오직 척호(陟岵)의 시를 읊으며 바다를 건너가는 신(信)편을 만나지 못하던 차 지금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가기로 모(某)는 차(茶)와 약을 사서 가신(家信)을 부쳐 보내고자 하옵는데, 말발굽의 물은 마르기 쉽고 구학(溝壑)은 가득 차기 어렵기 때문에 엄하신 꾸지람을 회피하지 않고 다시 궁한 사정을 아뢰옵니다」라고 하여, 부모님께 보내드릴 차와 약을 사기 위해서 3개월의 급료를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로 선생이 차를 사서 부모님께 보냈던 것과, 둘째로 고향의 부모님이 차생활을 했다는 것과, 셋째로 선생이 차를 사서 보낸 때가, 고변태위의 밑에서 종사관으로 일하던 24세부터 고향에 돌아오기 전 28세 사이에 있었던 일로 25~26세 때에 차를 사서 마셨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글을 올린 뒤 고태위로부터 차를 선물받았는데 이에 감사하는 장계를 올렸다.
「사신다장(謝新茶蔣)」
「모는 아뢰옵니다. 오늘 중군사 유공초(兪公楚)가 처분을 받들어 전달하고 전건의 명다(茶芽)를 보내왔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촉산(蜀山)에서 빼어난 기운을 받았고, 수원(隋苑)에서 꽃다움을 날렸으며 비로소 제작하는 공력을 가하여 바야흐로 정화로운 맛을 갖추었은 즉, 녹유(綠乳)를 금정(金鼎)에 끓이고 향고(香膏)를 옥구(玉鷗)에 띄워야 마땅할 것이오며, 만약 고요한 선옹(禪翁)을 대하지 않는다면 바로 한가한 우객(羽客)을 맞아야 할 것이어늘 뜻밖에 훌륭한 선물이 외람되이 범상한 선비에게 미치오니 매림(梅林)을 빌어오지 아니해도 절로 능히 갈증이 그치고 훤초(萱草)를 구하지 아니해도 비로소 근심을 잊게 되었습니다. 하정(下情)에 은혜를 느끼어 황공하고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원문생략)
이 장계 역시 고태위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지은 것으로서 당시 중국이나 신라나 차를 선물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고, 또 선생이 이미 차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선생은 차에 대해서 이해가 깊었던 분으로 고향집에서는 일찍이 부모님의 차시중을 들었고 당나라에 가서 수학할 때는 본격적인 차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3) 해동(海東)의 등불 원효성사(元曉聖師)
해동의 등불이셨던 원효성사는 신라 땅 압량(押梁)의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어느날 밤 어머니의 꿈에 유성이 뱃속으로 들어와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태몽이었다.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온통 뒤덮여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때가 진평왕 39년(617년)으로 그의 조부는 잉피공(仍皮公)이요, 아버지는 담날(談捺)이다. 성씨는 설(薛)이요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라고 했다. 일찍이 화랑에 몸담고 있었는데 29살 때 황룡사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계를 받았다. 그 뒤 영취산의 낭지(郎智), 흥륜사의 연기(緣起), 반용산의 보덕(報德) 등에게 배우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 33살 때(650년) 의상대사와 함께 입당구법의 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크게 깨우친 바 있어 게송 한 구를 읊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게송에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라고 하며, 「일체가 다 오직 마음으로 짓는다(一切唯心造)」라고 하였다. 이처럼 깨달은 원효성사는 신라 땅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교화를 폈는데 하루는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누가 도끼에 자루를 끼게 할 자는 없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을까 하노라」하였다.
이 노래를 들은 무열왕이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현자를 낳고자 하는도다. 나라에 대현(大賢)이 있으면 그 이(利)가 매우 크도다」하고 요석공주에게 마음을 두었다. 요석공주가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설총(薛聰)이다. 파계를 한 뒤 거리에 나가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르고 다니다가, 신문왕 6년(68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 들어가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70세였다.
스님은 한때 변산의 원효방에 들어가 지낸 적이 있는데 시자승 사포가 늘 차를 달여 올렸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보면 「다음날 부령현재(扶寧懸宰) 이군이 다른 손님 6~7명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발을 후들후들 떨면서 천천히 올라가니 뜰계단과 창문이 수풀 끝에 솟아나 있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와 범이 인연을 구하여 올라오려다가 오지 못한다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전에 의하면 사포성인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라 한다. 원효가 와서 사니 사포도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원효께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때에 물이 바위틈에서 문득 솟아났는데 물맛이 젖같이 매우 달아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이요 한 노승이 거처하는데 삽살개 눈썹과 다 헤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하다. 방 한 가운데를 막아 내,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영정을 모셨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 뿐 취사도구도 없고 시자도 없으니 다만 소래사(蘇萊寺)에 가서 하루에 한 재(齋)를 참예할 뿐이라 한다.」(원문생략)
이때 시자승 사포가 원효스님께 달여드린 차는 분말차로 점다(點茶)한 것이다. 수백년이 지난 뒤 이러한 원효스님의 다풍을 흠모한 한 노승이 시자도 없이 혼자서 부처님과 원효스님의 진용을 모시고 살고 있다. 방 안에는 병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상 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배고프면 소래사에 가서 한 끼만 얻어먹고, 갈증나면 차 마시고 잠이 오면 자는 것 뿐, 하는 일이란 쭈그리고 앉아서 조는 것이리라.
옛 사람 이규보가 노래하기를,
「산길 따라 높은 사다리를 지나고,
발을 포개어 좁은 길 걸었네.
위로는 백길 산꼭대기가 있는데,
효성(曉聖)이 일찍 암자를 지었도다.
신령스런 발자취 어딘지 아득하고,
영정은 종이 폭에 남았구나.
차샘은 찬 구슬처럼 고였는데,
한 웅큼 마셔보니 젖같은 단맛이라.
이 땅에 옛날에는 물이 없어서,
스님들이 머무르기 어려웠더니,
원효대사 한 번 와서 머문 뒤로는
맑은 물이 바위 구멍에서 솟아났다네.
우리 스님 높은 뜻 이어받아서,
누더기 걸치고 이곳에 와서 사네.
돌아보건데 8척쯤 되는 방에,
한 쌍의 신발이 있을 뿐이구나.
또한 시중드는 자도 없이,
홀로 앉아서 세월을 보내는구나.
원효가 이 세상에 다시 나오신다면,
감히 허리 굽혀 절하지 않을손가.」
(원문생략)
4) 학문(學門)의 종장(宗匠) 설총(薛聰)
홍유후(弘儒侯) 설총은 신라 땅 서라벌 궁궐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담날(談捺) 내마(奈麻)이며, 아버지는 원효성사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성은 설(薛)씨며, 자는 총지(聰智)이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십현(十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방언(方言)으로 중국과 외이(外夷)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고 이회(理會)하여 6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강경(講經)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전수해서 이두(吏讀)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같이 설총의 천성이 밝고 예민하여 생지(生知)에 가까웠고 이두로 구경(九經)을 읽게 만들어 후학을 가르쳤으므로 지금까지 학자들이 종(宗)으로 삼고 있다. 또 글짓기에 능통하였으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남쪽 지방에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고 하나 알 수가 없다.
하루는 신문왕(新文王:681~691년)이 설총을 돌아보며 이르는 말이 「오늘 비도 막 개고 바람기도 선선하오. 비록 좋은 찬과 애절한 가락은 있지만 고상한 이야기와 좋은 웃음거리로 우울한 가슴을 푸는 것만 같지 못하오. 그대는 반드시 특이한 이야기가 있을터이니 나를 위하여 들려주지 않겠소」하였다. 그래서 설총은 군왕으로서 지켜야할 계율을 꽃에 비유하여 화왕계(花王誡)를 들려드리게 되었다.
삼국사기 열전 제6(列傳第六) 설총편에 보면 「신이 듣건데 옛날 화왕(花王一모丹)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적에 향기로운 동산에 자리잡고 푸른 장막으로 둘러싸여 삼춘(三春)을 만나 곱게 피자 백화를 앞지르고 홀로 빼어나니 이에 원근을 막론하고 고운 족속들이 모두 달려나와 문안하되 오직 뒤질까 근심하지 않는 자 없었습니다. 그러하온데 갑자기 붉은 얼굴에 옥 같은 한 미인이 깨끗한 옷으로 아름답게 몸을 단장하고 아장아장 걸어 앞으로 나와 아뢰되 『첩은 눈처럼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대하고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맞아 스스로 만족하옵는데 이름은 장미(薔薇)이옵니다. 왕의 어지신 덕을 듣고 향기로운 장막 속에서 밤을 모시기로 하오니 왕은 저를 받아들이시렵니까』라고 하였으며, 또 한 장부가 베옷에 가죽띠에 백립 쓰고 지팡이 짚고 엉금엉금 걸어 구부리고 나와 아뢰되 『저는 도성밖의 한 길 가에 사옵는데 아래로 아득한 들경치에 다다르고 위로 우뚝한 산빛에 기대어 있사옵니다. 이름은 백두옹(白頭翁:할미꽃)입니다. 비록 좌우의 공급이 넉넉하여 육식으로 배를 채우지만 다주(茶酒)로 정신을 맑게 해야 하고 상자 속의 저장으로는 기운을 보충하는 좋은 약과 독을 제거하는 궂은 약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실과 삼이 있더라도 질경이도 버리지 말라는 말도 있사옵니다. 무릇 여러 군자는 물건의 절핍될 때를 생각하여 대비하지 않는 것이 없사오니 왕께서도 그렇게 하실 의향이 있사옵니까』라고 하였다.」(후략)
『臣聞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以翠幕, 當三春而發艶, 凌百花而獨出, 於是, 自邇及遐, 艶艶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 唯恐不及,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정服, 伶빙而來, 約而前 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 而沐春雨以去垢, 快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유, 王其容我乎, 又有一丈夫, 布衣韋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구루而來, 曰, 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峨之山色, 其名曰白頭翁, 과謂左右供給雖足, 膏梁以充腸, 茶酒以精神, 巾衍저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견毒, 故曰, 雖有絲麻, 無 菅괴, 凡百君子, 無不代궤,』
이와같이 설총은 왕을 모란꽃에, 간신과 여색을 장미꽃에, 충신을 할미꽃에 비유하여 다주론(茶酒論)을 전개하고 있다. 이 다주론에서 설총은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여색과 간신은 멀리해야 한다고 했다. 이같은 다주론은 당나라 왕부(王敷)의 다주론이나 명나라 등지모(鄧志謨)가 지은 다주쟁기(茶酒爭寄:1643년경)와는 내용이 다르다. 중국의 다주론은 차와 술이 다 같이 공덕이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또 일본의 난숙선사(蘭叔禪師)가 지은 주다론(酒茶論:1576년)도 중국의 다주론과 같은 논리이다.
5) 범패(梵唄)의 선구자 진감선사(眞鑑禪師)
진감선사(眞鑑禪師)는 전라북도 금마(金馬) 땅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최씨(崔氏)요 법휘는 혜조(慧照)이다. 그의 아버지는 창원(昌元)이며 어머니는 고씨(顧氏)부인이다. 일찍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 속에 한 스님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유리 항아리 하나를 주었다. 얼마 후에 임신하여 선사를 낳았는데 나면서부터 울지 않았다. 칠팔세가 되어 놀 때에는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서 향을 삼고 꽃을 꺾어서 공양을 올렸으며 서쪽을 향해 꿇어앉아 시간이 지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선(禪)의 뿌리가 실로 깊은 바이요, 배워서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십여 세로부터 이십 세에 이르기까지 부모봉양에 뜻이 간절하며 잠깐도 잊지 아니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농사 지을 땅도 저축도 없어 부모봉양을 오직 자기 손으로 해야만 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흙을 져다가 봉분을 하고서 말하기를 「길러준 부모 은혜는 힘으로 갚았으나 미묘한 도리는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랴. 내가 어찌 박과 오이가 덩굴에 달린 것처럼 젊은 나이에 한구석에 박혀 있으리오」하고 당나라로 건너갔다. 창주(滄州)의 신감대사(神鑑大師)를 찾아가 뵙고 절을 하니, 대사가 기뻐하며 「장난삼아 헤어진 지가 오래지 않은데 두 번 만나니 기쁘구나」하며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히고 심인(心印)과 계(戒)를 함께 주니, 무리들이 서로 말하기를 동방의 성인을 다시 보겠네 하였다.
선사의 얼굴빛이 검어서 모두가 흑두타(黑頭陀)라 불렀으며 현덕왕 2년(810년)에 숭산 소림사(少林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사방산천을 떠돌면서 수행을 하는데 뜻밖에 고향에서 온 도의선사(道義禪師)를 만났다. 함께 멀리 참례를 하다가 도의선사는 먼저 귀국하고 스님만 남아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독처지관(獨處止觀) 수삼 년을 하고서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니 왕이 수레를 타고 나와 친히 맞아주었다. 처음에는 상주 장백사(長柏寺)에 머물렀으나 이내 자리를 옮겨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화개곡의 옛 삼법화상(三法和尙)의 절터를 찾아 그곳에 절을 지으니 이가 지금의 쌍계사이다. 처음에는 옥천사(玉泉寺)라고 했는데 뒤어 문성왕이 진감선사라 추시(追諡)하고 절 이름을 쌍계사(雙磎寺)라고 하였다.
평소에 선사는 범패(梵唄)를 잘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금옥 같아서 곁들인 음조와 날아가는 소리가 상쾌하고 애완(哀婉)하여 능히 제천(諸天)으로 하여금 환희케 하고 먼 곳까지 흘러 전하였다. 배우는 자가 집 안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어산(魚山)의 묘한 곡조를 익히는 자가 다투어 손으로 코를 가리고 옥천의 남긴 음향을 본뜨려 하니 어찌 성문(聲聞)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리요. 이와같이 우리나라의 범패는 진감선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선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범패를 가르쳐 길이 전하도록 하였으니 우리나라 범패의 선구자인 셈이다.
선사는 평소에 차를 무척 애음했는데 특별한 법도나 의식을 갖추지 않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마시는 차생활을 하였다. 비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중국향(胡香)을 선사하니 기와에다 잿불을 담아 환(丸)을 짓지 않은 채로 태우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할 뿐이다 했으며, 다시 중국차(漢茗)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니 섶나무로 돌솥에 불 지피고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배(창자)를 적실 뿐이다 했으니 참(眞)됨을 지키고 속(俗)됨을 싫어함이 다 이와 같았다」(원문생략)
진감선사는 선물받은 중국차를 가루를 내지 않고 덩어리차 그대로 돌솥에 넣어 달여 마셨다. 당시는 당이나 신라나 마찬가지로 가루차를 마실 때였다. 돌솥에 물을 끓이고 그 끓는 물 속에 가루를 낸 차를 넣어 한 번 더 살짝 끓여서 표주박으로 떠내 찻잔에 나누어 따라서 마신다. 이처럼 차를 가루를 내서 끓는 물에 넣어 달여서 마시는 방법이 일반적인데, 선사는 덩이차를 가루를 내지 않고 끓는 물 속에 그냥 넣어 우려서 마신 것이다.
6)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開祖) 무염국사(無染國師)
무염국사(無染國師)는 신라 땅 서라벌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요, 법휘는 무염, 시호는 대낭혜화상(大郎慧和尙)이며 달마조사의 십세손이다. 신라왕실의 진골(眞骨)로서 무열왕의 8대손인데 아버지는 범청(範淸)이요, 어머니는 화씨(華氏)이다. 어려서부터 걷거나 앉을 때 반드시 합장이나 가부좌를 하고 놀 때에는 불상이나 탑을 만들었다. 9세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는데 한 번 보고 들으면 잊지 않고 기억하므로 신동이라고 했다. 12세에 출가할 뜻을 세워 부모의 허락을 받아 설악산 오색사(五色寺)에 들어가 예를 받았다.
법성선사(法性禪寺)는 중국에 유학한 스님인데 그 문하에서 수년동안 공부를 하고 부석사에 가 화엄경을 본 뒤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대흥성(大興城)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러 잡화에 대해서 말하는 이를 만나 「멀리 여러 물건을 취하려 하는 것이 네게 있는 부처를 알아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까」하는 말을 듣는 순간 크게 깨달았다. 그 뒤 불광사에 가서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었다. 여만은 말하기를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났으나 이같은 신라 사람은 드물었다. 훗날 중국이 선풍을 잃어버리게 되면 장차 동이에 가서 묻게 될 것이다」하였다.
보철(寶徹)화상의 법을 잇고 왕명을 받들어 귀국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경사스럽게 여겼다. 왕자 흔(昕)의 요청으로 오합사(烏合寺)에 가서 머물게 되었는데, 문성왕은 수교를 내려 절 이름을 성주사(聖住寺)라고 하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로 각별히 대우하였다. 헌안왕 역시 제자의 예를 갖추고 폐백으로 차(茶)와 향(香 )을 보냈다. 매달 빠뜨리지 않고 사신 편에 차를 보낸 헌안왕은 왕자 흔과 형제지간으로 무염국사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당시에 차와 향은 스님들에게 가장 큰 예물이었다.
7)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開祖) 보조선사(普照禪師)
보조선사(寶照禪寺)는 충남 공주(熊津)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요, 법휘는 체징(體澄)이며, 탑호는 창성(彰聖)이요 보조(普照)는 시호이다. 부모의 이름은 알 수가 없고 어머니 꿈에 한 귀인이 일륜(日輪)을 타고 하늘을 나는데 일륜으로부터 내리는 서광이 어머니 배를 관통하는 꿈을 꾸고 선사를 낳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빨이 모두 나 있고 머리카락은 금빛이 찬란하여 보는 이가 모두 놀랐다. 어려서부터 출가할 뜻이 있더니 8세에 인연을 끊고 입산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설악선 권법사(勸法師)의 제자가 되어 공부를 하더니, 설산(雪山)의 억성사(億聖寺)로 가서 염거선사(廉居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염거선사는 도의선사(道義禪師)의 제자로서 지장법사(智藏法師)의 법을 이은 분이다. 도의선사는 선덕왕 1년(780년)에 당나라로 가서 지장대사의 제자가 되었다가 심법(心法)을 전수받아 귀국하여 선문(禪門)을 폈으나 듣는 이가 없어 염거선사에게 심인(心印)을 전해주었다. 보조선사는 염거선사로부터 심인을 전수받고, 회강왕 2년(837년)에 동문수학하던 정육(貞育), 허회(虛會) 등과 함께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갔다. 35주를 두루 돌아다니며 선지식(禪知識)을 찾아 배우고 체득하였다. 문성왕 2년(840년)에 사신 일행을 따라 귀국하였다. 처음에 무주(无州) 황학산 난야사(蘭若寺)에 와서 교화를 하였다. 헌안왕이 듣고 장사현 부수 김언경(金彦卿)을 보내 차(茶)와 약을 예물로 드리고 서울로 모셔다가 선문(禪門)을 열도록 청하였다. 또 겨울에는 도승정(都僧正) 연훈법사(連訓法師)를 보내어 청해다가 선법을 열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헌안왕은 보조선사에게 차와 약을 예물로 드리고 모셔다가 설법을 들은 것이다. 당시에 차와 약은 최고의 예물로서 극진히 예우할 때 으례 드리는 예물이다.
8) 중원문화(中原文化)의 기수 원랑선사(圓朗禪師)
원랑선사(圓朗禪師)는 신라 땅 통화부(通化府) 중정리(仲停里)에서 태어났다. 선사의 휘는 대통(大通)이요 자는 태융(太融)이다. 속성은 박씨(朴氏)이고 시호는 원랑선사이며 탑호는 대보선광(大寶禪光)이다. 선사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 수절을 하고 경(經)을 읽으며 태교를 했다. 그래서 태어날 때 강과 산에 기이한 기운이 어리어 감쌌다. 자라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스승을 찾아 배우는데 한 번 들으면 반드시 기억했고 경사를 두루 섭렵하여 모두 증명했다.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와 모든 경전과 많은 논설을 다 규명하여 알았고 내외경전에 두루 통하니 막힘이 없고 시비를 여의게 되었다.
비로소 29세(845년) 때에 성린대덕(聖鱗大德)에게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다. 구족계를 받고는 단엄사(丹嚴寺)에 머물렀는데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마음을 닦아 보리심을 구하며 인욕하고 정진하고 보시하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때 자인법사(慈仁法師)가 당에서 돌아오자 찾아가 뵙고 배웠다. 그 뒤 40세(856년) 때 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제방 사찰을 돌아보고 앙산(仰山)에 이르러 머물렀다. 증허대사(澄虛大師)가 선사의 총명함과 인자함을 살펴보고 머리숙여 이마를 마주대고 참된 종지(宗旨)를 가르치는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름 없이 인정을 뛰어넘어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가르쳤다. 훗날 멀리 떠날 것을 짐작하고 말없이 황매인(黃梅印)을 주었다. 그것은 참으로 보배로운 것이다.
명산과 명찰(名刹)을 두루 돌아보고 경문왕 6년(866년:50세) 여름에 고국으로 돌아오니 광종대사가 각별한 예우로 맞이하여 월광사(月光寺)에 머물게 하였다. 월광사는 원효대사가 성도(成道)한 곳으로 신성한 곳이다. 이곳에 선사가 주석하시니 그 명성이 순식간에 천하에 퍼지고 자비를 구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아름다운 인연과 향기로운 얘기가 멀리 궁궐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경문왕(景文王:861~874년)이 선사의 덕화를 듣고 관영법사(觀榮法師)를 보내 예물을 드리고 조서를 보내 위로했다. 그 뒤 임금의 사신이 끊이지 않고 왕래를 했으며 선사가 머무는 다실(茶室)을 윤택하게 돌보아 주었다. 이처럼 경문왕은 원랑선사에게 각별한 정의로 각종 예물을 보내고 향화의 인연이 끊이지 않도록 하였으며 그가 머무는 가람과 다실 등을 보수하여 거처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헌강왕 9년(883년) 여름에 뱀들이 구멍에서 나와 산과 계곡을 꽉 메우고 슬픈 소리를 내며 머리를 들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선사가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이르기를 「생(生)이란 상주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미 다함이 없노라. 너희들은 마땅히 게으름 피우지 말고 힘쓰고 노력하여 수행하라」하고는 홀연히 입적하시니 수명은 68이요 법랍은 39이다.
9)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제2조 수철화상(秀澈和尙)
수철화상(秀澈和尙)은 신라 땅 서라벌에서 현덕왕 9년(817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하지(何知)이며 속성은 김씨(金氏)요 할아버지는 소판(蘇判)을 지냈으며 그의 집안은 진골(眞骨)이다. 시호는 수철(秀澈)이며 탑호는 능가보월(楞伽寶月)이라고 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학문에 뜻을 두어 불법을 배웠고, 이내 출가할 뜻을 세워 연허율사(緣虛律師)를 찾아가 의지하여 계를 받았다. 이어 천종대덕(天宗大德)으로부터 경(經)을 배웠으며 동경(東京)의 복천사(福泉寺)에 가서 윤법대사(潤法大師)를 의지해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명산과 승지(勝地)를 찾아다니며 선원에서 선(禪)을 닦았으며 화엄경을 연구하고 지리산 지실사(知實寺)에 들어가서 제장(諸章)을 열람했으며 힘을 기울여 중생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였다. 51세(867년) 때에는 경문왕이 팔각당(八角堂)으로 청해 모시고 선(禪)과 교(敎)의 같고 다른 점을 물었다. 화상의 대답이 시원하고 대낮과 같이 밝고 선계(禪階)가 분명하니 왕이 마음으로 환희심을 내었다. 헌강왕도 선사를 모셔다 심원산사(深源山寺)에 계시도록 하고 널리 중생들의 미흡함을 깨우쳐 주도록 하였다. 하루는 제자 수인(粹忍)과 의광(義光)을 보내 남악의 북쪽 좋은 땅을 찾았다. 근세에 심학(心學)을 전할만한 곳이라 하고 옮겨와 힘을 경주해 복과 지혜의 밭을 일구었다.
진성여왕 7년(893년) 5월 4일에 제자들을 불러모아 이르기를 「장차 내가 떠나려 한다. 너희들은 게으름 없이 힘써 노력하라」하시고 열반에 드니, 문득 바람이 미친듯 불고 폭우가 내리치며 구름이 몰려 화상의 머리 위에 모였다 흩어졌다 하고 달이 서에서 동쪽으로 운행을 했다. 나이는 77이요, 법랍은 58이며 제자 음광(飮光) 등이 임종을 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양왕(讓王)이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며 모든 문중에 이를 전하고, 관청에서는 왕이 수레에 식량과 물자를 가득 실어 나는듯이 가져다 드리고 위로하였다.
그 뒤 8차례에 걸쳐 제사(祭)를 모시고 예(禮)를 갖추기를 10순(十旬)이나 하였는데 그때마다 차(茶)와 향(香) 등 모든 제물을 고루 갖춰 올렸다. 차와 향 등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극진히 모셨으니 이미 이때에는 차가 제사의 중요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상이 평소에 차를 즐겨 애음했음을 알 수도 있다. 그리고 왕궁에서 보내는 예물 중에는 으례 많은 양의 차와 향이 포함되어 있었다.
10)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 자장율사(慈藏律師)
자장율사(慈藏律師)는 신라 땅 서라벌에서 진평왕(眞平王:570~631년) 때에 태어났다. 율사의 어릴 때 이름은 선종(善宗)이며 법호는 자장(慈藏)이요,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그의 아버지 휘는 무림(茂林)이며 소판(蘇判)을 지낸 진골(眞骨)출신이다. 청관요직(淸官要職)을 두루 지냈는데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불교에 마음을 두어 관음보살(觀音菩薩)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빌었다.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홀연히 그 어머니의 꿈에 별 하나가 떨어져서 품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어 아기 하나를 낳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날이라서 이름을 선종랑(善宗朗)이라 했다.
그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필이 날로 풍부하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속세의 번거로움을 싫어해서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전원(田園)을 내어 원녕사(元寧寺)를 삼았다. 혼자서 그윽하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백골관(白骨觀)을 닦는데 조금 피곤한 일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서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그 속에 발가벗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어두운 정신을 없앴다.
때마침 조정에 재상 자리가 비어 있어서 율사가 문벌(門閥) 때문에 물망에 올라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으니 왕이 칙명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율사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 지언정, 1백년 동안 계율을 어기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의 출가를 허락했다.
그 뒤 선덕여왕 5년(636년)에 제자 숭실(崇實) 등 십여 명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가 청량산의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하여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舍利) 등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금강계단(金剛戒段)을 쌓아 이것을 모시었다. 이 통도사에는 예부터 차나무가 많은데 이 차나무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설이다.
「조선의 다와 선(朝鮮の茶ヒ禪)」에 보면 「경남 통도사는 신라의 명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 지금도 있다. 경내의 차나무는 율사가 입당(入唐)하여 가져온 다종(茶種)을 재배한 것이라고 한다.」
이 기록은 고증이 안되는 내용이지만 통도사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차나무가 있다. 그리고 고려 때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촌(茶村)이 있는 사찰이다.
11) 오대산(五臺山)의 성자(聖者) 보천(寶川) 효명(孝明)태자
보천(寶川, 寶叱徒) 효명(孝明) 두 태자는 신문왕(神文王:681~691년)의 아들로서 속성은 김씨(金氏)요, 신라 왕실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출가할 뜻이 있어 두 형제가 서로 상의하더니 남몰래 약속하고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두 태자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서라벌로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 속에 이르러 중대(中臺) 남쪽 밑에 있는 진여원(眞如院:上院寺) 터 아래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터에 풀로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다.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백보쯤 가니,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효명태자가 암자를 지었다.
어느날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예배하러 올라가니, 동대(東臺)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대(南臺) 기린산(麒麟山)에는 8대 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있고, 서대(西臺)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대(北臺)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나 있고, 중대(中臺) 풍로산(風盧山:地盧山)에는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와같은 5만보살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배를 했다. 또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사인 진여원에 이르러 36종(三六種)의 모양으로 변신하여 나타났다. 두 형제는 항상 골짜기의 물(우통수:于洞水 洞中水)을 길어다가 차(茶)를 달여 1만 진신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로 돌아가 도(道)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淨神王:神文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이를 폐하고, 장군 네 사람을 보내서 산에 가서 이들 두 태자를 맞아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불렀다.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부터 신라에까지 뻗치어 7일 동안 밤낮으로 빛을 뿜었다. 나라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태자는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려 함으로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아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 분이 효소왕(孝昭王:692~701년)으로 16세(692년)에 즉위하여 26세(701년)로 돌아가실 때까지 1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보천(寶川)은 항상 그 신령스런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마셨으므로 만년에는 육신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의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을 외면서 밤낮으로 도를 닦았다. 하루는 장천굴의 신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 굴의 신이 된 지가 이미 2천년이나 되었건만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진리를 들었습니다」 하고,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청했다. 계를 받고 나자 그 이튿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졌다. 보천은 놀라 이상히 여기고 그곳에 20여일 동안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또 50년 동안 참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忉利川)의 신이 삼시로 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茶)를 달여 바치고, 40명의 성인(聖人)은 10자 높이의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면서 방을 세 바퀴씩 돌아다니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도를 했다.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別)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열반에 들 때 뒷날에 이 산중에서 해야 할 국가를 이롭게 할 일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이처럼 보천 효명대사는 오대산 우통수(于洞水)의 물을 길어 차(茶)를 달여 문수보살께 공양을 올렸다. 훗날 효명은 돌아와 왕위에 오르고, 보천은 그대로 남아 수도를 했다. 보천이 도를 닦자 정거천의 하늘나라 사람들이 차를 달여 보천에게 공양을 했다. 이 오대산 우통수는 한강의 발원지로서 우중수(牛重水)를 말하는데, 찻물로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다.
12) 향가(鄕歌)의 명인(名人) 월명사(月明師)
월명사(月明師)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고 행적 또한 분명하지 않다. 다만 경덕왕(景德王) 때 화랑(花郞) 출신의 승려였다는 사실 밖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고승(高僧)이었으며, 피리를 잘 불고, 향가(鄕歌)에 능했다. 또한 차(茶)를 좋아하는 다승(茶僧)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경덕왕 19년(760년) 4월 초하루에 해가 나란히 둘이 나타나서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인연이 있는 스님을 청해서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제단(祭壇)을 정결히 모으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거동하여 인연이 있는 스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가 남쪽 밭고랑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제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뢰기를 「신승은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우 향가만 알 뿐이고 범성(梵聲:梵唄)은 서투릅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미 인연이 있는 스님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소」했다. 이에 월명사가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다. 그 가사를 읊조리고 재를 모시니,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기시고, 차 끓이는 다구 일습(品茶一襲)과 108수정염주를 하사하였다.
이때 갑자기 동자 하나가 나타났는데 모양이 곱고 깨끗했다. 공손히 차(茶)와 염주를 받들고 대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사는 이를 궁궐의 시자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從者)로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알고보니 모두 틀린 추측이었다. 왕은 몹시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따라가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속으로 숨고 차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 미륵불상 앞에 있었다. 월명사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경덕왕은 더욱 공경하여 다시 비단 1백 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시했다.
월명사는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제를 올렸는데,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전(紙錢)을 불어서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하였다. 이때 지은 제망매가(齊亡妹歌)는 이러하다.
「나고 죽는 길이 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 하고 말도 못다하고 가는구나.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과 같이,
한 가지에 태어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극락세계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道) 닦아서 기다리련다.」
월명사는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로서,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머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앞 큰 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월명사도 이 일로 인하여 세상에 이름이 드날렸다.
월명사가 경덕왕으로부터 받은 다구 일습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차와 차 끓이는 도구 일습을 예물로 받았다는 사실 밖에는 알 길이 없다.
13) 신라 화랑(花郞)의 스승 원광법사(圓光法師)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년)에 태어나 진평왕(眞平王) 52년(630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입적했다. 법사의 행장은 자세히 알 길이 없고,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에 의하면 속성은 박씨(朴氏)요 법호는 원광(圓光)이며, 진한(辰韓) 사람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도량(度量)이 넓고 크며 글을 즐겨 읽어 노장(老莊)과 공맹(孔孟)을 두루 섭렵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연구하여 문명(文名)이 삼한에 떨쳤다. 그러나 부족함을 스스로 느끼고 25세(556년) 때에 홀홀단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南京)에 이르러 학문에 몰두하였다. 얼마 후에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장엄민공(莊嚴旻公)의 제자로부터 불법(佛法)을 듣고는 세상 학문을 썩은 지푸라기와 같이 여기고 드디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처음에 진(陳)나라에서 삭발을 하고 계(戒)를 받고는 두루 강석(講席)을 참례하여 배우고 익히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경률론(經律論)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깊이 연구하여 통달하였고, 특히 성실론(誠實論)과 열반경(涅槃經)에 밝았다. 언변이 뛰어나고 투철했으며 말과 뜻이 분명하여 듣는 자가 모두 환희심을 내고 기뻐하며 진심으로 귀의했다. 이와같이 교화함이 날이 갈수록 지극 하므로 그 명성이 산과 바다를 건너 멀리까지 들리게 되었다. 그래 원행을 무릅쓰고 법음을 듣고자 찾아오는 자가 구름처럼 많았다. 신라 진평왕이 법사의 명성을 듣고, 수문제에게 간곡히 아뢰어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니, 수문제는 칙명을 내려 후하게 대접하고 귀국토록 하였다. 법사가 여러 해만에 돌아오니 남녀노소가 기뻐하며 맞이하였다. 진평왕이 법사를 한 번 만나보고는 공경하여 스승으로 삼고 성인처럼 우러렀다.
법사는 성품이 허한(虛閑)하고 다정하며 자상하여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이 없었다. 중국과 왕래하는 글이 법사의 머리에서 나왔고 화랑들을 위해 세속5계(世俗五戒)를 설해 수지하도록 하였다. 법사의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갔으며, 진평왕이 법사의 의복과 약과 차와 모든 음식을 손수 마련하여 주었으며 좌우의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이와같이 진평왕의 각별한 예우를 한 몸에 받던 법사는 차의 명산지인 호구산(虎丘山)에서 여러 해 동안 참선수행을 하였으며, 차생활도 익혔다. 지금도 이 호구산에서는 좋은 차가 많이 나오고 있다. 법사가 하루는 간절한 유훈을 남기고 입적하시니 세수는 99세요, 법랍은 60여 년이었다. 입적할 때 절 동북쪽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찼다.
14) 화랑(花郞)들의 꽃, 사선(四仙)
사선(四仙)이란 네 사람의 국선(國仙)을 말하는데, 즉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을 말한다. 이들은 고조선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가진 선인들로서 신라 화랑의 꽃이다. 사선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고, 조선 선조 때 사람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에 보면, 「영랑은 향미산(向彌山) 사람으로 나이 90이 되어도 안색이 어린아이 같았으며 노우관(鷺羽冠)을 쓰고 철죽장(鐵竹杖)을 짚고 산수간에 소요하며 마침내 문박선인(文朴仙人)의 업을 전하였다」고 하였으며,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理蹟)》에는, 신라 때 사선은 즉 술랑, 영랑, 남랑, 안상인데 모두 영남 사람이라고도 하고, 혹은 영동 사람이라고도 한다.
고성 해변가에서 사흘을 같이 놀고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그 지명을 삼일포(三日浦)라 한다. 또 남쪽에 작은 봉우리 셋이 있는데, 봉우리 위에 돌굴(石龕)이 있고 봉우리 북쪽 벼랑에는 붉은 글씨로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란 여섯 글자가 쓰여 있다. 여기 남석행이란 남랑(南郞)을 말한 것이다. 작은 섬에 예전에는 정자가 없더니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정자를 세우니 즉 사선정(四仙亭)이다. 또 단혈(丹穴)이 군 남쪽 십리 되는 곳에 있고, 통천(通川)에는 사선봉(四仙峰)이 있으니 모두 사선이 놀던 곳이다. 간성(杆城)에 선유담(仙遊潭)과 영랑호(永郞湖)가 있고 금강산에 영랑봉이 있는데 영랑 등 사선들이 그 땅에서 놀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또 장연(長淵)에 아랑포(阿郞浦)가 있고 강릉에 한송정(寒松亭)이 있고 정자 밑에 다천(茶泉)과 돌솥(石釜), 돌절구(石臼)가 있는데 다 사선이 놀던 곳이다. 또 삼재도회속집(三才圖繪續集)에는 총석정(叢石亭)은 강원도 통천군에 있는데, 인접한 바닷가에 정자가 있다. 이 정자를 총석정 또는 사선정(四仙亭)이라고 부르는데, 전하는 말에 신라의 사선이 이곳에서 놀았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같이 사선의 행적은 상세히 알길이 없고, 출신지 또한 영남, 영동으로 분명치 않으며, 혹설에는 신라 이전의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이 선유하며 차를 달여 마시던 유물과 유적지가 지금도 동해 바닷가에 남아 있다.
15) 해상왕국(海上王國)의 제왕(帝王) 장보고(張保皐)
장보고(張保皐)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2년(801년)에 완도 장좌리(長佐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계(父系)는 완도지방의 오랜 호족으로 일찍부터 대(對) 중국무역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찍 중국에 들어가 활약을 하게 되었는데, 신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무관이 되었다. 《당서(唐書)》「신라(新羅)조」에 보면, 태화 5년(831년)에 그 나라에서 공부하던 학생으로서 연한이 찬 사람 1백 5명을 모두 돌려보냈다. 이때 그 나라에 장보고와 정년(鄭年)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싸움에 능했다. 특히 창을 잘 쓰고 바닷속으로 5십리를 가도 목이 메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용맹스럽고 씩씩한 것이 장보고가 제일이었다. 그래서 정년은 보고를 형이라 불렀는데 보고는 나이가 위이고 정년은 또 재주가 있어 서로 비등했다.
이들이 모두 중국에 와서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더니, 그 뒤에 장보고가 신라로 들어가 흥덕왕에게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다녀봐도 우리 신라를 모두 종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원컨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치고 적들로 하여금 사람을 서쪽으로 잡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했다. 청해란 아주 요지였다. 이에 왕은 장보고에게 군사 만명을 주어서 지키게 하니 이 까닭에 태화년간(太和:827~835년) 이후로는 바다 위에서 신라 사람을 잡아가는 자가 없었다. 보고가 이미 신라에 귀하게된 뒤, 정년은 굶주림과 추위가 말이 아니었다. 어느날 수주(戍主) 풍원규(馮元規)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쪽으로 가서 장보고를 찾아 밥을 얻어 먹을까 하오」했다. 원규는 말하기를 「만일 보고가 돌봐주지 않는다면 어찌 하려는가. 왜 하필 그의 손에 죽을 일을 취하는가」했다. 정년은 다시 말하기를 「굶주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남의 칼에 맞아죽는 것이 좋지 않겠소. 더구나 고향에 가서 죽으면 얼마나 좋겠소」하고 드디어 장보고를 찾아갔다. 정년이 장보고를 찾자, 보고는 그를 맞아 술을 마시면서 몹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대신이 회강왕을 죽여서 나라가 어지러워 주인이 없다고 한다.
이에 보고는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자네가 아니면 이 환란을 평정할 사람이 없네」했다. 이리하여 정년은 서라벌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킨 자를 베고 새왕을 세웠다. 이에 신무왕은 장보고를 불러 감의군사(感義軍使)를 삼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진을 지키도록 했다. 이로부터 중국에 조공이 다시 오지 않았다. 또 일본의 구법승 원인(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면, 장보고가 중국의 산동반도에 신라방(新羅坊)을 설치하고 자치권을 얻어 신라인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곳에 법화원(法華院)을 세우고 많은 신라승들이 강석(講席)을 열고 재(齋)를 베풀며 교화를 폈다. 여기에서 신라인들은 자연스럽게 차생활을 하였으며, 장보고의 해상왕국이 청해진에서 중국의 산동반도에까지 그 영향력을 크게 미쳤다.
16) 제30대 문무왕(文武王)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릉에 차(茶)로써 제사를 지내게 한 문무왕(661~680년)은 태종 무열왕(武烈王)의 장자로서 휘는 법민(法敏)이요, 시호는 문무(文武)이다. 어머니 김씨는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蘇判)을 지낸 서현(舒玄)의 막내딸이자 김유신의 누이동생이다. 언니가 꿈에 서형산(西兄山)에 올라 오줌을 누니 그 오줌이 서울(경주) 안에 가득 찼었다. 언니가 꿈을 깨고 나서 동생 문희(文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문희가 「내가 언니의 그 꿈을 사고 싶다」하고 꿈값으로 비단치마를 주었다.
며칠 후 유신은 태종과 공을 차다가 태종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 집이 근처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하고 함께 집으로 가서 술상을 베풀고 조용히 언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 꿰메게 하니 보희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문희가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다는데, 수수한 단장과 날씬한 맵씨가 곱고 빛이 났다. 태종이 보고 마음에 두어 청혼을 하여 아내로 삼았다. 이가 낳은 아들이 문무왕이다. 부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문무왕은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수로왕릉에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이어서 지내게 했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가락국 시조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奴宗), 그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率支公), 그의 아들은 서운잡간(庶云匝干:舒玄)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있어서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묘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 제사를 지내게 하여라」하니, 수로왕의 17대손 경세급간이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감주를 마련하고 떡과 밥, 차(茶)와 과실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17)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설총(薛聰)으로부터 화왕계(花王戒)의 다주론(茶酒論)을 듣고 왕자의 훈계로 삼도록 한 신문왕(681~691년)은 문무왕의 장자로서 휘는 정명(政明)이요, 시호는 신문(神文)이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인데,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다. 문무왕 5년(665년)에 태자로 책봉 되었다가 부왕이 돌아가시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김씨요, 소판 흠돌(欽突)의 딸인데, 그의 아비가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붙들려 사형을 당하자 궁중에서 쫓겨났다. 신사년(辛巳:681년)에 즉위하여 신묘년(辛卯:691년)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치세는 12년이요,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 지내고 신문(神文)이라 시호하였다.
어느 해 여름(5월) 높고 시원한 방에 앉아 설총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오늘 비도 막 개고 바람도 신선하오, 비록 좋은 찬과 애절한 가락은 있지만 고상한 이야기와 좋은 웃음거리로 우울한 가슴을 푸는 것만 같지 못하오. 그대는 반드시 특이한 소문이 있을 터이니 나를 위하여 진술해 보지 않겠소」하니 설총이 명을 받아서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화왕계(花王戒)이다. 이 화왕계에서 왕(王)을 모란꽃에, 간신(奸臣)을 장미꽃에, 충신(忠臣)을 할미꽃에 비유하여 「비록 좌우의 공급이 넉넉하여 육식으로 배를 채우지만 차(茶)와 술(酒)로써 정신을 맑게 해야만 합니다」라고 여쭈었다. 신문왕은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왕자의 훈계로 삼도록 명하였다.
18) 제35대 경덕왕(景德王)
귀정문(歸正門) 누상에 충담사(忠談師)를 청해다가 멋진 다회(茶會)를 베푼 경덕왕(742~764년)은 효성왕(孝成王)의 동복 동생으로 휘는 헌영(憲英)이요, 시호는 경덕이다. 아버지는 성덕왕(聖德王)이고 어머니는 소덕대후(炤德大后)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서 헌영으로 태자를 삼았다. 효성왕이 임오년(742년) 5월에 병을 얻어 돌아가시니 헌영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왕비는 이찬 순정(順貞)의 딸 삼모부인(三毛夫人)인데 후사(後嗣)가 없어 폐출되고 다시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왕비로 삼았다. 시호를 경목왕후(景穆王后)라고 하며 의충각간(依忠角干)의 딸이다. 경덕왕이 24년 왕위에 있다가 갑진년(764년) 6월에 돌아가니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경덕왕 19년(760년)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인연이 있는 스님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하였다. 그리하여 조원전(朝元殿)에 제단을 모으고 월명사(月明師)를 청해다가 도솔가(도率歌)를 지어 바쳤다. 그러자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차달이는 도구 일습과 수정염주를 하사하셨다.
또, 경덕왕 24년(764년) 삼월삼짓날 귀정문 누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 나가 위의가 있는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하였다. 이렇게 하여 충담사(忠談師)를 모셔다가 다회(茶會)를 열게 된 것이다. 이때 충담사는 안민가(安民歌)를 지어서 바쳤다.
19) 제42대 흥덕왕(興德王)
국교를 통해 처음으로 차씨(茶種)를 수입하여 지리산(地理山:智異山)에 심게 한 흥덕왕(826~835년)은 헌덕왕(憲德王)의 동복 아우로서 휘는 수종(秀宗)인데, 뒤에 경휘(景徽)로 고쳤으며, 시호는 흥덕(興德)이다. 아버지는 혜충대자(惠忠大子)이고 어머니는 성목대후(聖穆大后)이다. 형 헌덕왕과 짜고 조카 애장왕(哀莊王:800~809년)을 시해하고 형 헌덕이 왕위를 이었으며, 뒤어 헌덕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왕비는 애장왕의 누이동생이자 형 소성왕(昭聖王)의 딸 창화부인(昌花夫人)이고 시호는 정목왕후(定穆王后)라 했으며 흥덕왕과 합장하였다.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갔던 사신 대렴(大廉)이 돌아올 때, 당 문종(文宗)으로부터 차씨(茶種)를 얻어 가지고 오자 흥덕왕은 이것을 지리산 남록에 심게 하였다. 이 일이 정식국교를 통해서 차씨(茶種)를 처음으로 수입한 사례이며, 왕명으로 차밭(茶田)을 설치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차는 이전부터 있었으며 중국에 유학한 구법승들에 의해서 먼저 수입되었다.
20)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무염국사(無染國師)와 보조선사(寶照禪師)께 예물로 차(茶)를 보낸 헌안왕(857~860)은 신무왕(神武王:839년)의 이복동생으로 휘는 의정(誼靖)이요, 시호는 헌안(憲安)이다. 어머니 조명부인(照明夫人)은 선강왕(宣康王)의 딸이다. 문성왕(文聖王)의 고명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일찍이 문성왕이 병이 깊어지매 좌우 신하를 불러 유조(遺詔)를 내렸다. 「서불한(舒弗邯) 의정(誼靖)은 선황(先皇)의 손자요, 나의 숙부로 효우(孝友)하고 명민(明敏)하며, 관후(寬厚)하고 인자(仁慈)하며 오랫동안 재상으로 있어 국정을 협찬하였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만 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무육(撫育)할만하다. 이에 무거운 짐을 벗어 어질고 덕 있는 분에게 맡기노라」하였다.
헌안왕은 왕업을 이어 백성을 다스리면서 학덕이 있는 무염국사(無染國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차(茶)와 향(香)을 매번 예물로 보내고 성주사(聖住寺)를 중창으로하여 모시었다.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계시던 보조선사께도 같은 예우로 깊은 정의를 다했다.